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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평 ? 인간의 근원적 고독함에 대해 극한까지 탐구하는, 이 시대의 살아있는 고전.
인간의 근원적 고독에 관해 노래하고, 이야기한 작품은 셀 수 없이 많다.
나는 네가 될 수 없고, 너도 내가 될 수 없기에. 이 서로의 다름에서 오는 두 세계간의 긴장. 누군가가 내 마음과 생각을 알아주길 바라는 욕망과 그 욕망이 결코 이뤄질 수 없다는 좌절감. 그 욕망과 좌절감 사이의 간극. 그 외에도 문득 내가 어디에서부터 어디로 향하는 것인가에 대한 불가해함과 무기력함. 그 외에도 어떤 순간에, 분명한 이유도 없이 찾아오는 그 지독한 외로움과 씁쓸함.
이것들이 시인과 소설가가 무수하게 반복한 테마인 ‘인간의 근원적 고독’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감상을 쓰고자 하는 <생의 이면>이란 소설은 ‘인간의 근원적 고독’의 여러 측면의 근원으로 토대를 쌓은 후, 고독이란 무엇인가를 지독하게 파헤치는 소설이다.
이 소설의 줄거리만 보면 단순하다.
‘나’라는 화자가 주인공인 박부길 소설가의 자전집을 만들며, 그 박부길의 외로운 인생을 조사하는 이야기다. 박부길의 불행한 어린 시절부터 고향을 버린 중학생 시절과 힘겹게 보낸 고교 시절에 만난 첫 사랑. 그 첫사랑에게 사랑을 갈구하다 실패하고, 결국 이 지독한 외로움을 풀어낼 방법을 찾지 못하다가 소설을 썼다는 이야기다. (스포라고 느꼈다면 미안하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정말 지독할 만치 인물의 내면에 천착하면서 결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닌, 인생의 큰 화두 중 하나인 ‘존재의 근원적 고독’이라는 문제를 소설 전반부부터 마지막까지 집중적으로 파고들면서 심오한 이야기로 탈바꿈한다.
박부길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한 초반부의 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사람의 몸속에는 얼마나 많은 눈물이 들어 있는 것인지, 쏟고 또 쏟았지만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그 눈물은 물론 아픔 때문이 아니었다. …(중략)… 아니, 그것은 슬픔이 아니었다. 뼛속을 시리게 하는 외로움이었고, 사무치는 혈육에의 그리움이었다. 또 그것은 무정형의 세상, 온통 비밀투성이고 규명되지 않은 수수께끼들과 모순들을 끌어안은 채 살아야 하는 용납할 수 없는 삶에 대한 울분이기도 했다. -<생의 이면>, 65p 중-
본 장면은 8살의 박부길은 아버지가 고시공부를 한다고 들은 어느 절간에 찾아가려다 실패하고, 큰아버지에 의해 비가 오는 바깥으로 벌거벗긴 채 내쫓긴 상태에서 눈물을 터뜨리는 장면이다.
처음에 울음을 터뜨린 박부길은 슬픔 때문인줄 알았으나, 이내 그것은 “외로움”과 “그리움”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한 그 울음은 삶의 불가해함과 그 불가해를 마주해야만 하는 부조리에 대한 “울분”이라는 사실마저 인식한다. 이것이 과연 8살의 인생인가, 38세의 인생인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하지만 작가의 뛰어난 논리적 심리서술과 그 시절에 분명 있었을 법한 인물들로 단단하게 ‘이 세계는 진실이다’라고 뒷받침하기에, 읽는 그 순간엔 그 어떤 거슬림도 없었다. 단지 지나고 나서 발췌를 하며 이 사실을 눈치챘을 뿐이다.
이야기가 흘러가며, 박부길이 부디 행복한 인생을 살았으면… 하는 소망을 품으며 읽어나갔으나… ㅋ 어림도 없지! 18살의 박부길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이 세상에 잘못 보내졌다. 나는, 지금, 너무 외롭다.”
그렇게 발음하는 순간, 나는 정말로 걷잡을 수 없는 외로움이 거대한 물결이 되어 나의 전신을 감싸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나는 다시 한 번 그 단어를 입속에서 굴려 보았다. 나는, 너무, 외롭다. 그러자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오려고 했다. 나처럼 이 세상에 잘못 보내진 나의 형제, 나와 동일한 표적을 소유한 나의 동지, 나와 원형질이 같은 단 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중략)… 나는 다리의 난간을 붙잡고 서서 출렁이는 검은 강물을 향해 마구 소리를 질렀다. 슬프고 외로운 짐승의 외마디 울부짖음이 길게 꼬리를 늘이고 수면 위를 달려갔다. -<생의 이면>, 147p 중-
한때 나도 “이 세상”에 왜 태어났을까를 고민한 시절이 있었다. “이 세상에 잘못 보내졌다.”는 표현은 앞서 말한 ‘왜 태어났나’와 같은 이야기가 아닐까. 그 시절의 내가 떠오른다. 물론 다행히도 “원형질이 같은 단 한사람”을 운 좋게 만나며 이 물음은 잠시 멈췄다. 결국 나중에 다시 이 물음은 진득하게 내 그림자에 붙어서 ‘삶이란 도대체 뭔가, 인간이 반드시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존재하는가? 왜 살아야하는가?’라는 형태로 찾아왔으나, 다행히 문학과 철학의 도움으로 그 답을 겨우 찾았다.
