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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의 사상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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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역사를 보는 관점은 다르다. 자신만의 견해를 갖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그 견해가 노골적으로, 그리고 행간마다 드러나면 글의 품격과 설득력이 떨어진다.   1980년대의 시대 분위기 속에서 이런 시각을 담은 책이 탄생했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하지만 그 사실이 고무적일 뿐, 나에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한쪽에 치우친 서술이 가득하여 답답했다. 읽는 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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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마다 역사를 보는 관점은 다르다. 자신만의 견해를 갖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그 견해가 노골적으로, 그리고 행간마다 드러나면 글의 품격과 설득력이 떨어진다.

  1980년대의 시대 분위기 속에서 이런 시각을 담은 책이 탄생했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하지만 그 사실이 고무적일 뿐, 나에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한쪽에 치우친 서술이 가득하여 답답했다. 읽는 내내 한풀이를 듣는 기분이었다. 저자의 시각에 마냥 공감하기 힘듦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은 존재할 가치가 있다. 반공주의로 첨철된 책들과 동등하게.

  볼테르가 한 말이 떠오른다.


나는 당신의 사상에 반대한다.

그러나 당신이 그 사상 때문에 탄압 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편에 서서 싸울 것이다.

b****i 2008.02.14. 신고 공감 1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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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현사의 약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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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한국현대사를 재미있게 읽었다. 위의 리뷰들는 칭찬 일색이지만 나는 좀 비판을 하고 싶다. 먼저 이 책은 저자가 직접 1차 사료를 검토하고 쓰여진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서로서 매우 큰 약점이다. 즉 2차 사료만을 보고 이 책을 썼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역사서로서의 객관성과 엄밀성이 필연적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6.25에 대한 저자의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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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한국현대사를 재미있게 읽었다. 위의 리뷰들는 칭찬 일색이지만 나는 좀 비판을 하고 싶다. 먼저 이 책은 저자가 직접 1차 사료를 검토하고 쓰여진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서로서 매우 큰 약점이다. 즉 2차 사료만을 보고 이 책을 썼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역사서로서의 객관성과 엄밀성이 필연적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6.25에 대한 저자의 입장은 최근의 실증적 사료를 바탕으로한 신전통주의의 성과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저자가 사용한 문헌들은 충분히 권위적인 것들도 많았지만, 저자의 입장을 지지해주는 문헌들만 선택했다는 감을 지울 수 없다. 왜냐면 신뢰성이 있는 반대쪽 논거들도 많기 때문이다.(특히 6.25에 대해) 나는 역사를 서술하는 것에 대해 역사가의 객관적 인식 가능성을 부정하는 입장이다. 완전히 객관적일 수는 없다. 다만 객관적이고 공정한 방향으로 움직이려는 힘이 역사서가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럴려면 좀 더 많은 사료들을 오랜 시간에 걸쳐 면밀하게 검토해야한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내내 이런 생각을 했다. 물론 이 책의 내용은 새롭고 재미있었다. 실제 역사과정이 이 책의 내용대로 였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것을 증명하기에는 이 책에는 위와 같은 약점이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을 때는 우리는 역사 과정의 새로운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지, 이것만이 진실되다는 입장은 피해야 할 듯하다. 즉 다른 많은 역사서를 함께 읽으면서 진실을 찾아나가야 할 듯하다.

[인상깊은구절]
이 책은 완벽한 통사가 되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할 수 밖에 없음을 솔직히 고백해야만 되겠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약점은 일차 사료를 직접 일일이 검토하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필자가 전문적인 역사학자가 아니라는 사정에 따른 것입니다. 대신 기존의 학자나 관련된 사람들의 업적에 크게 의존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책의 신빙성은 그분들이 참고한 이차 사료의 객관성에 의해 간접적으로 보장되어질 것입니다.
c******p 2002.07.09. 신고 공감 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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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를 알고 현실을 살아가자...
"현대사를 알고 현실을 살아가자..." 내용보기
'다시쓰는 한국현대사1'은 수구.보수세력에 길들여진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들이 바라본다면 당연히 절판되어야할 '반공서적'으로 치부될 수있을(현실에선 받아들이기쉽지않은) 역사적사실들로 채워져간다. 3권분량으로 시리즈출판된 박세길씨의 이 '위험한고발'은 우리가 지금 왜 평화통일과 반미를 외쳐야하는지에대한 이유와 그 필연성을 뚜렷하게 보여주고있어, 5.6공세력과 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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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한국현대사1'은 수구.보수세력에 길들여진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들이 바라본다면 당연히 절판되어야할 '반공서적'으로 치부될 수있을(현실에선 받아들이기쉽지않은) 역사적사실들로 채워져간다. 3권분량으로 시리즈출판된 박세길씨의 이 '위험한고발'은 우리가 지금 왜 평화통일과 반미를 외쳐야하는지에대한 이유와 그 필연성을 뚜렷하게 보여주고있어, 5.6공세력과 친일파후손들에 의해 지금까지도 왜곡되고 은폐되어온 우리 현대사를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될것으로보인다. 아직도 이승만을 '대한민국 초대대통령'으로만 기억하고있다든지, 인천상륙작전으로 유명한 맥아더장군을 남한의 '구세주'로 생각하는사람들이 있다면 반드시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그리하면 '매국노' 이승만과 권력에 대한 야욕과 변태적기질을 동시에지닌 '난봉꾼' 맥아더를 동시에 만나볼 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이 책이 외치고있는 '진실'은 그리 널리 전파될 수 없을 현실적 한계에 봉착하게된다.(솔직히 이책이 절판되지않고있는 현실이 놀라울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러한 충격실화는 당연히 우리의 미래가 숨쉬고있는 학교교실에서부터 알려져야한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아직도 우리 아이들이 받고있는 '현대사교육'은 10년전이나 20년전이나 다를바가없다. 이러한문제는 자연스럽게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되는것이라 길게 얘기할 순 없겠고, 분명한건 대한민국에선 여전히 친일과 매국을 일삼은 자들의 후손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떵떵'거리며 살고있다는것이다. 정치.경제.국방은 말할것도없고 심지어는 '백년지대계'라 일컫는 교육까지도 그들이 잠식하고있는형편이니.. 일제시대는갔지만 미군정은 현재진행형이다. 이승만은갔어도 국가보안법은 아직도 국민의 족쇄로 남아있으며 휴전선에 걸린 차디찬이슬은 오늘도 한반도의 새벽을 알린다.. 한총련의 존재에있어 절대근거가 되는 '통일과 반미'의 외침... 좋다! 분명 옳은일이다!! 민족의 주체성을 되찾고 진정한 자유와 독립을 쟁취하기위한 젊은이의 투쟁정신.. 높이살만하다!!! 하지만 국민을 설득하지않는이상 언제까지나 그것은 '한총련만의 외침'이요, '한총련만의 고민'으로 남을것이다. 한총련이란 단체가 국민의 불신을 받고있는 현실을 뛰어넘지못한다면 역사의 심판은 저 흡혈귀같은 기득권층이 아닌 우리 국민과 그대들에게 내려질것임을 명심하자...
k*****7 2004.01.07. 신고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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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필요한, 그러나 반드시 경계해야할 역사
"반드시 필요한, 그러나 반드시 경계해야할 역사" 내용보기
이 책을 두고 흔히 이런 이야기를 하죠. 고등학교 검정 국사책이 한쪽 날개라면 '다현사'가 다른쪽 날개다... 라는. 읽다보면 피를 끓게 만듭니다. 이 책이 얼마나 제대로 된 역사관을 가지고 있느냐를 논외로 한다면(이걸 논외로 하고 역사책을 본다는 건 좀 무리긴 하지만) 최소한 '이런 역사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데에는 충분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역사적 사건을 자신의
"반드시 필요한, 그러나 반드시 경계해야할 역사" 내용보기
이 책을 두고 흔히 이런 이야기를 하죠. 고등학교 검정 국사책이 한쪽 날개라면 '다현사'가 다른쪽 날개다... 라는. 읽다보면 피를 끓게 만듭니다. 이 책이 얼마나 제대로 된 역사관을 가지고 있느냐를 논외로 한다면(이걸 논외로 하고 역사책을 본다는 건 좀 무리긴 하지만) 최소한 '이런 역사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데에는 충분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역사적 사건을 자신의 입장에 맞게 껴맞추려는 입장이 너무 강하게 보인다는 게 맘에 안들기도 합니다. 역사책이라는 것이 어차피 사실과 저자의 관점이 어느쪽에서 평형을 맞추느냐에 따라 서술되는 것이긴 하지만,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분명 독자의 체로 거른 것이여야할 것입니다.
r*****o 2003.09.08.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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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오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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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는 아버지 아이디 서평은 아들인 중3이 씁니다^^ 다시쓰는 한국 현대사 1권을 읽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우리나라가 해방되어서 독립할때까지의 역사가 이때까지 학교에서 배운 내용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고 이때까지의 다른 일들을 보아도 아마도 이 책의 내용이 거의 사실인 것 같았다. 그리고 역시 교과서는 미국의 만행에 관한 이야기는 싣지 않는 다는 것이 더욱 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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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는 아버지 아이디 서평은 아들인 중3이 씁니다^^ 다시쓰는 한국 현대사 1권을 읽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우리나라가 해방되어서 독립할때까지의 역사가 이때까지 학교에서 배운 내용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고 이때까지의 다른 일들을 보아도 아마도 이 책의 내용이 거의 사실인 것 같았다. 그리고 역시 교과서는 미국의 만행에 관한 이야기는 싣지 않는 다는 것이 더욱 확실히 알았다. 특히 우리나라가 해방 후 정부를 세울때의 미국이 한 짓은 읽을수록 화가 났다. 우리나라가 일제에서 해방되었을 때 우리나라는 지역별로 인민위원회 등을 조직해서 토지 분배 및 치안 유지 활동을 했었다. 그리고 친일파들의 재산 등을 몰수하는 등 민족배반자에 대해서도 처벌을 시작했었다. 우리나라 스스로 정부를 조직하려 하는 이런 시기에 미국은 우리나라를 자신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서 군대를 동원해서 남한을 점령했다. 미군은 자기들 마음대로 군정을 실시하고 친일파를 다시 정치, 외교, 군, 경찰에 복직시키는 등 시대의 흐름을 역행했다. 그리고 미군정은 친일파의 토지를 몰수했던 것을 다시 모두 빼앗아서 자신 소유로 만들었다. 그리고 도덕시간에 배웠던 모스크바 회담 내용이 순 거짓이고 미국이 우리나라의 자주 독립에 관심이 없고 무제한적으로 군정을 실시하려 했었고 소련이 우리나라에 독립정부를 만들어야 된다고 했었다고 했다. 정말 우리나라 교과서는 친미의 극치인 것 같았다. 계속적으로 미군정에 반대해서 일어난 전국적인 파업과 인민항쟁, 4.3 제주 항쟁, 여순 봉기 등을 미군정 때문에 일어난 사건으로 말하지 않고 단순한 폭동이나 반란으로 치부하기 때문이다. 남한 단독 정부를 수립할 때 미국은 유엔을 통해 결정하여서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전 세계가 동의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때 유엔은 미국산하 기구와 같은 미국의 영향 하에 있던 기구였다고 했다. 그리고 미국은 이런 유엔에서 파견한 선거 감시 조사단에게 조차 미국과 친미파들이 민중에게 강압적인 선거 참여 등을 시킨 것을 유엔회의에서 말할까봐 비행기 비를 유엔에서 못주게 하여 유엔회의에 참여하지 못하게했다. 이렇게 강압적으로 참여하도록 했지만 남한단독정부 선거 참여율이 낮은 까닭은 남한에서 역시 우리 민족 모두가 참여하는 남북 모두의 정부를 원해서 강압속에서도 대다수고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거 결과 거의 친미파 이승만세력이 정권을 잡았다. 이런 선거를 반대하던 제주도민들이 일으킨 4.3 제주 항쟁과 여순 봉기를 민주주의를 위한 일이라고 하지 않고 아예 무시하거나 폭동으로 치부하는 것이 매우 화가 났다. 그러다가 북한에도 정부가 수립되고 몇 년뒤 6.25 가 터졌다. 전쟁은 남한이 매우 유리했다. 남한과 미국의 군사력은 무기와 인원 면에서 북한과 중국을 능가 했었다고 했다. 중국의 100만대군도 거짓이었던 것이다. 심리전을 통한 부풀리기로 남한군과 미군이 겁을 먹어서 무작정 후퇴를 하게 된 것이었다. 이 사실은 후퇴하던 미군 사령관이 조사한 결과 밝혀졌다. 그렇게 압록강 부근에서 후퇴를 해서 다시 38선에서 태격태격했다. 남한군과 미군은 심리전에 넘어가 상대편의 군사력이 많다고 겁이 먹었고 북한군과 중국군은 38선 이남에서는 주민들의 협조가 없었기 때문에 주민을 이용한 심리전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전쟁은 끝나고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우리나라는 반공 이데올로기가 뿌리내리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우리나라가 해방되어서 스스로 독립 정부를 세우려 했었는데 미국이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들려고 해서 지금까지 남북분단이 되어있고 친일파가 숙청되지 않아서 친일잔재가 남아있고 그로 인해서 이승만 독재가 이어지고 일본군 말단장교로 독립군을 잡던 박정희 독재가 이어지는 등으로 인하여 우리나라 민주화가 아직까지 완전히 되지 않은 것이 매우 분했고 독립후 미군정 때문에 일어난 남북 단독 정부 수립 실패와 여러 항쟁과 봉기를 교과서에서는 모두 빨갱이 폭동으로 몰거나 북한 탓으로 하는 것에 화가 났다. 교과서를 사실 그대로 고쳐서 독립되었을 때에는 우리나라가 북한이 친일파 숙청을 확실히 한 것에 비하여 친일파 숙청이 안되었고 미군정에 의해서 남북 분단이 되었던 사실과 여러 항쟁의 진실을 바르게 이야기하면 좋겠다. 그래야만 우리 스스로 떳떳해지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2권을 읽어야겠다.
YES마니아 : 로얄 s****s 2001.09.30.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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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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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에선 이승만을 위시한 모든 친일파와 친미파들의 본질과 가면속진실을 명명백백 공개,고발했다면 "제2권"에선 이승만이 최후를 맞으며 놓친 고삐를 더더욱 단단히 고쳐잡았던 독재자 박정희의 만행과 "한강의기적"으로 미화된 민중의 수난을 얘기하고있다. 민중의 주린배는 아랑곳하지않는 정체불명의 "국익"을 위해서라면 억압과 착취, 원치않았던 "총알받이"의 운명도 모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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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에선 이승만을 위시한 모든 친일파와 친미파들의 본질과 가면속진실을 명명백백 공개,고발했다면 "제2권"에선 이승만이 최후를 맞으며 놓친 고삐를 더더욱 단단히 고쳐잡았던 독재자 박정희의 만행과 "한강의기적"으로 미화된 민중의 수난을 얘기하고있다. 민중의 주린배는 아랑곳하지않는 정체불명의 "국익"을 위해서라면 억압과 착취, 원치않았던 "총알받이"의 운명도 모든게 받아들여지고 용서되고 정당화되었던 암울했던 70년대속에서 헤아릴 수 없는 이슬로 사라져간 "애국투사"들의 영혼을 우린 이 책을 통해 잠시나마 조우할 수 있을것이다. 온갖 간사한 수단과 방법들로 미국과 일본이 우리 조국을 삼키고 짓밟으려해도 "경제발전", "국가안보"를 핑계로 민중을 탄압하고, 고문하고, 얼르고 달래며 가파르게 썩어온 지 어언 반세기가 다차간다. 그렇다면 이 사연많은 땅에서.. 숱한 질곡과 눈물과 한(恨)으로 기름진 이 땅에서 이전보단 많이 불러진 배를 움켜잡은 우리가, 여전히 정쟁과 부패가 판치는 정치권과 썩은나무에 기생하는 벌레같은 "대한민국1%"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가야할까.. 쉽지않은 물음이다. 그렇다고 마냥 어렵지도않은.. 하지만 막연한.. 그런 물음이다. 해답은 각자가 알아가면되겠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지켜내려했던 "민주주의"의 참모습일테니말이다.
k*****7 2004.06.17.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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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추!! [서평] 역사와 국가의 주인으로 일어서는 민중과 진보진영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
"강추!! [서평] 역사와 국가의 주인으로 일어서는 민중과 진보진영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 내용보기
강추!! [서평] 박세길 저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 : 1980년에서 1990년대 초까지>를 읽고 / 1998. 10., 314쪽, 돌베개<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는 전두환 일당의 1979년 12.12 군사쿠테타 및 1980년 광주민중 학살과 뒤이은 광주민중항쟁에서 시작하여 1990년 김영삼이 역사의 대역죄인으로 등장하는 '3당 합당'까지 이어진다.1980년대의 출발은 미국과 전두환 일당에 의해 민중들의
"강추!! [서평] 역사와 국가의 주인으로 일어서는 민중과 진보진영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 내용보기
강추!! [서평] 박세길 저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 : 1980년에서 1990년대 초까지>를 읽고 / 1998. 10., 314쪽, 돌베개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는 전두환 일당의 1979년 12.12 군사쿠테타 및 1980년 광주민중 학살과 뒤이은 광주민중항쟁에서 시작하여 1990년 김영삼이 역사의 대역죄인으로 등장하는 '3당 합당'까지 이어진다.
1980년대의 출발은 미국과 전두환 일당에 의해 민중들의 흥건한 피와 처참한 패배주의로 시작된다. 하지만 민중들과 새로운 세대는 한국전쟁 후 한 세대에 걸친 선배들의 헌신적인 투쟁과 희생을 목격하면서 스스로 역사의 주인임을 자각하기 시작하여 조금씩 투쟁의 돌파구를 열어가다가 마침내 역사적인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일구어낸다.
비록 1987년 양 김씨와 민족민주운동의 분열로 인해 외세의존적인 군사독재 일당이 재집권에 성공하고 1990년 또다시 김영삼 등의 배신으로 보수대연합에 국가권력을 찬탈당하지만, 민중들과 민족민주운동 진영은 서서히 역사의 주인으로 발돋움하고 있음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로써 저자 박세길은 1941년부터 시작된 일제의 태평양전쟁과 한민족 말살책동, 이에 굴복한 수많은 지식인들의 변절과 친일행위를 딛고 중국과 만주, 국내에서 끈질기게 저항하여 8.15 해방에서부터 굴곡되고 ??겨진 한민족의 삶을 다루었다. 북한의 역사 또한 공개된 자료와 정보를 중심으로 균형있게 다루었다.

