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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틀비의 도시, 뫼르소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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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틀비의 도시, 뫼르소의 거리       필경사가 필사 일을 거절하고 먹는 것도 거절한 채 죽음을 향할 때, 그 주검 앞에서 먹먹함은 결국 그에게서 나를 봐야하는 현기증일 것이다. 바틀비의 수동적인 행위, 단순한 거절도 아니고 자신을 소멸로까지 밀고 나가는 이 행위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이건 단순한 저항과도 다를 것 같다. 내가 아버지에게 저항 할 때, 나를 소멸시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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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틀비의 도시, 뫼르소의 거리  

 

 

필경사가 필사 일을 거절하고 먹는 것도 거절한 채 죽음을 향할 때, 그 주검 앞에서 먹먹함은 결국 그에게서 나를 봐야하는 현기증일 것이다. 바틀비의 수동적인 행위, 단순한 거절도 아니고 자신을 소멸로까지 밀고 나가는 이 행위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이건 단순한 저항과도 다를 것 같다. 내가 아버지에게 저항 할 때, 나를 소멸시키기 위함은 아니다. 내가 부르주아에게 저항 할 때,, 페미니스트가 남성적 질서에 저항 할 때,,,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바틀비적 행위, 자기 소멸(굉장히 급진적이라고 생각됨)로까지 밀어붙이는 것이다.

 

 

내가 소멸하면 뭐, 아무 소용 없을테니까...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건 아닐까. 나, 내것, 나의 동지, 친구. 라고 하면서 내가 잃어버리는 것은 공통적인 구역이 아닐까. 나의 적과 함께 걸을 수 있는 거리, 길에 대한 감각.

 

 

 

공동의 구역, 길 위에서 나는 철저하게 수동적이다. 나는 길을 장악할 수도 없다. 그저 타자와 함께 걸을 수 밖에 없다. 이들 타자는 단순히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내 한가운데 들어서 있다. 내가 말을 배우면서 잃어버린 나의 유아infans는 내 안에 말 못하는 타자로 남아 있다. 우리 안의 구멍, 익명의, 비인칭(으로서 나는 비존재이다!)의 어린아이라는 공동 경비 구역은 이중적이다. 우리는 늘 그 구멍 때문에 허전하기도 하지만 바로 이 빈 구멍(틈) 때문에 타자와 무한히 마주할 수도 있다. 그것은 구멍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고 우리가 없앨 수도 없다. 그곳에 마주하여 우리는 수동적으로 있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능동적으로 타자와 함께 살아갈 수 있게 한다.

 

 

 

이 어린아이가 나와 타인 사이에 공동의 구멍이라면 우리는 이 공동의 메워지지 않는 구멍을 통해 스스로 타자화되면서 타자에게 열릴 수 있다. 이렇게 나는 이미 빗금쳐진 존재이며 타자이다. 비인칭적이고 중성적이며 말못하는 아이처럼 수동적인 행위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타자를 향해, 아니 그보다 타자와 함께 공동의 언어, 침묵의 언어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라는 이름으로, 본질이라는 이름으로, 이념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침묵의 언어를 망각해왔다(블랑쇼 선집 8, <카오스의 글쓰기>, 2012).

 

 

 

이와사부로 코소는 현재 뉴욕이 그 거품같은 번영이 어떻게 세계 각지의 눈물과 연결되어 있는지 봐야한다고 말한다(144p). 뉴욕이 어떻게 자신의 타자로 구성되어 있는지. 그 자신 안의 타자를 보지 못하는 뉴욕에게 닥칠 것은 자신의 죽음밖에 없다. 그래서 뉴욕은 자신을 비존재로 비인칭(내부의 타자에 대한 감각)으로 감각하고 사유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여전히 세계의 중심으로 착각하는 한 그들에게 공동의 안전 지대는 없다.

 

 

 

내가 비인칭적이 되지 않으면 나는 계속해서 젠더 간에, 계급 간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자유 재산과 그 바깥에, 안과 밖에 벽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국가는 벽을 세우길 좋아한다(177p). 우리의 상징 체계는 차이 체계이기 때문이다. 여자/남자, 위/아래, 낮/밤의 세계에서 중성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성적 소수자를 박해하며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문턱, 경계를 두려워하고 지우려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수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문턱인지 모른다. 문턱에 앉아서 상징 질서(자본주의적)와 단절하기.

