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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한(?)소설을 쓰지 않는 조경란 작가. “혀”이후 몇 개의 작품을 만났지만 읽을 때 마다 불편했다. 그리고 자유롭지 않았다. 이 책을 도서관 책꽂이에서 봤을 때 몇 번을 꺼냈다, 넣었다를 반복했다. 심지어 장편도 아닌 단편이라니.. 줄거리를 요약하기도 힘들고 무엇을 느꼈는지 생각하기도 힘들 그녀의 단편. 망설이다가 빌려는 왔지만 읽다가 내 스타일이 아니라면 그냥 덮겠다는 편안한 생각으로 읽기 시작했다.
파종 일본에 사는 동생이 손을 다녀 아버지와 함께 일본으로 떠난 주인공. 평범한 일상을 통해 과거 가족들의 상처와 마주하게 된다. 우연히 가지고 가게 된 씨앗이 꽃씨인줄 알았지만 그것은 시금치 씨앗이었다. 그 씨앗을 심고, 씨앗이 자라나면서 그들은 조금씩 소통하게 된다.
학습의 生 회복되기 힘든 면역질환을 앓고 있는 여성이 산속 외딴집으로 이사 온다. 그녀는 이혼과 퇴직을 결심하고 단절된 공간에서 스스로를 가두고 새로운 삶을 살려고 한다. 하지만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 그녀에게 식료품을 배달하는 가게가 있는데 그 집의 소년은 부모의 폭력에 자유롭지 못하다. 투포환 선수를 꿈꾸는 소년은 그녀의 집에서 투포환 연습을 시작하고 주인공과 소년의 기묘한 공존관계가 시작된다.
봉천동의 유령 서울 변두리 동네 봉천동. 그곳은 주인공의 고단한 삶과 그녀의 인생이 모두 포함된 장소이다. 하지만 그 이름이 행운동, 성현동, 청룡동, 은천동 등으로 바뀌게 되고, 그 주소는 엄마의 죽음처럼 쓸 수 없는 주소가 되고 만다.
단념 성공한 교수이지만 그녀는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한다. 그녀의 생일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지인들과 생일 파티를 끝내고 이혼했지만 부부인척 남편과 연기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로지 혼자가 되려는 순간 청년이 찾아온다. 그리고 청년의 여자친구가.. 그곳에서 두 남녀는 시간을 보내고 그들이 갈 동안 그녀는 생각한다. 아침이 조금 늦게 온 것 뿐이라고..
일요일의 철학 이따금 만나는 술집 바텐더 원숭이 남자는 주인공에게 묻는다. 이곳에서 무엇을 하냐고.. 하지만 주인공은 대답할 수 없다. 집을 떠나고 싶지만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삶의 반복적인 모습들.
밤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자식이라는 사실에서 평생 자유롭지 못했던 남편 진교가 자살 비슷한 형식으로 세상을 떠나고 미호는 아픈 시아버지를 바라보며 자신의 삶을 회상한다. 그리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마음의 준비를 시작한다.
옥수수빵 구워줄까 가족이지만 별로 가족이지 못한 가족. 오븐에 집착했던 엄마를 회상하면서 지금 현재 자신의 가족관계를 뒤돌아본다.
성냥의 시대 평생 성냥 만드는 일에 자부심을 가졌던 아버지가 숨을 거든 후 j읍의 성냥공장으로 아들이 찾아간다. 아버지의 손길이 닿았던 공간과 사물을 만지며 옛 시절을 돌이켜 본다. 오로지 성냥에만 정신을 쏟았던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놓고 떠난 어머니를 생각하지만 왜 어머니가 떠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버지의 삶을 뒤돌아보며 아버지에게 성냥은 무엇이었는지 주인공은 생각해 본다.
어떤 단편도 나에게 친절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밑도 끝도 없고, 자세하지도 않다. 그러니까 왜 여기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불편한거야?를 연발하게 만든다. 하지만 8편의 단편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결코 행복하지 않은 가족들이 있다는 것. 같은 공간에서 밥을 먹고 숨을 쉬고 일상의 생활을 하지만 최소한의 대화 말고는 서로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다. 가족에 대한 따스한 추억도, 행복한 기억도 없다.
