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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 피크(Spring Peak)라는 말이 있다. 사계절 중 봄에 사람들이 가장 자살을 많이 하는 현상을 이르는 말이다. 원인은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이야기된다. 하나는 계절의 변화로 인한 충동 증가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 경제적 변동이 큰 시기에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이라고 일컬어진다. 모 유명 가수의 노래 중 "나만 빼고 다 사랑에 빠져 / 봄 노래를 부르고"라는 가사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스프링 피크는 이 책의 제목을 보자마자 느낀 끌림의 원인이기도 하다. 물론 시기상 카소나가 이 용어를 알고 쓰진 않았겠지만, 자살률이 가장 높은 봄에 '자살 금지'를 선포하는 포부가 마음에 들었다. 막상 열어보니 카소나의 이야기는 스프링 피크처럼 현실적인 자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느꼈다. 정확히는 현대 한국의 사회적 문제인 자살과는 좀 동떨어지게 느껴졌다고 해야 하나? 극 중 인물들은 박사의 말처럼 '자살을 망설이는 사람들'이다. 자살을 돕는 공간을 마련한 것처럼 가장한 박사의 목표도 사실 그들을 치유하는 것이다. 사실상 이곳에는 살려는 사람들과 살리려는 사람들밖에 없다. 실제로 극 안에서 아무도 자살에 성공하지 못한다. 그들은 왜 자살을 망설일까. 이곳에 온 사람들이 시달리는 자살 충동의 원인은 현실과 달리 사회 경제적 불평등이 아니라 '사랑' 때문이다. 그들이 견디지 못하는 것은 현실의 고통이 아니라 환상의 불만족이다. 그렇기에 그를 채워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등장하자 즉시 돌아선다. 귀부인과 교수는 서로를 사랑하고, 딸 알리시아를 잃은 남자는 동명이인 알리시아와 만나고, 극 중에서 가장 심각하고 진지하게 자살을 고려하던 후안마저 자신을 바라보는 알리시아에 자살 시도조차 멈춘다(그가 바란 건 형이 아닌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이들의 고통은 열병처럼 찾아와 우연을 계기로 치유된다. 희극적이고 낭만적이다. 사회적 문제로써 자살을 다루는 방식으로 접근하였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그렇다면 카소나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내리기 위해서는 카소나가 이 작품을 집필한 시기를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카소나의 고향 스페인은 내전을 겪었다. 당시 사람들은 무척 고통스러운 현실에 처해있었고, 그것을 희극을 통해 한바탕 울고 웃으며 치유하길 원다. 그들이 원한 것은 현실을 잠깐이나마 잊을 수 있는 공간에서 받는 위로였던 것이다. 카소나의 대중성은 그렇게 발휘된다. 즉, 이 작품을 통해 카소나는 '자살'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 것이 아니다. '삶'의 문제, 삶을 견디는 일에 대해 말하고자 한 것이다. "자살하지 않을 이유"가 아니라 "어떻게 더 삶을 충실하게 살 수 있는가?"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작품은 더 진정성 있는 메시지를 담는다. '육체'라는 자신에게 주어진 물성을 거부하고 영혼 상태를 바라던 귀부인은 식사마저 거부한다. 허나 교수와 사랑에 빠지며 그 우울감은 치유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육체는 속박이 아니라 상대를 감각하고 탐닉하는 기관으로서 영혼의 확장체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사랑이 환상임을 알기에 절망감에 빠진 젊은 남자가 있다. 그는 우연한 계기로 그 환상을 실현할 기회를 얻지만, 동시에 그것이 또 다른 현실에 부딪히리라는 운명을 예감하기에 주저한다. 결국 그는 환상을 그 자체로 남겨둔 채 글을 쓰며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형에게 열등감을 가진 동생 후안은 형의 연인 촐레가 자신의 여자가 되길 바란다. 하지만 촐레는 이미 페르난도를 깊이 사랑한다. 촐레가 사랑하는 페르난도의 모습들이 진실이 아니더라도 그렇다. 결국 촐레는 죄책감 때문에 후안의 곁에 남기로 하지만, 후안은 그를 보내주고 자살하려 한다. 그순간 알리시아가 나타나고, 후안은 알리시아와 함께 퇴장하며 극이 마무리된다. 집착하던 대상에게서 시선을 돌리자 새로운 가능성이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에서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대상에는 언제나 양면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무조건 사랑할 것도, 무조건 미워할 것도 없다. 하나가 나를 떠나도 그 자리에는 또 다른 것이 찾아온다. 하나의 대상에 집착하는 것보다는 여러가지의 사랑할 만한 것들이 좋은 삶을 사는 것에 필요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사람 구원으로 삼지 말라"는 말이 있다. 나는 그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여러 사랑을 구원으로 삼아라". 그러면 행복할 여건은 늘어나고 좌절의 농도는 옅어진다. 그것이 상실과 고통의 시대를 좀 더 나은 방식으로 견디는 법 아닐까. |
| 우연히 이 작품을 알게 되어 연극으로 나왔다기에 찾아보았지만 봄 한정 작품인가보다. 타이밍을 놓쳐서 올해는 보지 못했지만 안타까운 마음 안고 희곡집을 구매해 보았다. 다음에는 꼭 연극으로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하며 미리 작품을 읽어본다. |
