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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대선은 어찌 보면 이 땅에서 보수와 진보를 가치로 내건 사람들이 총력전으로 맛붙은 선거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흔히 보수가 집권을 하든, 진보가 집권을 하든 최소 10년은 유지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할 때, 대한민국 정치역사의 대부분을 장악했던 보수가 집권 5년 만에 진보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의 실정이 두드러졌다는 얘기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이전 정권이 저지른 수많은 민주주의 가치들에 대한 훼손과 국민과의 소통이 먹통이 된데 따른 결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가 다시 승리를 했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민주적 가치는 부차적인 것이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이것은 진보를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정치혐오와 무관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이 책은 이처럼 정치가 국민들에게서 떠나 제도권 정당들에게 돌아가 버리고, 남은 빈자리에서 피어 오르는 절망과 혐오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안을 모색한 책이다. 저자는 이긴 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사회경제 구조 속에서, 서로 다른 가치를 지닌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공적 현실을 짓는 일이 정치라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러한 공적 현실 짓기의 상실을 목격하고 있으며, 이는 달리 말하여 정치의 상실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여기서 말하는 상실은 온전한 것을 잃어버림이 아니라, 온전한 것을 만들어 가려는 노력의 잃어버림을 의미한다. 저자는 먼저 우리가 상실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며 오늘날 이 땅의 정치를 진단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진단 위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상실된 정치를 다시 되찾을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 자유주의, 진보, 소통 그리고 유토피아를 상실했다고 말한다. 이런 5가지의 상실이 정치의 상실을 가져왔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흔히 시민이 정치에 참여할 때,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근대국가가 형성되면서 국가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모든 사람이 참여하는 민주주의는 작동하기 힘들게 되었다. 대의민주주의에서 민주주의란 구성원들의 직접적인 참여라는 원래의 이상 대신, 제도와 절차를 핵심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제도와 절차에 따라 대표를 선출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대의민주주의에서 평범한 시민들의 정치참여는 오로지 투표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투표가 끝나면 시민들은 곧 정치에서 소외되었고, 투표로 선출한 대표들을 시민들이 통제할 수는 없었다. 정치권력을 소유하는 이들은 민주주의를 서슴없이 파괴하고, 대항민주주의자들 역시 정당중심, 인물중심으로 된 기존의 제도 속에서 모든 것을 입안, 결정하면서 민주주의에서 멀어지고 있다. 이는 정치는 정당위주로 흘러야 한다며, 시민들은 그저 투표만 하라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저자는 우리사회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현상을 민주주의의 상실이라고 말한다. 또한 저자는 우리사회는 자유주의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고 강조한다. 자유주의는 존재의 개별성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며, 민주적 원칙을 존중하고, 그 원칙에 근거해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주의는 안정된 민주주의에서만 확고히 보장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사회에서 말하는 자유주의는 보수와 진보 모두에 의하여 심하게 훼손되어 왔다. 우리나라의 보수를 엮어온 두 가지 요소는 정치적으로는 반공이념과 사회경제적으로는 기존 기득권세력의 이권보호이다. 이 두 요소는 여태껏 서로 완벽하게 상호보완의 역할을 해왔다. 그러기에 이들은 시장과 자유주의라는 이름을 걸고 자신들의 이익을 방어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진보 역시 자유주의를 진보의 상대개념으로 규정하여, 보수의 논리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처럼 보수에 의해 오염되고, 진보가 버린 자유주의 역시 우리사회에서 상실되어 버렸다. 즉, 자유주의의 상실이 오늘날 우리사회의 모습인 것이다. 민주적 가치는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투명성, 절차성, 비폭력성이 담보될 때 비로소 그 빛을 발한다. 그러나 우리사회의 진보는 그 가치를 종종 저버리며, 그것은 운동과 정치를 동일시하는 경향 때문이라고 저자는 비판한다. 사회변혁을 위한 운동은 같은 신념을 공유한 사람들이 펼치는 결집된 집단활동이지만, 일상의 정치는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공적 현실을 지어내는 일이다. 군사독재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된 이 땅의 진보는 지금은 자유주의 좌파, 도덕주의, 반신자유주의를 표방하면 누구나 진보로 생각한다. 이러한 개념에는 일관성이 없고 상호모순이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더군다나 2012년 통합진보당 사태는 이런 진보에 대한 불신과 편견을 일반 시민들에게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이를 진보의 상실이라고 규정하는 저자는 이제 진보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야 하며, 또한 운동에서 정치로 옮겨와야 할 때라고 말한다. 최근 우리사회에서는 가치다원주의가 신념의 사유화로 나타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것은 아무도 나의 신념을 비판할 수 없으며, 타자의 신념을 비판할 때는 오로지 나만이 가진 신념을 기준으로 사용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현상이 정치적으로 표출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 분파주의이며, 우리사회에 만연한 현상이기도 하다. 이를 소통의 상실 때문이라 저자는 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민주주의 역사에서 상실한 유토피아는 바로 참여민주주의라고 한다. 저자는 유토피아를 우리가 이르고자 하는 최종 목표가 아니라, 더 나은 세계가 가능하다는 믿음이라고 정의한다. 달리 말해서, 유토피아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사회세계를 바꾸는 열정이며, 변화에 대한 추구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사회는 제반 문제는 유토피아의 상실 때문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우리사회는 제도권 정치는 물론 시민사회에도 이러한 정치의 상실이 만연되어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민주주의를 역행시키는 보수세력과 그 앞에서 무력하거나 혹은 스스로 민주주의 원칙을 저버리는 진보세력의 모습을 보면서, 저자는 우리사회의 구성인 개개인의 정치적 자유를 확립하고, 그것을 보장하는 바람직한 민주주의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성숙한 시민들이 정치적 주체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책에서 이를 ‘자유로운 시민 게릴라’라는 개념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정치적 자유를 존중하는 사람들이다. 정치적 자유는 민주시민들이 공유 하고 있는 기본가치이자 시민의 기본권리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자유는 경제적 필요에 우선한다고 한다. 그리고 정치적 자유의 본질은 차이에 대한 인정이라고 강조한다. 우리가 경제적 필요를 충족하고자 하는 이유는 개별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의 확장 때문이며, 우리가 민주주의를 고집하는 이유는 그 개별인간의 자유의 확장을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보장하는 유일한 정체이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정치적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시민 게릴라가 되어 밑으로부터의 민주주의를 단단하게 엮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차이에 대한 인정은 민주주의의 가치인 정치적 자유를 위한 연대를 쉽게 이룰 수 있도록 한다. 