박세길의 한국현대사 서술 관점은 한국전쟁 이후 1990년대 초까지 국내 역사학자와 지식인 어느 누구도 바라보지 않았던 한민족 전체의 관점,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관점, 지배자들이나 기득권자들의 입장이 아닌 민중들의 입장을 중심으로 하였다.
따라서 기존의 국사 교과서나 언론, 주류 지식인들이 감추거나 외면했던 남북한 전체의 모습, 한반도를 둘러싼 중국-러시아-미국-일본의 음모와 움직임, 민중들의 역동성에 그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다.

1940년대 초에서 1960년까지의 한국현대사 1단계와 1961년부터 1979년까지의 한국현대사 2단계의 공통된 특징은 '냉전대결'과 '소련봉쇄'라는 세계최강 제국주의인 미국의 동북아 군사패권전략에 한민족과 남한 민중이 철저하게 희생된 것이었고, 그러한 특징은 한국현대사 3단계까지 이어졌다.
군사쿠테타와 광주민중학살을 통한 전두환 일당의 등장과 전국민적인 6월 항쟁을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반란 세력의 단죄 없이 1987년 헌법이 개정되고 '광주 5적' 중의 하나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보수대연합 '3당 합당'은 동북아시아에서 자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미국이 얼마나 철저하게 친일파 후예들과 군사독재 잔당과 결탁하여 남한의 정치,경제,군사,문화 전반을 관리하고 있는지를 보여준 동기이자 결과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자주, 민주, 통일과 '일하는 사람이 주인되는 세상'을 원하는 민족민주운동 진영과 민중들은 분단체제 극복과 반외세 반독재 전선으로 단결하고 연대하지 않고는 외세와 친일-친미 군사독재 후예들의 간교한 분열책동과 무력탄압, 언론조작과 경제적 수탈에 맞서 최소한의 기본권과 생존권도 이루기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특히 주요 고비마다 분단체제를 이용하여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를 통해 정치공작과 여론조작, 파쇼탄압과 야권분열, 기득권 유지를 획책해 온 미국과 냉전수구세력들의 지배전략은 2013년인 지금도 여전히 강력하다는 점에서 민중들과 민주진보진영에 가장 큰 숙제로 제기된다.

1961년 미국의 지지와 지원 아래 민주당 장면 정권을 군사쿠테타로 무너뜨린 박정희 군사독재체제는 1978~1979년 YH무역 노동자 등 민중들의 투쟁과 대학생을 중심으로 하는 유신 철폐투쟁의 힘이 부마항쟁으로 폭발하였고, 이에 따라 발생한 지배집단 내부의 분열이 김재규 등의 저격으로 무너졌다.
박정희의 사망과 유신체제의 붕괴에 대해 다수의 민중들은 환호했지만, 미국과 친일-친미 기득권층은 자신들의 기득권이 흔들리는 것에 불안감을 느꼈고, 야당과 민주세력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박정희 체제에서 성장한 일단의 정치군인 집단인 '하나회'가 주축이 되어 또다시 군사쿠테타를 일으켰다. 미국의 지원과 보호를 바탕으로...

박정희와 달리 전두환 일당은 그동안 성장한 민중들의 힘을 탄압하여 말살하려 하고, 민주세력의 분열을 공작,조장하면서 언론과 행정체제를 장악하였고, 6개월 뒤 2차 5.17 군사쿠테타를 자행했다. 여기에는 무능한 보수여당인 김대중-김영삼 세력과 '5.15 서울역 회군'으로 상징되는 비겁한 학생운동 지도부가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전두환 일당은 5.17 군사쿠테타 이후 유일하게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광주시의 대학생과 민중들을 무참하게 학살하였고, 광주민중들은 결사항전으로 맞섰다.
광주민중들의 결사항전 소식은 남한 전역에 소리소문 없이 번져나갔고, 학생들과 민중들은 미국과 전두환 일당의 폭압통치를 뚫고 7년 만인 1987년에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만들어냈다.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은 전두환 국가반란 세력을 법으로 처단하지 못한 한계와 재벌체제를 혁파하지 못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 처음으로 정당하고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유신헌법을 민주헌법으로 개정하였고 직선제로 정권을 선출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외세와 군사독재 일당의 청산이라는 민중들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전두환 일당의 분열책동에 말려든 김대중-김영삼 보수정치세력과 민족민주운동 세력은 분열을 거듭하여 광범위한 관권,금권 부정선거를 자행한 노태우 일당에게 정권을 빼앗겼다.

그렇지만 민족민주운동(진보) 진영과 노동자, 농민, 청년, 학생, 지식인 등 민중운동 진영은 분열의 아픔을 딛고 자주적인 대중조직을 광범위하게 결성하여 새로운 대체세력으로 거듭났고, 김대중 중심의 정치세력보다 세력 규모가 약하지만 권력에 대한 탐욕은 더 강했던 김영삼은 민중운동 진영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미국과 노태우 군사독재 잔당들의 꼬임에 넘어가 김종필 유신잔당과 함께 '3당 보수대연합'을 만들어냈다. 
민족민주운동 진영과 민중운동 진영은 보수대연합을 토대로 금권, 관권 부정선거를 더한 김영삼 일당에게 1992년 선거에서 패배했다.

1980년대 남한의 경제사정은 외세의존적, 수출의존적, 매판재벌 중심으로 운영된 박정희의 부실한 경제정책의 연장선에서 노동자, 농민들의 피땀으로 전후 30여 년동안 그나마 일으켜 세운 경제성과마저 외세와 매판재벌에게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런 결과는 전두환 일당의 무능함과 수동적 경제정책, 외국자본의 수탈구조, 저임금-저곡가의 민중수탈 경제구조의 원인이면서도 더 심하게 왜곡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나마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 이후 남한 전역에서 노동자들 스스로의 힘으로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이루어내었고, 산업 전분야와 사회 각분야의 민중들이 수탈당하는 정도를 줄여가면서 소득 수준을 높여갈 수 있었다.

1987년을 계기로 이후 민중들의 조직과 민주진보진영이 강력하게 성장하였고 이에 기반하여 민주개혁성향의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창출하여 정치,경제개혁과 남북화해, 평화통일로 한 걸음 더 전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2007년과 2012년 연속 외세 의존과 친일파-군사독재-매판재벌 잔당이라는 특징을 가진 냉전수구세력들에게 정권을 탈취당한 이유가 무엇일까.
앞으로 1990년대 이후 20년간 한국현대사에 대해  공부하고자 하는 목적이다.

* <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 > 중에서 인상적인 대목을 블로그에 정리했습니다. http://blog.daum.net/hy2oxy/8691710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 1, 2, 3권 전체에 대한 주요 내용은 http://blog.daum.net/hy2oxy/8691548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 2013년 12월 27일 ]

 

c****n 2013.12.28.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강추!! [서평] 친일파와 외세에 군사독재를 추가한 1950~70년대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2]
"강추!! [서평] 친일파와 외세에 군사독재를 추가한 1950~70년대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2]" 내용보기
강추!! [서평] 박세길 저 <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2 : 휴전에서 10.26까지 >를 읽고 / 1998. 10., 314쪽, 돌베개 저자의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시리즈 3권 중 제2권은 한국전쟁 직후부터 친일 군사쿠테타범 박정희의 사망까지를 다루고 있다. 한국현대사가 1945년 8.15 해방에서부터 한국전쟁까지가 첫번째 커다란 획을 그었다면,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과 박정희로 이어지는
"강추!! [서평] 친일파와 외세에 군사독재를 추가한 1950~70년대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2]" 내용보기

강추!! [서평] 박세길 저 <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2 : 휴전에서 10.26까지 >를 읽고 / 1998. 10., 314쪽, 돌베개


저자의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시리즈 3권 중 제2권은 한국전쟁 직후부터 친일 군사쿠테타범 박정희의 사망까지를 다루고 있다. 한국현대사가 1945년 8.15 해방에서부터 한국전쟁까지가 첫번째 커다란 획을 그었다면,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과 박정희로 이어지는 기간은 예속과 굴종, 부정과 부패, 압제와 착취라는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병폐가 자리잡는 두번째 단계라 할 수 있다.
한국현대사의 두번째 커다란 획을 가르는 과정은 미국에 의한 정치군사적, 경제적 종속과 이승만, 박정희로 이어지는 친일파 출신의 범죄자들의 압제와 착취, 그리고 미국과 친일파 권력집단에게 기생하는 매판자본가들의 육성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1953년에서 1979년에 이르는 한국현대사를 다시 공부하면서 몇 가지 특징과 교훈을 재발견하였다.

