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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백가들이 활동했던 춘추전국시대는 혈연과 자연에 기초한 원시공동체가 철기와 농업혁명에 바탕을 둔 중앙집권적 관료국가로 변해가는 공간이었다. 난립한 국가들은 제각기 부국강병의 기치를 내걸고 천하의 주인이 되고자 했기에 전쟁은 그칠 날이 없었다. 당시의 사상가이었던 제자백가들은 각기 저마다의 사상으로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고자 했다. 우리는 이들의 저작을 동양고전이라 부르며 그 저작들을 통해 그 시대를 이해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구하고자 한다. 춘추전국시대는 분명 난세였다. 수많은 사상가들이 자신의 사상을 유세하며 승자가 되기 위해 애썼지만 난세가 끝났을 때 최후의 승자는 법가였다. 법가사상을 국가통치의 기반으로 삼은 진시황이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룬 것이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허나 진시황이 급서하면서 진(秦)제국이 멸망하고 뒤이어 한(漢)무제가 유학을 유일한 관학으로 인정하면서 난세에 통용되던 법가는 설 자리를 잃고, 법가의 대표적인 저작이라 할 수 있는 [한비자]는 금서로 지정되어 뭇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비자]를 저술한 한비는 전국시대 한(韓)나라에서 태어나 활약한 법가 사상가이다. 본래 이름이 한자(韓子)였으나 후대인 당나라의 학자 한유를 사람들이 한자로 높여 부르는 바람에 이름마저 빼앗기고 한비자라 불린 불운한 사상가이기도 하다. 우리는 흔히 [한비자]를 동양의 [군주론]이라고 칭하며, 한비를 동양의 마키아벨리라 부른다. 그리고 한비자를 군주의 권력유지를 위한 법치주의의 창시자로 본다. 물론 서구의 관점에서 본 것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법가는 한비가 살았던 전국시대 이전에도 세 갈래의 학파로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상앙이 인간의 호리지성을 통제하기 위하여 강조한 법(法), 신불해가 신하들이 내세우는 이론과 비판을 그들과 행동과 일치시키고자 했던 술(術), 그리고 신도가 주장한 군주가 가지는 유일한 권세를 내세운 세(勢)가 바로 그것이다. 한비는 이러한 세 학파의 사상을 종합하여 법가의 체계를 완성하였고, [한비자]에 그것을 담았다.
이 책 [한비자, 법과 정치의 필연성에 대하여]는 이러한 한비의 사상을 현재의 관점으로 풀어낸 책이다. 춘추전국시대 법가는 기득권세력이 아무리 저항해도 그 반발을 일소하고 개혁을 해야 나라와 백성이 살 수 있다고 주장한 사상가들이었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 바로 한비가 있었다. 이 책의 저자는 지금의 우리사회를 양극화와 함께 온갖 사회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난세로 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개혁을 말하지만 목소리만 클 뿐 실행은 없고 기득권을 지키겠다는 저항만이 순리인양 판치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나라를 전국시대 한비가 살았던 한나라와 비교하며 한비를 소환하고 있다. 그는 책속에서 스스로 한비가 되어 난세의 승자였던 법가의 사상을 살펴보며 우리가 지금의 혼란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 그 해답을 제시한다. 책에는 [한비자] 55편에 대한 원문이나 주석이 실려 있지 않다. 한비의 사상을 당시 시대상황에 맞춰 해설하면서 우리가 한비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지를 묻고 있다.
저자는 먼저 한비의 사상이 태동할 수밖에 없었던 공간적, 시간적 배경을 살펴본다. 전국시대말기 한비가 살았던 한나라의 실정과 당시의 궁중사회와 군신관계, 개혁과 법치, 신뢰, 권력, 인간의 본성 등을 통해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법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당시를 살았던 여러 사상가들과 법가의 입장에서 바라본다. 그리고 무엇이 답인지, 법과 정치가 어떻게 작용해야 하는지를 한비의 사상을 중심으로 풀어간다.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한비가 말한 법과 법치이다. 난세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성군이나 영웅이 아니라 공정한 시스템 즉, 법(法), 술(術), 세(歲)로 대변되는 법치사상이라는 것이다.
