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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교수의 [미국사 산책]을 읽던 도중 미국의 19세기 문학이 유럽의 아류라는 타이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부단히 애를 썼다는 사실을 접하였기에 [D.H. 로렌스의 미국 고전문학 강의]에 대한 나의 관심은 자연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이 책의 저자인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가 영국 소설가라는 점과 1922년부터 1925년까지 미국에 거주하였다는 점은 미국 고전문학을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점에 흥미를 갖게 된다. 또한 자칫하면 방대한 주제에 대한 장황한 설명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사실이 저어되는 상황에서 페니모어 쿠퍼라든지 너대니얼 호손, 허먼 멜빌과 같은 미국의 고전문학 작가들의 작품을 통하여 강의를 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물론 로렌스의 의견이 미국의 고전문학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다양한 관점으로의 접근이 필요한 분야이기에 이 책도 일정 부분 그러한 관점의 다양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미국이 세계 패권을 장악하면서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지만, 그들의 역사가 영국의 식민지로 출발하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미국의 기원이 유럽이라는 사실은 미국에게 자긍심이 될 수 있고, 또한 유럽의 복사판이라는 콤플렉스로 작용할 수 있다. 19세기 미국의 문학은 그러한 콤플렉스를 벗어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을 하였으나, 부유 계층은 유럽의 귀족과의 결혼을 통하여 명예를 추구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여준다. 헨리 제임스의 [아메리칸]은 바로 그러한 미국과 유럽에 대한 비교를 소재로 하고 있을 정도이니 당시의 시대에 대한 미국의 고민은 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의 고전문학은 스스로 그러한 콤플렉스에서 벗어났다고 자평할 수 있겠지만, 이 책을 통하여 보여지는 로렌스의 시각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강의라는 제목이 무색할 정도로 다소 논쟁적이면서 글 자체에 패러디와 풍자가 가득하기 때문에 그러한 부분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아마 이 책에 대한 평은 다양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힘든 육체노동을 이상화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이상주의자가 이전 상태로 다시 돌아간다면 모를까, 이상주의자로서 힘든 육체노동을 이상화할 수는 없다. - p. 209 - 미국은 혈연의 고국이 아니다. 모든 미국인에게 혈연의 고국은 유럽이다. 미국은 정신적 고국일 뿐이다. - p. 211 - 데이나의 <2년간의 선원 생활>이라는 작품을 소재로 한 로렌스의 강의 초반에 등장하는 이 문구는 짧지만, 상당히 강렬하다. 미국의 고민을 콕콕 찌르면서 그들이 그러한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한 '초절주의(Transcendentalism)'에 대한 설명을 이끌어 내면서 동시에 그 사상이 등장할 수 밖에 없는 원인을 로렌스는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생물학적 기원은 유럽이지만, 그에 종속되지 않기 위한 미국의 고민을 고국의 개념과 더불어 육체노동으로 설명하고 있으니 말이다. 더구나 데이나의 <2년간의 선원 생활>이 바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작품으로서는 공간적 배경으로만 이해할 수 있지만, 로렌스는 데이나가 바다를 배경으로 한 이유가 바로 초절(초월)주의에 따른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을 바다로 표현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로렌스는 미국의 유럽을 극복하려는 시도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아니, 스스로 그러한 콤플렉스를 극복하였다는 미국의 주장에 대하여 일침을 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 책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내용이 벤저민 프랭클린이라는 점도 애초에 그러한 분위기를 담아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벤저민 프랭클린이 누구인가? 미국의 독립과 관련하여 정치가로 활약하였으며, 사상과 발명과 같이 다방면에서 활약한 인물로서 오늘날 미국의 존경을 받고 있는 건국에 크게 이바지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미국의 고전문학과 관련하여 무슨 관련이 있어서 로렌스는 그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 프랭클린은 미국이 독립하면서 그들의 정체성에 대한 논란이 일 것을 생각하여 스스로 영혼의 울타리를 친 인물이라 로렌스는 말하고 있다. 