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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심플한 게 좋고, 간편한 게 좋고, 차가운 게 좋고, 편리한 게 좋고... 늘 이런 마음으로 살아왔다. 어르신들께서 흙 밟으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도 그 깊이를 잘 몰랐다. 그저 취향의 차이겠거니 하고 생각한다거나, 다를 뿐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지금도 그런 마음은 마찬가지이긴 한데, 가끔씩 이렇게 흙냄새 풍기를 글귀를 보고 있을 때는 사뭇 달라지기도 한다. 아, 이런 느낌을 두고 하는 말씀들인가? 하는 순간의 흔들림이 생긴다. 금방 다시 또, 편리한 것들을 찾아서 눈을 돌리기도 하겠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대로 그 글귀가 품고 있는 흙냄새나, 길가에 핀 이름 모를 꽃이나, 먼지 나는 시골길을 걸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맹목
벼 베고 볏짚 거두어 간 자리 그루터기에 새순 솟는다 다시 이 새싹에서 이삭이 나와 벼알이 맺힐까 찬 저리 내릴 날도 머지않아서 잎이건 물이건 모두 시들어 주저앉는데
끝났다고 하여도 끝이 뻔하다 하여도 끝까지 가보겠다는 끝을 보겠다는 갈 때까지는 가보고 말겠다는 오기 창창
저것을 버티는 힘은, 지난날을 밑동부터 잘라 떠나보냈고 눈서리 칠 내일은 믿지 않으니 그 무엇의 과거도 미래도 아닌 다만 지금 여기 가던 길 그냥 갈 뿐인 쥐뿔같은 현실주의
상록의 소나무나 대나무의 고상하고 관념적인 교훈이 아니다 모름지기 한 번 참수당해본 것의 목에서 솟구치는 서늘한 삿대질, 맥없이 주저앉는 것들에 대한 욕설이다
맹목의 뿌리가 빚어낸 것이 벼가 되고 쌀이 되고 밥이 되었을 것인즉 독한 것일러라 쌀이여 밥이여 나 오늘 그냥 밥 먹고 내 길 간다 빈 논에 철새 한 무리도 볍씨 주워 먹고 간다 제 갈 길 간다
시인이 시를 통해서 표현하거나 전하고자 하는 은유가 있을 것이겠지만, 나는 내가 보는 것으로만 느낄 수 있으므로 이 시집을 읽던 그 순간만으로 말해보자면, 시의 구절에서 그대로 마음이 드러나는 것만 같았다. 어느 시골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자연 그대로를 보는 듯한 느낌을 전해주는 것, 보이는 그것들에 더해진 시인의 마음까지 가늠하게 만든다. 미처 다 드러내지 못한 언어가 조금은 눌려진 것도 같지만, 그러면 좀 어떠하리. 마음이 따라가면 그만인 것을...
우산이 좁아서
왼쪽에 내가 오른쪽엔 네가 나란히 걸으며 비바람 내리치는 길을 좁은 우산 하나로 버티며 갈 때 그 길 끝에서 내 왼쪽 어깨보다 덜 젖은 네 어깨를 보며 다행이라 여길 수 있다면 길이 좀 멀었어도 좋았을 걸 하면서 내 왼쪽 어깨가 더 젖었어도 좋았을 걸 하면서 젖지 않은 내 가슴 저 안쪽은 오히려 햇살이 짱짱하여 그래서 더 미안하기도 하면서
투박하다고 생각했었다. 첫 페이지를 열고 마지막 페이지를 닫을 때까지, 시가 이렇다면 뭔가 그럴싸하게 포장되는 것이 사라지는 느낌에 살짝 배신감도 생겼었다. 그런데 중간 중간에 튀어나오는 그 투박함과 솔직함이 이 시들은 시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했다. 일기일까? 아니면 조금은 더 편하고 가깝게 다가오려고 하는, 그저 ‘시’일 뿐일까. <우산이 좁아서> 같은 시를 만날 때면,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설레던 어떤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누군가의 어깨를 적시던 빗물이 애틋하게까지 보이게 하고 있었다. 지나간 한 순간의 모습들이 아름다워, 지금의 이 서늘한 순간도 살아가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애정 어린 기대감도 갖게 한다. 시가 그렇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금 갖게 한다. 그러면서 다시 또 서글픈 한 순간을 만나게 하기도 한다.
