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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나라가 어수선하다. 당장이라도 전쟁이 일어날 것만 같고, 고위층은 고위층대로 또 지방 자치단체는 자치단체대로 불법이 난무하고 있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은 심각한 수준이고, 빈익빈부익부 현상도 갈수록 팽배해지고 있다.
그 끝이 어디로 흐를지 모르는 이때에 젊은이들은 과연 무얼 준비하고 있을까? 누군가는 청춘들에게 짱돌을 들어 던지라고 독촉하고, 또 누군가는 청춘들이 아프다며 다독이기에 바쁘다. 그런데 누가 이 살벌한 시대에 바리게이트 앞에 나서서 짱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누가 또 아픈 마음을 달래준다며 그 그늘 속에 숨죽이며 살 수 있겠는가?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자동차는 결국 벼랑 끝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젊은 청춘들조차도 그걸 의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학에서 4년간 배운 걸 써먹지도 못하는 세상인줄 알면서도, 침대에 누워 이 생각 저 생각에 잠을 설치고 있는 줄 알면서도, 한 발 잘못 내디디면 천 길 낭떠러지인 줄 알면서도 도무지 고민조차 하지 않는 청춘들이 너무 많다.
명문대에다, 토익고득점에다, 인턴과 봉사활동에다, 심지어 공모전 입상까지 갖춘 어느 대학 졸업생조차 수많은 기업의 면접 기회를 단 4곳 밖에 받지 못했다는 그 뼈아픈 현실 앞에서 누가 감히 살인적인 등록금을 내고 대학에 다닐 맛이 나겠는가? 대학졸업생들 가운데 95%가 비정규직에 내몰리고 있는 서글픈 현실 앞에서 요즘의 청춘들은 공부하는 커리큘럼을 새로 짜야 하는 게 아닐까?
이계삼의 〈청춘의 커리큘럼〉은 바로 그걸 고민하고 있는 책이다. 경남 밀양의 밀성고등학교에서 11년간 국어교사로 일했다던 그는 2011년 퇴직 후, 밀양의 송전탑반대대책위 일꾼으로도 일하며 지역 어르신들의 투쟁을 도왔다고 한다. 그와 같은 '가치 투쟁'에 뛰어든 것은 그것만이 지역이 행복할 수 있는 길임을 내다본 까닭일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그런 것들을 고민한다. 주류 언론과 지식인 사회가 외면하는 이 시대의 문제들, 이른바 석유 정점과 농업, 그리고 핵발전의 문제가 그것이다. 그를 위해 웬벨 베리, 도로시 데이, 하워드 진, 더글러스 러미스, E.F.슈마허, 그리고 다카기 진자부로와 같은 지식인들을 정성스레 소개하고 있다. 그들이 내다본 미래 속에서, 우리시대의 청춘들이 무얼생각하며 살아야 하는지 차근차근 되짚어 보고 있다.
"세탁기가 발명되어 주부들이 빨래할 시간에 책을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학교에 컴퓨터가 들어오면 교사는 서류를 작성하고 결재판을 들고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을 절약하여 수업 준비를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현실은 정반대가 되었다. 노동시간을 줄여줄 경이로운 기술적 장치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인간이 누리는 여가는 기계의 증가량과 복잡성에 오히려 반비례한다."(31쪽)
그야말로 21세기 최첨단을 달리는 시대임에도 현실은 더욱 힘들고 고달프다는 이야기다. 기계문명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삶에 여유가 깃들일 것으로 생각했지만 실은 그 반대라는 것이다. 그만큼 처리해야 할 일들이 쌓이고, 풀어야 할 문제는 더욱 많아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홈페이지 하나만 봐도 그렇고, 전산프로그램만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그걸 관리하는데 시간도 많이 들어가고, 악성 댓글이나 비방글로 인해 조직 자체의 분위기가 험상궂게 변할 때도 많다. 어디 그 뿐이랴? 전산프로그램에 '0'이라는 값을 하나나 두 개만 더 쳐도 엄청난 값을 가져오는 혼란을 초래한다. 그만큼 그에 따른 인력과 처리해야 할 문제가 더욱 산적히 쌓이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그런 일들이 많아도 즐거울 수 있는 것은 정규직으로 인한 일일 것이다. 만약 그것조차 비정규직으로 해야 하는 일이라면 〈직장의 신〉이라는 드라마에서 보듯이 얼마나 비참한 일일까? 정규직보다 한참이나 뒤쳐지는 월급은 물론이고 그에 뒤따르는 심적인 스트레스는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겠는가?
