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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의 봄은 '체르노빌의 목소리'라는 책에서 시작된다. 체르노빌의 목소리라는 책을 읽고 있던 엠마뉘엘 르파주는 예술가들과 함께 그곳에 예술가들을 위한 집을 만드려는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그들은 금지구역에서 20km 떨어진 볼로다르카라는 마을에서 지낼 예정이다. 그러나 역시 따라오는 고민은, 그곳에서 살 수 있을까. 그곳의 음식을 먹어도 될 것인가. 이다. 가족들은 당연히 반대하고 설상가상으로 팔까지 마비되어 그림조차 그릴 수 없다. 이런 저런 우여곡절 끝에 볼로다르카에 도착한 르퐈주는 그곳에 300명이나 되는 주민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첫 날 바시아 가족의 환대를 받으며 심난한 첫날 밤을 보낸다.
![]() 위의 그림에서 보듯 이 책은 거의가 흑백으로 그려져 있다. 작가도 죽은 도시를 그린다는 생각에 연필, 백묵, 목탄을 준비하고 별다른 색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경고 문구나 고작해야 아이들이 타는 범퍼카 정도에만 색깔이 들어가 있다.
![]() 1986년 4월 29일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사고가 발생해 핵융합로가 붕괴되고, 냉각로가 기화해 수백킬로미터가 방사능에 오염된다. 사고 후 근처에 살던 20만 명은 모두 피난을 떠나고, 50만에서 80만이 넘는 처리반이 원자로 봉인을 위한 석관건설에 동원되었다. 그곳의 동물들은 도살처리 되었고, 숲은 빨갛게 물들었으며, 처리에 쓰인 모든 장비는 버려졌다. 금지구역 2천6백 제곱킬로미터는 전체가 무덤과 같았다.
작가는 가는 곳마다 방사능 수치를 재며 한정된 시간동안 머무르며 그림을 그린다. 측정기가 위험을 알리면 즉시 그곳을 떠나는 일이 반복됐다. 당연히 그림은 뻣뻣하고 잘 그려지지 않았다. 방사능에 노출된 이끼와 풀을 이리저리 피하며 걷고 무사히 정해진 시간을 마친다. ![]()
그날 저녁 사람들은 또 파티를 열어준다. 사람들이 차려준 음식들, 방사능 지역에서 나온 정성스런 식탁 앞에서 고민한다.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음식을 입에 넣고, 사람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고, 나와서 하늘을 보며 생각한다.
나는 이곳에서 찾고자 하는 걸 이미 알고 있는 게 아닐까?
흑백의 그림은 어느새 색깔을 되찾고 있다. 죽은 듯 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처럼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처럼, 측정기에 의존해 비피하듯 숲속을 돌아다녔던 때는 못 보던 장면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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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생각한다. '체르노빌이 아른답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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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죽음을 그리러 왔지만 결국은 삶을 그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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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정체불명의 해커에 의해 방송국과 금융기관 서버가 해킹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번엔 디도스 공격 정도가 아니라 바이러스로 부팅시스템 자체를 붕괴시킨 희대의 사건이어서 경악을 넘어 공황상태에 빠졌다 하겠다. 이번에 다들 똑똑히 실감했을 것이다. 사이버테러가 우리 일상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와 있는지, 그리고 그게 어느 정도나 심각한 피해를 주어 평범한 시민들을 위험에 빠뜨리는지 생생하게 말이다. 그런데 문득 방송국이나 금융기관이 아닌 다른 기관이 공격을 받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그곳이 다름 아닌 우리 인근의 원자력발전소였다면... 고개를 저었다. 생각만으로도 섬뜩해져서 소름이 돋았기 때문이다. 작년 후쿠시마 원전 폭발사고의 잔상이 아직 또렷이 남아있기에 공포가 현실감 있게 다가왔던 것이다. 인류는, 우리는 아니 나는 지금 이런 실제적 위협에 직면해있다는 자각에 새삼 아득해졌다. 후쿠시마 이전 최악의 원전사고는 체르노빌원전폭발 사건이었다. 아니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재앙이해도 무방할 것이다. 1986년의 일이니 벌써 2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방사능 수치가 높게 나오고 생태계와 주민들의 피해는 현재도 진행 중이니. 