어머니, 여자
어머니 혼자 기저귀를 가신다 스스로 아기가 되어 쭈그리고 앉아 기저귀를 가신다
어머니는 여자였구나
아버지가 나를 만드실 나이의 아버지가 된 내게 각시처럼 부끄러워서 불도 켜지 않은 채 앙상한 엉덩이뼈를 감싼다
업거나 안고서 어디로 데려가겠다는 것 같다 그 어디에 가서는 진짜 아기가 될 것이다
죽음의 둘레가 만삭이다 산통이 좀 길다
소설의 한 부분을 보여주는 듯한 이런 시는 또 어떻게 감당하라고 이렇게 적어놓았나. 이 부분의 이야기가 실제인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 해석해도 독자의 마음이다. 하지만 구절 그대로 머릿속에 장면들이 떠오르면서 들리는 것을 또 어쩌랴. 결국은 다음 생에서나 만날 인연을 떠올리며 이별을 고하는 그 순간이 먼저 그려지는 것을...
이 시집 속의 많은 시들이 대부분은 어떤 것들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했다. 작은 사물들부터 어떤 장소, 인물까지. 그것을 시인의 눈으로 쫓은 흔적처럼 시로 새겨져 있었다. 시를 다 옮겨놓을 수는 없는 게 아쉽지만, 그러한 눈으로 같이 따라간 구절들은 가끔 시간을 멈추게도 했고, 때로는 더 깊게 지켜보게도 했다. 그렇게 다른 방식으로 온기를 넣어주고 있는 듯했다. 읽으면서는 그게 온기인줄도 몰랐는데 말이다.
사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어떤 목적을 갖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시간때우기용으로 외출할 때 가방 속에 들어가기 좋은 사이즈라는 것이기도 했다. 시의 구절들이 의미하는 바를 몰라서 답답해질 때보다는 그저 눈으로 담는 것 자체가 좋을 때도 있었기에 만나고는 했는데... 처음 만난 복효근의 시는 그 의미를 어떤 식으로 담든지 부담이 크지는 않았다. 다만 지금처럼 내 몸과 마음에 찬바람이 들어올 때 만나도 되는 감정들인지 조금은 염려스러웠다. 누군가의 일기처럼, 살아가는 냄새처럼, 인생처럼 들려오는 이 바람이 제법 세다. 다시 한겨울로 돌아간 것만 같은 오늘의 꽃샘추위처럼. 바람의 온도가 다른 것이 다행스러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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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성(聖)물고기처럼
복효근의 따뜻한 외면(실천문학사, 2013)은 “기어이 가야 할 그 어딘가가 있어/ 여울목을 차고 오르는 눈부신 행렬”(「성(聖) 물고기」)들로 가득 차 있다. 성(聖)이라는 어사가 붙은 이 존재들은 “잠시만 멈추어도 물살에 밀려 흘러가버릴 것이므로/ 아픈 지느러미를” 끊임없이 파닥여야 한다. 눈부신 행렬은 그러니까 눈부시게 아픈 존재들의 행렬과 다르지 않다. 물고기는 한사코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오르려 하고, 물살은 물살대로 물고기의 아픔에는 아랑곳없이 제가 해야 할 일을 어김없이 수행하고 있다. 물고기가 있는 곳이라면 이 세상 어디에서나 펼쳐지는 이 장쾌한 풍경에 매혹되어 시인은 “눈 뜨고 꾸는 꿈은 얼마나 환할 것인가”라고 소리친다. 물고기는 무엇을 꿈꾸고 있을까?
