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8)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50%
  • 리뷰 총점8 38%
  • 리뷰 총점6 12%
  • 리뷰 총점4 0%
  • 리뷰 총점2 0%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0.0
  • 30대 9.0
  • 40대 9.0
  • 50대 7.0

포토/동영상 (1)

리뷰 총점 종이책
계산하는 기계는 생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까?
"계산하는 기계는 생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까?" 내용보기
개인적으로 인공지능에 대한 현실적 관심은 2016년 이세돌9단과 알파고 대국이라기 보단,아이가 음성인식 기술인 시리(SRI)와 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부터이다. 그 모습을 이야기 해보자면, 자신이 원하는 의미를 전달하며 인공지능과 재미나게 대화하는 모습은 문제될게 없어보였다. 하지만 자신의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쉽게 짜증을 내거나, 어른이 되면 칩으로 지식을 심으면
"계산하는 기계는 생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까?" 내용보기

개인적으로 인공지능에 대한 현실적 관심은 2016년 이세돌9단과 알파고 대국이라기 보단,

아이가 음성인식 기술인 시리(SRI)와 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부터이다. 그 모습을 이야기 해보자면, 자신이 원하는 의미를 전달하며 인공지능과 재미나게 대화하는 모습은 문제될게 없어보였다. 하지만 자신의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쉽게 짜증을 내거나, 어른이 되면 칩으로 지식을 심으면 된다는 확신 섞인 말을 들으니 ‘이대로 괜찮은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인공지능이 보여주는 정보와 지식의 힘은 우리 스스로가의 존재가치를 쉽게 수동적으로 만든다. 스스로 계속해서 질문하고 탐구하는 힘보다는 편리함에 의존하게 만든다.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음을 포함한다. 여기서 능력이란 인공지능에 전혀 의기소침하지 않아도 될 스스로에 대한 능력이며, 의심이란 고도로 발달한 인공지능의 정신적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함이다.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이라는 책에서 일본의 문화는 군사적 패배(의도치 않게 죽음을 피했더라도)보다 천황 앞에서 할복이라는 극단적 행동을 하는 다소 충격적 문화를 하나의 체계로 인정하게 만들었다. 그럼으로써 미국 점령군은 처음 계획과 다르게 일본에 천황 제국주의 폐지를 굳이 강요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녀가 일본이라는 사전 경험이 전혀 없는 문화에 다가가 그 문화의 구조를 파악해냈듯이 우리도 계산하는 기계에게 다가 가야한다. 


“기계가 X를 할 수 있다면,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X에 무엇을 넣어야 기계가 생각한다고 말 할 수 있을까? 코플랜드가 말하는 3장의 결론을 빌려오자면 “미래의 인공물들은 생각할 수 있고 우리만큼이나 대규모 적응성을 지닐 수 있다”로 모을 수 있다. 동시에 우리는 ‘생각한다’의 정의를 바꾸거나 확장할 필요가 있음을 이야기한다.(3장) 

 생각한다는 고정관념에서 자유롭기 위해 저자가 던진 첫 번째 질문은 ‘생각에서 의식이 필수적인가?’이다. 저자는 의식적 행위는 사실 ‘생각한다’와 ‘자신이 생각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를 혼동하고 있을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말에 완고한 반대를 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본문 외에 나의 예를 들어보자면, 지금도 나는 컴퓨터에 앉아 있으며 (의식하지 못했지만) 나의 손은 수 없이 내 얼굴의 어느 부분을 오고 갔다. 그리고 최근의 예로 평소 잠을 잘 때 이불을 덮고 자는 습관은 없으나 감기로 호흡기 문제가 있거나, 우풍이 있는 곳에 잠을 자게 되면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으며 스스로를 보호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한다.

두 번째 논의는 “튜링테스트”이다. 튜링은 결정론적일 뻔한 컴퓨터에 무작위 선택(똑같이 바람직한 선택지들 사이에서 취하는 선택) 장치를 추가한 아이디어를 논의한 최초의 사람일 뿐이며 무작위 선택이 자유로운 선택이 될 수 없음을 지적한다. 여기서 무작위 선택은 단지 평행을 깨는 역할을 할 뿐이며, (대체로 동등하게 만족스런 선택지들 중에서) 군계일학의 상황 (만족스런 선택지들 중에서 선택이 이루어진 상황)일 뿐이다.


“우리의 핵심 질문은 ‘기계가 정말로 생각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튜링의 전략은 본질적으로 질문자에게 질문을 되돌려 주는 것이었다. 다음과 같은 형태로. “한번 생각해봐. 그들이 X를 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었다면, 당신은 기계가 생각할 수 있다는 말에 동의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튜링 테스트와 같은 간접적인 접근법은 실패한다는 것을 이제 깨달을 수 있다. 왜냐하면 외적 행위 능력 만큼이나 내적 수행 능력을 고려하더라도, 튜링의 도발적인 문제제기에 대해 확실히 ‘예스’라고 대답할 수 있도록, X의 자리를 채울 방법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p.124)


이 X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저자는 자유와 의식에 관한 논의를 이어간다. 여기서 의식은

비-의식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인지활동이나 상황판단이 얼마나 우리의 상식을 벗어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동시에 상식을 벗어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복종 또는 예속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개가 주인을 기쁘게 한다는 상식에서 벗어나야, 사람이나 개가 복종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진정한 상식에 닿을 수 있다. 단지 서로 다른 환경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서로 다른 필요에 따라 반응할 뿐임을 알 수 있다.

자유가 ‘필연적 세계와 양립가능하다는 주장’이나 ‘초월적 자유를 내세우는 주장’ 사이에서 어떤 자유를 취할 것인지에 따라 인공 지능의 자유를 다르게 논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의 필요에 따라 인공지능은 방향을 설정하게 된다. 

저자가 주장하듯 실험과 증거수집으로만 비경험적 문제에 답할 때, 증거 수집은 아무런 의미 없다. 기존의 지식이 완전히 절단될 수 있겠구나라는 단순히 ‘~는 그럴거야’라는 한계를 반드시 뛰어넘어야 한다. 

 



m******g 2020.03.18.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원탁의서평단
"원탁의서평단" 내용보기
"계산하는 기계는 생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까?" 4차산업혁명과 관련된 모든 것이 이슈가 되고 있는 요즘, 책 제목이 확 눈에 들어왔다. 이제 4차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패러다임 속에서, 기계는 단순히 계산하는 도구가 아닌, '머신러닝' 또는 '딥러닝'을 통해서 스스로 배우고 '인공지능'을 탑재한, 어쩌면 진짜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막상
"원탁의서평단" 내용보기

"계산하는 기계는 생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까?" 4차산업혁명과 관련된 모든 것이 이슈가 되고 있는 요즘, 책 제목이 확 눈에 들어왔다. 이제 4차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패러다임 속에서, 기계는 단순히 계산하는 도구가 아닌, '머신러닝' 또는 '딥러닝'을 통해서 스스로 배우고 '인공지능'을 탑재한, 어쩌면 진짜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막상 받고 보니, 이 책의 원제는 "Artificial Intelligence: A Philosophical Introduction"이었다. 원제를 다시 읽어보니, AI와 관련된 수업 교재인가? 싶었다. 아니나다를까. 책의 첫 서문에 이 책은 심리철학과 인지과학 수업의 교재라는 것이다. 다시 대학생이 된 기분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책의 맨 앞장을 살펴보았다. (C) 1993. 27년에 인공지능에 대한 교재가 쓰였졌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기계, 인공지능, 철학, 단순히 이런 단어들을 들으면 영미권 또는 유럽지역의 선진국 어디 옥스포드대학이나 하버드 대학교 교수 정도 되는 사람이 쓴 책이거니 싶었는데, 이 또한 편견이었다. 잭 코플랜드라는 이름이야 철학과 과학사에 문외한인 나에게 생소한 이름이라 처음듣겠거니 했지만, 저자는 영국도 미국도 아닌 뉴질랜드에 위치한 캔터베리대학교의 철학/논리학 교수였다.

철학과 논리학 교수가 쓴 교재인 만큼,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계가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명제에 대해 논증하는 책이다.

