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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등만 원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유행어는 친구들과 만나면 가끔 농담처럼 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상하게 이 유행어를 농담처럼 내뱉곤 하면 왠지 모를 열등감이 해소되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현실에서 일등이 아니면 버텨나기 힘든 사회적 구조, 그리고 그런 구조가 낳은 병폐는 다름 아닌 2등이라는 열패감이다. 그리고 지독한 열패감은 질투와 시기를 부추기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런 지독한 열패감은 또 하나의 이야기를 낳는다.
"너 그 얘기 알아?“ 이야기의 시작은 언제나 질문으로 시작한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 질문이다. 그리고 다시 묻지 않아도 이야기는 이미 시작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학교 다닐 때 유일한 낙이라 하면 아마도 삼삼오오 모여다니며 머리를 맞대고 소문이나 괴담을 말하는 것이었다. 유난히 여고시절 괴담이 많은 이유도 아마 늘 사방이 하얀 벽으로 갇혀져 공부만하는 지루한 일상에 유일한 감정해소의 방법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때에 괴담이 주는 카타르시스는 경쟁이라는 프레임 속에 있다는 사실도 잊게 해 주는 재미난 놀이와 같은 유희였다. 사춘기 시절, 우리는 늘 재잘거렸다. 참 이상한 건 그 괴담의 모토는 언제나 2등이 1등을 죽이고 1등이 되지만, 죽은 1등이 항상 2등의 어깨에 앉아 있다던지, 교실 어딘가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단순한 이 야기인데 그때는 그 괴담들이 이야기가 아닌 현실처럼 생생하게 느껴져 괴담을 들은 날은 화장실도 못갔던 것 같다. "연못 위에서 형제가 사진을 찍으면 둘째가 사라진대.’ ‘연못 위에서 일 등과 이 등이 사진을 찍으면 이 등이 사라진대.’ ‘연못 위에서 첫 번째 아이와 두 번째 아이가 사진을 찍으면 두 번째 아이가 사라진대
괴담은 현실이 된다. 그럼 괴담은 왜 끊임없이 재생되는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모두들 주인공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누구나 주목받고 싶고 남보다 뛰어나고 싶은 욕망이 있다. 소설 <괴담>에서는 성악을 하는 서인주의 죽음이후 학교에 떠도는 괴소문 "연못 위에서 1등과 2등이 사진을 찍으면 2등이 사라진다.“ 이 떠돈다. 이 괴담은 십대들의 불안한 심리와 경쟁 심리속에 절묘하게 파고들어 공포로 발아한다. 괴담의 시작 ”너 그 얘기 알아?“ 라고 말하는 순간, 이야기는 실체가 되어 학생들 사이에 다가가 실제와 실존이 된다. 절대음감을 가진 지연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연두 , 존재감은 희미하지만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던 인주. 고등학교 합창부인 이들은 서로를 경쟁하면서도 친한 친구라는 허울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괴담은 이들의 사이에 끼어들게 되면서 1등이라는 욕망에 부채질을 하고, 절대음감을 타고 났고 남부러울 것 없이 유복하게 자란 지연과 성악의 재능보다 더 눈에 띄는 아름다운 외모의 연두, 그와 반대로 평범한 비쥬얼을 지니고 있지만, 뛰어난 재능의 인주. 인주의 그런 재능을 알아본 것은 합창부의 경민 선생과 지연과 지연엄마이다. 성악을 하는 세 친구들- 지연,연두, 인주-와 또다른 세 친구- 치한, 보영, 미래-는 친구의 이름이 아니라 경쟁과 질투의 상대에 더 가깝다. 이들의 삼각형의 구도는 서로를 상호보완하며 견제하는 안정적인 구도다. 그러나, 인주가 통학로 옆 샛길 연못에서 시체로 떠오르게 되면서 삼각형의 안정적인 관계는 이지러지기 시작하고. 치한과 보영과 미래 역시 이지러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이지러지기 시작한 틈새에 괴담은 이들에게 다가가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갈망과 1등에게 주어지는 천부적인 능력에 대한 질투와 시기는 2등의 마음속에 자리잡아간다. ‘늘 사라지는 건 두 번째 아이. 남은 건 첫 번째 아이. 지연은 언제나 남았다. 하지만 지연은 한 번도 첫 번째 아이가 될 수 없었다. 두 번째 아이가 눈앞에서 사라져 가는 그 순간조차도 지연은 자신이 첫 번째 아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언제나 두 번째 아이였다. ―두 번째 아이가 사라진다. 어쩌면 이 괴담은 위험할 정도로 끝이 없는 거짓말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두 번째 아이니까. 사라지는 것도 남는 것도 모두 두 번째 아이.’ p. 238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동화를 보면 정상에 올라가기 위해 애벌레들은 다른 애벌레를 짓밟고 밀치며 필사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정상에 올라간 애벌레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보고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정상에 올라가는 것보다 자기 안에 나비가 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자, 애벌레는 아름다운 나비가 된다. 우리의 인생역시 마찬가지다. 일등이 되기 위해 기를 쓰고 공부하지만 일등이 되면 또 다른 경쟁자가 기다리고 있다. 경쟁은 언제나 새로운 경쟁자를 등장시키기 때문이다. 무한경쟁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동료애벌레를 짓밟고 올라간 정상의 꼭대기가 아닌, 우리는 모두 아름다운 나비가 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소설에서 지연이 1등이 되기 위해서 1등을 죽이지만 한번도 1등이 되지 못한 것처럼, 정상의 꼭대기는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소설 <괴담>은 무서운 이야기다. 