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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바르트라고 들어 보셨나요? 롤랑바르트는 신비평의 기수, 기호학자, 문학평론가등 다양한 직함을 가지고 있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사상가입니다. 그는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다양한 저서를 남긴 인물입니다. 고인이 되셔서 다시금 그가 집필을 하는 것을 볼 수 없는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현재 서점에 가 보면 참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한 장르로의 쏠림, 그리고 가벼운 책의 범람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향은 인문 분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해 말쯤 쉽고 대중적으로 쓰여진 인문학의 입문서가 인기를 끌면서 지금 인문분야에 가 보면 수많은 인문학 입문서만이 범람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어렵다고 생각을 하는 인문 분야에서 쉬운 대중서로 인문학의 가치를 올리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컨플레이션 음반처럼 여기저기서 모아 놓은 듯한 책, 또 인문 분야의 모든 책이 대중서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가볍고 쉽게 볼 수 있는 책이 있으면 생각을 하고 또 무겁게 읽을 책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제가 읽은 <롤랑바르트가 쓴 롤랑바르트>는 무거운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롤랑바르트가 쓴 롤랑바르트>는 자전 에세이입니다. 그가 사망한 1980년의 5년 전 1975년에 출간된 책으로 자신의 생각, 글쓰기, 분쟁과 같은 다양한 개념들을 풀어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다른 출판사에서 출판된 책을 재출간한 작품입니다. 초반 60페이지 정도는 자신의 사진으로 지면을 할당하고 있고 나중에 소분야로 다양한 자신의 생각과 메모, 느낀점들이 들어 있습니다.
작품을 쭈욱 읽어본 결과, 결코 쉬운 책은 아닙니다. 그리고 무슨 말인지 모르는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어렵다는 가치를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고 보여집니다. 무조건 쉬운 글이라고 반드시 좋은 글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좋은 글이란 논리의 정연에 있어서 자연스럽고 글쓴이의 목적이 잘 드러나 있으며 가독성이 좋은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좋은 글이 어려울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우리가 쉽다고 생각하는 글들 가운데는 좋은 글이 아닌 것들이 많은 수도 있습니다. 즉,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가치관과 맞다면 혹은 자신이 생각하는 정치적인 견해와 동일하다면 좋은 글이라고 자신도 모르게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렵다고 해서 이 글은 좋지 않다고 무조건 판단을 해서는 안됩니다. 다만 생소한 것이죠.
<롤랑바르트가 쓴 롤랑바르트>도 마찬가지라고 보여집니다. 단장의 형식으로 200여편의 조각들이 합쳐져 있는 이 책은 쉬운 책이 아닙니다. 하지만 좋은 책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다만 제가 이 책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지식이 부족할 따름이죠. 저의 인문학적 깊이가 깊었다면 이 글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일반인이 의학, 물리학과 같은 전문분야의 논문이나 책들을 보면서 참 쉽다라는 느낌이 들기 힘든 것처럼 이 책도 같은 것이라 보여집니다. 저의 부족한 인문학적 깊이때문에 이해하지 못하고 또 어렵다고 생각해서 이 책이 좋지 않다고 판단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보여지네요.
이 책에는 바르트의 개인적인 이력을 비롯해 그가 탐구했던 사상 전반에 대한 글들이 많습니다. 어머니와의 각별한 사랑, 동시대 연구자들과의 관계 등 사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기호학, 구조주의와 같은 그가 치밀하게 연구했던 학문을 담담하게 풀어놓고 있는 책입니다. 그리고 200여편의 조각같은 글들이 연관석이 없다는 것도 독특합니다.
