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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크래시> 도처에서 자동차를 하나의 섹스 판타지로 사용했고 현대 사회의 삶에 대한 총체적 은유로 사용했으며, 테크놀로지를 근간으로 한 최초의 포르노그라피 소설이다. <크래시>의 궁극적 역할은, 테크놀로지가 판치는 풍토의 언저리에서 인간에게 마냥 그럴싸하게 손짓하며 잔인하고도 에로틱하고 눈부신 세상에 대한 훈계와 경고이다. 크래시(crash)는 ‘자동차 충돌’이나 ‘항공기 추락’ 등의 <사고>를 뜻한다. 새로운 스타일의 TV 과학자 1세대, 컴퓨터 전문가 로버트 본 박사, 그의 목표는 영화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타고 있는 자동차와 충돌하는 순간 극락의 성적 쾌감을 느끼며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은, 여러 차례 충돌 사고를 자행하며 죽음을 예행 연습해왔건만 영화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차에 꽂혀야 할 자신의 차가 여행객을 잔뜩 실은 공항버스 지붕을 뚫고 들어가면서 죽음을 맞이한다.
사람과 자동차의 이종교배(異種交配)가 빚어내는 그로테스크한 공포를 즐기는 본과 발라드. 자신의 육체를 자동차에 실어 스스로 파괴함으로써 얻어지는 성적 욕망과 에로틱한 몽상을 구현한다. 주인공 발라드는, 사고 난 자동차와 충돌하면서 빚어진, 배설물과 파열된 자동차 부품들을 머릿속에 오버랩 시켜가며 카섹스에 심취해 있다. 심지어 덜커덩 지나가는 차의 진동만으로도 오르가슴에 도달하고, 과거의 트라우마 조차 성적 흥분제가 된다. 본과 발라드는 각자 자동차 충돌에서 빚어진 사고현장을 보면서 성적 환희에 휩싸인 가운데 우연찮게 맞닥뜨린다. 본은 마치 관음증 환자와도 같이 자동차 사고 현장을 매순간 카메라 셔터에 담아낸다.
발라드의 자동차 사고로 미망인이 된 여의사 헬런과 죄책감 없는 카섹스를 나누고, 아내 캐서린에게 성적 파트너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개의치 않으며, 심지어 캐서린은 헬런을 계속 만나라고 부추기기까지 한다. 한 공간에서 잠만 잘 뿐 윤리의식이라곤 먼발치에 떠다민 이들 부부의 깨어진 성 의식이 참으로 당혹스럽다. 크래시에 등장한 인물들은 하나 같이 성도착증 환자, 변태성욕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선정적이라는 느낌을 지우게 하는 궁극적인 이유인즉, 노골적으로 드러내놓고 섹스를 얘기하기 때문이며 감정을 밀어내고 기계적인 행동에 기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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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소장하게 되고 읽게 된 것은 이 책의 소개 글을 읽는 중 예전에 한 커뮤니티의 게시판에서 읽은 한 글 때문이었다. 그 게시판의 주제는 절판되어 이제는 더이상 구할 수없는 책들을 자랑 하는 코너였는데, 그 중 하나가 '소돔 120일' 이라는 책에 관한 내용이었다. 나는 소돔 120일 이라는 책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읽지 못했고 더 이상 책을 구할 수 없어서 읽을려고 해도 읽기 쉽지 않다는데 흥미가 일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구하지 못하는 책에 대한 로망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그 글에서 읽어본 대다수의 사람들이 책 내용 때문에 읽기가 힘들었다. 읽기를 권하지는 않는다고 말했지만 이것은 읽어본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 절판으로 인해 더 이상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호기심이 일고 가질 수없는 것에 대한 궁금증이 일기 마련이다. 그것은 책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이 책을 좋아하고 소장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가질법한, 남들이 가지지 못하는 책에대한 소장욕구 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인지 그때 그 게시판의 글을 읽을때 나 또한 '어떤 책이길래?' 하는 물음에 검색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인지 비슷한 주제를 가지는 이 책의 소개글과 소개글에 나오는 '소돔 120일'과 비교하는 글에 흥미를 가지지 않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책 소개글의 마무리에 적힌 '주인공 여성의 심리와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독자들에게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는 말에 이 책을 선택 하게 되었다. 내가 1인칭 주인공 시점의 내면을 다른 이야기를 매우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 책이 내 손에 들어오고나서 나는 책을 들었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해야만했다. 그만큼 책을 읽히는 느낌이 부족해서이다. 이 책이 소설보다는 회고록에 가깝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야기의 개연성이 부족하고 나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 많아서 일것이다.
