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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도 모르고 철학에 빨대 꽂겠다며 덤볐다가 피만 보고 자신감을 낮춰 '입문' 책을 펼쳤더니 이 책은 아예 먹기 편하라며 씹어서 입으로 떠밀어 준다. 안 먹을 수가 없잖아. 철학의 방, 사유의 놀이터로 들어가는 18개의 문 실제로 이 책이 담고 있는 18개의 주제를 다루는 방식을 보면 이 카피 문구는 진부하기 짝이 없다. 18개의 문이란 무의식, 지식, 자유, 거대담론, 행복, 주체, 매체, 텍스트, 언어, 창작, 타자, 인식, 드러난 것과 숨은 것, 보편자, 종교, 사랑, 욕망, 이원론이다. 18개의 주제와 36개의 이야기가 있다. 즉, 주제마다 2가지 이야기가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구조주의란, 인식론이란, 데카당스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대신 짤막하고 새롭고 일상적인 이야기가 오간다. 형식도 다양하다. 저자는 심리법원을 방청한 적이 있는 사람으로서 심리법원의 모순적 양상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와중에 꼬박꼬박 일기를 쓰는 한 소년이 되기도 하고, 홈페이지 운영자가 되어 회원들에게 글을 남기기도 한다. 마르크스와 레닌이 대화를 주고 받으며 자연스럽게 19세기 러시아의 상황과 자신들이 이룩한 업적과 사상을 드러낸다. 일상적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좀 더 딱딱하고 객관적인 목소리가 등장한다. 마찬가지로 그리 길지 않다. 머리가 아파질 때쯤 되면 슬그머니 마무리하고 또 흥미를 잡아끄는 새로운 이야기가 등장한다. 흔들리는 버스에서도 머리에 쏙쏙 들어올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18개의 이야기 모두가 별개의 작품처럼 재밌었지만, 그중 인상 깊었던 몇 가지를 기록하고 싶다. 먼저 두 번째 문, 지식이다.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열여섯 살 소년이 약물 실험을 통해 몇 개월여만에 매스컴에서 주목하는 천재가 되는 일련의 과정을 일기 형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처음에는 초등 저학년 수준의 글에서 갑자기 대학생 수준으로, 이후 인문학, 과학, 문화와 종교 등 갖가지 분야를 1,2주만에 섭렵하기 시작하면서 해박한 글실력과 지식을 드러낸다. 곧 자신에게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그것의 원인과 반향까지 스스로 분석하는 지경에 이른다. 유머는 지식의 일부분이다. 유머가 전달되는 과정에서 보는 것처럼 지식에도 위상이 있다. 하나의 지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지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치료를 시작한지 약 5개월만에 약효가 떨어진 건지 병이 재발한 건지 다시 언어 능력이 급격히 쇠퇴하면서 기존에 알고 있던 독일어를 잊어버리거나 맞춤법을 틀리기 시작하더니 일기조차 쓰는 것이 귀찮다는 걸로 이 다이나믹한 일기는 끝이난다. 대부분의 지식은 무의식적으로 권력을 행사한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과 연관해 미셸 푸코는 지식=권력이라고 한다. 여기서 푸코가 말하는 권력은 정치적 권력뿐만 아니라 일상적 권력도 해당한다. 최소한 에펠탑이 이탈리아에 있다고 말하는 지인이 콜로세움이 이탈리아 어느 동네에 있다고 설명해준들 설득력이 떨어지는 건 자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에펠탑은 파리에 있다는 식의 설명만이 지식이 아니라 에펠탑이 파리에 세워진 역사적 배경을 이야기하는 것도 지식이다. 즉, 지식이란 대상을 설명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지식이 지식을 생성함으로써 지식이 대상을 규정하는 반대되는 상황도 가능하다. 지식은 분류와 배제의 메커니즘을 통해 드러나지 않게 권력을 행사하며 지식과 지식의 관계 속에서 재생산된다. 따라서 지식을 따라다니는 불나방 같은 존재는 자신도 모르게 권력에 복종하는 셈이라고 볼 수 있다. 