이익을 목적으로 뭉친 연대는 이익이 달라지면 무너지지만, 민주적 원칙과 행위를 신뢰의 기반으로 삼는다면 견고한 연대가 이루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연대만이 우리가 겪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역행과 정치의 상실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지난 대선이 너무나도 치열했던 탓인지, 혹은 그 결과가 시대의 역행이라 생각한 탓인지 아직도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또한 그것은 대부분 무관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역행의 원인이 정당이나 한, 두 명의 정치지도자에 의존한 결과일수도 있다. 그것이 문제인 이유는, 설사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온다 할지라도, 시민들을 수동적 존재로 전락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시민사회의 강화가 그를 극복할 수 있는 토대가 됨을 강조한다. 정치가 떠난 자리에 남아 있는 상실들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금 노력을 기울일 때가 아닌가 싶다. 칼 만하임의 말이 새롭게 다가온다. ‘우리가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세계와 현실과의 불일치가 극복될 수 없다고 가르치는 것이 이데올로기이고, 극복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유토피아이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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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노무현 대통령의 묘비에는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말이 쓰여 져 있다. 불과 몇 시간 전만해도 나는 깨어있는 시민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 《정치가 떠나간 자리》를 읽으면서 깨어있는 시민이라는 의미 자체를 모르고 있었던 ‘국민’ 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책의 저자는 현재 뉴욕 뉴스쿨 정치학과에서 정치이론 및 법철학을 전공하고 있는 연구자이며, 자유주의 및 공화주의 이론, 정의론, 민주주의 이론, 입헌주의 이론, 정치철학사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이 시대의 자유주의자라는 정체성과 깨어있는 시민으로서 이 책을 집필하였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보수와 진보에 대한 정치성향의 비판이 아닌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짚어주며 우리가 잃어버린 정치의 의미를 다시 되찾기 위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 우리나라는 2017년이 민주주의 30년 되는 해이다. 지난한 30년의 굴곡진 정치사에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사실상 깊이 뿌리지 못하고 있는 지금의 정치현실이다. 더군다나 자유시장주의로 인해 자본주의가 브레이크 없는 차처럼 폭주하고 있는 이 때에 민주주의는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 정치의 가장 큰 문제는 민주주의가 깊숙이 뿌리를 내리기 이전에 자본주의가 지나치게 앞서갔다는 것이다. 저자 역시 우리 사회에서의 민주주의 상실은 시민들의 직접적 참여의 부재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토대가 부실한 탓이라고 한다. 오히려 현실의 정치구조와 시민들의 직접적 참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민주주의 상실을 가져왔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의 상실’은 민주주의의 상실, 자유주의의 상실, 진보의 상실, 소통의 상실, 유토피아의 상실이 총체적으로 드러난 결과이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이 책을 통해 꼭 이해하는 개념으로 두 가지 키워드를 제시하고 있는데 바로 ‘도망자 민주주의’(fugitive democracy)와 ‘자유로운 시민게릴라’라는 개념이다. *‘도망자 민주주의’(fugitive democracy)는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대의민주주의에서는 원래 민주주의가 의도했던 시민의 적극적인 정치참여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의 함의다. 민주주의가 도망쳐 버린 자리에 시민들의 모습. 정치엘리트들이 남용하는 정치에 무지할 뿐만아니라 자발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구경꾼’으로 그려내고 있는 시민의 모습을 일컬음이다.저자는 이러한 구경꾼의 모습을 한 시민들이 “스스로 바라본 것을 자신의 말로 표현할 수 있고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으며 이런 해석을 다른 사람들과 주고받을 수 있는 비판적 존재‘ 로 인식할 때에야 비로소 시민들이 스스로 해방된 관객으로 변모할 수 있다고 한다. 랑시에르의 ’해방된 관객‘은 무지와 수동성을 벗어나 앎과 능동성을 추구하는 시민상을 ’자유를 확장하는 시민게릴라‘로 간명하게 표현되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국민이란 개념이 민족이란 개념과 함께 생존 및 필요에 의해서 비롯된 개념이지만 시민은 안정된 민주정체의 가치와 틀을 존중하는 개념으로서 차이가 있다고 한다. 민주주의의 한 근간을 이루는 민주주의의 people이라는 말의 번역은 국민이라 부르는 것보다 ‘차이와 개인성을 인정하는 결속된 정치주체’라는 속성을 가진 시민에 더 잘 어울린다고 한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잘 드러난다. 깨어있는 시민의 참 뜻은 자기만의 견해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독립된 주체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독립이 계란에 바위치기에 불과하였지만 결국은 수많은 계란의 깨짐으로 독립을 이루어내었듯이 니체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싸울 것이며,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끝내 알아듣지 못할 지라도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듯이 , 매일 떨어지는 바위를 들어올리는 시시포스가 우리의 모습일지라도 ‘깨어있는 시민’은 멈출 수도 없고 멈춰서는 안되는 민주주의의 뿌리이며 근간이다. ‘자유로운 시민 게릴라’는 우리가 잃어버린 정치를 찾게 해 줄 열쇠이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시민 개개인이 독립된 존재로서 정치에 참여하기 위해서 글쓰기를 하라는 조언이 실려 있다. 이 부분이 정말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는데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설계하는 일로 사유하며 성찰함으로써 ‘함께 참여하는 정치’에 다가가라는 것은 점점 인터넷이 점점 발달하면서 정치의 형태가 매우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통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최근 읽은 정치서적에서도 인터넷에서 형성되고 있는 ‘헤테로토피아(이견과 차이의 중요성)’나 ‘호모토피아(합의와 동의)’와 같은 새로운 계급의 ‘자유로운 시민 게릴라’ 형태에 귀추를 주목하고 있는데 온라인에서 형성되는 시민참여는 다른 어떠한 집단보다도 빠르고 쉽게 뭉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자신이 생각하는 뜻의 적확한 표현과 깊은 사유가 바탕이 되는 글쓰기가 더욱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어떤 나라보다 민주주의의 역사가 짧은 우리나라는 현재 여러 가지 숙제를 안고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절차적 민주주의가 견고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민주적 문화의 혁명을 이루어 내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보수-진보 양 세력 간에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는 보수-진보의 대격돌이라는 말이 붙을 정도로 팽팽하게 대립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보수 일변도의 사회에서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추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진보의 연대는 필수적이다. 서로간의 화합과 균형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에 당면한 문제이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도 시민의 힘이다. 《정치가 떠난 자리》로 자유로운 시민의 한 걸음을 겨우 디뎌본 기분이다. 수준 높은 정치철학서로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왜 필요한지를 느끼기에는 , 충분한 책이다. 스테반 에셀이 무관심이야말로 민주주의 최고의 적이라 하였듯이 참여하는 시민, 깨어있는 시민으로서 이 책의 일독은 불가피해 보인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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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자유주의자라 칭하는 저자 김만권은 지난 겨울에 우리가 맞이한 실패를 어떻게 우리가 받아들이고 이제 더 다음의 실천을 위해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를 위해 이 책, '정치가 떠난 자리'를 썼다. 그에 의하면 지금의 우리 시대는 무엇보다 '정치가 상실된 시대'다. 왜 그는 이렇게 보는가? 그가 가지고 있는 정치에 대한 정의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진정한 정치의 의미란 바로 이렇다.