이 책이 비록 27년 전에 출판된 책이더라도, 인공지능에 대한 논의는 훨씬 더 이전인 컴퓨터가 출현하는 시점부터 시작된다. 인공지능 기원에서부터 출발하여, 저자는 기호체계와 계산주의와 관련된 다양한 시도와 철학적 논증들을 소개한다. 아마도 이 책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인물은 '튜링'일지 모르겠지만, 튜링 외에도 다양한 철학자의 사고논증과 그동한 시도되었던 다양한 형태의 인공지능 프로그램의 구현에 대해 언급하였다. 조금 지루하기도 한 논증들을 훑고난 뒤, 저자는 인간과 기계를 구분짓는 자유의지와 인과관계 규명(7장)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인지과정은 알고리즘으로 계산할 수 있는가? 10장에서 마침내 저자는 기호가설을 넘어서 네트워크를 이용한 인공지능의 구현에 대해 언급한다.

개인적으로 이 책 앞부분에 실린 감수의 말과, 저자가 쓴 '들어가며'는 이 책의 훌륭한 요약본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이 책과 함께 '기계가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끈질긴 논증과 추론을 해나가길 원한다면, 감수의 말과 '들어가며' 부분은 책을 다 읽고 난 맨 뒤에 읽어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이 부분은 아주 훌륭한 요약본이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아주 짧은 대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추가로, 본문에서도 많은 철학자들과 다양한 학자들의 논증이 언급되어 있는데, 주석의 양도 상당해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아주 많은 양의 지식이 필요한 듯 싶다. 개인적으로, 배경지식이 없다면 결코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닌것 같다.

리뷰 총점 종이책
생각하는 기계가 되어가는 인간
"생각하는 기계가 되어가는 인간" 내용보기
잭 코플랜드의 책. 『계산하는 기계는 생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까?』(에디토리얼, 2020)를 읽고.  계산하는 기계는 생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까? 저자잭 코플랜드출판에디토리얼발매2020.01.12.
"생각하는 기계가 되어가는 인간" 내용보기

 

 

잭 코플랜드의 책. 『계산하는 기계는 생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까?』(에디토리얼, 2020)를 읽고.

 

 

 

이 책은 네이버 카페 <원탁의 서평단>에서 진행하는 서평이벤트로 읽게 된 책이다. 순전히 4차 산업혁명의 물결을 타고 내게 큰 호기심의 대상이 된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으로 이벤트에 참여했다. 그런데 저자의 이력이 남다르다. 저자인 잭 코플랜드는 로봇공학자도 뇌과학자도 아닌 논리학을 가르치는 철학자다. 다만, 그는 인공지능에 대한 철학을 창시한 영국의 논리학자이자 수학자였던 앨런 튜링 연구 전문가다. 이 책의 제목도 앨런 튜링의 논문인 <계산하는 기계와 지능>의 시작 질문에서 가져왔다.

 

나는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숙고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앞으로 인공지능의 혁신이 어떻게 일어날 것이며, 그런 혁신이 이 사회를 얼마나 놀랍도록 변화시켜 놓을 것인가 하는 (적어도 내가 기대했던) 일차적인 문제에 집중하지 않는다. 이 책을 감수한 철학자 김재인의 말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인공지능은 마음의 특성을 다 지니지는 못하는 것일까?

인간의 몸과 마음을 이루는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은 결국 물리-화학적 현상으로 환원되는 것일까?

인공지능은 자유의지와 의식을 가질 수 있을까?

끝없이 제기되는 물음들은 결국 인간을 더 잘 이해하려는 시도이며,

새로운 현상과 맞닥뜨렸을 때면 늘 인간을 다시 물어왔던

역사의 반복이기도 하다.

 

요컨대, 이 책은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을 더욱 섬세하고 자명하게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인공지능의 역사적 개요를 시작으로 컴퓨터와 프로그램의 다양한 종류들이 어떤 방식으로 진화해 왔는가를 살핀다. 그리고 3장에서 첫 번째 결정적인 질문을 던진다.

 

생각에서 의식은 필수적인가?

 

논리학을 가르치는 철학자답게 저자는 생각과 의식의 개념을 쪼갠다. 이 질문은 인공지능 연구자들 사이에서 실험의 타당성을 인정받는 튜링 테스트에 관한 논의를 전제로 한다. 테스트는 간단해 보인다. 질문자가 오직 대화를 통해 어느 쪽이 사람인고, 컴퓨터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된다. 컴퓨터는 입력된 기호를 패턴화시켜 대응하는 패턴 일치의 기술로 대응하는데 이 때, '일라이자'라는 프로그램은 패턴 변형 리스트와 연결되어 입력된 문장을 변형시키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일라이자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나타냈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생각이 반드시 의식을 수반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동시에 인간과 컴퓨터를 유사하다고 여기는 것 자체에 오류가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이제껏 우리가 가지고 있던 편견, 즉 "생각하는 존재는 자연적으로 발생한 유기체에게만 적용된다"는 편견을 깨버린다. 그리고 바로 "제대로 된 인공물에 '생각하다'라는 용어를 온전히, 문자적 의미 그대로 적용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입증"한다.

 

간단한 예로 우리는 잠을 자면서도 생각을 할 수 있다. 즉, 의식을 하지 못하면서도 생각이 가능하다. 한 마디로 " '생각한다'와 '의식적으로 생각한다'를 같은 의미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단지 '생각한다'와 '자신이 생각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를 혼동하고 있을 뿐이다."

 

 

 

저자는 컴퓨터의 기호체계가 무엇인지 면밀하게 설명한다. 4장은 특히, 기계치에 논리치인 내가 읽기 힘들었던 부분이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간 부분이 많다. 4장뿐 아니라 컴퓨터의 알고리즘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이에 반박하는 내용을 서술한 대부분을 충분히 납득하기는 힘들었다. 그저 인공지능에 대한 "실패한 예측과 과장된 주장"이 현재 인공지능에 대한 심각한 반발을 양산한다는 것, 그래서 인공지능에 대한 다른 관점의 이해와 사유가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할 뿐이다.

 

특히, 지식의 문제에서 컴퓨터에 데이터를 입력하기 위해 "객체의 기본 유형에 무엇이 있는가"라는 질문이 대두되었다는 부분, 그리하여 그 옛날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요하게 다룬 "기본 범주"를 명확하게 하는 작업이 필요해 졌다는 부분은 이제껏 인공지능을 그저 기술의 발전으로만 보아온 내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실체를 무엇으로 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공간, 관계, 양 등의 범주를 통해 앎에 도달하고자 했던 아리스토렐레스의 철학 자체가 오늘날 인공지능의 시스템 구축에 필수적인 과정으로 다뤄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존재론과 인식론, 논리학이 컴퓨터과학이 직면한 가장 어려운 문제다. 그런데 인간은 이 문제를 해결했던가? 컴퓨터는 스스로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이 물음 과연 인간은 자명한 답을 할 수 있는가?

 

자유의지에 관한 주제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컴퓨터과학과 인간 모두에게 딜레마다. 자유의지가 환상이라고 믿는 다수의 사람들은 결정론에 이론적 근거를 둔다. 컴퓨터의 시스템은 예측가능하니 자유의지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역시 결정론자들과 같다. 그러나 전통적인 양립가능론자들은 결정이 자유로우며 동시에 예측가능함을 설득력있게 주장한다. 놀랍게도 비선형 방정식의 컴퓨터 모델링은 예측할 수 없는 결정론적 시스템을 기술하는 것이 가능하다. 나아가 저자는 정해진 미래라 해도 삶에 기회는 충분히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어떤 생동을 취하든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을 흔히

우리는 '불가피하다'고 한다. 그러나

당신의 미래에서 일어날 많은 사건들은, 정확히

당신이 그 사건을 일으키고자 어떤 행동을 취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정된 미래는 사건의 흐름을 무기력하게 경험하는 미래가 아니다." 그리고 로봇에게도 이런 차원에서 자유가 존재한다.

 

이제 저자는 Qualia 퀄리아 개념을 내세워 의식에 대해 더욱 파고든다. 그러나 저자는 "퀄리아에 관한 한 아무도 모른다"라는 결론으로 독자를 이끌며 "비물리적 특성(퀄리아)들이 자연적인 뇌에서 생성된다면, 그것이 적합한 종류의 인공적인 뇌에서는 왜 안되겠는가?"라는 반문을 한다. 이는 "인공물이 의식을 가질 수 없다는 주장은 전혀 당연하지 않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저자의 논의는 일관적이다. 즉, 우리가 인간과 인공지능을 구분하고 인공지능을 인간보다 하위의 물질적 존재로 규정지으려는 모든 생각과 태도에 대해 인간만의 것이라 거론되는 생각, 의식, 느낌, 실체 등이 과연 자명한가? 질문하고, 인간에게 자명하지 않다면, 인공지능과 인간이 다르다는 주장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식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컴퓨터가 처리하지 못하는 맥락, 통찰, 직관 등을 논의한다.