이런 위험천만한 곳에 프랑스 예술가들이 방문하여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그린 만화가 [체르노빌의 봄]이다. 원전의 위험성을 현장에서 기록하여 보고한 르포르타주 만화인 것이다. 내용은 초입부터 거의 잿빛의 암울한 분위기 일색이다. 마치 엑스레이 사진인 양 흑백으로 골격만 포착한 사물들은 기괴하고 음산하였다. 그런 곳이기에 사명감에 불타 방문하고자 다짐한 이들이지만 내심으론 거리낌이 클 수밖에. 작가는 손이 마비되는 증상을 보여 그림을 그릴 수 없을 지경이 되어버렸다. 의사들은 한결 같이 원인모를 그 증상에 대해 심리적 요인을 지목하였다. 가족들과도 기약 없는 이별, 혹 잘못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섞인 생이별을 해야 했으니 방문대원들의 고심도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찾아간 그 위험하고 고립된 곳, 거기서 우선 위험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의 안내로 체르노빌 원전과 주변 오염지역을 살펴보며 처참한 지경에 몸서리친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의외의 일을 경험하며 자신들이 지녔던 선입견에 금이 가는 것을 발견한다. 서방세계가 지레짐작하고 있는 체르노빌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정경에 당황하게 된 것이다. 나는 현실을 직시하고, 나와 세상 사이에 있는 보이지 않는 벽을 부수기 위해 체르노빌에 왔다. 그것을 내 그림에 담기 위해, 경험이라는 발자취를 부여하기 위해... 하지만 그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 모르겠다.(130-131쪽) 특히 방사능 오염을 걱정하며 한참 숲의 모습을 데생하다가 문득 둘러본 자연에 마음을 빼앗겨 그곳에도 여전히 생명이, 그것도 경이로운 삶이 이어지고 있음에 경탄하는 대목은 약간 생뚱맞을 정도였다. 이 보고서의 발간 취지와 너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성한 잎들은 어두운 초록에서 환한 연두색으로 변했으며, 밝게 빛나고 있었다. 부드러운 새싹이 따스한 노란빛, 침엽수 나무줄기의 선홍빛, 쪽빛 자작나무 그리고 휘날리는 하얀 꽃잎들, 이 모든 색깔이 타오르는 듯이 강렬했다. 주위의 모든 것들이 고요하게 호흡했다. 관능이 살아 숨쉰다.(113쪽) 생동감 있게 되살아나고 있는 것은 자연뿐 아니었다. 그 칙칙한 곳을 아이들의 미소가 환하게 밝히고 있었던 것이다. 구김살 없이 웃고 뛰놀고 외지인에 신기해하는 아이들에게서 방사능에, 삶에 찌든 모습은 발견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세상에! 이런 생경한 모습, 인간의 정이 배어 있는 삶의 방식에 이끌리다 보니 어느새 작가의 마비되었던 손이 감쪽같이 나아서 원래의 유연성을 되찾게 되기까지 했으니. 그 후론 신들린 듯 그림을 그려나가게 되었고. 그러면서 작가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체르노빌의 처참한 실상을 낱낱이 까발려 원전 맹신에 빠져있는 서방세계에 준엄한 경고를 가하려는 르포르타주의 의미가 무색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는 결국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얘기해야 겠다고 마음먹는다. 그곳에도 인간의 삶은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으니. 하여 [체르노빌의 봄]은 우리에게 두 가지 측면으로 다가온다 하겠다. 다시는 그런 재앙이 일어나지 않도록 원전을 폐쇄하거나, 최소한 신규 건설을 막고 기존 운영 중인 시설은 안전 점검을 더 높은 기준에서 수행해나가야 한다는 점을 뼈아프게 되새기고 있는 것이 그 하나다. 한편 어떤 재앙이 닥치더라도 지혜롭고 낙관적인 인간의 심성이 이를 치유해낸다는 것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런 능력을 지니고 있기에 앞으로 닥칠 재앙도 미리 대비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체르노빌의 봄], 암울함과 희망을 동시에 보여준 생생한 르포르타주를 통해 자연과 생태, 그리고 인간에 대해 많은 것들을 돌아볼 수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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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능의 위험성에 관한 책을 찾다게 발견한 책. 만화책인데...심오하다
체르노빌의 위험성 및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체르노빌로 달려간 프랑스 예술가의 이야기이다. 직접 찿아가서 그곳에서 지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곳의 장면을 그림으로 남기고.. 이 책으로 남겼다.
방사능의 위험성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보다....예술가의 눈으로 간접체험하는 경험.