이 책은 남녀간의 사랑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9주 반 동안의 이 남녀간의 사랑이야기는 사디즘으로 나타난다.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줌으로서 쾌락을 느끼는 두남녀에 대한 내용이다. 하지만 노골적인 성적묘사는 배제 하고 여주인공의 심리적흐름에 따라 이야기가 전계되어 간다. 문체자체는 딱딱 끊기듯 이어지고 있어 주인공의 심리적 변화를 더욱 잘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예전 게시판에서 보았던 사람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있다. 굉장히 넘어가지 않는 책장을 넘기면서, 과연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계속 든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느끼는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잘 읽히는 책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인하프위크'라는 동명의 영화의 소제가 된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할 만하기 때문에 읽어볼 만한 책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책으로 인해 나는 소돔 120일의 소장에 대한 막연했던 부러움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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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인 명성, 아름다운 아내와 두 아이. 스스로 '운 좋은' 인생이었다고 인정하는 '나'는 아들의 연인을 본 순간 영혼이 뒤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그의 영혼을 사로잡은 것은 '동질감'이었다. "잠깐 동안 나는 같은 부류를, 나 같은 사람을 만났다. 우리는 서로 알아보았다."(35쪽) 아들의 연인, 안나를 통해 '나'는 허울 뿐이었던 자기 삶의 실체를 들여다 본다. 세계의 규칙에 순종하며 기계적으로 움직였던 눈가림 인생. 그 안에는 열정이 빠져 있었다. 운명처럼 나타난 안나는 그 결핍된 욕망을 충족해준다. 한편 안나는 스스로도 고백하듯이 "상처 입은 사람"이다. 그녀의 세계는 '애스턴'이라는 상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애스턴은 안나의 친오빠. 안나를 향한 사랑의 고통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끔찍한 기억을 안고 있는 여자는 사랑-소유욕은 고통이라고 생각한다.
"난 당신이 냉혈한처럼 말하듯 '준비해둔' 적 없어요. 일이 그냥 벌어졌어요. 마틴을 만났고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어요. 둘 중 한 사람이 상상할 수 있었던 것보다 관계가 더 깊어졌어요. 그런데 그때 당신은 인생의 은밀한 코너를 돌았고 내가 거기 있었어요. 이 두 가지 사건에 대해 내게는 통제권이 없었어요. 나는 마틴을 만나게 될 줄 몰랐어요. 당신을 만나게 될 줄도 몰랐고요. 하지만 내 인생의 모양을 만드는 힘들은 늘 인지해요. 그런 힘들이 알아서 움직이게 내버려두죠. 때로 그것들은 허리케인처럼 내 인생을 헤집으며 찢죠. 때로는 내 발 밑의 땅을 밀어올려서 내가 다른 땅에 서 있게 하고, 그 힘들이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삼켜버려요. 나는 지진 속에서 중심을 잡아요. 누워서 허리케인이 나를 지나가게 내버려두죠. 난 싸우지 않아요. 나중에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하죠. '아, 적어도 나한테 이게 남았구나. 그리고 그 좋은 사람 역시 살아남았구나.' 난 조용히 가슴의 돌판에 영원히 가버린 이름을 새겨요. 그런 다음 내 길을 다시 가기 시작하죠. 이제 당신과 마틴, 그리고 사실 잉그리드와 샐리까지 폭풍의 눈 속에 있어요. 그 폭풍은 내가 만든 게 아니에요. 내게 무슨 힘이 있고, 무슨 책임이 있겠어요?"(96쪽)
고통의 경험에서 살아남은 안나는 불행한 생존자이다. 이 생존자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무감하다. 애스턴의 죽음이 자기 통제권 밖에 있었듯 다른 사람의 고통 역시 그러하다고 믿는다. 모든 일은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일어난다는 위험한 합리화 속에 산다. 안나의 사랑은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세상을 쉽게 통제할 수 있었던 남자가 이 한 여자만은 통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난생 처음 겪는 황홀한 고통은 남자를 파멸로 몰아간다.