신뢰에서 맹신으로 맹신에서 숭배로 나아갈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계몽주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이런 비정상적인 숭배는 푸코의 표현대로 '광기'로 분류되면서 치료가 필요한 불나방으로 격리되었지만, 맹신하는 불나방들은 여전히 사회에 잔재하고 있다. 이제는 스마트폰만 켜면 에펠탑이 파리시 에펠구 탑동 123번지에 있으며 역사적 배경부터 관련 시구들까지 살펴볼 수 있게 되어 검증할 수 없는 맹신은 걸러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오랫동안 지식인들이 품어온 책이라는 가치를 낮잡게 되면서 얕은 지식의 보편화를 낳았다. 이는 불필요한 과정을 생략함으로써 빠른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는 크나큰 장점을 갖고 있음과 동시에 파내는 것의 즐거움을 앗아감으로써 새로운 진리 발견이 어려워진다는 단점을 갖고 있기도 하다. 물론 이제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이미 진리로 가득하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운전면허를 따려고 학원에 갔을 때 출석체크를 하는 데 한참이나 헤맸다. 바로 아래에 키패드가 있었음에도 나는 모니터 버튼만 겁나 누르며 인식을 못한다고 투덜거렸다. 고작 5-6년 전만 해도 키패드를 쓰는 게 당연했는 데도 이제 내게 키패드는 어색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마 내 손자들은 뇌파로 메시지 전송하는 방법을 묻는 내게 화를 낼지도 모른다. "아 할머니! 저번에 설명드렸잖아요!" 결국 지식의 사회주의가 도래해도 감자를 두 개 캐는 사람과 네 개 캐는 사람의 저녁상은 같을 수 없다. 최고급 삽을 쥐어줘도 감자를 두 개 캐는 사람은 감자 하나만 캐고 한숨자고 나머지 하나를 캐고 밥을 먹는 식이다. 물론 행복과 연관 지으면 감자를 두 개 캐는 사람이 더 행복하게 식사를 할 수도 있다. 네 개를 캐려고 식사도 거르고 가족과의 대화도 소원한 것보다 천천히 두 개를 캐서 가족들과 나눠먹고 강아지와 산책하고 아들과 캐치볼을 하는 삶이 더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리란 무엇인가? 이것은 인류의 지성사에서 언제나 중요한 물음이었으나, 프리드리히 니체는 그보다 더 중요한 물음은 누가, 왜, 어떤 의도에서 진리를 묻는가라고 말한다. 때로는 답을 마음속에 정해 놓고서 묻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우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흔히 겪을 수 있다. 상사가 "소비자들이 원하는 게 뭐야?"라고 물었을 때 상황에 따라 대답이 갈릴 수 있다. 회의하던 중일 경우, 식사를 하던 중일 경우, 실수해서 혼나던 중일 경우. 물론 회의 중 내 눈을 똑바로 보며 질문한 게 아닐 경우 대부분 입을 닫고 있는 게 좋다. 일장연설을 하기 전 밑밥으로 던진 질문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저 연설이 끝나면 열렬히 박수칠 두 손바닥만 준비하면 된다. 세 번째 문 자유는 한국에 자유주의 바람이 격정적으로 불던 1980년대를 불렀다. 1980년대의 한국 사회는 온갖 모순이 중첩된 상황이었다. 어느 시인의 말에 따르면, "한국 사회는 세계사적 모순의 똥거름자리"였다. (...) 그때 우리가 경멸하고 저주했던 군사정권의 경직성을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모방하고 답습했던 것이다. 1980년대를 빛나던 시기라고 말하는 어른들이 있다. 간혹 요즘 대학생들은 데모도 안 한다며 마치 국가와 제도와 사회에 굴종한 어린아이 취급을 하기도 한다. 고마운 일도 생색내면 감사인사가 쏙 들어가듯이 소위 일부 꼰대들의 찬란한 과거 회상은 대부분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으며 자유를 위해 자유를 바쳤다는 그들의 말은 비열하게 들렸다. 그래서 그들이 얻은 자유란 무엇인가? 후대인들을 비판할 자유? 시대적 흐름은 어차피 민주주의를 향하고 있었다. 유신정권은 영원할 수 없다. 