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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희란 작가를 <<자동 피아노>>라는 소설로 처음 접하게 되었다. 가장 인상깊었던 문장:
같은 작가의 책을 더 읽어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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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기에 혼자 있다.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다. 가능한 것은 불가능하다. 수수께끼 같은 말로 시작된 <자동 피아노>의 첫 장면. ‘나’는 어디에, 왜 혼자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너는 무너진다. 너는 죽고 싶다. 너는 죽을 수 있다. 죽지 않았다. 죽을 수 없었다. 저주인 걸까. 저주라는 단어가 떠오를 정도로, 그렇게 생각될 정도로 화자는 부정적이다. 읽기만 해도 우울해지는 느낌. 죽음을 생각하는 일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죽음을 생각하는 자신을 생각하면 어딘가에 못 박혀 있는 듯하다. 우울감에 젖어들고 싶을 때,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을 때, 땅굴 팔 때 꺼내 읽어야지. 지금은 아니다. 너는 깨닫는다. 네가 너를 기만하고 있다. 이것도 기만인 건가. 뭔가 포기한 듯한 내색을 하는 이 수상한 뉘앙스가 분위기를 어둡게 했고, 계속 읽고는 있는데 무척 찝찝하게 했다. 그래, 찝찝함. 이게 <자동 피아노>를 떠올렸을 때 함께 부상한 단어였고 감정이었다. 그런데 지금 당신, 찢고 찢겨나가는 나를 목격해온 당신, 나와 눈을 맞추려고 발을 끌며 오고 있는, 혹은 나를 외면하려는 당신, 당신은 무엇을 보고 있지. 갑자기 질문이 훅 들어왔다. 나? 나한테 하는 얘기야? 이제야 고백건대,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소설이 아니라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급히 예스24에 책 제목을 검색했다. 작가 이름을 네이버에 쳤다. <자동 피아노>. 천희란. 이건 소설일까. 살아 있을까. 우울증에 걸린 사람의 글이 이럴까. 끝없이 불행을 얘기하고, 불안과 죽음을 암시도 모자라 대놓고 말하는 글이었다. 자동 피아노란 제목에 맞춰 소제목들의 곡을 검색해 반복재생으로 설정하고 읽었다. 신비로운 운율과는 다르게 무겁다. 그만, 멈추고 싶다. 멈춰 있는 것을 멈추고 싶다. 멈춰지지 않아도 멈춘 것을 멈추려고. 그만. 지긋지긋하다. 모순이 참 많이 등장했다. 멈춰 있는 걸 멈추는, 멈춰지지 않아도 멈추려 했다. 분열을 중단시킬, ‘나’를 견디게 할 수 있을 만한 무언가를 찾고 있을 때. 나는 우습게도, 죽음을 떠올렸던 것이다. ‘나’가 떠올렸던 것은 다름 아닌 죽음이었다. 순간 내가 알고 있는 죽음과 천희란 작가가 말하는 죽음의 의미가 다른 것인가 했다. 문학적 표현을 하기 위해 죽음이라는 단어의 형태만 취하고 뜻은 버린 걸까. 이런 생각을 잠깐이라도 했을 나 같은 독자들을 위해, 천희란 작가는 친절히 죽음의 뜻을 확실히 밝힌다. <자동 피아노> 작품 속 죽음이란, 완전한 끝, 대체 불가능한 절대적 결말, 즉 당신과 내가 아는 죽음, 그거였다.
작품해석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 간절함을 알기라도 한 걸까. 모든 해석은 독자에게 자유롭게 열려 있단다. 작가의 말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어진 고백. 실제로 자살 충동에 끊임없이 시달렸다는 작가 천희란. 작가에게 있어서 <자동 피아노> 속 화자는 본인이었기에 소설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추상적인 감정들을 구체화하기 위해 노력한 가상의 인물을 그리며 읽었기에 이 책을 소설로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읽으면서 혼란스러웠고, 무슨 이런 책이 다 있을까 싶었지만, 작가의 말까지 전부 다 읽고 나니 그저 고개만 끄덕이게 되는 <자동 피아노>. 할 말이 없다. 얼어붙은 자기만의 세계를 단숨에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걸어볼 것이다. 아니, 이미 걷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 오래전의 일이다. 작가 천희란, 그리고 인간 천희란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것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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