이건 성인이 읽어야할 만화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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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의 그대로의 모습을 한 화가의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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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 원전사고..그 말을 들은 것은 오래전 희미한 기억속에 어렴풋하게 딱 그 단어들만이 생각난다..'체르노빌 원전사고' 그냥 기억속에 원전이 파괴되어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사건이라는 흐린 기억만 생각날 뿐이였다. 이 책은 나에게 '체르노빌 원전사고'가 어떤 사고였는지 객관적인 정보 뿐 아니라 그 후로 그곳에서의 사람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알게 해주었다. 엠마뉘엘 르파주라는 작가가 직접 아직도 방사능 피해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그지역에 직접 들어가서 취재하며 그곳에서 아직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취재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흑백과 칼라의 색감이 살아있는 르뽀만화의 장르를 가지고 있는 이 책은 따뜻한 감성과 그곳 체르노빌의 아픈 참사를 고스란히 만화의 느낌으로 전해주고 있다. 죽음과 아픔..그리고 상처와 아직도 삶이 교차하는 그곳의 인생에 대해서 논리적인 서술이 아니라 그림이 주는 감성으로 그곳의 흑과 백을 교차하며 그곳 체르노빌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아직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곳..왜 그 사람들은 그곳에 머물러 있을까..그들의 삶의 뿌리를 박고 있는 터전이라서..아니면 다른 곳에서는 삶의 이어가기 어려울 만큼 그 땅에 깊은 뿌리를 박고 있어서..아니면 재정적인 능력이 없어서...엠마뉘엘 르파주는 몽환적으로 그곳 사람들의 흑과 백, 그곳 체르노빌의 과거와 현재의 흑과 백, 그리고 미래의 흑과 백을 교차적으로 그리며 삶과 죽음, 아픔과 절망과 이어지는 삶을 어지럽게 그려가고 있다. 생명이 있는 곳에는 희망이 있다는 메시지..아무리 최악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고 해도 결코 꺾을수 없을 수 없는 삶의 질긴 생명력을 그려주고 있다.
뭔가 혼미하고 야릇한 기분..이 만화를 읽고 난 뒤의 느낌은 뭔가 원전에 대한 강한 경각심이나 그곳 피해자들을 돌아보자는 직선적인 메시지가 아니다. 그냥 뭔가 멀고 먼 원시적 생명에 대한 갈망..파괴..나무..공작..웃음..단절..어둠..빛...우울..분노..감상..르뽀...이러한 단어들이 얽히고 섥히며 묘하고 우울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우석훈의 위의 글처럼 이 책을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이 책의 느낌을 가장 잘 포착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렇게 잠시 빌린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 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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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에 관한 책을 조금 많이 읽었다. 자의에서 읽었다기보다는 타의와 강요에 의해 리뷰를 꼭 써야 한다는 의무감에 떠밀리 듯 읽게 된 경우가 많았다. 대게가 <반핵>, <반원전>을 다룬 내용이 대부분이었고, 또 읽는이들도 그런 '선입견'을 지닌 채 읽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물론 나 또한 그렇다. 체르노빌은 '죽음의 땅'이어야 했고, 후쿠시마도 그래야만 했다. 그런 곳에서 사람이 살아갈 수 있다는 상상은 금지어여만 했다. 그런데 그런 곳에 '봄'이 찾아왔다고? 여전히 방사능에 피폭 되면서도 아름다운 풍경속에서 그림처럼 사는 이들이 있다고? 쉽사리 상상이 가질 않는다. 이 책의 겉표지에 실린 그림은 이질적이다. 처음엔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그냥 읽어 나갔는데, 책의 내용이 내 생각의 경계를 허무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에 다시 겉표지를 쳐다보게 되었다. 총천연색으로 장식된 울창한 숲 속에서 한 남자가 얼굴에는 마스크를 뒤집어 쓰고 신발은 비닐봉지로 감싼 채 거닐고 있다. 표정에선 두려움 따위를 느낄 수 없다. 발걸음조차 가벼워 보인다. 그럼 감기라도 걸렸나? 그렇다면 신발을 감싼 비닐봉지는 무언가? 