이 작품은 92년 루이 말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한때 큰 논란을 몰고 왔던 영화라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나는 영화를 안 봤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먼저 봤다면 이 소설을 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다소 충격적인 이미지들에서 헤어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스스로 쌓아올린 편견의 벽에 막혀 작품과 제대로 소통하기 벅찼을지 모른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큰 거부감 없이 몰입할 수 있었다. 탁월한 심리묘사 덕분이다. 잠깐 등장하는 인물 처리도 치밀하다. 스치듯 지나는 짤막한 대사에도 그들 심리를 잘 반영하고 있다. 인간의 욕망과 상처를 꿰뚫는 작가의 통찰력이 놀랍다. 여기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우습다. 누구나 고유의 경험을 하고, 그것을 흡수하는 방식도 제각각이다. 이질적인 존재들이 부딪치며 살아가는 이 세계에서 상처는 일상적이다. 다른 사람 존재 자체가 상처일 때도 흔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삶을 통제한다는 생각은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순수한 본능과 욕망을 구체화하려면 일상적인 세계, '나'의 말대로 하자면 '눈가림 인생'에서 벗어나 은밀한 세계로 숨어들 수밖에 없을까. 조심스럽게 동의할 수밖에 없다. 이 '눈가림'의 세계에서는 수많은 잣대와 가치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똥을 누기 위해서 우리는 문을 잠그고 홀로 차가운 변기 위에 앉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이 작품은 약혼자의 아버지, 아들의 연인과 애정행각을 벌이는 두 남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런데 '폭풍의 눈'을 들여다보면 그리 단순하지 않다. 커다란 액자를 걸어놓고 매순간 다른 각도에서 관찰했던 작품 속 '나'처럼, 독자는 다양한 관점에서 작품과 소통할 수 있다.《데미지》는 감춰져 있던 우리 안의 욕망과 맞닥뜨리게 해주는 '고통스러운 선물' 같은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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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미건조의 독(毒), 흘러가는 세월이 그저 호수같이 잔잔하기만 한 인생의 독. 거칠고 험하게, 눈을 뜨면 바로 헐떡거리기 시작하여 평생 목구멍에 풀칠하기 바쁜 인생들에게는 그런 독의 유혹이 자리 잡을 여유가 없다. 이 독은 ‘내가 가만있으면 세상도 가만히 있어주는 삶’으로 기어들어가 순식간에 급작스러운 영혼의 파멸을 이끌어낸다. 그런 소설의 전형이다. 데미지.
저자는 조세핀 하트. 아일랜드 태싱으로 런던 헤이마켓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근무했고,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여러 편의 연극을 제작했다. 영국광고업계의 거물이자 마거릿 대처 총리 공보 담당이었던 모리스 사치와 결혼, 두 자녀를 두었다. 이 소설에서도 똑똑한 부인과 두 자녀가 나온다. 그냥 그렇다는 얘기다. <데미지>는 그녀의 처녀작으로, 1994년 영화화하여 당시 논란과 함께 화제가 되었다. 저서로는 <죄><가장 고요한 날><망각><사랑에 관한 진실>등이 있다. 그의 다른 저서들의 제목도 범상치 않은 듯, 머리복잡한 날 읽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제목들이다.
주인공과 그 아버지의 관계로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자기의 신념과 사상을 주입시키며 아들을 대하는 아버지에게서 주인공은 늘 떨어져나가고 싶어 안달이었고, 반대로 가고 싶어 했다. 부자관계 이면의 부자연스러움과 부적응. 그에게서 아버지란 정떨어지는 기억들뿐이 없었다. 좋은 부인과 나쁘지 않은 결혼 -가장 중요한 게 결여된-을 한다. 자녀를 원했을까? 그러나 슬하에 아들과 딸을 두었다.