하지만 박부길이에겐 그 어떤 “형제”나 “동지”도, “원형질이 같은 단 한사람”도 없었기에 절망했고, 나는 그 절망감이 어떤 지 같은 형태는 아닐지라도, 비슷한 의미에서의 절망을 겪어봤기에, 이 구절을 읽으며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그 이후에 박부길은 첫사랑인 김종단을 만나게 되지만 그것은 예정된 비극이었다.
대인 거부증이고, 세계의 모든 것을 거부하던 박부길이 유일하게 함께한 김종단이라는 여인에게 보여줄법한 태도가 무엇인지는 이 소설을 읽지 않더라도 익히 짐작할만한 그런 것이다. 집착, 편집증적인 태도, 극심한 질투, 강요 등. 박부길은 ‘그녀를 사랑한다’ 보다는 소유하길 원하는, 유아기적인 태도를 보이며, 결국엔 파국으로 치닫는다.
파국 부분에서 박부길의 사랑을 설명하다가, 압축적으로 요약하는 부분은 후반부의 백미였다.
‘아가페는 인간에게 이르는 신의 길이다.’
‘에로스는 신에게 이르려는 인간의 길이다.’’ <생의 이면> - 270p.
‘아가페’가 인간에게 이르는 신의 길인 까닭은 그것이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면서, 그 어떤 대가나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사랑’을 하기 때문에 그것은 ‘신’이 늘 말하는 사랑의 실천이고, 그렇기에 그 길은 신의 길과 다름이 없다. 감상문을 쓰면서 문득 어디선가 읽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말들이 떠오르며, 그의 책을 읽어 봐야하나? 라는 생각이 잠시 드는 대목이다.
반면 ‘에로스’가 신에게 이르려는 인간의 길’인 까닭은, 사랑하는 대상을 ‘우상화’하고 ‘맹목적’으로 추종하면서, 상대방을 그저 온전히 바라보고 이해하기보단 ‘신’처럼 여기면서 상대를 자신의 관념에 끼워맞추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박부길이 김종단에게 요구하고, 그 관념에 맞지 않으면 갑작스런 폭언을 퍼붓고, 심지어 헤어지기 직전엔 뺨때기를 날리며 갈보라는 욕설을 하는 장면까지의 그의 비틀린 사랑은 ‘에로스’적인 사랑의 표상이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물론 감상에서 생략된 박부길의 인생과 심리적 발전단계를 생략했기에, 이 감상만 보면 박부길이 무척 쓰레기같다(사실 쓰레기 맞음 ㅇㅇ).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런 인간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그렇기에 마지막 챕터의 제목인 ‘낯익은 결말’처럼 어쩔 수 없는 결말처럼, 박부길은 김종단과 이별하고, 그 이후의 외로움을 짊어지다가 결국 그 목소리를 감당하지 못해 어딘가 울분을 토해내듯 소설을 쓰며 이야기가 끝난다.
천천히 생각해보면, 이 이야기는 ‘외로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내리기 보단, ‘외로움을 극한까지 겪는 인간은 어떤 모습인가’를 그려내기 위한 소설이다. 그렇기에 읽을 당시엔 몰입하면서 읽어 잘 몰랐지만, 이젠 제법 작위적인 상황설정과 그에 따른 감정(외로움)의 극단적인 고조가 너무 과잉이지 않은가 의심을 품을 만도 하다.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실패작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심지어 작가 또한 서문에 “실패를 예감하면서도 써야 하는 글이 있다. …(중략)… 나는 끊긴 길 앞에서 주저앉는 대신 수렁에 빠지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길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 미련과 집착이 나는 두렵다.”고 했을까.
하지만 난 이 소설이 정말 대단한 소설이라 생각한다. ‘실패를 예감’하면서도 ‘수렁에 빠지는 쪽을 택’해가면서까지, 인간의 외로움이란 주제를 이토록 묵직하게 밀고나간 작품 자체가 처음이었다. 물론 내 독서력이 빈약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난 이 소설을 보면서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했던 상처들과 외로움이 “나와 원형질이 같은 단 한 사람”인 박부길을 보면서 위로받았다.