 

 

 

괜히 공부를 한다고 취직도 안하고 이러고 산지 족히 십년은 된 것 같다. 나를 비정규직이라고 이름 붙이지 말라. 나를 그렇게 호명하면서 나에 대해 평가하고 재단해서 나의 위험성을 삭제하지 말라. 난 이름 붙여지지 않은 채 차라리 유령(비존재로서)처럼 살겠다. 그래서 어디에나 아무때나 출몰하겠다. 수동적으로 조금씩 자본주의에 참여하지 않겠다. 나는 미용실에 가지 않으며 백화점에 가지 않는다. 이렇게 조금씩 자본주의를 침몰시키겠다. 음핫!!! 위안은 안되는군.

 

 

아무튼 나는 자본주의에 대립하고 투쟁하는 게 아니다. 코소가 말하는 것처럼 대립, 투쟁과 그것의 통합, 해결이라는 사고 방식은 비현실적이다(219p). 대립 투쟁은 영속하지 않고 통합되지도 않는다(푸코가 어디선가 귀뜸해 주었듯). 대립 투쟁 모델은 ‘타자 배척’에 매어 있을 수 밖에 없다. 여성운동이 외로운 건 남성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가야할 길은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그 둘을 아우르는 ‘공통적인 것’(기관 없는 신체인 지구처럼-이진경 해제에서)을 토대로 하는 사고이다.

 

 

이러한 사유 방식에는 젠더 정체성도 자기 존재도 소멸시키며 그래서 휴머니즘도 없다. 들뢰즈는 자신의 소논문(「내재성」, 1995)에서 비인격적 유아의 삶을 예찬했다(270p). 이와사부로 코소는 ‘비인격적 개체화’ 그 ‘덧없음’ 자체를 힘으로 삼는 삶, ‘자기만의 삶’을 넘어서는 삶이 우리가 재구축해야 할 삶이라고 말한다.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난 ‘보통의 삶’으로서 말이다.

 

 

우리는 국가 중심주의에서도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이땅은 너의 땅이 아니면 안되는 것이다(285p).

 

 

공통적인 것을 위한 감각에는 이런 익명의 혹은 액체의 무엇이 필요할 것 같다. 민중을 넘어선 세계 민중으로, 주체를 넘어선 비인칭 주체?로, 국가를 넘어, 젠더를 넘어...넘을 게 많다. 나는 코소의 이 책을 바틀비의 ‘수동성’ 즉 자기소멸적 태도에 빗대 읽어 보았다. 오독도 독서이므로, 죽음의 도시에서 독서하기(자기만의 삶을 넘어설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일 것도 같다) 또한 하나의 수동성으로서 생명의 거리를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봄볕에 취해 책장을 넘기며 생각해 본다. 뫼르소의 태양이 부럽지 않다.

a*******m 2013.04.04.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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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민중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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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어떤 도시를 생각할 때 그 도시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물이나 시설을 떠올리곤 한다. ‘파리’하면 에펠탑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민중을 소외시키는 물신숭배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도시를 구성해나가는 것은 민중이다. 사부 코소는 현대 사회에서 다운타운으로의 인구집중이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사방으로 사람들이 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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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어떤 도시를 생각할 때 그 도시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물이나 시설을 떠올리곤 한다. ‘파리하면 에펠탑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민중을 소외시키는 물신숭배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도시를 구성해나가는 것은 민중이다.

사부 코소는 현대 사회에서 다운타운으로의 인구집중이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사방으로 사람들이 흩어짐에 따라 고전적 메트로폴리스가 사라지고 있는데, 이에 따라 누각거리가 선명하게 분리되어 나타나게 된다고 한다. 여기서의 누각대규모 건물 및 교통기관 등의 상징적/기반적 시설”(pp30~31)을 의미하는 반면에 거리는 민중의 집합성과 관계성을 보여주는 지표로서의 공간/장소을 의미한다.

 거리의 힘은 누각을 형성한다. ‘누각거리의 활력, 노동력, 창조력 등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는 존립할 수 없다.

 

요컨대 누각은 그것이 아무리 강력하게 보일지라도 거리의 부양가족 혹은 기생충에 불과하다.(p.299)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민중은 누각으로부터 끊임없이 추방당하는데, 이것이 민중들의 유동성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누각으로 상징되는 도시 중추는 투기 자본의 놀이터가 되어 상품화되고 있다.

이에 따라 누각거리의 대립은 선명하게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이 그동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러한 대립은 도시계획자연발생적 민중공동체들의 대립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국가나 자본에 의한 도시개발은 자연발생적 공동체들을 파괴하곤 했다.

