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의 날개는 유명한 소설이라, 누구나 다 알것이다. 나는 그 날개보다, 이 책에 실려있는 이상의 수필중에 하나인 '권태' 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권태를 읽다보면 등장하는 초록색은 정말이지 이제껏 내가 생각해왔던 초록색의 이미지를 사정없이 구겨버린다. 초록빛이 그렇게 지루한 색이었는 지, 미쳐 몰랐었다. 권태를 읽고 나서 보이던 주변의 산들이 왜 그리 지루해보이는 지.. 아무런 재미도 없이 끊임없이 계속 펼쳐지던 시골의 일상과 더불어 여름 내내 늘 그대로인 초록이 그렇게 매치 되는지.. 어느 새 울긋불긋하게 단풍이 들어버린 산에서, 지겹기는 하지만 숨막힐 듯한 초록이 그리워진다. |
|
"이상은 왜" 를 읽으며, 이상의 시각으로 기록된 부분들 중 상당 부분이 이상의 작품속 모습과 묘하게 오버랩이 되어 있고, 그 밖의 여러 곳에서 선생님의 시도 상당부분 인용이 되어 있었기에, 책을 읽는 내내 이상 선생님의 작품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갈증이 있었다..
|
| 이상하면 흔히들 이상한 소설만 쓰는 사람이라고들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심리주의라는 하나의 거대한 장르를 완성시켰다. 날자날자..날개 속 주인공은 결국 이 말을 남기고 옥상에서 투신한다. 이것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가? 단순히 한 사람의 죽음? 내 눈에는 이상세계를 향한 갈망으로 보였다. 삶의 희망이 없는 지식인. 그 지식인의 고뇌와 방황. 아무도 도움을 줄 수 없는..그러면서 나 혼자만 슬픈 것 같은 나만 혼자 소외당하는 느낌. 그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현대인이 한번쯤 생각해 보는 자살..이상..아니 김해경씨는 모더니즘으로 그것을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인간의 심리를 꿰뚫는 날카로운 묘사가 인상깊었던 아주 묘한 책이다. |
| 나는 모든 것에 게으르고 육체는 허약하다. 내가 왜 극치의 게으름까지 도달했는지 소설에는 언급되어있지 않다. 이런 허약하고 무능한 나에게 아내는 얼만큼의 애정을 갖고 대해준다. 집에서 하릴없이 빈둥거리는 내게 아내는 이따끔씩 미소를 머금고 빛나는 은화를 쥐어준다. 나는 아내의 행동에 이해할 수 없어하다가 아내를 방문하는 내객 또한 아내에게 그같이 행동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게 순간의 기쁨을 제공할 뿐인 은화가 덧없이 귀찮아져서 변소에 버렸으나 아내는 여전히 돈을 놓고간다. 내객, 아내가 놓고가는 돈에는 일종의 쾌감을 삽입됐었음을 난 깨닫는다. 탐구심이 강한 난 아내가 느끼는 쾌감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오래간만의 외출을 한다. 피곤에 지쳐 되돌아온 난 난생처음으로 아내와 내객의 소근거림을 듣는다. 아내가 놓고 간 돈에는 속죄의 뜻이, 내객이 놓고 간 돈에는 호의에 대한 보답의 의미가 숨어있따. 아내는 나에게 애정이 있으나 현실의 막막함에 어쩔 수 없이 몸을 팔았을 것이다. 비록 나에게는 필요치 않는 은화라도 육체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남편에 대한 애정이 은화엔 숨어있다. 아니면 더럽게 번 돈을 얼만큼 나에게 주므로써 ‘남편이 저렇게나마 살 수 있는 것도 모두 이 은화덕분이다’라며 합리화시켰는 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태 골방에 누워있으므로써 존재감을 상실했던 난 단 한번의 외출로 색채를 지닌 존재로 부각되었고 곧 –날 신경쓰는- 아내와 내객의 소근거림을 듣게 된다. 나의 외출에 노한 아내가 있다. 마음이 약한데다 아내에게 애정까지 있어서 난 아내에게 사과하고 싶다. 문득 돈이 생각났고 아내에게 돈을 쥐어준다. 여기서 소설에서 벗어나 생각해본다. 사람과의 사이에서 의겨을 표현할길이 정말 돈뿐일까라는 생각. 정말 물질만이 세상의 전부일까. 이런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파온다. 다시 소설로 들어가 주인공인 난 말한다. 난 머리맡에 저절로 모인 오원을 아무에게라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라고. 돈이라는 게 무엇을 상징하는 지 알고 싶어서 어느 누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지 모르지만 아마도 주인공인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타인에게 인식시키고 싶었던 게 아닐까싶다. 그래서 외출했던 건데 –거리는 너무 복잡하였고 사람은 너무 들끊었기에 5원은 어느 누구에게도 줄 수 없었다-라고 말한다. 그 후 난 33번가에 이사온 후 처음으로 아내의 방에서 잔다. 다음 날 아내는 내 모이를 내 작은 방에 놓고 간다. 아내는 내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만 33번가의 작은 방 외의 삶이 있기에 날 골방으로 내몬다. 