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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고증을 통해 독도와 간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알려준다.
"역사적 고증을 통해 독도와 간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알려준다." 내용보기
영토는 국민, 주권과 함께 국가의 기본요소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영토에 대한 개념을 분명히 하고 그 영토를 수호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해야만 한다. 그러기위해서는 우리의 영토가 어디까지인지 그 경계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의 헌법은 우리의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분쟁의 소지가 있는 곳이 세 군데나 된다. 독도와 간도 그리고 이어
"역사적 고증을 통해 독도와 간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알려준다." 내용보기

영토는 국민, 주권과 함께 국가의 기본요소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영토에 대한 개념을 분명히 하고 그 영토를 수호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해야만 한다. 그러기위해서는 우리의 영토가 어디까지인지 그 경계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의 헌법은 우리의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분쟁의 소지가 있는 곳이 세 군데나 된다. 독도와 간도 그리고 이어도가 바로 그곳이다. 세 곳 모두 우리의 영토가 분명함에도 주변국들의 도발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때 우리는 그 영토가 왜 우리의 영토인지에 대해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조선의 사대부라는 시리즈의 한 권으로 출간된 이 책 [독도 수호와 백두산정계비 설치]는 우리의 영토와 관련하여 역사적 고증을 통해 독도와 간도가 우리의 영토임을 밝히고 있다. 저자는 우리의 영토정책에 큰 변화를 가져온 역사적 사건,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일어난 두 사건을 기초로 하여 살펴보고 있다. 하나는 숙종19(1693)에 발생한 안영복의 독도 지키기이고, 다른 하나는 숙종38(1712)에 일어난 백두산정계비 설치가 그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에게 두 역사적 사건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독도가 우리나라 영토가 된 것은 512년 신라 지증왕이 이사부를 시켜 우산국을 병합하면서 부터이다. 우산국은 울릉도와 우산도(독도)를 가리키며, 두 섬은 날이 맑으면 서로 바라다 보인다고 했다. 이런 내용이 [삼국사기], [고려사], [세종실록]에 실려 있다. 고려시대에는 울릉도를 행정구역에 편입시키기 위해 자주 조사를 나가기도 했고, 조선시대 들어 태종은 울릉도안무사를 파견하여 울릉도와 우산도를 구분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지도에는 이들 섬이 표기되기 시작하였으나 지리인식이 정확하지 않아 우산도가 울릉도 안쪽, 즉 울릉도 서쪽에 표기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울릉도에 군역을 피해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았고, 또 주민이 많으면 왜구의 노략대상이 될 것을 우려하여 울릉도 주민을 모두 육지로 데려오는 주민쇄환정책을 실시했다고 한다.


그러다 울릉도와 독도가 한일간 외교문제로 비화한 것은 1693년 울산의 어부 안영복이 울릉도 부근에서 조업을 하다 왜인에게 붙잡혀 일본으로 끌려가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안영복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임을 명확히 하고 귀환하던 도중 대마도주의 농간에 의해 독도의 경계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다. 조선과 대마도주의 주장이 오고가며 흐지부지해지자, 유배에서 풀려난 안영복은 1696년 다시 도일하여 조선관헌 행세를 하며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임을 확약 받고 돌아온다. 조선에서는 안영복을 죽이자는 공론이 일어났으나 그럴 경우 울릉도와 독도의 경계에 대한 문제가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다시 유배형에 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안영복이 처음 일본에 납치되었다가 돌아온 이후인 1694년 조선은 울릉도에 수토관을 파견하여 조사했다. 이때 비로소 독도의 위치가 울릉도 동쪽임을 파악하였고 지도에도 올바로 표기되기 시작했다. 이후 울릉도 수토는 3년에 한 번씩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고 한다. 울릉도 수토는 1894년 울릉도 개척 건의가 받아들여져 수토제가 폐지될 때까지 이어졌으며, 1900년 울도군을 설치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직접 관할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1905년 독도를 일본영토에 편입시킨다는 불법고시를 하였고 이때부터 틈만 나면 도발을 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영복이 도일하여 울릉도와 독도의 소유를 확실히 하였을 때 조선의 대응은 한심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그곳이 우리의 영토임을 분명히 했다는 것에 그나마 위안이 된다.


조선초기까지만 해도 만주는 우리의 영토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시대 태종은 1404년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만주동북부 공험진 이남을 조선이 관할하기로 합의를 보기도 했다. 그러다 청나라가 만주에서 건국하면서 만주에 대한 주도권다툼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병자호란으로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기게 되었다. 1679년 청나라가 백두산을 측량하려다 실패했다. 이후 청은 수시로 백두산을 조사하고자 했고, 조선은 이를 막기에 온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1712년 청은 공식적으로 장백산을 조사하겠다고 공문을 보내오고, 이를 거절할 수 없었던 조선은 접반사를 보내 대처하기로 했다. 조선에서는 백두산까지 가는 길이 험하다는 핑계로 백두산 정상에 가는 것을 막으려했으나 실패했다. 조선은 청이 기어이 백두산 정상에 오르겠다면 조선 측에서도 한사람만이라도 동행하고자 했으나 거절당했고, 청 사신은 조선측 군관, 통역관만을 대동하고 백두산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서쪽으로 흐르는 강을 압록강, 동쪽으로 흐르는 강을 토문강이라 보고 그곳에 정계비를 세웠다고 한다. 조선과 청의 국경이 확정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아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이렇게 해서 조선의 영토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정해졌다.


그런데 문제는 동쪽의 토문강에서 일어났다. 이 토문강을 두고 청은 두만강이라 했고, 조선은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실제 토문강이라고 본 것이다. 여기서 간도문제가 발생했다. 토문강을 기준으로 한다면 간도는 조선 땅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간도는 이미 그전부터 조선인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기에 조선은 1903년 간도를 함경도의 행정구역으로 편입시켰다. 허나 일본은 1909년 청과 간도협약을 맺어 간도를 청의 영토로 인정했다.


이 책은 17세기 말과 18세기 초에 일어난 두 사건을 중심에 두고 전후 20년간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를 살펴보면서 독도와 간도가 왜 우리의 영토인지를 살피고 있다. 우리는 이런 역사적 사실을 통해 독도와 간도는 분명한 우리의 영토임을 알게 된다. 당연한 사실일지라도 우리가 그 근원을 알고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는 크다. 혹 그것을 가벼이 여긴다면 우리의 존재이유를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우리일 수 있는 까닭은 우리의 영토를 제대로 지켰을 때 가능함을 이 책의 저자는 말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역사적 실례를 들어 고증을 한 것은 좋았는데 어딘지 내용은 깊이가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료가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 참고로 이 책과는 관계없지만 한중간의 분쟁이 되고 있는 이어도는 이어도연구회에서 펴낸 [이어도, 그것이 알고 싶다/인간사랑]를 읽으면 이어도가 왜 분쟁의 소용돌이에 빠졌는지, 그리고 왜 우리의 영토인지를 알 수 있다.

k*****1 2020.01.21. 신고 공감 15 댓글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