의사와 정치가로서의 평화와 안정, 그것이 50이 될 때까지 누리던 그의 삶이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를 찍고 있었다. 그는 평탄한 가정에서 그의 영혼을 이방인이라고 인식한다. 결핍과 부재, 어쩔 수 없는 그것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터져주기만을 기다린다는 듯이.
아들이 좋아하는 여자를 우연히 한 파티에서 만나게 되고, 불꽃은 일어난다. 그렇게 그 여자, 안나에게 붙어버린 그의 영혼, 중년이냐 싶게, 20대인 아들보다 더 열정적으로 그녀의 노예가 되고자 한다. 아니, 완전히 종속되었다.
차를 몰고 런던으로 가면서 모든 게 나를 휙휙 지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체념하고 피해자라는 것을 지켜보면서 아파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 나는 서글펐다. 그래도 이게 전보다 더 사는 것 같은 것을. (p. 172)
아들과의 약혼식 전날 밤, 그들은 따로 정한 아파트에서 만나 정사를 벌이고 이를 본 아들은 충격에 아파트 난간에 떨어져 죽는다. 안나는 떠나고 모든 사실을 들은 아내는 충격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수건으로 피가 터질 때까지 자기의 뺨을 내려친다. 그것을 보는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이 부분이 재밌다.
그녀는 다시 수건을 들고 뺨을 후려갈겼다. 피가 탁자의 유리 상판에 튀었다. 안나의 어떤 이미지가 외설스럽게 내게다가 왔다. 그녀의 얼굴이 늘 살짝 부어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게 그 열쇠일까? 안나는 생명을 구하는 거친 키스를 얼굴선이 바뀔 만큼 살이 여리지 않았다. (p. 212)
아들이 자신의 천인공노한 만행을 보고 그 자리에서 죽었고, 믿었던 남편의 배신과 그로 인한 아들의 죽음이라는 사실 앞에 미친 듯이 자학하는 아내가 앞에 있는데, 그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는가. ‘외설스러운 이미지’ 확실히 정상이 아니다. 독기운에 완전히 빨려 들어간 인간의 모습일 뿐.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잃었다. 하나도 남김없이, 죽을 날을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시간을 걷는 인생을 두 부류로 나눈다면, 살아가는 인간이 있고, 죽어가는 인간이 있다. 그가 삼킨 달콤한 유혹은 살아있는 듯한 ‘발작’을 일으키게 도와주었을 뿐, 그 또한 죽어가는 과정이었다. 늘 그렇듯 독성의 착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외국소설을 읽을 때 역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주목도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과연 낯설지 않은 이름, 공경희 씨의 번역이다. 그의 이력까지 밝힐 필요는 없겠지만, 일단 번역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읽었고 책 전반에 걸친 그녀의 필력은 독자를 꽉! 사로잡는다.
매끄럽지만 얇지 않은 종이의 질감이 좋다. 요즘 책값에 비해 좋은 종이를 써서 제지회사 이름도 확인하게 될 정도다. 표지는 별로다. 꼭 외설에 초점을 맞춘 듯한 이상스러운 디자인은 책의 내용이 지닌 깊이를 격하시키는 듯하다. 영화와 같은 구성, 그런 장치가 들어있다. 그래서 영화로 만들기는 더 쉬웠으리라. 장면간의 흐름이 지루하지 않는다. 삭제가 적절하다. 초반부터 지루하지 않게끔 잘 잘려져 있다.
나는 이 책을 머리나 식힐 겸 읽고 싶었다. 경영분야의 서적을 읽고 있다가 집중력도 떨어지고, 잡념도 많아져서 들게 된 책이다. 허나 머리를 식힐 수는 없었다. 이 책은 독자에게 계속적인 생각의 깊이를 만든다. 삶에 대한, 인간 본성에 대한, 욕망과 그 끝없는 욕심에 대한 독자만의 생각을 이끌어낸다. 주인공의 인생을 만화 보듯 간단하게 인식할 수가 없다. 너무나 본질적인 이야기를 파고들기 때문이다. 대신 몰입을 준다. 이 책이 주는 집중력은 온전히 주인공의 심리로 훅 들어가게 만든다.