사실 이 표지그림은 작가가 체르노빌에서 직접 경험하면 느꼈던 '혼란'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작가는 체르노빌로 떠나면서 공포에 휩싸였던 것이다. 누군들 그러지 않을까. 벌써 30년 가까이 지났지만 여전히 치명적인 방사능이 검출되는 곳이고, 죽지는 않는다고 해도 방사능에 피폭된 뒤에 어떤 휴유증을 남길지도 모르는 곳이니 말이다. 그런 곳으로 하루이틀도 아니고 2달이나 머물다 와야 한다. 어쩌면 그 이상이 될 수도... 그런데 말이다. 그런 곳에서 머물며 사는 사람들이 있단다. 여전히 방사능 수치가 높아 '금지구역'으로 묶인 곳이 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사는 사람들이 있단다. 물론 거주지역은 방사능 수치가 낮아 덜 위험한 곳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무얼하며 살고, 무얼 먹고 살아가는 걸까? 작가가 느끼는 두려움은 자연스럽다. 당연하다는 말이다. 헌데 작가는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회색으로 가득한 그림'이 아니라 총천연색으로 가득한 그림을 그리고 만다. 물론 현실 속에서 그런 풍경은 없다. 파괴되고 방치되고 버려진 마을은 여전히 이곳이 사람 살 곳이 못 된다고 알려주지만, 오래도록 방치된 그곳에서 새싹은 돋아나고 숲에는 동식물들이 강한 생명력을 뽐내는 듯 하다. 작가는 이런 혼란 속에서 망설인다. 체르노빌에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죽음의 도시를 그려야 할지, 아니면 자기가 직접 보고 느낀 낯선 아름다움을 그릴 것인지 말이다. 그런 혼란 속에서도 작가는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원인 모를 통증에 시달렸던 손이었는데, 이젠 아픔도 느끼지 못한 채 그림을 그리고 있다. 마치 체르노빌에서 마음의 안식을 얻고 치유를 얻은 것처럼 말이다. 여전히 방사능측정기에서는 위험을 알리는 소음이 들려오는데 말이다. 삶이란 무얼까? 지옥에 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지옥에서 평온함과 아름다움을 느낀다면...죽음의 땅에서도 새싹이 돋고 새 생명이 태어난다. 방사능이 만든 괴물들만 가득한 곳이라 상상했던 곳에서 작가는 아름다움을 깨닫고 당황해한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작가도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거리낌 없이 살아간다. 여전히 측정기의 익숙한 소음은 위험을 알리는데 말이다. 분명 체르노빌은 죽음의 땅이다. 살아가기에 척박한 곳이고 아름다움을 느낄 때보다 두려움과 공포의 도가니인 곳이다. 그런데도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사고가 일어났을 때 정부가 '희생'을 강요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아무런 위험도 통보받지 못한 채 피해자 된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다. 그 대가로 받은 것이라곤 고작 100유로도 되지 않은 것은 연금이란다. 그래서 생계가 막막한 이들은 금지구역으로 들어가 주인 잃은 물건들을 훔쳐서 팔며 살아간다. 그곳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작가는 그 삶에 '봄'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겨우내 잠자던 생명이 꿈틀대는 계절. 한결 따사로워진 햇볕 덕분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들이 떠나고 싶지만, 아직은 추위가 가시지 않아 두꺼운 옷을 옷장 깊숙한 데 넣지 못하는 계절. 체르노빌에 봄이 찾아 왔노라고. 그렇다고 작가가 원자력발전소에 찬성하지는 않고 있다. 여전히 핵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반핵을 외친다. 그러나 그속에서 느낀 '낯섬'을 통해 아직 인류가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할 기회가 남았음을 강조하는 듯 싶다. 아직 늦지 않았노라고. 그러나 더 늦기 전에 반성하라고. 지옥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을 것이니..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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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파주의 책을 처음 보는 것이 아니라 망설였다. [게릴라들]은 아름다웠지만 스토리를 이어가는 방식이 뭔가 흐릿했다. 진한 느낌의 이야기면 진하게 표현되어야 하는데, 그림이 마냥 아름다워 홀리 듯 읽다보면 내용의 갈피가 잘 잡히질 않는다. 해설서를 다시 읽어야 할 만큼 내용이 부실하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나만의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큰 사건의 단편적인 이야기라도 강렬하게 전달되는 단 하나는 있어야 하는 것인데, 그렇지가 못했다. 이 책도 약간은 그렇다.