 

 

그리고 로젠블랫의 아이디어를 되살린 '병렬분산처리'가 어쩌면 인공지능의 새로운 발전을 일으키는 키워드가 될지 모른다는 희망적인(?) 전망으로 책을 끝맺는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기계다.

Cogito ergo sum machina.

 

저자의 관심사는 처음부터 인공지능로봇 그 자체가 아니었다. 그는 컴퓨터과학과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을 더 잘 이해"하고자 했다. 그런 저자의 논의를 인내를 가지고 따라가다 보면, '컴퓨터'라는 기계가 왜 탄생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품고 책을 읽게 된다. 한 마디로, 인간은 자기를 닮은 기계를 만들어 내고, 발전시켜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이 스스로의 존재를 더 깊이 이해할수록 더욱 정교하고 섬세한 기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바꿔 말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은 나의 결론은 이것이다. 저자가 인간 존재가 기계 자체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이 자기를 닮은 기계를 만듦으로써 생각하는 기계가 되어가고 있다고.

 

처음 계산하는 기계를 만들때부터 우리는 우리의 사고의 흐름을 연구하고 그 순차적 논리를 분석해서 계산기라는 것을 만들 수 있었다. 그 다음엔 사고의 범주화를 인식하고 그에 맞는 카테고리를 기호화 하여 기계에 입력했다. 컴퓨터라는 단어는 이런 식으로 점차 인간화되어온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사유가 명확하게 제시된 순차적 기호의 흐름뿐 아니라, 명확하게 표현되지 않은 것들, 맥락에 의해서도 이루어진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고, 때로는 전혀 다른 범주와 범주를 건너뛰며 마치 도약하듯이 통찰의 사유가 이루어진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순차적 알고리즘을 넘어서는 다른 방식의 입력과 출력 시스템이 필요하게 됐다. '병렬적분산처리'는 바로 이런 사유의 도약과 범주의 교차 등에서 착안된 개념일 터다.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이라 두려워할 필요도, 과도한 희망에 사로잡힐 필요도 없다. 인간이 인간 스스로에 대해서 알아가는만큼 세상은 변할 것이다. 인공지능은 우리가 우리에 대해 아는만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우리 모습 그대로일 터이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가 곧 기계다.

 

 

 

 

b*******g 2020.03.16.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계산하는 기계는 생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까? / 생각하는 능력에 대한 오만과 편견
"계산하는 기계는 생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까? / 생각하는 능력에 대한 오만과 편견" 내용보기
이 책은 인공지능을 이야기하며 과연 인공지능이 사람과 같이 생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지, 의식을 가지고 자유 의지로 행동할 수 있는 기계가 될 수 있을지 고찰해보는 철학적인 내용의 책이다. 컴퓨터가 생기고 IT기술이 발달하여 인공지능 AI와 사람과의 관계에 관한 물음은 오래전부터 지속되어 왔다. 영화 AI에서는 불치병에 걸린 아들을 대신해 데이빗이라는 로봇이 모니카 가정
"계산하는 기계는 생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까? / 생각하는 능력에 대한 오만과 편견" 내용보기


이 책은 인공지능을 이야기하며 과연 인공지능이 사람과 같이 생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지, 의식을 가지고 자유 의지로 행동할 수 있는 기계가 될 수 있을지 고찰해보는 철학적인 내용의 책이다. 컴퓨터가 생기고 IT기술이 발달하여 인공지능 AI와 사람과의 관계에 관한 물음은 오래전부터 지속되어 왔다. 영화 AI에서는 불치병에 걸린 아들을 대신해 데이빗이라는 로봇이 모니카 가정에 입양되는 것으로 나온다.  물론 데이빗은 초기에 모니카를 엄마라고 부르도록 입력어가 설정되어 있기는 했지만, 지능과 감정을 가진 로봇이었기에 가족에게 사랑받고 관심받기 위해 행동했고, 버림받게 되었을때는 눈물까지 흘린다. 데이빗의 이러한 행동들은 하나하나 프로그래밍되었다기보다 스스로 의식을 가지고 결정하고 행동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만약 이렇게 자의식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는 로봇이 있다면 그때에는 인간과 로봇을 어떻게 구분하고 분류할 수 있을까? 사고 능력이 과연 인간만의 능력이라고 볼 수 있을까?


이 책은 10장의 내용을 말하기 위해 앞의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우선 인공지능과 컴퓨터의 역사부터 시작한다. 책을 읽다보면 이미 이 정도의 개발 수준은 넘어섰는데라고 느끼는 부분이 있는데 실제 이 책이 쓰여진 시기는 1993년이고 우리나라에 번역된 것이 최근이라 인공지능 개발 현황에 대한 갭은 어느 정도 존재한다. 3장부터 기계는 생각할 수 있을지, 자유의지와 의식을 가질 수 있을지에 대해 여러가지 실험을 통해 생각해본다. 결론은 인공물이 의식을 가질 수 없다는 주장은 당연하지 않다는 것. 왜냐햐면 퀄리아(Qualia)에 관한 한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비물리적인 특성이 자연적인 뇌에서 생성된다면, 그것이 적합한 인공적인 뇌에서는 왜 안되겠으며, 반대로 의식이 물리적인 현상이라면 인공물인 로봇에서도 당연히 퀄리아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외계인의 생리학이 우리와 다르겠지만 퀄리아가 있는 존재일 수도 있는 것처럼 로봇도 생리학이 우리와 다르지만 그들만의 퀄리아가 있을 수 있다는 것. 즉, 여기서는 로봇의 의식 존재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마지막 10장에서 저자는 병렬분산처리 방식을 이야기한다. 이는 인간의 신경 체계가 네트워크처럼 기능하는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인공신경망을 연결하여 인공지능을 구현하는 방식이다. 인간의 뇌에 대한 연구를 통해 좀 더 인간의 뇌와 유사한 인공지능 개발을 진행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인공지능의 개발이 어느 수준까지 도달할지는 알 수 없지만 인간의 지적 능력 수준을 따라가려는 인공지능 개발현황을 보여주면서 인간과 로봇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 지는 것이 아닌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때 과연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는 생각한다는 능력을 어디서부터로 정의해야하고, 과연 그 능력이 인공지능에게 갖춰줬을때 우리는 인공지능에게 편견을 가지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데카르트가 했다는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본질, Cogito ergo sum이라는 말은 새로운 지지자들에 의해 현재 Cogito ergo sum macina,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기계다라고 불리운다. 인간만이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기계도 지능을 가질 수 있음을 주장하는 말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만약 먼 미래 데이빗과 같은 기계 지성체가 등장했을때 인간과 기계는 편견없이 함께 공생할 수 있을지, 또한 기계와 인간을 구분짓는 정의를 생각하는 능력에서 다른 어떤 것으로 바꿀 수 있을지 생각해볼 문제이다. 이 책은 인공지능의 본질을 깊게 탐구하는 책으로, 기계와 인간은 다르다는 말이 개념적 오류를 가지고 있는지 철학적으로 풀이하고 있다. 중간중간 많은 역사적 기술과 생물학적, IT관련 해석들이 어려워 완벽히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 책이 심리철학과 인지과학 수업의 교재로 쓰이고 있는 만큼 비전공자 입장에서는 이해되지 않는다고 큰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읽어보며 인간의 본성에 대해 한번쯤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에 만족한다.




#계산하는기계는생각하는기계가될수있을까? #잭코플랜드,

#박영대, #김재인, #에디토리얼, #인공지능, #원탁의서평단

s*******3 2020.03.15.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계산하는 기계는 생각하는 기계가 뇔 수 있을까.
"계산하는 기계는 생각하는 기계가 뇔 수 있을까." 내용보기
독후기[생각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곧 마음은 아니다. ]_계산하는 기계는 생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까???????[생각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곧 마음은 아니다. ]??모를 뻔 했다. 이 책이 1993년에 쓰여진 책이란 사실을. 감수의 말이나 책 중간 몇몇 저작 당시 시점에 대한 내용을 지나치듯 읽었다면 말이다. 그건 컴퓨터 및 인공지능 분야에 대해 문외한이어서지만, 그만큼 오늘
"계산하는 기계는 생각하는 기계가 뇔 수 있을까." 내용보기


독후기[생각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곧 마음은 아니다. ]_계산하는 기계는 생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까??

?

?

?


?

?

[생각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곧 마음은 아니다. ]?

?