때론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도 하고, 존재 자체를 부담스러워하기도 한다. 어릴 적부터 보아온 평안하고 따스한 가족의 실체는 어쩌면 미디어가 만들어 놓은 허상일지도 모른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단결하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보듬기엔 간극이 너무 큰 것 같다. 대체 화목하고 따스한 가족은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군더더기 없고 함축적인 문장은 때론 냉소적이다. 다정다감하지 않고, 불편하기도 하다. 하지만 자꾸 생각하다 보면 단편에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밑그림이 서서히 그려지기도 한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정확하게 작가의 의도와 같은 것인지 자신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야기의 여운이 길게 남는 다는 것이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고, 무엇을 이야기 하려는 것인지 좀 더 생각해 봐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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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종」은 일상적이어서 더 좋았던 작품이다. 같은 집에 살고 있어도 우리는 각자 다른 세상에 살고 있(13p)었다던 주인공은 아버지와 함께 동생네가 있는 도쿄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의 생활로 서로에 관심을 갖게 되고 존재를 확인하게 되는, 그런 일상적인 발견이 담담하면서도 기분 좋게 다가왔던 작품이었다. 「학습의 生」은 투포환 연습을 하는 무순이 인상 깊었다. 커다란 덩치에 어깨는 오그라뜨리고 여기저기에 맞은 멍 자욱이 있는 무순이 묵묵히 공을 던지고 줍고 다시 던진다. 혼자라는 불안에 대해서 생각했고 서로 힘을 주고 받아 움직이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아직도 공을 던지고 있는 무순에 대해서. 「봉천동의 유령」은 좀 난해했던 소설이었다. 지금도 좀 어렵지만 소음만은 생생하다. 갖가지의 소리들이 들려왔고 나는 그걸 생의 소리라고 정의했다. 「단념」은 내가 갖고 있던 조경란의 소설의 이미지와 가장 가까운 소설이었다. 그래서 빨리 읽혔고 깊게 몰입했다. 혼자 있게 되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 죽음 후에도 혼자일지 모른다는 불안. 그러나 소설 내내 느꼈던 울적함이나 쓸쓸함과는 달리 결말은 경쾌하게 다가왔다. 소설집의 제목이기도 한 「일요일의 철학」의 나는 낯선 도시에 체류 중이다. 그곳에서 나는 술집 알바트로스의 바텐더인 원숭이 남자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는다. “그러니까, 너는 이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거니?” 질문은 곧 책을 읽고 있는 나에게로 향했다. 나는 아직도 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소설 속의 나는 앞을 내다보며 속도를 붙여 달려 나간다.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밤을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시아버지에게 쓴 며느리의 편지글이다. 아버지가 모르는 남편 진교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미호는 썼다. 보이지 않는데도 이끌려 갈 수밖에 없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버려졌던 진교는 자라서 미호에게 한 신비가 되었다는 것을. 「옥수수 빵 구워줄까」는 엄마의 이미지가 강했다. 오븐 속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그 모습이. 무기력하고 무관심한 극중의 나가 마음에 안 들었다. 그녀가 조카에게 그럼 옥수수 빵 구워줄까? 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계속 미웠을 것이다. 「성냥의 시대」는 그의 어린 시절 모습이 애틋했다. 아버지께 소음을 막을 수 있는 정적 망토를 만들어주겠다던 소년이, 그 행복했던 시절이. 그늘을 향해 똑바로 걸어가는 그의 모습도 오래오래 남았다.
전체적으로 주인공의 문제는 우리의 것과 닮아 있다. 소통의 단절이라든지 영영 혼자일 것 같다는 두려움 같은 것. 술에 의존하기도 하고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 같은 것도 남의 일 같지 않다. 불안, 무기력, 무관심, 낯설고 불편한 집, 이해하기 어려운 아버지, 소음. 우리에게서 멀지 않은 문제들이 비가 오고 안개가 낀 어둡고 축축한 날을 배경으로 이야기 된다.
그럼에도 가벼운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이 소설에서 한결같은 메시지를 봤기 때문이다. 생의 의지. 깨닫는다. 바꾸거나 혹은 바꿀 것을 암시한다. 그건 이전의 문제들 같은 어두운 것에서 벗어난다는 걸 의미했기에 희망적으로 다가왔다. 내 문제들도 덩달아 가벼워진 기분이다.