우리 내면의 욕망을 거울처럼 반추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보다 더 뛰어나보이거나, 잘 사는 모습을 보면 축복보다는 시기와 질투가 속에서 꾸물꾸물 올라온다. 그리고 그 사이를 여지없이 괴담이 파고든다. 그리고 속삭인다. “너 그 얘기 알아? 하며... 이야기를 듣는 순간, 괴담은 현실이 된다. 책을 덮은 순간, 서늘한 기운이 뒷덜미를 맴도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이 말해주는 현실은 무서우리만치 생생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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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속에 비틀린 욕망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단지 어떻게 드러내느냐에 따라 욕망이 아닌 게 되고 선망이나 동경으로 비추어지고 탈바꿈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솔직한 사람들이 좋다. 비틀린 욕망을 순화시킨답시고 얌전한 고양이인 척 부뚜막에 언제 오를까 곁눈질하는 사람보다 가감 없이 뛰어오르는 사람들이. 그런 맥락으로 본다면 『괴담』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위해 아낌없이 괴담을 퍼뜨리는 등장인물들은 모두가 최소한 솔직하긴 한 사람들이다. 과한 솔직함이 화를 불러오긴 했지만 말이다. 솔직함에 동반되는 각자의 결핍과 상실은 이 과함 때문에 쉽사리 밖으로 표출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같이 표독스럽고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인물이 판을 치는 소설처럼 보인다. 실상이 그렇기도 하다. 괴담의 중심축이 되는 세 소녀 연두, 지연, 인주는 합창부 단원으로 보이지 않는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각자의 내면에서는 상대방보다 뛰어나야 한다고 소리치며 자신의 우월성을 믿지만 한편으론 불안함도 호소한다. 셋 중에 사람에게 어필하는 매력이 가장 뛰어난 아이는 인주다. 그래서 인주는 연두와 지연 두 명에게는 공공의 적이다. 워낙 조용하고 평범한 아이라 다른 친구들에게는 존재감마저 미미하지만, 연두와 지연에게만큼은 인주는 사라져 줘야 할 공공의 적, 두 번째 아이이자 첫 번째 목표, 제거 대상이 된다.
이제 괴담의 발원지로 들어가보자. 이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는 연못을 장소로 한 흉흉한 괴담이 떠돈다. 모두 두 번째를 대상으로 한 기이한 괴담이다. 특정 장소인 연못에서 사진을 찍거나 찍히면 두 번째 아이-2등, 둘째, 두 번째 아이-가 사라진다는 괴소문이 그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곧이곧대로 믿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고 그것이 어그러진 현실을 투영할수록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더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은 청소년이지만 그들의 곁에는 그림자처럼 어른-학부모, 선생님-이 존재한다. 아이들이 제 욕망에 지나치게 심취해서 잘못을 저질러도 그를 저지할 올바른 어른들이 이 책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모두가 똑같이 제 욕망만 주시하기 때문이다. 욕망의 불을 지피는 이유는 무엇이든 단순한 데서 출발한다. 누구보다 내 아이가 잘나야 하기 때문에, 선생인 내 눈에 저 아이는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같은 어른들의 욕심과 관심의 중심에 오롯이 들고 싶어하는 아이들의 욕심이 한데 어우러진 '욕망의 산물'들이 이 소설에는 즐비해 있어서 꼭 세상의 축소판을 보는듯했다.
사회에 팽배한 과도한 경쟁의식과 남보다 월등해야 한다는 우월주의가 이 아이들을 괴담을 지탱해가는 축대로 만들었다. 평범하기보다는 너만은 특별해야 한다는 특별의식이 아이들을 삐뚤어진 사이코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남자 하나에 여자 두 명이 함께 사귄다 해서 트리플로 불리는 보영, 미래, 치한이 그런 예다. 이 아이들 역시 괴담의 희생물이 된다. 이 소설에서는 누가 피해자고 가해자고 할 게 없다. 모두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또는 그 반대다. 이들의 행동은 너나 할 것 없이 내가 더 주목받길 원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어그러지고 비틀린 욕망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음산하게 문을 여는 소설의 시작 부분, 세 군데 등굣길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각각의 특징을 살려 부르는 '언덕', '절벽', '내리막'. 이 세 가지 길에서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최고를 향해 거침없이 오르려는 욕심과 최고가 되려면 높은 고개도 마다치 않고 올라야 한다는 암시와 정점을 찍고 나면 언젠가는 내리막으로 치닫게 되어있는 인생의 진리 아니 1등이라 불리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이들에게 던지는 메시지. 우리 모두에게는 최고가 되고 싶은 욕심이 자리한다. 하지만 이것이 비틀린 욕망으로 표출되어 누군가에 상처를 입히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나의 과한 욕심이 누군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아픔으로 각인되지는 않았는지... 그 상처가 어긋난 결말로 끝맺지는 않았는지. 누군가를 불온한 재물로 만들기 위해 은밀히 다가가 귓가에 괴담을 속삭이지는 않았는지. 당신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다 말할 수 있는가?