‘꿈’이라는 인간의 말로는 차마 표현할 수 없는 ‘물고기의 꿈’은 “온몸으로 물을 뚫고 길을 내지만/ 이내 제 꼬리지느러미로 손사래를 쳐 지워버리네”라는 시적 진술에 암묵적으로 담겨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물고기의 꿈은 물고기의 운명-자연일 뿐이다. 온몸으로 길을 다시 지워버리는 물고기의 운명에서 시인은 “천국의 지도”를 발견하고 있지만, 물고기는 제 몸에 박힌 운명대로 앞으로 나아가고만 있다. 요컨대 시인은 물고기의 자연에서 우리-인간들이 나아가야 할 어떤 희망을 발견하려고 한다. 물고기는 기어이 가야 할 그 어딘가를 향해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오른다. 당신은 어떤가? 기어이 가야 할 그 어딘가를 향해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오르고 있는가? 복효근의 이번 시집에는 사물에 대한 주체의 자세를 성찰하는 시가 많이 실려 있는바, 이러한 시의 경향은 무엇보다 물고기의 삶으로부터 인간의 미래를 바라보려는 시인의 관점을 분명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보면 좋겠다.
‘인간의 미래’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달리 말하면 그것은 자연의 미래가 되어야 한다. 생태주의라는 말로 그의 시를 단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문명의 파괴성에 초점을 맞추는 생태주의 시와는 달리 복효근의 시는 아직은 파괴되지 않은 자연의 실재에 시안(詩眼)을 집중하고 있다. “달팽이 두 마리가 붙어 있다”는 시적 상황을 통해 ‘덮어준다는 것’의 의미를 부각시키는 시 「덮어준다는 것」이 보여주는 대로, 시인은 그가 보고 있는 자연의 생태를 온몸으로 ‘느끼고’ 그것을 시의 세계로 불러내는 체험의 시학을 실천하고 있다. 돌려 말하면 그는 인간의 눈으로 자연을 보지 않는다. 인간의 눈으로 보는 자연은 이미 대상화된 자연에 불과하다. 영원성의 공간으로 자연을 재단하는 순간, 자연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그 숱한 생명들의 현실은 가차없이 관념화되기 마련이다.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는 말에 드러나거니와, 자연은 결코 인자하지 않다. 거친 물살을 거스르지 못하는 물고기들을 자연은 살려두지 않는다. 약자는 강자에 먹히는 것이 자연의 생리라는 사실을 굳이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바로 이 자연의 생리에서 모든 생명을 덮어주는 자연의 또 다른 역설-힘이 뻗어 나온다. 이를테면 「얼음연못」에서 시인은 얼음 위에 던져진 돌 하나에 주목하고 있다. 누군가가 던졌을 돌 하나가 얼어 있는 연못 위에 박혀 있다. “거미줄 같은 균열들이 돌을 붙들고 있다”에 나타나듯, 돌과 얼음연못은 현재 아슬아슬한 균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 균형이 깨지면 ‘얼음연못’ 또한 깨질 수밖에 없다. 시간이 흐르면 균형이야 자연스레 깨지겠지만, 문제는 그런 미래의 상황이 아니라 바로 지금의 상황에 있다. 곧 얼음연못과 돌이 균형을 맞추고 있는 상태가 그들에게는 벗어날 수 없는 현재에 해당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균형은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 것일까? 시인은 “상처가 상처끼리 연대한다”라고 쓰고 있다. 돌은 얼음연못을 뚫고 들어가려고 했을 것이고, 얼음연못은 그 돌의 틈입을 용납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그것이 돌의 자연이고 얼음연못의 자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로가 서로를 밀치는 상황이 어느덧 서로가 서로를 받치는, 그래서 서로의 몸속으로 스미는 상황으로 뒤바뀌어버린다. 이제 돌과 얼음연못은 둘이 아니라 하나의 사물이 되었다. “한 번 부러졌던 뼈처럼/ 돌은 얼음의 뼈가 되어 연못은 더 단단해질 것이다”라는 시인의 말마따나, 얼음연못에 박힌 돌은 얼음연못이 그만큼 단단한 연못이라는 것을 제 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그러니 “큰 돌이 넉넉하게 박힌 얼음이라면/ 맘 놓고 들어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시인의 마음에 자연스레 떠오를 만하다.