-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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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에 철학은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올해로 등단 18년차가 돤 한국의 대표적인 중견작가로 자리매김한 조경란의 6번째 소설집이다. 일요일에 철학에는 총 8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파종 일본에 사는 동생이 손을 다쳐서 아버지와 함께 일본으로 떠난 주인공은 동생집에서 살림을 돌와주는데 평범한 일상을 통해 과거 가족들의 상처와 마주하게 된다.주인공의 가족들은 모두 내면의 상처를 안고 있는데 일본이란 낯선 타국에서 함께 살면서 우연히 가지고 가게 된 시금치 씨앗을 심고, 씨앗이 자라나는 과정을 함께 보면서 과거의 상처를 되새기면서 그들은 조금씩 소통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학습의 生 회복되기 힘든 면역질환을 앓고 있는 여성이 치료차 시골 외딴집으로 이사 오는데 그녀는 이혼과 고등학교 윤리 교사직을 퇴직하고 시골의 외딴집이란 단절된 공간에서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아간다.그런데 식료품을 배달하던 가게의 주인집 아들-투포환 선수를 꿈꾸나 아버지의 폭력으로 꿈을 포기한다-에게 그녀의 집에서 투포환 연습을 허락하면서 그녀와 소년의 기묘한 공존관계가 시작된다.동네 사람들의 수근거림과 주인공이 소년의 도둑질을 의심하면서 둘사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데.. 봉천동의 유령 서울 변두리 동네 봉천동에 아버지가 지은 집에 살며 소설쓰기를 시작한 주인공은 고단한 삶과 그녀의 가족과 집이라는 인생이 모두 포함된 장소인 봉천동을 나와 자유를 갈망하며 떠나려고 하지만 언제나 되돌아오고 마는데 봉천동의 이름이 행운동, 성현동, 청룡동, 은천동 등으로 바뀌게 되면서도 여전히 가족의 삶은 유령 같은 소리로 들려온다는 내용이다.
이 외에도 이 책에는 단념/일요일의 철학/밤을 기다리는 사람에게/옥수수빵 구워줄까/성냥의 시대 등이 수록되어 있는데 책 제목중에 철학이란 단어가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읽다보면 내향적이고 맘속에 있는 내면적 문제를 파고들어서인지 책의 분위기가 상당히 가라앉아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저자의 전작들이 주로 가족의 관계와 서로간의 소통에 대해서 집요하게 파고든것처럼 일요일에 철학 역시 여전히 가족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여전히 저자는 8편의 단편속에서 서로간에 상처를 주고 반목하여 한 구성원으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이들은 한 공간에 살며 밥을 함께 먹는다 뿐이지 가족간의 즐거운 대화나 함께 고유한 추억도 행복도 없는 이들이다. 책속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타인과 단절되어 고독을 느끼며 독자들이 보기에 답답한 정도로 수동적인 인물들로 그려지고 있는데 세상에서 받은 상처와 고통을 맘속에 끌어안고 묵묵히 그걸 감수하는 것 같다. 이처럼 상처를 주고 받는 가운데서도 작가는 파종에서 볼수 있듯이 상대방을 품으면서 타인과의관계를 개선하려는 따스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데 아마도 힘든 세상살이를 하는 모든 독자들에 주는 희망의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 일요일에 철학은 밝지도 친절하지도 않은 책이다.문장역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지만 뭐랄까 세상을 냉정한 시선으로 보는 것 같아서 다소 불편한 감이 없지 않다. 일요일에 철학은 책을 집중해서 읽으며서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행간의 숨겨진 의미를 찾아야 되는데 솔직히 좀 귀찮단 생각이 든다. 작가가 좀더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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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달라지면 사람도 달라져야 한다. 아니, 사람이 달라졌기 때문에 시대가 변하는 걸까? 닭과 달걀, 어느 쪽이 먼저인지 판단이 쉽지 않듯 이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어쨌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며, 누군가는 그 변화에 편승해 성공의 길을 걷는 반면 다른 누군가는 이리저리 표류하다 그림자가 되고 마침내 잿빛 땅과 하나가 된다. 선택은 본인의 몫이다. 문제는 자신이 선택한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선택 시점에서는 도통 알 수가 없다는 것에 있지만 말이다. 차분함을 요구하는 작품들이었다. 시대적·장소적 배경이 그런 분위기를 요구했던 것일 수도 있다. 주인공들이 두 발을 딛고 선 곳은 성공이라고는 보장해주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입에 착착 달라붙는 지명 ‘봉천동’이 그러했다. 관악구 봉천동을 모르는 이 누가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관악구엔 은천동, 성현동, 청룡동, 보라매동, 청림동, 행운동, 낙성대동, 중앙동, 인헌동은 있어도 봉천동은 없다. ‘서울시 관악구 봉천 10동 41-762 4통2반’이라는, 주인공이 이제껏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주소는 실체가 없다. 