물론 국가나 자본이 이러한 억압과 파괴만을 일삼는 것은 아니다. 국가나 자본의 거대 건축계획 혹은 개발계획은 이상적인 미래상을 과시하며 도시인구를 그 속으로 끌어들이려”(p.92) 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건축물 또는 시설에는 그러한 미래상이 골동품처럼 보존되어 있다.”(p.92)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 탓일까? 오늘날의 개발과 건축에는 그러한 도시적인 상상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뉴욕에는 어떤 비전도 없는 개발, 개발을 위한 개발, 순수개발의 시대가 도래하여, 지금 그 연장선상에서 건축 붐이 진행되고 있다.(p.95)

저자는 이러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개발적인 상상력, 누각을 만들어내는 상상력이 아닌  '유토피아적 상상력을 통해서 골동품적인 건축공간의 혁명적인 재이용”(p.96)을 수행할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유토피아적 상상력'에 부정적인 입장이다. 유토피아적 상상력은 전체주의에 악용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처참한 현실을 참아내게 했기 때문이다. 

 

2.

오늘날의 자본과 사람의 흐름은 도시들 사이에 일종의 관계를 형성시키는데, 이러한 관계를 메갈로폴리스라고 부른다. 또는 메타도시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메타도시는 굳이 한 나라 안에 있는 도시들 사이의 관계일 필요는 없다. 세계화는 서로 다른 나라의 도시들을 서로 연결시켜서 메갈로폴리스화시킨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메갈로폴리스화가 운동또는 이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저자가 살고 있는 뉴욕이라는 장소를 놓고 볼 때 다른 도시와의 관계 맺기는 1)세계민중의 이동의 궤적 2)노동력의 궤적 3)자본의 운동의 궤적 4)군사개입의 궤적이라는 운동혹은 이동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궤적은 거대한 도시 간의 네트워크, 세계도시를 형성하고 있다.”(p.39)

그리고 이러한 이동과 운동에 의해,

 

출생도, 언어도, 문화도 다른 타자들이 어떤 공간 안에서 만나고 교류를 시작한다. 대립/투쟁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것을 넘어 새로운 관계성이 구축될 가능성 또한 그곳에서 비로소 싹튼다.(p.217)

 

각각의 메트로폴리스는 이렇게 우연한 마주침을 통해 관계성을 구축함으로써 만들어지는 다중의 힘에 기초해 있다. 그리고 다중의 운동은 메갈로폴리스를 기초짓는다. 사부 코소는 뉴욕을 대신하는 새로운 도시 모델로 메갈로폴리스로서의 간도시적 네트워크를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도시민중은 이동을 통해서 점점 간도시적인 존재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오늘날의 도시에서의 투쟁은 누각거리의 투쟁, 즉 국가와 자본의 구축적인 권력과 민중의 자연발생적인 힘 사이의 투쟁이다. 코소에 의하면 오늘날 누각은 민영화에 의해 점점 더 탈 중심화되고 키메라화고 있는 군산복합체’”(p.296)가 되어가고 있는데, 코소는 이러한 군산복합체로서로 누각을, “/제도로서의 국가까지도 집어삼키는 거대누각’”(p.296)이라고 부른다.

현대 자본주의는 이렇게 화려한 거대누각뿐만 아니라 거대한 빈민촌이자 판자촌인 메가슬럼을 생산해내고 있는데, 코소는 오늘날 거리의 투쟁메가슬럼에서 벌어지는 민중의 투쟁-사람들의 생활의 재생산, 자율과 민주주의의 형성, 행복의 추구-을 모델로 하고 거기서” (p.300)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메가슬럼은 지구적인 계급투쟁의 최전선”(p.301)이 되어가고 있다. 메가슬럼의 민중들은 자신들을 통제하고 파괴하려는 권력에 맞서 싸울 뿐만 아니라 자율적이고 민주적으로 자기-조직화를 하고 공통적인 것의 조직화를 진행시키고 있다.

권력과 메가슬럼의 대립은 코소가 인용하는 슬럼, 지구를 덮다의 다음과 같은 문단에 극한적으로 잘 드러나 있다.

