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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늘 옳았던 건 아니다. 제복을 입은 어느 경찰관 앞에서 했던 어눌한 진술처럼 기억은 언제나 자신이 없었고, 증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었으며, 나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어떤 이에게 내보였을 때 내게 올지도 모를 불확실한 미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임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의 불안은 내 기억의 끄트머리에 달린 작은 물방울처럼 맺혔는지도 모른다. 땅을 향해 금방이라도 추락할 듯한 작은 물방울. 그런 불안. 적어도 나의 머릿속에 있는 기억은...
"빛이 잘 들던 어느 오후, 해가 다 저물도록 불 켜지 않은 방에 누워, 그 방 작은 창으로 들어온 태양빛이 사위어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한 남자. 매해 봄꽃이 필 때면 코끝에 와닿는 그 향기, 눈부신 색채의 찬란함을 견디지 못해 빛이 다 사라질 때까지, 베란다에 있는 모든 화분에 불을 지르고는 타오르는 꽃의 혼을 킬킬거리며 바라보던 한 남자. 꽃이 재가 되어 흩날릴 때에야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웅크린 채 고통스러워하던 한 남자.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채 스스로 문을 잠그고 그곳에 남아 있던 한 남자를, 나는 오래 기억하고 또 기억했습니다." (p.151)
어떤 소설은 이야기의 윤곽보다 시간에 따른 느낌의 변이만 선명하게 남는다. 온화한 갈색이었다가 새벽녘의 푸른빛이었다가 투명한 흰색이 되기도 하는... 장혜령의 소설 <진주>는 그런 책이었다. 학년 초, 가정환경조사서를 작성한 뒤 교실에서 그 내용을 발표할 때,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했다. 대학 시절부터 이십 년 남짓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에 매진했던 아버지를 둔 딸의 자전적 기록이기도 한 이 소설은 작가의 혼란스러움을 반영하듯 일인칭과 이인칭·삼인칭이 혼재되었고, 사건의 기록들이 시간 순서와 무관하게 등장하며, 삽화와 사진·그림 등 시각적 자료들이 텍스트의 중요한 일부로서 작용하기도 한다. 때로는 작가가 쓴 시가 묘사의 일부를 대체하기도 하고 그에 덧붙여진 날짜가 수감번호처럼 뜬금없게 만들기도 한다.
가정환경조사서 사건이 있은 후 작가는 엄마와 함께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고 진주로 가서 감옥에 있던 아버지를 면회했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이 지난 2015년 2월, 어른이 된 작가는 다시 비행기에 올라 진주로 향했다. 그렇게 탄생된 소설 <진주>는 작가 자신에 대해서 쓴 이야기인 동시에 작가의 아버지에 대해 묻고 싶었던 질문들이며, 듣고 싶었던 대답이다. 감옥에 있어 부재했던 상태의 아버지가 그리움과 존경의 대상이었다면, 딸이 중학생이 되어 나타난 아버지는 '개인적인 삶'에 충실한 평범한 가장이 아니었다. 작가가 기다리던 아버지는 아버지의 존재가 건넌방에 상주하면서부터 완전히 사라진 셈이었다. 아버지의 동지였던 엄마가 "이제 그만 불의를 참아달라"며 눈물로 호소하는 그 순간에도 딸은 아버지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누구냐고.
안산의 노동자 상담소에서 어려운 처지에 놓인 노동자들을 상담하고 소식지를 만들던 아버지와 노동 교회가 운영하는 탁아소 선생님으로 근무했던 엄마. 노동자 자녀들과 함께 컸던 딸은 동요 대신 투쟁가와 민중가요를 불렀고, 경찰을 '짭새'라 부르기도 했다. 추리닝과 슬리퍼 차림으로 딸의 과제물을 들고 학교에 나타났던 아버지를 고개를 돌려 회피했던 딸은, 남편과 떨어져 옷 수선집을 하며 키운 딸은 자신의 이야기가 아버지에게 가 닿음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가 된다는 사실을 이제 알 것 같다고 말한다.
"시간이 지나면 잊힐 거라고, 괜찮아질 거라고, 삶은 그런 거라고 자신을 타이르려 했다. 그때까지 나는 틈만 나면 내 방 불을 끈 채 죽은듯 잠을 청했고, 화장실 가는 소리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유령처럼 걸어다녔으며, 아버지 어머니가 완전히 잠든 시각에 집에 들어오고서도 또다시 새벽까지 집밖을 배회했고, 아침이면 관성처럼 입속에 밥을 떠넣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내 안의 누군가가 그러한 삶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곳으로 가자. 그곳으로. 그 사람은 내게 진주로 가자고 했다." (p.279)
하냥 걸어온 저 시간들이 기억의 끄트머리에 달린 물방울처럼 문득 낯설어질 때가 있다. 그 물방울이 햇빛에 말라 공기 중으로 스러지거나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땅에 떨어지지 않는 한, 우리는 기억의 줄기를 타고 아득히 먼 과거를 향해 불안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그것이 비록 원시를 향한 아득히 먼 여정처럼 보일지라도, 결코 닿을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우주처럼 여겨질지라도 우리가 불안을 딛고 나아가기만 한다면 우리는 결국 그곳에 닿을 수 있다. 작가가 진주로 향했던 것처럼.
