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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로마 가톨릭, 이른바 천주교가 전래된지 내년이면 240년이 됩니다. 200주년에는 당시 폰티펙스 막시무스였던 요한네스 파울루스 세쿤두스(=요한 바오로 2세)가 내한하여 직접 103위 시성을 하기도 했습니다. 240년이면 결코 짧은 역사가 아니며, 한국에 소재한 전통 종교 유적이 천주교 관련이라고 하면 뭔가 살짝 생경감이 들기도 하지만, 지금 이 책에서 확인하듯 이처럼이나 오래된 성당들이 많습니다.

로마 가톨릭은 아니지만 p65에는 성공회 강화(江華)성당이 소개됩니다. 성공회는 중국과 일본에서도 똑같이 성공회(聖公會)라고 부르며, 앙글리칸 혹은 에피스코펄로도 불리며, reformed catholic church라는 명칭도 있으니 가톨릭이라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의식도 사제의 지위(결혼 가능 여부 제외)도 천주교와 매우 비슷하지만 엄연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따르는 개혁교회인데, 사실 겉모습만 보면 루터 교도 로마 가톨릭과 매우 닮아서 독일에 간 한국인들이 놀라곤 합니다. 에큐메니컬 운동 이후 루터교와 성공회는 로마 가톨릭과 소통하며 매우 많은 쟁점을 해소하기도 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16세기 초 로마와 얼마나 격렬한 항쟁을 했으며 그레이트브리튼, 에이레 두 섬에서 얼마나 로마 가톨릭이 탄압을 받았던지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집니다.

아무튼, 왜 강화도에, 그것도 성공회 성당이 있을까요? 1900년에 성공회 사제였던 트롤로프가, 새로 서양식 건물을 짓지 않고 기존의 기와집을 그대로 살려 성당으로 썼다고 책에 나옵니다. 어찌보면 로마 가톨릭의 2차 바티칸공의회보다 훨씬 앞서 현지화를 시도한 셈이니 그 발상의 개방성과 포용성에 놀라게 됩니다. 책에도 설명이 그대로 나오는데, 제주도에서 큰 마찰을 빚은 천주교(예를 들면 1901년 이재수의 난)라든가, 반대로 지나치게 소극적이었던 개신교와 달리 성공회는 제3의 길을 택해 현지화를 시도했다는 설명입니다. 물론 이는 20세기 초의 사정에 국한되며, 이후에는 가는 방향이 크게 달라진다는 건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바입니다.

성공회성당이라고 하면 많은 한국인들이 대번에 떠올리는 게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貞洞)에 소재한 서울주교좌성당이겠습니다. 이 책 p27에 사진들과 함께 소개되었는데, 책에 나오듯이 덕수궁과 돌담을 사이에 두고 어우러진 모습이 이색적이기도 하죠. 형태는 장십자가형인데 이 점도 여타의 성당들과 다르며 크게 보아 로마네스크 양식에 속한다고 합니다. p27 하단에 나오는 반원형 구조 "앱스"는 apse라고 쓰는데 건축학 전공자나 되어야 이 단어를 구경했을 법합니다. 그리스어 apsis에서 유래했는데 그뜻은 아치형이라고 합니다.
서울 관악구의 신림동은 新林洞이라 쓰는데, 강원도 원주시 소재 신림면은 神林面이라 씁니다. 이 뜻에 대해 책에서는 치악산과 백운산 사이에 있는 신성(神聖)한 숲이라고 합니다(p119). 이곳에 놓인 원주 용소막 성당은 강원도 내에서 세번째로 오래된 성당이라고 하는데, 무려 흥선대원군이 병인양요를대응하고 나서 다시금 사후처리 삼아 천주교도들을 박해했는데 그 탄압이 매우 혹독하여 수원 지역의 신자들이 여기까지 쫓겨와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는 데서 유래합니다. 강원도쯤이나 되어야 그 궁벽함이 방패막이가 되어 관헌의 집요한 추적을 피할 수 있었겠습니다.
종탑도 있고 전반적으로는 고딕 양식 외관인데, 한국전 당시에는 북한군 식량 창고로도 쓰인, 현재의 모습이 백 년을 이어온 건물이라고 합니다. 병인양요는 1866년인데 그때에 세워진 건물은 당연히 아니며(쫓겨 다니는 판에 무슨 번듯한 집을 짓고 살겠습니까) 고딕 양식이라는 자체가 1880년대 이후에야 국내에 알려졌고, 천주교가 한반도에서 프랑스나 로마 교황청의 본격 지원을 받아 정식 교구도 설치하고 조직을 갖춘 건 20세기 들어서입니다.

1890년에 충청도 지역 최초로 들어선 당진의 합덕성당은 원래 예산에 있던 것이 자리를 옮겨 퀴를리에 신부에 의해 본당의 터를 잡았습니다. 처음에는 한옥이었다고 하는데, 1929년에 들어서야 페랭 신부가 중국인 기술자들을 데려와 비로소 지금 보는 저 건물을 세웠다고 하니 당시 조선의 낙후되고 빈한한 현실이 짐작되고도 남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건물의 역사가 이제 거의 백 년에 가까워지니 뜻깊은 유산으로 여기기에 별 부족함이 없습니다. 역시 로마네스크 양식이며 종탑이 두 개인 점이 특이합니다.
충북 유형문화재 188호이기도 한 음성 감곡성당은 명동성당의 축소판과 같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벽돌로 아치를 두르고 고딕 종탑을 세운 모습"도 그러합니다(p209). 외지인들은 잘 모르나 감곡은 음성 일대 교통의 요지라고 합니다. 가밀로, 시잘레 두 분 신부가 큰 역할을 했는데, 閔 某(민자영의 친척)가 109칸 고대광실을 짓고 살던 터를, 을미사변의 혼란 후 헐값에 사서 성당을 지을 수 있었다고 나옵니다. 얼마나 악질 탐관오리 짓을 했으면 임금이 버젓이 군림하던 봉건사회에서 109칸 집을 짓고 호사를 누렸을까요.

전북 익산 소재 나바위 성당은 한국인 최초의 천주교 사제이자 병오박해 때 순교한 성인 김대건안드레아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올해('23)가 그의 순교 177주년인데 이를 기려 얼마 전에 바티칸에도 그의 성상(聖像), 갓을 쓴 모습을 본뜬 하얀 조상이 들어섰다고 합니다. 형리들도 그의 준수한 용모와 당당한 태도에 감명받았다고 하죠. 이 역시도 저 합덕성당처럼, 파리 외방선교회 페랭 신부의 주도적인 기여가 있었습니다.

한국 곳곳에 들어서 오랜 세월 동안 고유의 기능을 행하며 신도들의 영혼을 지킨 성당들을 보며 새삼 숙연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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