읽을 때는 글썽글썽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졌을 뿐이던 이 소설이, 왜 감상을 쓰는 지금에서야 울음이 터지게 만드는지 이해하긴 참 어렵다. 아니, 이 소설을 읽고 며칠동안 계속 먹먹한 감정이 들었다가, 실패할 것을 예감하면서도 이 소설에 대한 감상을 반드시 써야만 한다는 어떤 강박은 이미 이 울음으로 해소해야 하는 어떤 예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가 개정판에 부치며 남긴 마지막 말로 이 감상을 마친다.
“지상의 모든 눈물겨운 것들에게 이 작품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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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세계문학을 깊이있게 탐독하는 사람들 중에 한국문학은 그리 좋아하지 않거나 높이 쳐주지않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말하길 한국문학중에서는 이승우작가의 생의 이면이 거의 유일하다싶이 세계고전문학에 들어갈 레벨에 가깝다고 평하는 얘길 몇번 들었었다. 더군다나 나는 작품속 주인공이나 등장인물중에 소설가가있어서 소설가의 삶을 다룬 이야기에 특히나 흥미가 돋는편인데 이 작품에 소설가가 등장하여 더욱 몰입되고 재밌엇다. |
| 최근 읽은 한국 현대 문학 작품 중에 가장 가독성이 뛰어난 작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문장의 흐름이 말 그대로 물 흐르듯이 가는데, 그렇다고 문장이 가벼운 게 아닌 게 참 신기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책을 안읽는 이유가 맥락이 안잡히는 뜬구름 잡는 문장, 무게가 가볍기 그지 없는 문장, 자신의 신념만을 편파적으로/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문장들에 피로감을 느끼는 게 크다 생각하는데 이 책은 처음부터 책이 뭘 말하고자 하는지 기본 컨셉부터 잡고 잘 들어갑니다. 더 읽어봐야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만족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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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있어 과거의 경험은 누구나 유년 시절이라든가 본인의 과거에 대한 아련한 추억, 아물지 않은 상처, 거의 지워졌으나 흐릿하게나마 남아 있는 흉터 같은 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어찌됐든 성인이 된 이후에도 인간에게 남아서 어떠한 방향으로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잊을만하면 다시 살아나고 떠올라 사유를 조금씩 잠식해 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또 잊혀지고, 한 켠에 제껴지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존재에 대한 탐구와 사유가 고통스러운 과정일수도, 행복한 과정일수도 있다. 중요한건 그걸 다시 돌아보는 과정에서 인간 내면에 있는 숨겨져 있던 무언가를 찾아내면서 다시 성장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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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생의 이면 이승우 저 문이당 | 2013년 01월 30일 전에 인터넷을 하다가 우연히 이승우 작가님의 생의 이면이라는 책의 일부 지문을 읽어보게 되었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마음에 들어서 덜컥 샀던 것 같다. 나는 그냥 취미로 소설 한번 끼적여보는 사람이지만 정말 이렇게 쓰려면 다시 태어나도 부족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물 묘사 너무 잘한다... 우선 내게는 유년기가 없었다. 무슨 뜻이냐고 의아해할 필요는 없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도 진정으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112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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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박부길이라는 한 인물의 삶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는 소극적인 인물로서 많은 것을 말로 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소설에는 그의 삶이 파편적으로 나뉘어져 있다.
한 사람의 불우한 유년기와 그로 인한 결핍, 그 결핍으로 인한 굶주림이 낳은 비뚫어진 모정과 우상화.... 그리고 예정된 몰락
이승우는 이것은 박부길이 쓴 소설을 더듬어서 추적해 나간다. 소설은 분명 거짓이다. 그러나 진실을 담고 있는 거짓이다.