모를 뻔 했다. 이 책이 1993년에 쓰여진 책이란 사실을. 감수의 말이나 책 중간 몇몇 저작 당시 시점에 대한 내용을 지나치듯 읽었다면 말이다.

그건 컴퓨터 및 인공지능 분야에 대해 문외한이어서지만, 그만큼 오늘날이 인공지능에 대해 쉽고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시대이기 때문일 터이다.

인공지능이란 용어나 그것이 보편화 된 미래에 대해 단편적인 이미지만 가진 나에게도 이 책은 꽤나 흥미로웠다. 이 책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30년 전 시점임에도 오늘날 우리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핵심을 찌르며 아주 묵직하게.

?

"컴퓨터는 생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이러한 질문은 오래전부터 예정된 것이었다. 계산기로부터 시작 된 인공지능 기술이 인간의 마음을 구현해낼 수 있을까라는 질문엔 오래되고도 근원적인 욕망이 담겨 있다. 인간의 마음을 알고 싶은 인간의 마음. 그것이 사랑이든, 지배든, 정치든 그 이유는 상관없는 그 마음.

?

이 책의 저자 잭코플랜드는 지금보다 인공지능 기술 논의가 활발지 않았던 90년대 초 시점에서 그 근본적인 물음을 끄집어 내고 있었다. 책은 인공지능의 기술적 측면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심리적, 철학적 면면에서 심도있게 접근 한다. 이러한 접근은 책이 무려 30년전 저작이라 생각하지 못한 이유와도 연결되는데, 인공지능 논의가 활발해진 오늘날의 쟁점과도 일치하기 때문이지 싶다.

?

저자는 인공지능의 두가지 큰 갈래. 하나는 인공지능의 인간화(마음탐구) 또 하나는 편의 제공 목적의 인공지능 기술 고도화를 언급하는데, 이러한 흐름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2016년 바둑 고수 이세돌 구단과 구글의 딥마인드인 알파고의 대국이 전세계의 이목을 한 데 모은 이유는 컴퓨터의 단순한 알고리즘으로는 파악할 수 조차 없다고 여긴 인간의 마음과 그것을 대변하듯 복잡한 수 싸움이 집약된 바둑영역에서 기계가 인간을 무력화시켰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그 이전의 인공지능과의 체스 대결이 다뤄지고 있다. 1992년 시점에서는 인공지능이 체스를 정복하지 못한 상태로 나온다. 하지만 몇년 후인 1997년 기계는 결국 체스 챔피언과의 싸움에서 이기게 된다. 이와 같은 사례를 통해 사람들은 과연 인공지능이 인간의 인지구조를 밝혀내고 실현시킬 수 있을지에 큰 관심을 가져왔음을 알 수 있다.

인공지능분야의 또하나의 갈래인 기술활용 측면은 산업용 드론이나 재난용 로봇 기술등으로 실현되고 있으며 그 중요성과 필요성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

이세돌 구단과 알파고 대국으로 돌아가서 이 대결이 세기의 대결이 된 것은 사실 기계가 인간을 이겼다는 '결과'에만 있지 않다. 사람들이 진짜 열광한 이유는 이세돌 구단이 전체 게임에서는 졌지만 한 경기만큼은 이겼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지고도 작은 전투 승리에 열광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는 인간 마음 탐구에 있어 현재 인공지능의 수준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깔려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바둑마저 기계가 사람을 이겼지만, 하지만 그것이 곧 사람 마음은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환호하는 것이다. 바둑에서 기계앞에 인간의 무력함을 확인했지만 기계가 인간이 아님도 동시에 확인시켜주었기 때문이다.

?

이러한 사실은 30년 가까이 전에 쓰여진 이 책이 지닌 주제와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샘, 일라이자 등과 같은 인공지능 컴퓨터가 수행하는 능력이 인간의 사고과정으로 나온 것과 동일하다면 기계는 '생각'할 수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그런 의미에서 알파고 대국은 인공지능의 딥마인드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여야하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기계가 인간 마음을 실현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또 달리 보아야 한다라 말한다. 책에 언급된 인공지능 대화 실험에서 일라이자는 인간의 "생각할 수 있어요?"라는 질문에 거듭해서 버벅되는 모습을 보인다. 일라이자가 자연스럽지 못한 대답을 하는 것은 그 프로그램에 저장된 패턴이 일치하는 것을 대답으로만 내놓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과 그것에서 비롯된 대화는 일관되지도 항상 논리적이지도 않다. 인간의 '적응성', '독창성' 등으로 표현되는 이러한 자유의지 앞에 인공지능은 한계가 분명하다. 이 책도 개념적으로 기계가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에 오류는 없지만, 인간의 인지과정은 현재 컴퓨터로는 구현할 수 없다고 인정하는 듯하다. 따라서 우리의 뇌가 컴퓨터 일 수는 있지만, 현재 우리가 알고있는 것과는 다를 것이라 말한다. 인간의 뇌를 CPU에 비유한다고 해도 컴퓨터의 중앙처리장치가 비분산적 속성인 것에 비해 인간의 뇌는 분산적이라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결함 발생시 우아하게 저하되는 인간의 뇌 앞에 단숨에 끊겨버리는 컴퓨터는 인간의 사고 기능을 구현했다기에는 한참 무리가 있는 것이다.

?

그러나 저자는 인공지능의 가능성만큼은 열어두고 있다. 책의 마지막에서 연결주의 네트워크 등으로 언급되는 병렬분산처리가 새로운 세기의 인지과학 분야의 큰 축이 될 거라 말하고 있다. 책이 나오고 30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 저자의 예상이 인공지능 연구분야에 얼마나 들어 맞았는지 살펴보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중요한 것은 이 책이 인공지능 기술이 인간의 근원적 욕구와 맞닿아 있고, 그것을 알기위한 인공지능 연구와 그로부터 파생 될 여러가지 인간심리적, 철학적 의미를 심도있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인간의 '자유의지'라던지 '기계적 생각능력'도 지금보다 더욱 고도화된 수준에서는 인간의 주체성과 존재의 동일성 논란을 야기시킬 여지가 충분하다. 그 때에는 기계의 생각함이란 것이 형식상 오류 없음에서 내용상 자연스러움으로까지 더 나아갈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 책이 가진 주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고 앞으로도 그러할 거란 생각이 든다.
s*****2 2020.03.15.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잭 코플랜드, [계산하는 기계는 생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까?], 박영대 옮김, 에디토리얼
"잭 코플랜드, [계산하는 기계는 생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까?], 박영대 옮김, 에디토리얼" 내용보기
잭 코플랜드, <계산하는 기계는 생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까?>, 박영대 옮김, 에디토리얼 1. 무엇을 물을 것인가?많은 경우에 인공지능에 대한 담론은 유치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나만 해도 '2060년까지 인간과도 같은 인공지능이 발명돼 전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곧, 특이점이 도래할 것이다.'라는 주제로 친구와 호텔 뷔페 내기를 했으니 말이다. TV광고에서도 정치인
"잭 코플랜드, [계산하는 기계는 생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까?], 박영대 옮김, 에디토리얼" 내용보기
잭 코플랜드, <계산하는 기계는 생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까?>, 박영대 옮김, 에디토리얼

1. 무엇을 물을 것인가?
많은 경우에 인공지능에 대한 담론은 유치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나만 해도 '2060년까지 인간과도 같은 인공지능이 발명돼 전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곧, 특이점이 도래할 것이다.'라는 주제로 친구와 호텔 뷔페 내기를 했으니 말이다. TV광고에서도 정치인들도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을 필두로 한 4차 산업혁명을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사실 뭐가 대단한 혁신인지는 모르고 떠들어대는 말 같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인공지능은 문학작품, 내기, 그리고 마케팅의 소재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인공지능 담론은 기술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풍부한 질문으로 구성돼 있다. 특히 인공지능에 대한 질문은 인간에 대한 질문과 맞닿아 있다. 인공지능에 대한 빛나는 초기 논의를 하였던 튜링 또한 "사고 과정 전체는 여전히 우리에게 불가사의로 남아 있지만, 나는 생각하는 기계를 만들려는 시도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밝혀내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거라고 믿습니다."(74)라고 말했다. 그리고 인간의 대한 질문들은 전통적인 철학적 질문들인 의식, 자유, 언어, 감각 등을 총망라하고 있다. <계산하는 기계는 생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까>라는 이 책의 원제가 "Artificial Intelligence: A Philosophical Introduction"인 이유다. 인공지능이 가져올 황금빛 또는 잿빛 미래를 그리기 이전에, 특이점을 판단하는 기준인 '인간'에 대해 더 자세히 캐물어야 하는 것이다.