특징은 첫째, 한국의 정치 및 군대가 외세(미국)에 반영구적으로 종속되었고 미국은 자신들의 군사패권전략을 위해 끊임없이 한미일 군사동맹체제를 시도했다는 점. 둘째, 한국의 경제 역시 미국과 일본, 특히 1970년대로 갈수록 일본에 의해 구조적으로 철저하게 종속되었다는 점. 셋째, 한국의 자본은 그 속성상 매판자본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 넷째, 그 과정에서 친일/친미파 집단의 대리인이자 권력중심인 이승만과 박정희 일당은 미국의 사전 승인, 동의 하에 집권하거나 집권을 연장하였다는 점. 다섯째, 집권세력은 단 한번도 부정선거를 저지르지 않은 적이 없으며 부정부패와 정경유착, 정치자금과 뇌물이 구조화되었다는 점. 여섯째, 한국 내 정치경제 상황은 미국의 세계 정치경제군사전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 일곱째, 친일 군사 독재의 압제권력의 무기는 반공반북 이데올로기와 부정부패에 의한 뇌물이라는 점. 여덟째, 한국의 민중들은 어떠한 탄압에도 굴함없이 저항하며 스스로 국가와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나선다는 점이다.

교훈은 특징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첫째, 미국과 일본에 대한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종속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국가적, 민중적 수탈이 지속된다는 것. 둘째, 특히 군 작전지휘권 환수와 미군 일변도의 무기, 군사전략,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자주국방은 요원하며 항상 미군의 군사패권전략에 좌우되어 위험을 초래한다는 것. 셋째, 기술자립과 금융독립성을 유지해야만이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국내경제를 관리할 수 있다는 것. 넷째, 정치 군사 경제 언론 학계에서 친일파와 그 후예들은 청산해야만이 자주국방도 자립경제도 가능하다는 것. 다섯째, 정경유착과 부정부패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이야말로 정치발전과 경제발전의 근본이라는 것. 여섯째,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를 끝장내기 위한 남북화해와 평화통일 노력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어야 한다는 것. 일곱째, 민중들의 불굴의 의지와 본성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현대사의 두번째 과정을 구조적으로 규정했던 기본 요소는 참혹했던 한국전쟁의 결과였다. 한국전쟁이 남한에 끼친 최악의 결과 중 한 가지는 저자의 주장처럼 '저항세력의 괴멸과 권력에 대한 굴종'이었다. 
"미국과 이승만, 친일파는 한국전쟁을 통해 남한에 존재하는 일체의 항일독립세력과 저항운동의 씨앗을 말려 버리고자 했다. 그 결과 이땅의 항일세력과 민중운동은 괴멸적 타격을 받았다. 그로부터 미국은 휴전과 동시에 남한을 자신의 요구에 맞게 개조시키는 작업을 서둘러 진행시켰다."(p.13)

그리고 한국전쟁은 남한의 정치 및 군대가 외세에 반영구적으로 종속되는 구조를 정착시켰다. 
"한국전쟁을 경과하면서 남한에 대한 외세의 지배가 고정화된 가장 중요한 징표는 주한미군의 영구주둔이라고 할 수 있다. 주한미군은 1949년 6월 일시 철수하였지만 한국전쟁을 계기로 다시 이 땅에 밀려들어 오게 되었다. 주한미군의 영구주둔을 공식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1953년 10월 한미 양국간에 체결괸 한미상호방위조약이다. 가장 중요한 조항인 제4조에 따라 미국은 우리 민중의 의사는 물론이고 남한 정부의 아무런 협의 없이도 자유자재로 자신의 병력을 이 땅에 주둔, 배치시킬 수 있는 특별한 권한을 지니게 되었다."(p.14)

또한 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경제는 미국에 의해 철저하게 종속되었다. 그것은 미국과 이승만 일당에 의해 원조경제와 잉여농산물, 부실한 농지개혁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승만 일당은 미국의 원조와 잉여농산물, 권력기구 등을 통해 불법 정치자금과 뇌물을 무수히 수령하여 악용했다.
1945년부터 1961년까지 미국이 남한 땅에 쏟아부은 원조액은 31억 달러를 넘었지만 사실 이 액수는 한국전쟁 중에 미국이 파괴한 남한 재산의 총액을 간신히 넘어서는 것이었다.[한국경제의관점, 이내영] 물론 이러한 원조조차 대부분이 국방비에 충당되었다."(p.22)

미국은 자신들의 정치군사적, 경제적 이익이 보장되는 한 이승만 일당의 반민족성, 반민주성, 반통일성, 반민중성 어느 하나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의 이익이 조금이라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판단되면 그들이 장악하고 있던 군사적, 경제적 물리력을 가차없이 휘둘렀다.

1952년 한국전쟁 와중에 부산 정치파동을 통해서 불법적으로 집권연장을 꾀했던 이승만은 불과 2년 뒤인 1954년 대규모 부정선거를 감행한 후 폭력을 동원해 '사사오입' 개헌을 강요했다. 이윽고 1955년 대통령 선거에서 또다시 부정선거를 통해 조봉암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런 후에 진보당과 조봉암씨에 대한 사법살인을 자행한 것이다.
이승만은 1948년 5.10 단독선거에서부터 1952년, 1954년, 1956년, 1960년까지 모두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즉, 이승만 정권은 정통성은 커녕 정당성도 없는 존재일 뿐이었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진보역량과 민중역량이 궤멸되어 산발적인 저항과 반발 수준에 머무르던 민중들은 단 7년 만에 다시금 역사의 주인으로 일어서기 시작했다. 운명의 순간은 1960년 3월 15일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서 벌어졌다. 이승만은 부정선거에 대한 민중의 저항을 총칼로 짓밟으려 했고, 마침내 이승만 정권은 민중들의 질풍노도와 같은 4.19 혁명에 의해 무너졌다.
그러나 4.19 혁명은 미완성이었다. 살인마이자 범죄자 이승만은 미국의 품으로 도망갔고, 이승만 정권 아래서 수많은 범죄를 저지른 친일파 군부, 정치인, 관료, 매판재벌은 아무도 처벌, 청산되지 않았으며(폭력경찰 일부만 처벌), 각종 악법과 제도도 그대로 존속하였던 것이다. 결국 기존 친일파들이 잔존하는 가운데 의원내각제와 장면 내각이 출벌하였다. 장면 내각은 혁명도, 개혁도 어느 하나 이루어내지 못한 채 이승만 정권과 똑같이 부정부패했고 미국은 경제기술원조협정을 통해 한국경제를 직접 좌우하기 시작했다.
4.19 혁명 이후 압제와 탄압이 약해진 틈을 뚫고 민중들과 시민들은 스스로 각성되어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을 벌였고, 친미와 반공을 사슬을 끊고 민족통일의 열망을 끌어올렸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핵과 유엔, 그리고 달러를 독점적으로 지배하면서 천하무적을 자랑했던 미국도 195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뚜렷한 쇠퇴의 기미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소련의 경제,군사력이 강력해졌고, 동아시아(중국, 한반도)에서 불붙기 시작한 민족해방운동의 기운은 1950년대를 넘어서면서 순식간에 중동 아랍과 남미, 아프리카 등지로 확산되어 갔다.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남한의 이승만 정권처럼 미국의 원조정책이 흔들리면서 붕괴되거나 궁지에 몰리는 친미 독재정권이 속출하고 있었다. 베트남의 고딘 디엠, 터키의 멘데레스 정권 등이 그 예이다. 이와 함께 이라크처럼 반제국주의적인 정권이 등장하기도 했다. 사태가 이렇게 발전하자 미국은 이들 나라에 깊숙히 개입하여 허약한 정권은 갈아치우고 반미 정권은 허물어뜨리는 방법을 통해 보다 강력한 친미 정권을 세우는 조치를 단행했다. 아울러 해당 나라 민중의 자주적 독립과 사회의 민주적 개혁에 대한 열망은 무참하게 짓밟혀졌다. 이같은 조치는 대부분 반동적인 군부를 매수하여 쿠테타를 종용함으로써 이루어졌다.
1961년 박정희 친일파 정치군부의 5.16 군사쿠테타는 이러한 세계사적 배경과 미국의 군사패권전략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박정희 군사정권 등장 이후, 한일국교정상화와 한국군이 베트남 파병이 미국이 주도 하에 하나의 군사적 목표를 위해 동시에 추진되었다. 한일국교정상화는 일본의 자본과 군대를 남한에 진출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동북아시아에서의 일본의 반혁명적인 역할의 강화를 보장하기 위한 사전 조치로서의 의의가 있었다. 베트남 파병은 미국의 중국 포위 및 공격을 위해 저렴한 비용과 자국군의 희생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추진되었다.
박정희 일당은 민족적, 국익적 관심은 전혀 없이 굴욕적, 망국적 한일국교정상화와 베트남 파병을 폭력적으로 강행했고, 그에 따른 군인 월급과 군수물자산업 그리고 일본 원조와 차관에서 개인적인 뇌물과 정치자금 조성에만 골몰했다. 그리고 그렇게 손에 넣은 거액의 자금을 바탕으로 박 정권은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방대한 억압기구를 통해 반대세력을 감시하고 억압하거나 매수함으로써 자신의 통치기반을 결정적으로 강화시켜 나갔다. 박 정권은 엄청난 자금력을 동원함으로써 1967년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후 3선 개헌을 강행하는 데 성공했다. 그 과정은 비상계엄 발동과 주한미군의 사전 허락 하의 군대투입을 남발하면서 이루어졌다.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된 미국의 경제원조 감소는 원조에 의해 지탱되고 있던 한국의 경제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이승만 정권 말기부터 본격화된 이러한 위기는 장면 시대를 거쳐 박 정권에 이르러서도 수습되지 않은 채 도리어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모로 보나 1960년대 초까지 한반도의 남북에서 전개되었던 상황은 명백히 남쪽이 열세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처럼 날로 악화되는 위기를 수습하고 실추된 위신을 회복하기 위하여 미국은 '경제개발'이라는 무기를 치켜 들었다. 물론 미국은 남한에서의 경제개발을 추구하면서 단순히 위기를 수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본격적 수탈이라는 더욱 큰 이익을 목표로 삼고 출발했다.
결국 1960년대 경제개발은 남한의 경제가 원조로부터 탈피하여 자립성을 획득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주장과는 정반대로 제국주의에 의한 본격적인 수탈의 길을 여는 것에 다름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경제개발은 한국군 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남한 민중의 어깨 위로 떠넘기고자 하는 미국의 의도를 반영하고 있었다. 미국의 직접적인 주도 하에 이루어진 이른바 경제개발이 최우선적으로 역점을 둔 것은 차관과 금융지원에 의한 '매판자본'의 육성과 불평등무역과 직접투자에 의한 민중에 대한 수탈이었다.
한일국교정상화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이 때에 밀려들어 온 일본 자본은 미국과는 또 다르게 한국경제의 요소요소를 장악해 들어가면서 궁극적으로 이 나라 민중에 대한 무자비한 수탈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1960년대 후반 베트남전쟁에서 실패를 맛본 미국은 심각한 정치경제적 위기에 직면함과 동시에 도덕적 위신마저 실추되는 결정타를 얻어맞게 되었고, 휘청거리며 내리막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69년 닉슨은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고 주한미군 일부를 철수하고 군사원조도 중단했다. 물론 이를 대체하기 위한 목적으로 핵무기 추가배치를 서둘렀다.
이에 발맞추어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을 시작으로 학생, 농민, 도시빈민 등 민중들의 민주주의와 생존권을 위한 저항이 촉발되었다. 그 영향으로 1971년 대통령 선거와 총선에서 민주역량이 높아졌다. 광범위한 폭력 부정선거로 인해 선거에서는 패배했지만...