그의 신앙에 대한 13가지 금언이 미국을 특별한 존재로 만들기 위한 것임을 지적하면서 그러한 금언에 대한 비꼬기를 통하여 미국의 고전문학에 앞서 사상 또는 종교적으로 미국의 차별화를 시도한 프랭클린에 대하여 로렌스는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의 시선은 [윌든]으로 유명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던 크레브쾨르에로 옮겨진다. 시기적으로 소로보다 훨씬 이전의 인물인 크레브쾨르는 미국의 독립이 이루어지던 시기에 활동한 프랑스 출신의 미국인이다. 그가 쓴 [한 미국 농부의 편지들]은 개척하는 과정에서의 목가적인 분위기와 더불어 인디언에 대한 시선을 담아내고 있는 작품으로서 유럽에 큰 반향을 불어일으켰다. 즉, 유럽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미국 초기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렌스는 그 작품의 이면에 가려진 크레브쾨르의 이중적인 모습, 즉, 말년에는 결국 프랑스로 와서 유유자적하였다는 점과 더불어 그의 가족들이 그러한 개척지에서 고생을 하였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러한 부분은 [모히칸족의 최후]의 저자인 페니모어 쿠퍼의 글에 대하여 그대로 이어진다. 우리에게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 주연의 [라스트 모히칸]이라는 영화로 잘 알려져 있는데, 호크아이라는 백인이 인디언과의 우정과 화합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미국의 현실과는 괴리감이 있음을 통하여 그 허상을 지적한다. 이 작품을 포함한 쿠퍼의 [레더스타킹 시리즈]가 자연과 문명이라든지 정착지와 숲, 그리고, 백인과 원주민의 모습을 자칫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지만, 현실을 기만한 것으로 평하면서 동시에 미국식 반달리즘과 민주주의에 대한 로렌스의 불편한 심기를 엿볼 수 있게 된다.
19세기 미국 고전문학의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는 포우와 호손의 작품을 통한 강의는 당시 미국의 사회적 상황과 더불어 영혼 내지는 정신적인 측면에 대한 부분이라서 흥미롭다. 포의 작품 [리지아]와 [베레니스]는 사랑에 대한 감각과 의식 흐름에 대한 강렬한 집착을 통하여 그의 작품들이 전반적으로 이성을 잃은 영혼을 소재로 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물론 그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그러한 그의 영혼과 의식은 길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그것이 호손의 [주홍글자]와 같이 사회적인 분위기로 표방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주홍글자]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하여 사랑과 증오에 대한 상호보완적인 모습은 포우의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영혼적인 부분을 체화하였다는 느낌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부분들이 그나마 미국의 유럽에 대한 콤플렉스를 벗어나기 위한 구체적인 부분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러한 흐름은 초반의 로렌스의 미국 고전문학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 물론 그 시선은 미국 고전문학 작품들에 대한 그의 품평회가 아닌 유럽에 대한 미국의 콤플렉스를 떨쳐냈다고 자평하는 미국에 대한 부벙적인 시선이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그러한 시선에 대하여 변화가 나타남을 느낄 수 있게 된다. 포우와 호손에서 그 시작을 보았다면 개인적으로는 그나마 잘 알고 있던 작품인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통하여 로렌스의 의도를 엿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반가울 따름이다. 피쿼드 호, 한 미국인의 영혼의 배, 이 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미국 성조기 아래에 모인 많은 인종들, 많은 민족들, 많은 국가들. 여러 줄무늬들에 패배를 당한. 때로는 눈앞이 캄캄해진다. - p. 281 - 그렇다면 모비딕은 무엇인가? 모비 딕은 백인 종족의 가장 깊은 피의 존재다. 모비 딕은 우리의 가장 깊은 피의 본성이다. - p. 300 - 다양한 인종들로 구성된 피쿼드 호의 선원들을 보면서 이내 피쿼드 호가 미국을 상징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면, 그러한 피쿼드 호가 가장 깊은 피의 본성을 상징하는 모비 딕을 쫓는 이 작품은 그동안 미국 작가들의 무의식에 잠재해 있던 유럽에 대한 것과는 어느 정도 차별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특히, 앞서 언급한 초절주의에 따른 다른 세계에 대한 갈망의 대상인 바다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말이다.