문제는 그 일이 오늘날의 청춘들이 맞이해야 할 현실이라는 점이다. 아무리 정치쟁점으로 반값등록금을 실현한다 해도, 중고생들에게 무상교육을 실시한다 해도, 대학평준화를 실현한다 해도, 그 뒤에 넘지 못할 장벽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대학졸업장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책에서 지적한 대로 그 졸업장은 사실상 '깡통계좌'나 다름없지 않을까?
"수소에 희망을 거는 이들이 있지만, 그것은 몽상이다. 수소로 만들어내는 에너지보다 수소를 분리해내는 데 드는 에너지가 더 많다. 저장도, 보관도, 이동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수소를 분리해내는 데 들어가는 거대한 에너지는 핵 발전이 없으면 감당할 수 없다. 결국 수소 경제는 핵산업의 위장술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풍력, 태양광, 수력 에너지는 훌륭한 대체 에너지이지만, 이 또한 화석 에너지와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다."(144쪽)
이른바 40년 뒤에 완전히 바닥이 나고 만다는 화석 에너지를 두고 하는 이야기다. 그걸 다 쓸 때까지 인류는 대체 에너지를 분명코 개발할 것이라고 낙관한다지만 그 역시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뿐이라고 한다. 마치 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대하듯 사람들이 대체 에너지를 내다본다지만, 그런 것들은 꿈꿀 수 없는 것들이라고 단정한다. 설령 그걸 개발한다고 해도 화학제품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들임을 역설한다.
그것이 오늘날의 청춘들이 준비해야 할 미래가 무엇언지 좀더 명확하게 조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른바 '거꾸로 가는 삶'이 그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옛날 소농과 같은 삶으로 되돌아가는 게 그것이다. 그만큼 불편과 불행해질 권리를 누리고, 그만큼 안락한 삶을 거부하는 정신적인 공동체를 세워가야 하는 게 그것이다. 한 줄로 줄 세우기 하는 식의 벼랑 끝 삶에서 완전 돌아서서 다양한 자립적 순환사회로 전환할 것을 주문한 게 그것이다.
한때 고등학교 3학년 담임을 맡은 그였기에 그랬을까? 그는 그 시절에 자기 반 학생들에게, 아픈 청춘들을 달래주듯, 그저 '견뎌보자, 대학 가면 달라지겠지'하는 위로를 남발했다고 한다. 물론 그렇게 위로하면서도 자기 속으로는 다 알고 있었다고 한다. 녀석들이 대학에 간다 해도 장밋빛 미래가 펼쳐져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더 괴로운 것은 입시철이었다고 한다. 그때가 되면 고3 교무실은 지방 사립대학 교수들과 전문대 교수들로 장사진을 이룬다고 한다. 그 교수들은 고3 담임선생들에게 밥과 술을 사주고, 주유권과 온갖 생필품까지 안겨준다고 한다. 그 이유야 뻔하지 않을까? 고3학생들로 인해 자기 살 길을 찾고자 하는 것 말이다.
그 얼마나 비참한 일이며, 그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그걸 과연 모르는 요즘의 대학생들이, 또 고3학년 학생들이 있을까? 그들도 정확히는 아니더라도 어렴풋하게나마 이 살벌한 구조적인 세상을 모를리는 없을 것이다.
이계삼 선생은 지금의 88만원 세대가 그나마 경제생활을 해 나가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 그들이 고시공부나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고, 또 각자 스펙을 쌓을 수 있는 토대는 그들의 부모가 아직까지 정규직 직장을 갖고 있는 까닭이라고 한다.
