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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시간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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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적 삶으로 길어 올린 한가로운 세계- 한병철, 『시간의 향기』       오늘과 어제가 다를 정도로 빠르게 변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가속화가 미덕이 된 시대에 우리는 엄청나게 빠른 시간에 끌려 방향을 잃어버린 채 헤매고 있다. 가속화는 우리를 속도에 무감각하게 만든다. 속도를 감당할 수 없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더 빠른 속도를 갈망한다. 수백 킬로미터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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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적 삶으로 길어 올린 한가로운 세계

- 한병철, 『시간의 향기』

 

 

 

오늘과 어제가 다를 정도로 빠르게 변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가속화가 미덕이 된 시대에 우리는 엄청나게 빠른 시간에 끌려 방향을 잃어버린 채 헤매고 있다. 가속화는 우리를 속도에 무감각하게 만든다. 속도를 감당할 수 없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더 빠른 속도를 갈망한다. 수백 킬로미터로 달리는 열차 안에서 우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는 사물들을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열차에 있는 사람과 바깥에 있는 사물은 애초부터 만날 자리가 없다. 가속화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다. 사물은 그저 스쳐가는 대상일 뿐이다. 사물 자체가 사라진 자리에는 만 남는다. 점과 점이 이어져 공간이 되고, 시간이 된다. 점과 점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무것도 없다. 요컨대 우리는 점과 점으로 이어진 무의미한 세계를 살고 있다. 점에서 점으로 시간은 흐르지만, 그 점과 점을 이어주는 것은 이제 없다. 지은이 말마따나 가속화된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점과 점을 잇는 장소의 부재가 더욱 큰 문제로 대두되는 셈이다.

 

오늘날 시간을 타는 사물은 점과 점으로 이어진 탈현재화된 시간 속에 놓여 있다. 시간으로서 점은 순간을 대표한다. 시간은 순간에서 순간으로 이어지다가 이내 스러진다. 돌려 말하면 점으로 변한 사물은 짧은 유행처럼 급속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사라져버린다. 지은이는 이 상황이 발생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시간은 마치 산사태처럼 마구 무너져 내리는데, 그것은 바로 시간이 자기 안에 아무런 받침대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25) 방향이 없이 속도만 빨라진다. 점으로 원자화된 시간은 받침대가 없기에 쉽게 폭주한다. 여기저기로 뻗어 나가기만 할 뿐 하나로 모이는 접점이 없다는 데서 원자화된 시간은 진리로 가는 길을 부정한다. 우리는 수많은 이미지들에 휩싸여 살지만, 그 속에서 아무런 의미도 얻지 못한다. 밤하늘을 밝히는 별은 이제 우리를 저 먼 나라로 인도하지 않는다. 현대인은 더 이상 먼 나라를 상상하지 않는다. 그들의 눈에는 오로지 산사태처럼 마구 무너져 내리는 시간 이미지만 보일 뿐이다.

 

점들 사이에서는 필연적으로 공허가 입을 쩍 벌리고 있다.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는, 어떤 센세이션도 일어나지 않는 텅 빈 간극, 반면 신화적 시간이나 역사적 시간은 어떤 공허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림과 선에는 간극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점들 사이에서만 비어 있는 시공간이 생겨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간극들은 권태의 원인이 된다. 그것은 때로 위협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곳, 의도가 무에 맞닥뜨리는 곳에는 바로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점-시간은 비어 있는 간극을 제거하거나 단축하고자 하는 강박을 낳는다. 간극이 오래 지속되지 않도록 센세이셔널한 일들이 더 빨리 연달아 일어나게 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장면과 장면, 또는 사건과 사건의 연속이 히스테리적이라고 할 정도로 가속화된다. (43~44)

 