[D.H. 로렌스의 미국 고전문학 강의]는 제목처럼 작품을 통한 문학에 대한 비평이 아니라 미국 문화에 대한 비평으로 다가가야 할 것이다. 책 속에서 미국의 고전문학 작가와 작품들이 꽤 언급되지만, 작품 자체에 대한 평이 아니라 그 작품을 통한 당시 사회나 문화에 대한 로렌스의 생각이 펼쳐지고 있으니 말이다. 책의 초반부에 로렌스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이상주의 국가를 건설하려는 것이 목표라는 그들의 생각에 대하여 유럽으로의 도피라고 언급하고 있기에 전반적으로 미국 고전문학에 대한 그의 평은 꽤 박한 편이다. 그러한 콤플렉스가 미국 작가들의 의식과 무의식에 작용하면서 오히려 우(愚)를 범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그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인하여 유럽과 차별적인 휘트먼의 영혼에 대한 생각을 언급하면서 어느 정도 희망적인 메세지를 전하고 있지만 말이다. 약 100여년 전에 쓰여진 이 책을 통하여 이 시점에서는 과연 미국의 문학에 대하여 로렌스의 생각이 맞는 것인지를 생각해보는 것도 이 책을 활용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지만, 나 역시 미국의 그러한 고뇌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아래의 문구가 책을 다 읽고 난 이후에도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는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고, 멜빌도 돌아갈 수 없었다. 비록 그는 자신이 아는 문명화된 인간들을 증오했지만, 멜빌은 야만인들에게 되돌아갈 수 없었다. 그는 돌아가고 싶었고, 돌아가려고 시도했지만, 돌아갈 수 없었다. - p. 257 中에서 -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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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스는 어떤 시선으로 미국 고전문학을 보고 있을까?, 미국 고전문학은 어떨까?' 라는 호기심으로 이 책을 펼쳤다. 문학작품을 미국 문학, 영국문학, 러시아 문학등으로 분류하면서 보지 않았고, 문학에 기본적인 지식도 없던 차에 이 책은 어려웠다. 하지만 초반부터 시작되는 로렌스의 미국문학에 대한 유쾌하지 않은 시선은 '이것은 뭐지?' 라는 궁금증을 불러왔고, 다소 생소한 작가(패니모어 쿠퍼, 호손, 헥터 세인트 존 드 크레브쾨르)의 작품평은 많은 질문을 가지고 왔다. 로렌스는 미국이 무척이나 궁금하였던것 같다.