 

보안 시설이 갖춰진 도시 공간과 악마적 도시 공간의 대립이라는 기만적 변증법에 의거하여, 끝없는 재난의 듀엣이 울려퍼지기 시한다. 매일 밤, 슬럼 구역 상공에서 윙윙거리는 무장 헬리콥터가 비좁은 거리를 오가는 정체 모를 적들을 추적한다. 판잣집이나 도망가는 자동차를 향해 지옥불을 뿜어댄다. 아침이 밝으면 슬럼측은 자살폭탄이라는 말없는 웅변으로 이에 응수한다. 조지 오웰이 예언했던 억압적 테크놀로지가 제국의 편에 포진해 있다면, 제국에서 추방당한 사람들 편에 있는 것은 혼돈의 신들이다.(p.302)

 

코소는 여기서 혼돈의 신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판잣집들 사이로 이어진 미로 같은 거리의 은유로 해석한다. 결국 국가-자본 권력과 메가슬럼의 대립은 누각거리의 대립, 계획자연발생성사이의 비대칭적 투쟁이 극한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4.

앞에서 설명했듯이, ‘누각거리의 힘과 역능에 크게 의존할 수 밖에 없고, 그런 의미에서 누각은 거리의 활력에 기생하는 기생충과 같은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도시를 대표하는 것은 누각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우리는 이러한 물신숭배를 극복해야 한다.

다시 말해 오늘날 우리에게 집중 조명을 받아야 할 것은 ‘누각’을 구축하는 ‘계획’과 ‘개발’의 상상력이 아니라 ‘거리’를 짜나가는 민중의 자연발생적인 힘과 역능이다.

g****y 2013.04.0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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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칭송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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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콘크리트 구조물에 영혼을 입힌 것이다뉴욕은 지구에서 가장 거대한 대도시이다bsdyr가장 거대한 콘크리트 생명체라고 말 할 수있다개활지를 나눠 로비에서 성공한 부동산 개발업자들에게 분양하면노동자가 유입되고 그것을 따라서 예술가와 이민자들이 모여든다대도시의 조건은 걷기 편한 도시인데 뉴욕은 가장 모범적인 보행자의 천국이다또 뉴욕은 단일 언어를 쓰지 않는다 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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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콘크리트 구조물에 영혼을 입힌 것이다

뉴욕은 지구에서 가장 거대한 대도시이다

bsdyr가장 거대한 콘크리트 생명체라고 말 할 수있다

개활지를 나눠 로비에서 성공한 부동산 개발업자들에게 분양하면

노동자가 유입되고 그것을 따라서 예술가와 이민자들이 모여든다

대도시의 조건은 걷기 편한 도시인데 뉴욕은 가장 모범적인 보행자의 천국이다

또 뉴욕은 단일 언어를 쓰지 않는다 각각의 이민자는 자신들의 언어가 있고 영어도 수많은 분파가 있다

책 전체에 뉴욕을 칭송하는 내용이 가득하다

작은 책인데 엔저로 인한 저자 선인세 때문인지 가격은 18,000원으로 높은 편이다

l*****1 2013.04.18.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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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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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현재 지구상에서 경험하고 있는 것은 '죽음을 향해 가는 도시'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되돌아오는 거리' 바로 이것이다(에필로그)   우리는 정말 저런 도시와 저런 거리를 경험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경험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떤 사람은 도시와 거리에 대해 관심도 없고 그것이 왜 얘기 거리가 되는지 조차 의아해 할 것이다. 그런데 코소는 어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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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현재 지구상에서 경험하고 있는 것은 '죽음을 향해 가는 도시'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되돌아오는 거리' 바로 이것이다(에필로그)

 

우리는 정말 저런 도시와 저런 거리를 경험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경험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떤 사람은 도시와 거리에 대해 관심도 없고 그것이 왜 얘기 거리가 되는지 조차 의아해 할 것이다. 그런데 코소는 어떻게 '우리는 경험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을까

 

책의 제목은 '죽음의 도시'로 시작하고 있지만 코소가 다루고 있는 뉴욕과 세계의 도시들이 '죽음이 점령해 버린' 도시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의 거리' 역시 생명력이 넘치는 어느 특정 거리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코소가 나름대로 정의하고 있는 '거리'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코소가 가장 마지막에 던진 에필로그의 이 한 마디로 인해 독자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난 뒤의 느낌은 '따뜻하다'

 

