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는 권력과 폭력의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서, 깊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즉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의 문제이다. 본래 Power라는 단어는 '할 수 있다'를 의미하는 Posse라는 라틴어에서 나왔다고 한다. 저자는 권력을 경멸적 의미로만 사용하지 않고, 삶의 과정의 한 근본적 측면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다. 인생의 많은 부분은 권력과 무기력의 갈등이다. 여기에서 권력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거나 대인관계에서 자신이 의미 있다고 느끼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을 의미한다. 전자는 권력욕구라는 나쁜 함의로 생각되고, 후자인 무기력은 직면하기 고통스러워 양쪽 모두를 외면하는데, 이 때문에 우리는 권력과 무기력의 갈등에 더 노력을 많이 기울이고 있다. 지난 1세기 동안 개인의 능력과 잠재력에 대해 많은 담론을 하고, 개인이 심리적, 정치적으로 영향을 끼칠 자기 능력을 확신하지 못한 때는 없었다. 이는 권력 상실을 우려하는 불안감을 보상하려는 한 증상이다. 그러나 권력이 악용된다고 해서 권력이나 공격성을 약물 사용으로 없앤다면, 결국 한 사람의 인간성을 점진적으로 포기하는 것이다. 저자는 폭력이 무기력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중독도 폭력의 한 형태라고 주장하는데, 중독이란 중독자 자신의 의지를 어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주장이 어렵다면 권력 = 능동성 무기력 = 수동성 으로 바꾸어 읽으면 이해가 좀 쉬울 것 같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나는 이렇게 이해했다. ![]() 삶에서의 권력을 통해 자신에 대한 의미를 느끼게 되는데, 이런 의미감을 상실하게 되면 무기력을 느끼고, 이것을 어떻게든 다시 추구하고자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물론 항상 옳은 방법은 아니다) 이런 권력에는 다섯 단계가 있다. 1. 존재하기 위한 권력: 생존과 관련된다. 선도 악도 아니다. 선악보다 우선한다. 2. 자기긍정: 이런 자기긍정을 통해 의미에 대한 질문이 일어난다. 이제 인간에게 중요한 문제는 생존만이 아니라, 어느 정도 자존감을 지키며 생존하는 것이다. 3. 자기주장: 자기긍정을 저지당하면, 더 큰 노력을 기울여서 우리 입장에 힘을 싣는다. 반대하는 사람에게 내가 누구이고 무엇을 믿는지 말한다. 4. 공격성: 오랫동안 자기주장을 저지당하면 더 격한 반응이 나타난다. 5. 폭력: 공격성을 완화시키려는 모든 노력이 효과적이지 않을 때 결정적 폭발이 일어난다. 추론과 설득이 가능한 다른 단계들이 차단되었기 때문에 폭력은 주로 신체적이다. 자. 권력을 이해했으면 이제 순수를 이해할 차례다. 무기력은 사실 인정하기 고통스럽다. 그러나 무기력을 그럴듯한 미덕으로 만들어 직면하는 방법이 있다. 한 개인의 권력 일부를 일부러 박탈하면, 권력이 없는 것이 곧 미덕이다. 이를 저자는 순수(innocence)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순수는, 그냥 순수가 있고 거짓 순수가 있다. 순수: 말 그대로 악한 의도에서 발생하지 않은, 현실을 부인하지 않은 채 어린아이 같은 태도를 유지하는 것 거짓순수: 자기 능력을 인정하거나 직면하지 않아서 성장하지 않는 태도, 권력 자체를 부정하며 현실을 직시하려 하지 않음. 이런 거짓순수에서 폭력이 나오게 된다. 실제로 높은 수준의 권력을 은폐하려는 시도에서 권력 욕구를 부인하면, 권력은 있어도 무력감은 완화되지 않는 내적 모순이 생긴다. 진정한 권력에 따라야 할 책임감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 것에 대한 책임감을 발달시킬 수 없다. (★★★ 별표 셋. 명언이다) (통념상) 권력을 갖게 된 데 대해 항상 죄책감을 느껴야 하므로 권력을 직접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순수는 "적이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희망이라고 말한다. '해답'을 발견하기만 한다면 결핍, 죄책감, 불안이 모두 애도하지 못한 해묵은 감정이 될 그런 사회를 쉽게 창조할 수 있다고 애써 용감하게 믿으려 한다. 애도하지 않고 배우지 않는 것, 여기에 현대인의 역사에 대한 무관심과 역사 연구 거부가 있다. 순수에 대한 이런 설명에 매달리면 반드시 역사를 부인해야 하는데, 역사는 인간이 저지른 죄와 악에 대한 기록이자, 전쟁과 권력의 대립에 대한 기록이며, 인식을 더 확장하고 심화하려는 인간의 오랜 투쟁에 대한 다른 모든 표명이기 때문이다. <언어: 최초의 재앙> 그리고 폭력이 판을 치게 된 이유로 언어를 꼽는다. 폭력과 소통은 상호배타적이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적과 이야기할 수 없다. 