진정한 미국적인 것이라 불리는 이 새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에게 새로운 시대의 난쟁이를 보여 달라. 어서, 비밀을 보여주시오. 이유는, 미국에서 유럽인의 육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일종의 비겁한 유럽적인 것이기 때문인다. 우리는 다음 시대의 이 읽어버린 고리를 보고 싶다.(p.8, 서문) 새로운 목소리를 듣는 것은 모르는 언어를 분명하게 듣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그냥 듣지를 않는다. 미국 고전문학에는 새로운 목소리가 존재한다.(p.14, 삶의 터전으로서의 미국의 영혼) 다음은 로렌스가 고른 10명의 작가이다. 벤저민은 18세기에 그런 사람을 위해 신을 창조했다. 신은 성공하고 생산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최고의 종이다. 신의 섭리, 신은 공급자, 천상의 가게 주인. 영원한 워너메이커. 그리고 이것이 청교도 조상들의 손자들이 남겨 놓은 모든 신이다.(p.31, 벤저민 프랭클린) 벤저민 프랭클린은 미국인들의 진정한 현실적 원형이다. 크레이브쾨르는 정서적 원형이다.(p.55) 프랑스인 크레브쾨르는 소로와 에머슨이 자연을 탐구하기 오래전에 먼저 자연을 포착했다. 정서적 반응을 회복할 수 있게 해주는 가장 안전한 대상이 자연이라는 것은 절대적이다.(p.55, 헥터 세인드 존 드 크레브쾨르) 살아 있는 백인과 인디언 사이에서, 화해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 점은 우리의 영혼 속에 오직 속죄, 그 다음에는 화해만을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일종의 이상한 보상이다. 속죄와 그에 따른 하나가 되는 것. 페니모어 쿠퍼는 그 어느 작가들보다도 인디언을 백인들에게 많이 소개했다. 그러나 쿠퍼의 소개는실로 소망 충족일 뿐이다. 바로 그 점이 쿠퍼가 크게 성공을 거둔 이유다.(p.80, 페니모어 쿠퍼)
포는 예술가라기보다는 과학자다. 그는, 과학자가 실험 도가니 속에서 소금을 원소의 형태로 환원하듯이, 자기 자신의 자아를 환원한다. 그것은 영혼과 의식의 화학적인 분석이나 마찬가지다. 반면에 참된 예술에는 항상 창조와 파괴의 이중적 리듬이 있다. 이것이 포가 자기 작품들을 '이야기(tales)'라고 부르는 이유다. 포의 작품들은 원인과 결과의 연속이다.(p.128, 에드거 앨런 포) 호손의 소설은 어쩌면 펜으로 쓴 작품 중에서 가장 웅장한 풍자적 작품일 것이다. "주홍글자". 너대니얼이라고 하는, 푸른 눈을 하고 인기도 많았던 어린아이 같았던 남자가 쓴. 그러나 범포는 아니다. 거짓말에 꽉 묵여버린, 거짓말에 들러 붙은, 그리고 스스로 영원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그런 인간의 정신. 모든 것은 A로 시작한다. 간부, 알파, 아벨, 아담.A.미국."주홍글자"(p.168) 호손의 다른 어느 작품도 "주홍글자"만큼 깊고 이중적이고 완전하지 않다. 이 작품은 죄의 승리를 그린 위대하 알레고리다. 죄란 기묘한 것이다. 신성한 계율의 파기가 아니다. 인간 자신의 온전함의 파기다.(p.191, 너데니얼 호손과 "주홍글자") 데이나가 그의 위대함을 성취한 것은 바로 구체적 사실들을 꾸밈없이 감정에 좌우되지 않고 진술한 데에 있다. 데이타는 열정적인 정서적 자아의 관점이 아니라 존재의 조금 더 냉정한 비정서적 초점의 관정에서 글을 쓴다.(p.216) 데이나의 이 조그만 책은 위대한 책이다. 이 책은 대단히 극단적인 상황에 관한 지식을, 위대한 자연에 관한 지식을 담고 있다. 결국 안다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기까지는 우리는 모든 것을 알아야만 한다. 상상력을 통해서 우리는 모든 것을 알아야만 한다. 심지어 광포한 바다조차도. 지식이 갑자기 쪼그라들고 우리가 영원히 모른다는 것을 알 때까지 계속해서 알고 또 알려고 하라. 그러면 일종의 평화가 존재하리라, 그리고 우리는,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 다시 시작할 수 있으리라.(p.241, 데이나의 "2년간의 선원 생활") 이 세상에서 가장 기묘하고 가장 경이로운 책 중 하나가 그 신비와 곡해 받는 상징주의를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끝이 난다. 이 소설은 그 누구도 필적할 수 없는 바다의 서사시다. 그리고 이 소설은 심오한 의미의 난해한 비교적 상징주의를 담고 있는 책이고, 동시에 상당히 따분한 책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위대한 책, 대단히 위대한 책이고, 지금껏 쓰인 소설 중 가장 위대한 해양소설이다. 