문제는 10년 뒤에 허물어질 이 구조적인 시스템에 있다고 한다. 지금의 청춘들을 먹이고, 입히고, 오락과 여유를 부리도록 재정적인 지원을 하는 부모 세대가 은퇴한 뒤에는 더 비참한 사회를 맞이한다고 한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러니 그가 내다본 '가치 투쟁'의 사회, '다양한 자립적 순환의 사회'는 지금부터라도 공부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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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화, 커리큘럼, 또 하나의 통제 지금은 그런 말을 별로 쓰지 않지만 예전에 ‘의식화’ 하면 상당히 불온한 어떤 것을 가리킬 때 쓰였다.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에 따르면, 이미 민중들은 지배 이데올로기를 의식화하면서 사태를 직시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에서 행해졌다는 의식화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의식화를 넘어서는 재의식화의 과정이다. 파울로 프레이리는 은행저축식 교육에서 문제제기식 교육으로 이행할 것을 주장했다. 한때 대학은 무비판적으로 찌든 지배 이데올로기를 세척하면서 비판의식을 키우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장이었다. 그래서 학점이 선동열 방어률인 걸 농담 반 진담 반 자랑스러워하던 청춘들이다. 대략 12년간의 숨막히는 제도교육이 ‘이건 참 불온한 거야’라고 가르쳐주었던 많은 것을 다시 보아야 했다. 우리는 정말 열심히 공부하려고 했다. 하지만 신입생 때 선배들과 같이하던 세미나도 문제는 많았다. 일단 자신들도 충분히 공부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얕은 지식을 주입시키려 했다. 이래저래 세미나 하다가 선배들과 가끔 싸우기도 했다. 나중에 그리 열심히 보았던 변유(변증법적 유물론), 사유(사적 유물론) 관련 서적이 소비에트 고등학교 철학교과서를 베낀 것으로 그것조차 관변용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선배들은 정파적 입장에 따라 커리큘럼을 통제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소작농 아직도 있거든. 그러니까 한국 사회는 식민지반(半)자본주의 사회야”라며 이야기하던 선배들에게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는 금칙어였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 책의 저자 이계삼 선생은 교직을 그만두고 밀양 송전탑 싸움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예전에 그의 <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을 읽고 전율을 느꼈던 적이 있다. 나는 그의 글에서 예언자적 통찰을 엿본다. 성서의 구약에서 예언자는 지성인의 전형으로서(지배권력에 영혼을 팔아버린 기능주의적 어용 지식인이 아닌) 지배권력에 저항하고, 수많은 기득권 세력을 불편하게 하는 직설을 가감없이 날렸다. 이계삼 선생은 ‘파국을 눈앞에 둔 아니 어쩌면 이미 파국에 깊이 빠져 있는 시대를 어떻게 응시하고 살아갈 것인가’, ‘우리를 현혹하고 눈멀게 하면서 신처럼 군림하는 작금의 자본주의 시스템을 직시하자’는 통찰을 큰 줄기로 여러 현대의 예언자들의 삶을 자신의 커리큘럼으로 끌어온다. 지금은 생태주의 잡지의 제목이 된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저자 슈마허를 통해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삶의 변화이고, 우리들의 삶의 조건에 대한 작지만 구체적인 변화이며, 이를 가능케 할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16쪽)이라는 점을 이야기한다. 또 슈마허가 쓴 <당혹한 이들을 위한 안내서>를 통해 그가 참 그리스도인의 면모를 보여주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가 버마에 있을 때의 에피소드도 인상적이다. 버마 사람들은 아주 저렴한 가격의 마차를 이용하지 않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저렇게 야박한 대우를 받는 말 뒤에 앉아 염치없이 다니느니 차라리 걷겠어요.”(27쪽) 웬델 베리라는 미국의 농부이자 사상가를 통해 소농이 민주주의의 기반이며, 우리에게 산적한 문제를 풀어가는 데 그 답이 농업과 농민에 있음을 적시한다. “오늘날 일반적 통념이란 경제성장을 통하여 중산층이 두터워질 때 민주주의가 안정적인 궤도에 오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웬델 베리는 단호하다. 소농이 민주주의의 기반이라는 것이다. 중산층은 우리가 지금 지켜보고 있듯이 세계 경제의 추이에 따라 끊임없이 등락을 거듭할 수밖에 없는, 그러면서 서서히 옅어지고 몰락하도록 구조화된 운명에 놓여 있다. 그러면서 부와 권력은 소수에게 집중된다. 땅과 자본이 소수에 집중되면 민주주의는 다만 정부의 형태에 불과하다는 베리의 진단은 정확하다. 지금 20대 80을 넘어 1대 99의 사회가 되어버린 오늘의 세계가 이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50쪽) 그러면서 저자는 마르크시즘을 학습하면서(물론 저자가 그 교재의 대부분이 소련과 동독의 어용학자들이 쓴 관제 교과서였다는 점을 밝히지만) 제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농민 계층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폄하였다고 한다. “농민들은 언제나 생산수단을 가진 소부르주아였고, 기회주의적인 중간자였다.”(65쪽) 이계삼 선생은 자그마한 귀농학교를 준비하면서 지금은 소박하고 미약하지만 언젠가는 거대한 물결이 될 실험을 하고 있다.