베트남 전쟁의 패배로 미국은 중국 전복을 포기하고 소련 봉쇄로 전환했다. 1970년대 초 미국은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시키고 나아가 중국을 반소진영에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한반도에서의 대결상태를 일시적인나마 은폐시키는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그것은 박정희 일당으로 하여금 기만적인 남북대화에 나서도록 사주했다. 이름하여 7.4 남북공동성명이 채택된 것이었다.
남북의 민중이 흥분과 열광으로 공동성명을 맞이한 것은 한편으로 볼 때 매우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공동성명 문안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을 부정하고 미국과의 사전 협의 후 곧바로 유신체제라는 더 광폭한 독재로 치달았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을 조작하는 등 박정희 일당의 반공 소동은 미국이 베트남에서 완전 패배하고 철수한 1975년 4월에 한층 노골적인 모습을 취했다.
1970년대 들어 미국은 남한을 전면적으로 핵기지하고 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몰 수 있는 한국군 지사병력을 대폭적으로 증강시키며 여기에 덧붙여 일본군을 보다 적극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자신이 주도하는 한-미-일 삼각동맹체제를 구체화시켜 나갔다. 미국은 한국군을 보다 직접적인 형태로 미군의 휘하에 편입시키기 위한 노력이 일치감치 시도하였다. 1971년 7월 주한 미 제1군단과 한국군 일부를 포함한 한미합동 제1군단이 창설되었다. 지휘권은 당연히 주한미군사령관이었다.[1970년대 한국일지, 청사 편집부] 부분적으로 시도되던 주한미군의 한국군에 대한 직접적인 장악은 1978년 한미연합사령부가 발족된 이후 전면화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전쟁정책에 편승하면서 급속한 성장을 자랑했던 남한 경제는 몇 걸음 못가서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미국은 국제수지 적자와 실업자 증대로부터 벗어나고자 1971년 10월 한미섬유협정의 체결을 강요함으로써 미국에 대한 섬유수출을 제한하였다. 그 결과 남한은 협정 체결 이후 5년간에 걸쳐 약 8억4천만 달러의 수출손실을 감수해야 했다.[민족분단과 통일문제, 김병오]
종전을 향해 치닫던 베트남전쟁 역시 전쟁물자 공급에 크게 의존하던 남한의 수출시장에 먹구름을 드리우는데 일조했다. 또한 1971년 한 해 동안 200개 이상의 차관기업이 일제히 파산하는 등 차관에 의존한 경제는 밑바탕에서부터 금이 가고 있었다.[프레이저 보고서, 미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이와 함께 급격한 유가인상 역시 원유의 전부를 해외에 의존하고 있던 남한 경제에 심대한 타격을 안겨다주었다.
미국의 압력에 의해 박 정권은 1972년 8월 이른바 '8.3 조치'라고 불려지는 긴급명령을 기습적으로 발표하였는데, 파산 직전에 놓여진 차관기업들은 가까스로 구출되었지만 이들 기업에 사채를 빌려주었던 소자산가들은 순식간에 재산을 강탈당해야만 했고, 은행대출의 증가에 따른 물가상승의 압박은 고스란히 민중의 어깨 위로 떠넘겨지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미국과 박 정권은 외국인투자와 차관도입에 의존한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하지만 모든 공업의 기초라 할 수 있는 기계, 부품, 소재 등은 제쳐놓고 값싼 숙련노동에 의존하는 최종 조립단계에만 치중한 것이다. 그 결과 부품, 소재 등은 계속해서 일본 등의 수입에 의존해야만 했고 따라서 전체 수입액은 계속적으로 증가했다. 또한 애초부터 경제성과 무관하게 추진되었다. 그리고 설비판매를 노린 외국자본의 박 정권에 대한 뇌물공세, 박 정권의 정치자금 획득을 겨냥한 차관도입 욕망, 그리고 기업을 담보로 금융특혜를 기대하는 국내 매판자본의 요구 등이 뒤엉키면서 중화학공업화는 시장수요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가운데 과잉, 중복투자가 행해졌다.

1970년대 내내 유신독재는 어느모로 보나 이성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1973년 8월 탄압을 피해 일본에서 망명투쟁을 벌이고 있던 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이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해 강제 납치, 귀국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학생, 지식인, 언론인들의 투쟁이 다시 일어났지만 박정희 일당은 민청학련 사건 날조로 맞섰다. 이에 대해 다시 거대한 저항이 시작되었고 박 정권은 동아일보사 탄압, 인혁당 재건사건 관련 피고인 8명 사형, 4대 전시입법을 제정하여 탄압에 나섰다.
1975년 4월 서울대 김상진 열사의 저항을 계기로 민주진영 전체는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이에 몹시 다급해진 박 정권은 5월 13일 기어코 악명 높은 긴급조치 9호를 발동시켰다. 긴급조치 9호에 대한 가장 처절한 투쟁은 1977년 9월에 있었던 청계 노동자들의 '노동교실 사수' 투쟁이었다. 그러나 청계 노동자들의 죽음을 각오한 투쟁은 그동안 긴급조치 9호에 억눌려 침체되었던 각계 민주세력에게 새로운 활력을 주었다.
1978년에 접어들자 상황은 보다 급박해지기 시작했다. 이 해에도 투쟁의 도화선은 노동자와 농민들이었다. 즉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투쟁과 함평 농민투쟁으로 학생들의 유신철폐투쟁 또한 새로운 양상을 보여주게 되었다. 학생들과 재야인사, 해직기자, 해직교수들까지 저항에 나섰다.
1979년에 들어서자 재야 민주화운동세력, 농민들의 감자 피해보상 투쟁과 오원춘씨 납치 사건 규탄, YH무역 노동자 신민당사 농성투쟁으로 이어졌고, 박 정권은 급기야 김영삼 의원을 제명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대학생들의 거센 저항이 이어졌고 시민들이 학생들의 시위에 동참하기 지가했다. 박정희 일당은 부산과 마산에서의 강력한 저항을 비상계엄과 군대 동원으로 막아보려 했지만 민중들은 개의치 않고 연이어 거대한 저항으로 맞섰다.

그러던 중 10월 26일 유신정권의 괴수 박정희가 부하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었다. 10.26 사건의 진상은 아직도 여전히 흑막에 가려져 있다. 다만 몇 가지 단편적인 사실들이 사건의 배후에 미국이 존재했음을 암시해줄 뿐이다.

[ 2013년 10월 13일 ]
c****n 2013.10.14.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강추!! [서평] 해방후 5년 분단과 친일파 부활 대 통일독립국가의 투쟁 [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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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추!! [서평] 박세길 저 <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1 : 해방에서 한국전쟁까지 >를 읽고 / 2012. 2., 303쪽, 돌베개) 외세에 대한 의존, 민주주의와 상식의 실종, 헌법 유린, 기득권끼리 장난치는 정치, 공직자들의 파렴치, 95% 가까운 국민의 민생파탄, 분단체제의 고착화, 남북화해와 평화와 통일에 대한 혐오... 이 모든 것들이 일제 강점 후 100년이 지나서도, 해방 후 68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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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추!! [서평] 박세길 저 <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1 : 해방에서 한국전쟁까지 >를 읽고 / 2012. 2., 303쪽, 돌베개)

외세에 대한 의존, 민주주의와 상식의 실종, 헌법 유린, 기득권끼리 장난치는 정치, 공직자들의 파렴치, 95% 가까운 국민의 민생파탄, 분단체제의 고착화, 남북화해와 평화와 통일에 대한 혐오...
이 모든 것들이 일제 강점 후 100년이 지나서도, 해방 후 68년이 지나서도, 한국전쟁 종료 후 65년이 지나서도, 1987년 6월 항쟁 후 26년이 지나서도 계속되고 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외형적인 민주적 절차와 경제규모는 OECD 10위권으로 인정받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내실과 국민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박근혜 정권의 안하무인을 목격하면서 드는 질문이었다.
나는 그 이유를 한국현대사에서 찾아보기 위해 이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1945년 해방에서 1950년 6월 한국전쟁 직전까지 다룬 한국현대사 1편은 2013년 한국사회의 뿌리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다.
기존의 편견과 상식과 제도권 정보에 의존했던 기억과는 달리 해방 후 5년간 한반도에서는 아주 잠깐의 희망과 열정, 그리고 그 뒤를 이은 5년간의 끔찍한 학살과 탄압과 파괴가 이어졌던 것이다.

저자는 방대한 기초자료와 언론기사, 증언과 인터뷰 등을 취합하여 한국현대사를 새롭게 재조명하였다. 일제의 식민사관이나 친일파 출신의 국사편찬위원회, 제국주의자 미국의 관점이 아닌 오로지 한민족과 민중의 관점에서 기존의 사건과 사실을 재발견하고 재해석했다.

저자의 결론은 한민족과 민중 스스로의 일제로부터 해방과 통일된 자주독립, 평등평화 국가를 수립할 수 있었음에도, 미군정의 군화발과 친일파들의 부역 아래 아래 한민족과 민중의 염원은 처절하게 꺽여나갔던 것이다. 한민족과 민중은 해방 후 5년 동안 자주독립과 평화통일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미군정과 친일/친미파 앞잡이들과 끝없는 항쟁을 이어나갔다는 것이다.
나 역시 책을 덮은 후 저자의 결론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친일과 사대주의, 부정과 부패의 뿌리는 오래 전부터 자라나고 있었고, 도려내지 못했던 것이다. 

한국현대사 1편을 읽고 나면 아래와 같이 정리하게 된다. 좀 더 자세한 정리내용은 개인 블로그(http://blog.daum.net/hy2oxy/8691548)를 참조하면 유익할 것이다.

1. [일제의 강제 공출과 징용]
100년~70년 전의 일이지만 다시금 일제의 만행에 치를 떨지 않을 수 없다. 일제는 식민지 침략 후반부터 100만명 이상의 조선인을 강제로 징용하여 일본 내륙과 동남아, 태평양 지역의 식민지에 보내 노동력을 갈취하고 학살하였다.

"일제는 군량미 조달 목적으로 조선 전역에서 강제적인 공출을 실시하였다. 이 공출제도에 의하여 쌀 생산고의 43.1%(1941년), 45.2%(1942년), 55.7%(1943년)가 강탈되었으며 1944년에는 63.8%에까지 이르렀다."(p.17)

2. [일제 강점기 국내외 항일 투쟁]
8.15 해방이 '외세에 의한 일방적인 해방'만은 아님을 이제 조금씩 깨닫게 된다. 억지 논리와 자기세뇌가 아니라 드러난 수치와 기록과 흐름으로... 저자가 전해주는 식민지 시대의 각종 수치와 통계는 일제의 폭압 속에서도 이 땅의 민중들과 독립투사들이 국내외에서 항일 투쟁과 생존권 투쟁을 끊임없이 진행했음을 알려준다. 한민족은 일제와 싸운 전세계 민주진영의 한 축이었다.

"1945년을 맞이하여 중국의 중경에서는 김구가 지도하는 임시정부의 하부 조직으로서 '한국광복군'이 조지괴어 한반도 진공을 위한 맹훈련에 돌입하고 있었고, 만주 일대에서는 소부대 항일 무장단체가 계속적으로 국경 주위에 출몰하여 일제의 후방을 교란하였다.
또한 중국 연안에서는 1942년 '조선독립동맹'이 조직되어 화북 일대에서 일본군과 항전을 전개함과 동시에 역시 국내 진공을 꾀하고 있었으며, 국내에서도 1944녀누8월 여운형의 지도로 서울에서 비밀리에 '건국동맹'이 결성되어 국외에서 독립을 꾀하는 조직과 연락을 계속 취하면서 해방을 맞을 날을 적극 준비하였다.[한국의역사, 조선사연구회 엮음]"(31~32)

3. [8.15 해방을 준비한 한민족의 활동]
해방 후 한반도에서 벌어진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의 활약은 한민족과 민중에 대해 굉장히 놀랍고 존경스러운 모습이었다. 21세기가 도래한 현재에도 제대로 조직하지 못하고 있던 수준을 해방 후에 한 달 만에 달성했다는 것은 저자의 주장대로 일제의 폭압 속에서도 한민족과 민중은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면서(굳이 예건하지 않더라도) 비밀리에 엄청난 의식화와 조직화를 준비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하여 총독부로부터 사실상 항복을 받아낸 가운데에서 극히 신속하면서도 광범위하게 건국준비위원회가 도처에서 결성되어 갔다. 그리하여 8월 말 경에는 전국적으로 145개의 건국준비위원회 지부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건국준비위원회는 지방 수준에서부터 인민위원회로 신속히 전환하여 갔고, 북측의 상당 부분과 남측의 일부 지역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직접 해당 지역의 민중의 손에 의해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인민위원회는 남쪽은 말할 것도 없고 북쪽에서도 대부분 소련군이 진주하기 이전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렇게 민중들의 자발적인 건국사업을 바탕으로 하여 드디어 1945년 9월 6일 전국에서 모인 1,000여명의 민중 대표들이 서울에서 회합, 역사적인 '조선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선포하였다."(p.34~37)

4. [해방 후 미군은 해방군인가 점령군인가]
그간 한국의 제도교육과 주류 학계, 언론에서 일방적으로 던져주던 정보와 달리 해방 후 미군과 소련군, 특히 미군은 일제의 총독부를 대체하겠다는 입장이 명확했다. 즉 미군은 해방자가 아니라 일제를 대신한 점령자, 군사통치였던 셈이다.
1910년 일제의 한반도 합병은 강박에 의한 '강점'이었다. 일제의 패망 이후 선택은 한민족, 민중 스스로 하는 것이지, 일제의 식민지를 미국이 양도받겠다는 것 그리고 식민지 통치기구를 그대로 존속시키는 조치는 우리 민족에게 치욕이자 분노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일본의 8.15 항복 선언 이후) 일본과의 전쟁에서 얻어낸 정치적 소득을 규정지은 '일반명령 1호'를 공표하였다. 이 명령은 모든 작전지역에서의 일본군은 연합국의 항복 접수에 협력할 것과 무엇보다도 (조선, 필리핀 등)해당 지역의 승인받지 못한 무장 저항단체에 항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시하고 있었다. 즉 맥아더가 선정하는 정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세력에게 이양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한국현대사의재조명, 조이스 콜코/서대숙]
8월 14일 청진과 나남에 소련군이 상륙하였으며 16일에는 원산에서 상륙작전이 감행되었다. 이러한 소련군의 진공 추세에 비추어 볼 때 한반도 전체가 소련군에 의해 장악되는 것은 시간 문제로 보였다.
당시 미군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부대가 한반도에서 600마일 이상 떨어진 오키나와 주둔 미군이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미국은 한반도 내에서 향후 자신의 지위를 보장받기 위하여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할 것을 소련에 제의하였고, 소련은 미국의 제안을 별다른 반대 없이 받아들였다. 서울에 진출한 소련군은 그 즉시 38선 이북으로 되돌아갔다.
훗날 미국 의회에서 국무성 딘 러스크 대령은 미국이 38선을 제안한 것은 '서울을 미군의 점령 하에 두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증언했다."(p.42~43)

5. [해방 후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의 행보]
미 군정은 애초부터 한반도 민족을 일제로부터 해방시키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괌이나 필리핀을 스페인 전쟁의 '전리품'으로 취득한 것처럼 일제와의 전쟁의 전리품으로 한반도 남단을 자신들의 식민지 확충의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다만, 괌이나 필리핀과 한반도 남단이 다른 것은 한반도 북단에 존재하는 소련 때문에 국제사회의 눈치를 봐야하는 것과 한반도의 민족과 민중들이었다.
미국 내 군국주의, 제국주의 세력들의 식민지에 대한 탐욕과 삐뚤어진 태도와 불합리한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가, 그들의 매카시즘이 한반도에도 확장된 셈이다. '반공주의'에 눈이 어두워 진실이 무엇인지, 정의가 무엇인지 바라보지 못하는 태도는 21세기 한국에서도 똑같은 '반공주의'와 조금 다른 '종북'이란 이름으로 여전하다.