장혜령의 <진주>를 읽고 나는 군더더기처럼 나의 기억을 덧대려 한다. 나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술에 의지하여 세상을 살았고, 술에 취하지 않은 시간보다 취한 시간이 더 많았던 사람이다. 세상에 대한 불안을 술을 매개로 하여 잊어보려 한 셈인데, 당신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고, 그것에 대한 울분은 가족을 향한 폭력으로 풀었다. 당신의 습관적인 폭력과 중독 증세는 길게 이어졌던 병원 생활과 함께 끝났지만 가족 모두에게 심어준 그 암담했던 기억들을 다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나는 여전히 기억의 끄트머리에 대롱대롱 매달린 불안의 물방울을 보고 있다. 당신이 세상에 없는 지금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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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그리고 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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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에 구매해서 다 읽기는 했으나, 내가 소화하기에는 마냥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이 후기를 어떻게 써야 하나 고민만 한가득인 작품이다. 작가의 다른 작품을 만나고 좋아서 출간작을 눈여겨 보던 차에 만난 작품이다.
주인공이 어린 시절 처음 비행기를 타고 갔던 장소가 진주였다고, 한때 아버지가 수감되었던 그곳으로 가기 위해 비행기에 올랐을 어린 주인공. 운동가 아버지의 딸이 쓴 소설은 그렇게 시작된다.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사실적이라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보고서 같은 느낌이다. 쓰는 사람이 되어 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하는 딸의 마음을 감히 읽고 싶었으나, 아직 나에게는 잘 읽히지 않은 마음이었다. 애써 노력하고 거듭 다시 읽어야 그 마음 언저리에 닿을까 싶기도 하다. 어린 딸의 개인적인 이야기와 바느질 하는 엄마의 이야기가 한곳에 모여 아버지의 이야기까지 더해지면서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가 된다.
솔직히 지금 소화하기에는 어렵지만 언제나 다시 만나고 다시 읽고 그 의미를 이해하고 싶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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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아버지를 둔, 한 사람의 이야기이자 그 시대의 이야기, 그리고 지금의 이야기. 진주는 그런 이야기였다. 진주를 읽는 도중에도, 다 읽은 뒤에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책을 덮고 말들이 다 어딘가로 숨어 자신을 찾아달라고 숨박꼭질을 시작했다. 인덱싱 한 곳들로 다시 돌아가 보았다. 읽는 도중에는 선명하던 책의 소리가 희미했다. 알 것 같던 마음이 숨어버린 마음이 되었다. 다시 찾아달라는 마음이 되었다. 되풀이되는 악몽 속에서도 기어이 살아가고야 마는 사람. 주어진 삶을 살아내기 위해 오직 그것을 잊으려 애쓰는 사람. 거듭 잊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 그럴수록 그것을 선명히 되새길 수밖에 없는 사람. 그에게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없지 않습니다. 도처에 있습니다. 생생히 살아 있습니다. 나는 여기 살아 있습니다. 나는 여기 있습니다. 우리에겐 시간이 있습니다. 그는 시간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는 공집합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수의 세계에 당신이 있었습니다. p17 한 사람의 이야기라고 알았는데, 읽으니 여러 사람의 이야기였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였다. 책 속을 걸어다니며, 화자의 목소리 그리고 또 다른 화자의 목소리, 여러 목소리를 들었다. 목소리들은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들려왔고 목소리들을 따라가며 시대의 많은 것들을 보았다. 알 수 없는 것, 알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것, 그러나 이해할 수 없음에도 읽는 것, 끝까지 그 끈을 놓지 않는 것, 그로부터 바로 사유가 확장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p21 마음에 질문이 떠오르면, 그 질문에 답하기 전까지 그 물음표는 사라지지 않는 것 같다. 답이 될 때까지, 충분히 풀려 나올 때까지 마음에 자리를 잡고 공간을 만든다. 산다는 건 뭘까. 이 삶이 주어진 이유와 내가 사는 이유를 생각한다. 오랫동안 원인과 이유에 매달리는 삶이었다. 내게 벌어진 일에 대해 생각하고 원인을 따져 제거하면 된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서 나아가지 못했다. 과거에 매달리는 삶이었다. 이미 내게 닥친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했던 나날들이었다. 오랜 시간이었다. 