거북이 등짝처럼 갈라진 가혹한 가뭄의 땅에 힘겹게 피어난 풀 한포기의 사진을 보고서는 쉽사리 풍성한 수확의 그림을 그릴 수 없다. 화재로 다 타버린 산등성이에 바람을 타고 날아와 막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잡목 하나를 보고도 상쾌한 숨을 들이 쉬기는 쉽지 않다. 코소가 결국 뉴욕의 거리에서 찾아낸 것들이란게 가뭄의 풀한포기 만도 못하고 산등성이 어린 잡목만도 못해 보인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 한쪽에서 빛이라고 하기에도 기대라고 하기에도 뭐한 이상한 것이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을 뭐라고 부를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움직임으로 인해 마음이 따뜻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의 저자 이와사부로 코소는 1955년 일본에서 태어나 20대 중반인 1980년대 초 뉴욕으로 건너가 약 30여년간 뉴욕에서 살고 있다. 그는 이미『뉴욕열전』(2010)과 『유체도시를 구축하라』(2012) 통해 도시와 거리에 대한 자신의 생각들을 펼쳐 보였다. 『뉴욕열전』에서는 운동하는 뉴욕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운동은 사람들의 운동이다. 『유체도시를 구축하라』에서는 사람들의 움직임, 움직이는 신체 곧 유체(流體)에 주목하고 있다.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활력으로 도시를 바라본다. 이 책에서는 4년동안 뉴욕 등의 도시에서 생긴 일들과 위의 두 책에서 펼친 저자의 도시와 거리에 대한 생각을 한층 더 쉬운 말로 연결해서 풀어냈다.

 

이 책에 실린 42편의 글은 일본의 아사히신문출판사에서 간행하는 월간지 『한 권의 책』에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연재되었다. 저자가 뉴욕에서 4년 동안 겪은 크고 작은 일들을 어렵지 않은 말로 담담하게 써내고 있지만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그의 애정어린 비판 정신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도시'일까?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 한국 인구의 90% 이상이 도시에 산다고 한다. 우리가 도시에 산다고 할때의 도시는 특정지역, 공간, 장소로서의 도시를 말한다.

가수 이용은 "종로에는 사과나무를 심어보자/ 그 길에서 꿈을 꾸며 걸어 가리라/ 을지로에는 감나무를 심어보자/ 감이 익을 무렵 사랑도 익어 가리라" 라고 서울을 노래했었다. 이 노래를 듣고 부르는 사람들이 서울거리의 과일나무들을 떠올리며 휴지회사의 광고처럼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를 떠올리지 않을 것은 너무 뻔한 일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도 '서울'을 떠올리며 사람들을, 관계를, 꿈을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면 한결 더 명확하게 도시를 볼 수 있게 된다.

 

누각이란 … 대규모 건물 및 교통기관 등의 상징적/기반적 시설이다. 그에 반해 '거리'는 사람들의 집합성과 관계성이 최대로 활성화된 상황/장소이다(프롤로그)

코소는 도시를 두개의 개념으로 분해했다. 정확히는 그가 분해한 것이 아니라 도시에서 진행된 누각과 거리의 분리현상을 파악한 것이다. 그래서 코소의 시각은 다르다. 독특하고 진지하다. 겉으로 쉽게 나타나지 않는 현상들을 친절하게 보여준다.

 

예를들면 이런거다.

경제문제에 대한 코소의 시각

2007년 부터 촉발된 미국의 금융위기는 2008 9월에 이르러 미국의 투자은행(IB)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 신청을 하면서 정점에 다다랐다. 나를 비롯한 보통의 비금융권 사람들은 그동안 듣도 보고 못하던 '서브프라임모기지론(비유량주택담보대출)'이란 용어를 처음 듣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와 서브프라임모기지사태를 이해하게 되었다. 물론 그것도 이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제대로 이해를 했을 경우에 한해서 말이다.

 

서브프라임모기지사태: 사태의 발단은 2000년대 초부터 시작된다. 2000년대 초 IT버블붕괴, 911테러, 아프간/이라크 전쟁 등으로 美 경기가 악화되자 미국은 경기부양책으로 초 저금리 정책을 펼쳤다. 이에 따라 주택융자 금리가 인하되었고 그러자 부동산가격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주택담보대출인 서브프라임모기지론의 대출금리보다 높은 상승률 보이는 주택가격 때문에 파산하더라도 주택가격 상승으로 보전되어 금융회사가 손해를 보지 않는 구조여서 거래량은 대폭 증가하였다. 증권화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은 높은 수익률이 보장되며 신용등급이 높은 상품으로 알려져 거래량이 증폭했다. 하지만 2004년 미국이 저금리 정책을 종료하면서 미국 부동산 버블이 꺼지기 시작했으며 서브프라임모기지론 금리가 올라갔고 저소득층 대출자들은 원리금을 제대로 갚지 못하게 된다. 증권화되어 거래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을 구매한 금융기관들은 대출금 회수불능사태에 빠지게되고 손실이 발생하였고 그 과정에 여러 기업들이 부실화 된다. 미 정부는 개입을 공식적으로 부정했고 미국의 대형 금융사, 증권회사의 파산이 이어졌다. 이것이 세계적인 신용경색을 가져왔고 실물경제에 악영향을 주어 세계 경제시장에 타격을 준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이다.(출처: 위키피디아)