저자는 이외에도 더글러스 러미스, 조너선 코졸, 다카기 진자부로, 하워드 진, 도로시 데이 등을 불러내 우리의 길 안내자로 초대한다. 이런 길 안내자들의 삶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꽤 중요한 커리큘럼이 구성되어가는 걸 잘 알 수 있다. 그중 도로시 데이가 한 말은 예수가 “이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외친 말을 연상시킨다. 저자가 도로시 데이를 이야기할 때엔 ‘영성과 혁명’의 어우러짐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힘 있는 사람들 편에 서고, 약자는 망각하는 교회를 볼 때면, 예수님께서 모욕당하고 있고 사형에 처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교회는 고위 성직자와 관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교회의 모든 백성, 특히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 아이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가 돌봐주고 싶어 하실 사람들의 것입니다. 창피합니다. 종교를 사회적 장신구로 활용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보면 구역질이 납니다. 교회는 기도를 필요로 하는 무시무시한 죄인입니다.”(299~300쪽) 이 시대를 밝히는 커리큘럼은 ‘농업의 시대’를 이야기하면서, 또한 사라져가는 ‘석유의 시대’와 이미 괴물이지만 언젠가 그 얼굴을 드러낼지 모르는 ‘핵의 시대’를 이야기한다. 제임스 하워드 쿤슬러의 <장기 비상시대>를 통해 석유에 지탱한 우리들의 불안한 삶을 통렬하게 지적한다. “우리의 밤을 밝혀주던 이 휘황한 불들은 곧 꺼질 것이다. 그러나 결핍으로 인해 우리는 서로 모일 수 있을 것이며, 얼굴을 마주볼 수 있을 것이며 스스로와 대면할 수 있을 것이다.”(147쪽) “석유에 중독된 삶, 소비와 안락 속에서 내팽개쳐진 인간의 품위, 만연했던 우울증과 비만, 일탈과 폭력, 석유 이후의 세계에서 전쟁과 추락의 격랑이 기다릴 것은 분명하지만, 다른 한편 이 거대한 전환의 시대는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시작할 기회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부디, 이 모든 일이 너무 늦지 않기를.”(147~148쪽) 핵발전은 석유문명의 사생아처럼 보인다. 이계삼 선생에게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는 깊은 상처다. 그가 전해주는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인간 드라마는 읽으면서 너무도 힘겨워진다. 처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 특히 이미 피폭되어 죽음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얻어맞고도 핵발전소를 지탱하는 저의는 무엇인가? 우리에게 체르노빌은 저 먼 나라 이야기고, 후쿠시마는 저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인가? 저자는 미친 짓이나 진배없는 핵발전소의 풍경을 통해 우리에게 충분히 경고의 메시지를 전해준다. 여기서 모두가 눈멀었을 때(무지도 죄다. 더 나쁜 놈은 눈 먼 척하는 인간들이다) 눈떠 있다가 왕따 당한 다카기 진자부로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는 시민과학자로서 온갖 수모를 당해가면서 핵발전소의 실상을 고발했는데, 이런 말을 남긴다. “뒤에 남는 사람들이 역사를 꿰뚫어보는 투철한 지혜와 대담하게 현실에 맞서는 활발한 행동력을 가지고 일각이라도 빨리 원자력시대에 종지부를 찍기를 바랍니다. 나는 어딘가에서 반드시 여러분의 활동을 지켜보고 있을 것입니다.”(274쪽) 아프니까 공부하자 이 땅의 청년들은 참 많이 아프다. 가끔 너무 생각 없는 것 아니냐고 갈구기도 하지만, 그들의 속내를 들어보면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헛될지라도 크게 꿈꿀 마음의 여유도 없고, 생활도 너무 힘들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미안한 마음도 든다. 이들을 향한 온갖 위안의 소리가 상품화되고 잠시 동안 마취제 역할을 하는 듯하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것은 다 깊게 연결되어 있는지라 자기 하나 잘 버텨낸다고 능사가 아니다. 