2. 모든 문제는 정의하기 나름(3.6 결정의 시간)
신입생 때 난상토론을 펼친 적이 있다. 이 책에서도 다루는 전통적인 철학적인 주제들을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자기자신의 의견만으로 토론을 벌인 것이다. 나는 항상 전투적으로 토론에 임하기보다는 양쪽의 의견을 듣고 있다가, "근데 여기서는 일단 'xx(주제어)'가 뭔지 정의하고 시작해야할 것 같아요."라고 말하곤 했다. 선배는 "넌 맨날 그런 얘기를 한다."고 했지만 사실 맞는 말이다. 우리가 무엇에 대해 토론할 때, 그게 도대체 무엇인지, 어디까지를 그것이라고 볼 것인지 약속을 해야 의미 있는 대화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던지는 여러 질문들, 지식(앎)이 무엇인지, 존재(하는 것들)는 무엇인지, 생각은 무엇인지, 의식은 무엇인지, 자유는 무엇인지... 이런 모든 문제가 결국 우리의 정의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저자는 인정하고 시작한다. 저자는 '테세우스의 배'(125)라는 고전적 문제를 가지고 이를 설명한다. 배가 낡아서 모든 부품을 교체하였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그 낡은 부품들을 가지고 배를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테세우스의 배는 어느 쪽인가, 원래 부품들을 갖고 있던 배인가 새로운 부품들로 수리된 배인가? 이는 우리의 결정(정의)으로 해결되는 문제이다. 물론 여기서의 결정은 자의적이어서는 안 되며, 여러 상황들을 고려해서 나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류의 질문들은 '끝까지 떼를 쓰며 반대하는 사람'의 가능성을 닫아둘 수는 없다.

3. 컴퓨터가 언어를 이해할 수 있을까? : 존 설의 중국어방 논증(6장)
기존에도 흥미롭다고 생각했던 설의 중국어방 논증을 저자는 더욱 흥미롭게 격파한다. 설의 중국어방 논증은 '의미론이 구문론에 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설이 펼친 사고실험이다. 어떤 방에 '조'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어떤 규칙에 따라 입력된 중국어에 대한 답변을 내놓는다. 물론 그에게 중국어는 어떤 형상일 뿐이기에 그는 중국어를 모른다. 설이 주장하는 바는 이처럼 인공지능이 번역을 하거나 대화를 한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문장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이른바 '시스템 반론'을 펼쳤다. 물론 중국어방 안의 조가 중국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중국어방의 시스템, 알고리즘 등이 중국어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설은 중국어방의 부분요소(조)가 중국어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중국어방 전체가 중국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논리적 비약의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읽었을 때 설의 논증은 매우 설득력 있다. 그러나 저자의 촘촘한 반박에 나는 결국 중국어방 논증이 '증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결론내렸다. 중국어방 논증이 설득력을 얻는 것은 결국 우리가 '이해' 내지는 '생각'의 주체로 생물학적 인간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설의 논증은 그가 이미 가진 전제(그의 인간관, 그의 이해/생각관 등) 위에서만 유효하다. 시스템 반론을 펼치는 사람들은 설의 전제를 편견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타파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모든 문제는 정의하기 나름'이다.

4. 컴퓨터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 자유(의지)론과 인과(결정)론(7장)
자유의지론과 인과결정론. 이것은 철학도에겐 영원하고도 엄청난 떡밥으로 아무리 논쟁해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분석철학자답게 우선 우리가 어떤 의미로 자유를 사용하고 있는지 분석하며 자유에는 여러 종류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첫째로 그가 포착한 자유는 '비선호 상황에서의 무작위 선택'이다. 비선호 상황에서의 무작위 선택은 컴퓨터의 결정과 상당히 유사하며 따라서 ‘컴퓨터의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말이 가능하다는 것이 저자의 의견이다. 저자는 지적하지 않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비선호 상황을 상상하기란 그것조차 어렵다. 우리는 모든 선택을 할 때 나름의 이유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왼쪽의 초콜릿과 오른쪽의 초콜릿 사이에서 하나만 선택하고자 할 때, 내가 오른손잡이라 오른쪽을 선택할 수도 있고, 그냥 변덕을 부리고 싶은 마음에 왼쪽을 선택할 수도 있다. 컴퓨터의 무작위 선택은 어떠한가. 인과적이고 결정적인, 따라서 예측가능한 메커니즘을 따른다는 기계의 일종인 컴퓨터가 진정한 무작위를 시행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저자는 '가이거 계수기' 또는 '양자적 증폭기'를 얘기하고 있는데, 나는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여전히 의문이 든다.)
둘째 저자가 주장하는 '(결정론과)양립가능한 자유'가 있다. 이는 자유의 반대가 결정론이 아니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피터가 사만다에게 청혼하기로 결정한 것은 여러 상황들을 고려하고 판단하여, 어떤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누구도 피터가 사만다에게 청혼할 것을 강제하지 않았다. 실은 매우 상식적인 이야기이다. 저자는 전통적인 자유의지 vs. 결정론의 문제를, '자유'라는 것을 매우 좁게 해석하며 해결해버린다. 물론 이러한 자유에 대한 정의는 그렇게 배척할 만한 것도 아니고, 수천 년 걸친 문제를 단 번에 해결하니 속이 시원하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뭔가 아쉽다.
이렇게 아쉬움을 느낀다면 당신은 셋째, '전통적인 자유의지'를 신봉하는 사람일 것이다. 이는 사실 일상적인 의미라기보다 존재론적인 함의가 매우 크다. 기독교 영향권에 있던 서양철학은 지속적으로 인간의 타락을 설명하기 위해서 자유의지를 신봉할 수밖에 없었다. 어떠한 인과적인 상황도 뚫고 나오는 인간 존재의 죄성, 혹은 후에 가서는 이 세계를 정복해 나가는 위대함 등, 인간 우월주의 사회에서 자유의지란 인간에게 최고의 존재론적 가치를 부여하는 하나의 수단이었고 현대에도 큰 의미를 차지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자유의지론자들은 소유할 가치가 없는 종류의 자유를 탐낸다."(326)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 또한 결정의 문제이다. 과학적으로 결정나지 않는 이러한 초월적인 자유를 인정할지 말지는 결국 내가 어떤 세계관을 갖고, 어떤 인간관을 갖고 있는지를 반영한다. 저자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 있지만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끝까지 떼를 쓰며 반대자로 남을 것 같다.