이 소설은 영혼 속에 경외감을 불러 일으킨다. 무서운 숙명. 숙명. 파멸.(p.299, 하머 멜빌의 "모비 딕") 나는 내 운명의 주인, 나는 내 운명의 선장. 휘트먼의 근본적 메시지는 탁 트인 길이었다. 영혼을 독자적으로 자유롭게 놔두는 것, 운명을 영혼과 탁 트인 길이라고 하는 베틀에게 맡기는 것. 이것들은 인간이 일찍이 인간에게 제안했던 교리 중에서 가장 용감한 교리다.(p.326, 휘트먼)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자음과모음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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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를 읽어야 겠다고 생각하던 시점에서 <미국 고전문학 강의>를 읽을 기회가 생겼다.책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 보르헤스가 골라 놓은 포의 단편집<도둑맞은 편지>를 먼저 읽었다.그런데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재미나게 읽혀서 <미국 고전문학 강의>를 읽게 되면 가장 먼저 포에 관한 강의부터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고전문학을 접하면서도 미국 고전문학 쪽으로는 시선이 잘 가지가 않았다.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 존스타인벡의 작품을 읽어 가면서 고전이라 불리는 작품은 시대와 나라를 불문하고 재미있다는 싱거운 결론을...로렌스가 소개한 작가는 8명 그 가운데서 페니모어쿠퍼와 너대니얼 호손 그리고 허먼 멜빌은 작가와 작품을 조금더 많이 소개하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페니모어의 작품은 한 작품도 읽지 않았고,호손의 <주홍 글자>도 읽지 않았다는 점이다.무튼 가장 먼저 에드거 앨런 포와 만나 보았다.소개된 작품은 한 작품도 읽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재미나게 읽을수 있었던 건 포의 소설를 관통하는 코드'공포'와 섬뜩함'은 <도둑맞은 편지> 속에 수록된 다섯편에서 모두 느낄수 있었다는 점일게다.오히려 왜 '공포'에 집착했을까에 대한 물음으로 읽을수 있었고 로렌스 강의로 명쾌한 답을 찾게 되었다.비록 로렌스의 주관적인 시선이라 해도 말이다.다음으로 만난 작가는 허먼 멜빌.<필경사바틀비>를 재미나게 읽었다고 생각했는데,리뷰로 남겨 놓질 못했다.해서 부랴부랴 보르헤스가 골라놓은 단편집<필경사 바틀비>를 읽게 되었는데,로렌스의 강연목록에도 역시 '필경사바틀비'는 없었다.다행이라면 포의 강연에서도 그랬지만 읽지 않은 소설에 관한 이야기기만 필경사바틀비를 읽으면서 느꼈던 감정을 로렌스가 소개한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말해주고 있어 고마웠다.아니 오히려 마음으로는 이해하면서도 왜?라는 물음표가 따랐던 바틀비의 모습에 관한 명쾌한 설명을 받은 기분이 들정도였다.멜빌의 생각에는 인간을 받아들일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했다.이유는 삶을 증오한 동시에 연옥과 낙원에 집착했다는 점인데,이것이 멜빌의 사생활에서 비롯된 해석일지라도 소설을 읽다보면 로렌스의 이와 같은 설명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따라 장을 마련했던 <모비딕>에서 광기의 단어를 만나게 되었을 때는 그저 반가웠다고 밖에는..바다에 관한 묘사에 대한 감동에 대해서도 그렇고.다음으로 만나게 된 너새니얼 호손.<주홍 글자>는 읽었다고 생각했고,<큰바위 얼굴>은 호손의 작품인줄 몰랐다. <일곱 박공의 집>은 왠지 재미가 없을것 같아 외면했었는데...이번 <미국 고전문학 강의>를 읽으면서 가장 큰 수확이라면 너새니얼 호손의 진가를 이제라도 알게 되었다는 점일게다.보르헤스 시리즈<큰바위 얼굴>편에 수록된 다섯편의 단편을 읽으면서 그의 매력에 빠지고 말았다.물론 로렌스 강의 목록엔 내가 읽은 단편은 수록되어 있지 않다.그럼에도 '믿음'과 '파멸'이란 코드가 눈으로 확 들어왔다. 단편 '웨이크 필드'와 '목사의 검은 베일'에서 이미 만났기 때문에.해서<주홍 글자>와 <일곱 박공의 집>은 로렌스의 강의를 읽고 나면 바로 읽을생각이다.로렌스의 꼼꼼한 강의가 아니더라도,이미 호손의 글맛을 경험했기 때문에.데이나 이름도 작품도 가장 낯설었다.그래서일까 <2년간의 선원 생활>은 국내에 번역 조차 되지 않은 듯 하다.검색해도 나오질 않는다.읽지 못한 책이 많음에도,이렇게 번역이 되어 있지 않다는 걸 알고 나면 더 읽어 보고 싶어지는 마음..로렌스의 소개로 아쉬움을 대신해야만 했다.영화 패터슨을 보지 못했다면 여전히 몰랐을 시인 휘트먼.아는 만큼 보이는 것인지 영화 덕분에 휘트먼을 찾아 보았더니 창비에서 미국대표시선<가지 않은 길>에 휘트먼의 시가 수록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쉬운듯 어려운,평범한듯 비범해 보였던 시인으로 휘트먼을 기억한다.어쩌면 영화 속 이미지가 그렇게 상상하게 만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그러나 로렌스의 강의를 통해서도 휘트먼에 관한 길은 멀게만 느껴진다.