하지만 이들 중 누구 하나를 콕 찍어 나쁘다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모두가 삶의 허기짐 즉 상실을 욕망과 괴담이라는 그럴싸한 마감재로 꽁꽁 싸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안에서는 모두가 똑같은 사람들이다. 상실과 결핍, 결여는 괴담을 불러온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 모두가 지극히 결핍으로 점철된 존재들이다. 자살한 인주는 사람들의 뇌리에 오래 남을 만큼 호소력 짙은 보이스를 가졌지만 그 재능을 지지해줄 경제력이 없었고 그와 반대로 지연은 자신의 재능을 뒷받침해줄 탄탄한 집안이 있었지만 인주보다 뛰어나지 못하다는 자괴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연두 또한 눈에 띄는 예쁜 외모를 가졌지만 인주만큼의 호소력도 지연이네만큼의 경제력도 부족했다. 이렇듯 각자의 결여된 부분이 아이들의 눈에는 더 적나라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시기하고 질투하고 급기야 괴담을 통해 상대방 아이가 사라지길 은밀하고도 간절하게 바랐다. 어른 또한 마찬가지였다. 소설에 등장하는 세 어른 여자(지연,연두 엄마, 음악 선생) 역시도 아이들과 같은 권력=경제력 앞에서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며 어떤 부조리한 일을 저질러서든지 자신의 아이가 앞서나가길, 1등으로 만들기를 서슴지 않았고 미움을 넘어 증오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주위의 기대 때문에 완벽해 보이고자 하는 열정이 넘쳐날 뿐이다. 급기야는 이 열정이 부담으로 치닫고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는 양날의 검이 될 수도 있다. 자신에게 부족한 무엇을 긍정적 열정으로 취하려 하기보다는 끝이 보이지 않는 욕심으로 갈취하려 한 이들에게서 요즘의 세상 사람들이 보인다. 결국은 모든 게 우리가 만들어낸 사회 구조적 모순의 한 부분이다. 노력해도 합당한 대가가 따르기보다는 부조리하고 부도덕하게 살아도 부와 권력만 있으면 대접받는 세상이 현대 사회의 아름답지 못한 모습이니까 말이다. 부디 어른들의 욕심을 아이들에게 투영해 일반화되어버리는 욕심이 되지 않기를... 재능이 있다면 그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괴담』 속에서처럼 누구의 어긋난 욕망 때문에 상처받고 사라지는 아이들이 더는 없는 그런 세상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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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각자의 세계에선 첫 번째 아이이다. 나만을 바라보는 상상 속의 청중을 즐겁게 해주려고 용을 쓰며 행복해하지만 청중은 눈치 채지도 못하는 실수나 혼자만의 염려가 생기면 괜찮은 곳이라 여겼던 세계가 조금씩 흔들린다. 내가 두 번째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첫 번째가 될 수 없다는 자괴감이 청소년의 의식을 잠식하면서부터 그 곳은 고통스러운 무대가 된다. 첫 번째 아이와 두 번째 아이가 사진을 찍으면 두 번째 아이가 사라지고 만다는 괴담은 이러한 심리 과정에서 만들어진 셈이다. 괴담은 트라이앵글 인물 구도로 현실이 된다. 자신을 첫 번째로 믿고 싶은 연두, 두 번째일 수 있음을 깨달아가는 지연, 잊히는 게 두려워 죽음으로 기억을 선택한 연주로 꼭짓점을 이룬 트라이앵글. 남자 하나 여자 둘의 기묘한 애정 관계로 청중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지만 위태로웠던 균형은 이내 깨지고 말아 청명한 음을 잃은 치한·보영·미래의 트라이앵글. 이밖에도 끝없이 인정받기 위해, 혹은 인정받을 수 없어 좀처럼 불안을 떨쳐낼 수 없는 요한·지연·연지의, 자식을 좋은 배경이나 도구로 활용하려는 세파에 닳고 닳은 성혜·수경과 제자가 첫 번째가 될까봐 저주하는 경민의, 보이소프라노의 맑은 고음(아들)과 음울해지는 음색(딸)과 이유를 잃어버린 울음(엄마)으로 연주되는 삼중주의……. 삼각형 안에서 이들이 마침내 알아낸 진실은 모두가 첫 번째가 될 수 없다는 씁쓸한 자각. 그래서 중간에 끊긴 다리 같은 연못의 전망대는 이들의 해방구가 된 것이다. 이 소설의 중심인물을 꼽자면 단연 지연이다. 오래전부터 괴담으로 자기의 거짓 생을 구축한 아이의 핸드폰 벨 소리는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 중 아리아 ‘내 이름은 미미.’ 아리아의 첫 소절을 무려 두 번이나 소설에 실은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미미는 파리에 올라온 시골 처녀다. 공장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도 생활은 여전히 곤궁하다. 반반한 얼굴로 부르주아에게 몸을 파는 롤레트가 되고 마는데, 롤레트로 활동하는 가명이 미미다. 사랑하고 싶은 상대에게 본명을 밝히고서야 희망을 엿보는 루치아. 루치아처럼 지연도 진솔해지고 싶지 않았을까. 꼬깃꼬깃 숨겨놓은 내면의 번민을 드러내면 서로가 서로의 배경이 되어* 무대에 설 수 있음을 깨닫게 되지 않았을까. 그런 열망으로 지연은 핸드폰 벨 소리를 선택하고 때때로 미미가 아닌 루치아가 되어 아리아를 부르지 않았을까. 지연의 상상 속의 청중은 꽤 오래전부터 박수칠 준비를 하고 있지, 않았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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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아이들에게 학교란 그리고 친구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까? 초등학교는 몰라서 재미있었다.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나름 눈치껏 선생님, 친구들의 모습을 살폈고, 새로운 걸 배운다는 것 자체가 좋아서 행복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 처음으로 학교란 세상도 무섭구나를 느낀 사건이 하나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반장선거를 했었다. 지금은 추천에 의해서 회장을 뽑지만 (성적과는 상관없이) 당시 만해도 성적순으로 후보가 올라오고 반 아이들이 투표를 해서 반장, 부반장, 회장, 부회장을 뽑았었다. 남자 3명과 여자 3명. 반장선거가 있기 전 어떤 친구의 어머님이 오셨다 가시고, 그 아이가 후보군으로 올라가 버린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아이와는 3학년 때 같은 반이었기에 성적이 어떤지 당연히 알았던 나는 어린 나이에 무척이나 충격을 받았다. 가끔 장난처럼 엄마께 “엄마도 우리 학교에 담임선생님 좀 만나고 가”라고 말했지만 엄마는 한 번도 학교에 오신 적이 없다. 내가 아파서 쓰러지지 않는 한은...