책을 읽으며, 책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며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진주에서도 과거의 나와 만났다. 나를 만나고, 내가 몰랐던 시대의 모습과 내가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삶과 사람을 만났다. 민주화운동과 그 시대, 운동가 사람들, 그리고 그의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나아가는 사람들을. 내 시야 밖으로 확장되어 시대를 넓게 바라볼 수 있었다. 칠판에 판서하는 선생님의 분필 소리를 듣다가, 이따금 바람이 불어와 창문 너머를 바라볼 때면, 나무와 나는 멀리서도 서로를 알아볼 수가 있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말을 걸고 연한 흙색의 몸을 바라보아습니다. 그러곤 그에게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속으로 발음해보았습니다. 그것은 나무와 나만이 아는 비밀이 되었습니다. p79 책이나 영화를 통해 잊었던 기억이 떠오르면, 마치 원래는 없었던 것이 생겨난 것 같은, 생소한 기분에 사로 잡힌다. 어떻게 잊고 살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아주 사소한 기억들이 잠에서 깨어나 지금의 나와 눈을 맞춘다. 나무에 말을 거는 아이였다. 체육시간이면 운동장 가운데 크게 아름드리 서있는 나무를 꼭 껴안았다. 한아름에 안을 수 없는 나무를 안고 속으로 조용히 말을 걸곤 했다. 나무는 나를 알아주는 것 같았다. 그애는 도둑질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 일은 자신만의 비밀을 갖는 일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비밀은 어른들도 친구들도 경찰들도 결코 알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p144 많은 부분에 인덱싱을 했지만 개인적 경험으로 맞닿은 부분을 발췌했다. 이야기는 이어져서 살아나는 것 같다. 읽지 않았다면, 그저 한 줄로 지나갈 굴곡의 시대를 알게 되었다. - 개별자인 사람과 보편의 시대와 사회는 무엇인가. 시대의 거대한 흐름 안에 개별자는 휩쓸려 매몰되기도 한다. 우리로 살아가며, 개인은 어떻게 하면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로 존재하던 사람이 홀로 자신이 되었을 때, 그 마음을 가늠해 보면 아득해진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 이야기라 오래동안 맘에 품게 될 것 같다. 아버지는 어느 날부터, 개인적인 삶 속에 버려진 채 더는 우리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야 했던 어느 날부터, 서서히 사라져간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잃어버린 조국을 찾기 위해 떠나갔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도저히 이곳에서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p172 안다는것은 뭘까. 가족은 모든 것을 서로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오히려 서로를 모르는 존재인 것 같다. 나이가 먹어, 부모님이 어린 나를 키우던 그 때의 나이만큼 먹어 조금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알고 싶고,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사람의 과거와 기억은 현재의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아니, 그 때의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지금의 자신이 보고 알게 되는 것일까? 아니다. 그 때 내게 미쳤던 그 일들이 그 때의 나를 만들었고, 지금의 나를 만들고, 과거를 돌아보며 다시 나를 만든다. 그 때는 몰랐던 것을 지금 돌아보며 알게 될 때가 있다. 그래서 과거와 기억과 지금의 나는 게속해서 연결되어있다. 당연한 이야기가 당연하지 않게 느껴질 때, 마치 새로운 것을 알게 된 것과 같을 때, 세계는 확장되는 것 같다. - 진주는 '쓰면서 알게 되는 것들'이 있으니 기록해보라고 말을 걸어왔다. 쓰는 것은 여러 색의 실들이 뭉쳐져 있는 어떤 뭉텅이를 풀어내는 일이라고 그러니 쓰면서 풀어지고 해체되며 각자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이라고. 진주를 읽고 무언가 쓰자 했지만, 그저 뭉텅이 실들 속 한 끄트머리만 겨우 잡은 느낌이다. 이렇게 잡은 실 끝을 놓지 않고 계속 따라가보자. - 김혜순 시인님의 추천평처럼 진주는 소설이기도 하고, 시이기도 하고, 르포이기도 하며, 누군가의 목소리인 책이다.
그 소리들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많은 것들과 만날 수 있다. 어렵지 않다. 읽는 즐거움이 충분한 책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길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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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가 아버지의 딸이 쓴 소설이다. 이 소설은 ‘말하는 여자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어떤 항쟁들과 텍스트들과 인물들이 얽혀서 상호텍스트성을 얻어야, 그것들이 말하는 여자의 배아가 되는가? 그 여자가 되어버린 텍스트들은 어떻게 다중 주체가 되어 우리의 가슴을 치는가?’를 증거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