그렇기에 이승우는 문학은 작가의 총체라고 말한다. 작가는 문학을 통해서 자신이 말한다. 박부길도 문학을 통해 자신을 말한다. 그것은 일개 개인의 체험에 불과하지만, 개인의 체험이기에 개인적인 체험을 뛰어넘는 문학성을 지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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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4. 이승우 『생의 이면』 [10/10]
이승우 작가는 이 책의 서문과 본문에 걸쳐 ‘모든 소설은 허구이다. 그러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허구이다. 혼돈의 삶에 형태를 부여하기 위한 인공의 혼돈. 모든 소설은 어떤 식으로든 글쓴이의 자전적인 기록.’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는 이야기 속 ‘사실’이란 결국 ‘기록된 사실’이라는 말을 덧붙이는 일도 기어이 잊지 않는다. 제1회 대산문학상 수상작인 이승우 작가의 『생의 이면』은 어느 작가의 삶과 문학을 재조명하여 한 권의 책으로 엮는 기획인 ‘작가 탐구’의 글을 화자가 청탁 받으며 작의 중심이 되는 작가 박부길의 삶을 그의 문학을 통해 화자가 풀어가는 식으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화자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작가 박부길의 연보를 완성하기 위해 그가 집필한 수많은 문학들을 접하며 삶의 궤적을 쫓는다. 그것들을 재구성하는 시점에서는 몇 번인가 박부길을 만나 자신이 재구성한 그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보지만, 박부길은 여전히 자신의 과거에 대해 깊이 침묵한다. 총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된 『생의 이면』은 첫 장인 <그를 이해하기 위하여>에서 정신분열증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와 이후로 유년 시절이 끝나기 전 동네 어귀의 작은 교회당에서 모습을 감춘 어머니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박부길이 걸어온 지난날 중 ‘생의 표면’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박부길이 그토록, 끝없고 한없이 어두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사회로부터 버림받거나 혹은 사회를 버림으로써 훗날 그가 칩거하게 될 어둡고 축축했던 자취방에서 작가 박부길이 탄생하게 되는 시점까지의 이유와 면모를 세세히 그려내고 있다. 내 이해에 기반하자면 <그를 이해하기 위하여>라는 장이 ‘생의 표면’이기에 세 번째 장인 <지상의 양식>과 연이은 <낯익은 결말>에서 이승우 작가는 박부길의 ‘생의 이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두 번째 장인 <연보를 완성하기 위하여 1>은 첫 장과는 다르게 박부길의 생을 화자가 말 그대로 연보 형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연보가 완성되는 시점에 시작되는 <지상의 양식>은 박부길 스스로가 서술자가 되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굉장히 독특한 형식의 소설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만나본 적 없는, 아마 앞으로도 만날 일이 없을 것만 같은 과감하고 독특한 형식의 이 장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동시에 잃은 박부길이 고향(아버지의 묘)에 불을 지르고 떠나며 유년 시절 있었던 모든 낯설고 서러운, 어둡고 척박한, 도무지 기억해내기 싫은 저주 받은 시절의 일들을 잊고 서울로 떠나 마침내 스스로 서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가 힘겹게 서울에서의 고교 생활을 하며 느껴야 했던 진한 성장통과 어둡고 축축했던 자취방에서의 삶은 훗날 그를 작가의 길로 귀결시킨다. 네 번째 장인 <낯익은 결말>은 박부길의 삶 중에서도 가장 혹독한 사랑과 이별의 시기다. 어느 밤 도망치다 마주한 교회 예배당에서 홀리듯 들려온 피아노 선율을 따라 그가 왔고, 그곳엔 그녀가 있었다. 박부길은 사랑을 위해 삶의 진로마저 틀었다. 목사가 되기로 작정한 박부길이 신학대학에 입학한 이야기로부터, 결국 헤어짐에 이르기까지의 일들을 이야기한다. 마지막 장인 <연보를 완성하기 위하여 2>에서 군대를 제대한 박부길이 결국 자신의 지난날을 돌이키며 떠나간 아버지의 존재에 대한 인정, 다시금 어머니를 만나는 과정이나 떠나간 사랑, 결별의 이유 같은 것들이 이제는 슬픔이 남아있지 않은 부질없는 지난 시간으로 남아 작가 박부길이 되어가는 것에 몰두하여 다시 찾은 지난날의 어둡고 축축했던 자취방 한편에서 그는 그 모든 일들을 ‘기록된 사실’로 만드는 일에 전념한다. 그는 일련의 성장 과정을 통해 세상과의 화해를 시도한다. 이승우 작가의 『생의 이면』은 ‘생의 표면’을 정밀하게 그려냄으로 이후 ‘생의 이면’에 대한 더없이 깊은 서술을 완성한 작품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인간의 인격 이면에 숨어 있는 근원적인 실체가 인간을 성장케 한다는 믿음으로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이 책이 ‘기록된 사실’일 수도 ‘선택된 진실’일 수도 ‘지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으나 나는 이승우 작가, 혹은 박부길의 삶을 복기하며 지금까지 만났던 수많은 ‘생의 표면’을 넘어 그 뒤로 숨겨진 ‘생의 이면’에 대해 경험했다. 