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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살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기억나십니까? 저는 열한 살에 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특별하게 기억나는 것이 없습니다. 일기로 적어 놓은 거라도 있으면 기억을 되살릴 수 있겠습니다만 아쉽게도 일기쓰기를 권장하지 않던 시절이라서... 그런 점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작가 자크 스트라우스가 <구원>을 통하여 풀어놓고 있는 열한살 소년의 이야기는 너무 생생해서 마치 영상으로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특히 프롤로그에서“내 나이 열한 살이었을 때...”로 정리하는 기억으로는 난 친구 들 앞에서 울 만큼 어리지는 않았다, 난 학생 교통 순찰대에 가입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컸다 등등 스무가지나 되는 일을 기억해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었지만, ‘설마 열한살 짜리가?’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사형집행에 대한 악몽을 꾸곤 했다거나, 나는 사람들이 아기를 원할 때만 섹스를 하는 게 아니라 재미를 위해서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등입니다. 그런 기억이 없는 저와는 달리 꽤나 조숙한 어린이였던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옮긴 이는 “이 작품은 열한 살 아이인 잭 필제의 때로는 순진하고 때로는 영악하거나 치기 어린 생각과 행동, 그리고 여기에서 비롯된 내적 갈등과 정신적 성장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다.(301쪽)”고 작품의 성격을 정리하였습니다. 성장 소설이라 하면 주인공의 시각으로 혹은 삼자적 시각으로 주인공이 변하는 모습을 그려내게 되는데, 이 작품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이라고 하는 우리에게 생소한 나라에 살고 있는 소년을 주인공으로 다루고 있는 점이 독특하다 하겠습니다.
주인공 잭은 영국계(루이닉) 엄마와 네덜란드계 백인(보어인) 변호사 아빠 사이에서 누나와 여동생을 둔 사내아이입니다. 주인공을 둘러싸고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집안일을 돌보는 많은 흑인들 가운데 수지와 그녀의 아들 퍼시는 잭의 생각이 성장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수지는 잭을 아들이라 부를 정도로 친밀하면서도 야단치는 일을 아끼지 않을 정도로 엄격한 면을 보이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과보호하고 있는 요즈음 부모들이 참고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잭의 부모와 수지와 같이 아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어른들이 사랑과 함께 아이들의 행동을 적절하게 제어하는 사회에서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게 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주인공처럼 열한 살에 자위를 하고 어른들이 보는 성안내서를 읽고 이해할 정도로 조숙한 아이들은 위태로울 수 있겠다 싶습니다. 십대 중반에 동정을 잃은 이매뉴얼처럼 말입니다. 잭 역시 수영장에서 자위를 하는 모습을 수지의 아들 퍼시에게 들키면서 생긴 수치감과 수지의 관심을 나누어야 한다는 죄의식으로 갈등을 겪다가 퍼시에게 피해를 입었다는 식으로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그 결과 퍼시가 집에서 쫓겨나 아버지가 사는 곳으로 옮겨가고 결국은 퍼시가 아버지를 살해하는 불행한 사건으로 이어지면서 잭은 심적 충격을 받게 되는데, 결국은 수지가 퍼시를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주인공과 헤어지는 원치않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앞서도 수지가 잭의 잘못된 행동에 야단을 치기도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잭의 부모님의 역할에서도 주목할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엄마가 가장 높은 수준으로 하는 비난의 행태이자 어떤 행동에 대한 가장 심한 질책은 그것을 ‘용서할 수 없는’ 짓이라고 표현하는 것이었다.(208쪽)”면서 다양한 사례에서 엄마가 야단치는 용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버지는 교육면에서 바람직한 모습을 맡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철학’이라는 말을 맨 처음 가르쳐 준 사람도 아빠였다. 당시 나는 아주 어렸다. 여섯 살이나 일곱 살쯤이었을 것이다. 철학은 착한 것과 나쁜 것에 관한 것이고, 왜 우리가 살아 있는지에 관한 것이며, 하느님과 악마가 있는지의 여부에 관한 것이라고 아빠가 말했다.(216쪽)”