아내의 방에서 잠을 잔 난 익숙치 못한 탓에 내 방에 와 다시 잠잔다. 처음으로 아내에게 돈을 준 난 아내와 내객이 갖었던 쾌감을 처음으로 이해한다. 한번의 외출로 저 밖의 세계에 익숙해진 난 다음날의 외출에 전보다 덜 피곤해졌음을 느낀다.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돈을 쥐어준 난 아내에게 무언가를 해줄 수 있다는 쾌감과 아내 방에 잘 수 있었음에 기뻐한다. 잠에서 깬 난 불이 들어온 방에서 아내가 끊임없이 지어주는 미소에 기뻐하며 환희에 차있다. 나는 아내와 함께 있었던 내객처럼 외출하고 난 후 들어와 나를 반기는 아내의 따뜻함을 맛볼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 날 기쁨의 근본인 돈이 내게 없음을 인식하고 나는 슬퍼한다. 그리고 외친다. –하늘에서 얼마라도 좋으니 왜 지폐가 소낙비처럼 퍼붓지 않나.- 그러며 울고 있는 내게 아내는 다가와 돈을 준다. 아마도 나는 알았을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식시키므로써 아내에게 따뜻함과 호의를 받는 것이 얼마나 기쁜 것인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돈에서 나온다는 것을. 그러나 현실의 나는 돈을 벌 수 있을 만큼 능력이 있지 못하고 난 그것 때문에 서러웠을 것이다. 현실의 무능력함. 그런 나를 꽤뚫고 있는 아내는 내게 돈을 쥐어준다. 아내에게 우선순위에 있는 내객 부재에 맞춰 오라는 나에게 난 끄덕거리며 외출한다. 소설에서 세번째의 외출이 전부이다. 외출은 타락과 음모에 접근과 동시에 향락이 존재한다. 첫번째의 외출에서 나는 돈의 의미와 준재 부각에 따른 환희를 아게 되고 두번째의 외출에서는 환희를 지속시키려하고 세번째의 외출에서는 환희와 존재 이면에 있는 어둠을 알게 된다. 세번째의 외출에서 나는 아내의 말대로 내객이 없을 때 귀가하려하지만 날씨라는 뜻밖의 상황 때문에 일찍 들어가게 되고 몸살과 더불어 보지 말아야할 무언가를 보게 된다. 가슴의 통증과 열과 아내가 준 약으로 며칠을 잠속에 묻어있던 난 다시 예전과 같은 상황처럼 자신의 방에서 누워있는다. 아내가 준 약이 몸을 튼튼하게 하는 보신약일 거라며 애써 자신의 세뇌시키며 골방에서 자신에게 익숙해져있는 베개와 이불과 더불어 편안함을 만킥한다. 역시 예전의 생활이 낫다며. 그러던 차에 난 이상스러운 것을 보게 된다. 아스피린이라고 생각했던 그 약이 아달린이였던 것이다. 자신을 죽이려한 아내의 배신에 까무러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무의식적으로 죽음을 느낀다. 처음과는 달리 호기심도 아니고 기대에 찬 것도 아닌 고통에 찬 외출을 하며 어느덧 난 벤치에 앉아있다. 아내가 준 아달린을 씹으며 며칠을 밖에서 기거했던 난 아내가 의심스러웠지만 지금까지 낙이었던 아내의 배신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어하며 어쩜 자신이 오해했을지도 모르는데 하며 오히려 아내에게 미안해한다. 그래서 귀가하지만 거기서 난 도저히 못볼 것을 본다. 내가 분노해야하는데도 도둑질과 계집질을 의심하며 오히려 내게 화를 내는 아내에게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난 계집질을 안했기에 아내는 오해한 거다. 그렇다면 그같이 아내가 아달린을 먹였다는 사실도 오해일까? 나는 아내와 숙명이 영원히 맞지 않을 발, 절름발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오해가 가득한 세상을 그냥 그렇게 살야야 된다. 그러나 난 머리로는 모순덩어리의 세상을 이해하면서도 그러고 싶지 않다. 마지막의 외출. 난 더 이상 외딴방의 안락함에 취할 수 없다. 내가 있을 곳은 이제 어디도 없다. 날고 싶다. 현실에 무능력해진 나에게 벗어나 예전처럼 희망과 야심에 찬 내가 되어 날아가고 싶다. 투명했던 세상, 의심없던 세상, 아내의 사랑이 가득했던 세상으로 날아갈 수 있는 날개를 갖고 싶다. 다시 한번 그런 세상속으로 날아가자꾸나. |
| 권태 혹은 날개라든가 이상을 대표하는 글을 접하다보면 내가 좋아하는 색을 감지하게 된다. 그것은 내가 느끼는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라든가 헤르만 헤세, 그리고 파트릭크 쥐스킨트 등의 작가들과도 어딘지 닮아 있는 색깔이다. 분명 작자 이상은 한국인이지만 (스스로도 회의적일 정도로) 적당히 사대주의적인 나에게도 이상은 여느 외국의 작가 보다도 매력적인 글과 그것을 탐닉하는 유희를 제공해 주었다. 좋은 글이란 책을 접하는 독자의 감정을 작자가 사용하는 언어로서 그 하나하나의 의도대로 한순간에 그 사상을 완벽하게 동화시키고 휘어잡는 것이라고 난 생각했었다. 또 그런 잣대로 책을 고르곤 했다. 그리고 이상의 글. 내가 여긴 바로 그 답답할 정도로 꽉 조이고 틈도 없이 딱 들어맞는 그런 동화(同化)의 감정을 느끼게 해준 글들 이였다. 비록 내가 작가와 함께 느끼게 되는 그 감정이란 잔뜩 우울하고 짙은 색을 가진 아닌 척 하는 듯한 괴로움 뿐 이였지만 그래도 그 경험은 정말 최고 였던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