"9월 9일 서울에 진주한 24군단의 하지 중장과 아베 총독이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 항복 조인식을 가졌다. 때맞추어 총독부 건물에 게양되어 있던 일장기는 내려지고 그 대신 성조기가 높이 솟아올랐다.
미군정은 과거 일본 총독부의 지위와 체계를 그대로 인수하였다. 총독부 일본인 관리들도 상당 기간 그대로 유임되었고 이후에는 자문역할로서 미군정을 보좌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항복 조인식은 일본 식민 통치의 근본적 해체가 아니라 통치권을 일본에서 미국의 손으로 이양하기 위한 절차라고 해도 조금도 틀린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절차를 거친 미군정은 그 즉시 자신만이 한반도 남단의 유일한 정부(?)임을 선언하였고 그에 따라 (한민족과 민중이 스스로 구성한) '인민공화국'은 간단히 부정되었으며 궁극적으로 미군정의 무력에 의해 분쇄되었다."(p.47~48)

6. [한반도 점령 후 미 군정의 통치방식]
미 군정이 한반도의 해방군, 해방자가 아니라 일제 강점 지배를 이은 미제 강점임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두 가지다. 제도와 사람.
미 군정은 일제가 공포, 시행하던 식민지 법과 제도를 그대로 시행하여 한반도 남단이 자국의 군사적, 경제적 식민지임을 만방에 과시하였고, 미 군정청과 경찰에 이어 국방경비대의 수뇌부에 일본군 말단 장교와 친일파들을 기용함으로써 한반도 남단의 민족과 민중들의 염원인 식민지 청산과 매국노, 친일파 청산을 가로막았다. 가로막기는 커녕 그들을 부활시켰고, 더 강력한 지원자와 배후로 버틴 셈이다.
일제의 동양척식회사보다 더 거대한 자산을 신한공사 명의로 탈취한 미 군정은 일제보다 더 거대한 식민지 통치자인 셈이었던 것이다. 일제든 미군정이든 한민족과 민중이 한반도를 점령해 달라고 식민지로 통치해 달라고 하지 않았다. 몇십, 몇백 명의 매국노, 친일/친미파, 사대주의자들 말고는...

"미 군정은 스스로를 일본의 총독부와 동일시했고 일본이 이 땅 위에 설치해 놓은 모든 기구를 고스란히 인수하여 다시 사용하였다. 친일 경력이 분명한 자들이 미 군정의 주위에 포진하였고 반봉건적인 지주 소작관계는 근본적 개혁 없이 계속 온존되었으며 억압적 식민 통치 체계 역시 그 완교한 생명력을 유지해 나갔다. 미 군정에 협력했던 대표적인 세력 중의 하나는 친일지주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한민당이었다. 또한 미 군정은 영어를 사용할 줄 아는 한국인들을 우선적으로 고용하였는데 이들은 대부분 부유한 지주계급 출신이었다.
우선, 미 군정은 치안유지의 문제를 과거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경찰 기구를 그대로 인수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했다. 이러한 미 군정 정책의 결과 경찰 간부의 8할은 과거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던 자들로 채워졌으며 특히 그 중에는 북의 친일파 처벌을 피하거나 ?i겨 내려온 친일파 중 상당수가 포함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경찰의 횡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극심하였다. 경찰의 창설과 더불어 더불어 그 활동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온갖 파쇼적 법령체계가 난폭스럽게 등장하였다. 1945년 11월 2일의 군정법령 21호는 다음과 같다. '앞으로 새로운 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혹은 앞서 폐기된 것이 아닌 모든 현행 법과 과거의 총독부가 공포한 규정, 명령, 지시 및 각종 문서들 중에서 1945년 8월 9일까지 유효했던 것은 합법적 당국(미 군정)에 의하여 폐기될 때까지 계속 발효한다.'
이리하여 1908년의 군사법령, 1910년의 정치집회금지법, 1936년의 선동문서통제령, 심지어는 1907년의 치안유지법 등 악명 높은 일제 시대 법률들이 그대로 효력을 유지하게 되었으며 경찰 총수 조병옥은 이러한 맥락에서 1912년에 제정된 일본 법률을 근거로 1946년 가을 무렵에 독립군과 애국자들에 대한 대량 예비검속을 단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태는 적어도 1948년 4월 8일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물론 그 이후에는 더욱 가혹해졌다."(p.61~62)

7.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진실과 거짓]
한국인들은 해방 후 신탁통치 관련 내용에 있어서도 친일파 관료와 정치인, 교육자, 지식인들에게 철저하게 속았다. 미국과 친일수구세력의 언론 조작과 허위선동은 이미 미국이 한반도를 점령하면서부터 시작되었고,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뿌리는 속일 수 없다"
모스크바 삼상회의는 당시 조건에서 한민족의 통일독입국가 수립에게 가장 최선의 방안이었고, 교과서와는 달리 대부분의 독립세력과 민주세력, 민중들은 환영했다. 모스크바 결정 과정과 내용을 왜곡,조작하고 이를 이용해 독립,민주세력을 공격한 자들은 미 군정과 한 줌 친일파였다.

"해방된 조선을 분열시키기 시작한 신탁통치는 최초에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구상되었다. 루즈벨트는 테헤란과 얄타회담 등 연합국 수뇌가 회동한 자리에서 한국(조선)에 대해, 최고 30년에 이르는 신탁통치의 실시를 제안하였다.[한국분단사, 조순승]
미국은 자신을 포함하여 소련, 영국, 중국 등 4개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실현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한반도를 자신의 수중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영국과 중국(당시 장개석 정부)은 미국의 동맹국이면서 영국은 동아시아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중국은 미국에게 예속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결국 소련이 반대하더라도 숫적으로 고립됨으로써 신탁통치의 주도권은 미국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이러한 맥락에서 신탁통치는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는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를 미국이 차지할 수도 있는 방안으로 등장했다.
1945년 12월 16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소,영 삼상회의에서 미국은 이러한 기대를 그대로 드러냈다. 회담에서 미국은 본격적인 신탁통치 체제가 수립될 때까지 조선을 미,소 양군 사령관을 우두머리로 하는 단일정부를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조선인은 단지 행정관, 고문관, 조언자의 역할이었고 그 기간에 단일 민족정부를 수립한다는 조항은 전혀 없었다. 이에 대하여 소련은 조선 민중의 공통된 열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임시 조선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긴급함을 밝히고 가능한 한 속히 장구한 일제 식민통치가 가져온 참담한 결과를 청산할 것을 요구하는 귀절을 협정의 최종안에 삽입하도록 압력을 가했다.[한국분단사, 조순승]
다음으로 미국은 미,소,영,중 대표들로 구성된 행정부가 신탁통치 기간에 입법, 사법, 행정에서 전권을 행사하도록 짜여져야 하며 그 기간을 5년으로 하되 10년으로 연장할 수 있고록 하자고 제안하였다. 이에 대하여 소련은 이 기간에도 임시 조선정부가 주권을 행사하도록 하고 4개국은 단지 조선의 독립과 민주적 발전을 위해 필요한 제반 원조를 하는 후견적 위치에 머물러야 하며 기간은 5년 이내로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후견제 실시 여부도 임시정부와 미소 공동위원회의 협의를 거쳐 최종 결정할 것을 요구했다.[한국분단사, 조순승]"(p.53~55)

8. [해방 후 미 군정 독재에 대한 민중항쟁]
해방 후 항일 투쟁세력과 민중들의 대중조직의 즉각적, 전국적 조직화를 살펴보거나 처음에는 미 군정의 활동을 지켜보다가 1946년 초부터 미 군정의 본질을 깨닫고 항거와 항쟁을 이어나간 남한 민중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달리 잘 조직되었고 민중들의 자유와 평등, 통일 독립정부를 세우기 위해 처절하게 싸웠다.
미 군정은 일제 총독부의 관리를 군정청에 고용하고, 총독부 경찰을 미 군정의 보호 하에 경찰로 변신시키고, 일본군과 만주군 전력자를 군대로 변모시키고, 친일 부역자들에게 일제 자산을 불하함으로써 민족반역자들을 미 군정의 통치기구에 이용함으로써 민족반역자를 처단해야 하는 한반도의 과제를 가로막은 것이다. 이승만이나 한민당은 미 군정의 앞잡이이자 괴뢰일 뿐이었다.

"1945년 11월 초 전국의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모인 가운데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이 결성되었다. 전평은 1946년 2월에 이르러 조합원 수가 57만명에 달하는 규모에 이름으로써 사실상 전국의 노동자 대부분을 조직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곧이어 1945년 12월 8일, 당시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을 조직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서울에서 '전국농민조합총연맹(전농)'의 결성대회가 개최되었다. 전농이 발표한 조직체계와 가입원 수는 전국 13개 도 연맹, 군 단위에 188개 지부, 면 단위에 1,745개 지부가 있으며 조합원 수는 약 330만 명인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밖에도 전국청년단체총동맹, 전국부녀총동맹, 조선문화단체총동맹, 학병동맹 등 다양한 대중단채들이 광범위하게 건설되었다.
청년단체는 1945년 12월 초 전국 13도의 2,397개 단체 72만 3,305명 회원의 대표 639명 중 602명이 참가, 결성했다. 부녀동맹도 1945년 12월 80만 명의 회원을 대리하여 대표자회의를 통해 결성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결성된 각종 민주적 대중단체들은 일부 정당과 손잡고 상설적인 공동전선을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1946년 2월 15일에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결성대회를 가졌다. 주 구호는 '주장하자 인민의 권리, 건설하자 민중의 국가' 기본 노선은 1. 조선의 모든 애국적 민주세력의 공동전선 2. 제국주의 침략세력과  그 하수인 격인 일체의 매국 도당에 대한 공동의 투쟁기관 3. 자주적이며 민주적인 통일정부를 위한 공동의 준비기관[연표한국현대사, 김천영]
이상과 같이 단기간 내에 광범위한 대중단체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지난날 숱한 고난 속에서도 꺽이지 않고 지속되어온 항일 투쟁의 뚜렷한 성과물이었. 또한 각 단체의 강령을 통해 표현되고 있듯이 당시의 한국 민중은 자신들이 쟁취해야 할 목표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렇듯 한국 민중이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기 위하여 조직적, 의식적 준비를 해 나가는 가운데, 미 군정에 의해서 강요되어지던 온갖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파탄은 필연적으로 대규모 민중항쟁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P.72~74)

9. [미소 공동위원회의 파탄과 민중들의 염원]
미 군정이 모스크바 협정과 미.소 공동위원회를 파탄으로 몰고가는 상황은 한반도만의 상황으로 전후관계를 분석하기에는 어려울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1947년 봄 '트루만 독트린' 등 미국의 대외 군사외교정책이 '소련과 중국 봉쇄'로 구체화되면서 미국 정책을 극우보수세력이 지배하는 과정과 관련이 있으니까.
처음 한반도에 상륙한 미국은 한반도를 일제의 '식민지 전쟁 전리품'으로 그냥 낼름 먹으려고 시도한 것이다. 하와이나 필리핀처럼. 그럼에도 미국측이 식민지 통치 -> 30년간 신탁통치 -> 10년간 신탁통치 -> 임시정부 선 수립 -> 일제 잔재 청산 등으로 계속 탐욕을 줄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한반도 민중들의 가열하고 단결된 투쟁과 소련의 견제 때문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모스크바 삼상 협정에 의해 개최된 미.소 공동위원회는 1946년 3월부터 3개월간, 1947년 5월부터 3개월간 진행되었으나, 모스크바 협정을 극렬 반대하는 친일파와 민족반역자 단체를 한반도 사회단체에서 제외하자는 소련의 주장을 미국이 거부함으로써 결렬되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평가는 당시 남한 민중의 요구가 무엇이었으며, 미.소 양국이 이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가능해질 것이다. 여론조사는 이란 평가에 큰 시사점을 준다. 미.소 공동위원회가 진행되고 있던 1947년 7월 3일 '조선신문기자회'에서는 서울 시내 주요 지점 10개소에서 일제히 통행인 2,495명에 대해 임시정부의 형태와 방법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발표한 결과, 시민들의 압도적 다수가 한민당과 한독당을 배척(72%)해야 하고 국호는 조선인민공화국(70%)으로, 정권형태는 인민위원회(71%)로, 토지개혁은 무상몰수 무상분배(68.3%)하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한국 민중은 모스크바 협정 실현을 촉구하는 투쟁을 광범위하게 벌여나갔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47년 7월 27일 남한 전역에서 민주주의민족전선 주최로 개최된 '임시정부 수립촉진 인민대회'였다. 전국적으로 수백 만명이 미소 공위의 성사와 임시정부 수립을 촉구했다."(p.95~97)

10. [미국의 남한 단독선거 강행과 2.7 구국투쟁]
한민족과 민중의 의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유엔에 한반도의 운명을 떠넘긴 미군정과 친일파들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은 거셌다. 전국적으로 무려 200만 명이 2.7 구국투쟁에 참여하였다.

