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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뿌리 깊게 내려 온 종교근본주의는 질색이다. 근본주의자들은 자신의 종교가 아닌 타종교에 지나치게 배타적이고 신비주의적 성향이 너무 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주위에는 언제나 종교인으로 넘쳐난다. 나는 때론 그들의 호의에 감사하면서도 대체 ‘나의 종교’는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렇다고 나는 무신론자 또한 될 수 없다. 언제나 마음 한 켠에 하나님께 향한 깊은 사랑과 감사가 넘쳐나고 있는 것을 볼 때, 나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종교인인 것은 분명하다. 어쩌면 나는 현실의 종교와 타협점을 찾지 못해 늘 방황하는 가련한 생물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
그럼 종교는 과학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을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분명 과학의 영역이다. 그러나, 종교는 과학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과학자들이 종교를 과학으로 설명하기 위한 접근은 때론 얼마나 눈물날 정도로 우스운지 과학자들이 고작 몇 억년전의 빅뱅이론을 찾아내고서는 ‘신은 태초에 존재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려고 ’ 할 때마다 인간의 유한한 삶이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한하기에 단 하나의 사실을 ‘앎’에 대해서 마치 그것이 전부인양 치부해버리는 어리석음을 발견할 때마다 난 오히려 즐거웠다. 예를 들어,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한 성경 구절의 한 장면을 과학으로 설명한다고 치자. 그것이 어떻게 과학적 이론으로 설명되어질 것인가 말이다. 뿐만 아니라, 모세가 가른 홍해바다의 기적은 또 어떻게 설명되어질 수 있을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기존의 실증주의적 과학과는 달리, 이 책은 종교적 문제, 즉 기원과 신, 창조의 문제를 사유한다. 기존의 과학이 종교의 믿음 자체를 허상으로만 치부하여 비판했던 것과는 달리 종교가 전유하고 있던 창조, 주체의 기원, 믿음, 소외, 희생과 봉사, 예외, 신성성, 사랑 등의 철학적 사유에 대한 비판이다. 정신분석이론의 틀 안에서 종교를 사유함에 있어 일신교에 천착하여 정신분석으로 접근한 것이 이 책의 특징이다.
라깡뿐만 아니라 프로이트에게도 종교는 다름 아닌 이 세상, 즉 현세와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현세는 근대 과학과 근대 과학이 낳은 주체가 설립된 이후,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만 적절성을 갖는다. 정신분석은 지속적으로 이 지점, 즉 대타자에 대한 질문-어떻게 완전히 텅 비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이라는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가-에 이론적 노력을 기울여왔다.
프로이트의 분석에서 신의 고유한 역할이란 인간의 법을 보증하는 것, 법의 금지적 성격에 과외의 힘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라깡은 프로이트를 좇아서 법은 부정적일 뿐만 아니라 욕망을 구성함으로 긍정적이라고 답한다. 종교는 욕망을 단순히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는 사실 욕망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향유(쥬이상스)는 기표가 아니라는 전제 하에 의식적으로 주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는 우리가 향유를 갈망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줌으로써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를 이해하게 한다. 욕망을 억압하지 않고 우리 삶의 기본적 현실을 깨닫게 해준다. 하지만 이 라깡주의 시각은 근본적으로 종교의 개념과 종교 비판을 변형시킨다. (이는 라깡주의가 진리와 현실의 개념을 바꾼 것과 같은 개념이다. )
라깡은 “프로이드에게 돌아가라”며 엄격하게 욕망을 분석하는 ‘구조적 방식’을 유지하였다. 결국 라깡주의의 이론은 종교로 귀결되지 않으며 라깡의 입장에서 정신분석은 종교에 대한 대안을 제공해 주어야 하며, 이는 프로이트의 비판에 매우 근접한 것이다. 프로이트와는 달리 라깡은 종교에 미래가 있다고, 혹은 적어도 정신분석에서조차 일반적 지평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고 인정하는 듯 보인다. 결국 종교가 갖는 의미는 인간존재가 실재에서 토대를 갖도록 보장해 줌으로써 인간과 인간의 삶에 진정한 의미를 부여해준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라깡의 이론과 접목하여 종교에 대한 철학적 사유는 색다른 종교로서의 의미를 부각시켜주고 있다. 거울 이론과 같이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상상속의 환상과도 같은 종교가 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러한 종교적 배경을 끊임없이 사색해야 한다. 비판과 사색을 하다보면 언젠가는 종교의 본질에 닿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책을 덮는다.