모든 게 어이없고 절망스럽게 구조화되어 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에게는 공부가 필요하다. 세상이 힘들다고 말랑말랑한 말에 현혹되어 잠시 잊거나 도피하지 말고 일단 세상을 온전히 직시하는 공부가. 그런 공부를 혼자 하면 재미없고 쓸쓸하고, 또 다른 지적 허세로 변질될지 모른다. 그러니까 이왕 하는 공부, 여럿이 같이 하자. 사실 청년들만 이런 공부가 필요한 게 아니다. 이 지구별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과 무관하지 않은 우리 모두에게 공부가 필요하다. 이제 아프니까 공부하자. 우리 자신의 삶을 지켜내고 잘 살아가기 위해 공부하자. 같이 하자. 세상에는 좋은 책 그리고 그 좋은 책을 연결해주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를 이끌어주는 좋은 길 안내자들이 많다. 이계삼 선생도 그중 하나다. 누구보다 아이를 사랑하고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쳤던 저자는 결국 교단을 떠났다. 이 책의 마지막 장 ‘나는 왜 학교를 그만두었는가’에서 자신에게 다가왔던 절망감도 토로한다. 하지만 그는 자본이 필요로 하는 다양한 수준의 조립품을 양산하는 좁디좁은 학교를 떠나 더 넓은 학교로 옮겨갔다. 짙은 절망 속에서 핵보다 더 강한 희망을 길어내는, ‘관념과 허위의 제국’을 넘어서 ‘진솔하고 구체적인 삶의 공화국’으로 이행하는 그의 커리큘럼은 더욱 업그레이드될 것이며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공부의 길을 밝혀 주리라 믿는다. 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3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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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가치관이 담긴 책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사회에 대한 분석은 이미 버섯농장마냥 여기저기 널려있기에 따로 말할 필요조차 없겠으나 적어도 이 책은 그에대한 우려와 나름대로 정리한 해결책에 대해 진실성 있는 어조를 통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그, 자립적 소농사회?라고 요약될 그것이 현대사회의 해법으로서 적절한가의 유무는 제쳐두고, 개인적으로는 책의 구조나 구성에 대해서는 그닥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여러 분야의 서적이나 사상에서 요소를 끌어와 책을 구성한 것은 좋게본다면 앞으로의 독서의 방향과 폭을 넓히기 위해서라는 관점에서는 좋을지도 모르나 한편으로는 난잡하고, 정리되지 않은 짜깁기라는 인상을 주기 마련이다. 읽으면서 제멋대로 모여든 여러 강과 산줄기가 생각난 것은 그때문일 테지만 저자의 역량을 추측컨대 좀더, 하나의 큰 강줄기로 다듬어낼 수 있다고 보이는 바 그점에 있어서는 아쉬울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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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들이 겪는 고통, 성장통이 아니야. 이 시대의 지속 불가능성에 대한 고찰
이계삼님의 ‘청춘의 커리큘럼’은 비록 최근 출간된 책은 아니지만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쓰여 졌기 때문에 여전히 책의 메시지와 방향성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책의 컨셉은 아주 명확한데요. 우선 지금 청춘들이 겪고 있는 일상의 스트레스나 삶의 고통은 성장통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며 출발하고 있습니다. 이 책이 출간됐던 2010년대 초반에는 청년실업률이 본격적으로 치솟으면서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같은 일종의 청춘담론 열풍이 불었는데, 대체로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식이었다면, 이 책이 던진 메시지는 정 반대였죠.