"북측과 소련이 반대할 것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결정을 강행하는 것은, 결국 미국의 의도는 한반도 남북에서 점증하는 민족해방세력의 위세로 인해 한반도 전체를 속국으로 삼는 것을 포기하고 남쪽에서만 자신들의 군사력과 친일파를 동원하여 친미 식민지 또는 위성국가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고, 이를 위해 모든 정당성과 규약을 무시하고 유엔이라는 명의를 도용하여 강제로 한반도 남단에 자신의 뜻에 맞는 허울뿐인 정부를 구성하려는 것이었다.
국토 양단의 위기로부터 벗어나고 민족의 주권을 되찾기 위한 한국 민중의 의지는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2.7 구국투쟁의 불길로 치솟았다. 전평 산하 30만 명의 남한 노동자들은 일제히 전국적인 총파업에 돌입함으로써 투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전신, 철도 등 노동자의 파업은 미 군정의 손발을 마지시켰다. 노동자들의 총파업에 고무되어 전국의 각급 학교도 일제히 동맹휴학을 선언하고 대대적인 가두시위에 나섰다. 이에 발맞추어 일부 미 군정 관리들까지 포함하는 각계 각층의 민중들이 미국의 단독선거 방침에 반대하며 투쟁의 대열에 합류했다. 농촌에서의 투쟁은 미 군정의 야수적인 탄압에 대항하려 무장투쟁으로의 전환이라는 새로운 양상을 띠어가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무려 200만 명이 2.7 구국투쟁에 참여하였다.
이에 대해 미 군정과 친일 군경은 야수적인 탄압을 자행하여 100여명이 무참하게 학살되고 8,500여 명이 투옥되었다."(p.104~107)

11. [망국적 단독선거의 강행 : 민족통일전선의 형성]
1945년에서 1948년까지를 살펴보면, 1948년 8월 제정된 헌법과 이승만 정부(?)는 한국인이 선출하거나 승인한 정부가 아니라 미군정과 친일파가 선출하고 승인한 정부일 뿐임을 알 수 있다. 박근혜 정권이 한국 유권자가 아니라 국정원과 경찰, 선관위가 선출한 것처럼... 물론 1948년 8월까지 미군정이 식민지를 군사,정치적으로 점령통치하기 위해 직접 또는 친일파 군경을 동원해 학살한 민중들의 숫자는 수천~수만 명에 이른다.
5.10 단독선거 실시의 결정 주체와 과정, 5.10 선거를 위한 투표등록 과정, 선거 전후 자유의 박탈과 폭력의 난무, 강압적인 투표 강요, 투표율, 투표 및 개표 관리 등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5.10 선거 자체가 무효이고 따라서 현재 기득권자들이 애지중지하는 제헌국회와 이승만 초대 정부 자체가 원천무효임을 말해준다. 그들은 역사적으로도, 보편적 민주주의 관점으로도 정당성이 없는 집단인 것이다.

"한국 민중이 성스러운 3.1 운동을 기념하고 있던 1948년 3월 1일 유엔 임시위원단은 5월 10일 이전에 남한 단독선거를 치르겠다는 모욕적인 발표를 단행했다. 이렇듯 미국의 강요에 의한 민족분열의 징후가 명확해져 감에 따라 조국을 수호하시 위한 한국 민중의 투쟁은 보다 끈질기고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또한 미국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채 미 군정과 타협적인 자세를 취했던 남한의 애국적인 인사들과 정당, 사회단체들도 망국적 단독선거 강행에 반대하는 투쟁에 나섰다. 드디어 4월 19일 평양에서 남북 56개 정당 시회단체 대표 695명이 참석한 가운데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가 개최되었다.
연석회의는 26일까지 공식회의를, 30일까지는 남북요인회담을 개최하여 남한 단독선거 분쇄와 통일조국 건설의 방도에 대해 폭넓은 의견을 교환하였고,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미국은 단독선거를 강행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미 군정은 미군을 한반도에 증파하고 전 미군에게 특별경계령을 내려 철저히 무장하도록 하였다. 또한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을 중심으로 선발한 국방경비대로 하여금 경찰업무를 수행하도록 하고, 경찰과 별도로 그들이게 한국 민중을 구속 수사할 수 있는 권한을 부당하게 부여하였다.
그리고 모든 경찰(총독부 경찰 출신이 대부분인)로 하여금 중무장한채 요소요소를 지키도록 조치하였고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민중들을 영장없이 구속할 수 있고 필요에 따라 무차별 살상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이것도 모자라 미 군정청은 온갖 부랑 악질 청년들의 손에 무기를 쥐어주고는 경찰을 도와 민중 탄압에 나서도록 조치하였다. 미군정은 5.10 투표 당일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한 후 장총을 든 경관, 곤봉을 든 우익청년단원을 길목마다 배치하였고 부산과 인천 앞바다에는 미군 군함을, 하늘에는 공군기를 띄워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남조선 단독선거 반대투쟁 전국위원회는 선거 보이코트를 위해 한국 민중이 총궐기할 것을 호소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에 따라 선거기관 공격, 매국적 선거 입후보자에 대한 처단, 지서 등 미군정 행정기관에 대한 타격 등 단독선거를 분쇄히기 위한 민중들의 투쟁이 세차게 타올랐다. 남한 전역에서 파업과 동맹휴학, 철시가 진행되었고 군정관리들과 경비대원의 일부도 단독선거 반대에 동참하였다.[이상 연표한국현대사, 김천영]
5.10 선거는 대다수의 애국인사들이 불참을 선언한 가운데 오직 이승만과 한민당 일파만이 입후보한 채 이루어졌다. 이와 함께 온갖 회유와 협박을 통해 민중들을 투표장으로 내몰았건만 다분히 과장했을 것이 뻔한 미 군정의 공식집계조차 전체 남한 인구의 3분의 1에도 못미치는 숫자만이 투표에 참여했을 뿐이다.
이렇게 대한민국이라는 정부의 최초 형태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유엔은 미국의 요청에 의해 대한민국을 한반도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했다."(p.118~124)

12. [이승만 정권의 정체]
 탄생 자체가 정당이 없고 폭력으로 점철된 이승만 정권이니 탄생 직후 온갖 폭력기구와 파쇼악법을 제정한 것은 필연일 것이다. 21세기인 현재 미국과 한국 사이에 체결된 대부분의 협정과 합의서,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법률과 제도는 이미 일제가 강요한 조약과 협정 그리고 미군정이 강제한 조약과 협정에서 시작된 셈이고... 
따라서 이승만 정권은 역사적으로도, 법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정당성, 정통성이 없는 정권이라 할 수 있다. 정치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미국이라는 외세를 등에 엎고 친일파 매국노들을 편에 서서 애국자, 독립투사, 민중들을 끝없이 학살하고 고문하고 빼앗고 짓밟으며 거짓과 폭력으로 세운 헌법과 정권이 무슨 정당성이 있을까...

"미국의 남한에 대한 영속적 지배는 각종 조약과 협정에 의해 보다 확고해지고 합법화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미군의 철수 여부와 관계 없이)이승만 정권은 이러한 예속 조약에 의해, 미국의 이해에 따라서 국정 전반을 풀어나갈 수밖에 없는 허약한 존재였다. 대표적인 예를 살펴본다면 미국과 이승만 정권은 (정부수립이라는 형식을 갖춘 8월 15일 이후 9일만인) 1948년 8?r 24일 남한 땅에서의 미국의 계속적인 군사지배권을 보장하는 다음과 같은 '과도기간 잠정적 군사 및 안전에 관한 행정협정'을 체결하였다. 
이와 함께 1948년 9월 1일에는 '한미 재정 및 재산 이양에 관한 협정'을 제결하였다. 이 협정을 통해 미국인과 미국 회사들이 그때까지 누려오던 온갖 특권은 그대로 유지되도록 보장되었고 그들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한국 내의 재산을 점유할 수 있도록 용인되었다. 또한 이 협정을 통해 미국은 미 군정 시절 자신들의 과도한 통치비용으로 인해 말생한 모든 부채를 이승만 저원에게 떠넘길 수 있게 되었으며 마찬가지로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기지를 위한 토지공여 및 시설유지 비옹을 전부 한국 정부가 부담하도록 할 수 있게 만들었다."(p.124~126)

13. [단독선거를 저지시키려는 남한 민중의 무장항쟁]
1948년 여순 봉기를 돌이켜보면 1980년 5월 광주항쟁이 비교됩니다. 여순 봉기는 동포와 민중에 대한 학살을 거부하여 군인들이 일으킨 의거였고, 광주항쟁은 군인들이 전두환 살인마의 학살명령을 충실히 이행했기 때문이다. 비록 여순 봉기로부터 시간도 많이 경과되었고 미군과 박정희 군사독재자가 군인들을 집요하게 세뇌한 점, 작전권을 쥐고 있는 미국과 '하나회'를 주축으로 사설 군대조직을 가동했던 전두환의 책임이 분명하지만 수많은 광주시민의 목숨을 꺼리낌없이 앗아간 공수부대와 계엄군들은 역사와 민족 그리고 민중에게 큰 범죄를 저지른 것이라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아직도 초급 장교와 하사관, 병사들 중에서 대다수가 학살의 범죄를 참회하거나 진실을 밝히지 않고 있는 것은...ㅠ
저자는 4.3 제주 항쟁과 여순 봉기 그리고 기타 광범위했던 당시의 무장항쟁을 자연발생적이고 불가피한 측면으로 분석, 평가했지만 오히려 그 이후의 역사적 결과는 당시의 무장항쟁이 자연발생적이 아니라 조직적이고 전면적으로 진행되었다면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역사에 가정은 없는 것이지만...)
1948년 8월 미군정이 한민족과 민중들의 염원과 요구에 반하여 이승만과 친일파 일부로 단독정권을 수립한 것은 역으로 미군정과 친일파가 야금야금 한반도 전체를 집어 삼키려다고 포기하고 남쪽에만 괴뢰정권을 세우려 한 것이기에 한민족과 민중 전체에게 선전포고를 단행한 것이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해 비록 낫과 망치, 죽창 밖에 없지만 남북한 민중들이 끊임없이 싸웠던 것이다. 이미 한반도는 1948년 8월부터 '미군정+친일파'에 의해 분단된 채 정당성 없는 집단의 학정을 감수하느냐 아니면 한민족과 민중 전체의 힘으로 스스로 친일파를 척결하고 통일된 자주독립국가를 세우느냐는 기로에서 전쟁이 시작된 셈이다.

"1946~7년 미.소 공동위원회의 파탄과 미국과 이승만 일파의 단독선거에 의한 민족분단 음모를 알아챈 후, 1948년 들어 2.7 구국투쟁과 단선단정 반대투쟁을 경과하면서 남측 민중의 반미 반이승만 투쟁은 무장투쟁 단계로 발전하여갔다. 2.7 구국투쟁 이후 한반도 남단 각지에서는 농촌을 거점으로 한 야산대라는 초보적인 무장조직이 등장하였다. 야산대는 광폭한 탄압을 헤치고 효과적으로 투쟁을 벌여나가기 위한 민중의 자위조직으로서 정치활동을 위주로 낮은 단계의 무장항쟁을 수행하여 나갔다.
이러한 야산대의 활동은 4.3 제주 민중항쟁 등 지역적 봉기라는 계기를 맞이하면서 급속히 본격적인 유격전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대체적으로 볼 때 본격적인 무장항쟁의 불길을 당긴 4.3 제주 민중항쟁과 그것에 의해 촉발된 여순 봉기 그리고 계속되는 군대 내의 항쟁 등은 당시 해당 지역과 군 내부의 불가피한 사정에 따른 자연발생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미군정과 이승만의 친일파 군경은 단선단정에 반대하는 한반도 남단의 민중들을 학살하다시피 탄압하였다. 미군정은 제3세계의 민족해방운동 탄압의 경험과 노하우를 가지고 이승만의 친일파 군경을 직접 지휘하여 제주 민중과 여수, 순천 일대의 애국적인 군인들과 민중들을 엄청나게 학살하였다.
미 군정과 이승만 친일 군경은 제주의 경우만 해도 8만6천명 살상, 1만5천호 방화, 7만8천 두의 소와 2만2천 필의 말 그리고 2만9천 마리의 돼지 도살, 곡류 13만5천 석, 고구마 4백2십만 관, 면화 9만7천 관, 소채 9십만 관 소각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제주 민중들에게 안겨주었다.[연표한국현대사, 김천영]
또한 여수, 순천 봉기를 탄압, 학살한 결과는 이승만 정권이 축소 발표에 따르더라도 6천명의 사망에 달하였다. 2만3천 명의 민중을 체포 투옥되고 5천호의 가옥이 미군정과 친일 군경의 방화에 의해 소실되었다.[잠들지않는남도, 노민영] 여순 봉기 후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군대 내 저항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정작업에 착수하여 1949년 7월까지 4,700명을 총살시키거나 투옥시켰다."(p.135~160)

"농촌에서 출발한 전국적인 야산대와 여순 봉기로 비롯된 군인들의 유격대 전환으로 한반도 남단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유격전 수행을 위한 준비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여순 봉기를 계기로 군장병들이 대거 입산함에 따라 야산대는 유격대로 전환되어 갔다. 이들 유격대는 대체로 1945년 5월까지는 생존 및 횔동에 필요한 지반을 다지기 위한 목적으로 이른바 유격전구를 창설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렇게 해서 형성된 유격전구는 한반도 남쪽 지역 133개 군 중에서 118개 군에 달했다. 요컨대 남한 지역 내 대부분이 무장투쟁의 도가니로 변화된 것이다. 남한 내 유격대의 활동은 1949년 6개월 동안에만도 수십 만명의 인원이 친일 군경과 수천 번의 교전을 치렀다."(p.161~167)

14. [한국전쟁의 기원과 성격, 그리고 전쟁전야]
한국전쟁은 베트남 전쟁처럼 어느날 하루아침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가깝게는 미군정이 1948년 한반도 남단에 단독정부를 수립한 시점이 전쟁의 개시 시점이고, 조금 멀게는 1945년 9월 35년간 한반도를 점령한 일제를 대신하여 미군정이라는 제국주의자들이 한반도 남단을 점령한 때가 전쟁의 개시 시점인 것이다. 아주 멀고 크게 본다면 19세기 말 서구와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를 침탈하기 시작한 때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1945년 8월 이후 5년간 한반도, 특히 남단에서 전개된 상황만 보더라도 5넌 내내 통일된 자주독립국가를 위한 대다수 한민족과 민중 대 미군정과 친일파와의 전쟁으, 연속이었다.