물론 선대인들이 행한 모든 행위를 시대적 흐름이라는 말로 무효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일부 1980년대에 청년기를 보낸 4-50대 남성들, 현재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거나 한창 회사의 중역을 맡고 있는 인물들은 당시를 아련하게 미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그토록 반짝이던 시기라고 느끼던 것은 정권을 바꾸려 스스로 거리로 뛰쳐나갔다는 적극성이다. 과거를 아름답다고 회상하는 것은 현재가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다. 불과 5년만에 '스마트폰 중독'이라는 말을 찾아보기가 어려워졌다. 밥을 세끼 다 먹는다고 밥중독이라고 부르지 않듯 너무도 당연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이제 적극성이 당연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과거가 그토록 빛나는 것이다. 강요된 경각심은 반향을 부추긴다. 경험하지 못한 것을 절대적으로 신봉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플라톤의 동굴 속에 사는 죄수들은 동굴 밖이 어떤지 전혀 모른다. 나는 촛불 시위나 폭력적 데모가 현시대를 타개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일종의 모임이 경각심을 깨우고 하나의 행동을 만들고 정치계를 긴장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마치 서든에서 만난 초딩처럼 모든 욕을 튕겨냄으로써 내가 두배로 데미지를 입는 대상도 있을 수 있다. 현재 정권을 쥐고 있는 인물 같은 경우에는 나라 경제가 마비될 정도로 시위를 하러 모여들지 않고서는 꿈쩍도 하지 않을 기세다. 어정쩡한 데미지만 날려 치명타는 못입히고 내 엠통만 닳는 식이다. 또 하나 내가 TV, 뉴스를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한 것은 폭력적 시위는 또 다른 문제만을 만들 뿐이라는 것이다. 자신도 다치고 경찰도 다치고 뉴스의 쟁점은 흐려져서 본질적 문제는 곁으로 밀려난다. 동생과 왜 내 옷을 몰래 입었냐로 싸우다 동생이 '야!'라는 말에 어디 언니한테 반말이냐고 머리끄댕이를 잡기 시작하는 격이다. 결국 내 옷을 입었다는 사실로 화가 났다는 것은 싸움의 말미가 되어서야 또는 중재자 엄마가 나타나야만 깨닫는다. 싸움이 발생한 본질을 잃은 순간 또 다른 싸움의 씨앗만 심을 뿐 제대로 된 해결이 되는 건 어렵다. 그렇다면 1980년대의 데모를 현시대 청년들에게 강요하는 그들이 동굴 속 사람들일까, 데모와 시위가 거북한 현시대 젊은이들이 동굴 속 사람들일까. 평화적이고 본질적 문제를 꾸준히 유지하는 행동만이 올바른 경계심을 줄 수 있다. 감정을 이기지 못한 폭력은 불필요한 유혈을 낭비하고 본질을 흩트려 행동이라는 노력을 무효화시킬 수 있다. 차가운 분노가 더 섬뜩하다는 걸 알아야 한다. 상식적으로 자유의 반대는 구속이나 속박이지만, 인식론 철학에서는 자유를 우연으로 해석하므로 반대 개념은 필연이 된다. 이러한 잘못된 관습 물려주기는 간혹 행동하는 젊은이와 개념없는 인간이라는 걸 혼동하는 젊은이를 양성한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이 어찌나 확고한지 예술과 민폐의 차이도 잊고 예술품 훼손, 공공기물 훼손, 사유지 침범, 고성방가, 불법 전단 배포, 사생활 침해 등을 일삼는다. 그리고 열의가 없는 사람들을 만나면 눈에 광기를 띠고 삿대질을 한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가 모두의 생각과 동일해야만 자유가 성립되는 것인가? 모두가 자유라는 개념을 똑같이 생각해야만 한다면 그건 자유인가? 역사 속에서 이따금 보이는 '해방의 반역'은 사실과 달랐을지도 모른다. 혹은 시대착오였거나. 임꺽정과 만적의 이념은 후대의 각색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저 개인적인 동기에서 작당하고 반란을 일으켰도 그러다 점차 본의와 무관하게 '의적'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 절대적으로 통용되는 관점은 없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잘못된 자유로의 행동을 위한 강요는 사회주의에 대한 전반적 오해를 불러오기도 했다. 대다수가 사회주의가 현 북한 시스템 격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정점에서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실행했을 때 올바른 것이라는 통념이 있다. 