 

뉴욕(및 그외 미국의 대도시) '비유량주택담보대출'에는 잔혹한 역사성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이야말로 인종(계급)차별의 도시공간적 표현이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 미국 대도시에는 '융자거절지대'가 존재해 왔다. 이는 금융기관이 흑인과 히스패닉계 주민의 거주구에 부여한 가치적 차별의 지표인 셈이다. 이러한 장소의 지정이야말로 이른바 게토라고 하는 지역성을 고정시켰다고 일컬어진다.(P34)

위의 두 개의 단락에서 우리는 같은 '서브프라임모기지'라는 단어를 사람들이 어떻게 해석하는지 어떻게 경험하는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코소는 사태 이면의 소리를 듣고 보고자 한다. 그는 집을 빼앗기고 주거할 곳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그들의 '움직임'을 주시한다. 그리고 스쾃(squat)이나 점거행동(occupation)으로 논의를 이어가기도 한다. 도시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도시를 영속하는 구조, 요컨대 '고정체'로 떠올린다. 그러나 도시에서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는 '일시적인 것'으로 관점을 옮기면 도시는 '운동체'로 보이기 시작한다. (P44)

 

정치문제에 대한 코소의 시작

 

부시정권 아래에서의 기나긴 8년은 강요된 군사적 위기감과 한껏 부추겨진 소비문화라는 기괴한 한 쌍의 가치관이 미디어의 조작에 힘입어 훌륭하게 달성된 무시무시한 시대였다(P259)

그런데 도대체 왜 미국 대중은 두 번씩이나 부시를 뽑았을까 도대체 왜 어느나라의 대통령은 이번에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 우리에게도 궁금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코소는 가장 큰 원인중의 하나가 지식인이나 예술가들이 살고 있는 뉴욕의 도시문화와 미국적인 대중사이의 어긋남이라고 한다.

 

이 도시에는 지식인이나 예술가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세계에 대한 정보, 발달된 의식, 비판적 사고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훨씬 세련되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믿음은 진정한 대안을 형성하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세련된 문화는 주로 특권계급의 사회 안에서 소비되고, 축적된 지성은 폐쇄적인 아카데미즘 내부에서의 발표로 소모되고 소비된다. 비찬적인 담론도 많은 경우 멋들어진 디너파치 석상에서의 회화로 해소되어 버릴 뿐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결국 맛있는 와인을 마시며 세상을 근심하고 서로의 지성과 혁신성을 확인한 후 집으로 돌아간다.(P129)

그렇다면 서울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일까. 뉴욕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엘리트들이 도시와 풍요로움이 제공하는 고급소비재로서의 '문화'를 향유하며 실천하지 않는 지성에 만족하고 있을 때, 서울의 엘리트와 대중들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생겨나고 있었던 것일까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코소가 본 직장이란 어떤 곳일까

2001 9 11. 많은 미국인들에게 이 날은 아직 과거로 남기에는 이른 것 같다. 아직도 생생하게 괴물처럼 살아 꿈틀거리며 많은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다. 이는 단지 어느 해 9 11일에 있었던 어마어마한 사건때문이 아니다. 그 이후로 미국인들에게 체계적이고 치밀하게 이식된 '공포'의 망령이 그 부피를 키워가며 성장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정치가들에게 있어 '공포' 만큼 효율적이고 성공율이 높은 억압의 도구가 있을까. 그리고 그 공포는 지금 사람들의 일상까지 뿌리를 내렸고 아주 성공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다름 아닌 직장에서 말이다.