점과 점을 연결해주는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는 죽음이 거주한다. 하늘의 별을 보며 인간이 가야할 길을 모색한 신화적 시간과 인간이성의 힘으로 빛의 길을 열어젖힌 역사적 시간에는 죽음이 거주할 공간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점으로 변해버린 사회는 더 이상 죽음을 받아들일 공간을 그 안에 지니고 있지 않다. 죽음을 갈무리하지 못하면 사회는 무너진다. 그렇다고 신화적 시간과 역사적 시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다. “그리하여 점-시간은 비어 있는 간극을 제거하거나 단축하고자 하는 강박을 낳는다.” 강박은 가속화의 히스테리로 나타난다. 현대인은 조급하다. 점과 점을 연결하는 계기가 없으니 이미지를 다른 이미지로, 순간을 다른 순간으로 대체해야 하기 때문이다. 순간에서 순간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기다릴 줄 모른다. 기다릴 줄 모르는 사람이 인내심이 있을 리 없다. 신화적 시간과 역사적 시간이 중시되는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과거와 미래를 기다릴 줄 알았다. 끈질기게 기다리는 사람만이 혁명의 과실을 맛볼 수 있었다.

 

순간에서 순간으로 시간을 사는 사람들은 숱한 순간들을 하나로 묶는 리듬을 찾아내지 못한다. 리듬은 중심 없는 중심을 타고 흐른다. 신화적 시간이라면 과거가 중심이 되고, 역사적 시간이라면 미래가 중심이 된다. 과거와 미래를 중심으로 시간은 리듬을 타며 원처럼 순환하거나, 직선처럼 앞으로 쪽 뻗는다. 하지만 점과 점으로 이어진 시간은 그 사이에 거대한 공허만 품고 있을 뿐, 점과 점을 하나로 잇는 중심으로부터 멀찌감치 벗어나 있다. 탈시간화. 지은이는 탈시간화는 모든 서사적 긴장을 소멸시킨다.”(55)라고 주장한다. 서사적 긴장은 시간 속에서 생성되는 수많은 사건들을 하나로 묶는 힘이다. 서사적 긴장을 잃은 사건들은 방향성을 잃은 시간처럼 여기저기로 폭주한다. 순간은 이미지로 나타났다가 곧바로 이미지로 사라진다. 이미지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지은이는 순간을 절대시하는 이러한 시간관이 가속화를 낳는 실제 원인이라고 진단한다. 시간의 가속화가 순간을 절대화하는 게 아니라, 순간과 순간을 묶는 힘의 부재가 이리저리로 튀는 난비(亂飛)의 시대를 이끌었다는 것이다.

 

이미지가 어지러이 날아다니는 시대는 한곳에 머무르는 마음을 불가능하게 한다. 자본주의만큼 머무름을 싫어하는 사회가 어디에 있을까? 자본주의는 무한 생산과 무한 소비를 매개로 이루어진다. 끊임없이 생산을 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소비를 독려한다. 생산하기 위해 소비하고, 소비하기 위해 생산한다. 생산과 소비가 맞물리는 톱니바퀴가 잠깐이라도 멈추면 자본주의 체제는 허망하게 무너져 내린다. 살아남기 위해 자본주의는 한곳에 머무르려는 사람들을 바깥으로 내몬다. 해마다 바뀌는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사람들이 유행을 만드는 게 아니라 자본이 유행을 만든다. 물건의 생산주기가 빨라질수록 교체주기도 빨라진다. 자본주의의 꽃이 왜 광고겠는가? 광고는 소비를 조장한다. 소비를 해야만 품위가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광고는 강조한다. 이미지가 사람을 대체하는 시대에 한곳에 머물러 진득이 사유하는 정신은 참으로 구시대적이다.

 

전반적으로 삶의 과정이 가속화되면서 인간은 사색적 능력을 상실한다. 그리하여 오직 사색적인 머무름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것들은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영역에 갇히고 만다. 그러나 가속화가 먼저 발생하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사색적 삶의 상실이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가속화와 사색적 삶의 상실 사이의 관계는 더 복잡하다. 사색적으로 머물러 있지 못하는 무능력이 어떤 원심력을 발생시켜, 이로부터 전반적인 조급증과 산만성이 초래될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삶의 과정이 가속화된 것도, 사색적 능력이 없어진 것도, 사물이 스스로 존재하며 그렇게 존재하는 가운데 영원히 머물러 있을 거라는 믿음을 실종시킨 역사적 구도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세계의 전반적인 탈소여화는 사물에서 고유의 광채를, 고유의 무게를 모조리 빼앗고 그것을 제작 가능한 대상으로 격하시킨다. 사물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 만들 수 있고 제작할 수 있는 대상이 된 것이다. 소여성이 물러나고 제작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다. 존재는 소여성을 상실하고 과정으로 전락한다. (114~115)