물론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에서 상위에 앉은 사람들이 이 체제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겠지만. 지구상에 신분제가 거의 사라진 현대 세계에서는 자유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자유의지를 거의 당연시한다. 그러나 실상 자유의 이념은 경제적 불평등에 의해 왜곡되어 있으며(마르크스) 공허하고 부담스러울 뿐 아니라(사르트르) 무의식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크게 제한되어 있다(알튀세르). 그리고 이어서 마르크스와 레닌의 대화 속 러시아의 사회주의혁명을 다루는 거대 담론이 있다. 레닌은 계속해서 혁명이 있을지를 걱정하며 이렇게 말한다 역사의 진보란 허구일까요?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역사는 늘 되풀이될 뿐이다. 다만 세대마다 꿈이 달라질 뿐이다." 이제는 국가 단위의 혁명이 아닌 개개인의 삶을 자연스럽게 바꿈으로써 전 세계적 변화를 가져오는 인공지능, 빅데이터, IoT는 4차산업혁명이라는 말에 딴지를 걸 수 없다. 이미 변화가 스며든 상태에서 갑작스레 혁명이라는 용어가 튀어나왔지만, 지금 우리에겐 그다지 놀랍거나 낯선 혁명이 아니다. 글로 읽을 때야 구식 방직기가 기차까지 몰고 오는 순간을 몇 분만에 겪지만, 실제 1-3차 혁명을 겪은 사람들에게도 혁명은 이렇게 자연스럽고 일상에 스며든 것일지도 모른다. 이어서 한 카페의 운영자가 '상상하는 삶'이라는 코너에서 "만약 신과 같은 완전한 능력을 며칠 동안 가질 수 있다면 당신은 나머지 삶을 포기하겠는가?"라는 주제로 회원들이 주고받은 의견을 게시하는 형식으로 '행복'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특히 사회 진보를 위해서는 쾌락보다 행복을 추구하는 활동이 더 큰 기여를 한다. 쾌락만 강조하면 자라는 학생들이 철학, 역사, 수학을 컴퓨터 게임보다 재미있게 여길 리는 만무하니까 학문의 전통이 끊기고 말 것이다. 마침 2016년 대입수능이 치뤄지고 있는 오늘, 몇 시간 뒤 아이들은 내일을 쾌락으로 채울까 행복으로 채울까. 대다수 청소년기에 접어든 아이들은 불명확한 동기부여가 학문을 파헤치는 이유가 된다. 각고의 사투 끝에 수학 문제의 답을 냈을 때의 그 희열이 동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이 개개인이 원하는 동기를 알아채기도 학교에서는 대학이라는 명확한 동기를 부여하고 학생들의 계급을 나눈다. 단기적으로는 결과를 낼 수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내 꿈이 뭔지도 모르는 취준생만 잔뜩 배양하고 있는 셈이다. 달달한 단기적 동기부여에 취한 부모들의 사교육열은 식을 줄을 모른다. 아직도 아이들은 학원과 학원 틈 사이에 편의점 컵라면을 불어먹으면서 부모와 학교가 말하는 좋은 대학=행복이라는 공식을 믿고 있다. 이어서 지식과 권력의 스펙트럼을 나타내는 매체와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진정 텍스트이냐를 논하는 텍스트,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본 언어, 창작=편집을 말하는 창작, 모범 시민 X씨의 이야기로 알아보는 타자의 개념을 지나쳐 열두 번째 문, 인식을 보고 또 한번 즐거웠다. 원래 냄새에는 좋고 나쁜 게 없다. 우리 견공들은 냄새를 그저 정보로 받아들일 뿐 좋고 나쁜 게 없다고 여긴다. 향수 냄새가 오줌 냄새보다 좋을 건 전혀 없다(굳이 말하자면 둘 다 썩은 물의 냄새다). 인간은 자라면서 문화를 배우기 때문에 좋은 냄새, 나쁜 냄새를 따지는 것뿐이다. 인간들이 말하는 오감이라는 게 개에게는 얼마나 비효율적인지를 개의 시점에서 보면서 인식이라는 개념의 범위를 확장시킨다. 요 영악한 강아지가 보기에 자기가 갖지 못한 인간의 특성은 이성과 핸디캡이다. 이성으로 수학적 진리를 탐구할 수 있고 감각기관이라는 핸디캡 덕분에 돌에 걸려 넘어지면 아프다는 경험을 바탕으로 돌을 치우고 의복을 입는 등의 체제를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이 책을 읽는 시간을 즐겁게 만든 이야기 중 하나는 열일곱 번째 욕망이었다. 