<미국 고전문학 강의>덕분에 포의 소설을 읽을 시간이 주어진 것도 고마웠지만 가장 큰 수확은 역시 너세니얼 호손이다.로렌스의 강연에 흠뻑빠져들어서만은 아니였다.단편집을 읽고 나면 그의 장편<주홍 글자>가 읽고 싶어질 수 밖에 없을 것 같다.<책은 도끼다>를 읽을 때도 그랬지만,로렌스 역시 이 책을 왜 읽어야 하는가에 관한 강조는 없다.물론 스스로 감동한 이유를 나열하긴 하지만.오히려 소개된 책을 읽지 않았다면 공감하기 힘들어 질 수 있을 지점이 있을 정도로 날것 같은 느낌도 있다.다행(?)이라면 미리 읽은 작가들 작품에서 느꼈던 코드와 다른 작품에서도 그와 같은 코드가 있어 다른 작품도 마저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그러면서 왜 영국문학이 아닌 미국고전문학에 관한 강연을 하고 싶었던 걸까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역자의 설명이 반가웠다."로렌스가 이처첨 미국 고전문학에 관심을 크게 기울인 이유는 흔히 '신세계'로 표현되는 미국 문학 자체에 대한 관심과 함께 그 출발부터 구세계인 유럽에 대해서 비판적 거리를 두고 싶었던 미국의 문학작품들이 유럽을 사상적 차원에서 진정으로 극복했는지 점검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로렌슨ㄴ 자신의 문학적 사상이 다른 나라의 문학작품들보다 미국 고전문학에서 더 잘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다"/336쪽 로렌스의 깊은 시선을 따라가며 읽었다고 말할 자신은 없다.그럼에도 재미나게 읽을수 있었던 건 소개된 작품과 내가 읽은 작품 속에서 닮은 공통점이 있었다는 것,또 왜 그랬을까에 대한 물음에 작은 답을 찾아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 리뷰는 예스24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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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H 로렌스의
그래서 읽다가 너무 궁금해서
예스24 리뷰어스클럽에서 해당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후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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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거 앨런 포, 너대니얼 호손, 허먼 멜빌, 월트 휘트먼 등 익히 한 번쯤은 들어봤음직한 이름들이다. 그렇다. 19세기를 대표하는 미국 작가들의 이름이다. 널리 알려진 그들의 작품을 얘기하자면 이렇다. <어셔가의 몰락>, <주홍글씨>, <모비딕> , <풀잎>. 딱히 문학 작품을 좋아하지 않은 이들이라 할지라도 읽어본 적이 있는 작품들일 것이다. 그만큼 그들의 작품은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여전히 새롭게 번역 출판되어 나오고 있으며 때로는 영화나 다른 예술 작품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 고전문학 작품을 말하자면 끝이 없다. 하지만 그중에서 정작 우리가 알고 있는 작품은 얼마나 될까. 그리 많지는 않을 듯하다. 그 분야가 워낙 방대한 이유도 하나의 이유겠지만 고전이라는 이름하에 어렵게 느껴지는 것 또한 그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 책은 어쩌면 우리가 그동안 미국 고전문학에 접근하기 어려웠던 점을 다소 해결해주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 책은 흔히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잘못 알려진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쓴 영국 작가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가 앞서 얘기한 작가들의 작품을 읽고 논평한 내용을 담고 있다. 20세기 초 영국을 대표하는 젊은 작가 로렌스의 시선으로 바라본 미국 고전문학의 허와 실이라고 해야 될까. 