중학교,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학교란 마냥 추억과 낭만이 숨 쉬는 곳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꿈이 있고, 우정이 있고, 늘 깔깔거리는 여학생들이 배우는 곳. 그래서 샘물처럼 통통 튀는 곳을 상상했다면.. 나는 그건 아니라고 본다. 여학교만큼 질투와 시기, 그리고 뒷담화가 많은 곳 또한 드물 거라고 생각한다. 중학교 때 였던가? 얼굴이 정말 예뻤던 아이가 있었다. 그냥 예쁜 정도가 아니라 인형처럼 예쁜 아이. 그 아이는 심지어 공부도 잘했다. 그래서 아이들의 시기 질투가 굉장했다. 재미있어 웃는 것도 선생님께 잘 보이기 위해 웃는 거라 말했고, 머리를 살짝 올려도, 손끝 하나하나가 재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아이 역시 자신이 예쁘다는 것을 알기에 그 장점을 잘 활용하기도 했다. 비록 우리 반은 아니었지만 그 반 아이들이 우리 반에까지 와서 욕을 했으니 그 아이를 모르면 간첩이 되는 상황이었다. 내가 가진 것보다는 남이 가진 것이 더 커 보이는 시기의 여학생, 남학생들은 움직이는 폭탄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런 저런 우여곡절 끝에 나에게로 온 책. 많이 들어본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 읽은 “손톱이 자라날 때”를 쓴 그 작가였다. 그 책에서도 아이들의 왕따, 아픔, 질투에 대한 이야기가 충격적이었는데 이 책도 역시... 나를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괴담은 내가, 아니 우리가 간절히 원할 때 내 주변을 맴돈다. 처음엔 우정이었을지 모를 친구에 대한 내 마음. 그 마음이 질투로 변했을 때, 재 만 아니면 내 인생이 행복해 질지 모른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는 순간 괴담은 생생히 내 마음을 묶어 버린다. “너 그 이야기 알아?”로 시작하는 그 말.. “거기서 형제가 사진 찍으면 둘째가 사라진다는 거?”, “연못 위에서 첫 번째 아이와 두 번째 아이가 사진이 찍히면 두 번째 아이가 사라진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그 아이가 빛나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가진 재능을 뛰어 넘는 아이 그 아이만 아니면 내가 1등이 되는데... 다른 누가 그 아이의 재능을 알아보기 전에 그 아이가 없어져야 하는데... 이렇게 비틀린 위험한 생각을 하는 곳..
인주, 연두, 지연. 같은 학교에서 성악을 하는 친구. 인주는 못생겼지만 성악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고, 연두는 누가 봐도 한번은 뒤돌아보는 예쁜 외모를 지녔다. 다른 두 친구보다 어릴 적부터 성악을 했고 당연히 잘났다고 생각했지만 자신보다 나은 아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지연. 어느 날 인주가 학교 연못에서 자살을 했다. 인주는 자살한 게 맞는 것일까?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아이들의 숨 막히는 질투와 시기.. 진실은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일까?
사실, 학교는 겉으론 평범해 보이지만 속은 위험한 아이들과 가득하다. 누가 위험인물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터지기 전에는 (96) 이 괴담이 왜 재미있는지 알아? 누가 사라지든, 남는 아이는 첫 번째 아이가 된다는 거야(159) 어쩌면 이 괴담 자체가 위험할 정도로 끝이 없는 거짓말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두 번째 아이니까. 사라지는 것도 남는 것도 모두 두 번째 아이. (238)
부모들은 말한다. 최고가 되라고. 1등만 기억해주는 세상에서 최고가, 1등이 되라고 말한다. 1등을 위해서면 친구든 뭐든 적으로 돌려도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1등을 한 아이가 사회에 나간다고 1등을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우리 사회는 1등을 좋아하는 것일까? 아이들에게 순수함을 바라기엔 너무 영악해져 버린 것일까? 아님 우리 어른들이 순수하고 착한 아이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다고 영악하게 만들어 버린 것일까? 오늘도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는 어떤 괴담들이 출렁거릴까?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어른들의 몹쓸 생각들이 차고 넘치게 들어차 있어서 아픈.. 그런 책이다.
괴담.. 그 괴담들이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우리 아이들을 얼마나 아프게 그리고 흔들리게 할지... 책을 덮지만 아픈... 그런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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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그 얘기 알아?”