만약 이 책의 초입에 언급된 체르노빌의 사건 당시의 상황과 그 이후 체르노빌에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의 감정과 이야기를 좀더 상세히 읽고 싶다면 [체르노빌:금지구역]을 읽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이 책은 금지구역의 모습과 금지구역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조명한다. 예술가 동료들과 함께 체르노빌을 가기로 하고, 모두가 반대하는-심지어는 자신의 손 조차 그림그리기를 반대하는- 상황에서도 체르노빌에 가서 그곳을 직접 느끼고 그 사람들을 만나고 그림을 그린다. 르포르타주 만화라고하는데, 르포르타주 만화라고 하면 '조 사코'를 떠올리는 나로써는 역시나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떠나기 전의 자신의 상황에 대한 위험과 공포 그리고 부담감에 대한 이야기와 그로 인한 손 근육 이상에 대한 이야기 때문에 체르노빌에 집중하기가 더욱 힘들었다는 것을 작가는 알지 모르겠다. 그 위험에도 불구하고 정작 체르노빌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동화되는 사이에 작가의 손은 나아진다. 그러나, 전혀 감동적이진 않다. 어느 곳에나 삶은 있는 것이 너무 당연한 것이니 말이다. 체르노빌보다 자신의 감정에 몰입한 느낌이 짙다. 역시나 그림은 예쁘다.
후쿠시마가 멀지 않은 곳에 있고, 얼마전 폭우로 고리원전 2호기를 수동으로 가동중단했다는 뉴스도 들렸다. 내가 아는 많은 사람들이 기장 근처에 살고 있고, 서울도 안전지역이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그렇기에작가가 이야기하는 체르노빌 근처에 사는 피폭되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가까이 있기에 위험을 모르는 사람들, 금지구역에 가보는 것이 남자다움이라 생각하는 어린 남자아이들, 피폭을 받아들이며 사는 삶, 타지인의 공포, 알고보면 그들도 사람이라는 연결고리는 아름다운 그림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인지 모르겠다.
책 상태는, 그림은 예쁘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읽다가 미뤄둔 [인간 없는 세상]이 읽고 싶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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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체르노빌에서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났고 그후 27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당시 최고의 과학기술의 산물이었지만, 발전소는 폭발했고, 사고 대처과정에서 22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피폭당했고, 이후 유럽 전체에 걸쳐 19만 제곱 킬로미터를 방사능으로 오염시켰고, 오염된 지역 주민, 처리반을 합치면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피폭당했으며 (30여만명의 이주, 60여만명의 사고 처리, 근처 오염지대에 살던 사람들 포함) 아직도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근처에서 방사능 오염구역에서 살고 있습니다)다고 합니다. 27년이 지난 후, 그곳은 아직도 방사능에 오염되어 있어서, 사람이 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근처에는 아직 사람들이 살아있고, 갈곳없는 사람들은 그 금지구역 근처에 모여 살고 있습니다. 언듯 보기에는 보통의 평범한 도시, 마을, 사람들로 보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손을 적게 탄 금지구역 내의 자연환경은 더 푸르고 평온하고 낭만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방사능 감지기로만 볼 수 있는 그 곳의 오염은 생명의 접근을 거부하고 있지요. 만약, 문명이 붕괴되어서, 체르노빌의 기록이 사라진다면, 방사능을 탐지할 수 있는 기술을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아름다운 풍경의 멋진 곳이라며 사람들이 몰려가 살지 않을까요? 체르노빌 사건이 발생한지 25년 후, 일본 후쿠시마에서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사람들은 체르노빌과 유사한 7등급 사고로 분류했습니다. 체르노빌 이후, 만들어졌던 조심성이 25년만에 사라지고 비슷한 사고가 또 발생한 것입니다. 기억은 시간과 함께 흐려지고, 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게 됩니다. 기억은 의지이기에, 노력하지 않으면, 기억은 사라지고, 기억하지 못하면, 같은 일을 반복하게 됩니다. 어차피 가이아에게 인간 따위는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인간이 가장 큰 의미일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에 대한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냥 시간의 흐름대로 자연스럽게 조금씩 사그러들다가 공룡처럼 없어지겠지요. 의지를 가지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아무것이나 기억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당신이 의지를 갖고 기억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체르노빌입니까? 후쿠시마입니까? 