지금 청춘들이 겪고 있는 고통은 성장을 예비하고 있는, 그래서 견딜만하고 또 지나 놓고 보면 아름다운 추억이 될 수 있는 그런 고통이 아니라, 이 시대가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전조 증상에 가깝다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래서 막막한 시대를 살아가게 될 청춘들에게, 이 시대를 진단하고 파악하는데 필요한 인물과 사상을 소개해주고, 이를 통해 이 시대의 지속 불가능성에 대해 고찰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거였죠.
컨셉을 놓고 보면 다소 어둡고 우울한 내용처럼 느껴질 수 있는데, 작가의 섬세한 감성과 예리한 통찰이 잘 녹아들어가 있어서, 전체적으로 비장미가 있고 몰입도가 높습니다.
책은 크게 3개의 챕터로 구성돼 있습니다. 1부는 우리가 이 시대를 진단하고 파악하기 위해서 공부해야할 인물인 슈마허, 웬델 베리, 더글러스 러미스의 사상이 소개되고 있는데, 저자에게 큰 영향을 준 사상가들인 만큼 이 책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핵심 줄기가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2부는 이를 바탕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별로 현 시대를 진단하고 분석하는 키워드와 소주제를 다루고 있구요. 마지막으로 3부는 1, 2부의 논의를 바탕으로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이 시대에 과연 어떤 대안과 실천 전략이 있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로 다룰 수 없을 정도로 밀도와 영양가가 높은 책인 만큼 직접 읽어보시길 권하며 개인적인 입장에서 좋은 점과 아쉬운 점을 몇 가지만 언급해보겠습니다.
먼저 좋은 점인데요,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인물과 사상이 현 사회 시스템과 주류 사상에 대한 비판 담론으로써 탁월한 내용과 논리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생태계의 하위 체계로서 산업 기술 문명을 고찰하는 러미스의 사상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또한 책 곳곳에서 저자는 전지구적 공동체의 동시대성과 총체성을 매우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는데, 날카로운 통찰과 풍부한 사례가 돋보였습니다. 저자가 국어 교사였기 때문인지 묘사가 매우 예리하면서도 동시에 섬세한 점도 놀라웠고, 무엇보다 본인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풀어나가는 전개 방식 때문에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담 없이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각각의 소주제마다 다양한 인물과 책, 영화가 인용돼 있어서 확산적인 독서를 도와주고 있다는 점 또한 좋았습니다.
반면에 지나치게 거시적이고 총체적으로 접근하다보니 일부 내용의 경우 좀 명료하지 않았던 점이 아쉽습니다. 디테일은 독자의 몫일 수도 있지만 책에서 언급된 개념이나 내용이 조금 더 완결성 있게 구성되었다면 좋았을 거 같습니다. 또한 비판 이론으로서는 탁월할지 몰라도 실천 전략으로서는 다소 아쉬우며, 특히 지속 불가능성에 대한 대안으로 농업을 제시한 대목은 디테일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논리적인 연결도 다소 엉성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후반부로 갈수록 상대적으로 몰입감이 다소 떨어졌고, 무엇보다 실천 전략이 약하다보니 비관론이나 혁명론 혹은 근본주의로 곡해될 가능성도 있겠다고 느껴졌습니다.
ps. 본 리뷰를 토대로 만든 영상 리뷰입니다. (https://youtu.be/SKd0fbec1X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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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까지 고미숙의 책에 대한 리뷰를 올렸습니다. 새로운 관점에 목말라 하던터라 신나게 읽었지만 막상 읽고나니 공허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저랑 좀 안 맞는달까.. 그냥 우리끼리 좋으면 되는거지 뭐. 이런 분위기.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공허함이 채워지는 듯합니다. 저자의 책을 더 읽어보고 싶고, 여기에 소개된 책들도 더 읽어볼 예정입니다. 한티재라는 출판사도 눈여겨 보게 됩니다. 좋은 친구(또는 선생님)를 만난 기분입니다.