실재한 왕이기도 했으며 그리스 신화에서 지나친 물질적 욕구로 술의 신 디오니소스에게 손에 닿는 뭐든지 금으로 바뀌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어 음식도 먹을 수 없고 사랑하는 딸을 금덩어리로 만들어버린 탐욕적인 인물인 미다스왕의 현대 버전 이야기다. 단, 주인공은 왕이 아니라 노숙자고 그가 구한 것은 디오니소스의 스승인 실레노스가 아니라 바퀴벌레였고, 소원을 들어주는 건 눈부신 천상의 신이 아니라 악마 디아볼로스였다. 그는 디아볼로스의 대리인인 변호사를 만나 계약서에 지장을 찍는다. 손을 대는 것마다 대박이 나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돈을 버는 것은 내가 아니라 돈이었다. 돈은 마치 생명을 지닌 생물체처럼 스스로 앞길을 헤쳐나갔다. 나는 돈의 임자로 출발했으나 점차 돈의 하수인으로서 돈이 잘 흘러가도록 길을 터주는 역할로 전락했다. 내가 살려준 바퀴벌레 암컷의 처지와 뭐가 다르랴? 처음엔 경마를 시작한다. 다음엔 주식. 그리고 부동산. 그러나 큰 돈을 만지기 직전 그는 깨닫는다. 디아볼로스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 순수한 욕망 덩어리니까요. 이야기가 끝나고 저자는 욕망을 새롭게 조명한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가 바라본 욕망에 대한 관점을 설명한다. 이성적 관점에서 보면 욕망은 결핍이고 자신에게 없는 것을 바라는 마음이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은 결핍도 소비도 아니며 오히려 충만이며 생산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욕망을 결핍을 채우는 어떤 것은 욕망을 의식적 흐름으로 봤을 때고 욕망 그 자체를 별개의 에너지로 봤을 때 욕망은 결핍이 아닌 스스로 생산하고 흐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결핍이라는 관점에서 욕망을 보면 욕망은 마치 결핍이 있어야만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욕망을 별개의 에너지로 봤을 경우 통제하지 않으면 항상 무의식 속에 도사리고 있는 또 다른 주체처럼 볼 수 있다. <종이달> 리뷰에서 그 여자의 결핍이라는 허기를 달래는 용도로 욕망을 언급했던 것은 욕망을 의식적, 이성적인 관점에서 봤던 것이다. 새로운 관점을 확장시킬 수 있다는 철학의 매력에 이제 눈을 떴다는 것에 통탄할 수밖에 없는 구절이었다. 철학을 어찌나 잘게 씹어서 떠먹여주던지 다음 책을 읽었다간 날 걸 먹고 체할까 겁이날 지경이다. 아직 철학적 위가 튼튼하지 않은 나에겐 입문 책으로써 더 없이 충실한 역할을 해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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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철학 등 다양한 분야의 인문학에 걸쳐 - 저자의 책 이름에도 잘 붙이던 - '종횡무진' 활약하던 저자가 이미 고인이 되었다는 걸 알았다. 삼가 조의를 표한다.
철학 입문책은 시중에 많이 있지만 이 책은 좀 특이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18가지의 철학적 주제를 놓고 설명을 하는데, 각 주제가 적용될 수 있는 현실을 가상적으로 만들어서 먼저 상황설정을 한 후 심층적으로 보충하는 형식이다. 앞의 가상 현실도 모두 같은 형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으로 여러가지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일기, 편지, 강의, 희곡, 단편소설 등 각 주제에 적합한 형식으로 썼는데, 이 모두 적지 않은 창작의 노력이 필요하겠다 싶을 정도로 만족스럽다.
저자가 설정한 철학적 주제는 무의식, 지식, 자유, 행복, 언어, 인식, 종교, 사랑 등 고대부터 현대까지 줄곧 철학적 연구 대상이었으면서도 우리 인간이 일상생활에서 느끼고 생각하는 개념이다.
1년전 헤어진 애인이 보내는 편지를 통하여 주체와 대상, 그리고 나아가 사르트르의 대자 존재와 즉자 존재의 의미를 설명하고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기원을 밝힌다. 또한 지적 장애를 가진 아이의 일기를 바탕으로 지식과 권력의 관계에 대해 미셸 푸코와 프리드리히 니체의 철학 개념을 들어 설명해 준다.