 

지은이는 활동적 삶과 사색적 삶을 구분한다. 활동적 삶은 노동에 얽매인 삶이다. 노동에 얽매여 바깥을 사유하지 않는 삶이라고 풀이하면 좋겠다. 사색적 삶은 자기를 들여다보는 삶으로 정리할 수 있다. 자기를 들여다보는 삶은 자기를 중심에 세우는 삶이 아니다. 자기를 내려놓고 사물과 하나가 되는 상태를 사색적 삶은 지향한다. 사색적 삶은 그래서 관조적(觀照的) 삶으로도 불린다. ‘관조는 사물을 맑은 거울에 비추듯이 보는 것이다. 사물을 보는 사람은 사물을 해석하지 않는다. 해석은 사물의 의미를 강제로 빼앗는 행위이다. 인간은 이성을 무기로 사물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한다. 사물 고유의 본성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인간의 의미가 채워진다. 지금 우리가 보는 사물은 인간화된 사물이 된다는 말이다. 지은이는 사물이 처한 이 상황을 소여성이 물러나고 제작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다.”는 말로 풀이한다. ‘제작은 사물을 (인식)주체 앞에 세우는 작업을 가리킨다. 인간이성의 능동성이 사물을 장악하는 순간, 사물은 본성을 잃고 인간을 위한 대상으로 전락한다.

 

제작하는 인간은 끊임없이 사물을 대상화한다. 사물은 인간과 대등한 존재가 아니라 자본 증식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이익이 되면 사물은 가치를 인정받지만, 이익이 안 되면 사물은 가차 없이 폐기된다. 생명마저도 인공물로 만들어질 수 있는 시대가 아닌가. 자본은 지금 생명의 영역마저도 도구적 이성으로 침범하고 있다. 도구적 이성은 사색적인 머무름을 모른다. 도구적 이성은 오로지 자본의 입장에서 이익을 따진다. 조류독감에 걸린 동물들을 주저 없이 살처분하는 인간들을 생각해 보라. 하이데거에 의지해서 지은이는 노동의 시간과는 다른 길고 느린 것의 시간, 머무름을 가능하게 만드는 시간(126)을 상상한다. 사색적 시선은 사물의 본성을 폭력적으로 재단하지 않는다. 지은이는 사물의 본성을 지켜주는 이 시선을 친철의 실천(126)이라고 풀어낸다. ‘친절은 사물을 사물로서 인정하는 마음이다.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이 친절이 살아나야 시간의 향기가 피어날 수 있다고 지은이가 무엇보다 강조한다.

 

진정한 의미의 사유는 도구적 이성과는 완전히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도구적 이성은 인간이성을 중심에 세우고 자연을 주변에 배치한다. 인간이성이 자연을 지배하는 정복자가 되는 것이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격이라고나 할까. 사색적인 삶은 도구적 이성이 만들어내는 삶과 다른 장소를 지향한다. 사색적인 삶을 사는 존재는 자기를 중심에 세우지 않는다. 지은이는 일하는 동물은 생각할 줄 모른다. 진정한 사유, 즉 숙고하는 사유에는 노동이 아닌 무언가가 꼭 필요하다.”(174)고 이야기한다. 숙고하는 사람이 나아가는 행로는 예측할 수 없고 불연속적인 길로 이어져 있다. 그렇다고 이 사람이 가는 길을 중력을 잃은 시간의 이미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중심을 내려놓은 존재는 다른 존재와 더불어 대화할 수 있는 길을 열어젖힌다. ‘일하는 동물이 자기에 갇혀 타자와 담을 쌓고 지낸다면, 숙고하는 사람은 자기를 열어 타자와 하나가 되는 길을 모색한다.