아무래도 성장소설의 독자는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젊은이들일 것 같습니다만, <구원>은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을 두고 있는 부모가 읽는 편이 더 어울리는 작품인 것 같습니다. 내 아이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있고 그런 아이들을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깨우치는 기회가 될 것 같아서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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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 작가 자크 스트라우스의 <구원> 은 굳이 장르로 말하자면 성장소설쪽에 들여놔야할 것 같습니다(저 개인적으론 100% 수긍할 수 없지만요). 사실 성장소설이라는 분야의 장르는 저 개인적으로는 그 다지 익숙치 않는 장르이고 약간의 편견 아닌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뭐랄까 이도 저도 아닌 청소년들을 위한 일종의 본 게임에 들어가기전에 한 두번쯤 경험하게 하는 데모버전 같은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사실 그래서 스스로 선택해서 읽지도 않았고(아 참 물론 호밀밭의 파수꾼은 이와 같은 해당사항이 없지만요)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해야할 것 같습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 <구원> 이라는 작품도 성장소설이라는 자체를 모르고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뭐랄까요 왜 굳이 이 작품에 대해서 성장소설이라고 칭하는지에 대해서 의구심이 들 정도로 상당한 매력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호밀밭의 파수꾼' 을 리바이벌 하는 느낌이 들면서도 인생의 쓴맛, 단맛, 쾌감, 죄책감, 스릴, 감추고 싶었던 욕망들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한번쯤은 겪어봤을듯한 그런 일련의 사태들을 이처럼 농밀하게(열한살의 눈에는 더욱더 농밀하게 보였겠죠) 서사해 놓은 부분들이 절로 수긍가게 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주인공 '잭' 과 잭이 바라보는 또래와 성인들, 남성과 여성, 백인(영국계, 아프리카너계), 흑인, 종교, 죽음, 性, 가치관등 삶의 모든 면에서 부딛혀야 하는 쟁점들에 대한 서사들이 하나같이 독자들 가슴속을 파고 든다는 것입니다. 특히 남성독자들이라면 잭과 같은 사춘기를 자연스럽게 회상하게 되면서 뭐 지금이야 입꼬리를 살짝 치켜 올리면서 웃음으로 마감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세상 무엇보다 심각했던 그런 행동들에 대한 데자뷰를 맛보게 된다는 점이 또 다른 위안거리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음 공식적으로 활자화된 문서를 통해서 면책을 받았다는 그런 느낌으로 말이죠. 또한 여기에 남아공 전반에 대한 역사까지 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죠. 뭐 보어인이나 아프리카너라는 친근하지 않는 용어와 인종적 갈등이나 종교적 갈등등에 대한 남아공 특유의 가치관이 오버 랩되면서 종합적이고 동시다발적인 장면을 대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는 점은 원작의 "dubious salvation" 라는 부분들을 두고 한참을 고민했던 점입니다. 구원이면 구원이지 의심스러운 구원은 무엇일까 뭐 딱히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나름의 느낌으론 작가의 일종의 면피성이라는 생각도 들더라구요 흑인과의 갈등에 대한 나름의 사과와 화해의 장을 마련한다고 했지만 이 역시 피해자의 시선에서는 완벽하지 못한 뭐랄까 마지못해 아니면 떠밀려서 혹은 세계가 바라보는 따가운 눈총 때문에 ,,, 그리고 또는 사춘기의 돌발적인 사고나 행동이 성인이 된다고 해서 100% 면제부를 획득하는 것은 아니라는 측면등 다양한 각도에서 완벽하게 단절된 느낌이 아닌 진행형으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는 개인들과 남아공의 현주소를 지칭하지 않나라는 생각도 들구요. 그래서 더 솔직담백한 맛을 느끼게 하는 제목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하면서도 무엇보다 돋보이는 점은 잭이라는 주인공을 통한 두 단계의 시선 처리라는 점입니다. 첫번째 단계는 정말 사춘기 소년의 시선으로 아기자기 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표현 기법들이 왠지 독자들을 과거속으로 끌고 가서 주져않혀 버린다는 것이죠.(할머니의 죽음, 페트뤼스와 19금의 그림책을 보는 광경, 무엇보다 할머니와 아버지의 관게에 대한 서사는 가히 일품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 독자들은 마냥 즐거움을 느끼게 됩니다. 마치 그 옛날 철모르던 시절로 갑자기 돌아가 기분이고 '그랬지 나도' 하면서 절로 웃음짓게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두번째 단계는 다 자라서 엄마 아빠의 말이 법이 아닐 수 있다는 의미를 확연히 알게 된 성인의 시선으로 무덤덤하게 마치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게 하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아마 이러한 시선처리로 인해서 더욱 더 전체적으로 상당히 매력있는 아이템과 그런 아이템을 맛깔나는 필체로 서사하고 있는 보기 드문 작품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다가옵니다.