단언컨대 생애 첫 경험이었으며 『생의 이면』은 수백 권의 책 보다 가치 있는 한 권의 책으로 남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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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오지 않을 흉터들이여. 못다 핀 울음들이여. 애써 그런 것인지, 원래 그런 것인지. 나만의 뒤란에 욱여넣고, 그냥 그렇게 지냈다. 스스로 이 방법이 최선이라 생각했지만, 생이란 그리 착하지도, 가볍지도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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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이면>의 책을 펴본다. 이승우 작가의 관심을 같게 되어 책을 먼저 주문했지만, <사랑의 생애>가 먼저 도착해버리는 바람에 <사랑의 생애>를 먼저 읽게 되었다. 만일 내가 이책을 먼저 읽었으면 어떠했을까? 우선 이승우 작가의 책은 참 설명하기가 애매하다. 섬세해야된다고 해야될까? 마치 인물들의 마음을 해부하듯 들어간다. 이승우 작가의 책을 다 읽어보지 못했지만, <사랑의 생애>와 <생의 이면>의 흡사한 점이 한가지 있다. 그것은 우리가 주인공을 감정에 이끌려 가기 보다는, 어느순간 위로와 이해로 접근한다는 생각이다. 보통 소설들은, 주인공의 감정에 몰입하여 주인공과 함께 소설의 세계로 다가간다. 그러나 이승우 작가의 소설들은 그들을 이해하고 다가서는 느낌이다. <생의 이면>또한 그렇다. 이 책은 흥미롭게도 책속의 책, 마치 한 화가의 전시관에서 작품들을 차례대로 관람하듯 여러 액자들이 가득하다. 한 소설가에게 <작가탐구>라는 출판사의 제의가 들어오고, 예전의 진 마음의 빚으로 이 제안을 수락한다. 그는 박부길이라는 작가에 대해 글을 써야 한다. 소설가는 박부길작가의 연보와 그의 모든책을 읽어 보아야만 했다. 그치만 그 짧은 시간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박부길 작가의 자전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을 추려내어 그것부터 읽기 시작한다. 그는 작품론이나 작가론이 과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의 삶을 연대기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한 작가의 삶이 그의 문학에 어떻게 반영되었는가, 또는 반영되지 않았는가를 보여주는 글을 쓰도록 기획하기로 한다. 박부길과 만남을 통해 그의 이야기를 듣지만 막막하다. 어떻게 어떤 형식으로 글을 풀려 나갈는지 통 감이 오지 않는다. 그의 과거를 이해하기 위해 그의 작품을 다시 꺼내보며 그를 점차 이해해가기 시작한다. 박부길은 어릴적, 큰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박부길의 아버지는 가족들의 기대를 온몸에 받고 있는, 아버지는 공부하러 절로 떠났다. 그래서 박부길은 어머니와 함께 지내는데, 어느날 어머니 마져 떠나버리고 큰아버지 밑에서 지내게된다.
박부길은 유년기에 대해 동심이라는 단어에 대한개념이 아예없다고 답한다. 그가 그 단어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후에 추상적으로 학습된 것이지,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다른책에서는 박부길은 그의 글에 대해 사람이 노출 본능 때문에 글을 쓴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더 정확하게는 위장이며, 사람은 왜곡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고 답한다. 현실이 행복해 죽겠는 사람은 한 줄의 글을 쓰고 싶은 충동도 느끼지 않으며,오직 불행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만이 글을 쓰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그때 그는 펜을 들어 자신의 불행한 현실에 마취제를 주사한다.라 서술하고 있다. 소설가는 박부길의 대한 소설들의 연보를 쫒아 어떻게 그글들이 쓰여졌는지 파해치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내 부끄러움의 뿌리이고, 내 치욕과 증오의 원천이라며,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표현하지만, 다른면에서 그는 부모로부터의 버림때문에 상처받은 아픔이 아닌, 외로움이였고, 혈육에 대한 그리움을 발견한다. 박부길의 큰아버지는 박부길에게 나무라지만 실은 박부길의 아비아닌 아비 노릇을 하고 있었다. 사랑의 방식은 무척이나 차이가 크다. 폭력이 사랑이 될수 있을까? 대개가 폭력은 사랑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치만 내가 아버지로 부터 받은 사랑은 대개가 언어적 폭력, 무관심의 폭력들이다. 실은 그것들이 관심과 사랑이라는 걸 늦게 알았을뿐이다. 큰아버지 또한 가족의 대한 사랑의 다른 방식을 어머니를 통해 들어난다. 겉으로는 박부길의 아버지의 정신병 발병의 책임이 어머니에게 있음을 선고한 결과이지만, 그 이면에는 다른 뜻이 숨겨져 있었다. 그것은 그 책임전가를 시키며, 반대로 어머니의 삶을 찾길 바라는 큰아버지의 배려이다. 어머니의 인생에 대한 배려가 그것이다. 그런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어떠한 말로 위로를 할수 있을것인가? 여기서 전에 <사랑의 생애>리뷰에서도 말했듯 그리스 신화얘기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인간이 과학적 또는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을때 신화를 만들어 낸다. 