개인들이 '서로 다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 '서로 다름'이 함께 공유하거나 협력할 수 있는 공통의 공적 현실을 만드는 것이다. 정치는 바로 이런, 각자 서로 다른 가치를 지닌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공적 현실을 짓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런 공적 현실 짓기의 상실을 목격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정치가 이런 공적 현실을 짓는 모든 노력인 이상 이를 정치의 상실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p. 14)
이 책은 크게 1부와 1부로 나위어져 있는데 1부의 내용이 바로 '정치의 상실'을 다룬다. 이 책은 상실된 정치를 되찾는 그렇게 대안을 모색하는 책이므로 이렇게 먼저 우리가 마주한 현실의 적나라한 모습부터 다루는 것이다. 1부에 실린 다섯 편의 에세이는 결정적으로 우리에게 정치의 상실을 가져온 그 대표적인 원인들이다. 김만권은 바로 이러한 민주주의의 상실, 자유주의의 상실, 진보의 상실, 소통의 상실 그리고 유토피아의 상실이 궁극적으로 정치의 상실을 가져왔다고 보고 있다. 민주주의의 상실은 대의제로 자리잡은 민주주의가 시민의 참여 보다는 엘리트 주의에 빠져 어떻게 정작 주된 참여자가 되어야 했을 시민들이 구경꾼으로 전락하게 되었는가를 다룬다. 자유주의의 상실은 이제 보수의 가치고 대변되고 있는 이 자유주의가 그들만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내세운 반공 이데올로기에 의해 어떻게 자유주의의 진정한 가치들이 왜곡되어 변질되었는지를 밝힌다. 그가 보기에 지금 자유주의를 운운하는 보수주의자들은 모순의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자유주의는 무엇보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며 스튜어트 밀이 말했듯이 대화와 타협을 그 차이를 줄여나가는 신념이다. 하지만 지금의 보수들은 어떠한가? 자기들과 다른 주장은 모두 '종북'아니면 '좌익'으로 모아 억압하고 대화와 타협을 하기 보다는 밥그릇부터 빼앗아 생존마저 위협하는 일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그들이 믿는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 자체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이니 모순의 존재인 것이다. 문제는 비단 보수에게만 있지 않다. 그건 진보 진영도 마찬가지다. 세번째 에세이, 진보의 상실은 특히나 진보적 가치를 믿었던 사람들에겐 더없이 충격으로 다가온 통합진보당 사태를 다루고 있기에 뼈 아프다. 진보라고 해서 민주주의적 가치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합진보당 사태에서 구당권파는 자신의 세력을 지키기 위하여 폭력과 억지로 민주주의적 가치를 크게 훼손시켰다. 그들이 공격한 보수들처럼 그들 역시도 스스로의 신념을 배신하는 행위를 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 저자는 지금 우리의 진보 진영이 아직도 운동과 정치를 구별하지 못해서 생겨난 현상이라고 말한다. 80년대와 90년대 운동의 논리와 현실 정치의 논리는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 논리를 여전히 수구하려 하자 그만 가장 우선적으로 지켜야 하는 민주적 가치마저 훼손시키고 마는 자가당착에 빠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수든 진보든 그들 스스로 모순의 존재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우리 현실에서 정치는 LTE 급 속도로 사라져버리고 만 것이다. 현실이 그러하니 보고 있는 시민 역시도 힘이 날리 없다. 이런 존재들이 어우러진 척박한 현실은 더 좋은 세상에 대한 믿음을 잃게 만들었으며 특히나 2008년의 촛불 집회처럼 그렇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거세게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며 악착같이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만 행해 온 정부에서 느낀 소통의 부재는 더욱 정말은 모든 정치적 행위에서 주체가 되고 참여자가 되어야 했을 시민들을 더욱 빠르게 정치에서 물러나게 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김만권은 이러한 현실 분석을 거쳐 정말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대안은 무엇인가를 바로 2부에서 탐색한다. 그에게 있어 진정한 대안은 어디까지나 현재 자꾸 정치로 부터 뒷걸음질 치고 정치는 오로지 엘리트들이 하는 것이라 여기고 스스로는 방관자로 남으려는 시민들을 다시금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정치적 참여로 이끄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정치적 현실의 문제점이 무엇보다 시민들을 위해서 움직여 줄 견제세력이 없다는 것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정당이 아니라 보다 많은 왕성한 활동을 하는 시민단체들이다. 다양한 방면의 시민들의 결집된 힘을 보여줄 시민단체들이 아주 많이 육성되고 적극적인 활동을 하는 것만이 점점 엘리트 주의가 되어 시민들로 부터 유리되고 있는 이 '정치의 상실 사태를 교정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가 바라보는 모델은 시민단체 활동이 왕성한 독일이나 스웨덴 같은 나라들이다. 바로 그 왕성한 시민단체의 활동은 오로지 시민 스스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정치적 참여의 주체가 될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김만권은 우리와 같은 시민들 스스로 그 필요성, 아니 우리들 스스로 정치적 참여의 주체가 되는 일은 바로 정치의 본질에 부합하므로 그 당위성을 자각시키기 위해 바로 이 책을 쓴 것이다. 그는 말한다. 무엇보다 정치적 자유가 경제적 필요보다 우선이라고. 그리고 그 정치적 자유의 확장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자발적이고도 적극적 시민들의 게릴라적 활동 이라고.
바로 정치적 자유의 확보를 우선적인 목표로 활동하는 시민게릴라야 말로 이 정치가 떠난 자리를 다시 메울 수 있는 효과적인 대안이라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정치적 자유를 경제적 필요보다 먼저 우위에 두는 건 무엇보다 2012년 대선 결과 때문이다.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오히려 기득권을 대표하는 존재에 투표를 하는 이 계급배반현상 때문에 정치적 자유를 경제적 필요에 우선시킨 것이다. 아담 쉐보르스키의 이론을 빌려 이러한 계급배반현상이 일어나는 까닭은 사회적 약자들이 민주적 가치를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탓에 일어나는 일이므로 그는 무엇보다 그 민주적 가치를 제대로 경험할 수 있도록 정치적 자유의 확장을 우선하는 것이다. 한데 왜 굳이 게릴라인가? 그건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이 남아있는 많은 이러저러한 쏠림 현상 때문이다. 이번 대선 결과에서도 드러났듯이 아직도 우리는 지역주의에 빠져 있으며 이런저런 이념 프레임에 갇혀 있으며 부동산 신화에 목매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지역적, 정치적, 경제적 쏠림을 지양하기 위하여 저자 김만권은 게릴라가 될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게릴라'가 뭘까?