누구나 첫 번째가 되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을 그대로 보여준 이야기였다. 특히나 그 나이의 아이들이 가질 수 있는 무모한 마음까지도 알아들을 수 있게끔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괴담이란 모양을 갖추어 구체화 되었을 때는 불안한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두 번째여서도 안 되고, 둘째니까 안 되고, 2등도 인정받지 못할 바에야 무조건 첫 번째가 되어야만 하는 계속되는 숙제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모습이 암울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꿈을 꾸면서 함께 하는 시간들이 모두 위선으로 가려진 거짓임을 알아차린 순간 찾아올 절망은 누구의 몫으로 감당해야 하는 것일까. 서로의 존재감이 친구도 우정도 아닌, 그저 잘라내고 버려야만 한다고 인정하는 것은 십대의 그 아이들에게 상처와 비명뿐일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또 모른 척 해야 하는 이런 순환은 어디서 멈출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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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한번 쯤 들어보았을 듯 한 이야기다. 어째서 괴담속에 나오는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꼭 한 교실에 남아서 공부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밤에 끝까지 남아서 공부를 하던 아이들이 하나씩 사라지곤 하는 이야기들은 입시라는 틀속에서 한줄기 빛이 었을지도 모른다. 무서우니 얼릉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니까. 정류장에서부터 십 분 정도 거리의 오르막인 '언덕', 길지는 않지만 경사가 가팔라 가장 힘든 '절벽' 이라고 표현이 되어지는 학교가 나온다. 내가 다니던 학교를 모델로 따왔나 싶을 정도로 고등학교의 모습이 닮아 있다. 인왕산을 배경으로 그림처럼 산등성에 있던 학교는 꽃다운 여고생들에게 튼실한 무다리를 선사해 줬었는데 하는 생각을 하니 풋하고 웃음이 나온다.
올 초에 강풀 만화 중 <조명가게>라는 작품을 읽은 적이 있었다. 에피소드 중 하나가 사라지는 아이들 이었다. 아이들이 하나씩 사라지는데, 사라진 아이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분명 누군가 있었던 것 같은데, 누군지 생각이 나지 않고, 처음부터 그 아이는 없는 것 처럼 느껴진다. 가끔 욱신거리게 아플때가 있긴 하지만 왜 인지는 모른다. 그런 이야기.. 어디에선가 한 번쯤 들었던 그런 이야기. 오늘 같이 있었는데 또 다른 오늘이 되면 낯선 듯 낯익은 물건들을 보면서 누군지 모를 사람을 그리워 하는 그런 이야기들을 우리는 은연중에 만나고 있다.
인주가 죽었다. 학교 뒤 연못에서. 새벽을 가르며 학교에 올라가던 인주가 죽었다. 그리고 괴담이 돌기 시작 한다. '너 그거 알아?'라는 은밀한 속삭임과 함께. 어느 학교에나 하나 둘씩 있는 괴담이 끊이지 않고 아이들 주변에 돌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곳에 지연과 연두가, 엽기 트리플이라는 미래, 치한과 보영이 있었다. 아이들은 성악을 하는 연두와 지연이 은근히 인주를 따돌렸다고 이야기 한다. 연두와 지연은 같은 반이었으니 둘이 더 친하게 당연한테, 예고가 아닌 학교에서 은근히 퍼지는 소문은 단짝 처럼 보이던 연두와 지연마저도 떨어뜨려 놓는다. 그러면서도 괴담은 사라지지 않고 조금씩 변해가면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연못 위에서 일 등과 이 등이 사진을 찍으면 이 등이 사라진대. 연못 위에서 형제가 사진을 찍으면 두 번째 아이가 사라진대. 연못 위에서 첫 번째 아이와 두 번째 아이가 사진을 찍으면 두 번째 아이가 사라진대. 연못 위에서 첫 번째 아이와 두 번째 아이가 사진이 찍히면 두 번째 아이가 사라진대. 텅 빈 교실에서 첫 번째 아이와 두 번째 아이가 사진을 찍으면 두 번째 아이가 사라진대. 셋이 찍으면....?
모든 것이 완벽한 것 같은 아이 지연. 부모의 재력이 있고, 절대음감까지 가진 이아이가 음악교사, 경민에겐 눈엣가시처럼 보였다. 경민은 인주의 죽음이 자살이라 확신을 하지만, 지연에게 책임에 있기를. 지연이 죄책감에 떨기를, 그러다 망가져 버리기를 원하다. 자신이 못 가진 것을 가진 학생에 대한 부러움 이었는지도 모른다. 경민의 친구인 PD가 만들고 있는 다큐에 여주인공을 차지하기 위한 아이들. 지연과 연두 그리고 인주의 이야기 였을까? . 여주인공이 되는 순간 앞날이 열릴 것 같았으니까. PD가 원했던 건 무너져 내린 경민을 찍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누가 여주인공으로 뽑히던 그 학생은 경민의 들러리일 뿐이었다. 이상한 관계에 아이들. 더 이상한 아이들. 엽기 트리플이라 불리는 치한을 두고 함께 사귀는 미래와 보영.
보영의 머리를 묶어 주고 있는 보라색 머리끈, 연두의 손가락에서 빛나는 반지, 주은 디지털 카메라 속에서 환하게 웃고있는 여학생. 주인없는 물건들이 하나둘씩 나타나면서 괴담은 현실이 되지만, 괴담은 괴담일 뿐이다. 인주는 괴담의 주인공이 아니었을까? 어째서 인주는 잊혀지지 않고 있을까? 지연을 누르고 있는 이야기들. 아무도 모르는 지연과 또 한 사람만이 알고 있는 이야기들. 두려움의 또 다른 이름은 외로움인지도 모른다. 첫 번째가 되고 싶은, 무대 위의 주인공을 꿈꾸는 아이들. '너만 없으면 돼?' 정말? 그런데 왜 두 번째 아이일까? 보통의 괴담 속 이야기는 첫 번째 아이의 사라짐이다. 너만 없으면 일등이 되니까. 늘 사라지는 건 두 번째 아이였다. 남는 건 첫 번째 아이. 첫 번째 아이는 언제나 남지만, 한 번도 첫 번째 아이가 될 수가 없었다. 두 번째 아이가 눈앞에서 사라져 가는 그 순간조차도 첫 번째 아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두 번째 아이가 사라짐에도 언제나 남는건 두 번째 아이였다.