사람은 현실에 대해 절망하려면 신화에 기대고 싶어한다. 신화는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현실의 부드러운 왜곡이다. 반영이라면 왜곡의 반영이다. 박부길에게는 신화를 통해 어린시절 부모없이 클수 있는 신화가 필요했다. 사실 신화라는 것은,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신화는 사실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에 있으며,여기서는 진짜냐,가짜냐 하는 논쟁은 의미를 잃는다. 우리는 자신이 믿고 지켜왔던 신념을 깨지는것을 두려워 한다. 일종의 방어 본능과 같다. 신화를 믿음으로써 온전히 나를 방어하는 것이다. <생의 이면>에서는 기독교, 종교에 관한 서술들이 많다. 즉 이말은 인간은 자신이 힘들고, 기대고 싶지만 기대지 않으려 할때 그 외로움이 신화에 의존하고 의존과 동시에 믿음으로 바뀐다는것이다. 또한 잘못된 우리의 믿음은 상상력으로 발휘되지만, 자칫 잘못하다간 상상력이 아닌 과대망상에 휩싸인다. 우리는 상상력을 가지고 현실을 초월하고 현실을 비틀기도 하지만,객관적인 현실자체의 부정은 위험하다. 상상력을 통해 현실을 승화되어야 하지, 그 반대여서는 안된다. 그러니 말하는 것은 상상력의 한계가 아니라, 그러니까 상상력의 방향이다. 상상력을 통해 힘을 얻어 현실에 접목을 할필요 있지만, 현실에 치우쳐 상상력으로만 의존한다면 그건 육체적으로 이루지 못하는 만족감으로 착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즉 해결하지 못한 일을 상상력만으로 승화시키다 그게 과해지면, 마치 내가 그일을 해낸것으로 착각한다는 얘기일것이다. *물론 내 해석이 틀릴수 있다. (개인적인 생각이다) 익숙해지면 어떤 자극도 자극이 되지 않는다. 상처를 받으면 그 상처에 익숙해 그건 더이상 상처가 되지 않는다. 박부길은 어느 순간 외로움과 수많은 삶의 상처에 더이상 자극되지 않는 무감감의 존재가 된듯하다. 그는 어린시절 독서를 많이 했는데 게걸스러운 남독의 버릇에 숨은 동기가 있었다면 그것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하나는 피난이고, 다른 하나는 은밀한 수련이다. 동전은 안과 밖으로 나뉘어 있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두 개의 동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동전인 것이다. 이렇게 다름과 동시에 같음이 존재하는 아이러니가 많다. 박부길은 어느순간 외로움에 익숙해지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꺼려한다. 그의 증세는 대인 공포증이 아니라, 대인 혐오증 내지는 대인 기피증이라고 불러야 한다. 사람은 그에게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혐오의 대상일 뿐이다. 박부길은 고등학교 진학후 어머니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다른 사람과 결혼하여 또다른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다. 어머니는 어쩌다 한번 박부길의 집으로 찾아와 밥을 차려주곤, 다시 새로 결혼한 가정으로 되돌아 갔는데 박부길이 학교에서 돌아와 보면 어머니는 언제나 가고 없었다. 어머니는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에 떠났다. 나는,왜그럴까?하는 식의 의문을 한 번도 품지 않았다. 그것은 기차가 레일 위를 달리는 것처럼, 사과나무에 사과꽃이 피는 것처럼 당연하게 여겨졌다. 소설을 읽다보면 당연하게 박부길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그치만 한가지가 의문점이 든다. 박부길에게는 수많은 사람들이 다가왔다. 그치만 그의 방어적 행동이 문제가 된다. 그는 어머니를 만나면서도 어머니를 바라보지만 떳떳하지 못한건 어머니뿐만 아니라 박부길도 마찬가지이다. "오랜만에 보아서 그런지 얼굴이 주름살투성이였다. 입고 온 한복도 후줄근해 보였다. 나는 되도록 어머니의 그런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외면한 채 아이스크림을 아주 천천히 빨았다. 나는 뛰어서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눈물을 훔치며 오랫동안 그곳에 서 있으리라는 걸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어머니의 모습을 차마 보기 힘들어 어머니의 싫은 모습을 연상할수도 있다. 그치만 나는 어머니의 약점들을 박부길은 잘 파악한다였다로도 보인다. 그말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의 약점을 찾아냄으로써, 자신이 사랑받는것을 차단한다는 느낌으로 들리기도 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신을 믿지 않았다. 나의 관심은 늘 피아노 쪽이었다. 오늘에야 비로소 그 십자가가 보였다. 어째서일까? 갑자기 무슨 큰 의미라도 발견한 것 같은 심정으로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곳을 노려 보았다.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도 달무리 같은 광배는 여전히 십자가를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당황했다. 나도 모르게 머리가 숙여졌다. 그는 눈을 감았다. 누군가가 바로 내 앞에 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천천히 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입속으로만 가만가만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조금씩 입술을 움직여 크게 말하기 시작했다. 