| 딱 3월에 읽기 좋은 책인 것 같습니다. 책이 가볍고 금방 읽히는데 담겨 있는 내용은 그리 가볍지 않아요. 그렇다고 심각하지도 않아서 좋은.. 왠지 모르게 위로가 됩니다. 작가의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고, 연극으로도 올라오면 한 번 보고 싶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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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 피크(Spring Peak)라는 말이 있다. 사계절 중 봄에 사람들이 가장 자살을 많이 하는 현상을 이르는 말이다. 원인은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이야기된다. 하나는 계절의 변화로 인한 충동 증가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 경제적 변동이 큰 시기에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이라고 일컬어진다. 모 유명 가수의 노래 중 "나만 빼고 다 사랑에 빠져 / 봄 노래를 부르고"라는 가사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스프링 피크는 이 책의 제목을 보자마자 느낀 끌림의 원인이기도 하다. 물론 시기상 카소나가 이 용어를 알고 쓰진 않았겠지만, 자살률이 가장 높은 봄에 '자살 금지'를 선포하는 포부가 마음에 들었다. 막상 열어보니 카소나의 이야기는 스프링 피크처럼 현실적인 자살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느꼈다. 정확히는 현대 한국의 사회적 문제인 자살과는 좀 동떨어지게 느껴졌다고 해야 하나? 극 중 인물들은 박사의 말처럼 '자살을 망설이는 사람들'이다. 자살을 돕는 공간을 마련한 것처럼 가장한 박사의 목표도 사실 그들을 치유하는 것이다. 사실상 이곳에는 살려는 사람들과 살리려는 사람들밖에 없다. 실제로 극 안에서 아무도 자살에 성공하지 못한다. 그들은 왜 자살을 망설일까. 이곳에 온 사람들이 시달리는 자살 충동의 원인은 현실과 달리 사회 경제적 불평등이 아니라 '사랑' 때문이다. 그들이 견디지 못하는 것은 현실의 고통이 아니라 환상의 불만족이다. 그렇기에 그를 채워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등장하자 즉시 돌아선다. 귀부인과 교수는 서로를 사랑하고, 딸 알리시아를 잃은 남자는 동명이인 알리시아와 만나고, 극 중에서 가장 심각하고 진지하게 자살을 고려하던 후안마저 자신을 바라보는 알리시아에 자살 시도조차 멈춘다(그가 바란 건 형이 아닌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이들의 고통은 열병처럼 찾아와 우연을 계기로 치유된다. 희극적이고 낭만적이다. 사회적 문제로써 자살을 다루는 방식으로 접근하였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그렇다면 카소나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내리기 위해서는 카소나가 이 작품을 집필한 시기를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카소나의 고향 스페인은 내전을 겪었다. 당시 사람들은 무척 고통스러운 현실에 처해있었고, 그것을 희극을 통해 한바탕 울고 웃으며 치유하길 원다. 그들이 원한 것은 현실을 잠깐이나마 잊을 수 있는 공간에서 받는 위로였던 것이다. 카소나의 대중성은 그렇게 발휘된다. 즉, 이 작품을 통해 카소나는 '자살'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 것이 아니다. '삶'의 문제, 삶을 견디는 일에 대해 말하고자 한 것이다. "자살하지 않을 이유"가 아니라 "어떻게 더 삶을 충실하게 살 수 있는가?"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작품은 더 진정성 있는 메시지를 담는다. '육체'라는 자신에게 주어진 물성을 거부하고 영혼 상태를 바라던 귀부인은 식사마저 거부한다. 허나 교수와 사랑에 빠지며 그 우울감은 치유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육체는 속박이 아니라 상대를 감각하고 탐닉하는 기관으로서 영혼의 확장체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사랑이 환상임을 알기에 절망감에 빠진 젊은 남자가 있다. 그는 우연한 계기로 그 환상을 실현할 기회를 얻지만, 동시에 그것이 또 다른 현실에 부딪히리라는 운명을 예감하기에 주저한다. 결국 그는 환상을 그 자체로 남겨둔 채 글을 쓰며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형에게 열등감을 가진 동생 후안은 형의 연인 촐레가 자신의 여자가 되길 바란다. 하지만 촐레는 이미 페르난도를 깊이 사랑한다. 촐레가 사랑하는 페르난도의 모습들이 진실이 아니더라도 그렇다. 결국 촐레는 죄책감 때문에 후안의 곁에 남기로 하지만, 후안은 그를 보내주고 자살하려 한다. 그순간 알리시아가 나타나고, 후안은 알리시아와 함께 퇴장하며 극이 마무리된다. 집착하던 대상에게서 시선을 돌리자 새로운 가능성이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에서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대상에는 언제나 양면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무조건 사랑할 것도, 무조건 미워할 것도 없다. 하나가 나를 떠나도 그 자리에는 또 다른 것이 찾아온다. 하나의 대상에 집착하는 것보다는 여러가지의 사랑할 만한 것들이 좋은 삶을 사는 것에 필요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사람 구원으로 삼지 말라"는 말이 있다. 나는 그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여러 사랑을 구원으로 삼아라". 그러면 행복할 여건은 늘어나고 좌절의 농도는 옅어진다. 그것이 상실과 고통의 시대를 좀 더 나은 방식으로 견디는 법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