아니면, 오늘 받은 숙제입니까? 무엇을 기억하던간에, 그 기억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줄 것입니다. 제9의 예술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단순한 만화가 아닌 예술 작품이었습니다. PS) 1예술 : 연극, 2예술 : 회화, 3예술 : 무용, 4예술 : 건축, 5예술 : 문학, 6예술 : 음악, 7예술 : 영화, 8예술 : 사진, 9예술 : 만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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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에도 봄은 온다. 아니 늘 왔었다. 체르노빌은 파괴당하지 않았다. 파괴당한건 인간이다. 환경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인간들의 지나친 자만이다. 사고는 늘 되풀이되고 있다. 문명의 이기심. 탐욕. 파괴 본능 이런 것들을 조금만 자제한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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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에 핵에 대한 공포가 심해졌지만 나는 그저 먼나라의 일, 지진 때문에 발생한 피해 정도로 무감각했었다. 물론 핵이 값싸고 깨끗하고 안전하다는 설득을 100퍼센트 믿는 것도 아니다. 핵 폐기물 처리라는 큰 숙제가 남아있으니까. 하지만 지나치게 공포를 부추기는 것 역시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본과는 다른 가압경수로 분리형이라는 우리 원전 방식의 차이를 무시할 수도 없다. 지나치게 겁먹지도, 지나치게 안심하지도 않는 균형적인 시각이 필요할 것 같다. <체르노빌의 봄> 역시 독자들에게 경감심을 일깨운다거나 뭔가를 주입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사실적인 현장 풍경과 자신이 받은 인상을 섬세한 묘사로 적절히 조합해 죽음의 땅에도 삶의 희망이 자라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p.14
세워진지 2년 밖에 되지 않은, 최신 안전 시스템이 갖춰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사고. 모든 것이 타버려 사망자 수치도 확인할 수 없다. 신뢰할 수 없는 발표는 피해 규모를 축소했다는 의심만 살 뿐이다. 죽음이 깔려있는 금지된 도시에서 과학자나 언론인도 아닌 예술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편견을 깨기 위해 체르노빌에 예술가들을 위한 집을 만들려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작가인 엠마뉘엘 르파주는 현실참여적인 그림을 그리자는 제안에 따라 체르노빌을 방문하려고 하지만 암에 걸릴지도 모른다며 주변의 만류가 심해지자 중압감에 손의 통증을 느끼고 망설인다. 하지만 프로젝트를 중단할 수 없어 현장 르포는 강행되고 기차에 몸을 싣게 된다. 출발 전, 여행 후와 비교해서 피폭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미리 체내 방사능 수치를 측정하고 주의사항을 전해 들으면서 그곳 사람들에게 초대받으면 어떻게 할지부터 걱정한다. 체류 장소는 금지구역에서 20km 떨어진 마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안고 사는 듯한 주민들은 주인 없는 물건들을 훔쳐다 팔 정도로 금지구역에 무감각해져 있다. 그곳이 삶의 터전이기에 떠나지 못한 사람들, 살 곳이 필요해서 돌아온 사람들. 체르노빌 출신이라고 말하면 다들 한발 물러서는 세상에서 고향을 고향이라고 부르지 못한 사람들.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며 가혹한 운명을 이기지 못하고 술과 신앙에만 의지한 채 살아온 사람들이다.
p.71
p.159
재앙을 그리기 위해 인간의 죄의식이 서려 있는 폐허-금지구역으로 들어간 작가. p.92-나는 그림을 통해 세상과 '접촉'하기 위해 여기 왔지만... 실제로는 만질 수도 없었다.
p.64
마스크와 장갑을 착용한 채 무감각해진 손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틱탁거리는 방사능 측정기 소리에 쫓겨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바쁘다. 마치 악어 뱃속의 시계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후크 선장처럼. 그 소리에 의지해야만 목숨을 건질 수 있다는 것도 다르지 않다.
p.110
p.159
땅에 떨어뜨린 그림 도구를 다시 집어들 자신도 없었던 작가는 그곳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압박감에서 벗어난다. 재앙과 죽음의 위협을 알리러 왔고, 회색빛으로 그리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지만 자신도 모르게 푸르고 화사하게 덧칠하면서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다. 무거운 침묵이 노랫소리에 파묻히듯, 겨울이 녹아 봄이 되듯, 죽음 또한 삶으로 뒤덮일 수 있다. p.161-그리고 날 감동시킨 건 바로 삶이었다.
p.161
<굿모닝 예루살렘>을 통해 만나 볼 수 있었던 해바라기 프로젝트가 번역한 책이다. 재미 위주가 아닌 생각할 거리를 주는 시사적인 내용의 책을 많이 소개한 팀이다. 앞으로도 계속 좋은 만화를 소개해주길 바란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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