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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작가이자 사회운동가인 백신애의 중단편선 [혼명에서]가 작가 사후 80년이 되는 해를 맞이해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마흔여섯번째 책으로 출간되었다. 그의 문학 세계를 조망할 수 있는 주요 작품 16편이 망라되어 있다. 1929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한 백신애는 1939년 31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소설 20여 편, 수필 30여 편을 남겼다. 생전에 작품집이 출판되지 않은 데다 작품이 다소 거칠고 과격하다는 평으로 인해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한국 여성 작가들을 살피는 연구가 이뤄지면서 본격적으로 조명되기 시작했다.
[나의 어머니]는 오빠가 XX 사건으로 감옥에 가고 교원으로 있던 내가 청년회를 조직하였다는 이유로 권고사직을 당하고 놀 수밖에 없다. 내가 연극을 하느라 딸이 도착할 때까지 잠을 못 이루는 어머니는 아까운 재주를 놀리기만 하면 어쩌느냐고 한탄하신다. 안 먹는다고 해도 배고프지 좀 먹으라고 오라비는 저렇게 떨고 있으련마는 나는 이렇게 먹는다고..모녀는 울음이 난다. 어머니는 감주를 내오며 밥 먹기 싫거든 이거나 좀 먹어라 하신다. 오빠 생각에 넘어가지 않는 음식이라도 내가 먹지 않을까 해서 일부러 많이 먹는 척하시는 가엾은 어머니가 얼마나 슬퍼하실까
[꺼래이]는 살길을 찾아 시베리아로 떠난 조선 민중의 고난을 다룬 작품이다. 농사지을 토지를 무상으로 나눠준다는 소문만 믿고 국경을 넘은 조선인들이 ‘꺼래이’라고 불리며 온갖 차별과 억압에 시달리다가 결국에는 추방당하는 모습이 처절하게 그려진다. 궁핍한 살림에도 노름을 하는 큰 아들을 위해 출산을 앞둔 며느리를 위해 집들을 돌며 사정 이야기를 하고 돈을 꿔서 두고두고 일을 해주리라 애원하는 매촌댁의 이야기를 그린 [적빈], 부자인 신랑이 한참 연하에 중학교를 다니는데 결혼 하기 싫어 동경으로 도망을 치려는 정희의 처지가 안타깝다.[낙오]
[호도]는 남편의 학대를 받으면서도 출산 할때까지 일을 해야 하는 옥계댁, 출산하는 마누라를 아이를 내질러하며 뺨을 때리고 누더기에 감싼 아기를 발길로 차서 죽게 만드는 빌어먹을 남편 천불이 난다. 죽은 아이를 묻고 마을 공동 상량식 준비에 음식을 만든다. 간을 보려고 콩나물을 한점 입에 넣었을 뿐인데 제물에 손을 대었다고 동네 사람들에게 맞아 죽는다. 남편의 외도를 목격하고 미쳐버린 여성[광안수기], [소독부]는 열네 살에 시집와서 밤마다 남편의 성욕에 시달리는 어린 색시가 있다. 남편을 죽인 것은 자신을 사모한 갑술이지만, 남편의 사망과 동시에 색시는 ‘간부와 공모하여 남편을 독살한 15세의 독부‘가 된다.
[혼명에서]는 가족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결혼을 했으나 이혼하고 돌아온 나를 보살피려는 가족의 사랑에 괴로워한다. 나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기쁘게 해주며, 그들의 원하는 딸이 되지 못하는지 생각하다 고질인 위병이 아프기 시작하였다. 거짓과 갈등과 괴로움에 고달파진 나는 세상의 시끄러움 속에서 혼명해져 ‘나’까지 잊어버리고 내가 남인지, 남이 나인지도 모르고 살아왔던가보다. 집을 뛰쳐나와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S는 어머니의 눈물 때문에 괴로워하는 ‘나’를 꾸짖기도 하고 격려하기도 하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나’는 힘을 얻고 봄이 올 때까지 자신이 갈 길을 찾아보겠노라고 의지를 불태우게 된다. 봄이 되면 만나기로 한 S가 급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통에 젖지만 ‘S는 살아서 나에게 ‘힘’을 가르쳐주었으며 죽어서 나에게 희망을 가르쳐주었다.‘ 소설은 끝을 맺는다.
작가가 사망한 뒤 유고작으로 발표된 [아름다운 노을]은 아들뻘의 소년과 사랑에 빠진 순희는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소년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심하고 그것을 위로 삼아 살겠노라고 다짐한다. [혼명에서]는 저자가 살아낸 짧지만 강렬했던 삶과 치열한 문제의식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큰 울림을 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