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1)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100%
  • 리뷰 총점8 0%
  • 리뷰 총점6 0%
  • 리뷰 총점4 0%
  • 리뷰 총점2 0%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0.0
  • 30대 9.0
  • 40대 0.0
  • 50대 0.0
리뷰 총점 종이책
개신교를 이해하면,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보인다.
"개신교를 이해하면,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보인다." 내용보기
개신교를 이해하면,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보인다.   우리 동네에는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는 건물도 크고 화려하고 일요일 예배시간이 되면 사람들이 대형버스를 타고 모여드는 곳이다. 많은 주민들이 물론 그 교회의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교회가 종교적인 믿음을 실천하지 않고 돈을 모으는 데 혈안이 돼있는 거라고 한마디씩 한다. 최근에는 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가 조세
"개신교를 이해하면,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보인다." 내용보기

개신교를 이해하면,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보인다.

  우리 동네에는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는 건물도 크고 화려하고 일요일 예배시간이 되면 사람들이 대형버스를 타고 모여드는 곳이다. 많은 주민들이 물론 그 교회의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교회가 종교적인 믿음을 실천하지 않고 돈을 모으는 데 혈안이 돼있는 거라고 한마디씩 한다. 최근에는 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가 조세포탈의 혐의를 받는 등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킬 만한 종교인들의 부패사실이 드러나면서 사람들이 기독교를 보는 시각은 더 악화되었다. ‘개독교’라는 말을 서슴지 않는데, 중요한 건 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의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순복음교회뿐만이 아니라 많은 교회의 목사들이 축재와 출세를 신의 은총으로 여기며 탐욕을 정당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위대한 말씀을 알고 있으며, 종교는 모름지기 사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사랑을 베푸는 나눔의 방식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런 종교인들의 행태에 대해서 감정적으로 격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이는 비단 기독교라는 종교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는 한국에서는 가장 많은 신도를 거느리고 있는 것이 기독교이기에 더 친숙한 만큼 더 욕하고 싶은 것이다. 또한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한 사람들의 판타지 즉, 그들은 ‘선(善)’ 또는 ‘사랑’이라는 이상을 실현하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신앙인들이 바라는 또는 상정하는 그 이상과 기독교인들이 정말로 믿고 있는 그 이상이 과연 같은 지는 의문이다.

나는 정말 무지하게도 개신교라는 총체적인 그 이름으로 모든 교회를 동일하게 바라보면서 이런 교회의 욕망을 비판만 했다. 그리고 나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니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 딱히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대학에 와서 접한 책이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다. 그런데 베버의 글을 읽다보니 베버가 말하는 그 청교도인들과 내가 그리고 현대인이 너무 비슷하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베버가 말한 ‘iron cage’에 갖힌 사람이 바로 ‘나’였다. 이런 당혹감의 연장선상에서 기독교의 마인드를 이해하기 위해서 접한 책이 바로 ‘세상을 욕망하는 경건한 신자들’이다.

사실 이 책의 저자에게 직접들은 얘기지만 표지는 정말 잘못된 선택인 것 같다. 책의 내용을 잘 전달하지 못하는 것도 같고 저자의 대안적인 시각에서 오는 희망감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혹시라도 표지만을 보고 ‘이 책 정말 지루하겠는 걸...’이라고 생각하는 예비독자가 있다면 정말 정말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내용은 현대 기독교를 내부자의 입장에서 직설적이지만 분석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고 있다. 게다가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이해하기 쉽고 특히 여성이라면 공감가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 책의 머리말과 맺는 말은 필자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다. 핵심만을 대충 알고 슬며시 빠져나가려는 현대인의 습성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진정한 기독교의 이상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종교에 관한 책이지만 결국 인간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한국사회의 정치적인 문제와 자본주의적인 문제를 모두 연결지어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다. 그러니...겉모습에 속지 말고! 이 리뷰를 끝까지 보고 판단해 주길 바란다.