사실 제대로 된 사랑을 해 본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사랑과 그 욕망에 미쳐버린 남자의 이야기이다. 여자로서 나는 잉그리드 - 주인공의 부인 -에게 더 큰 연민을 느끼고, 그의 삶을 더 동정해야 마땅할까. 그런데 나는 주인공의 사랑에도 그에 못지않은 동정심을 갖게 되는 것 같다. 사랑은 진정, 사람을 비참하게도 불쌍하게도 만들어버리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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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눈에 반한다는 말엔 외모뿐 아니라 운명적인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심오한 뜻이 담긴 것이리라. 운명이란 그런 것이다. 평생을 기다려온 상대를 서로가 한 눈에 알아보는 순간, 그 떨림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감격적인 운명이 아닌 가혹한 운명도 있다. 여기 위험하고 치명적인 운명에 뛰어드려는 남녀가 있다. 아들의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남자의 이야기인 소설<데이지>. 선정적인 표지는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은밀하고 불안한지 말해주는 듯하다. 한데, 나는 이 표지를 한 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귀를 형상했다고 생각했다. 동명의 영화를 본 기억이 있던가. 생각이 나지 않는다.
화자인 ‘나’는 의사로 정치가로 성공한 남자로 좋은 여자를 만나 안정된 결혼 생활을 유지한다. 부와 명예 남들이 부러워할 가족과 함께 평판한 삶이었다. 나의 삶에 갑작스런 운명, 안나가 들어온다. 평생 지탱해온 삶의 기반을 흔들 여자였다. 묘한 끌림이라 해도 좋을 그런 만남이었다. 나의 내부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나는 적막에 휩싸였다. 갑자기 퍼뜩 정신이 들기라도 한 듯 깊은 한숨이 나왔다. 알아본 데 대한 충격이 거센 물살처럼 내 몸속을 흐르고 지나갔다. 잠깐 동안 나는 같은 부류를, 나 같은 사람을 만났다. 우리는 서로 알아보았다. 그것은 고마운 일이었고 그냥 흘려보내고 싶었다. (…)내 영혼은 안나 바턴에게 내달렸다. 산과 나 사이의 사적인 일이니만큼 자유롭게 영혼이 튀어나가게 내버려둬도 될 것 같았다. 마음이나 정신, 육체, 삶이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을 터였다.’ p.35~ 36 운명의 장난일까. 안나는 아들 마틴의 연인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와 은밀한 관계를 시작한다. 안나를 만나면서 나는 삶의 기준이 달라진다. 그 어떤 것도 안나를 대신할 수 없다. 아내, 아들, 모두를 버릴 각오가 되었다. 안나는 달랐다. 아니, 안나는 알고 있었다. 마틴을 선택해야만 한다는 걸, 그게 현명한 삶이라는 걸 말이다.
마틴은 안나의 영혼을 이해하는 유일한 남자였다. 그녀가 지닌 상처를 안나 스스로 치유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오직 한 사람이 그였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 그 자리에서 자살을 한다. 모든 건 예정된 것인지도 모른다. 비밀은 결국 드러나기 마련이므로. 마틴의 죽음으로 숨겨졌던 그들의 부적절한 관계가 세상에 드러난다. 아내와 딸 가족에게 너무도 끔찍하고 잔인한 일이었다. 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남편을 보고 싶은 아내가 어디 있겠는가.
이성으로 다스리고 억제할 수 없는 욕망의 끝은 어디일까. 불행한 결과를 마주할 수 게 분명한 소설임에도 강한 끌림이 있다. 그건 소설을 감싸는 긴장감과 거부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잘 묘사했기 때문일 아닐까 싶다. 안나를 향한 나의 마음은 마치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는 어린 아이와 같다. 아내에게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남편이 느끼는 감정의 실체가 무엇일까 궁금증을 불러오는 것이다. 특히 내재된 슬픔을 최대한 끌어올려 분출하면서도 고요와 평온을 유지하는 안나와 그녀의 마음을 담은 편지의 내용은 압권이다.
