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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나. 파워문화블로그 딱지가 붙은지 얼마나 됐다고 블로그 활동에 이렇게 소홀한지. 4월 통틀어 지금 올리는 글이 첫 번째다. 숙제도 숙제지만 책 한 줄 읽을 틈없이 얼마나 학교 일에 치였는지 바쁘다고 우는 소리라도 할 수 있었던 3월이 오히려 나았던 듯도 하다. 목연님이 답글 달아주셨지만 4월은 좀 다를거라고 생각했던 내가 바보다. 지난주 1학년 수업시간에 이청준의 <흉터>라는 글을 함께 읽었다. 개에게 물리고 농사일을 돕다가 생긴 손의 흉터가 참 부끄러웠는데 그게 어려운 시절을 잘 이겨낸 훈장 같은 거란 말을 듣고 자신의 힘든 과거에 대해, 또 다른 사람들의 아픔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내용의 수필이다. 자신의 실수에 대해 긍정적인 측면을 찾아보는 글쓰기를 할 예정인데 거기까지만 하면 좋겠지만 이걸 또 시험에 내려고 하니 얼마나 고역인지 모르겠다. 지엽적인 것보다도 중심 의미를 묻고자 이 글과 주제가 비슷한 시들을 찾다보니 이 책을 만났다. <시인의 가슴을 물들인 만남>.
사실 교과서에서 배우지 않은 시를 보기로 구성할 때는 시험지를 통해서 이런 시도 있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알리고 한 번쯤 좋은 시를 읽게 하고자 하는 추천의 의도가 크다. 그래서 이 문제에는 도종환의 <흔들리며 피는 꽃>을 표적공천할 속셈이었다. 전문이 필요해서 찾은 이 책에는, 그 시 뿐만 아니라 도종환 아저씨의 전 생애에 관한 이야기들, 그리고 그 변곡점마다 탄생한 명시들이 함께 실려있다. 3년 전인가 옥천에서 정지용 시인을 기리는 '지용제'에 갔다가 도종환 시인을 만난 적이 있다. 국어교사 부부(당시에는 연애중)인 우리에게 도종환 시인은 설현이나 수지 까지는 아니어도 웬만한 아이돌 그룹 정도의 의미는 되기 때문에 먼 발치에서 신나게 막걸리를 드시는 모습을 두근대며 바라보았다. 용기내어 우리 둘 다 국어선생님이라고, 수업 시간에 선생님 시 참 많이 가르친다고 말을 건네자 아이들을 위해 현장에서 열심히 해 달라는, 말씀을 막걸리 한 잔 주지 않으시며 건조하게 하셨던 기억이 난다(디스 아님). 다음에 만나면 막걸리 한 잔 주십사 해야지. <지금은 국회에 두 번쨰로 입성하신 도종환 님>
어쨌든, 책 이야기로 돌아와서, 앞서 말했듯 그저 수더분한 국어 선생님 출신 시인인 줄 알았던 도종환 아저씨의 인생 이야기를 읽는 일이 꽤 뭉클하고 찡했다. 영혼과 육신의 고통을 한바탕 겪고 나서야 딱 한 조각 사리가 만들어지듯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시들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다. 역시.