매우 이해심이 많은 누군가가 아주 가까이서 참으로 진지하게 내 이야기를 들어 주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나의 입을 열게 만들었을까. 그는 내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한없이 풀어 놓았다. 그의 내부에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이 웅크리고 있었던가.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다.별의별 이야기들이 다 나왔다. 그 속에 그런 게 있었는지 그 자신도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 아무에게도 할 수 없었고 아무에게도 해보려 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빠져 나왔다. 어느 순간 그는 감정에 복받쳐 흐느끼기도 했다. 그는 시종 바로 눈 앞에서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고 있는 상대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눈을 뜰수가 없었다. 눈을 뜨면 그 상대가 금세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안타까운 기분 때문이었다. 그순간 그는 깨닳게 된다. 사람들이 왜 기도를 하는지 알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것은 자기 이야기를 마음놓고 솔직하게 늟어놓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자신의 힘듬을 입 밖으로 꺼내놓기란 쉽지 않은일이다. 우리는 그런 자신의 방어적인 태도안에 우리를 가두고 사는 것일지 모른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귀라고 하지 않던가' 사람은 도무지 비밀을 간직하고 산다는것은 참으로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이세상에 비밀은 없다와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욕망중 하나는 나누고싶다는 욕망도 포함된다. 그게 물질이던, 이야기든 간에 말이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 줄 상대, 이제까지 그는 그 상대를 찾지 못했었다. 그래서 늘 나의 일상이 불안하고 외롭고 헛헛했던 것이였다. 사람의 고집,아집이란 참 무서운 것이다. 내가 한번 믿기 시작하면, 그것들은 걷잡을 수 없는 폭주기관차가 되어버린다. 아무리 브레이크를 잡으려고 해도 소용없다. 생각이 한쪽으로 몰리면 다른 출구들이 닫혀 버린다. 이게 아닌데,이럴 필요가 없는데,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 길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 있다. 그곳 말고는 달리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갈 길이 아닌 줄 알면서도 막무가내로 내달린다. 그리하여 도무지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 발생한다. 그런 일이 발생하려는 순간에도 자각이 아주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어렴풋하지만,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다는걸 인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힘을 막으려는 희미한 반동도 일어나기는 한다. 그런 뜻에서 술꾼들이 경험하는 '필름이 끊어지는'상태와 이것은 다르다.단지 필름을 중지시키기가 어려울 뿐이다. 이 또한 우리는 자신을 들킴의 공포에 있다고 생각한다. 박부길의 소설중 일부에서는 그는 어느날 교회에서 만난 사랑한 여인을 어느 한순간의 오해로 폭력을 사용함으로 인해 큰 실수를 하게 된다. 그는 그 이후 그녀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날 밤에 그는 밤을 새워 가며 길고 애절한 편지를 썻다. 그가 그녀를 얼마나 간절하고 절실하게 사랑하는지를 표현하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수사를 다 동원했다. 그의 사랑은 너무 아슬아슬하고 가학적이었다. 그랬다. 그는 사랑을 전쟁처럼 하고 있었다. 인간의 방어적인 태도는 여러면에서도 나타난다. 사랑에 실패하는 사람은 많지만, 사랑에 대한 자신의 능력 부족이 실패의 원인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것은 마치 내가 잘못해서가 아니야라는 자신의 합리화를 깔고 가는 것 뿐이 되지 않는다. 그런 우리의 다른면들을 우리는 언제나 방어적인 태도만 취하는 형태로 삶을 살아간다. 나의 본성이 들킬까봐 두려워한다. 나의 약점을 나 자신또한 잘 알지 못하지만, 그게 무의식의 규칙처럼 반사적으로 작용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들을 배우고 익여야 한다면, 사랑이야말로 그래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사랑을 배우지 않을 때, 종종 사랑은 흉기가 되어 사람을 상하게 한다. 흉기가 되어 사람을 상하게 한다는것은 사랑을 함과 동시에 나를 지키려 애쓰다, 다른사람까지 훼손까지 우리는 하면서도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사랑의 방식들로 각자만의 사랑을 한다. 그치만 '사랑'이라는 한 단어만 사용한다 이세상에는 예수는 한명이지만, 여러 기독교가 존재한다. 차이가 있다면 예수의 삶과 정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느냐에였다. 