여기에서 '게릴라'라는 용어는 정책, 사안, 필요에 따라 연대하고 활동하고 흩어지고, 다시 새로운 정책과 사안에 따라 연대를 모색하고 활동하고 참여하는 활동 방식의 이미지를 투영한 것이다. 자유로운 시민게릴라는 굳이 특정 정치집단을 지지하는 일에 집착하지 않고, 제안되는 정책과 사안에 따라 지지 여부를 판단하며,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 공익에 좀 더 기여하는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찾아서 그들과 유연한 연대를 모색한다. 정책, 사안, 필요의 공익기여의 판단 기준은 물론 공유된 민주적 원칙에 얼마나 상응하느냐가 될 것이다. 또한 연대와 지지의 대상에 대한 판단은 진보와 보수를 떠나 얼마나 그 세력이 민주적 원칙을 지지하고 고수하고 있는지가 될 것이다. (P. 219)
바로 이것이 게릴라가 된다는 것의 의미이다. 다분히 자유주의적 발상같아 보이지만 사실 이는 푸코의 '헤테로토피아'에 근거한 것이다. '헤테로토피아' 란 푸코가 바랐던 정치적 유토피아였다. 애초에 시민 게릴라라는 개념 자체도 그가 제시한 것이었다.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헤테로토피아의 성격은 '뿌리없음'이다. 정치적으로 해석해 보자면, 뿌리 내리지 않음이 차이를 인정하는 가장 좋은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특정한 장소에 깊이 뿌리 내린다는 것은 일정의 영역을 차지하는 행위다. 하나의 확고한 영역을 얻은 존재는 자신의 영역 안에서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존재로 변하기 십상이다. 그래서인지 푸코는 이런 뿌리 없는 이상적인 헤테로토피아를 바다를 떠다니며 결코 하나의 항구에 뿌리 내리지 않음이 게릴라의 이미지와 상응한다고 보았고 이런 이미지에 착안하여 자유를 확장하는 시민게릴라라는 개념을 제시했던 것이다. (P.236)
시민게릴라는 바로 이러한 세상을 지향하며 바로 이 곳이 정치를 상실한 오늘의 우리가 도달해야 할 이상적 영토이다. 물론 저자의 말이다. 여기에 약간 개인적 의견을 첨가하자면 이게 그리 쉬운 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러한 무정형의 탈주의 선들을 실천적으로 변화를 위한 하나의 힘으로 만들어 내는 건 정말 어렵다. "말은 쉽지"란 말이 괜히 있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문제는 어떻게 이것을 실현할 수 있을까이다. 일례로 최장집은 어떻게든 조직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개인들의 희구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위한 힘을 만들어내기가 어렵다고 했는데 이 또한 그 다양성을 고루 존중하면서 그 자체로 중심에 있지도 않으면서 하나의 힘으로 협력한다는 게 실상은 정말 어렵기 때문이다. 뭔가 '틀'이 있지 않으면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흐름들을 모을 수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설사 게릴라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저자 스스로도 말했든 유대와 연대는 여전히 필수로 남는다. 그런데 유대와 연대를 하면서도 또 어떻게 영역화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것도 역시 커다란 문제이다. 과연 유대와 연대의 목적이 달성된 뒤 쿨하게 흔적없이 산포될 수 있을까? 역사적 경험이 보여주듯이 그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이 가능하게 하려면 또 하나의 게릴라적 조직이 필요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여전히 남는다. 물론 이것을 한 방에 해결하는 방법이 하나 있다. 그건 개개의 시민들이 더없이 성숙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오로지 '백의종군' 하듯이 제 한 몸 돌보지 않고 목적을 위해 봉사하고 연대를 이루고도 제 영역을 굳이 찾으려 하지 않으며 노선과 이념 그리고 방법이 설사 자신이 원하는 것과 차이가 나더라도 타당하면 겸허하게 수용하는 그런 아량을 가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쉬울 리 없다. 아마 이게 그냥 가능하다면 게릴라 같은 것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 개인과 조직을 어떻게 균형있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이다. 헤테로토피아는 그야말로 들뢰즈의 '리좀'과도 같다. 이러한 풀뿌리와 같은 고유의 존재성으로 빛나는 흐름들을 어떻게 조화롭게 잘 엮어서 변화를 만들어 내는 고원으로 묶어 낼 것인가? 그렇게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권력은 되지 않을 수 있는 방법들이 필요하다. 시민 스스로 적극적 능동적 정치 참여의 주체가 되는 것도 어렵지만 이것은 더욱 어렵다. 지은이는 이런 어려운 일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엔 그 당위성에 대한 부분만 나오고 그것에 대한 실천적인 방안들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다행이 이 책이 완결은 아니다. 여기서 이어지는 또 한 권의 책이 준비중이라고 한다. 어쩌면 그 책에서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의문들을 풀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빨리 볼 수 있게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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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에 정치가 눌러 앉았던 적도 없으니 떠났다는 표현은 한국사회를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 것 아닐까? 어쨌든 비어버린 그 공허함, 부재의 아쉬움만은 충분히 전달된다. 모 작가의 소설이 너무 정치를 지향한다고 비난하던 뉴라이트의 정말 지나치게 무식한 행동대원의 말처럼 정치는 시민사회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해괴한 인식이 뿌리깊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시민들은 투표행사를 위한 선거이외에는 정치에 참여하거나 관여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사회의 정치에 대한 인식이 이 모양이다 보니 시민사회에 정치가 존재할리 만무한 것은 당연한 것이고, 정치와는 무관했던 시민들이 선거 날 투표하는 내용이 무지(無知)에 근거할 수밖에 없는 것은 불 보듯 뻔한 것 아니겠는가?
저자는 이러한 투표, 소위 대의민주제하에서의 비민주적이고 시민의식이 부재하는 정치의 비극이 안타까웠을 것이다. 한국인의 투표는 결코 정치적이었던 적이 없으며, 오직 지연과 혈연, 지역적이며 경제적 소망이었을 뿐이다. 물론 양식(政治的 良識)있는 사람들의 투표가 존재하긴 하지만 무지의 인민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니 이렇게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비단 이번 대선의 결과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선거를 보며 내 주변의 이들은 입을 모으곤 했다. ‘사람들의 의식이 깨어나야 돼’라고. 또한‘저 지역 좀 봐, 뻑 하면 노동쟁의를 벌이고 공권력에 무참히 당하면서도 그 주체에 다시 투표하잖아’ 결국 민주적 형식행위로서 전락하고 굳이 엄청난 국고를 낭비하면서 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서 이 말을 하고 있는 것도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 같다. 깨어나려 하고,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미 한정적이고 자기들끼리만 매번 같은 얘기를 반복해야 아무런 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민주주의, 자유주의, 진보, 유토피아의 상실을 설명하는 저자의 열변은 아마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잘 알고 있는 내용일 것이다. 그래 안타깝고 아쉽다. 민주주의는 더욱 후퇴하고, 진보는 자기의 정체성은 물론 스스로 민주적 근간을 훼손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누리는 자유가 평등한 사회에 대한 염원이 자취를 감춘 사회에 어찌 절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저자가 지적하듯이 한진중공업 해고근로자를 응원하던 희망버스에 탑승했던 시민들처럼 ‘자유’란 이미 평등해야 한다는 것을 체화하고 있는 많은 시민들이 있으며, 또한 동행하지는 못했지만 그 참뜻을 깊이 응원하는 시민들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회의를 멈출 수가 없다. 이들에 대한 자유의 침해가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여기는 다수의 시민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계급에 반하는 투표를 하고 있지 않은가? 이 점에 대한 저자의 믿음은 몇 가지로 요약되는 듯하다.
정치는 기성의 소수 제도정치세력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시민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정치이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민주정이기에 지금까지 외면했던 시민의 깨어남을 위해 식견있는 기성의 정치인들은 시민참여 정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시민들 또한 정치극장을 팔짱끼고 관람만 하는 수동적이고 무지한 자세를 탈피하고 “자유를 확장하는 시민 게릴라”로서 능동적으로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전자의 방법론으로 진정 퇴행하는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와 자유, 평등의 가치를 되살리려 한다면 진보세력은 분파적 신념에 매몰되지 말고 신뢰를 기반으로 한‘연대’, 즉 시민의 정치 참여는 물론 자유주의를 비롯한 혁신세력과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후자를 위해서는 시민들의 자유에 대한 사유와 실천의 용기를 말한다.
