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창 문학고전에 맛을 들였던 지난 겨울부터 읽기 시작했던 책 중에 마침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가 있었다. 사실 언젠가부터 문학에 흥미를 잃은 후로 그냥 작가 이름과 제목만 들어봤을 뿐 읽지 않은 책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책을 고른 기준이 '유명한 작가의 책'이었더랬다. 누가 보면 참 무식해 보일지 모르는 방식이지만 그렇게라도 읽어야겠다고 결심한 게 어디냐고 위안을 해본다. 그래서 까뮈의 <페스트>를 읽으면서도 그를 유명하게 해준 <이방인>을 꼭 읽어보고 싶었다. 도대체 어떤 작품이기에 지금까지도 그 많은 사람들이 까뮈하면 이방인을 자동으로 떠올리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읽은 지 한참이 지난 지금도 책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 어땠느냐고 묻는다면, 참 이상하다고, 뭐라 표현할 수 없지만 낯설기도 하고 겉도는 느낌이 든다고 말하고 싶다. '이 소설은 작품 자체가 이방인이다'라고 한 사르트르의 말이 어렴풋이 이해된다고나 할까. 흔히 소설을 읽으면 등장인물 중 하나에게 나를 대입해서 나도 모르게 일희일비하게 되는데 이 작품은 끝까지 인물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만든다. 특히 주인공은 그 어떤 독자도 자신에게 동화되지 않기를 바라는 듯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자신조차도. 자신의 일을,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면서도 마치 다른 사람의 것인 양 말하는 방식이 정말 낯설다고나 할까.
1부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만 하고 있는데다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것도 아닌, 그야말로 무미건조한 주인공의 삶을 나열하고 있어서 무슨 이야기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엄마가 돌아가셨고, 장례식에 가서도 의례적인 일을 기계적으로 하고 돌아온 주인공을 보면 감정이 없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비인간적인 범죄가 일어날 때마다 언론을 장식하는 사이코패스랑 비슷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게다가 자신이 살인을 저지르고도 변명하려 하지 않는다거나 마치 남의 재판 구경하듯 하는 행동은 상식적으로 낯선 사람의 모습이다. 즉, 이방인의 모습인 셈이다. 어디에도 적극적으로 속하지 않는, 속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 주인공 뫼르소가 결국은 자신이 저지른 살인죄가 아니라 사회적 관습법을 무시한 다른 죄목으로 사형당하는 모습 또한 이방인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그래도 뫼르소의 친구들이 모두 그를 변호하기 위해 애쓰는 걸 보니 뫼르소가 잘못 살지는 않은 듯하다. 곳곳에 사회비판적인 내용을 품고 있어서 여전히 사람들에게 읽히고 분석된다는 까뮈의 <이방인>. 사르트르는 뫼르소에게서 까뮈의 모습을 보기도 하고 뫼르소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거창하게 해석했던데, 문학에 문외한인 나는 그저 참 낯설고 독특한 주인공을 만난 것으로 만족한다. |
|
고전이라는 명성과 이방인이란 독특한 제목에 끌려 읽어 보았던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 10대인 난 '이방인' 이란 낯선 소설을 읽으며 과연 무엇을 느꼈을까. 아마도 따분하고 이해하기 힘든 난해한 소설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10대란 나이는 주인공을 조금이라도 이해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였을 수도 있다. 양로원에 있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고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청년 뫼르소는 우연히 직장 동료였던 마리를 만나 유쾌한 영화를 보고 해수욕을 즐긴 후 사랑을 나누고, 변심한 애인에게 복수하려는 이웃의 계획에 얼덜결에 동참하게 된 그는 강렬한 빛과 태양의 열기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품에 있던 권총의 방아쇠를 당긴다. 법정에서 태양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다는 그의 진술이 그당시의 내겐 도무지 이해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 참이 지난 후, 오기로 다시 펼쳐든 '이방인' 은 새내기 대학생이였던 내게 다시금 좌절을 안겨 주었으니 카뮈의 '이방인'은 내게 더욱 낯설고 멀게만 여겨졌다. 