p.s: 이 책은 여덟 편의 글이 실려 있는데 <윤리와 자본, 무에서부터>에서 갑자기 한 페이지에 두 면의 글이 실려 읽기에 매우 어려움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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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죽었다'고 얘기한 니체를 좀 읽은 뒤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좀더 할 이야기가 많았을 텐데, 암튼 이 책에는 '신은 없다'는 논점에서 말한 철학적 고찰이 가득 담겨 있다. 애초부터 '창조론'보다는 '진화론'을 지지하는 나이기에 신이 없다는 저자들의 이야기가 전혀 낯설지 않았다. 또한 종교와 과학은 분명 다르기에 신의 존재 유무를 따지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이 없다지만, 이 책은 철학적 고찰이기에 좀 색다른 관점에서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낯설지만 재밌었다. 다만 내 철학적 깜냥이 미천하기 그지 없기에 이 책의 진가를 제대로 평할 수 없었음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런 가운데 '종교에 맹신'하는 모습에 대한 비판적 논조가 눈에 띠었다. 글쎄, 내 스스로가 그닥 종교인이라고 할 수 없기에 '맹신'의 기준을 감히 논할 수는 없지만서도 일상생활에 불편과 부당함을 느낄 정도로 '믿음'이 과하면 맹신이라고 판단하니 나름 재미난 분석이 가능했다. 먼저 <검은 신>이라 함은 신은 실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욕망'의 다른 이름이라고 라깡이 말했음에서 비롯 한단다. 그래도 여전히 낯설긴 마찬가지만 동양문화권에서는 철학적 고찰 없이도 '욕망의 헛됨'을 부지불식간에 느끼곤 하니 그쯤 되는 표현으로 <검은 신>을 이해하면 좋을 듯 싶다. 내 해석이 틀렸다면 지적해주시길... 한편 종교라는 것이 사람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꼭 필요하냐 하면 그와는 반대 입장이다. 마음의 위안과 치유를 위해 절대자에게 귀의한 것은 아름답게 느끼지만 위안과 치유를 넘어서서 맹신과 의지를 하는 모습을 볼작시면 추하디 추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게 종교란 '필요 조건'일 따름이다. 그런데도 종교가 사회를 좌지우지 하려 들고, 국민을 휘어잡아 길들이려 들고, 과학을 위시해서 대중을 호도하려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환멸을 느끼곤 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난 종교인을 존경한다. 그들의 검소하고 금욕적인 삶에 무한한 존경과 귀감을 느끼는 사람이란 말이다. 허나 종교가 저지른 만행을 역사를 통해 접할 때는 오만상이 일그러지곤 한다. 이를 테면, 중세교회가 그렇고 미션이라는 미명 아래 신음한던 식민지 원주민들의 탄성이 그렇다. 물론 다 지난 역사이고, 지난 역사의 잘잘못을 따지고자 함이 아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 가운데, 잘못된 역사의 전철을 다시 밟지 않으려는 노력도 포함될 것이다. 그런데 종교가 지난 잘못을 반성했다는 소식은 가뭄에 콩 나듯 할 따름이다. 더는 빼도 박도 못할 상황에 처해서야만 찔끔 반성하는 척하고 여전히 근엄한 체하기 일쑤였다. 이제는 한술 더 떠서, <과학의 시대>에 이르렀는데도 종교가 과학을 대신하려고 드는 모습을 보면서 여전히 지난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또 다른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내가 생각하는 참종교의 모습은 이런 게 아니다. 중세 유럽처럼 교회와 교황의 한 마디가 알파이자 오메가로 통하는 권위를 벗어던지고, '낮은 곳으로 임하라'는 그분의 말씀처럼 가난과 아픔을 달고 사는 불쌍한 이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는 모습이다. 또 지독히도 단조로운 삶 속에서 원인 모를 만성고통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는 모습이다.
그런데 특정 종교인들은 그런 모습과는 사뭇 다른 행보를 보여준다. '속세의 욕망'을 벗어던지신 분들이 행동하기에 심히 낯부끄러운 모습 말이다. 굳이 예를 들자면, 영적인 구원을 말씀하시는 분이 '조건'을 달고 '기브 앤 테이크'를 하시려 든다. [오직예수 불신지옥]이란 팻말을 들고 다니시는 분들이나 성경을 들고 다니시면서 '믿음'을 강요하시는 분들이 그렇고, 한 나라의 정치와 경제, 사회를 막론하고 큰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분들이 그렇다. 이런 분들의 '설교'가 어찌 그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아, 입 아파진다.
물론 이런 내용이 이 책에 담긴 내용은 절대 아니다. 외국의 종교에 대한 난해한 고찰을 읽다가 떠오른 '우리 나라의 종교적 문제점'일 뿐이다. 이 책은 <과학과 종교>의 대립적 양상에 종지부를 찍고 둘 사이의 화해를 모색한 책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과학과 종교는 정말 양립할 수 없을까? 신의 존재유무를 떠나 '과학적 믿음'과 '종교적 믿음'을 따로 생각하면 답이 나올 듯도 한데, 그 '잣대(기준)'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아무래도 짧은 소견으로는 '윤리적인 문제'가 둘 사이를 해결 불가능한 상황으로 내몰기 때문이라고 본다. '배아줄기세포'로 복제가 가능해진 시대에 <인간복제를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라는 갈등이 생긴 것도 윤리적인 관점에서 서로 양보할 수 없었던 것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복잡하다. 생각이... 그 분은 달을 가리켰는데, 우매한 군중은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으니 답답하기도 하고...
- 이 리뷰는 <인간사랑>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