이러한 제안을 위해 한국사회의 정치 현실이 삶의 목적을 생존으로 바꾸어 놓은 국가 중심의 개발독재에 뿌리를 둔 천민자본주의에 연장에서 해독하며 우리의 민주주의가 공존의 모델이 아니라 생존의 모델로 전락하면서 시민들이 정치적 자유의 토대라는 기본을 잃어버렸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자신의 처지와는 상반되는 집단에 투표하는 계급배반투표를 하는 시민들의 행동은 당연한 귀결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모두 옳다. 그러나 “정치적 자유를 존중하는 시민의 결핍”이 현실인 사회, 경제적 이해득실에 자신들의 정치적 자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편화된 사회에서는 이들을 어떻게 정치적 자유인이 되도록 깨어나게 하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정치적 무지,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무지, 현실을 바꾸기 위한 삶의 열정인 유토피아의 상실을 이해시킬 수 있겠는가? 경제적 번영과 생존에만 매달린 시민들에게 동등한 자유를 누릴 권리가 곧 동등한 존재로서의 인정이며 소통의 시작임을 어떻게 깨우치게 한다는 말인가? 한국사회가 진정한 자유를 지지하고 민주주의의 정체가 안정되는 사회이기를 기대하는 사람들만의 대화만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얻어내지 못하게 된다. 이번 18대 대선의 선거처럼 말이다. 쳇바퀴처럼 돌기만하는 지식인이라 자처하는 이들의 지혜가 깨어있는 시민들보다 결코 깨어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오히려 문제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다만 능동적인 시민정치 참여에 대한 프로그램들은 기성 정치의 혐오로 정치에서 철수한 정치적 자유를 존중하던 도망한 시민들이 되돌아와야 할 중대한 시사와 용기를 제공한다. 주변의 누군가가 나보다 못한 자유를 누린다면 그것은 이미 자유롭지 않다는 이해만큼 중요한 인식은 없을 것이다. 우리사회는 분명 수구정권의 5년을 통과하면서 너무도 많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퇴행을 목격해 왔음에도, 다시금 5년을 연장시켰다. 이 절망의 나락에서 시민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되찾는 방법은 정치적 자유에 대한 심각한 인식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이 인식을 자기 계급에 반하는 투표를 하는 많은 시민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는 가에 대한 지속적인 방법론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그들이 읽어 주었으면, 그리고 변화되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결코 이 책을 읽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책을 읽지 않는 시민들이며, 경제가 정치보다 우선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딜레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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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에게 정치과 경제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생계,자기계발,입신양명 모두가 정치,경제의 커다란 범주 안에 놓여 있고 개인은 이것들에 커다란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존재라고 생각한다.한 나라의 정치와 경제가 원활하게 돌아가고 삶의 질이 윤택하면서 행복도 역시 풍요로워진다면 말그대로 '강구연월'의 한 세상을 멋지게 살아갈 수가 있으련만 현실은 그것과는 거리감이 느껴진다.때로는 환멸감마저 느껴지는 것이 현실 정치가 보여 주는 답답함과 울적함이다.
한국정치는 일제강점기를 벗어나 해방이후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을 하는데 정치계의 풍향이 두 갈래로 나눠진다고 생각한다.하나는 친미,친일세력들에 의한 정치의 이합집산이고 또 하나는 신자유주의를 맞이하면서 '강남좌파'라고 하는 세력들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산업화,개발화를 위해 인권,민주화는 유린되었던 시절이 있었고,1990년대 이후 급속히 불어 닥친 신자유주의,FTA 등이 가속화되면서 돈과 물질을 갖은 일부 소수계층에 의한 정치 놀음이 현재까지 횡행하고 있다는 것을 체감한다.
지난 시절 보리 고개를 넘기면서 부모들의 마음은 가난을 되물림하지 않기 위해 그야말로 허리 띠를 졸라매고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돈과 밭을 팔아 도회지,해외로 유학을 보냈다.그들이 현재 한국 사회의 중.장년층에 해당하고 한국 사회를 이끌어 가는 중추적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그런데 그들이 학창시절 정치민주화를 부르짖으면서 일궈낸 정치 민주화는 피부로 느끼는 민주화가 아니다.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헌법 조문은 과연 살아 있는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신자유주의는 정치권의 보수,진보라고 하는 모양과 색깔만 그럴듯 하고 내면은 모두가 사회적 통념인 돈과 물질을 바탕으로 한 권력을 누가 먼저 장악하느냐에 혈안이 되어 있다.
권력이 국민에게 있고 주권이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말은 겉치레에 불과한 요식적이고 가식적인 정치행위일 뿐이다.국민 대다수가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사회에 거는 기대도 커져만 가고 있지만,지난 정권,지난 대선의 결과를 돌이켜 보면 정치권력을 쥐고 있는 계층이 오히려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는 양상이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우선 언론을 장악하고 민간인 사찰,미네르바 사건,MBC PD수첩 파괴 등에서 비롯되고 국민과 토론과 타협의 장은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를 않는다.대신 지식인,보수계층들은 '고소장'으로 그들의 이념과 문제점을 해결하려 든다.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면 일상에서 벌어지는 정치,사회 문제에 국민들도 직접 참여하여 시비를 가려내고 참다운 정치 발전을 꾀하는 것이 마땅한데 총선거,대선에서만 국민들의 심판만 받으려 할 뿐 선거가 끝나면 선량 아닌 선량들끼리만 이합집산하는 추태를 연출하고 있는 것이 한국정치계의 지도이다.
이러한 정치 추태현상이 지속되는 것을 막으려면 견제세력이 국민들을 위한 실제 세력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한다.여.야의 잘못된 정치관행을 시민단체가 엄격하게 감시하고 제지할 수 있는 안정된 정치쇄신을 일궈 나가야 한다.아울러 시민단체가 정부의 역기능을 감시하고 시정할 수 있는 시민권력을 부여하는 것이 비로소 안정된 정치사회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다해히 이러한 현상들이 미미하나마 '시민 게릴라'형식(팟 캐스트:나는 꼼수다)으로 나타나고 있어 다행이지만 정부의 감시와 통제에 의해 이들의 역할도 중도하차하고 말았던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정치계의 내면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제도와 정책을 '조삼모사'식으로 뒤바꿔는 꼴이 비일비재한 것도 불안정한 정치제도의 단면이 아닐 수가 없다.
또한 보수와 진보,수꼴과 좌빨이라는 용어는 선거철만 되면 '약방의 감초'마냥 등장한다.해방후 지금까지 한국 정치,경제,사회를 이끌어 온 두터운 보수층들은 진보진영에서 제시하는 정책과 이념을 '국론 분열','빨갱이','사상검증'이라는 명목으로 물타기 작전을 꾀하면서 표를 독식하고 정치권력을 장악하려 든다.대다수 사회현상에 관심이 있고 정치의 생리,속성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갑다'라고 넘기고 주체적인 자유인으로 정치참여를 하겠지만 아직도 그러한 말에 쉽게 속아 넘어가는 국민들이 있다는 것이다.우리가 언제 우리 삶에 정치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올바른 정치 가치는 무엇인지 제대로 배운 적이 있었던 말인가.정치꾼들에 쓸모없는 말놀음에 쉽게 속아준 것이 잘못일 뿐이다.선거가 끝나고 과연 정치계의 선량들이 국민의 주권,생계를 위해 헌신하려 했던 지도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이제는 정치도 건강한 정치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시민사회와 함께 상생하는 시대를 넓혀 나가야 마땅하다.물대포,최루탄 등의 데모,저항은 많이 수그러들었지만 정치,경제 계층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는 아직도 불씨로 남아 있다.특히 앞만 보고 달려 온 한국 사회는 결국 사회양극화,사회구성원 간의 불신감만 가중시켰다.정치,경제권력을 철통밥과 같이 쥐고 있는 기존 정치기득권 보수세력의 반공주의,경제기득권 보수세력의 신자유주의는 다원주의를 혐오한다는 점이다.나와 다른 이념,주의,사상은 절대 인정하려 들지 않는 외골수의 체질을 유지하고 있다.이들이 쥐고 있는 아집,집착을 내려 놓고 사회적 약자,소외계층에 대해 배려와 분배의 정신을 갖고 상생의 정신을 이어간다면 한국 정치계는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사회진입이 빨리 찾아 오리라 생각한다.