진실을 위해서는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뫼르소라는 이방인과 진실 사이에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어리둥절하기만 했었다. 그러나 지금, 마흔을 훌쩍 넘긴 내게 이방인은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 온다. 엄마의 죽음을 객관적인 사실로 받아들이는 뫼르소는자신의 죽음 마저도 어쩔수 없는 있는 현실로 받아들인다. 아랍인을 죽인 것은 우발적인 사고였다고 자신을 변호해 볼 수도 있었겠지만 오히려 그는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느낀다. 법정에선 그는 진실을 왜곡해 자신을 도우려는 변호사도, 하느님을 통해 뫼르소를 감화하려는 재판관도, 그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찾아온 사제 마저도, 뫼르소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뫼르소 역시 주변 세계를 이해할 수 없긴 마찬가지다. 이렇게 뫼르소는 자기 자신의 사건에서 소외되고 만다. “어처구니없게만 여겨지는 죽음에 대한 거부, 자기 스스로의 밖으로 쫓겨난 듯 자기 자신에 대해 느끼는 낯섦, 그리고 이 세계의 불투명한 어둠, 부조리는 송두리째 여기에 담겨” 있는 것이다. 타인에 의해 내려진 사형 선고를 받으며 뫼르소는 세상에서 ‘이방인’이 되어 버린다. 사회 속에 녹아들지 못하고 현실에서 소외되어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반복되는 일상의 지루함과 나른한 오후의 권태는 참을 수 없는 시간이며 외로움이기도 하다. 인간은 누구나 죽기 마련이고 어머니 역시 언제고 죽을 수밖에 없다면 그날이 오늘이건 내일이 되었건 별반 다를 게 없다는 뫼르소의 생각이 그리 이상할 게 없다. 죽음을 앞두고 비로소 마주하는 자신의 실존적 체험을 마치 남의 일인양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는 뫼르소와 말없이 죽음을 받아 들였던 사형수 소크라테스의 모습이 자꾸만 겹쳐지는것은 죽음과 정면으로 대면한 이 둘은 모두 사회적 통념이나 관습에서 벗어 났기에 사람들에게 지탄 받고 죽임을 당하였다. 이들의 행위나 죄보다 규범을 어긴 이들의 행동이 사회구성원들의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이들은 죽음에 초연한 모습으로 자신들의 옳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들이 새벽녘에 온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결국 나는 밤마다 그 새벽을 기다리며 지낸 셈이다. 감자기 당하는 것을 나는 언제나 싫어했다. 내게 무슨 일이든 생길때면 거기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편이 더 나았다. 그 때문에 나는 마침내 낮까진 조금 자 두었다가 밤에는 꼬박 새벽 빛이 천장 유리창 위에 훤히 밝아올 때까지 꾹 참고 기다리게끔 되었다. 가장 괴로운 때는, 그들이 보통 그 일을 하러 오는 때라는 것을 내가 아는 터인 그 의심쩍은 시각이었다. 자정이 지나면 나는 기다리며 지켜보고 있었다. 나의 귀가 일찍이 그처럼 많은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고, 그렇게도 조그만 소리를 분간해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그 시기 동안 줄곧 나는 어지간히 운수가 좋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발소리는 한 번도 들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p134) |
|
분명히 읽었던 책이다. 학부 리포트 제출도 했던 기억도 있다. 수년이 지나도 유독 햇빛이 강한 여름날에는 먼저 생각나는 책이다. 바로 그 책, 까뮈의 <이방인>이다. 책의 자주 언급되는 바다가 내 주위에 찾아보기 힘들지만 땅바닥에 내리 꽂히는 듯한 강한 햇빛으로 인식되어 이방인= 햇빛 으로 연관지어 생각나는 책이다. 뺨을 때릴 듯한 햇빛의 강렬함,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눈부신 햇빛, 괴로울 정도로 강렬한 열기, 벌겋게 작열하는 햇빛, 바다가 작은 파도들의 빠르고 억눌린 호흡으로 헐떡거리는 강한 햇빛까지 ..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베스트에 올라있고 다른 번역으로 읽고 싶은 마음에 다시 읽게 된 <이방인>(2013. 3 보물창고)는 기억과 달리 전혀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1부의 가장 큰 사건이자 주인공 뫼로소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일은 어머니의 장례식에 다녀온 일이 있은 후 벌어진 아랍인을 총으로 쏘아죽인 일이다. 그를 불행의 문으로 들어가게 했던 네 발의 총성이자 노크소리였다. 2부에서는 그의 감옥생활과 재판과정 그리고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심리변화를 주로 다루고 있다.