‘나 자신을 당신에게서 떼어내야 해요. 나는 치명적인 선물이었어요. 난 당신이 그렇게 열심히 찾았던, 쾌락이라는 가장 큰 보답을 주는 고통스러운 선물이었어요. 우리는 격렬한 한 쌍이 되어, 우리가 누구며 누구였든 자유롭게 솟구쳤어요. 지구에 온 외계인들처럼 우리는 서로를 발견했고, 발걸음마다 우리가 잃은 별나라의 언어를 새겼어요. 우리에게는 고통이 필요했어요. 당신이 갈구한 것은 내 고통이었어요. 당신은 믿지 않겠지만, 당신의 허기는 충분히 채워졌어요. 이제 당신은 당신은 나름의 고통을 갖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그것이 ‘모든 것, 언제나’가 될 거예요. 당신이 나를 찾아 다닌다 해도 난 거기 없을 거예요. 당신이 이미 갖고 있는 것을 찾아다니지 마세요. 우리에게 주어졌고 이제는 영원히 가버린 나날 역시 ‘모든 것, 언제나’예요.’ p. 252
누군가는 불편하고 잔인한 소설이라 할 것이며 누군가는 영화로 다시 보려 할 것이다. 누군가는 은밀하게 공존하려는 인간 내부와 외부의 처절한 몸부림으로 기억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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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때 간혹 '치명적인 사랑'이란 말을 한다. 여기서 말하는 치명적이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두가지가 있는데 첫번째는 생명을 위협하는 일 두번째는 일의 성공과 실패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주는 일을 의미한다. 앞에서 말한 치명적인 사랑의 뜻은 첫번째의 의미인 생명을 위협할만큼 위험한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함부로 '치명적인 사랑'이다 우린 지금 '치명적인 사랑'을 하고 있다는 표현은 하지 않은 것이 좋을 것이다 그건 상대방 중 한명이 죽을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되니깐 말이다.
하지만 여기 '치명적인 사랑'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 사랑(?)을 한 이들이 있다. <데미지>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안나가 그런 사랑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사랑이라... 아들의 여자를 탐낸 아버지, 그 아버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여자 과연<데미지>에 등장하는 이들의 사랑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데미지>속의 주인공들의 사랑은 도덕적으로 아니 양심적으로 해서는 안되는 일, 있을 수도 없는 일,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만남은 잘못된 만남이었고 주인공에 있어서 안나라는 여자는 그저 한 남자의 욕정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그 결과 얼마나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냐 말이다. 그런데도 이 모든 것이 사랑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내 관점에서는 이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관점이다. 다른 사람들은 나와는 다른 사랑관을 가지고 있을 수 있으니 무조건 내가 옳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주인공은 안나를 만나기 전까지 진정한 자신을 숨기며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저 남들 눈에 보기 좋은 인물로 살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신처럼 철저하게 뭔가를 숨기고 사는 안나를 한눈에 알아보게 되고 자석에 이끌리듯이 안나에게 빨려들어가게 된다. 그녀가 자신의 아들인 마틴의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럼 모든 남자를 파멸로 이끈 안나에게 주인공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진정으로 안나를 사랑한 마틴은 그녀에게 어떤 남자였을까? 그녀의 오빠는? 피터는? 사실 막상 그녀의 비밀을 다 알고나서는 왠지 그녀가 안되보였고 불쌍했고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말에 가서 안나가 한 행동은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
<데미지>란 책은 아는 사람은 알고 있겠지만 예전에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때 영화를 본 기억은 있는데 다른 장면들은 다 생각이 안나고 아주 중요한 충격적인 결말 부분만 기억에 남아서 이 책을 읽게 된거다. 인간의 에로티즘과 욕망을 다룬 <데미지> 솔직히 지금은 <데미지>의 내용보다 더 한 사랑과 더 비극적인 결말이 하도 많아서 지금의 <데미지>가 그다지 충격적이지는 않다. 영화로 만들어졌을 당시의 <데미지>는 엄청난 충격이었으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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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초현실주의 작가 제임스 발라드의 대표작 『크래시』. 