안전장치를 풀고 방아쇠를 당겨도 / 이제 나의 개인화기는 발화하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은 누구인가 / 역사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역사여 구름 그림자에 눌리운 이 깜깜한 오월의 국도 위에서 참으로 부끄럽지 않은 사람들은 누구인지 / 당신도 헤아리고 있는가 - 도종환, <삼대 8, 사격명령>
5.18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놀랍게도 실제 진압군으로 투입되었던 시인이, 시민들에게 총을 쏘지 않기 위해 탄창 제일 위 총알을 거꾸로 돌려 총에 꽂아 놓고 대기하며 구상한 시라고 한다. 문학적 진실이 삶의 진실에서 우러나와야 한다는 신조가 이때를 계기로 생겼단다. 시대의 비극은 거꾸로 사리처럼 훌륭한 시인을 잉태하게 되는 모양이다. 군 제대 후 교사로 일하며 시대의 아픔을 걷어내려 싸우던 중, 그의 아내는 병마와의 싸움에 져 세상을 떠나게 된다. 차마 당신이 죽는다는 말을 못 꺼내던 남편은 시인답게 시를 통해 마음을 표현한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 가슴 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어리 어느 곳 있다면 / 그것조차 끼워 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 도종환, <접시꽃 당신>
결혼해 보니까 이 시가 왜 백만 부가 팔렸는지 조금 알 것도 같다. 아직은 아내가 동의하지 않았지만 나도 장기기증(줄 수 있는 상태라면) 꼭 하고 갈거다. 어차피 썩어 없어질 몸뚱아리 그것 끼워 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겐 얼마나 큰 축복으로 돌아갈지. 아내를 보내고도, 참교육을 위해 전교조를 만들고 해직을 당하는 와중에도 싸움은 끝날 기미가 없고 거대 권력에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도 보이지 않을 때 그를 일으켜 준 건 창 밖의 담쟁이였다.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 도종환, <담쟁이>
쩐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담쟁이의 질긴 생명력이 녹색으로 환하게 빛나는 순간이다. 평소엔 눈길도 안주는 덩굴 식물이 지금 내 삶에 침투한 절망과 질투와 분노를 삼켜버리는 순간이다. 도종환 시인 아니 의원이 20대 국회에서 담쟁이처럼 절망의 벽을 여럿 삼켜버렸으면 하는 응원의 마음과 바람도 쓱 배어나온다. 그리고 마지막 오늘의 표적공천 작품, <흔들리며 피는 꽃>이다.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피었아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의 어디 있으랴 - 도종환, <흔들리며 피는 꽃>
맡겨진 모든 일을 다 완벽하게 해 내야 한다는 그릇된 신념으로 스스로를 괴롭힐 때, 부모와 친구,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고 오해할 때, 인생을 좀 살아본 어른이 건네는 이런 위로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공문과 계획서, 보고서에 파묻혀 있다가 이야기 좀 하자고 찾아온 아이의 눈도 한 번 마주치지 않고 응, 그래만 반복하다 수업에 아이를 돌려보내놓고 밀려드는 자책에 <흔들리며 피는 꽃>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그래, 고작 6년차인 선생이 잘하면 얼마나 잘 하겠어. 실수도 좀 하면 어때. 그러면서 조금씩 더 좋은 선생이 되겠지 하고 속으로 몇 마디 하고 나면 다음 쉬는 시간에 그 아이를 찾아가 사과하고 함께 이야기할 용기가 생긴다. 그리고 아이들은 여전히 기다렸다는 듯이 마음을 살짝 내보인다. 이렇게 아직 모자란 선생인 나에게 교직의 까마득한 선배인 도종환 시인 아니 의원은 이런 '교사 십계명'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의 금언을 던져준다. 아이고... 좋은 선생 되기 무지하게 어렵다. 책상에 끼워넣고 좀 자주 봐야겠다.
어려운 상징과 현학적인 표현이 없어도, 문학적 진실은 삶의 진실에서 나온다는 신념 아래 쉬운 말들에 진실한 의미를 담아 잔잔한 감동을 주는 도종환의 시편을 읽으며 하루를 시작하니 오늘 하루도 버티고 살아갈 작은 희망이 갈라진 내 마음 틈새로 스며드는 듯하다.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고 도종환 시인은 말했다. 매일 일에 쩔어 살아도, 아무리 바빠도 쉬는 시간엔 교실에 가서 아이들이 어디 아프진 않은지 고민은 없는지 오늘 점심은 맛있었는지 함께 이야기하다보면 일에 쩐내보다는 함께함의 행복이라는 향기가 피어오르겠지. 그래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때를 보내는 그 친구들이 조금 더 행복한 꽃으로 피어나겠지 하면서 위안을 삼아본다. 시와 함께 시작한 아침은 여느 아침보다 참 행복하다. 이제 아내랑 같이 아침밥 지어먹고 학교 가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