20대때 읽었던 나의 가장 의문점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 여자 친구와 수영을 가는 뫼르소의 처음 행동이다. 어떻게 어머니가 세상에서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슬픔에도 덥다는 이유로 바다에 갈 수 있었는지 말이다. 햇빛에 대한 작가의 묘사가 참 다양하다는 것은 나중에 그가 살인은 저지르게 된 원인이었다고 자포자기한 듯한 진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번에 다시 읽게 된 뒤 나는 그가 한 행동하나를 놓치지 않고 읽으려고 노력했다. 마치 사건의 원인 같은 것을 찾는 탐정의 입장이 되보려 했는지도 모른다.
원인은 찾을 수 없었고 그저 2부에서 벌어진 재판정의 모습만이 우스꽝스럽기만 했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죄인이기에 우발적인 사고임에도 (아랍인은 칼을 소지 하고 있었고 마침 그늘을 찾아 멀리 간 곳에 그가 누워있었으며 그가 칼을 먼저 내 보임으로써 자기방어의 행위인 것은 어느새 묻혔다) 그에 대한 전혀 다른 해석으로 시종일관 계속되는 것이 아이러니하기만 했다.
신을 믿지 않는 것도 인간이라면 모두 똑같이 행동을 해야하는 것인양 치부하는 사회적인 편견이 한 사람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끝내 폭발하는 뫼르소의 행동이 조금 이해가 된다.
쓰여진 지 오래 된 글이라 믿어지지 않을 만큼 짧고 강렬한 문체와 사실위주의 서술이 처음 읽을 때는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은 여전했다. 하지만 청소년을 위한 번역의 힘이 한 번 더 힘을 발휘해서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것도 쉽게 풀어 놓아 한층 읽기에 부담을 덜어주었다. |
|
프랑스의 유명 작가 알베르 카뮈, 그리고 그의 작품 << 이방인 >>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한번쯤은 다 들어 보았을 것이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로 들어 보았지만 끝까지 다 읽은 적이 없었기에 이번 기회에 끝까지 다 읽어 볼 요량으로 책을 펼치고 읽기 시작하였다.
알제의 소박한 동네에 사는 평범한 직장인 뫼르소, 양로원으로부터 어머니의 부고를 전해 받게 된다. 나도 또한 아버지를 비롯한 어머니를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하늘나라로 머나먼 여행을 떠나 보냈던 경험을 갖고 있었기에 어머니의 부고를 받은 뫼르소는 놀람과 슬픔을 어디에 견줄 수 있을까? 또한 얼마나 놀랍고 슬펐을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뫼르소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덤덤하게 장례를 치른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수영을 하러 갔다가 만난 전 직장 동료 마리와 데이트를 즐기는 등 우리의 정서와는 알맞지 않은 행동을 보여 준다. 하지만 같은 아파트에 살며 몇번의 왕래가 있던 레몽을 도와 주다가 아랍 인을 별다른 이유 없이 총으로 쏴 죽이는 일, 한마디로 '살인'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된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살인. 살인죄를 이유로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도 그는 사건으로부터 소외되며 이야기는 전개된다. 그가 저지른 '살인' 보다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고 장례를 치르고 마리와 함께 영화를 보며 데이트를 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며 점점 이방인이 되어 간다.
이 작품은 출간 후 지금까지 총 750만 부 이상 판매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고 있다. 현재도 매년 프랑스 내에서만 평균 20만 부가 판매되고 있으며, 전 세계 100여 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수많은 독자들을 만나고 있는 ‘살아 있는 고전’이라고 한다. 여고시절에 읽었던 맛과는 사뭇 다른 맛이 있지만 아직까지도 책을 읽은 느낌을 말로 표현하기에 2% 부족한 감은 없지 않았지만 색다른 기분으로 프랑스 작가의 책을 읽을 수 있어 좋았다. |
|
무심한 듯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뫼르소. 그는 여전히 한결같은 모습으로 나를 다시 찾아왔다. 퉁명스러운 말투, 일상에 대한 무관심,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등의 그의 모습은 참 한결같다. 엄마의 죽음 앞에서도 그는 울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방인]은 주인공 뫼르소의 모습을 잘 대변해 주는 단어인 듯 하다. 저자인 알베르 카뮈가 그러했던 것처럼 뫼르소 또한 이방인의 모습으로 그렇게 살아간다. 일상이 흘러가는대로, 안될것도 없다는 생각으로 모든 일을 시작한다. 그게 그의 방식이다. 그 누가 그런 그의 모습에 삿대질한다 해도 상관없다. 그가 전혀 게의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그리고 타인으로부터 이방인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탕....탕, 탕, 탕, 탕!!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살인. 살인죄를 이유로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도 그는 사건으로부터 소외되었다. 그의 '살인'에 관심을 가지는 자는 아무도 없었으며, 지금껏 그의 이상하리만큼 이해되지 않는 무심한 그의 행동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다. 그것이 상대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점, 장례를 치르고 마리와 함께 영화를 보며 데이트를 했다는 점 등을 미루어 그를 처형하기를 바랬다.