5. 컴퓨터가 의식을 가질 수 있을까? : 의식(8장)
의식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저자는 오랫동안 의식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척하라'는 원리의 희생양"(344)이라고 말한다. 프로이트는 의식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논의할 필요가 없다며 무의식에 집중했지만, 오늘날 과학계와 철학계는 의식이 도무지 뭔지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무의식보다 베일에 쌓인 존재가 바로 의식인 것이다.
의식이라는 단어는 흔히 '의도'라는 말과 유사하게 사용되는 것 같다. '의식적으로' 그랬다는 것은 곧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행했다는 것이다. 또한 오감을 사용하여 세상을 지각하는 상태를 나타내는 것 같기도 하다. '환자가 의식이 돌아왔습니다'는 것은 곧 눈을 뜨고 모종의 방법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확실히 의식이 없다고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잠을 잘 때나 혼수상태의 사람의 경우이다. 의식이란 이처럼 다분히 감각적이고 의지적인 대상에게 사용할 수 있는 것 같다. 의지는 앞에서 논했으니 여기에서는 감각에 집중해 보고자 한다.
세상을 감각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이 컴퓨터에게 있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컴퓨터는 카메라와 마이크로 정보를 받아들이고 또 내보낸다.(후각은 아직인 것 같지만 나머지 감각들은 어느 정도 구현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인간의 것과 본질적으로 유사한 것일까? 네이글의 논의가 매우 흥미로웠다.(8.6) 박쥐 특유의 음파탐지라는 감각 방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인간은 과학을 통해 밝혀냈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박쥐가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없다. 이는 마치 잭슨의 논의(8.7)에서 고통에 대한 모든 생물학적 지식을 알고도 선천적으로 고통을 느낄 수 없는 메리가 치료를 받고 고통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생물학적 지식들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진짜 감각'을 별도로 알게 된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 두 논증이 말하는 바는 인간의 감각은 결코 물리주의적 지식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곧 완전히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앎에 대한 세분화를 통해 반박한다. 다시 말해, X의 물리생물학적 메커니즘을 아는 것과 실제 X를 체험해서 아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음이 명백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다고 하여 X가 본질적으로 물리생물학적 현상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문제 또한 '정의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한다. 네이글이나 잭슨의 논의가 설득력을 얻는 것은 인간의 모든 것, 특히 그중에서도 전혀 물리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 인간의 감각(감정, 고통 등 포함)들을 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믿음 때문이다. 실제로 우울증과 관련하여 많은 정신의학자들이 이를 물리적으로 설명하고, 물리적인 약물이 우울증을 치료하는 데 효과가 있다는 점은 물리주의의 입장을 대변하지만, 우리는 다른 한 편으로 약물로 치료되지 않는 정신적인 고통이나 아픔이 있으며 단순히 의료기술이 완전히 발달하면 인간에게 우울이 없어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원론자에 가까운 나는 인간의 정신이 지닌 고유한 능력들이 결코 물리적인 뇌세포로는 완전히 설명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철지난 형이상학의 유산을 받드는 입장에서 인간의 지식을 넓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려는 물리주의의 욕망은 존중하지만, 인간은 결코 인간의 지식으로 세상을 손에 넣을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6. 인공지능 담론의 훌륭한 길잡이
여태까지 책이 소개하는 철학적 쟁점들을 위주로 글을 썼고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내가 서두에 언급한 내기에서 어느 쪽에 걸었는지를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특이점은 오지 않는다'에 걸었고, 나아가 내 생각은 '특이점이라는 말 자체가 허구다'라는 과격한 입장이다. 저자의 입장은 특이점이 오고 말고는 경험적인 문제로 미뤄두고 오직 사변적인 가능성을 따져 묻는 것인데, 결국 계산하는 기계는 생각하는 기계의 적합한 유형이며, 컴퓨터가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 견해는 언제나 결정이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나 같은 반대자의 존재를 항상 열어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꼭 책의 내용에 동의해야지만 그 책이 훌륭하고 소장하고 싶은 책인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책이 인공지능 담론에서 이미 훌륭한 고전의 반열에 들어선 책이라고 생각한다. 나야 철학적 쟁점들만 소개했으나, 사실 이 책은 컴퓨터의 역사와 기본적인 컴퓨터 작동방식, 그리고 인공지능에 대한 기존의 접근법(기호체계)과 최신의 접근법(병렬분산처리)을 모두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야말로 인공지능 담론을 총망라하고 사람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양으로나 질적으로나 묵직한 책 한 권이라 할 수 있다. 두 번 읽었는데도 아직 궁금한 부분이 많다. 이 부분들은 책을 읽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채워나가고 싶은 마음이다.

#네이버원탁의서평단
YES마니아 : 로얄 e*****m 2020.03.15.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인간을 닮은 인공물을 만든다는 것
"인간을 닮은 인공물을 만든다는 것" 내용보기
도전장은 던져졌다    손안의 비서 - 시리와 빅스비, 알렉사 - 와 이야기하고, 허공에 대고 혼자 중얼거리는 이들이 더는 기괴하게만 보이지 않는 요즘이다. 21세기의 세 번째 10년이 시작됐고 사회 전반에서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 시대에 돌입하고자 박차를 가한다. 한 대기업에서는 로봇업무자동화 시스템 8대가 249명의 몫을 해낸다. 이는 237명이 연간 총 3만9000시간을 투입해
"인간을 닮은 인공물을 만든다는 것" 내용보기

도전장은 던져졌다 

 

손안의 비서 - 시리와 빅스비, 알렉사 - 와 이야기하고, 허공에 대고 혼자 중얼거리는 이들이 더는 기괴하게만 보이지 않는 요즘이다. 21세기의 세 번째 10년이 시작됐고 사회 전반에서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 시대에 돌입하고자 박차를 가한다. 한 대기업에서는 로봇업무자동화 시스템 8대가 249명의 몫을 해낸다. 이는 237명이 연간 총 3만9000시간을 투입해야 하는 업무다. '알 파트장'이라고 불리는 이 인공지능은 사내 네트워크에 정식으로 '동료'로 등록되어 다른 직원과 협업이 가능하다.

 

알파고가 바둑 명예 9단에 등극하면서 인공지능에서 장밋빛 미래를 보는 이들과 더불어 그 이면을 우려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체스와 달리 바둑에서 기계가 인간을 넘어설 수 없다던 호언장담은 전설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기계의 진화는 어디까지일까? 기계가 스스로 생각하고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의식이란 무엇일까? 이 책 <계산하는 기계는 생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까?>에 손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저자인 잭 코플랜드는 심리철학, 언어철학, 논리학을 주제로 강의하고 글을 쓰는 학자이자 튜링 연구 전문가다. 그가 이 책을 쓴 건 1993년이다. 4반세기 전 인공지능의 현실은 어땠을까? 그리고 다가올 다음 세기를 맞이하며 어떤 전망을 그렸을까? 저자는 컴퓨터가 마침내 체스판에서 인간 정신을 이기는 때가 되면, 하나의 강력한 상징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했다(69). 인공지능 딥 블루가 체스 세계 챔피언을 꺾은 지 20년이 흘러 '알 사범' 알파고는 68승 1패라는 화려한 전적을 남기며 2017년 은퇴했다. 듣도 보도 못한 알파고의 포석은 이제 많은 바둑 기사가 즐겨 쓰는 수법이 되었고 인간 기사들은 알파고의 후배들과 대국 훈련을 한다.

 

이 책의 원제는 <인공지능: 철학적 입문>이다. 과학과 인문학의 첨병과도 같은 '인공지능'과 '철학'이 제목에 나란히 있는 것을 보라(입문이라는 말은 일단 제처두자). 코플랜드는 직관적으로 사유하는 방식이 적용되지 않는 사례들을 들어, 일반적인 사유 방식이 모든 사례에 적용할 수 있을만큼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만, 분명 저자는 평이한 문장으로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썼다고 했는데?(데카르트 곱이 대체 뭐지...) 머리속이 혼란하다.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스핑크스를 마주하는 것처럼 긴장과 흥분으로 저자의 논지를 열심히 쫓아가다 보면 십중팔구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만나게 된다. 그렇다, 독자는 사고실험을 해야 한다. 

 

모든 사고실험에 개념상의 오류는 없다. 그렇다고 근거도 없다. 저자의 말대로 '만약'이라는 거대한 함정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을 뿐. 이 구덩이를 잘 헤쳐갈 수 있을까? 책장을 넘기며 독자는 생각의 지평을 사정없이 늘리고, 쥐어짜고, 거꾸러뜨릴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도전장은 던져졌다.

 

 

생각하는 존재 컴퓨터? 컴퓨터! 

 

18세기 줄리앙 드 라 메트리가 "인간은 시계다”라고 했을 때 당신은 분노했다. 나를 시계 따위와 비교하다니! 근 2세기가 흘러 '당신은 컴퓨터 같네요'라는 말은 셈이 신속 정확하다는 뜻이며, 당신도 라 메트리 시대와 같은 분노로 치를 떨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 알파고군요!' 2020년의 어느 날 이런 소리에 당신은 '아이고, 아니죠'라며 손사래를 칠 테지만 한편으로 뿌듯해할지 모른다. 나의 지능과 지식은 인간을 넘어선다! 심지어 어떤 이들 - 과학자나 미래학자를 포함하여 - 은 기계가 되기를 원한다.

 

기계가 생각하는 것이 개념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는 논지는 이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는 다시 인간은 생각하는 컴퓨터인가?라고 되물을 수 있다. 4장 '기호체계 가설'에서 특히 잘 드러나는데, 기호 유형이 복합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이론에서 인간의 뇌는 글자 그대로 컴퓨터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컴퓨터를 제외한 인공물은 생각할 수 없다는 강한 기호체계 가설은 SF 영화만큼이나 흥미롭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컴퓨터다(180). 입력 장치와 지식 저장소에 따라 내부 처리와 출력 방식은 꽤 차이가 나겠지만. 