18대 대선을 치르고 신정부가 들어섰지만 정치권에는 있어야 할 사람이 집을 나간 냥 텅 비어 있는 것만 같다.정치는 혼자서 생각하고 재단하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특히 지난 MB정권에서 여실히 보여 준 인권문제,언론의 자유문제 등은 개선되어 시민사회가 건강하게 정착해 나가야 할 것이다.이것은 이번 정부의 몫이고 꼭 그렇게 해주기를 바랄 뿐이다.공평,공정,정의로운 정치외연을 보여 주어야 할 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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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자유주의, 진보, 소통, 유토피아의 상실은 우리나라 정치의 현상태를 진단하는 주안점이자 잃어버린 민주적 가치를 수호하려는 정치철학 성격을 지닌 에세이북 <정치가 떠난 자리>의 문제제기 담론이다. 열 편의 에세이는 다섯 편의 문제제기와 다섯 편의 해답찾기로 나뉜다. 민주주의 기치(旗幟)로 떠받쳐지는 다섯 가지 가치의 상실은 19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정착되었거나 정착을 고수해온 민주주의의 부재형태이자 정치가 부재하면서 의식있는 시민의 모습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는, 민주주의가 거꾸로 가는 현 정치상태를 역설한 것이다. 2012년 12월의 대선 결과는 잃어버린 민주적 가치를 되찾기 위해 사활을 건 이들의 혼신에도 불구하고 같은 정당이 정권을 고스란히 이어 받으면서 적어도 소통이나 자유의 사수가 쉽지 않으리란 예상과 추측을 낳았다. 가난한 자들은 왜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와 같은 제목의 책이 말해주듯, 나이가 많을수록, 소득수준이 낮을수록 보수에 표를 던진 기이한 선거분석표를 두고 세대론과 계급론이 팽배해지고, 개발과 성장, 독재와 민주화를 겪은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가 다투기 시작했다. 시민은 스스로 투표권을 박탈하면서 민주주의의 부분이기를 포기하는 등 민주주의의 가장 위대한 필요조건인 계급을 지워나갔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안에서 정부의 역할과 성장과 복지, 안정과 개혁이라는 가치가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라는 개념으로 나뉘면서 진정한 자유와 소통, 민주주의라는 가치에 대한 고찰은 물론이고 수호의지 역시 잃어버렸다.
절차적 민주주의와 실체적 민주주의는 어느 하나가 다른 것에 우선하는 성격을 가진다. 자유와 평등, 정의가 민주주의의 가치라는 걸 부정하지는 않지만 이 가치들이 언제나 양립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절차(수단)가 목적을,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예를 들어, 100명 중 49명의 의견이 무시되는 51명의 합의는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방식에 의해 49명의 동의를 이끌어낸다. 정치는 자유롭되 정치권력은 규제되어야 한다는 말은 민주적 가치의 의미와 주체를 설정하고, 그 방법과 의지마저 포함하는 점에서 설득적이다. 이해관계와 득실이 상반된 이들이 한곳에 모인다. 각자 발언 기회를 가지고 문제와 해결법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다수결로 문제의 해답을 찾는다.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선택된 절차(수단)가 각각 혹은 각자의 최대한을 대변해줄 수 없으며 있다해도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수호는 모질고 가혹하며 멀리 내다봐야 하는 일이다. 민주주의 자체가 가져다주는 올바른 정의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복지 안에서도 대학등록금, 육아보육비, 노인연금, 청년취업, 의료 등 어느 것을 먼저 하고 얼마나 할 것인지 치열하게 대립한다. 우리나라 민주정치의 후퇴는 민주주의의 가치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의 핵심에 다가가지도 못하도록 싹을 잘라버렸다.
반면, 정치권력이란 정치 엘리트들의 역할의지에서 나온다. 열린 민주정치라 하더라도 정치권력은 철저히 검증 혹은 규제받아야 한다. 현 민주정치는 정치와 정치권력을 동일하거나 비슷한 것으로 위치시키면서 시민이 주체여야 하는 정치의 자유를 누르고, 담론의 장을 철폐시키고, 정치권력의 파이를 키워왔다. 누구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것과 단일목적을 위해 한 가지 방법론을 도출하는 것의 의미는 다르다. 의견만으로는 목적을 구축하거나 결과를 도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다수결처럼 49명, 499명, 4999명의 의견이 얼마든지 묵살될 수 있는 여지를 떠안는다. 지난 대선 후 두 개로 나뉜 나라를 떠올렸다. 곧이어 파이가 점점 작아져서 아무도 누구와도 교집합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끔찍했다. 민주주의는 포퓰리즘, 선거제도, 대의민주주의 등의 한계를 안고 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갓난아이 수준에서 단 한번도 무언가를 시도해보지 않았다는 점은 여전히 먼 길을 제시한다. 민주주의는 내 것과 네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 되는 최소한의 방법이다. 민주적인 가치는 민주주의라는 장치 아래 수정과 검증, 재설정의 과정이 필요한 통합적이고 입체적인 시도로 수호되어야 한다. 아직 한 번도 진보-보수-진보라는 바톤터치를 못한 우리나라의 정치계보는 여전히 과제가 무겁다. 통합진보당의 신당권파와 구당권파는 평등과 정의를 내세우는 진보 안에서조차 절차적 민주성을 무시하는 등 기존 보수와의 접점을 드러내면서 민주정치에 대한 국민의 기대를 몰살시켰다. 많은 국민이 이 사건으로 시민의 역할을 포기했다. 옳지 않다. 정치는 오로지 시민의 힘으로부터 나온다. 시민은 기득권 싸움과 재산 부풀리기에 능한 정치권력을 견제함으로서 바로잡아야 한다. 민주주의는 (시민 혹은 정치지도자의) 선택이 아니라 (시민 혹은 정치지도자의) 의지의 문제라는 걸 모두가 알게 되는 날이 오기나 할까. 그러니까, 민주주의가 어떻게 해서든 도착해야 하는 항구가 아니라 항구로 가기 위해 올라타야 할 정박된 배라는 것을 이해하게 될 날 말이다. 도착한 항구가 유토피아일지 디스토피아일지는 가봐야 알 것이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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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만권
이 책은 특이하게 에필로그로 시작해서 프롤로그로 끝을 맺는다.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읽은 사람들이 다양한 시선을 가지고 새로운 시민 사회로 발을 내딛길 기대하며, 프롤로그로 마무리를 한 것 같다.
1부에서는 지난 대선 이후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잃어버린 다섯 가지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상실, 자유주의의 상실, 진보의 상실, 소통의 상실 그리고 유토피아의 상실이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사회인데 그것을 상실했다니, 다소 황당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대의 민주제로 인해 참여 민주주의가 훼손되었고, 구경꾼들의 민주주의내지는 도망자 민주주의로 변질되었다고 지적한다. 또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진보의 용어가 혼동이 되면서, 그 본질적인 의미를 잃어버리고 흔들리고 있다고 말한다. 특히 남북한의 대치라는 특수 상황에 대해 약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세대 간, 계층 간, 신념 간의 갈등으로 인해 소통이 되지 않는 사회를 안타까워하고 있다. 유토피아의 상실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부분이었다. 아직도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대목이기도 하다.