판결의 모든 상황이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그는 결코 항변하지 않는다. 변한 건 없다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죽음도 그렇게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어머니의 죽음과 아랍인의 죽음을 그렇게 받아들인 것처럼 말이다.
어머니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 앞에서 '우수에 잠긴 휴전'을 느끼고 세상의 다정한 무관심에 마음을 열었던 뫼르소. 그는 그렇게 죽음을 받아들였다. 밤의 경계에서 사이렌 소리가 그와는 영영 상관없는 세계로 끌어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마지막까지 덤덤하게 모든 현실을 받아들였다.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냉소적인 태도는 한결같았다. 이방인의 삶은 그렇게 끝이 났다. |
|
이방인 L'etranger 클래식 보물창고 18 알베르 카뮈 지음 보물창고 - 소설 '이방인'은 주인공 뫼르소가 엄마의 죽음을 듣고 요양원에 가게 되면서 시작된다. 엄마의 죽음 앞에서 뫼르소는 눈물도 흘리지 않고, 담담히 그 상황을 직시한다. 그는 건물 관리인과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폈다. 뫼르소는 엄마와 절친이였던 페레즈 씨를 만나고, 다시 집으로 들어온다. 그는 예전에 같이 직장에서 일했던 마리와 만나고, 그녀와 즐거운 주말을 보낸다. 그리고 일요일 밤, 그는 생각한다. 변한 건 없다고. 그리고 다시 일상 속으로 들어간 뫼르소는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레몽과 친구가 된다. 왜냐하면 안될 것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레몽의 이야기를 들어주게 되고 그의 정부에 대해 알게 된다. 그렇게 뫼르소는 마리와 함께 레몽의 초대를 받아 별장에 가게 된다. 그러나 그 곳에서 레몽의 정부의 오빠 무리들, 아랍인들이 나타나고 뫼르소, 레몽, 그리고 별장의 주인인 마쏭은 아랍인들과 결투를 벌인다. 그러다 뫼르소는 태양이 작렬하는 날, 그곳에서 아랍인 한 명에게 총을 쏜다. 그는 여러 심문을 받지만 예심 판사들이 그의 '살인' 보다는 엄마의 죽음에 눈물 흘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더 관심 있어 한다는 걸 깨닫는다. 5개월동안 감옥에 갇혀있던 뫼르소는 재판에 들어가게 되지만, 재판은 그에게 불리하게 흘러간다. 양로원 원장과 건물 관리인의 증언. 마리와의 데이트까지...... 어느덧 그는 아립인을 계획적으로 살인한 범죄자로까지 몰린다. 결국 그에겐 처형이 확정된다. 그렇게 독방에서 처형만을 기다리고 있던 뫼르소에게 부속신부가 들어온다. 여태까지 담담한 모습을 보인던 뫼르소는 그의 말에 폭발한다. 신부가 나가고 난 후, 잠에 들어버린 그는 일어나고 사이렌 소리를 듣는다. 그러면서 오랜만에 엄마를 생각하고, 처음으로 '세상의 다정한 무관심'에 자신을 열어본다. 처음에는 잔잔하다 못해 지루하게 흘러가다가, 1부 끝에서부터야 이 책에서 폭발이 일어난다. 바로 주인공 뫼르소의 살인. 뫼르소는 제목처럼 이방인다. 엄마의 죽음 앞에, 그는 다른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오열 대신, 담담하게, 일상으로 되돌아 간다. 그리고 역시 죽음마저 담담하게 기다린다. 이 소설은 알베르 카뮈에게 노벨평화상을 안겨주었던 작품이였다. 특히 내게는 큰 충격을 준 책이였다. 이방인이지만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는 뫼르소가 갑자기 살인자가 되버리는 과정이 한마디로 멘붕상태로 빠지게 만들었다. 이방인에는 카뮈가 평생동안 고민하던 '연대의식'과 '고독'이 잘 나타나 있는 것 같다. 2013.3.10.(일) 이지우(중3)
|
|
화려한 **역 거리를 걷는다.쌍쌍의 젊은이들이 모두 행복한 얼굴로 재잘거린다.화려한 내온싸인 사이로 자본주의가 작렬한다.그런데 그 거리에는 자본주의의 치명적인 약점인 군중속의 고독이 유령처럼 어슬렁거린다.모두 화려함으로 무장했지만,그들은 본질적으로 고독하다.제 속을 들여다보기 두려운 그들은 고독을 저만치 멀리 밀어버렸다고 생각한다.하지만 뒤돌아보면 고독은 한 발짝 떨어져 어디든 쫒아오는 그림자와 닮았다.