 

미국에서 사람들이 가장 자신을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는 장소인 직장이야 말로 자유의 나라 미국이라는 신화와는 가장 거리가 먼 '억압과 공포가 지배하는 장소'이다. 20세기 초반 찰학자 존 듀이는 미국의 민주주의는 그것이 직장으로까지 확장되지 않는 이상 결국 실현되지 않을 것임을 예견했다. (P150)

 

학벌, 출신지역, 남성/여성, 이성애자/동성애자, 인종, 민족, 피부색, 기혼/비혼 등 세상이 만든 온갖 분류와 그것에 따른 차별과 불평등이 직장만큼 적나라하게 그리고 잔인하고 처절하게 드러나는 곳이 없다는 생각을 해보면 직장이 갖는 '공포성'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만 하다.

 

센트럴파크는 어떤 곳인가

뉴욕을 생각하면서 센트럴 파크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을 일이다. 뉴욕을 배경으로한 많은 영화속에서도 센트럴 파크는 빼놓을 수 없는 배경이다. 뉴욕을 여행하는 관광객들도 그곳엔 꼭 가게 될 것 같다.

 

거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코소는 왜 센트럴파크를 도시 한가운데 보존된 아름다운 자연으로만 편안하게 감상할 수 없을까. 그곳에 계획된 '말소'가 있었다고 한다. 대지를 점유하는 일 없이 자연과 공존하며 살던 먼시족(Munsee Indians) 문명의 말소, 공원과 그 주변부지에 살던 농민들과 아프로 아메리칸 커뮤니티의 말소, 그리고 공사현장에 투입된 약 2만여 명의 이민노동자들의 노동의 말소가 있었다고 한다.

센트럴파크는 문명이전의 맨하튼섬이 마치 그랬으리라는 듯이 무구한 자연을 표상/대행하고 있다. 하지만 그곳을 걷는 주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이 자연환경 밖의 경관일 것이다. 이공원안의 자연환경은 그 자체를 바라보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그 환경 사리로 불쑥불쑥 얼굴을 내미는 문명을 보기위한 무대이다. 나는 내 마음대로 이를 '역차경'이라고 부른다. (P152)

 

위베르 다미쉬 이공원을 '문화가 자연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드라마를 영원히 전시하기 위한 자연의 박제' 센트럴파크는 변치않는 그 모습을 보존함으로써 공원밖에 바둑판 모양의 그리드로 펼쳐진 시가지에서 영원히 계속될 개발과 그에 의한 변화를 관찰하고 칭찬하기 위한 장치이다.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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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도 코소는 메가슬럼, 현대 정치의 한계, 보안문화, 신자본주의, 세계민중음악, 미디어의 민심통제, 부동산 예술(투자)등에 대해서 얘기한다. 그리고 그와 함께 ,

조심스러운 질문을 던지면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인류/세계를 사고할 때, 더 이상 '대립/투쟁 모델'에 기댈 수 없다는 사실이다. '대립/모순과 그것의 통합/해결'이라는 사고방식은 언뜻 볼 땐 그럴듯한 것 같지만 사실은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만약 우리들이 계속해서 '대립/투쟁 모델'에 구애된다면, 사회는 점점 더 다양한 형태의 광적인 타자배척으로 향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에 맞서기 위해 필요한 것은 …불가피한 공생상태를 전제로 삼아 차이를 긍정적인 원리로 바꾸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이상주의적이라고 비판받아 온 아나키스트적 원리들 -자율, 자주연합, 자기조직화, 상호부조, 그리고 직접민주주의-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절박한 리얼리티를 가지고 일어서기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도 이런 원리들을 믿고 일상속에서 조용히 실천해 온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보이지 않는 일상의 온갖 국면에서 언제나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다하여, 권력자들이 뿌려놓은 문제를 뒤치다꺼리해 온 여성, 인종적 소수자, 무산자들이다. (P221-222)

 

현재 세계는 대격변의 시기에 있다. …사회주의권의 붕괴이후 지금까지,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가 이끌어 온 지배적인 가치와 스타일, 그것들이 구성해 온 가치체계가 와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지금까지의 정치/경제를 대체하는 새로운 원리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원리가 제도로서 설립되기 전에 그 토대로서 필요한 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의 가치들의 가치전환이다. (P263-264)

 

그래서 거리가 중요하고, 거리에서 살아나고 있는 사람들이 중요하고, 거리에서 우리의 가치를 바꿔나가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거리로 생명이 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함께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거리에서 우리는 가슴에서 가슴으로 따뜻함을 전하게 될 것이다.