우리가 적과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는 우리의 적이 아니다. 이 과정은 상호적이다. 소통이 되지 않아서 폭력이 급증하는 것이다. ![]() 소통되지 않는 예로 라오스 침공 뒤 미국 국방부 장관 레어드가 한 말을 들고 있다. 분명히 한 말은 모두 사실인데, 질문과 아무 상관 없는 답변을 함으로써 전체 의사소통 구조를 부인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행동이 극단적이고 지속적인 형태의 정신분열증이라고 말한다. 동시에, 오늘날 그런 행동은 단순히 정치라고 불린다고 일갈한다. 참... 날카로운 지적이다. 사실 타인에게 기분이나 감정을 막힘없이 직접 표현하고 싶지만 이는 쉽지 않다. 그래서 몸으로 직접 친밀감을 표현해서 친밀 관계 형성에 필요한 다른 사람을 알아가는 시간을 단축하기를 갈망한다. 그것이 불완전한 방법임을 알면서도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단계로 즉시 건너뛰기 위해 몸으로 말하고자 한다. (갑작스런 혼외 정사를 이런 식으로도 설명한다) 당연히 똑똑한 이 저자는 이런 소통의 어려움으로 언어 자체가 가진 한계도 지적하고 계신다. 언어는 상징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상징은 항상 그 상징이 말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징은 본래 암시적이다. 게다가 말은 그것이 상징적인 한, 그 말이 명확하게 나타낼 수 있는 것 이상을 가리킨다. 중요한 것은 말이 남긴 여운이며, 호수에 던진 돌과 같은 의미의 잔물결이고, 말의 지시적 측면보다 함축적 측면이다. 그것은 시인이 사용하는 것과 비슷한 형태(Gestalt)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스트레스 상황에서 무엇인가를 보고할 때 더욱 시적이 되는 이유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배워온 것과 다르다. 우리는 한 단어를 더 구체적이고 한정적으로 사용할수록 더 정확하게 말하는 것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더 구체적인 단어를 사용하면 더 정확하게 말할 수는 있어도, 더 진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멘, 하고 싶은 말이다. 그 정확과 진실의 사이에서 나는 늘 표류하기 때문이다. 자. 이제 다시 권력 얘기로 돌아가서. <권력의 의미> 권력은 본래 사회학 용어였는데, 심리학에서 말하는 권력을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고, 영향력을 끼치며, 변화시키는 능력을 의미한다. 즉, 영향력은 권력이고, 아무리 지적인 권력이라도 여전히 권력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권력을 완벽하게 무력, 강요, 강압에서 떼어놓는 것은 이상적이고, 모든 종류의 권력을 무력, 강요, 강압과 동일시하는 것은 냉소적이다. 쉬운 예로 사랑도 권력과 관련이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사랑하려면 우선 자기 내면에 힘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그렇다. 또한 자존감을 발달시키기 전까지는 애정 관계에 조금도 들어갈 수 없다. (착취 구조로 전락한다) 완전히 자신을 빼앗기거나 하잘것 없는 사람으로서 흡수되어버리지 않으려면 무엇인가 줄 것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사랑과 권력을 병치시키는 오류는 사랑을 감정으로만 보고, 권력을 강제적 힘으로만 보는 데서 기인한다. 우리는 사랑과 권력을 모두 존재론적인 것으로, 즉 존재의 상태나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주장한다. 권력과 사랑이 하나가 되지 않는 한 인종적 정의와 세계 평화, 빈민 구제 활동 같은 사회적 행동은 불가능하다. 이제는 각 문장만 떼어놓고 봐도 이해할 만하다. <존재하기 위한 권력> @ 자녀가 전쟁광이 되지 않을까 불안해하는 부모는 전쟁놀이나 그 비슷한 놀이를 금지해서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과 정반대되는 행동을 장려한다. 그 부모는 자신이 피하기를 원하는 바로 그 유형의 성격을 창조할 가능성이 더 크다. (위니캇) 아이가 자신의 성장하는 개성을 보호하고 주장하려면 모든 공격적 잠재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많은 사람이 저지르는 오류는 자기긍정을 무시한 채 곧바로 무기력 상태에서 공격성과 폭력으로 건너뛰는 것이다. 항상 무기력했던 사람이 자신에게 힘이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닫게 될 때 느끼는 도취된 감정은 중독적일 수 있다. @ 존재하기 위한 권력에 유지할 능력과 깊이를 제공하는 것은 바로 자기긍정이다. @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성서의 가르침은 자신을 미워하는 만큼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 사람이 자기 존재를 인식하게 되면, 자기긍정 욕구가 크게 증가된다. 