어쩌면 인간은 가장 밝게 빛나는 햇빛 속에서 가장 고독할 수도 있다.화려함 뒤에 고독이 부유하는 것처럼..그 어느때보다 경제발전을 이룩했다고 자부하는 지금이 바로 우리시대의 고독을 말하는지도 모른다.현대사회의 대명사는 부조리함이다.그 어떤 것으로도 뭉뚱그려지지 않는 부조리함을 현대인은 안고 살아간다.부조리함은 우리를 구토나게 만든다.인간은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에 구토한다.제 몸이 거부하는 까닭이다.그래도 현대인은 구토나는 삶을 수레바퀴를 멈출 수가 없다.우리는 관념과 상식,제도라는 수레에 올라탔기 때문이다.
엄마가 죽었다.그런데 뫼르소는 엄마의 죽음에 아무런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그는 엄마의 죽음에 이방인이다.엄마가 죽은 날 그는 커피를 마셨고,담배를 폈다.그 다음날 애인과 함께 보냈다.그의 행위들은 상식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부조리함으로 가득차있다.그는,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눈부신 햇빛 아래서 친구와 물놀이 하다가 우연히 아랍인을 죽인후,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다.
내가 이끌어왔던 그 부조리한 삶 내내,내 미래의 깊은 곳으로부터 모호한 숨결이 내게로 올라왔다.아직 도래하지도 않은 세월들 속에서 제안 받았던 모든 것들을, 그 숨결이 지나가면서 모두 다 균등하게 만들어 버렸다.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뭐가 중요하며,그의 신,우리가 선택한 삶들,우리가 고르는 운명들이 뭐 중요하단 말인가.단 하나의 운명만이 바로 나를 선택할 테고,그리고 나와 더불어,그처럼 자신을 나의 형제라고 말하는 무수한 특권자들을 선택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p144)
<이방인>을 처음 읽었던 때가 언제였지? 내 기억의 창고에서는 '햇빛'이라는 단어만 아지랭이처럼 가물거린다.그 햇빛은 사르트르와 자꾸 겹친다.엄마의 죽음을 대하는 뫼르소에게서 세상과의 단절감이 보인다.뫼르소의 단조롭고 건조한 삶은 현대인의 일상과 닮았다.햇빛이 너무 강렬해서..수직으로 내리 쬐는 태양..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눈부신 햇빛..빛의 강렬함은 소설 속에서 뫼르소를 충동으로 이끄는 역할을 한다.그것은 도처에 존재하는 우연이다.