강력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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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신문에 칼럼을 쓰던 고등학교 교사가 있었다. 많은 칼럼 가운데서도 난 꼭 그의 글을 찾아 읽었다. 정교한 논리, 세상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에 끌렸다. 칼럼의 마지막엔 칼럼리스트의 직명이 나오는데, 이 분의 직명이 얼마 전 바뀌었다. 경남 밀성고 교사에서 `오늘의 교육 편집 위원'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분은 그외 몇 가지 감투를 더 갖고 있다. 밀양 765kv 송전탑 반대대책위 일꾼, 감물 생태학습관 인문학 교사 겸 사무장. 그는 다양한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는 현직 칼럼리스트이자 `전직' 고교 교사인 이계삼이다. 물론 최근에 펴낸 <청춘의 커리큘럼>이란 책의 저자이기도 하다.
교사가 쓰는 책 답게 제목에 커리큘럼 즉 교과과정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다. 그것도 청춘의 교과과정이다. 청춘이란 애매한 지칭어는 또 뭔가? 청춘에겐 특정한 배움이 필요하단 의미일까? 이계삼은 11년간 고향의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그런 그가 최근 학교에 사표를 냈다. 이제 막 마흔 줄에 들어선 젊은 선생이 말이다. 그 오랜 궁금증은 이 책의 말미에서 풀렸다. `나는 왜 학교를 그만두었는가' 라는 꼭지의 글에서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고백한다. `사기를 좀 그만 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325쪽)
학교 교육에 대한 불신은 이 책의 곳곳에 등장한다. "내 경험으로 학교 교육 속에서 아이들에게 받을 수 있는 질문이란 시험 범위 알려 달라는 것밖에 없다" (100쪽) 그는 학교 교육의 최대 수혜자는 아이들을 낮은 사고력과 높은 애국심으로 길러내고 싶어하는 지배자들이라 잘라 말한다. 이 불온한 표현들은 다 뭐란 말인가? 그가 교사를 그만두기 잘했단 생각이 드는가? 학교에서는 절대 가르치지 않는 교육과정이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이계삼이 학교 교육을 부정하고, 청년들에게 새롭게 가르치고자 한 커리큘럼은 어떤 것인지 먼저 살펴보자.
이 책에는 많은 저자들의 책이 소개 돼 있다. 이계삼의 책은 이 책들에 관한 서평과 평론 모음집이다. 평이한 서평이 아닌 또 하나의 사상을 담고 있는 수준높은 글들이다. E.F 슈마허는 생태론적 경제 사상가로 `작은 것의 가치'와 `적정 기술론'을 제창한 지식인이다. 또, <온 삶을 먹다>의 저자 이자, 녹색평론에 글을 싣던 웬델 베리는 미국의 농부다. 그는 43살에 대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고향 켄터키로 돌아와 농사를 짓고, 문필 활동을 해왔다. 이들이 한결같이 내세운 건 새로운 경제 모델에 관한 구상이다. 이들 저서에 대한 서평을 통해 저자는 자본집약적 산업화된 농업에 반대하고, 공동체 중심 소농의 삶과 자립 가능한 농촌의 새로운 미래를 상상한다.
영화 <매트릭스>에 대한 평론에선 우리 시대 노동 환경을 영화를 빗대 비판한다. 네오가 선택한 트리니티의 빨간약은 한진중공업 크레인 위에서 200일 넘게 고공농성을 벌인 김진숙의 선택으로 풍자된다. <체르노빌의 목소리>의 저자 스베틀라나 일렉시예비치의 문장들을 소개하는 저자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깝다. 원자력에 대한 실상과 공포를 비추는 글 속에서 독자들은 종말의 징후들을 감지한다.
" 한 아내가 있다. 남편이 체르노빌에서 트럭으로 모래와 콘크리트를 운반하는 일에 종사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고 믿었고, 의사의 중절 권유에도 기어코 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죽은 채 태어났다. 손가락도 두 개 모자란 계집아이였다. 사랑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 사랑의 감정에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는 것, 사랑 때문에 2세에게 끔찍한 고통을 넘겨주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체르노빌 이후의 세계다." 123쪽, <청춘의 커리큘럼>, 이계삼
로버트 콜스의 <환대하는 삶>은 20세 미국의 카톨릭 빈민 운동가 도로시 데이의 삶을 그리고 있는 평전이다. 가난한 이들과의 공존, 교회의 경직성과 투쟁 등을 다루는 이 평전에서 이계삼은 올바른 신앙이 가야할 길을 상상한다. 근거없는 도그마를 고집하는 교조주의는 권력과 신앙의 오랜 전통이다. 도로시 데이는 "무신론자의 흠 없는 삶을 내치고, 자신을 경배하는 신앙인을 더 사랑할 만큼 하느님이 경배에 굶주린 존재가 아니라고 믿었다" (299쪽) 란 표현을 쓴다.