손을 뻗어 잡으려 해도 도무지 잡을 수가 없다. 거추장스러웠을 텐데도 계속해서 오븐을 끌고 다니며 많고 많은 종류의 빵을 놔둔 채 오로지 옥수수빵만을 굽는 엄마(‘옥수수빵 구워줄까’)도 마찬가지다. 시대를 거스른 고집스러움은 언젠가는 꺾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애초에는 뚜렷했으나 점차 희미해져 어느 순간부턴 기억조차 나지 않는 추억처럼 산산이 부서져버린 지역을 저자는 소설의 배경으로 삼았다. 장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대미를 장식하고 있는 ‘성냥의 시대’는 저물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무언가다. ‘성냥왕’으로 불렸던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뜨기 훨씬 이전부터 사람들은 성냥을 찾지 않았다. 성냥공장이 다시 부흥할 날을 꿈꾸고, 최상의 배합을 통해 최고의 성냥을 만드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던 인물들을 세상은 ‘어리석다’ 말할 따름이었다. 아버지의 성냥 제조법을 입술로 끊임없이 되뇌인다 하여도 이미 세상은 변했고, 앞으로는 더 달라질 것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공장 안에서 뛰어놀던 것을 어렴풋이 추억하듯, 언젠가는 성냥공장 자체가 실체 없는 그리움이 되어도 이상치 않으리라. 사람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등장인물들이 지닌 파편화된 모습은 앞서 언급한 배경들의 영향일 것이다.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나는 그와 같은 분위기가 편했다. 그러나 편함과 유쾌함은 또 다른 것이어서, 묵직하게 나를 짓누르는 우중충함까지 달갑게 끌어안을 순 없었다. ‘파종’에서 주인공은 동생이 오른팔을 다치자 가사를 대신 맡아주기 위해 도쿄로 떠난다. 바람이라도 쐴 생각이었던지 주인공의 아버지도 그 움직임에 동행했는데, 세 인물의 관계는 돈독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매사 서로 부닥치고, 어쩌면 서로가 서로를 부끄러워하기에 바빴다. 큰소리가 한 번 즈음은 날 법도 했으나 서로가 서로를 적당히 피한 탓에 그런 일은 없었다. 같은 공간에 있으나 다른 생각을 하는 듯, ‘함께’라는 단어로는 이들을 엮기 거북했으니, 이러한 분위기는 다른 작품에서도 엿볼 수 있다. ‘봉천동의 유령’에서 주인공 가족의 생활 모습에선 불편함이 묻어난다. 표면적인 원인은 아랫집에 세든 예민한 남자 때문이지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길고 또 좁은 집 구조와, 어머니의 요리솜씨를 감시하는 주인공의 태도 등은 편안함보다 날카로움이 가깝다. 난생 처음 보는 아이와 긴 시간을 보내야 하는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일요일의 철학’)과 저세상으로 가버린 남편 대신 시아버지와의 동거를 하고 있는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밤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역시 편안함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밀어내고 철저히 혼자가 될 수는 없는 게 이 세상에서의 삶이다. 아무리 큰 상처를 짊어져야 한다 하여도, 그 크기는 혼자가 됨으로 인해 껴안게 되는 상처보다 크지 않다. ‘겨우 이거였니.’ ‘다시는 내 집에 오지 마라.’ 주인공이 무순에게 뱉은 말은 무순뿐만 아니라 주인공에게도 상처였다. 홀로 되었을 때 비로소 평온을 느끼는 ‘단념’의 주인공도 마찬가지. 불청객(?)에게 그녀가 베푸는 이유 모를 온정은 어쩌면 그리움을 드러내는 그녀 나름의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개인주의, 그 뒤에 숨는 것은 현재를 거부하고 과거에만 머무르는 것과 하등 다르지 않았다. 시대착오적인 삶이 불편하듯 혼자 사는 삶도 불편하다. 하지만 희망이 없진 않다. 불편한 동거 끝에 ‘파종’의 세 인물은 비로소 하나가 된다. 맞는 요인이 하나도 없어 결국에는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시금치 농사(?)처럼 하찮은 것일지라도 세상일을 옳은 방향으로 이끌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깝게 만들 수는 있다. 봉천동을 향한 맹렬한 그리움도 계기가 있다면 행운동을 향한 강렬한 사랑으로 변신할 수 있다. 그 계기가 무엇인지, 문을 열기에 꼭 맞는 열쇠를 찾는 것은 아마도 우리 자신의 몫일 것이다. 일요일에는 철학을, 아니, 살아가는 모든 순간 우리는 생각을 통해 자신에게 필요한 열쇠를 찾아야 한다. 혼자보단 둘이 좋다는 그 말이 비록 거짓일지라도, 거짓말이 아닐 거라는 강한 믿음으로 거짓을 진실로 녹여가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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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소설에서는 언제나, 내 옆에서 살아서 생활하고 있는 가족들의 냄새가 난다.
그래서 익숙하고, 그래서 숨기고 싶다.
하지만 결국 멀리 돌아오고나서야, 그것을 그리워하는 나와 마주선다.
그 냄새를, 그녀의 소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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