뫼르소의 살인은 심리적인 살인으로 해석 할 수도 있다.네트워크로 연결된 현대인은 소통이 넘치는 시대에 살고 있다.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소통이라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뫼르소의 살인은 뒤르껨의 <자살론>에서 말하는 사회적인 타살과도 같은 의미로 다가온다.엄마의 죽음 뿐만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조차 이방인으로 존재하는 뫼르소를 나는 이방인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나와 상관없는 부조리한 행동일 뿐이라고..방관자로 존재하는 나는 또 다른 차원의 이방인이다.나는 방관자로 존재함으로서 수많은 뫼르소를 양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
아마도 타의에 의해 이 책을 읽었다면 나는 이방인 속 뫼르소를 보고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며 비난하기에 급급했을 것이다.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전해 듣고도 별 다른 반응이 없었으며 어제와 동일하게 똑같은 날인 듯 장례식을 치르는 그를 보면서. 그리고 나서 옛 직장 동료였던 여자를 만나 코미디 영화를 보고 하루 밤의 정사를 나누고 그러다 어느 날 해변을 거닐다 아랍인을 총으로 살해하는, 그것도 우발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담담히 몇 발의 권총을 쏘는 그를 보면서, 그렇게 막을 내리는 1부를 보면서 아니 아마도 보기도 전에 닫아버렸을 것이다. 나는 두 시에 버스를 탔다. 날씨는 무더웠다. 나는 늘 그러듯이 셀레스트네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식당 사람들은 모두 몹시 마음 아파했고, 셀레스트는 "어머니는 오직 한 분뿐인데."라고 말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들은 문까지 따라 나와 배웅했다. -본문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라고 시작하는 소설의 첫 마디를 보면서 그 동안 수많은 서평들이나 이방인에 대한 칼럼과 분석한 글들을 보며 이방인이라는 책이 이렇게 시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눈 앞에 마주하게 된 뫼르소와의 첫 조우에서 여전히 대체 이게 무슨 반응이람, 이란 생각으로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올해 양로원에 거의 오지 않은 데는 그런 이유도 약간 있었다. 버스 타고 가서 표를 사고 두 시간 걸려 여기 오는 노력은 차지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내 일요일은 잡아먹기 때문이기도 했다. -본문 무심하다는 말 한마디로 그의 모든 것을 설명하기에도 부족했다. 과연 뫼르소는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대체 이 작품은 어떠한 면에서 알베를 카뮈를 전세계적인 작가의 반열로 오르게 했다는 것인지에 대해 읽는 내내 이방인, 뫼르소, 알베르 카뮈, 부조리 이 4개의 카테고리를 조합하고 이해하기 위해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들판에 가 본 지 오래된 나는 엄마 장례식이 아니었다면 산보를 하면서 아주 즐거웠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본문 엄마의 죽음에서도 별 다른 슬픔을 느끼지 않고 그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들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는 그를 보면서 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라는 생각과 보통 사람이라면 소리 내어 울고 죽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의 시간과 그 일련의 과정들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방인 속의 뫼르소는 어디에서도 내가 생각하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들을 나타내지 않았다. 몇 년 전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도 나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내 자신이 운다는 사실을 인식하지도 못하게 멍하니 계속해서 할머니의 죽음과 산 사람들 사이에서 장례 절차를 바라보고 있던 그 순간, 그리고 그 모든 절차를 마치고 장례식장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나는 그 순간 배고픔을 느끼는 내 자신에 혐오감을 느끼며 그럼에도 밥알을 삼키고 있는 나를 보면서 그 모습에 또 다시 울컥했었는데 뫼르소는 그 어디에서도 인간다운, 인간미 넘치는 그 끄나풀조차 던져주지 않고 있었다. 나는 내 이마에서 태양이 심벌즈처럼 울려 대는 것밖에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희미하게, 여전히 내 바로 앞에 있는 칼에서 분출되는 번쩍이는 양날 외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 불타는 검이 내 속눈썹을 물어뜯고 고통스런 내 눈을 후벼 대는 것 같았다. 나의 온 존재가 긴장했고, 내 손은 권총을 꽉 쥐었다. 방아쇠가 굴복했고, 내 손은 권총 자루의 반들반들한 배에 닿았다. 바로 거기서, 메마르면서도 귀를 멍하게 하는 소음 속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본문 계속 이렇게 그에 대해 세상 속에 우리가 정해놓은 인간다움이라는 틀 안에서 그를 바라보면 그는 이방인을 넘어선 인간으로서의 지녀야만 하는 덕목이 없는 미개한 자로밖에 보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나는 뫼르소처럼 생각하는 시각을 가져야만 했다. 그가 생각하는 대로, 그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대로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나는 생각해보아야 했고 그렇기에 잠시 책을 던져버리고 훌훌 털어내어 이방인이 되어보고자 했다. 