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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데스밸리에서 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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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랑     밤사이 비가 다녀가셨다   우리가 잠든 사이 도둑처럼 오셔서 산과 들을 깨끗이 쓸고 닦고 가셨구나     나는 이렇게 몰래 다녀간 것들이 좋다     몰래 온 비   몰래 온 눈   몰래 온 사랑     몰래 와서는 존재의 흔적을 남기고 가는 것들     몰래 들어와 내 안에서 기숙하는 사랑아!     올 때처럼 갈 때에도 몰래 가거라   - 이재무, 「몰래 온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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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랑

  

  밤사이 비가 다녀가셨다

  우리가 잠든 사이 도둑처럼 오셔서 산과 들을 깨끗이 쓸고 닦고 가셨구나

 

  나는 이렇게 몰래 다녀간 것들이 좋다

 

  몰래 온 비

  몰래 온 눈

  몰래 온 사랑

 

  몰래 와서는 존재의 흔적을 남기고 가는 것들

 

  몰래 들어와 내 안에서 기숙하는 사랑아!

 

  올 때처럼 갈 때에도 몰래 가거라

  - 이재무, 「몰래 온 사랑」

       

밤사이 내린 비로 산과 들은 오랜만에 목욕을 했다. 말끔하게 제 빛깔을 드러낸 산과 들을 보며 시인은 우리가 잠든 사이 도둑처럼다녀간 사랑을 떠올린다. 몰래 온 비는 지상에 흔적을 남기고 어딘가로 가버렸다. 미처 알아채지도 못한 채 산과 들을 적시고 가버린 사랑이라니. “나는 이렇게 몰래 다녀간 것들이 좋다라고 시인은 쓰고 있다. 우리가 잠든 사이에 몰래 다녀간 것들이 베푼 이 환대를 시인은 감격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 몰래 오는 비가 있고, 몰래 오는 눈이 있고, 몰래 오는 사랑이 있다. 비가 그쳐도 비가 내린 흔적은 남아 있다. 눈이 그쳐도 눈이 내린 흔적이 남아 있다. 마찬가지로 사랑이 떠나간 자리에도 사랑의 흔적은 남아 있다. 이 흔적으로 우리는 비를 그리워하고, 눈을 그리워하고, 사랑을 그리워한다.

 

몰래 와서는 존재의 흔적을 남기고 훌쩍 어딘가로 떠나버린 것들을 생각하다가 시인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차마 잊을 수 없어 몸에 새긴 것들이 바로 흔적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걷던 길을 홀로 걸으면 가슴 저 깊은 곳에서 그리움이 밀려온다. 그리워서 그 길을 걸은 게 아니다. 그 길을 걷다 보니 그리움이 밀려온 것이다. 분명 그 사람을 잊은 줄 알았는데, 이 길을 걸으면 잊었던 그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 머릿속을 채운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는 본능과도 같이 무심결에 떠오른다. 배고픔의 본능이야 밥을 먹으면 이내 사라지지만, 그리움은 밥을 먹을수록 더욱 더 깊어진다. 그리움이 커질수록 존재의 흔적이 커진다. 그 흔적을 지우려면 그리움도 지워야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리움은 문득 문득 떠올라 우리를 당황스럽게 한다.

 

시인은 이 상황을 몰래 들어와 내 안에서 기숙하는 사랑아!”라는 시구로 표현하고 있다.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몰래 들어온 이 사랑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언제 들어 온지 모르는 이 사랑을 시인은 그 사랑이 나간 다음에야 알아챈다. 몰래 온 비를 비가 내린 흔적으로 알 수 있듯, 몰래 온 사랑은 사랑이 남긴 흔적으로 알 수 있다. 알지도 못한 사이에 왔다가 가버린 사랑은 어떤 흔적을 남기게 될까? 시인은 산과 들을 깨끗하게 쓸고 닦고 간 비를 통해 몰래 왔다가 간 사랑의 흔적을 상상하고 있다. 혼자 사는 방에 밥상을 차리고 사라진 우렁각시/우렁총각이 생각나지 않는가. 그들이 어디에 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밥상을 차려놓고 갔다는 사실에 있다. 시인은 바로 이 흔적을 통해 몰래 온 사랑을 가슴 깊이 느끼는 것이다.