저자가 제시한 자료와 근거를 살펴보면, 저자의 논리는 미국의 '남침 유도설'을 제기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남치 유도설'의 가장 강력한 주창자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문가인 브루스 커밍스 교수다. 그는 저자도 자주 인용하고 있는 <한국전쟁의 기원>의 저자다. 올해 커밍스 교수는 연합뉴스 등 한국 언론과 한국전쟁에 대해 아래와 같이 인터뷰를 진행한 바 있다.
"그는 “1940년대 후반의 미군정 기록들을 열람했다”며 “이는 한국의 고위급 관료들도 볼 수 없는 자료로서 한국인들이 알지 못하는 한국전쟁에 관한 내용들이 많다”고 말했다. 또 “한국 전쟁동안 미국이 한국에서 한 일들은 매우 끔찍하고 중대한 전쟁범죄“라며 “한국 전쟁의 발발은 미국에게 막대한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의 기원은 19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한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해방 후) 한국이 둘로 나눠지고 2개의 다른 정부가 나타나면서부터 본격 전개되기 시작했다. 미국이 한국을 둘로 나누는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6·25 발발 20여년 전인 1930년대에 있었던 충돌도 얽혀 있다. 김일성 등 북한 게릴라와 게릴라를 쫓던 일본군 사이의 갈등이 대표적인 예", "남침을 감행한 것은 김일성이 남측 경찰과 군에 있는 과거 일본군 협력자를 제거하고 싶었기 때문" "한국전쟁은 20여 년에 걸친 오랜 기원을 가진다. 내전이 일방의 침략 감행으로 시작됐다는 생각은 바람직하지 않다"

"1949년 상반기까지 남한 전역 133개 군 중에서 118개 군에 결성된 유격전구의 유격대는 하반기 동안 수십 만명의 병력으로 친일파 군경과 7천 여회의 전투를 치뤘다. 유격대는 한겨울에 친일 군경 토벌대의 보복공격을 버텨낸 후 1950년 3월부터 공격을 개시하였는데, 4월 한달 동안 전투회수 3천 여회에 참가인원은 6만5천 명에 달했다.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 지지세력이 불과 30석 밖에 당선되지 못했고 대미 자주노선와 평화적 협상에 의한 남북통일을 주장하는 진보적 인사들은 130여 명이 대거 당선된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상태로 계속 갔으면 이승만 정권은 조만간 붕괴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연찮게도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즉시 미군의 대규모 군사개입이 진행됨으로써 가까스로 위기에서 구출될 수 있었다."(p.167~169)

"1949년 한 해 동안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지역에서는 역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갖는 일대 사건들이 계속 발생한다. 소련은 핵무기 실험에 성공했고 중국 대륙에서는 미국의 앞잡이 장개석이 ?i겨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었다. 베트남에서도 프랑스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중국을 봉쇄하기 시작했다. 동맹국들에게 외교와 무역을 금지시키고 중국의 유엔가입도 막았다. 동시에 미국은 '패전국인 일본을 아시아의 후방 병참기지로 전환시키고 한반도, 대만, 베트남을 각자 군사적 진공을 위한 교두보로 삼으며 최종적으로 중국 대륙의 회복을 목표로 한다'는 전략방침을 수립하였다.[1960년대, 김성환 역] 따라서 베트남 전쟁에도 개입하기 시작했다.
미군정은 1950년 6월 초 일본의 병참기지화를 반대하는 일본공산당을 불법화 조치했다. 뒤이어 동경 시내에서의 모든 공개집회와 시위를 금지하는 비상계엄령을 발동하고, 24명의 공산당 간부와 당 기관지 편집인을 추방했으며, 1만2천명의 노조원과 공무원을 정치적인 이유로 해직시켰다. 미군정은 한국전쟁 발발 9일 전인 1950년 6월 16일 전 일본 지역에 일체의 공개집회와 시위를 금지시키고 전시동원체제에 착수하였다.[1960년대, 김성환 역]"(p.176~183)

"대규모 전면전에 대한 북의 준비상태를 알려주는 사례로서, 미군 정보팀이 북의 문서를 입수하여 연구한 끝에 밝혀낸 사실은 '노동당 상임위원회의 일급 비밀 작업계획이나 북의 고위 장교들은 전쟁이나 공격에 대해 전쟁 전까지 아무런 구체적인 지시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한국현대사, 로버트시몬즈]
또한 1950년 7월 맥아더 사령부의 보고 과정 중 한 장교가 특파원에게 '전쟁이 시작된 6.25 당시 북은 동원계획을 수행하지 않았다. 오직 6개 부대가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전투준비가 되어 있었다. 전쟁 수행에는 13~15개 부대가 필요함에도...' [비사한국전쟁, 스토운]"(p.184~190)

15. [한국전쟁의 발발과 초기 상황의 중요한 진실]
한국전쟁의 기원과 성격, 그리고 전개 양상은 '남침-북침'이 그다지 의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한국 정부는 지속적으로 '남침설'을 주장하고 있는데, 저자의 문제제기나 인용된 책들에서 제기된 사항들은 '북침설' 또는 '남침유도설'에 대한 근거로 사용될 수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한국의 군 관료나 정치인, 기득권자들은 항상 '전쟁불사'를 외치지만 정작 위기가 닥치거나 전쟁이 나면 제 몸과 재산을 들고 36계 줄행랑을 치는 비겁하고 이기적인 자들임을 일제 시대와 미군정 시대에 이어 전쟁 중에도 여실히 보여준다.
또한 이승만과 친일파 도당의 남침설이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한국전쟁의 진실이 보여주는 바는 대통령과 군대의 간부로서 경계와 전쟁에서 패배하고 민중의 생명과 재산을 파괴당한 이승만과 군 간부들은 처형되고 숙청되고 감옥으로 가야 마땅한 것이다. 이것은 경계에 실패한 '천안함, 연평도 사건'에서 주요 관련 지휘관들이 징계, 투옥되지 않고 승진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별개 문제이기는 하지만, 당시 미국 내 극우보수세력과 군군주의자들은 유엔을 내세우면서도 유엔의 결의와 절차를 무시하고,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자국 내 헌법과 절차를 철저하게 파괴하는 범법자, 무법자라는 것이 분명하다.

"한국전쟁은 적어도 이미 4.3 제주항쟁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순 봉기와 전면적인 유격전을 거치면서 최소한 10만 명 이상의 희생다를 양산하면서 치루어진 적대적인 두 세력(미국+친일파 분단세력 : 독립군+민중 통일세력) 간의 대규모 무력충돌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전쟁이었다고 보아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또한 1950년 6월 본격적인 전쟁이 발발하기 훨씬 전부터 38선에서는 남-북 군대간의 대소규모 충돌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었다. 미 국무성의 한 관리 역시 1950년 4월에 "38도선은 실질적인 전선이다. ... 전투가 계속 진행되고 있고 아마 1,2천 명의 전투원이 실제 교전하고 있다."고 말했다.[한국현대사, 로버트 시몬즈]
한반도에서의 전쟁 발생 보고를 받은 워싱턴의 분위기는 예상과는 달리 비교적 차분한 편이었다. 대통령 트루만은 고향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고, 그래서 에치슨 미 국무장관이 백악관을 진두지휘하며 지체없이 한국전쟁에 대한 개입을 결정하고 지시했다. 사실상 오늘날까지도 에치슨이 무슨 권한으로 이렇듯이 난해한 문제를 그토록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었는지에 관해서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미군의 한국전쟁에 대한 최초의 개입은 미국 의회의 승인도 받지 않은 채 시도되었다. 미군의 개입에 대한 미국 의회와 동맹국들의 사후 승인은 남측 군대가 형편없이 패전만을 거듭하고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 적절히 이용됨으로써 이루어졌다.
미군은 군사 개입 직후부터 공군기와 군함을 동원하여 남한 지역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탄세례를 퍼부었다. 맥아더는 폭격함에 있어 한반도의 기후와 지형, 남-북 군대의 구별, 군인과 민간인의 구별 등이 여의치 않게 되자 '정확성이 없더라도 38선과 서울 사이의 좁은 회랑지대를 폭격할 것'을 결정하여 실행에 옮겨졌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6월 30일 맥아더는 북측에 대한 폭격 명령을 내려 평양 비행장을 급습, 폭격하였다 
7월 1일 미 지상군의 선발대의 부산 도착을 시작으로 13일까지 대부분이 도착하자, 7월 14일 맥아더는 이승만으로부터 '한국군의 지휘권을 양도'받았다. 이른바 '대전협정'이라 불리는 이 통고는 조약이나 협정에 의한 문서화도 없이, 국회 비준도 없이 곧바로 7월 17일부터 실시되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한국전쟁, 조지프 굴든] 작전권의 이양과 함께 주한 미군에 대한 치외법권을 보장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16. [한국전쟁에서 몇 가지 중요한 진실]
한국전쟁은 수많은 인명의 피해를 가져왔다. 특히 240만 명의 죽음에서 군인이 수십 만명 밖에 되지 않았던 것을 고려하면 2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이며, 대부분은 미군과 이승만 친일 군경의 행위였다고 본다. 미군의 경우 무차별 폭격, 미군 리지웨이 중장의 '몰살작전', 미군과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이 가장 큰 피해를 미친 것이라 할 수 있다. 미군의 전쟁 범죄는 이 책에 나오듯이 황해도 신천군의 민간인 학살, 원주/홍천지역 등의 네이팜탄 사례, 세균전, 민주정부 때 밝혀진 노근리와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저의 아버님이 직접 경험한 익산역 500여 명 폭탄 투하 몰살사건 등이 드러난 사례일 뿐이다.(북측이 주장하는 미군과 친일 군경의 황해도 민간인 학살 숫자만 18만 명에 달한다.)
이승만과 친일 군경의 학살은 무수히 많은데 대표적인 것이 국민보도연맹 학살과 거창양민학살 사건이다. 학살된 사람이 최소한 수십 만명에서 거의 백여 만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참여정부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공식 사과할 정도였다.

"1950년 7월 미군은 한반도 남,북을 가리지 않고 소위 '융단폭탄'을 퍼부었다. 미 공군기의 폭격으로 인하여 남쪽 주요 철도를비롯하여 길목, 터널, 집하장, 창고 등 일체의 보급 연관시설과 민중들의 생활과 직결된 61만채의 주택, 1만5천동의 학교, 1만7천개의 공장이 완전히 잿더미로 변했다.[민족과통일, 노중선]
1951년 1월 15일 '런던 타임즈'는 원주지역 미군이 초토화작전을 추구하면서 22개 마을을 불태웠고 300개의 건초더미에 방화했음을 보도했다. 2월 5일자 '뉴욕타임즈'는 미군이 F-80 공군기를 동원하여 철원, 금촌, 춘천, 춘천리 근처의 마을 공격에서 로케트, 네이팜탄뿐 아니라 폭탄으로 강타당했음을 보도했다. 또한 24대의 F-51 무스탕 비행편대는 홍천 지역에 5천 갤론의 네이팜탄읓 퍼부어댐으로써 일대의 모든 마을과 건물을 불태워버렸다.
3년간애 걸친 전쟁은 쌍방의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240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또한 이 기간에 한반도 전체에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각종 시설은 대부분 파괴되었다.[한국전쟁, 고지마노보루]"(p.295)

"중국은 한국전쟁 발발 1년 전인 1949년 10월에 국가를 세웠고 아직 장개적 국민당 잔당 세력을 완전히 평정하지 못했그며 수십 년간의 전쟁 참화를 딛고 경제를 전설해야 하는 시급한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어한 시기에 터진 한국전쟁은 결과적으로 중국의 이같은 과제 해결을 극히 곤란하게 만들었고 시간적으로도 상당히 지연시키고 말았다. 한국전쟁은 중국으로서는 결코 원하지 않은 시기에 원하지 않은 형태로 발생함 셈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중국의 이런 기대는 결국 깨지고 말았다.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가하지 훨씬 이전에 미 공군기가 만주지역읓 폭파해버린 것이다. 이에 대해 중국 정부는 다수의 민간인 사상자 명단을 제시하면서 수십 차례에 걸쳐 항의하였다. 그러나 11월 16일에 워싱턴에서는 압록강 철교를 폭파해도 좋다는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현대조선사, 콩드] 이렇게 하여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전쟁개입은 최초의 38선 원상회복에서 시작하여 38선 돌파, 만주 폭격이라는 단계적 확대 과정을 거치기 되었고, 중국의 한국전쟁에 대한 참전은 자국 영토가 직접적인 공격대상으로 되고 있는 상황에서 추진되었던 것이다. 이 점이 미국의 개입과 서로 다른 측면일 것이다."(p.220~222)

"한국전쟁은 붕괴 직전의 이승만 친일 정권이 되살아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전쟁을 계기로 미국의 지원 하에 60만 대군으로 급성장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유격전의 형태를 띠고 있던 남한 민중의 저항을 완전히 분쇄할 수 있었다.
또한 범람하는 군수물자는 이승만에게 풍부한 정권 유지 비용을 공급해주는 원천이 되었다. 전쟁 중 자금확보를 위한 수많은 불법행위 중 가장 빈번히 사용된 것은 석유, 자동차 부속품, 식품 원로 등과 간이 상품가치가 있는 전쟁물자를 공공연히 팔아먹는 일이었다. 보다 교묘하게 거금을 남기는 방식은 60만 대군의 부식비를 유용하는 일이었다. 또한 계약을 맺을 때뿐 아니라 불량품이 검사를 통과할 때 뇌물이 공공연히 요구되었다.[1960년대, 김성환 외]"(p.261~267)

[ 2013년 9월 08일 ]
c****n 2013.09.08.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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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를 읽었다. 전두환 일파는 칼날을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저항의 싹을 키우고 있던 지식인 사회에 대해서도 어김없이 휘둘러졌다. 소위 '7․30 교육개혁조치'를 단행하여 대학입학 본고사를 폐지하고, 졸업정원제를 시행하여 민주화 투쟁의 가장 강력한 세력인 대학생들을 성적 경쟁의 쳇바퀴 속으로 밀어 넣었다.(p.75)   애초에 팀스피리트 훈련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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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를 읽었다.