2부는 앞에서 언급한 다섯 개를 어떻게 하면 되찾을 수 있는지에 대한 대안을 내놓고 있다. 특히 저자는 시민의 참여와 활동을 중요시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다수 의견을 중시하는 민주주의를 호모포비아적이라 규정하고, 그에 반하여 다양하고 많은 의견을 중시하는 시민 게릴라적인 활동을 높이 사고 있다. 그는 이것을 헤테로토피아적이라고 지칭한다. 그 일례로 작년에 돌풍을 일으킨 ‘나는 꼼수다’와 ‘희망버스’를 든다.
책은 차분한 어조로 조목조목 이유와 예를 들어서,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고 있다. 하지만 읽기는 힘들었다. 이건 아마 내 독서 습관 때문일 것이다. 단문 위주의 글을 좋아하기 때문에, 한 문장이 몇 줄씩 이어지며 긴 호흡이 필요한 이 책은 상당한 부담이었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빙 돌려 말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건 통합진보당 사건을 언급한 ‘진보의 상실’ 부분에서 확실히 느껴졌다. 저자는 거기서 관련된 사람들의 실명을 밝혔다.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신문을 읽어도 다 나오는 이름들이니까.
그렇지만 ‘자유주의의 상실’이나 ‘민주주의 상실’ 같은 부분에서는 모호하게 ‘~세력’ 내지는 ‘~집단’이라고 대상을 언급했던 것에 비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 이름들은 신문에 실명이 나오지 않아서 그런 걸까? 왜 진보 계열 인사들의 이름만 실명으로 콕 집어 언급했는지 잘 모르겠다. 만만하기 때문일까?
뭔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있는데, 그건 꼭꼭 숨긴 채 고상하고 평이하게 포장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리뷰를 쓰는 나도 그러고 있으니까. 처음에는 직설적이고 비속어나 난무했지만, 퇴고를 하면서 용어를 엄청 순화시켰다.
책을 읽으면서 갑자기 화가 났다. ‘왜 또 시민들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려는 거지?’라는 위문이 들었다.
지금까지 이 나라의 역사를 보면, 정치가들이 병신 짓을 해서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상황을 시민들이 피흘려가면서 바로잡아놓았고, 그러면 정치가들이 자기들이 마무리를 하겠다고 하면서 삽질과 병신 짓을 했고, 다시 국민들이 몸 바쳐 제자리로 돌려놓기의 반복이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임진왜란 때도 양반들은 도망갔지만 평민들이 의병을 일으켜 싸웠고, 일본 침략기에도 그랬으며, 4.19때도 그랬고, 6월 민주 항쟁 때도 똑같았다.
그런데 이 책에서도 역시 깨어있는 시민의식 어쩌고 하면서 급기야 시민 게릴라라는 이름을 붙여가며, 대안으로 시민의 정치 참여를 권유하고 있다. 그러니까 시민이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된 이유가, 시민들이 공부를 하지 않고 깨어있지 않았으며 참여를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걸까? 병신삽질만 해대는 정치가들을 몰아내고 국민이 직접 참여하는 민주제라도 만들라는 걸까? 아니면 기존의 정치가들을 다 낙선시키고 시민들이 입후보해서 새로운 판을 짜라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또다시 시민이 나서서 판을 뒤엎고 자기들에게 넘겨달라는 걸까?
시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하고 방관자로 남게 된 이유?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나라를 위해 일하라고 했더니 자기들 배만 불리기 바쁜 새누리당, 자기들 살겠다고 자기 당에서 배출한 대통령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죽으라고 등떠민 민주당, 그리고 채 영글기도 전에 못된 것만 배워갖고 김칫국물 마신 진보당이 자폭하는 동안 시민들은 먹고 사는 일에 열중해야했기 때문이다. 정치를 제대로 하라고, 경제를 살리라고 했더니 자기네 통장 잔고만 늘린 자들 때문에, 생존하기 위해 다른 곳엔 눈 돌릴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다시 그런 시민들에게 피 흘리기를 요구하는 건가? 왜 이 나라는 언제나 시민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는가? 왜 정치를 하거나 정치에 한 발을 담근 사람들은 자기들이 활동할 생각은 하지 않고, 남이 갖다 바치길 바라는 걸까?
물론 깊이 생각하고 공부하는 시민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사색하고 관찰하고 반성해야한다. 하지만 그걸 이용할 생각은 안 했으면 좋겠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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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자는 부당한 권위에 복종하지 않으며, 집단의 위세 앞에 주눅들지도 않는다. 술자리 안줏감으로 씹히고 괘씸죄에 걸려도 어쩔수가 없다. 어느 시대든 신조를 지키는 데는 비용이 따르는 법이다. -유시민 <WHY NOT?> 중에서
시민의 자발적 참여로 운영되는 정당을 만들어, 한국 정치를 바꾸겠다고 했던 유시민은 최근 정계 은퇴를 선언하며, '내가 졌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유시민은 정치활동 중, 시민의 참여가 바탕이 되는 정당 개혁과 정치 개혁을 강조했었는데, 그가 만든 개혁국민정당이든 열린우리당이 정당 모델로 한국 정치에 제대로 정착됐다고 보기 어렵고, 기존 정당이 그 영향을 받아 바뀐 것도 아니기에 유시민의 정치 실패에 대한 평가는 외부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한겨레 신문, 2012.3.16일자 참조)라고 한다. 유시민을 지금껏 진보 정치인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유시민은 진보 정치인이 아닌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정치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책의 시각에서 자유주의자 유시민을 본다면, 그의 정치는 실패가 아니다. 왜냐하면 바람직한 정치개혁은 일부 정치 엘리트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보통의 시민들이 일상의 삶 속에서 자신이 바라보고 목격한 것들을 자신의 언어로 말하고, 자신의 말과 해석을 타자들과 공유하며, 그런 공유 속에서 권력을 찾아내는 것이 참다운 정치이기 때문이다. 민주적 가치를 확산하고 공유해 나가는 일의 주체는 정치엘리트가 아니며, 시민이라고 볼 때 유시민은 이제 직업적 정치인이 아닌, 일개 시민으로 더더욱 정치적이 될 것이라 생각하게 된 것이다. 또한 보수세력에 의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칭해지는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진보진영에 의해 신자유주의 정부라고 불리는 것이 안타까웠던 나는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남겨놓은 정치적 자유가 재평가되어야 마땅하다는 생각과 함께 민주화대표세력인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부라기 보다는 자유주의 지향 정부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경제성장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으며, 환경은 보호되어야 하고, 세상의 모든 사람은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고 믿는 나는, 나 자신조차도 '진보적', 혹은 '왼쪽'이라고 믿어 왔는데, 이 책을 통해 나 역시 진보적이라기 보다는 자유주의자에 가깝다는 것을 알았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잔혹함을 바라볼 수 없고, 다른 사람들이 나와 동등하게 자유로운 상태야말로 내가 가장 자유로운 상태라고 이해하는 나는 충분히 자유주의자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 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다만 나에게 부족한 것은 '정치적 행동'이라는 것 또한 절감하게 된다.