 

몰래 온 사랑은 갈 때에도 몰래 가야 한다. 우렁각시가 현실에 나타나는 순간, 사랑은 이내 현실이 되어버린다. 사랑이 현실이 되면, 욕망 또한 현실이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무언가를 원하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하나가 이루어지면 다른 하나를 원한다. 다른 하나가 이루어지면 또 다른 하나를 원한다. 이것이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이다. 사랑만큼 지독한 욕망이 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비는 세상을 욕망하지 않는다. 눈 또한 세상을 욕망하지 않는다. 사랑도 과연 이럴까? 사랑은 세상을 욕망한다. 지금보다 더 아름다운 사랑을 욕망한다. 이 욕망이 극단으로 치달을 때 사랑은 이내 집착으로 변한다. 무언가를 향한 욕망이 금기가 되어 사랑에 빠진 사람을 얽매기 시작한다.

 

몰래 온 사랑은 이리 보면 사랑이라는 지독한 욕망과 거리를 둔 사랑임이 분명하다. 몰래 들어온 사랑이므로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신이 사랑에 빠진 것을 모른다. 사랑에 빠진 줄 모르고 사랑하는 상황이 참으로 재미나지 않는가. 밤새 내린 비가 산과 들을 깨끗이 씻고, 밤새 내린 눈이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듯, 몰래 온 사랑은 욕망에 물든 사람들의 마음에 가만히 닿았다가 이내 사라진다. 그 사랑이 온 것을 알 수도 없거니와, 설사 안다고 해도 그 사랑을 붙잡을 수는 없다. 사랑이 다녀간 흔적으로 하여 시인은 가슴이 뭉클해오는 것을 느낀다. 가슴을 뒤흔드는 사랑의 마력을 느낄 수는 없지만, 가슴을 잔잔하게 맴도는 사랑의 여운만은 느낄 수 있다. 세상을 겪어야 할 젊은이의 사랑이 아니라, 세상을 이미 겪고 편안하게 의자에 앉은 황혼녘의 사랑을 시인은 몰래 온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2. 인생

       

오늘처럼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여름 저녁은 양푼에 찌개용 돼지고기와 묵은 김치와 네모나게 썬 두부를 넣고 끓인 찌개를, 갓 지은 밥과 포장 김과 함께 먹고 싶다. 반주도 곁들이면 더욱 좋으리. 얼큰한 국물을 한 숟갈, 두 숟갈 뜨다 보면 이마에 송골송골 땀은 돋아나리라. 싱겁게 살아온 하루를 맵짠 맛으로 달래다 보면 울컥, 설움이 자욱하게 솟기도 하리. 밖은 허공에 못 박듯 사선을 그으며 줄기차게 비가 내리고 열린 창으로 빗소리가 들어와 찌개 속으로 첨벙 뛰어들기도 하리. 안부가 그리운, 먼 곳의 사람아, 얼도 있고 큰도 있는 찌개가 아니라면 우리 어찌 저 매캐한 세월을 건너갈 수 있겠는가. 오늘 저녁은 비가 와서 어둠이 근친처럼 살갑고 먼 곳의 네 얼굴조차 가차이에서 환하다.

