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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신춘문예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로 등단한 작가의 산문집이다. 고양이를 향한 시인의 마음을 시를 통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책으로 더 자세하게 확인했다고 할 수 있겠다. 예뻐 보이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 나는 이제 이해한다.
세 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사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제각기 성격이 다르고 활동 성향도 먹성도 다 다른 세 고양이와의 동거. 두 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는 나로서는 80% 정도 그 상황들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닌가, 두 마리와 세 마리는 또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는 것일까. 모르겠지만, 모른대도 더불어 사는 마음만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테지, 이렇게 믿고 싶다.
작가인 시인은 함께 사는 고양이만 보살피는 게 아니다.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챙겨 주는 것도 집을 잃은 고양이를 아는 사람들에게 맡기는 일도 정성을 다한다. 이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더 대단해 보인다. 그러는 중에 고양이를 괴롭히거나 해를 끼치는 인간들의 행패에 대한 글을 읽고 있자니 더 읽어나갈 수가 없을 지경이다. 내가 괴로워서 못 읽겠다.
고양이와 함께 사는 이들에게는 마치 제 집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는 느낌을 줄 것 같다. 그집 고양이도 그런가요? 우리집 고양이도 그래요, 하면서. 아픈 고양이를 병원에 데리고 다니면서 치료해야 했다는 글을 읽으면서 애가 쓰였다. 우리집 두 녀석은 지금처럼 건강하게 자랐으면 바랄 도리밖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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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시인의 시집을 두어 권 읽었을 뿐, 다른 책들은 전혀 보지 않았다가 읽게 된 이책의 매력에 빠져서 한참을 고양이에 대한 사라졌던 열망을 다시 불타오르게 했다. 그동안 오랫동안 키웠던 강아지 우리 찌비와의 이별 때문에 동물을 키운다는 것, 무지개다리 건널 때까지 책임을 진다는 것의 묵직한 마음 때문에 되도록 이런 책임에 대한 나의 스스로의 마음가짐이 다시 들 때까지 키우지 않겠다며 접었던 고양이와의 동거에 대한 갈망과 꿈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말았다.
황인숙 작가의 집에 살고 있는 보꼬, 명랑이, 란아의 사진이 아닌 그림으로 이뤄진 그녀의 세 고양이의 동거 얘기가 어찌나 알콩달콩한지. 달달한 차 한 잔을 홀짝 마시면서 읽다가 차가 모자라 몇 번씩 더 우려낸 차를 마시고 또 마시며 다 읽는 책이 너무 아쉬워 몇 장은 남겨 놓고 잠이 들기도 했다. 그만큼 내게는 고양이가 너무 간절했다. 보드라운 털을 부비고 싶고, 말랑한 발바닥을 만지며 늘 호기심 많은 그 얼굴을 한참을 들여다보며 하루를 맞이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고양이가 없으니 남이 키우는 고양이 얘기에 이렇게 열망하며 들뜰 수밖에.
이용한 시인의 그동안 고양이 시리즈를 읽으며 왜 유독 사람들이 고양이에 대한 인식이 사납거나 인색할까 참 안타까웠다. 그래서인지 고양이에 대한 책은 강아지보다 훨씬 더 많은 것 같고, 고양이에 대한 탐닉은 더 늘어나는 것 같다. 유기된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에게 많은 반성 아닌 반성도 했다. 동물을 키운다는 것, 그 동물이 반려 동물로 되어 같이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일정 부분은 분명 포기해야 하는 일상이 있다.
오랫동안 키웠던 우리 집 개 찌비도 그랬다. 자율 급식이 안되는 녀석이라서 아침, 저녁을 따로 줘야 했다. 공복 기간이 길면 위액을 뿜어대는 녀석이라서 더욱더 자율 급식은 할 수 없고, 시간 맞춰 밥을 줘야 했다. 그래서 저녁에 항상 집에 누군가 있어야 했다. 간혹 어쩔 수 없이 저녁 늦게까지 못 들어오는 날이 생기면 밖에서 친구들과 술 먹던 동생은 집으로 차를 몰고 와 저녁밥을 주고 (그전에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환영 세레모니를 30분간해서 그것 다 받아주고 안 나갈 것이라고 안심 시켜주고) 밥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일행들과 만나는 이런 일을 가족이 모두 짜증내지 않고 했었다. 어떤 것을 얻기 위해 치러야 할 강철의 연금술사에 나오는 [등가교환의 법칙]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일까, 업둥이들을 가족으로 맞아 살고 있는 작가에게 구조를 기다리는 고양이를 보면 모두 찾아와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며 더 이상 들이지 못하는 업둥이들에 대해 안타까운 한숨이 절로 나오는 장면도 그냥 행복해 보이는 것은 그런 것까지 모두 행복으로 알고 살아가는 작가의 모습이 눈에 선하기만 하다. 어느 구석에서 울고 있는 고양이의 존재를 알리며 구조해 주기를 바라는 아래층 아주머니의 모습을 보며 제발, 나에게 오지 말라며 기도하는 모습이 왜 이렇게 귀엽게만 느껴질까.
가장 감동인 에피소드는 단연코 ‘열무’ 얘기였다. 자꾸만 생기는 업둥이들을 더 이상 보낼 곳이 없어 답답할 때 너무나 쉽게 고양이를 키우겠다며 받아준 친구. 하지만 역시 반려 동물과 함께 한다는 것은 많은 인내와 책임감이 있는 것이다. 열무가 너무 좋아서 열무라는 이름까지 지어줬지만 역시 그 친구분은 열무가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1년 정도 키웠지만 아무래도 고양이를 키울, 반려 동물을 맞이할 마음의 공간이 쉽게 오는 것이 아니다. 그 친구분의 마음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그래서 결국 열무를 다른 곳으로 보냈는데 열무가 그 친구와 헤어지고 난 후 계속 밥을 안 먹는다고 한다. 며칠째 밥을 먹지 않는 열무 때문에 다시 찾은 친구분이 준 사료를 먹고 떠난 주인을 다시 기다리며 금식에 들어간 열무 때문에 친구는 다시 열무를 키우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마치 맨날 술 마시고 두글겨 패도 절대 이혼 도장 안 찍어주는 마누라 같다는 말에 웃음이 난다. 고양이의 행복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떠오르게 한 이 부분에서 눈물이 사실 좀 왈칵 나왔다가 들어간 부분이다. 동물들은 자신이 왜 버려지는지 모르고 또 세상을 떠난 주인을 기다리는 개와 고양이들도 많다. 날로 늘어나는 유기 동물들이 안쓰럽고 처량하다.
“ 사랑이라는 게 감정 상태인지 영적 상태인지 헷갈리게 하는 그 행복감” P275
이라는 작가의 말에 오물거리는 잡은 입을 가진 노랑 고양이를 꿈꿔봤다. 내게 그 어던 상황에도 손잡은 그 순간을 후회하지 않고 감당 할 수 있을때 꼭 만나고 싶은 하얀 발을 떠 올려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