우정이 지독한 질투로 변하고, 열정이 비틀린 집착으로 물들고, 간절히 사라지길 바라는 존재가 생겼을 때, 간절히 원할 때 찾아와 현실이 되어 버리는 이야기. 작가의 말처럼 괴담의 의미를 도저히 읽어 낼 수가 없을 지도 모른다. 배 속에 든 창자처럼 단순한 형태의 미로지만, 출구를 찾는 사이 흡수돼 버리고 마니까. 목적도 의미도 없는 커다란 함정이니까. 혹시, 이 함정에 빠져서 내가 기억못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 두 번째 아이로 인해서 어느 순간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 내리는 건 아닐까? 여름밤을 잠 못 이루게 만들면서 <괴담>은 이렇게 프리마돈나와 세콘다돈나를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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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 귀신, 심야버스 괴담, 옥수역 귀신, 홍콩할매 등등 요즈음 들어 도시 괴담(怪談)들이 점점 다양해지고 그 수(數)도 더욱 많아지고 있지만 수많은 괴담 중의 대표 주자는 뭐니뭐니해도 “학교괴담(學校怪談)” 일 것이다. 학교괴담 속 학교에서는 자정(子正)만 넘기면 음악실의 피아노가 저절로 울리고, 복도에는 과학실 해골 모형과 유관순 누나 동상(銅像)이 걸어 다니며, 바람 한 점 없는 데도 교실에는 커튼이 태풍을 만난 듯 펄럭이고, 복도와 교실 뒷 편에 걸려 있는 그림 속 얼굴의 눈들은 붉게 타오른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공동묘지가 그렇게 많았었는지 모든 학교는 공동묘지 터 위에 지어졌고, 졸업 앨범에는 수 십 년 째 같은 얼굴의 학생이 찍혀 있는데, 이를 알아보는 학생 또한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갇혀서 수업을 받게 된다. 이처럼 한두 가지 씩은 꼭 들어봤을 학교괴담의 기원은 어디일까? 그 기원은 각종 요괴 이야기가 발달했던 일본의 문화가 일제강점기 때 정비된 근대학교 제도와 접목되어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고, 일본의 귀신 이야기 대부분이 물건에서 요괴가 탄생하는 것을 주요 소재로 삼고 있는 점도 그 근거라고 한다. 또한 한 때 유행했던 “분신사바” 괴담도 일본에서 비롯된 것이고, 마을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무덤가를 형성하였던 우리 조상들의 전통으로 볼 때 무덤가 위에 학교를 세운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이고 우리 이야기라고 볼 수 없다고 한다(“학교괴담, 넌 어디서 왔니?”, 2012/7/12, 한국콘텐츠진흥원 발췌) 최근에는 우리 전통 문화와 결합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니 이제 우리 문화화(文化化)되고 있는 듯 한데 아뭏튼 학교괴담이 인기가 있는 이유가 뭘까? 위에서 열거한 학교괴담 한두 가지 씩은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학창시절의 추억(追憶) 때문은 아닐까? 학교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기쁨과 슬픔, 우정과 질투, 자유와 속박, 성공과 좌절, 상처와 치유 등 서로 상반된 감정들을 같이 맛보고 나누며 학창 시절을 함께 지냈다는 동질감 때문에 학교괴담에 더 많은 공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학교괴담 얘기를 늘어놓다 보니 역시나 서언(序言)이 쓸데없이 길어졌다. . 이번에 소개할 책은 이런 학교괴담을 소재로 한 “방미진” 작가의 <괴담; 두 번째 아이는 사라진다(문학동네/2012년 7월)>이다.
‘연못 위에서 형제가 사진을 찍으면 둘째가 사라진대.’ ‘연못 위에서 일 등과 이 등이 사진을 찍으면 이 등이 사라진대.’ ‘연못 위에서 첫 번째 아이와 두 번째 아이가 사진을 찍으면 두 번째 아이가 사라진대.’
산비탈을 깎아 만들어 찻길에서 학교 정문까지 언덕길이 길게 이어지는 어느 고등학교 뒤편에 위치한 연못에는 위와 같은 괴담(怪談)이 떠돌고 있었다. 그저 아이들 사이에 떠도는 유치한 농담쯤으로 여길 수 도 있는 이 괴담이 본격적으로 떠돌게 된 데는 “서인주”라는 여학생이 시체로 발견되고 난 후 부터였다. 사인(死因)은 자살로 판명 났지만 아이들 사이에서 괴담은 확대 재생산되어 떠돌아다니고, 아이들은 인주와 단짝이었던 지연과 연두에게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낸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같이 성악을 전공했었기에 셋이서 어울려 다녔지만 타고난 음색에 뛰어난 실력을 선보였던 인주를 시샘한 연두와 지연이 인주를 따돌리는 그런 관계였다. 여기에 자신의 제자이자 부유한 환경에 속물 근성의 어머니를 두고 있는 연두와 지연을 경멸하는 음악 선생님, 남자 하나 여자 둘이라는 트리플 연인 관계인 치한과 보영, 미래, 어릴적 부터 엄마의 과잉보호를 받는 언니 연두를 미워하는 연지, 인근 대학에 다니는 천재화가이자 연못에서의 인주의 죽음을 목격했던 치한의 형 요한, 연두를 스토킹하는 남학생 등 많은 인물 군상들이 서로에게 악의와 질투, 애정과 질시 등 복잡다단한 감정들을 품어내며 이야기를 엮어간다. 인주는 과연 자살한 것일까 아니면 누구에게 살해당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뜬소문에 불과했던 연못괴담이 진짜로 이루어진 것일까?