의식은 본성과 존재를 이어주는 매개변수다. 의식은 인간존재의 차원을 크게 넓혀준다. 의식은 자각과 책임감, 또 이 책임감에 맞는 자유의 한계를 인식하게 해준다. @ 이 선택이 얼마나 제한될 수 있나와 상관없이 사람은 자기 성장에 참여하고 온 힘을 다해 이 경향이나 저 경향을 지지할 때 자기(self)가 된다. 사람은 자기가 알고, 긍정하며, 주장할 수 있을 정도까지만 자기가 된다. @ 권력을 받은 사람은 여전히 그 권력을 준 사람에게 권력을 빚지고 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권력은 다른 사람에게 주어질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권력은 반드시 차지하고 취하며 주장해야 한다. 반대를 견뎌낼 수 없는 한 그것은 권력이 아니며, 권력을 받은 사람 편에서는 결코 그 권력을 실제적인 것으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격성> @ 권력의 네 번째 단계인 공격성은 자기긍정이나 자기주장으로는 권력을 재구성할 수 없다는 개인이나 집단의 확신에서 비롯된다. <황홀경과 폭력> @ 폭력의 황홀감은 바로 이 공허감에서의 도피다. 그 무미건조함의 일부는 삶에서 많은 부분의 위험과 도전을 제거한 문명화된 존재의 피할 수 없는 상황에 기인한다. @ 우리가 의미심장한 경험을 거부하는 한 폭력은 급증할 것이다. 누구나 의미감에 대한 욕구가 있다. 사회 속에서 그 욕구를 실현할 수 없다면, 우리는 파괴적인 방법으로라도 그 의미감을 찾을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도전은 파괴적인 폭력을 쓰지 않고도 의미와 깨달음을 얻을 방법을 찾는 것이다. <폭력의 구조> @ 폭력은 인간 이하의 수준에서 자기를 통합한다. @ 산다는 것은 판단하는 것이다. - 카뮈 @ '아니요'라 말할 수 없다면, '예'란 대답은 의미가 없다. 이제 다 왔다. <새로운 공동체를 향해> @ 사람이 옳든 그르든 그에 대한 책임을 수용해야 한다. @ 사람이 자신에게도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부정적 측면이 있으며, 그 악마적 측면이 선과 악 모두의 잠재력으로 작용하고 있고, 자신은 그 부정적 측면을 부인할 수 없을뿐더러 그 측면 없이 살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큰 혜택이다. 자신이 성취한 많은 부분이 이 악마적 충동이 일으킨 갈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도 유익하다. 이것은 삶이 선과 악의 혼합물이고, 순수한 선은 존재하지 않으며, 악이 잠재력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선도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악이 공존하는 속에서도 선을 이루는 것이다. 저자는 권력과 무기력을 부정하지 않으며, 책임감 있는 삶을 살도록 촉구하고 있다. 이 모두를 인정하며 자기를 인식하고 적절히 주장할 때 폭력이라는 수단으로 의미감을 성취하거나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일이 사라질 것이라고 보고 있다. 정신분석의 토대로 환자를 치료한 예들이 좀 나와는 맞지 않았고, 권력이나 폭력을 꼭 증상으로만 보고 접근하는 것이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참 지적으로 자극되고 신선한 글을 만나 반가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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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반댓말은 무엇인가? 사랑? 자유? 평화? 이렇게 대답한 이들은 '권력'을 매우 부정적인 것으로 바라본 것이다. 전통적으로 지식인들은 권력을 '더러운 말'이라고 조롱하고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지식인과 권력은 양립될 수 없다"는 말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권력이 단지 부정적인 의미만 있다고 보는 것은 무지의 소치다.
미국의 대표적인 실존주의심리학자 롤로 메이는 권력의 반댓말이 '무기력'이라고 강조한다. 권력이란 다름아닌 존재의 힘이다. 권력이란 모든 인간의 타고난 권리이며 자존감의 근원이 된다. 권력은 항상 사람들 사이에 존재한다. 권력이 순전히 개인에게만 해당한다면 그것은 '힘'이라고 부른다. 즉 권력이란 언제나 사회적이고 대인관계적이다. 권력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거나 대인관계에서 자신이 의미 있다고 느끼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을 의미한다." 권력과 의미감은 서로 얽혀 있다. 의미감이란 "자신이 가치가 있고,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며, 동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고 믿는 한 사람의 확신"을 가리킨다.