예수에 대한 이해와 해석의 차이가 그처럼 차별화된 수많은 기독교를 만들어 냈다. 이 또한 사랑과 마찬가지이며, 우리는 어느 방식에 따라 인간의 성향으로 분류된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고향을 금기의 땅으로 맹새를 하고. 금기의 땅이라 맹새를 함으로 돌아가서는 안괴는 곳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금령을 내리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 즉 신을 믿음으로써 의지하려 한다고 말했다. 사랑이란 즉 신앙과도 같다. 어쩌면 우리들은 사랑을 사랑의 대상이 아닌 숭배할 대상으로 여길때가 많다 그 말은 사랑을 숭배한다는것은, 사랑의 의지함으로써 세상을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게 만드는것이다. 그런데 그 사랑이 꺠졌다면? '나는 무엇인가' 나의 존재의 이유가 이세상에서 지워졌다면? 우리는 길을 잃어버린, 마치 신에 대한 배신감처럼 느껴질 것이다. 현실 부정은 그래서 하게되는 이유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상처받은 영혼은 우리는 또 어떠한 선택을 할것인가? 우리는 또다시 우리가 가장 잘 할수 있고, 안전하고, 평화를 느끼던 삶을 찾을것이다. 그방법은 전에 내가 해봤던 일과 다르지 않다. 그는 다시 2년 전의 박부길이 되어 자기 방에 틀어박혔다. 어둠이 제 몸처럼 익숙해지던 어느날 그는 갑자기 원고지를 끌어다 놓고 폭풍처럼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일종의 만회에 대한 욕망이 그의 의식의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하고 추측해 볼 수는 있다. 그가 고백한 것처럼, 그는 여태 자기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어 줄 상대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왜 기도를 하는가.'그것은 자기이야기를 마음놓고 솔직하게 늘어놓기 위해서이다'. 기도하듯 털어놓은 내면의 고백이다. 그는 어느 순간 그간의 의식을 노출하여 공식화함으로써 아버지를 인정하고자 했다. 고립을 다시 택함으로써 성장한 자신과 마주칠수도 있다. 그치만 그 또한 떳떳하지 않다. 위에 말했듯이 모순적인 것들이 많이 존재한다. 우리는 방어함과 동시에 공격함이다. 다름과 동시에 틀림을 말한다. 마치 위의 동전의 양면과도 같지만, 한개의 동전으로 불린다. 그가 해낸 것은 아버지와의 값싼 화해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교묘한 것이다. 죄의식의 되돌림. 아버지는, 그가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 고통당하기 시작한다. 고통을 통해 그는 아버지를 이해하고, 아버지를 껴안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글쓰기는 감춰진 것의 드러내기이다. 그 드러내기는 그러나 감추기보다 더 교묘하다. 그것은 전략적인 드러냄이다. 말을 바꾸면 그는 감추기 위해서 드러낸다. 그가 읽은 대부분 신화들이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감춤으로써 드러냄의 처세술을 실연하는 것이다. 위는 박부길의 소설속의 박부길의 자전적으로 보여지는 소설의 일부를 통해 박부길의 삶을 간추려본것이다. 실은 내가 위에 언급한 내용들은 정리한 내용들을 통해 내가 한편의 소설을 만들어 낸 것이나 다름없는것이다. 박부길이 저런 삶을 살았다고는 묘사하지 않았지만, 그가 여지껏 펼쳐낸 책들을 통해 그의 삶을 유추해 본 것이다. 나타나엘이여, 그대를 닮은 것 옆에 머물지 말라. 결코 머물지말라.나타나엘이여,주위가 그대와 흡사하게 되거나 또는 그대가 주위와 흡사하게 되면 거기에는 이미 그대에게 이로울 만한 것이란 없다. 그곳을 떠나야만 한다. '너의'집 안,'너의'방,'너의'과거보다 더 너에게 위함한 것은 없다. 지드의 산문집 가운데 한 구절인 위의 말이다. 우리는 나와 닮은 것 옆에 머물려고한다.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편안하다고 생각하기에 상처를 받으면서 성장한다고 한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는 사과할 줄 알고, 미안해 할 줄 알기에 우리는 위대한 것이다. 그치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방어적인 태도를 취함을 통해 우리를 지키려고 한다. 우리는 공격적인 면, 방어적인 면 이 서로 공존하는 인간이다. 방어를 택함으로써, 우리는 누군가 훼손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나 그 방어가 우리를 생각하게 한다. 참 아이러니 하다 방어가 곧 공격이 되니 말이다. 이승우작가의 <생의 이면>은 정말 어려운 책이다. 말로 설명하기 힘들정도로 서로가 계속 공존한다. 날카로움과 동시에 둥글다. 최고의 방어는 공격이다. 반대로 최고의 공격은 무엇인까? 그것은 어쩌면 무림의 고수들이 하는 말일 수 있지만, 이런 생각이 든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자가 진짜 고수이다. 공격이란, 배려하고 우리가 이해해 나가야지만 되는 것들임과 동시에 방어적인 태도가 무의식에 나옴을 인정하고 받아 들이는것 아닐까 한다. 감춤으로써 드러냄일 수 있지만, 드러냄으로써 감춤일 수 있다. 나 조차도 이글을 쓰면서 내가 무엇을 쓰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생각은 많지만 주저리주저리 적었다. 어지럽고, 긴 문장을 읽는 분들이 있을지 몰르겠지만, 나 또한 위에 언급한것처럼 무엇을쓰는지 모르겠다가 어쩌면 나의 무식함을 합리화하려는 나의 방어적인 태도인지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