240 여 페이지의 짧은 분량, 페이지 당 20 줄 내외의 듬성듬성한 줄 간격이라 한 두 시간이면 뚝딱 읽어낼 줄 알았는데, 이 책을 다 읽는데 꽤나 애를 먹었다. 이런 류의 학교괴담은 정석(定石)이라 할 수 있는 영화 <여고괴담>에서처럼 입시경쟁에 내몰리면서 서로가 친구가 아니라 적(敵)이 될 수 밖에 없는 삭막한 학교 현실 속에서의 갈등과 시기, 미움, 질투, 그리고 그런 환경에서 비롯된 공포 상황의 연출을 기대해볼 텐데, 책 중반이 넘도록 이 책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인주의 죽음과 함께 어울렸던 친구들인 연두, 지연의 관계에서 서로를 미워하고 질시하는 상황임을 알 수 있고, 주문(呪文)처럼 끝없이 반복되는 위의 문구들과 음악실에서 죽은 인주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공포스러운 상황이 없진 않지만 그리 명확하게 묘사되어 있지도 않고 - 음악실에서의 상황은 친구의 죽음과 괴담을 연관시켜 생각하는 연두와 지연의 상상으로도 볼 수 있다 -, 결말에 이르러 드디어 드러나게 되는 괴담의 실체도 원인과 결과가 모호한 결말로 마무리되고 만다. 특히 결말에서 괴담이 이뤄져 둘째, 이 등, 두 번 째 아이가 사라졌는데, 그걸 의도한 아이들 기억에만 남아 있고 그들의 존재가 완벽히 사라진다는 설정이 영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학교 교육의 모순과 심각성을 강조하는 사회파적 추리소설 경향을 따르던지, 아니면 반대로 학교 교육의 문제점은 그저 원인이나 배경 정도로만 설정하고, 공포에 포커스를 맞춰 원인과 상황 연출을 명확하고 분명하게 그려내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을 텐데 두 가지 모두를 담아내려다 보니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이야기로만 느껴졌다. 이 책을 먼저 읽은 분들의 서평들 중 호평(好評)이 적지 않은 것을 보면 학교를 졸업한 지 벌써 오래되어 지금 학생들의 심리와 정서에 올곧이 감정이입하지 못한 내 이해력과 공감의 부족과 자기 맘대로 기대치를 설정해놓고 그 기대에 못 미친다고 금세 실망해버리는 나의 변덕스러움을 탓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아쉽지만 한여름 무더위를 잠시나마 잊게 할 만한 공포를 기대했던 나에게는 맞지 않았던 책이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감상일 뿐이니 이 글 때문에 책에 대한 편견이나 오해는 없길 바래본다. 지금 학생들의 심리와 정서를 잘 이해하고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분들과 학교괴담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한번쯤 읽어 봐도 좋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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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부터 시각적 대비를 목적으로 쓴 문장들이 강렬하게 눈길을 사로잡는다. 차갑고 순결한 바람. 순교자와 광신도. 언덕, 절벽 그리고 내리막. 이러한 고의적인 대비를 통해 소설의 분위기는 오싹해지고 이야기 속 밝은 풍경 이면에 숨겨진 그림자를 기억하게끔 유도한다.
효과를 유도하려는 의도는 좋은데 사용 빈도가 약간 과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이야기의 초반부에 이러한 대비를 남발했던 나머지 내 눈과 생각이 미치는 곳은 대비의 농도 차를 가늠해보는 영역에 한정되었던 것 같다. 다른 말로 이야기에 몰입도가 떨어졌다는 소리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이 대비는 낯섦의 영역에서 익숙함의 영역으로 이동했기에 더 이상의 불만은 필요가 없게 되었다.
2. <괴담>이 브라운관에서 파생된 이야기를 재료로 가져왔다고 해석해도 될는지 확실치 않지만 나는 그렇게 느꼈다. 인물들을 보면서 그들에게서 범람하는오디션 프로그램과 주목받는 스포츠 스타. 그리고 아이돌이 연상되었다.
특히, 오디션 프로그램을 시청할 때마다 출연하는 아이돌의 친구나 친인척들의 도전기와 그 속에 내포된 부러움 섞인 열망. 그리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세계선수권 우승자의 언니가 충분히 느꼈을 법한 열등감이 연상되었다.<괴담>은 그러한 열등감을 풀어놓는다. 소설 전체에 흐르는 빛과 그림자처럼 우열의 법칙이 이 공간에 짙게 형성된다.
이걸 살리에르 증후군으로 불러도 좋고, 세콘나 돈나. 서브 남주로 표현해도 좋다. 타의로 설정해놓은 환경 속에서 주인공은 아니지만, 주인공이 되기를 열망하는 자들의 반란이라고 할까? 이 반란은 일인자가 되기만을 원하는 인간의 욕망과 그것을 부추기고 일등만 기억하는 사회 시스템 때문에 생겨나는 부분이다.