법(法)은 법과 제도로 신하와 인민 모두에게 적용되며 신상필벌로 대표된다. 한비는 인간의 본질을 욕망과 이익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았다. 인간의 본성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모여 살게 되면서 인간의 본질인 호리지심이 문제를 일으킨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감정과 의지가 아니라 법과 제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법이 가져야 할 조건으로 객관성, 가지(可知)성, 법적 주체성, 합리성, 가행(加行)성, 공정성을 꼽았다. 객관성이란 온 인민이 모두 알 수 있는 성문법이어야 하며, 가지성이란 그 법이 알기 쉽고 누구나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법이 어려우면 특권층의 전유물이 되기 때문이다. 법적 주체성은 법의 위반여부를 인민 스스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법이 애매모호할수록 관리들의 재량권이 개입될 여지가 커진다. 흔히 이어령비어령이라는 말은 바로 법적 주체성이 확립되지 못한데서 연유한다. 가행성이란 모든 인민이 지킬 수 있고 따를 수 있는 법을 뜻한다. 약자에게 잔인한 법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공정성은 법불아귀(法不阿貴) 즉, 법은 귀한 사람에게 아첨하지 않고 신분이 높다고 봐주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한비가 말한 법을 읽으면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법을 생각해본다. 과연 우리의 법은 한비가 말한 조건을 제대로 가지고 있을까?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이제는 하나의 법칙처럼 통용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술(術)은 신하에게 적용되는 군주의 정치기술이다. 군주가 주변의 신하와 관료를 부리고 다루며 제어할 수 있는 기술로 일종의 정치테크닉이라 할 수 있다. 흔히 형명(形名)의 술이라 말하는데, 명은 맡겨진 보직이나 임무를 뜻하고, 형은 명을 기준으로 일궈낸 결과, 행위, 전적 등을 말한다. 군주는 형이 명에 부합하는지, 다시 말해 신하들이 말한 것과 일과 성과가 맞는지를 살펴보면 된다고 한비는 말한다. 특히 침묵하는 자가 있다면 그 침묵에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기 위해서 군주는 신하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호오를 드러내지 않아야 하며, 공과 사를 구분하고,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한다. 군주가 쉽게 호오를 드러내면 주위에서 실세를 자처하며 군주에게 가는 정보의 창구를 담당하는 자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들은 정보를 비틀거나 통제하며 군주를 좌지우지 하여 공적으로 행사되어야 할 권력을 사적이익을 위해 사유화하려 한다. 또한 군주는 신하와 지혜를 겨루지 않고 경청의 자세를 유지하되, 의견이 통일되고 쉽게 만장일치가 되면 누군가를 중심으로 결탁하고 있지 않은지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고 한비는 주문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같다. 바로 몇 년 전에 일어난 국정농단 사건을 생각해보면 섬뜩할 정도로 맞아든다. 이에 더해 한비는 군주가 모범을 보이겠다고 솔선수범하며 나서면 안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유가의 머릿속에서 존재하는 덕목이지, 현실정치에서 솔선수범은 통치의 필연성을 담보하지 않으며 오히려 시스템의 활용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군주에게는 군주의 일이 있고 신하에게는 신하의 일이 있다며 군주는 오로지 자신의 일, 즉 신상필벌의 권한만을 누구에게도 위임하지 않고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歲)는 군주의 힘, 군주의 권위, 군주의 배타적 권리를 뜻한다. 본래 세란 병가에서 사용되는 상황과 조건이란 의미였다. 그러나 한비는 군주를 둘러싼 모든 정치적 상황과 조건에 세라는 말을 사용하였으며, 이는 통치의 필연성이자 정치적 필연성으로 이어진다고 강조했다. 세를 만드는 기본은 상벌의 장악과 인민의 지지를 획득하는 것이다. 저자는 [한비자]라는 텍스트를 일관하는 키워드는 바로 세이며, 법과 술은 바로 세를 위한 수단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볼 때 세는 궁극적으로 인민을 잘살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인민의 지지를 얻어 세를 공고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법과 술과 세를 합하여 법가는 법치라 부른다. 한비는 국가의 통치를 인치에 의존하면 예측가능성과 확실성이 떨어져 정치의 필연성이 사라지고 사회의 신뢰 역시 사라진다고 보았다. 국가의 안위란 시비를 가리는 기준에 달려있지 강약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이다. 개혁과 변법을 통해 법치가 공정히 행해지고 정치가 신뢰받으면 국가는 강해진다고 한비는 말한다. 그러나 군주가 선의로 법과 제도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인민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급진적이고 강한 개혁드라이브 일수록 이익과 혜택의 시간편차가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장은 모두에게 골고루 혜택이 가지 않더라도 장기적으로 국가와 인민 전체가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신뢰가 중요하다. 그리고 그런 신뢰는 법치와 엄정한 신상필벌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고 한비는 본 것이다.
한비가 살던 전국시대말기 한나라가 처한 상황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보는 듯하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의 불확실성과 복잡성, 거기에 더하여 개혁을 반대하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입만 열면 국민을 파는 정치인들, 그리고 그들에게 빌붙어 일신의 안위와 사적이익을 탐하는 관료들까지. 이러한 때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바로 법치가 아닐까 싶다. 권력을 가진 자나, 금력을 가진 자를 막론하고 국민 모두에게 적용되고 신상필벌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법치에 대한 신뢰를 찾는 일이 지금당장 우리가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 할 일이란 생각이 든다. 2500년 전, 불운의 사상가 한비가 쓴 [한비자]가 오늘날의 우리사회에도 여전히 필요한 이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