성장소설이라는 한계을 뛰어 넘어 세대간의 소통을 이끌어 내면서(물론 협소한 의미죠. 좀더 줌 다운하게 되면 세대간 및 계층간 그리고 인종간의 소통으로 봐야 하겠죠) 서로 어울릴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네요. 여기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이라는 낯선나라에 대한 이해가 들면서요(이 작품을 접하기 전까지만 해도 전 이스라엘, 일본등과 더불어 세계 3대 惡으로만 생각했던 나라였는데요 이부분이 많이 완화되었습니다)굳이 성장소설이라는 현판을 걸어야 할 이유를 찾아볼 수 없을만큼 다양한 먹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보기 드문 작품이었습니다. 그래서 차기작이 더 기대되게 하는 작가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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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살짜리 애새끼가 대체 뭘 알 수 있겠나. 그래도 일단 내 쪽에서 접어줘야 할 것은 잭이 그 나이에 샴푸 병으로 자위를 했다는 건데, 이것만 봐도 나보다는 행동 발달이 좋긴 하다 ― 나이도 나이지만 대체 샴푸 병을 어떻게 써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알고 싶긴 한데). 행동 발달이 좋다는 건, 지(智)와 덕(德)까지 겸비할 수 있다는 건데, 나로 말하자면 지덕체에서 체(體)가 맨 앞으로 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야말로 잭을 지지할 수 있는 요건은 갖춘 셈이다. 이것은 자신의 신체를 돌보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기쁨도 슬픔도 제대로 느끼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서 기인한 것으로, 예컨대 조콘다의 눈썹 같은 거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고, 없다면 왜 없는 것인지 아무런 설명도 없는, 누구도 설명해 주지 않는 것. 이 세계가 어떤 메커니즘으로 동작하고 있는지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거나 설명하려 들지 않는 것. 이런 세계에 발을 디밀고 살아가고 있는데 누가 샴푸 병으로 자위를 안 할 수 있을지. 나는 전반적인 상황이 점점 나빠져서, 그것을 계기로 이전에 몰랐던 것을 배우게 되고, 나중에는 고통과 상실을 거쳐 서글프고도 멋진 과거를 추억하고야 마는, 그러니까 썩어 빠진 싸구려 성장 소설이라면 질색이다. 잭이 처한 세상이 『구원』의 그것이 아니었더라면 이 소설도 그렇게 됐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다(물론 나에게). 『구원』에 티핑 포인트는 없으며, 그것의 유의미한 가능성조차도 찾을 수 없다. 대신 덜떨어진 이스터 에그나 꾀바르지만 개개풀린 자질구레한 각론이 (그의 말에 의하면) 부비 트랩처럼 산재해 있다. 사람이 사람을 일단 싫어하게 되면, 이것은 거의 변할 수 없게 굳어 버리곤 한다. 죽을 때까지 그럴지도 모른다. 성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니 반드시 다른 사람들이 망해야 한다고 누군가가 그랬는데, 이런 식으로 타인의 불행과 자신의 처지 ― 스스로가 행복하지 않다 하더라도 ― 를 비교하고 나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 되어 버리는 이치다. 마치 지구 멸망은 영화나 소설에서만 등장하므로 현실에서 만족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러니까, 인간이란 족속은 본질적으로 그렇게 생겨 먹었다. 불행을 입은 타인이 죽을 정도의 위기에 봉착하지 않는 한은 그렇다. 반대로 내가 지옥에 떨어지게 됐을 때도 마찬가지. 친구 페트뤼스가 했던 것처럼 나 아닌 다른 남자가 내 물건을 주물럭거리는 정도의 위험천만한 상황 같은 거 말이다…… 라는 건 (반쯤은) 농담이고, 자기보다 멋지게 보이는 남자에 대해 묘한 질투심이 들어 그를 쫓아내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죽어 버릴 것만 같은 느낌, 더군다나 그에게 나의 치부가 드러났다면 말할 것도 없다. ‘생긴 대로 살자’ 식의 사고방식을 탑재해 살고 있는 나로서는 온전히 용납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다른 남자들의 이런 복수 행태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굉장히 멋진 여자와는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지만 굉장히 멋진 남자는 도리어 멀리하게 되는 심리 말이다(여자도 매한가지 아닐까?). 그러나 이런 식의 같잖은 사유의 남발이라면 『구원』은 망한 것임에 다름 아니겠으나, 이런저런 사람들과 공존할 수밖에 없는 남아공의 상황이 더해짐으로써 마뜩잖은 것도 더 이상은 그렇지 않다. 수지, 수지를 갖고는 싶은데 어떻게 해야 자신이 수지의 마음에 들 수 있을지 모르는, 발육이 덜된 파락호의 느낌이랄까. 내가 보기에 잭과 수지는 평행선 두 개다. 퍼시가 끼어들지 않았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왜? 열한 살짜리 애새끼가 대체 뭘 알 수 있겠냔 말이다. 다자이 오사무가 그러길 세상은 인간의 복수형이라던데, 아마도 당신이 태어난 그 순간부터 이 세계는 당신의 불알을 잡고 늘어질 것이므로 미련퉁이처럼 핼금거리다가는 큰일이 날 것이다. 그렇지 않을 리가 없다. 나를 잡아채려는 인간들을 떼어 내려고 할수록 그 손들은 더 옥죄어 오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부비 트랩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으니까. 흑묘(흑인)건 백묘(백인)건 쥐만 잘 잡으면 된다고? 허튼소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