인간의 에로티시즘과 욕망을 말하는 문학 시리즈 「에디션 D」의 두 번째로, 인간 내면에 숨겨진 은밀한 욕망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영화 <크래시>의 원작소설인 이 작품은 자동차로 대변되는 테크놀로지와 그것을 페티시로 느끼는 섹슈얼리티의 결합을 소재로 삼았다. 자동차와의 충돌을 통해 성욕을 느끼고, 상대방의 외도를 상상함으로써 오르가슴에 이르기도 하는 인물들. 정상적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성적 쾌감을 묘사하고 있지만, 작가는 이러한 적나라한 표현 속에 은유와 상징을 숨겨놓았다. 강렬한 문체와 비범한 상상력, 기괴한 접근이 돋보이는 문제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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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 하프 워크』를 읽고 인간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남녀 간의 관계일 것이다. 인류가 출현할 때부터 남자와 여자가 만들어졌고, 두 사람의 결합으로 자손이 이어져 대대손손 지금의 모습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남녀 간의 관계 모습이 세계 각 지역이나 국가마다 다 독특한 관습과 함께 다 다르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 어떤 것이 진짜이고, 좋은 것인지 판단하기에는 어렵다는 생각이다. 단지 우리나라에서 생활하고 있는 내 자신으로서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 연애나 선을 보고 결혼을 하면서 하나의 가정을 이루고, 그리고 태어난 자녀들과 함께 가족을 이루면서 생활하는 것이 정석이라는 생각이다. 바로 이런 생각과 자세로 벌써 30년 가까이 생활해오고 있다. 바로 이런데 익숙한 내 자신으로서는 각종 매스컴에서 보도되고 있는 각종 불건한 남녀관계라는 것이 그리 탐탁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요즘 학생들은 물론이고 결혼 전 많은 사람들이 애로에 관련된 각종 자료(테잎, 시지, 잡지, 발간책 등)를 많이 보면서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도 들었다. 물론 호기심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잠시 빠졌다면 이해할 수 있으나 깊게 빠지게 된다면 본인으로서도 결코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에 결코 찬성할 수 없는 내 자신의 생각이다. 얼마 전 여행하면서 지방의 어느 도시 밤거리를 거닐다가 정말 오래 만에 옷을 입는 둥 마는 둥 한 쭉 뻗은 다리를 가진 진한 화장을 한 날씬한 밤거리 여자들이 갖가지 자세를 하면서 밤거리 남자 손님들을 유혹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내 자신도 남자이기 때문에 호기심이 들기는 했지만 내 자신을 억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무난하게 그 거리를 지나칠 수가 있었다. 바로 이런 우리의 마음이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이 책에 전개되는 이야기들도 정말 내 자신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 너무 많았다. 우리가 진정한 사랑이라면 서로가 마음을 진심으로 표현하는 진지한 모습들이 절대 필요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에서 표현된 내용들은 내 자신 같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면이 많았기 때문이다. 처음 잘 때 그는 그녀의 양 손을 머리 위로 올리게 하기, 눈을 가리고, 사랑의 행위를 구걸하게 하고 스카프로 그녀의 양쪽 팔목을 묶고, 머리를 감겨주고 몸을 씻겨주며, 화장도 지어주고, 채찍으로 매질을 하기도 하고, 수갑을 채워 창녀처럼 취급하게도 했다는 점이다. 책에 표현된 적나라한 애정행각은 한 마디로 놀랄 수밖에 없다. 저자가 뉴욕에서 거주하면서 겪은 자신의 연애 이야기를 회고록 형식으로 쓴 글이라고 하니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아직 보지는 못했다. 어쨌든 강열하면서도 소름끼치게 하지만 에로틱한 표현에 정말 색다른 여행을 하고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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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하프위크>라는 영화를 기억하는가? 미키 루크와 킴 베이싱어가 주연으로 나왔던 영화다. 줄거리는 생각 안 나는데 엄청 야한 영화로 기억된다. 영화라는 매체는 시각적 이미지가 강하다보니 원래 의도와는 달리 보이는 것에 더 치중하게 된다. 그래서 원작이 있는 영화인 경우에는 원작을 읽어봐야 작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다. <나인하프위크>는 제목 그대로 9주일 반이라는 시간 동안에 벌어지는 남자와 여자의 성적인 이야기다. 결코 사랑 이야기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육체적인 사랑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로지 성적 욕망에 충실한 모습을 사랑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주인공 ‘나’는 낮 동안에는 지극히 평범한 직장인이지만 밤에는 그 남자와 자극적인 성행위를 즐긴다. 