<죄와 벌을 거꾸로 읽다>란 장에서 이계삼은 청년들이 살아가야할 이 세상이 어떤 세계인지 되묻고, 되살필 것을 요구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은 한 사회의 총체적 부조리를 어떻게 응징할 것인가, 라는 고뇌가 깊이 내재된 소설이다. 이계삼은 오늘 우리 사회의 부조리가 자신을 소설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과 응징이란 몽상에 젖어들게 한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을 강력한 후원자로 등에 업은 돼지 같은 자본가가 활개를 치고, 멀쩡한 갯벌의 숨통을 끊어 놓고 죽음의 시궁창이 되어가는 그 갯벌 옆에서 록 페스티벌을 벌이고 수천 명이 떼로 모여 춤추고 노는 나라에서, 60대 70대 할머니들을 하루 열여섯 시간 동안 유독가스가 넘쳐나는 공장으로 밀어 넣는 나라에서, 이성을 가진 누군들 그런 몽상에 젖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 216쪽
이 책의 주장은 과격한 면이 없지 않다. 세계를 날것으로 보여주고 비판해서다. 주류 언론과 교육이 감추고 무시한 현실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다수가 긍정하는 삶을 비난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익숙한 체제 내의 성공을 꿈꾸는 젊은이가 있다면, 이 책의 주장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런 비판이 나의 미래에 어떤 도움을 주는가, 어떤 해법을 주는가 알 수 없다. 하지만, 1 대 99의 사회나 원자력의 공포, 환경 오염과, 먹거리에 대한 걱정, 삼포세대(연애,결혼,출산이 불가능한 세대)는 이미 우리 앞에 출현한 현실이다. 모든 정권과 모든 세계의 지도자의 꿈이 지상의 유토피아를 만드는 것인데도 이 지경이다. 그러니 뭔가 근본적으로 세계는 잘못된게 아닐까? 결론적으로 저자는 자급자족의 농업 사회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소통이 원활한 소규모 공동체가 주체가 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더불어 인문학과 노동을 삶의 중요한 지렛대로 삼는 개인의 삶을 꿈꾼다.
이 책은 신념으로 가득차 있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바뀔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면, 강건한 학교 교육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 교육은 이 체제를 현상 유지하는 것이 최대의 목표다. 자본과 권력이 경제의 무한한 확장과 인류의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란 환상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하여, 인간적인 공동체, 행복한 개인은 미사여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인류 역사상 핵폭탄의 위력을 최초로 경험한 일본이 전후 50기가 넘는 원자력 발전소를 보유한 것은 무얼 말하는가? 국가 권력의 생리는 과거와 역사를 외면한다. 탐욕과 반사유성이 자본과 권력의 본질이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그럼에도 청년들의 몫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환경오염과 원자력, 전쟁의 공포와 자본주의의 폐해 모두를 막아낼 지혜는 공부하는 청년들에게서 나온다, 고 그는 믿는다.
지금 청년들은 정작 체제속의 정착을 꿈꾸는 공부에 여념이 없다. 하여, 이 책이 제시하는 청춘의 커리큘럼은 배부른 자의 탁상공론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가 걸어간 길이 새로운 삶과 미래에 대한 실천적 상상력을 제공한다. 시험 범위 외에는 질문할줄 모르는 학생들을 양산하는 학교를 벗어난 이후라면, 이제야 본격적으로 세상과 삶을 공부해야 할 때가 아닐까? 책 속 청년들의 커리큘럼은 가볍지 않고, 즐겁지 않은 과목들이다. 하지만 우리 세계를 반성하고,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책들로 가득하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이 책을 통해 공부의 길로 들어선다는 데 있다. 이 안에 소개된 책의 목록을 기록해 두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자. 절대로 학교 교과서로 채택될리 만무한 이 커리큘럼을 주목하자. 다른 삶은 가능하다,는 저자의 믿음을 지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