해당 작품들 속에 녹아있는 미국인의 영혼과 삶 그리고 역사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있다. 로렌스는 이 책을 통해서 작가다운 면모를 그지없이 보여준다. 난해할 정도의 비유와 은유가 함축되어 있으며 때론 민망할 정도의 거칠고 날카로운 표현으로 작품을 비평한다. 과연 진정 이것이 문학 작품을 대하는 태도로써 적합할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는 동안 그의 말에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만큼 작품에 대한 이해가 깊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비평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역시 미국을 대표하는 대작가의 면모는 누구나 알아보는 법이다. 특히, 허먼 멜빌의 <모비딕>에 대한 논평을 읽다 보면 그가 얼마나 멜빌의 작품에 빠져있는지 알 수 있다. 최고의 해양문학이라고 일컬어지는 그 작품에서 로렌스는 고래와 포경선 선원들 간의 싸움, 보리새우가 고래에게 먹히는 장면 등을 묘사하는 멜빌의 섬세한 표현력을 아낌없이 칭찬하고 있다. 그 대목에서도 역시 고개를 저절로 끄덕일 수밖에 없다. 멜빌만큼 마치 나 자신이 바다에 있는 것처럼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쉽고 재미있다고 말하기는 조금 어려울 것 같다. 로렌스의 거칠 것 없는 비평이 낯설어 이해가 쉽지 않기도 하거니와 주의 깊게 읽지 않는다면 앞서 얘기한 내용들을 금세 잊어버려 도통 문맥의 흐름을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조금만 더 집중해서 읽는다면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읽으면서 느꼈던 로렌스 특유의 문체가 오히려 글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 것이다. 그로 인해 미국 고전문학을 이해하고 그간 몰랐던 새로운 즐거움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다시 한번 처음 언급했던 작품들을 찾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작품들에 대한 이해와 즐거움은 이 책을 읽기 전과 후로 나누어지지 않을까 싶다. 그 차이가 못 견디게 궁금해진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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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솔직히 생각만으로도 생각이 고전할게 뻔한 단어다. 나는 옛날에 고전 작품들이 정말 싫었다. 이것을 내가 왜 배워야 하는지 이유도 알지 못했고, 지금 이것을 배워 어디에다가 써먹어야 할지 또한 알지 못했다. 허생전, 최씨남정기, 구운몽, 광장 등등등. 현대 문학이든 고전문학이든 내가 이해하고 내가 왜 배워야 하는 것인지 언제나 몰랐다. 그런데 나를 이렇게 답답하게 만들었던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국어 선생님들이었다. 국어는 나에게 있어 가장 최악의 과목이었다. 재미도 없고 의미도 모르겠는 것들 나는 그냥 외울 수밖에 없었다. 문학의 재미를 그 선생님들이 나에게 조금이라도 알려줬으면 괜찮지 않을까 새삼 지금 하고 있다. 나이 30이 거의 다 되가서야 좋은 선생님을 만난 것 같다. 좋은 선생님이 가르치는 문학이 무엇인줄 알게 됐다. 비록 내 나라 문화를 모르는 사람, 아니 내 나라가 아닌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남의 나라 문화와 관련된 문학을 재미있게 읽는게 말이 되는지 솔직히 아이러니 할 정도다. 저자가 갖고있는 생각의 깊이를 나는 따라갈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따라갈 수 없는 만큼 나는 새로운 것을 봤다. 새로운 것을 경험했다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자의 박식함을 따라가면서 나는 문학이 외워야 하는게 아니라 재밌기 이런식으로 하나의 놀이로서 될 수도 있음을 알게 됐다. 30살이 거의 다 돼서야 진정으로 선생 같은 선생을 만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문학 비평이라는 장르 문학 비평. 