롤로 메이의 권력론은 존재론적 입장이다. 즉 권력을 존재의 상태나 과정으로 이해한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권력이 필요하고, 권력은 일종의 치유력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니체가 "생명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 권력의지가 있음을 나는 깨닫는다"고 말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저자는 니체의 권력의지가 '자기실현'과 '자기성취'의 의미라고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권력이 없다면 참다운 존재도 없는 것이다. 반대로 무력감은 "시달리고, 괴롭힘당하며, 박해받는 느낌"으로, 자기성취가 좌절될 때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무력감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으며, 가치 없어졌고, 부모가 일생을 바쳐 지켰던 가치가 우리에게 비현실적이거나 무가치해졌다는 느낌이다. 무력감이란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하찮은 존재가 되고, 미국 시인 오든이 말한 쓸모없고 '얼굴 없는 타인'이 된 것처럼 느끼는 것인데, 이렇게 내가 무력함을 인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19-20쪽)
롤로 메이에게 권력은 선의 기초일뿐만 아니라 악의 기초이기도 하다. 권력을 악용할 때 파괴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점은 상식에 속한다. 가령 착취적 권력과 조작적 권력이 그러하다. 하지만 권력의 상실이나 결핍도 폭력을 부른다는 사실을 아는가? 권력은 절대적이 되어 타락하거나 완전히 부재할 수도 있지만, 분노 감정처럼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힘이 될 수도 있다. 폭력은 자존감의 상실과 무기력에서 기인한다. 폭력이 자라나는 토양은 권력이 아니라 무기력과 무감각이다. 자신이 약하다고 느낄 때, 무기력하다고 느낄 때 사람은 폭력적으로 돌변하기 쉽다. 학교폭력, 성폭력, 가정폭력도 예외는 아니다. 사회학자 에드거 프리덴버그(Edgar Z. Friedenberg, 1921-2000)는 "모든 연약함은 타락하는 경향이 있고, 무기력은 반드시 타락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왕따의 희생자는 또다른 폭력의 가해자가 되곤 한다. 미국 코네티컷초등학교 총기난사 사고의 주범은 학교폭력의 희생자였던 애덤 랜자였다.
롤로 메이는 모든 인간의 삶 속에는 다섯 단계의 권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첫번째 권력은 '존재하기 위한 권력'이다. 두번째 단계는 '자기긍정'이다. 인정에 대한 요구는 자기긍정 욕구에서 핵심이다. 세번째 단계는 '자기주장'이고, 네번째 단계는 '공격성'이다. 한 사람이 오랫동안 공격 성향을 완전히 부정해 버리면 좀비처럼 의식이 약해지거나 신경증과 정신증 또는 폭력이 나타난다. 마지막 단계는 '폭력'이다. 폭력은 다른 모든 반응 방법이 차단된 상황에 대한 반응이다. 이는 테드 로버트 거의 '좌절-공격이론'을 연상시킨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모든 폭력의 기원에 무기력이 있다고 지적했다. 폭력에는 무기력, 두려움, 억압된 분노가 내포되어 있다. 약물중독 역시 일종의 폭력이며 무기력의 결과다. 폭력의 원인이 되는 무기력은 권력에 대항하지 못하는 거짓순수(pseudoinnocence)와 연결되어 있다. 폭력과 '거짓순수'를 연계시킨 점이 롤로 메이의 독창적인 공헌이다.
롤로 메이는 두 종류의 순수를 구별한다. 시인과 예술가의 순수와 거짓순수가 그러하다. 시인의 순수가 새들에게 설교를 베풀던 성 프란체스코의 순수처럼 어린이와 같은 맑고 깨끗함을 나타낸다면, 거짓순수는 과거 아동기에 고착된 유치함, 단순함을 이용하는 미성숙하고 고지식한 무능력, 세상 속의 악이나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 내면의 파괴성을 인식하기를 거부하는 연약함을 말한다. 무기력과 절망이 감추어져 있는 거짓순수는 유토피아주의에 빠지게 하거나 폭력으로 나타난다. 허먼 멜빌의 소설 <빌리 버드>의 주인공 빌리 버드가 보여준 순수가 바로 거짓순수에 해당한다.
"폭력은 한 증상이다. 폭력이란 증상을 낳는 그 질병은 무기력, 무의미, 불의같이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간단히 말해서, 그 질병은 내가 인간이 아니며 세상에는 내 집이 없다는 확신이다. 나는 폭력도 그것을 촉발할 어떤 징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면서 폭력을 낳는 그 질병을 간단하게 무능력(impotence)이라고 불러왔다. 이 무능력은 자신이 고통당하거나 죽으면 상황이 나아지리라는 희망과 결합된 절망이다."(296쪽)
그런데 폭력과 거짓순수를 한데 엮는 이런 주장은 내부적인 문제점이 있다. 무기력과 광기에서 폭발한 폭력을 '거짓권력'으로 규정한 것도 무리수를 둔 셈이다. 이처럼 롤로 메이는 선(순수, 권력)은 때로 악(거짓순수로서의 무능력, 거짓권력)의 가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논리에 빠질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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