그리고 여전히 최악의 가정을 취했다. 나의 항소가 기각된다는 가정이었다. "그래, 그럼 난 죽게 되겠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일찍,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인생은 살아 볼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안다. 사실 나는 서른 살에 죽든 별로 중요치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당연히 다른 남자들과 다른 여자들이 살아 있을테고, 수천 년동안 그럴테니까. 요컨대 그보다 더 명백한 것은 없다. 그게 지금이건 20년 후이건 간에 죽게 되는 사람은 여전히 나였다. (중략) 사람이 죽게되는 마당에 어떻게, 언제, 이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그러므로, 나는 내 항소의 기각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본문 시지프의 신화 속에서 계속해서 바위를 산꼭대기로 올려야 하는 그 의미 없는 고된 노동 속에서도 그럼에도 그 안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기에 부조리에 대해 이해 할 수 있다는 그 이야기를 뫼르소의 삶의 태도에도 대입해 보아야 했다. 멍하니 대체 그의 삶에 있어서 부조리란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고민하던 찰나, 어느 순간 떠오르는 것을 죽음의 도래를 지워버리고 내일을 기대하며 오늘을 사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진리를 알면서도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삶을 보면서 그는 죽음과 공존하는 오늘의 삶에 있어서 그 어떠한 것이든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고 보았다. 그 무엇도 특별하지도 그렇다고 가볍거나 묵직하지도 않은, 그저 하나의 평행선상에서의 무수한 점들 중 하나 일 뿐인 것이다.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 엄마의 죽음과 그 이후 코미디 영화나 정사는 별개의 하나하나의 일들이었으며 아랍인의 살인사건이 발생하기 까지는 자신 스스로가 자신의 삶에 대해 놓았다면 그 사건 이후 타인에 의해 자신의 삶이 결정되는 것들을 보면서 그는 또 다시 현상의 부조리에 대해 깨닫게 된 것이다. 자신의 재판 과정에서 대변하는 것에 대해 귀찮다고 생각하고 그 과정들이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뫼르소에게 있어 오늘의 죽음은 중요치 않다. 어차피 언제건 오게 될 기정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소설이 너무도 슬프게만 느껴졌다. 세상의 다정한 무관심에 행복했으며 자신의 처형일자에 많은 사람들이 와서 자신이 떠나는 날이 외롭지 않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그 마지막 순간을 읽으며 과연 그는 진정으로 행복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이라는 너무도 진리한 진실에 빠져있었던 뫼르소에게 삶은 그저 죽음으로의 길로 가는 통로였을 뿐이었다. 우리 모두가 보이게 그는 낯설은 이방인이었지만, 매일을 아등바등하며 지내는 우리가 그에게 있어서는 모두 낯선 세계였을 것이다.
|
|
이방인이라고 하면 나와 다른 사람, 즉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을 뜻한다. 흔히 속된 말로 무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카뮈의 이방인은 노벨상을 수상하기도 했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전이기도 하다. 나도 제목은 들어 이미 알고 있었으나 내용은 잘 알지 못했는데... 역시나 읽어보니 난해했다. 잘 이해가 되지 않아 뒷편에 작품해설이나 관련 글이나 읽어 보니 조그나마 이해가 되었다.
《이방인》은 크게 두 가지 사건으로 나눠서 전개가 된다. 1부에서는 갑작스런 어머니의 죽음을 통보받아 담담히 아무런 느낌없이 장례를 치르는 장면이 나온다. 2부에서는 우연한 계기로 살인을 저지르게 되지만, 말도 되지 않은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게 되는 주인공의 심리를 그리고 있다. 주인공인 뫼르소는 아랍인을 왜 죽였나는 질문에 뜨거운 태양 때문에 그랬다고 답을 했다. 그러자 뫼르소가 왜 죽였는지에 대한 핵심에서는 벗어난, 사회 통념이나 관례를 벗어난 태도 때문에 더욱 심한 형량을 받는다. 어머니 장례식에 가서 얼굴도 보지 않고 입관을 했다, 울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돌아오자 말자 여자와 데이트를 했으며, 잠자리도 같이 했다는 사실에 더욱 집착을 하여 판결을 내린다. 이웃인 레몽을 돕다가 이에 얽힌 아랍인을 우연히 죽이게 되었는데도 그 상황에 대해서는 이해를 할려고 하지 않고, 앞선 그런 사실을 가지고 계획적으로 했다고 모든 사람들이 믿어 버린다.
《이방인》은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가 아주 많다. 특히 우리나라 사회에는 더욱 더 그렇다. 틀리다와 다르다는 말은 어찌보면 같은 뜻이기도 하지만 자세히 새겨보면 전혀 다른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 생각과 행동과 조금이라도 차이가 나면 다르다고 하지 않고 틀리다고 한다. 나 자신조차 그랬으니깐. 그러나 얘를 키우면서 그런 말보다는 다르다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는 걸 알고 가급적이면 틀리다는 말 사용을 지양할려고 노력중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카뮈의 《이방인》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내용과 일맥상통해서이다. 한 사회 내에서 일종의 게임의 룰을 존중하지 않은 뫼르소는 다른 구성원에게 신경 거슬리는 존재이다. 어찌 보면 다른 사람과 조금 다르게 행동했을 뿐인데 그걸 틀리게 보고, 우연하게 죽였을 뿐인데 일련의 사건을 비추어 계획적으로 살인을 했다고 믿음을 가지고 판결을 내려 버린다.