이 책이 통시적 관점에서 쓰여진 것은 아니지만, 철학사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개념에 대해 여러차례 반복해서 설명이 나오기 때문에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철학적 관점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또 부록에 '더 읽어면 좋은 책'이라고 해서 주요 철학책의 목록을 실어 놓았는데 좀 더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필요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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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철학 입문 18
철학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생각하기 워밍 업~
철학으로 들어가는 18개의 문
-> 특정한 상황을 보여주고 그 상황과 관련된 철학적 추론을 덧붙이는 해제가 이어지는 도서 입니다,
책의 그 내용이 너무 흥미롭고 느끼면서 이해하기에 더욱더 와닿는 느낌 이랄까요^6^
철학 애 대한 지루하고 어렵고 고리타분하다라는 생각을 하신분들이라면 이책을 읽어 보시면 더욱더 철학이 재밌고 흥미롭게 다가올것 같네요,,
좋은도서 이기에 추천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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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인문학의 꽃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철학이 없는 인문학을 논한다는 것은 앙코 없는 찐빵이라고 할까?
남경태라고 하면 우리나라의 대표 지식인 가운데 한 명으로 받들어졌던 분이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운명하셨지만...
이 책의 저자가 남경태라는 것만으로도 끌린다.
인문학과 다른 분야의 경계를 두지 않으면서 일찍부터 인문학의 실용성에 대해 누구보다 많은 공감을 표했던 지식인이다.
이분이 쓴 책들 중엔 이런 실용성에 바탕을 둔 책들이 상당하다. 지식인만의 전유물이 아닌 누구나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기본 신념을 가지고 집필한 책들이 많다.
거기다가 철학적 논제에 대해선 누구보다 할 말이 많고 머리에 든 것이 많은 분이다. 이런 분의 생각을 엿들을 수도 있다는 것도 행운이다.
이 책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18개의 주제를 제시하며 우리를 철학의 세계로 안내하고 있다. 책의 타이틀이 말하는 것처럼 어디까지나 입문이다. 그래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각각의 주제를 소설 형식으로 덧입혀 그에 해당하는 철학적 개요를 짧게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줄거리 속에서 그 상항에 적절한 철학적 개념을 끄집어내는 식이다. 상황 파악이 안 될까 봐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된다. 친절한 해설은 물론이요, 초보자들이 대체로 이해하기 쉽게 서술되어 있으니. 어려운 단어도 남발하지 않고 딱 적당할 정도에서 그 선을 지킨다.
난 철학에 약하다 하시던 분들도 이 책으로 입문하면 편안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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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이면서도 철학에 대해 먼저 디스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것이 자칭 철학이라면서.
일상의 삶에 철학을 어떤 식으로 접목할 것이냐? 이 책은 그런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철학도 결국 인간을 탐구하는 주제인 만큼 무릇 우리네 삶과 괴리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어렵고 딱딱한 철학에 실용을 더했다. 초보도 이해하기 쉽도록.
18가지 다양한 철학적, 사회적 주제로 가상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철학적으로 해설하고 있다. 그 가상의 이야기가 때론 황당무계하게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철학적 의미의 사유를 들려주기 위한 하나의 예시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야기 형식으로 진행하니 이거 철학책 맞아?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기존의 철학이 가지고 있던 딱딱하고 어려운 고정관념이 이 책 한 권으로 가볍게 타파해 버렸다. 초보들을 위한 친절한 철학 입문서 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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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실용은 당장의 이익을 위한 활용이 아니라 인문학과 현실 사이의 흥미롭고 생생한 교감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칫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철학적 주제들이 친근하게 다가와요. 철학을 한번 시작하고 싶은데 수많은 철학서 중에 도대체 무슨 책을 읽어야 할지 망설이는 분들에게 철학 입문서로 단연 추천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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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라는 무거운 느낌으로 다가오는 학문을 여러가지 비유와 이해를 통해 보다더 쉽게 다가설수 있도록 만들어주기에 너무나 좋네요,, 철학이 무겁고 따분하고 이해도 잘안되고 읽으면 졸리고 마치 수면제를 복용한듯한 느낌이 나에게 있어서 그동안 철학관련 무수히 많은 책들을 구입하였지만 폋페이지만 읽고 책장에 꽃혀있으니 그냥 전시용이 되어버렸는데요 이책은 읽으면서 이해도 되고 상상력도 키워주니 철학이 주는 재미가 남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앞으로 나에게 있어서 철학 이라는 단어는 이제는 어려운 단어가 아님을 느끼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