처음에는 두 손을 묶는 정도였지만 점점 그 수위가 높아진다. 이 남자는 놀라울 정도로 여자의 심리를 꿰뚫는다. 처음에는 다정하면서도 세심하게 여자를 배려한다. 함께 있는 동안에는 여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남자의 시중을 받으며 여왕처럼 지낸다. 식사를 준비하고 음식을 먹여주고 목욕을 시켜주고 옷까지 입혀주는 일, 하물며 그녀가 원하면 책까지 읽어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남자가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성적인 부분까지 완벽하게 만족시켜주는 이 남자에게 완전히 빠져든다. 그녀의 낮과 밤은 극과 극의 모습이며, 점점 그 남자와 함께 있는 밤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서서히 남자는 본색을 드러낸다. 마치 여자를 자신의 꼭두각시가 되도록 길들이는 것 같다. 남자는 한 번도 여자에게 강요한 적이 없다. 여자 스스로 남자에게 굴복한 것이다. 개구리를 팔팔 끓는 냄비에 넣으면 놀라 달아날 것이다. 하지만 찬물에 넣고 아주 서서히 물을 끓이면? 가학적이고 변태 성향을 지닌 이 남자가 여자에게 보인 친절과 정성은 쾌락을 위한 약간의 수고로움 정도다. 너무나 섬뜩한 점은 남자의 태도가 실험실에서 개구리를 해부하듯이 세심하고 능숙하며 매우 차분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녀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자신을 남자의 손에 맡긴 것이다. 남자는 여자가 원하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자유를 줬다. 자유를 포기한 것은 여자다. 만약 마지막까지 그들이 모험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영화 <원초적 본능>처럼 끔찍한 장면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나인하프위크>는 단순한 성적 호기심을 넘어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내재된 성적 욕망과 쾌락의 끝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한 번 경험하면 헤어나기 힘든 중독처럼 그 여자는 결국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오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겨우 9주일 반이라는 시간이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버린 것이다. 이 소설은 1978년 작품인데 전혀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다. 인간의 욕망이란 태초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코드가 아닐까. 진정 자유로운 인간은 욕망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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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흥분과 욕구 충족만이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의 전부는 아닐 테지만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과 현대 테크놀로지의 결합이 이처럼 끔찍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니 충격이었다. 자동차 사고를 통한 충격과 상처의 아픔에서 더 큰 성적 흥분과 욕구 충족의 희열을 발견한 등장인물들의 사고방식이 문장으로는 이해가 되어도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기가 너무나 힘들고 불편해서 읽는 내내 거북하고 고통스러웠다.
이 소설은 스토리적인 재미보다는 가학적이고 피학적인 인간의 욕망이 충족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는 점이 특징인 작품이다. 사고 현장의 끔찍하게 훼손된 시신이나 남은 흔적, 파괴된 자동차 부품들의 형태를 보면서 테크놀로지가 개입된 인간의 성행위를 더 높은 단계의 쾌락의 열쇠로 여기고 심지어 그 궁극의 경지를 그런 상태에서 죽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습들은 인간의 자기파괴적인 상상력의 한계가 어디까지 그 폭과 깊이를 더할 수 있는지 가늠조차 하기 힘들게 한다.
올바른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정상의 범주를 넘어서는 욕구 충족의 수단들이 인간 대 인간을 넘어 인간과 기술의 산물들과의 결합으로까지 이어진다는 것은 향후 인간의 건전한 욕망의 정의가 상당히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예상해볼 수 있게 한다. 예전에는 금기시되었던 많은 것들이 오늘날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처럼 말이다. 세상이 어떻게 변해갈지 정말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극단적인 일들이 계속해서 새롭게 드러나고 있으니... ‘크래시’는 오늘날 우리가 점점 인간적인 것을 잃어가고 있는지 아니면 새로운 요소들이 포함됨으로써 인간성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한 것인지를 묻고 있는 문제작임에는 틀림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