《이방인》은 짧지만 강렬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읽었지만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어렴풋이 이해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들도 각자의 논리로 이 《이방인》을 해석하고 있는데 말이다. 또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인 카뮈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만 한다. 소설속에 나오는 마을이나 배경, 소설 내용들이 작가가 실제 살았던 삶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무수한 해석과 해설들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의 '진정한 의미'를 여전히 단정 짓기 힘든 것이 이 작품의 매력이자 고전이 주는 힘이지 않을까 싶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
|
|
'이방인' 알베르 카뮈의 고전작품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난 이제야 이 고전을 읽게 되었다. 어떤 내용인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고전이기때문에 조금 읽는데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했다. 사실 다 읽고 난 지금도 '이방인'이란 작품을 이해하기가 쉽진 않았다. 그리고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알베르카뮈의 고독이 느껴지긴했다. 이 책을 통해 그의 한 부분의 고독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던데 그런 고독이 느껴졌다. 이방인이라는 의미자체에 매우 고독함이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읽으면서 나도 모르는 감정에 우울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아직 난 그가 말하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것 같다. 기회가 되면 다시 읽어봐야 그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조금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작품은 주인공 뫼르소의 어머니가 죽고 난 다음으로 시작된다. 그는 양로원에서 보내고 있는 어머니의 죽음 소식을 전해듣고 양로원을 찾게된다. 어머니와 사이가 나빴던건 아니였지만 형편상 모시기 힘들어져서 그는 어머니를 양로원으로 모셨다. 그런데 어머니가 갑작스레 떠나게 된 것이다. 어머니를 찾아갔지만 그는 어머니의 시신조차 확인하지 않았다. 눈물도 흘리지 않고 냉담했다. 담배를 피우는가 하면 다른 사람이 권해주는 커피도 마셨다. 그에게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것은 큰 의미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어머니를 만나고 온 다음날도 여자를 만나 하룻밤 보내고 즐겼다. 그리고 친구들과 어울렸다. 누가봐도 어머니의 죽음에 상심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친구들과 자신의 애인과 함께 여행을 가게된다. 친구와 바닷가를 거닐다가 아랍인과 싸움이 붙을뻔했다. 간신히 친구를 말리며 평온한 상태로 지낼 수 있었는데 그는 다시 그 바닷가로 나가게 되고 태양이 이글거리는 바다에서 다시 그 아랍인과 부딪히게 된다. 특별히 싸움을 걸려오는 자세를 취하지 않았는데 뫼르소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총의 방아쇠를 당기게 되었다. 네발의 총알을 쏘았다. 한발은 의도적으로 쏘았다면 나머지 세발의 총알은 잠시 시간을 두고 쏘았다. 그런 그의 행동은 법정에서 그에게 아주 불리한 작용 하게 된다. 그는 아무런 이유도 우발적으로 총을 쏜 것이었다. 법정에서는 그가 유죄인지 무죄인지를 판결하기 시작한다. 그는 솔직하게 물음에 대한 답변을 한다. 사람들은 모두들 그를 유죄라고 말한다. 그의 친구들은 그가 무죄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는 그런것에는 관심이 없어보인다. 그저 지금 이 상황이 지겹고 무료하게만 느껴진다.
별다른 재미없이 인생을 살아온 뫼르소. 갑작스런 어머니의 죽음. 특별한 슬픔을 느끼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슬프지 않은것도 아니였다. 하지만 그런 그의 행동은 사람을 죽인 법정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그의 행동은 오히려 그가 유죄임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을 뿐이다. 그저 그 상황이 따분하게만 느껴지는 뫼르소. 감옥에 갖혀있으면서도 답답하기만 하다. 이 상황이 끝나기만을 바랄뿐이다. 그는 과연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것일까? 왜 그는 갑작스레 우발적으로 방아쇠를 당겼을까? 그 아랍인은 그를 해치려고도 하지 않았고 그져 햇빛이 비치는 바다에 누워있을뿐이였는데 뫼르소는 눈부신 햇빛에 움직이는 그의 몸짓을 통해 자신을 공격해오는것 같은걸 느꼈을까? 그가 느끼는 그 공간이 그에게는 마치 자신이 이방인이 된것 같은 기분일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