 

존 폰 노이만은 중앙처리장치에서 순차적 방식으로 과제를 수행하는 컴퓨터를 고안하면서 컴퓨터의 아버지가 되었다. 하지만 부모 세대는 저물고 자식 세대는 변하기 마련 아닌가. 이제 비(non)노이만형 컴퓨터는 병렬 및 분산 처리 방식으로 인간 신경망을 모사하면서 발전하고 있다. 코플랜드는 “100년 안에 컴퓨터라는 단어의 의미가 너무 많이 바뀌어서 뇌를 컴퓨터라 하더라도 반박에 부딪힐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리라” 확신한다(425). 하지만 우리가 언어 공동체로서 컴퓨터라는 '의미'를 끊임없이 다듬어야 하는 의무도 강조한다. 20세기 양자역학의 출현으로 인간 이해 능력과 판단 형식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았다.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는 "과학의 진보는 단순히 우리가 새로운 사실을 알고 그것을 이해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해한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느냐 하는 것을 항상 거듭 새롭게 배워나가면서 성취하는 것"이라고 했다. 테세우스의 배(125)를 통해 공동체에서 언어의 합의가 인공지능에 관해 어떤 관념과 개념을 '만들 수' 있는지 생각할 수 있는데 이는 의식의 영역까지 확장한다.

 

한편 일부 미디어가 인공지능을 다루는 데는 볼멘소리를 낸다. 정보는커녕 오해만 불러일으키는 떠버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지능형' 운운하는 미디어의 과대광고 - 이젠 어느 정도 사실이 되어버린 문구 - 에 현혹되지 말 것을 당부한다. 이는 4차 사업혁명의 물결에 올라탄 우리 역시 명심해야 하는 바다. 이어지는 맥락에서 한스 모라벡의 주장 역시 과장과 속임수의 경계를 오간다고 꼬집는데 코플랜드는 과학자는 책임감을 느끼고 주요 기술혁신이 사회를 어디로 이끄는지 전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211). 어찌 됐든 모라벡의 예측은 현재 빠르게 현실이 되어 가는 듯하다. 2040년(특이점에 근접해 있다!) 모라벡의 예측이 과연 어느 과녁에 꽂힐지 두고 볼 일이다.

 

 

똑똑하지만 상식은 없는 친구 

 

모라벡의 비전에 "공상적인 과장"이라며 날을 세웠어도 코플랜드는 '생각하는 존재'에 대한 개념을 현상학적 구분과 생물학적 구분에서 찾는 것은 잘못이라고 짚는다. "대규모의 적응성"을 바탕으로 행동 지향성을 갖는, 즉 행위 하는 존재는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현재 서로에게, 그리고 생물학적으로 우리와 가까운 동물에게만 적용하는 용어와 카테고리를 인공물로 확장할지에 대한 결정이다(282).

 

"최고의 고양이 모형은 고양이다." 사이버네틱스 분야를 창시한 노버트 위너가 한 말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은 적절한 인간 모형이 될 수 있을까? 앨런 튜링은 생각하는 기계를 만들려는 시도가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믿었다. 저자도 이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미션은 확실해졌다. 인간을 잘 알고 싶다면 인간을 닮은 인공물, 인간형 인공지능을 만들어라.

 

인간의 의식 작용과 거의 일치하는 인공물에는 '생각하는 존재'라는 개념을 사용할 수 있다. 여기서 가장 까다로운 것이 바로 지식 문제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아는 것이 곧 힘 아니던가. 더글러스 레넛이 주도한 CYC 프로젝트는 백과사전 Encyclopaedia에서 이름은 따왔다. 흥미롭게도 이 프로젝트는 존재론, 인식론, 논리라는 철학 영역에서 가장 큰 열매를 맺었는데 레넛은 CYC를 대규모 "존재론적 공학"이라고 한 바 있다(224). CYC는 심리치료사 일라이자와는 확실히 달랐다. 하지만  레넛이 CYC는 전자 백과사전이 아니라고 강조했음에도 미시세계에서 표식 붙이기를 하는 전문가 시스템의 한계도 벗어나지 못했다. 인간의 지식 모델은 색인된 목록이 아니다. 이 똑똑한 친구가 "더 넓고 덜 질서정연한" 세계에서 제대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레넛은 지식에는 반드시 그만큼, 아니 그 이상의 상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이 상식은 인간이 보기엔 어처구니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CYC를 손수 코딩하는 사람은 마치 그 옛날 라 메트리가 인간을 시계에 비유했던 것처럼 모욕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기호체계 가설에 기반한 CYC는 1994년 일종의 자가학습이 가능한 '교차점'을 지나, 2001년이 되면 인간 수준의 지식을 갖춘 시스템으로 완성되는 데 목표를 두었다. 2001년 목표는 실패했다. 평균적인 성인의 지식을 따라잡으려면 CYC는 적어도 2190년까지 학습해야 한다. 작고 작은 우리의 두뇌가 새삼 신비롭기만 하다.

 

상식과 더불어 '잊어버릴 줄' 안다는 것 역시 이 신비의 영역일 것이다. 똑똑한 컴퓨터는 인간과 다르게 망각하지 않는다. 강제로 코드를 뽑거나 고장 내지 않는 한. 모든 것을 기억하는 컴퓨터와 달리 인간은 기억의 조각들이 떠돌다 느닷없이, 한꺼번에 맞춰지기도 한다. 이 작은 뇌는 분주하게 움직이며 때때로 착각하고, 실수하고, 잊어버리기도 한다. 특히 '망각하기'는 더 넓고 덜 질서정연한 세계에서 빛을 발하는, 컴퓨터와는 다른 인간 특유의 적응성이다.

 

 

기억과 망각 사이

나의 기억력은 마치 쓰레기 하치장과도 같지요. 

호르헤 보르헤스, <기억의 천재 푸네스> 중  

 

보르헤스의 단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이레네오 푸네스는 모든 것을 기억한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순간까지도 모조리 기억하는 그는 마치 기호체계 가설의 현신인 양, 글자 그대로 두개골 속에 슈퍼컴퓨터가 들어 있다. 소설의 화자는 푸네스에 관한 기억을 떠올리며 '기억한다’라는 단어는 '신성한 동사'라고 한다. 그리고 이 말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단 한사람 - 이미 죽었지만 - 오직 푸네스 뿐이라고 말한다.

 

칠판에 그려놓은 원, 직각삼각형, 마름모와 같은 것들이 우리가 완벽하게, 그리고 즉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그런 형상들이다. 이레네오에게는 말의 곤두선 갈기들, 언덕 위의 가축떼들, 다른 모양으로 바뀌는 불길, 그리고 그것의 셀 수 없이 많은 재들, 긴 임종의 밤 동안 수없이 바뀌는 망자의 얼굴들을 가지고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 나는 그가 하늘에서 한꺼번에 얼마나 많은 수의 별을 보았는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하지만 “시계 같은 푸네스”의 사고 능력에는 회의를  품는다. 푸네스의 기억에는 개념화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푸네스는 정면에서 보는 개와 2/3 지점에서 보는 개가 왜 똑같은 이름을 가져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화자는 이를 두고 푸네스가 플라톤적인 사고, 추론을 할 수 없었다고 회상한다.

사고를 한다는 것은 차이점을 잊는 것이며, 또한 일반화를 시키고 개념화를 시키는 것이다. 푸네스의 풍요로운 세계에는 단지 거의 즉각적으로 인지되는 세부적인 것들밖에 없었다. 

 

우리는 정면에서 보든, 측면에서 보든, 다양한 견종을 다른 날에 걸쳐 여러 번 보든 모두 '개'라고 인식한다. 소설의 화자는 독자에게 요청한다. 한 번 들었던 것은 정확하게 반복할 수 없고, 그래서 간접화법으로는 자신이 푸네스를 만나서 느낀 경외감을 제대로 전하긴 힘들겠지만, 부디 상상력을 발휘해달라고. 우리에겐 푸네스 같은 능력이 없다. 그래서 화자의 말을 통해 푸네스의 의식 세계를 상상해 볼 뿐이다. 어쩌면 이 말은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하는 보르헤스의 당부가 아닐까? 

 

보르헤스는 책을 제외한 모든 매체가 인간 육체의 확장이라고 했다. 현미경은 시력을, 전화기는 목소리를 확장한 것이다. 하지만 책은 상상력의 확장이라고 했다. 시력을 잃은 그가 시각이 지배적인 매체인 책을 인간 지성과 상상력의 확장이라고 꼽은 것은 어떤 의미일까? 보르헤스는 자신이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기억 속에 산다고 했다. 우리는 과거 속에 존재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누구인지, 이름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할 것이라고. 인간은 모든 것을 기억하거나,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존재가 아니며 그 중간, 기억과 망각 사이에 존재한다고 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상상력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제 인공지능 연구는 모 아니면 도인 아버지 세대를 지나 병렬분산처리(PDP) 방식으로 거듭 성과를 내고 있다. 20세기에는 민달팽이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았지만, 산발적인 병렬 활동은 역치를 통해 ON과 OFF 사이를 무수히 오가며 놀라운 학습 능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PDP 역시 우리의 작은 뇌를 희미하게 비출 뿐이다. (개념적으로)생각하는 기계는 과연 상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까?