인간의 문화는 인간과 환경의 상호작용 속에서 만들어진다. 종교도 인간문화의 한 부분으로 본다면 그 다양성의 원인은 인간이다. 기독교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그 절대명제는 변하지 않았으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그 구체적인 내용과 방법은 조금씩 변해왔다. 그리고 그 흐름에서 청교도 신앙과 자본주의는 ‘선택적 친화력’을 가지게 된다. 이 두 가치의 맞물림이 어떤 집단역학 속에서 이루어졌고 현대에는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이해한다면 우리는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진단할 수 있고 대안을 모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종교적인 가르침이 인생 그 자체였던 중세시대는 교황이 절대권을 갖고 교회가 점점 제도화되면서 부패하고 타락하기 시작한다. ‘면죄부’로 대표되는 이런 부패를 목도한 루터는 “만인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며 모두 제사장이다”라고 외치게 되고 이로 인해 종교개혁은 시작된다. 그의 주장은 급속히 퍼져나가 결국은 ‘종교의 자유’가 개인에게 주어지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개신교적 종교 지도자들을 반긴 것은 부르주아들이었다. 제3세력으로서 그들을 대변할 새로운 사상을 원하고 있던 이들은 루터의 선언을 채택하게 된다. 그로부터 1세기 후 나타난 청교도 운동은 ‘별난 경건’을 탄생시킨다. 기본적인 생각은 행위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구원을 결정하셨다는 것이다. 죄인인 나를 하나님이 크나 큰 은혜로 구원해 주시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이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우리는 그에게 무한한 신뢰와 순종을 바쳐야 한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그런데 내가 구원받았는지 어떻게 알지?’라는 의문이 밀려온다. 여기서 사람들은 내적 고립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청교도인들은 이 문제를 ‘세속직업의 소명(calling)’에서 찾았다. 내가 하느님께 구원을 받았다면 나는 하나님께 그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기쁨을 표현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도구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열심히 낭비없이 현세를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삶은 다시 내가 구원받았음을 말해주는 표시가 된다. 이런 종교적 동기의 순환고리 속에서 청교도인들은 핀잔받을 정도로 열심히 일하고 부자가 되었지만 돈과 명예에 집착하지 않는 ‘현세내적 금욕주의자’가 되었다. 합리적이고 조직적인 방법을 강구하는 그들의 삶은 근대의 관료적인 시스템과 딱 맞아떨어진다. ‘일하는 인간기계’, ‘일개미’. 동기는 다르지만 그 행태 면에서는 상통했다. 이제 경건한 청교도인들은 ‘경건’과 ‘욕망’의 사이를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경건한 합리화 속에서 어떤 비합리적인 부분들이 감추어졌는지를 인식해야 한다. 루터의 ‘만인’에는 시대적으로 유럽중산층남성들만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처럼 청교도인들이 미국으로 건너가고 그들이 ‘하나님의 도성’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많은 폭력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과 언약은 그들을 선택받은 특수한 집단으로 인식하게 하며 그들의 폭력성과 비합리성에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성을 부여한 측면이 있었다. 청교도 신앙은 ‘경건’이라는 면에서는 금욕적이기에 신앙의 내면화를 특징으로 하지만 ‘욕망’이라는 면에서 자기 확장, 나아가 외부에 대한 정복을 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의 신앙(미국의 선교회)이 한국으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그리고 그들의 신앙이 후기 자본주의사회로 갈수록 ‘부’에 대한 해석이 변질된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그들의 목적은 ‘경제적 부’가 되었고 종교는 ‘축복으로서 부와 성공을 약속하는 수단’이 된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번영신학’이라는 ‘우리교회에 헌금을 내면 그대로 신자들에게 미래의 축복과 부로 돌아올 것’이라고 설교하는 신앙을 목격하고 있다.

저자는 우리가 다시 ‘욕망’을 재고해야 한다고 말한다. 기독교인들이 현재 가지는 ‘제도적인 교리’에 절대성을 부여하지 말고 초대 교회의 이상이었던 예수님의 ‘욕망’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특수한 집단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보편성을 담보한다. 루터의 ‘만인’의 진정한 의미는 여기에 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왔으나 ‘아직’오지 않았다. 우리는 이 사이에서 살아야 한다. “‘서로가 함께’사는 세상의 도래를 위해, 지금 그렇지 아니한 현재의 질서를 끊임없이 부정하고 개혁하려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가 ‘들으면 들을수록 우울해지기만 하는 우리네의 가요’에 지쳐가고 있고, ‘뻔한 위로의 말’에 허무해져만 가고 있다면 나는 이 책을 추천한다. 이 책은 독자에게 희망찬 내일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희망찬 내일을 함께 가자고 손을 내밀 것이다.

 

 

 

 

 

 

 

 

 

 

 

 

 

 

 

 

 

 

 

 

 

 

j********g 2013.06.19. 신고 공감 2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