왜 시민이 정치에 진정으로 참여하는 길은 당비를 납부하는 당원이 되는 길밖에 없는 것일까?, 왜 정치참여의 길은 정당을 위한 투표로만 향해야 하며, 왜 정당을 통해서만 정치갈등이 조직되어야 하며, 왜 정당만이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만들어 내는 최선의 길일까? (53쪽)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믿는 대의민주주의에서 시민들이 무지해지고, 수동적이 되는 경향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밖의 일상에서 왜 좀더 자신의 정치색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일까? 옳다고 믿는 것에 왜 더 많은 지지를 보내지 않을까? 왜 먼저 행동하지 못하고 주변의 눈치를 보게 될까? 내 경우, 진보정당에 당비를 내고 진성당원이 되자니 뭔가 꺼림직 하다. 잘못하다가는 좌를 넘어 빨갱이로 비치는 게 아닐까 주저하게 되고, 또 진보정당이라고 해봤자 돌아가는 모양새가 기득권 정당에 비해 다를 것이 없기 때문에 그다지 정당 가입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나마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하는 진보정당의 내부 싸움은 보수정당의 그것보다 혐오스럽다. '진보'를 '도덕'으로 이해하기 때문이 아닌, 기득권에 대한 탐욕을 혐오함이다. 이러한 정당정치의 현실에서 정당 가입을 하지 않은 내 자신의 정치관에 대해 그저 단순히 게으름때문이라기 보다는 정작 지지할만한 '당'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이런 나의 자위를 이 책이 만족시켜 주었던 것이다. 딱히 당원이 아니어도 나는 이미 충분히 정치적이다. 다만, 나 스스로 권력을 만들고 공유하는 주체가 되기 위한 수많은 '나'들과의 공유에 머뭇거리고 있을 뿐이다. 진정한 자유주의자로 거듭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혐오스러운' 정치와 거리두기가 아닌, 일상 속에서 내가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다른 '나'들과 이야기하고, 내 의견이 수많은 '나'들과 다르다면 무엇이 다른지, 왜 다른지에 대해 살펴보고, 합의점을 끌어내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 정치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 것이다. 2012년 18대 대통령 선거는 보수세력을 대표했던 박근혜 후보가 51.55%의 득표율로 민주세력을 대표해서 나서 48.02%를 득표한 문재인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는 결가가 나왔다. 그러나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무시된 49명의 의견은 정말 그대로 묻혀도 좋은 것일까?
우리동네 지하철 역 네거리에 걸려있던 플랭카드. 볼때마다 왠지 무시당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사사키 아타루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변화를 꿈꾸는 것이며, 옛것에 대한 거부이며, 읽고 쓰는 것이 바로 혁명이라고 말했다. 읽고, 읽고, 쓰고, 써라. 지은이 김만권은 이 책을 에필로그로 시작해서 프롤로그로 끝낸다. 그것은 각자 처해있는 상황에서 각자의 맥락에 맞게 스스로를 돌아보며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지은이의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세계를 바꿀 힘은 자아에 있다고 믿었던 세네카의 이야기로 이 책은 마무리되지만, 지은이 자신은 글을 쓰고, 사유하는 일을 통해 공적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고, 혹은 이해시키며, 다중에게 말을 거는 일임을 토로한다. 그것이 지은이 김만권의 자리에서 가장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며, 가장 정치적인 일임을 말이다. 행동하는 시민으로의 거듭남의 시작을 알리는 프롤로그 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읽은 나는 내 자리에서 내 시각으로 책을 이해고, 이해한 것에 대해 내 목소리로 말하는 만큼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도 귀를 귀울이고, 자기목소리로 말한 사람들에게 가해진 폭력에 대해 분노할 때, 성숙한 자유 시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은이가 말하는 자유로운 시민게릴라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지은이의 그러한 주장이 이데올로기적이라기 보다는 유토피아적이라 할지라도 내게는 더 희망적으로 들린다.
시민의 힘은, 시민으로서 삶의 충만함은, 다음 선거일을 기다리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정치에서 민주적 가치를 확장하고 실천하는 데 있다고 제안한다. (261쪽)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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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대통령 선거와 박근혜 정부의 내각 인선과 관련한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의 다툼을 보면서 여전히 우리나라 정치의 구태를 볼 수 있다. 말로만 국민을 위한다고 할 뿐, 실제로 행동으로는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지금 정치인들은 아직도 국민들이 6, 70년대의 일자무식꾼으로 알고 있는 듯 하다. 국민들의 눈높이는 한껏 높아졌지만 이를 충족시켜 줄만한 모습은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정치인들은 내편, 네편으로 나누어서 서로 극한 대립을 보이며 갈등만 양산하고 있다. 21세기는 다양성과 창의성을 중시하는 사회다. 극단적인 이념 대립은 이제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이미 우리 세대는 이념 대립이 가져온 병폐를 보아왔다. 통합진보당 사태는 우리 사회의 진보가 현재 어떠한 모습인지를 보여주는 씁쓸한 순간이었다. 현재는 진실하고 도덕적이며 열심히 일하는 정치인들이 필요하다. 개인적으로는 우리 사회에서 진보니 보수니 하는 주장 자체가 정말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다. 지금까지 내가 봐온 보수니 진보니 하는 사람들도 종국에는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으로 뭉쳐진 정치인들이었다. 진정한 정치인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국민들은 정말 진심으로 국민을 위한 정치인들이 나와 주기만을 바라고 있다. 그런 국민들의 갈망을 팔아 먹는 이들이 현재의 정치인들이다. 지은이는 현재 뉴욕 뉴스쿨 정치학과에서 정치이론 및 법철학을 전공하고 있는 연구자로서, 자유주의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정치 사회적 발언을 해 온 사람이라고 한다. 지은이는 민주주의의 상실, 자유주의의 상실, 진보의 상실, 소통의 상실, 유토피아의 상실 등 다섯 가지의 상실로 한국정치를 진단하면서, 진보진영에서 어떻게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들이 외면을 받았는지, 자유주의가 매도되었는지를 살펴보면서, 자유로운 시민들이 만드는 참여민주주의의 이상이 상실된 현실을 진단하고 있다. 지은이는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개개인의 정치적 자유를 확립하고 그것을 보장할 민주정체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성숙한 시민들이 정치적 주체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민주적 가치에 대한 기회를 확장하고 시민들이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가지고 소통하며 연대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그 곳에서 형성된 국민의 의사를 제도권 내로 수렴할 후 있도록 해야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대의민주주의를 ‘도망자 민주주의’로 은유하면서 개개인이 독자적인 정치적 존재로서 자신과 공동체와 관련된 사안에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고, 민주적 원칙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며 사안과 필요에 따라 유연하게 연대하며 움직이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하는 ‘자유로운 시민게릴라’가 필요한 시점이 왔다고 한다. 지은이는 ‘자유로운 시민게릴라’의 모습을 ‘나는 꼼수다’와 ‘희망버스’의 사례를 비교하면서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대의민주주의의 가장 큰 약점은 국민의 정치적 무관심을 불러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정치 현실이 그에 가까운 모습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정치현실을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지은이가 이야기하는 ‘자유로운 시민게릴라’가 의미 있는 시도일 수는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이 처음 의도와 달리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면 또 똑같은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지금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정치권에 들어가서 하는 모습을 보면 측은한 느낌마저 든다. ‘자유로운 시민게릴라’라는 것이 어디서 불쑥 나타난 것은 아니다. 이미 우리 사회에서도 있어 왔던 것이다. 다만 어떤 식으로든 제대로 관심과 논의의 장으로 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오히려 이제까지는 탄압의 대상이 되어 왔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정치에 새로운 공기를 불어 넣기 위해서는 지은이가 이야기하는 내용에 귀를 기울여 봐야 한다. 시민들이 깨어 있을 때 정치인들은 제 정신을 차린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