지금 이 책을 완벽하게 소화하지는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좀 더 인문학 지식이 쌓이고 이른바 내공이 쌓인다면 <롤랑바르트가 쓴 롤랑바르트>를 쉽게 그리고 우걱우걱 소화하면서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너무 대중적인 입문서가 범람하고 있는 지금 트렌드에서 깊이있게 또 많은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하고 싶습니다. 쉬운 글이 반드시 좋은 글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어렵다는 건 결국 자신의 부족함을 수반한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 좀 더 많은 책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더 공부를 해야 한다고 여기며 글을 마칩니다. 언젠가 롤랑바르트는 저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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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는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글이다. 그를 매혹시키는 것은 어린 시절의 이미지뿐이다. 그의 주위에는 항상 따뜻한 사람이 있어서 행복했다고 한다. 바르트의 글은 단아하면서도 간결하다. 한때 그의 글이 빠져든 나로서는 이 세상에는 그의 글말도 아름다운 문장은 없다고 단언하였다. 이 책은 그의 기억으로 건축되어진 글이지만 그의 말에 의하면 고백으로 이뤄진 책은 아니다. 그의 글이 단지 세상에 대한 단상으로 만 이야기한다면 지루했을 것이다. 그의 글이 부드러운 것은 그의 생각이 달콤해서이다. 때때로 그의 유치한 알로 장난을 치지만 밉지는 않다. 그는 기꺼이 정치적 주체가 되기를 원하지만, 정치적 ‘이야기꾼’은 사절한다고 한다, 그 주체는 랑시에르의 말을 빌리자면 정치적인 것이다. 이야기꾼이 되지 않기를 희망하는 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러한 이유는 뭘까? 그는 단 한 번도 정치적 행동을 하지 않은 소박한 글쟁이였다. 글로서 세상과 소통하고 글로서 자기의 목적을 확실히 했던 기호학자였던 그의 삶에 대해서 동경한 적도 있다. 누군가가 비평의 종말이 왔다고 선언하는 사람에게 이 말을 들려주고 싶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바르트에게 이런 인터뷰하면서 당돌한 질문을 한 모양이다. “선생님. 비평가는 뭡니까?” 바르트가 대답하기를, “쓰레기죠. 비평가는 쓰레기입니다.” 그러면서 뒤에 덧붙이며. “굉장히 위험한 쓰레기들이죠. 이들은 역사가 지나간 다음에 남아있는 걸 뜯어먹고 사는 쓰레기들이죠. 그런데 이 쓰레기들이 위험한 까닭은 전염병이 있다는 겁니다” 라는 말은 곧 비평이 살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도 이제는 그 효력을 다하고 있다. 전염병에 길들여져 내성이 생긴 사이버펑크의 스마트족 아이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글이란 따분하고 지루하고 재미없는 그 자체이다. 그들에게 설득은 무리다. 다만 직감적으로 그들의 이러한 불만을 수용 할 줄 아는 관용을 그 윗세대들이 지녀야 한다. 왜 바르트는 그런 시절에도 분개하지 않았다. 분노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조용히 사색에 잠기며 낮에는 햇빛을 벗 삼아 그의 종이를 잉크의 깔끔한 필체로 짓눌렀으며 밤에는 어둠을 잡아먹는 희미한 촛불아래에서 하얀 종이의 검은 흔적을 남겼다. 그는 자연주의자다. 또한 낭만주의자이다. 그의 글들에게 느껴지는 감정들은 무척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아가씨의 심상이 떠오른다. 그는 수다스럽지도 않고 떠들썩하지도 않다, 그저 밤에 피는 안개와 같이 조용히 우리의 감각에 스며들고 똑똑 떨어지는 이슬의 물방울처럼 살며시 사라진다. 나는 글을 쓴다: 이것이 언어활동의 제1도이다. 그리고 ‘내가 글을 쓴다’고 쓴다. 이것은 제2도이다. 우리는 오늘날 제2도를 엄청나게 소비하고 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 한참을 생각한다. 이해하기 어렵다. 글과 언어 따로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다. 곧 글이 말이 되고 그 말의 발화되어 구조를 이루면 언어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러면 많은 제1도를 경험했다.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나와라는 것과 내가라는 것은 무슨 차이일까? 바르트는 굳이 구분을 하면서 후자를 피곤한 존재로 본다. 나와 사랑을 같이 할 수 있을까? 와 내가 사랑을 할 수 있다는 다르다. 그 대상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데 아직 그 대상에게 바르트의 말을 빌리자면 고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이렇게 은둔자이다. 사랑의 대상이 스스로 사라지게 만든다. 그 부드러움 뒤에는 우물쭈물 이라는 망설임이 있다. 난 이것이 사랑의 공포라고 말하고 싶다. 그 불안이 나의 삶의 궤적의 물결의 얼룩을 남기기 때문이다. 그 퍼지는 얼룩의 흔적은 나의 육체에 각인되어 떠나지 않고 문신이 된다. 심장의 아픔으로서 말이다. 바르트는 이러한 사랑의 과정을 몸소 체험한 사람이다, 그러기 때문에 언젠가 그의 글을 읽을 미래의 독자에게 아프지 않는 사랑의 처방전의 내역서를 내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