 

지은이는 니체의 다음과 같은 인용하며 이 책을 맺고 있다. 우리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 상태로 치닫고 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는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관조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것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인간 교정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182) 부산한 자와 평온한 자의 차이는 무엇일까? 부산한 자는 중심에 세운 자기를 펼치기 위해 부지런히 몸을 놀린다. 그는 한 곳에 머물러 진득이 기다릴 줄 모른다. 남들보다 더 빨리 목적지에 닿기 위해 끊임없이 달리고 또 달린다. 마음이 평온한 사람은 자기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는 맑은 거울로 사물을 그저 비출 뿐이다. 부산한 자가 능동적으로 보인다면, 평온한 자는 수동적으로 보인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람을 중시한다. 자기를 조용하게 관조하는 사람을 지극히 싫어한다. 니체는 이 상황을 새로운 야만 상태라는 말로 표현한다. 니체가 산 시대보다 더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사색적 삶이 그래서 더욱 더 필요한 요즘이다.

 

 

 

o*****s 2019.05.18. 신고 공감 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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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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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에 이어서 두 번째로 접한 한병철 교수님의 책이다.역시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이지만 들어있는 내용은 만만치 않다.한 줄 한 줄 곱씹으며 천천히 읽어내려간 바를 정리해 보자면삶의 과정이 가속화되면서인간은 사색적 능력을 상실하고 있으며예술은 서사적 호흡을 잃어버렸고세상은 점차 가쁜 호흡 속에 빠져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그래서 이처럼 '궁핍한 시간'은 향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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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에 이어서 두 번째로 접한 한병철 교수님의 책이다.

역시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이지만 들어있는 내용은 만만치 않다.

한 줄 한 줄 곱씹으며 천천히 읽어내려간 바를 정리해 보자면

삶의 과정이 가속화되면서

인간은 사색적 능력을 상실하고 있으며

예술은 서사적 호흡을 잃어버렸고

세상은 점차 가쁜 호흡 속에 빠져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처럼 '궁핍한 시간'은 향기가 없는 시간이라는 것.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느끼고 있는 당연한 사실이지만

이렇게 공들여 학술적으로 정리해 놓은 것을 읽고 나니 왠지 더 무거운 상실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니체의 말처럼 우린 '활동하는 자 혹은 부산한 자가 높이 평가받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한 템포 쉬어간다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도 않고

어렵사리 쉬고 있을 때도 뭔가 불안하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그래서 저자가 제시하는 해결책인 '사색하는 시간'의 생성은 더욱 더 요원하게 느껴진다.

'떡갈나무의 냄새'라는 소제목 하에 쓰여진 페터 한트케의 질문을 나도 해 보고 싶다.

 

"왜 사람들은 한 번도 느림의 신을 생각해내지 않았을까?"

 

 

 

 

 

YES마니아 : 로얄 b******l 2019.05.20. 신고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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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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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의 짧은(?) 철학 시리즈(?) 완비를 위해 구매. 절대 쉽게 이해되는 철학자라고 평할 수는 없겠지만 현대사회를 선명하게 드려다 볼 수 있는 강력한 도구를 쥐어주는 작가임에는 변함이 없다. 전작 (또는 후작)들에 비해 좀 더 어렵게 다가오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의 우리 자신을 이 책을 통해 돌아보기에는 충분하다. 작가가 전해주는 도구가 너무나 강력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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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의 짧은(?) 철학 시리즈(?) 완비를 위해 구매. 절대 쉽게 이해되는 철학자라고 평할 수는 없겠지만 현대사회를 선명하게 드려다 볼 수 있는 강력한 도구를 쥐어주는 작가임에는 변함이 없다. 전작 (또는 후작)들에 비해 좀 더 어렵게 다가오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의 우리 자신을 이 책을 통해 돌아보기에는 충분하다. 작가가 전해주는 도구가 너무나 강력하기에.
YES마니아 : 플래티넘 n******8 2024.04.15.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