 

 

우리 감각의 지향점

 

인공지능 연구의 첫 황금기인 1960년대. 미디어학자 마셜 맥루언은 미디어는 인간 육체의 확장뿐 아니라 정신의 확장이라고 했다. 차기 미디어가 무엇이 되건, 의식의 연장이라는 것이다. 맥루언은 ‘지구촌'의 개념을 이야기하면서 전자 기술은 인간 중추신경계의 연장이며 지구의 집단적인 신경 회로가 24시간 돌아가면서 준지각력이 있는 무형의 거대 메타 커뮤니티라고 정의했다. 또한 "너무 많은 정보를 접하게 되면 사람들은 곧바로 패턴을 찾아내서 이를 구조화하려 한다. 예술가의 일은 패턴을 찾는 것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구조화를 '네트워크 하기'로 이해하면 이는 빅데이터의 정보 처리 방식과 다름없다. 맥루언의 비전은 초고속 인터넷의 등장으로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초연결 시대에 접어들면서 우리의 생활 패턴은 사람이 아닌 빅데이터로 재구성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맥루언의 신묘한 통찰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이 같은 비전을 그렸냐는 것이다.

 

맥루언의 주장은 과학적 방법과는 거리가 먼 것이기에 충격을 넘어 광대, 사기꾼이라는 비웃음까지 샀다. 그는 시골 출신(캐나다는 당시엔 그야말로 깡촌이었다.) 영문학자고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중세 종교 개혁의 문건,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 모더니즘의 수사학 등을 연구해서 다음 세기 미디어의 전망을 예측했다. 같은 맥락에서 코플랜드의 고찰을 눈여겨봐야 할 이유다. 독자는 책장을 넘기며 고대(그리고 외계의) 수수께끼와 여러 사고 실험으로 머리를 싸매게 된다. 저자는 책의 원제처럼 인공지능의 ‘개념’을 철학적으로 분석한다. 이 책의 독법은 인공지능 기술이 아닌 ‘인간’을 좀 더 잘,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사고 과정이다.

 

조지프 와이젠바움은 심리상담 프로그램 일라이자를 만들고 뜻하지 않은 효과에 의문을 품는다. 왜 인간을 모델로 하는 인공지능을 만들어야만 할까? 아이처럼 유년기가 있고 언어를 배우면서 자신의 기관으로 세계를 감각해서 궁극적으로 인간 사유의 전 영역을 고려하는 로봇을 왜 만들어야 하는지 말이다(52). 우리는 기술 진보를 향해 달려가는 것뿐 아니라 왜 그래야 하는지 끊임없이 상기해야 한다. 인간이 생물학적 표본으로 인간 존재를 더 잘 이해하고, 삶을 가치 있게 하고, 시대에 따른 개념 구조를 공동체의 합의로 끊임없이 다듬어가는 것이 인공지능 연구의 바탕이어야 한다.

 

4차 산업혁명에 따른 초연결, 빅데이터, VR/AR 등 미래 기술이 사방에서 화두인 요즘이다. 너도나도 5G 시대를 선도한다고 외쳐댄다. 사회가 기술 진보를 쫓아 숨 가쁘게 달려가는 한편 지능형, 스마트 운운하는 떠버리 미디어에 현혹되지 말라는 코플랜드의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최소한 알맹이와 쭉정이를 구분하기 위해 우리의 눈과 귀가 머물 곳은 어디일까? 맥루언은 <미디어는 마사지다>에서 말한다. “우리는 백미러를 통해 현재를 본다. 우리는 미래를 향해 뒷걸음질한다." 포스트휴먼 시대에 인공물과 공생을 넘어, 상생의 시대를 맞고자 하는 인류가 되새겨 볼 만한 말이다. 

 

#원탁의 서평단

a******e 2020.03.15.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인공 지능은 얼마나 인간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까?
"인공 지능은 얼마나 인간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까?" 내용보기
인공 지능은 얼마나 인간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까?. 본서 ‘계산하는 기계는 생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까? (원제: Artificial Intelligence: Philosophical Introduction, 1993)’는 과연 인공지능은 인간에 얼마나 가까워 질 수 있는지에 대해 철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도입부에 다양한 인공지능 프로그램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데, 서적 출간 당시인 1993년에도 마치 사람
"인공 지능은 얼마나 인간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까?" 내용보기

인공 지능은 얼마나 인간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까?.

본서 계산하는 기계는 생각하는 기계가 될 수 있을까? (원제: Artificial Intelligence: Philosophical Introduction, 1993)’는 과연 인공지능은 인간에 얼마나 가까워 질 수 있는지에 대해 철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도입부에 다양한 인공지능 프로그램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데, 서적 출간 당시인 1993년에도 마치 사람처럼 대화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게임을 하는 등 주목할 만한 결과를 내고 있었다.  저자는 과연 이러한 인지적 모사를 하는 인공지능 프로그램들이 그 자체로서 사람처럼 이해하고 생각하면서 결과를 내는 것인지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인공지능이 사고를 할 수 있는지를 구분하는데 전통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튜링 테스트, 격리된 채로 사람과 인공지능을 각각 인터뷰해서 이 둘과 대화한 사람이 어느 쪽이 컴퓨터이고 어느 쪽이 사람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그 때는 소위 생각하는 컴퓨터라고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서에서 반론으로 제기하는 것처럼 생각을 시뮬레이션한다고 해서 생각한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생각하는 존재의 개념 자체가 부정확하기 때문에 특정 테스트를 통과한다고 정말 사람의 생각이 기계의 하드웨어에서도 구현되고 있는지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본다. 다만 인간이 그러하듯, 인공지능이 광범위한 적응성을 통해 인간의 독창적이고 합목적적인 행동과 언어를 수행해 나갈 때, 인공지능도 생각을 한다고 결정을 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비록, 인간과 똑같은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이 부분은 사실 나 아닌 타인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영역이라고 본다. 타인이 나와 같이 생각을 하는지는 그의 언어와 행동을 통해 유추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뇌 안에서의 벌어지는 생각의 과정이 나의 그것과 같은지는 확인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관찰을 통해 결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의식적 존재가 갖는 미묘한 느낌을 퀄리아(qualia)’로 표현했는데, 이를 뇌 안의 생물-물리적 현상이라고 보는 물리주의자와, 생물-물리적인 것을 초월한다는 이원론자로 나뉘며 두 관점 중 어느 것이 맞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여 결국 나의 퀄리아가 다른 사람의 퀄리아와 일치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는 근거를 제시한다.

이러한 인공지능의 구현이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기호체계 가설병렬분산처리로 제시하고 있다. 기호체계 가설은 인간의 마음은 보편적 기호체계이며 생각하는 보편적 기호체계를 구성하는 일이 원리상 가능하다는 추정이다. 병렬분산처리는 인간의 신경세포의 연결을 본 따서 만든 인공신경세포들의 층간 연결을 통해 학습과 훈련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최근 인공지능 분야에서 각광받는 딥러닝의 기본 발상이다.

최근 인공지능은 연구의 영역을 넘어서 일반 생활 속에도 파고 들고 있으므로, 그것이 측정하고, 분석하고, 정의하며, 추진해 나아가는 큰 흐름에서 어떤 분야도 자유롭다고 하기 어려울 것 같다. 2020년 현재의 기술로도 인간의 종합적 사고를 모방하는 강()인공지능은 그 어떠한 실마리도 없으며, 특정 작업(바둑, 영상 및 음성 인식, 운전 등)을 대체하는 약()인공지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1993년에 소위 생각하는 컴퓨터인 강인공지능에 대해 논의를 한 부분이 흥미롭다. 특정분야에서는 인간 이상의 수행력을 보이는 기술의 발전을 이룩한 인공지능의 철학적 토대를 탐색하며, 오히려 인공지능이 모방하는 인간의 지능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잠시나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기술적으로 숨가쁘게 앞서 나가는 인공지능에 대한 철학적 접근은 마치 SF영화처럼 흥미로운 측면이 있지만 어떻게 보면 인간의 지능에 대해 답하기 어려운 문제(생각, 자유의지, 의식은 무엇인가? 타인이 나와 같은 형태의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있는가?)의 답을 구하는 과정을 통해 역설적으로 인간의 지능이 가지는 경이로움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l*****6 2020.03.14.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