표제작인 「따뜻한 외면」에서 이러한 마음은 새와 나뭇잎, 나비가 전혀 구분되지 않는 상생의 세계로 시화된다. 비를 그으려 나뭇가지로 날아온 새는, 나뭇잎 뒤에 매달려 비를 긋는 나비를 작은 나뭇잎으로만 여긴다. 나비는 나뭇잎처럼 그냥 그곳에 있는 것이다. 당연히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비를 피하러 왔으니 비를 피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것은 나비도 마찬가지다. 자기를 나뭇잎으로 아는 새에게 굳이 자기를 내보일 필요는 없다. 생명들의 여여(如如)한 삶을 표현하는 이 시는 관념화되지 않은 자연의 서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 관조(觀照)라면 관조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시작(詩作) 태도가 상처와 상처의 연대라는 현실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점을 새삼 주목해야겠다. 상처가 있기 때문에 자연 속 생명들은 기꺼이 상대방을 향해 자신의 몸을 연다.
「맹목」을 참조한다면, 그런 태도는 “그 무엇의 과거도 미래도 아닌/ 다만 지금 여기/ 가던 길 그냥 갈 뿐인 쥐뿔같은 현실주의”의 태도와 다르지 않다. 새와 나비의 ‘따뜻한 외면’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비를 긋는다는 현실에 집중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을 ‘여여하게’ 살아간다. 그리고 그들의 그런 수동적 삶들이 모여 자연이라는 거대한 광장이 생성된다. 수동적 긍정, 혹은 수동적 능동이라는 역설적 삶을 자연 속 생명들은 실천하고 있거니와, 「멀리서 받아 적다」는 복효근의 이러한 시작 태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고 하겠다.
국화 마른 대궁을 베어버리려 낫을 들이대니 시들어 마른 꽃 무더기에서 뭉클한 향기 진동하다 서리 몇 됫박 뒤집어쓰고 잎부터 오그라들 적에 오상고절도 어쩔 수 없구나 했더니 아서라 시취(尸臭)까지 향기로 바꾸어내는 고집 그 꽃다운 오만 앞에서 낫을 거두다 안도하듯 다시 뱁새 몇 마리 그 그늘 아래 찾아들고 하, 고것들의 수작이라니 밤새 서설이 내려 꽃을 새로 피우다 애초 내가 간섭할 일이 아니었다 - 「멀리서 받아 적다」 전문
“애초 내가 간섭할 일이 아니었다”는 시인의 깨달음이 ‘멀리서 받아 적다’라는 제목과 어울려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시든 국화에서 피어나는 “뭉클한 향기”는 죽어서도(?) 여전히 생명의 끈을 놓지 않은 존재들의 질긴 생명력을 상징한다. 뱁새 몇 마리가 그 그늘을 찾아들고, 밤새 내린 서설이 새로운 꽃을 피우는 죽음의 이후 풍경은 죽음과 생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자연현상의 실제적 표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자연현상의 일부분에 불과하면서도 자연의 지배자처럼 행세하는 인간-주체의 오만을 에둘러 비판하는 효과를 내보이기도 한다. 이 시집의 3부에 실린 ‘어머니’를 소재로 한 시편들은 이러한 자연의 삶을 그대로 살다가 제 갈 길로 떠난 그 많은 어미들의 삶을 시화하고 있다.
「쭈글쭈글」에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어미들의 삶은 “물 한 방울 흙 한 줌 없이/ 제 피와 살을 온통 짜내어/ 싹을 키”우는 저 쭈글쭈글한 감자 몇 개의 삶과 정확히 일치한다. 쭈글쭈글한 몸으로 어미들은 새싹을 키우고, 새싹은 그 어미의 거친 물살-몸살을 거슬러 제가 살아야 할 운명의 길을 걸어간다. 죽은 어미들이 남긴 뭉클한 향기는 이렇게 수많은 새싹들의 몸을 빌려 이 땅의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간다. 외면하고 싶어도 외면하지 못하는 삶이 있다. 어미와 새싹의 관계가 그런 삶의 하나라면, 복효근은 이렇듯 외면할 수 없는 존재들의 삶을 묘사함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시인으로서의 길을 걸어가려고 한다. 늙은 어미의 지린내(「요실금」)와 같은 뭉클한 향기가 그 어느 때보다 그리운 시대에, 시인은 바로 그 그리움의 감각-풍경을 몸으로 체험하며 시를 쓰고 있는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