전두환 일파는 칼날을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저항의 싹을 키우고 있던 지식인 사회에 대해서도 어김없이 휘둘러졌다. 소위 '7․30 교육개혁조치'를 단행하여 대학입학 본고사를 폐지하고, 졸업정원제를 시행하여 민주화 투쟁의 가장 강력한 세력인 대학생들을 성적 경쟁의 쳇바퀴 속으로 밀어 넣었다.(p.75)

 

애초에 팀스피리트 훈련은 '한반도 유사시 한국에 증원 ․ 투입되는 미국 예비 병력을 신속히 공수하기 위한 작전'으로 실시 되었는데, 1980년대 레이건 정권 시대에 접어들면서부터 훈련 내용에 상당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선 훈련 기간이 20일에서 70~90일로 늘어났고 참가 병력 또한 1976년 5만명 정도에서 1983년 20만명으로 확대되었다. (p.95)

 

전두환 정권이 등장한 1980년 당시의 국내 경제는 최악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1970년대의 중화학 공업화가 애초부터 선진국의 불황산업을 떠맡는 과정이었던데다가, 1979년에 터진 제 2차 석유 파동은 국내 경제를 한 순간에 뒤 흔들어 놓고 만 것이다. 우선 경제 성장률은 사상 유례가 없는 마이너스 5.4%를 기록한 반면, 도매물가는 무려 44.2%나 치솟아 올랐다. 이러한 가운데 공장 가동률이 1979년 82%에서 74%로 떨어졌고, 그에 따라 휴폐업과 대량 해고 사태가 빈번해지면서 공식적인 실업률이 1979년 3.8%에서 5.0%로 상승하였다. (p.112)

 

외국자본과의 관계가 재정비 되어 가던 중, 3저 즉 저달러, 저유가, 저금리라는 3저 현상이 발생하고 그로부터 한국 경제가 3저 호황이라는 단군이래 최대의 호황을 구가하게 되었다. (p.120)

 

기업은 엄청난 흑자로 흥청망청했지만, 임금상승은 보잘것없는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예컨대 3저호황의 첫해인 1986년의 경우, 노동자들은 뼈빠지게 일해 노동 생산성을 13.6%에 올려 놓았고, 그 덕분에 기업은 막대한 이윤을 남길 수 있었지만 그해 실질 임금은 7.9%의 상승에 그쳤다. 반면 기업은 늘어난 이윤을 부동산 투기에 쏟아 붓느라 정신이 없었다. 단적으로 삼성, 롯데, 기아, 금호 등 주요 재벌그룹들은 1985~88년 기간 동안 총투자액의 80% 이상을 부동산 매입에 사용했을 정도이다.(pp.121~122)

 

1983년 12월 '제적학생 복교허용'과 함께 대학가에 상주하던 경찰을 철수시키는 조치를 취하고 말았다. 비록 오래갈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정책 변화는 3년간의 극렬한 탄압정책이 실패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p.134)

 

'학원자율화 추진위원회'등 공개기구를 중심으로 실질적인 학원자율화를 추진함과 동시에 1984년 5월 4일 고려대에서 '강제징집 사망학생 합동유령제'를 거행하는 것을 계기로 대학간의 연대를 강화시켜 나갔다. 이러한 노력들은 1984년 2학기에 접어들어 주요 대학에서 학생회가 출범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와 함께 11월 3일 연세대에서는 전국 42개 대학 2천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민주화투쟁 학생연합'이 결성됨으로써, 학생운동은 보다 강력한 반독재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조직틀을 갖추게 되었다. (p.135)

 

2․12 총선에 나타난 중요한 현상-정치규제법에 묶여 있던 일부 인사들은 민한당 후보로 나섰는데도 역시 당선되었다. 반면에 민한당 국회의원이었다가 신민당 후보로 나온 인사도 있었으나 이들은 대부분 낙선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민중은 어느 후보를 지지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 과연 그 후보가 전두환 정권과 협력을 하였는가, 아니면 정권으로부터 탄압을 받으면서 그와 대결을 벌였는가를 우선적으로 고려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우리 민중은 전두환 정권과 협력한 인물은 단호히 거부했고, 그럼으로써 전두환 정권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투쟁만이 허용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p.138)

 

함평군 손불면의 경우는 농지세 총수납 목표가 83만 원이었는데 산남지구 50여 가구에 부과된 농지세만도 2백 30만원에 이르렀다. 산남1구에 사는 모씨는 그해에 양파와 마늘을 합하여 3천여 평을 경작하는데 3백 20만원의 생산비가 들었지만 3백만원을 받고 밭떼기로 팔았다. 결국 소득은 커녕 20만원 이상을 손해봤는데도 10만 4천원을 세금으로 내라는 고지서가 날아들었다. 고지서를 받아든 그는 기가 막히고 앞이 캄캄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의신청을 하였다. 그러자 관계 공무원이 고지서를 회수해 가더니 다음에 찾아와서 뭐가 잘못 되어서 그런다면서 형편대로 내라고 하였다. 이에 농민은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세금도 무슨 양동시장에서 잠바 사는 식이냐'고 따졌다고 한다.(p.155)

 

1986년 10월 28일 오후 1시부터 건국대 민주광장에서 전국의 29개 대학생 2천여명이 '전국 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 발족식을 거행하였다. 3시 20분쯤 학생들은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나카소네 일본 수상등에 대한 화형식을 거행하였다. 바로 그때 학교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1천 5백여명의 경찰들이 불시에 최루탄을 난사하며 밀려들었다.(p.173)

 

31일 오전 10시, 이윽고 학생들에 대한 진압작전이 시작되었다. 작전 이름은 황소 31 입체 작전! 8천여명의 경찰이 동원된 이날의 작전은 정말 '입체적' 이었다. 하늘에서는 헬기가 최루탄과 소이탄을 직격으로 쏘아 대고, 땅에서는 최루탄이 날아 오르고, 고가 사다리의 소방 호스에서는 페부를 뚫은 듯한 강한 물줄기(최루액)이 뿌려졌다. 바리게이트를 뚫고 올라온 용감무쌍한 '민중의 지팡이'들은 쇠파이프를 어지럽게 휘둘렀고 사방으로 피와 살점이 튀겼다. 각목으로 대항한 학생도 있었으나 천지사방에서 날아드는 최루탄과 쇠파이프를 허기진 몸으로 막아 낼 수는 없었다. 한 시간이나 계속된 유혈의 참극이 끝나갈 무렵, 최후까지 항전했던 사회과학관 옥상에는 때 아닌 무지개가 피어 올랐고, 팔을 뒤로 걱인 채 끌려가던 학생들은 뿌연 눈물 너머로 이 무지개를 보았다. 그리고 한 학생이 외쳤다. "동지여! 무지개가 떴습니다. 승리의 무지개가! 우리가 승리할 것입니다!"(pp.173~174)

 

경찰 당국은 박종철군이 심문을 시작한지 30분 후 책상을 '탁'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발표했다. (p.177)

 

민중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중요한 사건이 터졌다. 5월 18일 광주 민중항쟁 7주년 추모미사에서 김승훈 신부는 "당국은 철저하게 이 사건을 은폐했고 그 과정 일체도 조작해서 국민을 다시 한번 속였다"며 박종철군을 고문한 경관이 모두 다섯 명임을 폭로하였다.(p.179)

 

6월 민중항쟁 기간 동안에는 다양한 구호들이 선보였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광주학살 배후조종 미국놈들 몰아내자. 군사독재 지원하는 미국놈들 몰아내자. 전두환 노태우 그놈이 그놈이다. 직선제 쟁취하여 군부독재 타도하자. 노동3권 탄압하는 군부독재 타도하자. 대통령에서 동장까지 우리의 손으로.(p.180)

 

부산에서의 시위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일째 계속되었다. 밤 열 두시가 넘어도 많은 시민들은 해산하지 않고 다음날 아침까지 시위를 계속했고, 그러다 보면 다시 많은 시민들이 합세하여 새로운 투쟁이 전개 되었다. 19일의 경우에는 소나기가 쏟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수만의 시민들이 우산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p.187)

 

마침내 6월 26일 국민운동본부의 제창에 의해 '국민평화대행진'이 개최되었다. 이날에는 전국의 34개 도시와 4개 군에서 1백만 명(국민운동본부 집계, 경찰 발표는 5만 8천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광주에서는 약 30만의 시민이 거리를 그득 메웠다. 항쟁이 다시금 절정을 향해 치솟아 오른 것이다. 당시 우리 민중은 그간의 투쟁을 통해 자신감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이틀 전인 6월 24일 전두환 김영삼 회담에서 전두환이 "정치 일정을 여야가 합의하여 건의하면 받아들이겠다"는 등의 잠꼬대만을 되풀이하는 바람에 가떡이나열이 받아 있던 상태였다. (p.188)

 

7월 9일 이한열 군의 장례식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 너나 할 것 없이 한 젊은 학생의 죽음을 통해 지나온 고난의 순간들을 되씹었다. 그리고 그 죽음의 의미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하여 거듭 다짐했다. 이는 장례 행렬에서 무수히 외쳐진,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거ㅘ제들에 대한 구호들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군 장례식은 항쟁의 마무리이자 새로운 출발을 기약하는 자리가 되었다.(p.193)

 

1987년 7월 3일, 우리 나라 최대의 중공업 도시 울산에서는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다. 전국을 뒤흔든 노동자 대투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현대엔진 노동조합이 결성된 것이다. 물론 노조결성 자체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노조결성에 관한 한 난공불락의 청옹성으로 불리던 현대왕국에서 노조가 결성되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남다른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p.196)

 

11월 29일 KAL기 실종 사건 발생. (p.218)

 

1988년 4월 26일 총선거가 실시 되었다. 결국 민중은 4․26총선에서 야당 우세의 국회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집권 세력의 완전한 참패였다.(p.222)

 

전교조 배경 - 한국의 교육열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높은 수준이라는 것

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제도 교육이 지금까지 해온 역할은 사대주의, 민족분열주의, 개인주의 등 온갖 잡사상을 주입하고 단순한 몇 가지 기능을 습득시켜주는 것뿐이었다. 그런 만큼 올바른 교육을 바로 세우는 것은 민족의 장래를 위해 절대 절명의 과제라 할 수 있다. (p.228)

 

1987년 대전 충남대에서 개최된 제 1기 전대협 출범식에는 약 3천 5백 명의 학생이 참가하였지만, 그로부터 5년 뒤인 1992년 서울 한양대에서 개최된 제 6기 전대협 출범식에는 무려 8만여 학생이 집결하였던 것이다. (p.232)

 

1989년 3월 25일. 문익환 목사 북 방문-공동성명은 통일방안으로서 연방제안을 채택하였으며, 다양한 방법에 의한 연방제 실현과 정치․군사 문제 및 교류협력 문제를 동시에 추진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로써 문익환 목사 개인 자격이기는 하지만 남북의 관계자가 구체적인 통일방안을 합의하는 중대한 전진을 이룩하게 되었다. 통일방안의 합의는 민족대단결의 필수적 전제조건이다. 서로 다른 통일방안을 갖고서는 결코 민족대단결을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문목사의 방북이 갖는 의의가 있다.(p.240)

 

책 한권으로 80년대를 이야기 한다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바다를 헤엄칠 수 없듯이, 80년대의 역사를 돌아본다는 점에서, 개론서로 적합하다.

80년대에 태어났지만, 정작 나는 80년대를 모른다. 세파형 동검과 빗살무늬 토기는 외웠어도 문목사의 이야기는 모른다. 그것은 이 시대에 관한 필자의 무관심도 있었겠지만, 이 시대를 힘겹게 살아낸 선배들의 목소리도 부족했기 때문 아닐까.

역사를 배우는 것은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강도의 무게는 판단 할 수 없지만, 비슷한 시나리오가 반복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출판사 돌베게에서 이 책을 출간한지 18년이 흘렀다. 내년이면 19년이다.

저자 박세길의 긍정적 희망과 전망을 우리는 충분히 검토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2010.12.13. 철산에서



YES마니아 : 플래티넘 s*******2 2010.12.13.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