그렇지만, 누군가의 기억에서 그 존재를 아예 지워버리는 <괴담>의 방식은 혐오스러울 정도로 잔인하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괴이한 이야기'<괴담>과 동음이의어인 '괴이한 연못'<괴담>은 내게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상대에게 불온한 일을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는 공간이 존재한다는 가정하에서만 가능한 이야기다. 과거 나치 독일과 마오쩌둥의 중국에서는 이웃 간에 갈등이 생기면 유대인이라고. 체제에 반하는 자라며 비밀리에 고발했던 것처럼…….
3. <괴담>이 첫 번째 아이와 두 번째 아이의 대립으로 반복시키는 일대일의 대립은 강한 사람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사람이라는 명제를 증명하는 듯해서 껄끄럽게 느껴졌다.
인간의 탐욕과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순간을 극대화하여 드러내는 방식은 헤르만 코흐의 <디너>에서 접했던 부분이지만, <괴담>이 흥미로웠던 것은<괴담>에는 선이라고 불릴 존재가 딱히 없다는 것이다. 이 소설은 열등감과 열등감의 충돌. 이기심과 이기심의 충돌만이 존재했다.
서인주를 기억에서 들춰내 생각해봤을 때도 그녀가 먼저 지연을 불러냈다는 것으로 미루어봤을 때, 인주를 선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차마 악을 실행하지 못했던 존재 정도로 불러야 할까……. 그나마 양심을 지킨……. 그것을 선으로까지 포장하는 것에는 반대다.
4.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 즉, 형제, 자매, 친구 간의 갈등이 점점 커져 같은 목적을 추구하는 집단을 형성하는 결말은 인정하긴 싫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고 여겨졌던 결말인 것 같다. 자연계의 여러 원소가 자신의 욕망 때문에 그것을 혼자 소유하려들지 않는 것처럼, 그들이 만든 탐욕의 트라이앵글은 자연계의 공유결합과 같은 효과로 바라볼 여지를 마련해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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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괴담이 없는 학창시절을 보낸 이는 없을 것이다. 시골 학교에 다녔던 나는 교실과 꽤 떨어져 밖에 따로 지어진 화장실을 무서워서 가지 못했었다. 화장실 괴담이 아이들 사이에 돌고 있었던 까닭이다. 예전 같으면 터무니 없는 이야기라고 어른들은 상관하지도 않던 이 학교괴담이 영화 등의 매체의 힘을 얻어 더 흉흉해지더니 해마다 더 강력해지고, 아이들의 갖가지 경쟁의식과 맞물려 점점 돌연변이를 거듭하는 괴물처럼 증폭되어가고 있다. 더이상 무슨 괴담이 있으랴 싶은데, 또 하나의 학교 괴담을 만났다. 1등과 2등이 사진을 찍으면 2등이 사라진다는 어디선가 많이 되풀이되어 익숙한 테마에 이야기의 전개가 식상하지 않을까 의심하며 책읽기를 시작했는데, 예민하고 뾰족하게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요소들 때문에 긴장감을 늦추지 못하고 계속 읽게 되었다. 그 뾰족함은 주인공들의 행동을 질타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마음 속에 감추어두었을 그러나 누구라도 숨기고 있을 만한 어두운 일면들을 찾아내어 찌른다. 누구보다도 빛나고 싶고, 누구보다도 위에 있고 싶은 욕망에 의해 아이들은 괴담을 유포하고 괴담의 희생자를 끌어들인다. 그럼, 괴담의 희생자는 왜 괴담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게 되느냐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모두가 자신이 1등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라지는 것은 2등이므로 자신이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는 희망이 아이들에게 괴담의 주인공들을 만들어 낸다. 경쟁을 부추기는 오디션 프로그램들, 자신의 아이를 주인공으로 만들고자 하는 부모세대의 입김 경쟁 또는 일그러진 희생, 서로 빛나고자 하는 가운데 싹트는 질투와 질타, 경쟁과 경시 이 모든 것들이 각각의 자리에서 보이지 않게 자리한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밎물려 기능하면서 아이들 사이의 괴담이 당연한 사회의 현상이 되어간다. 사라지는 것이 인주같은 2등만이겠는가? 반짝반짝 빛나야 할 아이들의 꿈은 공포에 부딪히고 일그러진다. 서인주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감동을 주던 음악실은 지연과 연두에게 공포의 공간이 되고, 믿었던 그들의 우정사이에도 금이 가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1등이라면 또 누군가는 2등이기에. 2등을 '사라지게' 한 1등들은 항상 불안할 수 밖에 없다. 2등을 '사라지게 한' 그 순간 새로운 2등이 자리하게 된다는 것을 자신들도 알고 있으므로. 인주의 사건이 이야기의 중반에 가면서 서서히 묻히고, 연두와 지연의 괴담이 다시 새로운 싹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연두도 사라진다. 그러나 결코 괴담의 끝은 없다는 끔찍한 진실을 다시 한번 각인시키며 작가는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씁쓸하고도 쓸쓸한 이야기다. '사라진다'는 미묘한 단어는 이 책에서 아주 위험하게도 아주 가볍게도 읽힐 수 있게 정말 미묘하고 작용하고 있다. 모두가 상생하는 아름다운 경쟁의 미덕을 우리의 아이들이 익혀나가게 할 일이다. 1등만이 값진 결과가 아니고 자신이 있는 그 자리에서 노력한 만큼 빛나는 보람의 뿌듯함을 소중하게 여기는 그래서 자신을 사랑하는 아이들로 키울 일이다. 괴담이 아니라 학교미담이 훈훈하게 번지는 학창시절 문화의 터전을 만들어 줄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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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못 위에서 형제가 사진을 찍으면 둘째가 사라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