- 이재무, 「김치찌개」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 시인은 김치찌개를 먹는다. 양푼에 가득 담긴 김치찌개를 먹으며 더위에 지친 몸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음식이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생명은 먹어야 살 수 있다. 먹는 일이 곧 생명이 사는 일이다. 반주를 곁들여 얼큰한 국물을 먹다 보면 이마에서는 송골송골 땀이 맺힌다. 몸이 살아 있다는 표시다. 한여름에 비까지 내렸으니 눅눅한 날씨가 아닌가. 온몸에 달라붙은 습기를 뜨거운 찌개 국물로 날려 버리면, 오랜만에 매끄러워진 몸을 느낄 수 있다. 음식이란 이런 것이다.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몸이 달라지고 마음이 달라진다. 다른 생명을 먹어야 비로소 생명을 유지하는 생명의 본성 때문인 걸까? 먹기 위해 사느냐, 살기 위해 먹느냐고 사람들은 묻지만, 어쨌든 사람은 먹어야 산다는 말 하나는 거부할 수 없는 진실임이 분명하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느낄 새도 없이 맵찬 김치찌개를 먹으며 시인은 싱겁게 살아온 하루를 달랜다. 음식을 먹을 때만큼 평화로운 때가 어디에 있을까? 다른 생각을 하며 음식을 먹으면, 음식은 결코 몸으로 가지 않는다. 빨리 먹으면 체하기 일쑤이고, 억지로 밥을 먹어도 속에 무언가 걸린 듯 그득한 느낌이 든다. 인생에서 먹는 재미만한 것도 별로 없는데, 지금 사람들은 마치 일을 하기 위해 음식을 먹는 것도 같다. 그래서일 것이다. 시인은 김치찌개를 먹다가 울컥, 설움이 자욱하게 솟기도 하리.”라고 이야기한다. 김치찌개 하나로도 이토록 큰 위안을 얻을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런 시간마저도 외면한 채 일에 매진한다. 성공을 하면 더 맛있는 김치찌개라도 먹을 수 있는 것일까 

 

밖에서는 줄기차게 비가 내린다. 열린 창으로 들어온 빗소리가 찌개 속으로 첨벙 뛰어든다. 빗소리가 가미된 김치찌개라, 참으로 감미롭지 않은가. 어디에 가서 이런 김치찌개를 먹을까? 시인은 비 오는 날 그저 김치찌개만 먹는 게 아니다. “안부가 그리운, 먼 곳의 사람을 그리워하기도 하고, “얼도 있고 큰도 있는 찌개를 통해 저 매캐한 세월을 건너가기도 한다. 한마디로 그에게 김치찌개는 인생을 돌이키게도 하고, 다른 인생을 떠올리게도 하는 고마운 음식으로 나타난다. 김치찌개 하나에 드리워진 인생의 맛이 느껴지지 않는가. 먹는 일이 사는 일이라는 말에 담긴 진의를 시인은 김치찌개의 맵짠 맛을 통해 감각적으로 표현한다. 인생이 김치찌개만 같다면 정말로 살 만하지 않겠는가.

 

하긴, 김치찌개를 먹는 마음으로 인생을 살면 그뿐이다. 김치찌개가 어디 값비싼 음식이던가. 가장 서민적인 음식을 먹으며 시인은 비가 오는 날의 정취를 느끼고, 지금은 볼 수 없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매캐한 연기로 남아 있는 지난 세월을 들여다본다. 빗소리까지 첨가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김치찌개를 먹다 보니 어둠이 근친처럼 살갑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둠과 식구가 되어서 그런 것일까? “먼 곳의 네 얼굴조차 가차이에서 환하다.”라고 시인은 쓰고 있다. 이 정도면 김치찌개의 낭만이라고 이름 지을 만하다. 김치찌개 하나로 먼 곳에 있는 네 얼굴을 환한 세상으로 데려오는 이 낭만 시학이 이재무 시를 관류하는 근원인지도 모른다.

 

낭만이란 현실에서 현실 너머를 보는 일이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 시인은 김치찌개를 먹으며 안부가 그리운 먼 곳의 사람을 떠올린다. 먼 곳에 있는 사람을 이곳으로 불러냄으로써 시인은 김치찌개를 먹는 장소를 그리움이 흘러넘치는 시적 공간으로 만든다. 어둠에 물든 칙칙한 세상은 김치찌개의 낭만과 만나 멀리 있는 네 얼굴조차 환한 세상으로 돌변한다. 사물 하나로 피워내는 낭만치고는 참으로 그럴싸하지 않은가. 낭만이 유물이 되어버린 이 시대에 시인은 김치찌개의 맵짠 감각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입안에 침을 고이게 하는 그 감각을 온몸으로 느끼며 우리는 누군가와 먹던 김치찌개를 떠올린다. 이것이 인생이고, 동시에 이것이 이재무가 추구한 낭만의 시이다. 감각은 무엇보다 그런 낭만과 더불어 더욱 깊어지는 것이다.

 

 

 

 

o*****s 2020.02.09. 신고 공감 3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