그것은 엄처나게 피가 튀기는 싸움이라고 한다. 문학을 다루는 사람들은 서로간에 엄청나게 비평을 하면서 작품을 해설한다고 한다. 이 책을 쓴 사람 또한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옛날에는 작가를 그냥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 정도로 생각을 했는데, 그 사람들은 어쩌면 인류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차원의 것들을 상상하는 사람들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어떻게 이런 비판이 가능할까? 어떻게 이 정도까지 생각할 수 있을까? 이게 그렇게 이상해 보이나? 이런 질문들이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대게 그들이 갖고있는 상상력의 척도였다. 얼마나 상상하는 힘을 갖고있는지 그들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능력이 부러웠던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얺었던 일 같다. 나도 앞으로 작게나마 이런 책을 통해서라도 책 비평을 시도해보고 싶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 미국의 대표적인 작가와 문학에 대해서는 떠오르는 생각이 몇가지 있지만 그것을 말이나 글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생각만 많아질 뿐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는 '채털리 부인의 연인' 과 같은 소설로도 유명한 작가이지만 '미국 고전문학의 관찰자' 역할을 하는 영국 소설가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는 작가가 아닐까 싶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미국 작가들은 흘러가는 시대를 대표하는 이들, 프랭클린, 크레브쾨르, 쿠퍼, 포, 호손, 멜빌 등으로 문학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들로 유명한 작가들이지만 이 책에서는 단순히 그들의 작품에 대한 비평과 해석이 아닌 D.H 로렌스 본인이 생각하는 미국 문학, 더 나아가 미국 문화와 사회에 대한 생각이 펼쳐진다. 책의 구성은 작품을 단순히 해설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야말로 어떠한 형식도 없이 작품에 대한 그의 생각을 쏟아내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정말로 대학교 강의 시간에 교수님과 학생이 대담하는 듯한 형식으로 미국은 유럽을 어떻게 극복하려 하였고,작가들은 그들의 문학작품을 통해 그것을 어떻게 녹여냈는가에 대해 작가는 그야말로 자신의 생각을 이 책에 그대로 쏟아냈다. 사실 이 책은 미국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이거나 미국문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면 다소 어렵게 느낄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물론 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나 자신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강의라는 형식으로 이 책에서 논하고 있는 고전문학에 대한 시각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설명과 해석 위주의 강의라기 보다는 문제제기와 그에 따른 풍자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더더욱 어려워진다. 미국은 유럽과는 다른 나라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이 문학 작품에 그대로 녹아 있는지, 유럽이라는 역사적 부담을 극복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생각에 대한 로렌스의 해석을 듣고 느껴보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끝으로 이 책을 잠시 덮어두려 한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