 

 

p****h 2013.04.06.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조금은 불편하고 때로는 아름답지 않은, 도시의 해부학도판
"조금은 불편하고 때로는 아름답지 않은, 도시의 해부학도판" 내용보기
조금은 불편하고 때로는 아름답지 않은 도시의 해부학도판 <죽음의 도시, 생명의 거리>를 읽고 2013.4.5. 김린 정기적으로 이화여대에 갈 일이 있어서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이대앞에서 식사를 하게 된다. 갈 때마다 느끼지만 이 근처에는 왜 이렇게 제대로된 음식점이 드물까.십 년 전만해도 꽤나 잘나가는 중심상권이었던 이곳은 이제 옷과 화장품 쇼핑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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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불편하고
때로는 아름답지 않은
도시의 해부학도판
죽음의 도시, 생명의 거리를 읽고

2013.4.5. 김린

정기적으로 이화여대에 갈 일이 있어서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이대앞에서 식사를 하게 된다
. 갈 때마다 느끼지만 이 근처에는 왜 이렇게 제대로된 음식점이 드물까.십 년 전만해도 꽤나 잘나가는 중심상권이었던 이곳은 이제 옷과 화장품 쇼핑을 위해 관광버스를 타고 온 패키지 투어 관광객으로나 붐빈다. 뜨내기들에게 소구하는 음식맛이래봐야 얄팍할 수 밖에. 서울 곳곳의 이러한 흥망성쇄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홍대앞이 젊고 가난한 예술가들의 아지트로 떠오르면서 상업화되고, 거대상권이 들어와 예술가들은 상수, 합정 뒷골목으로 이동한 것은 이미 옛 이야기다. 가로수길에 밀려난 세로수길이 그랬고, 이제는 그나마도 관광지화 되어버려 이태원일대가 붐빈다. 그 다음은 또 어디일까?

이삼년 주기로 점점 고속화되고 있는 이러한 자본과 사람의 이동, 그 갈등의 과정을 통해 도시를 해석한 책을 만났다. 이와사부로 코소의 도시3부작 중 세번째 책, <죽음의 도시, 생명의 거리이다. 전작 두 편뉴욕열전유체도시를 구축하라는 유희적 산책을 통해 독자를 뉴욕의 도시성 한 가운데로 안내한다. 미셀 드 세르토가 지적한 뉴욕, 즉 마천루의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하늘 위 신의 관점이 아니라 철저하게 육신적인, 냄새나고 먼지나는 거리를 누비며 관찰한 산책자의 관점으로 본 뉴욕이 전작 두 권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현대 디지털 지도에서 명확히 대비되는 위성뷰거리뷰에 비할만한 현저히 다른 경험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했던 코소는, 본작에서 또 한번 도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거리뷰에서도 볼 수 없었던, 화려한 스펙터클 너머의 외면할 수 없는 불편한 진실을 마치 엑스레이뷰처럼 마주하게한다. 도시, 거리의 역학관계를 42편의 짧은 에세이들을 통해 조금씩 해부해가는, 조금은 불편하고 아름답다고만은 할 수 없는 도시의 해부학도판이다.
일본에서 뉴욕으로 이주해간지 삼십 년이 되어가는 저자 이와사부로 코소. 도시에 이민 온 외부자에서, 도시에 적응하고 뿌리내려 질서 속에 편승된 내부자로 전환해가는 세월을 겪은 당사자다. 자신을 도시 속에 위치시키는 정체성의 여정과 함께 그의 이야기도 변모한다. 2004~2006년에 걸친 전작 두 편에서 산책자 코소를 보여주었다면, 이번에는 의식여행자(armchair traveler) 코소가 되어, 걷지 않고도 오사카와 뉴욕을 넘나드는 의식의 여행을 펼친다. 실제로 저자는 전작 두 편을 쓸 때와는 달리 본 책을 쓸 당시에는 자전거 주행이나 도보여행을 할 여유가 없었노라고(p.6) 고백한다. 그렇기에 코소는 본 책에서 뉴욕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뉴욕만의 이야기가 아닌 거대도시의 공통적 속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이제 코소에게 있어 도시를 이야기하는 것은 특정 장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각종 사회운동, 정치, 이데올로기, 예술, 생태학 에대해 이야기하는 시금석이 되었다.(p.32)
코소는 뉴욕에 처음 발을 딛고 생각한다. 이 도시는 오사카를 닮았다. 도쿄가 아닌 오사카를. 낯선 사람 사이에도 일상적으로 편하게 대화하는 뉴요커의 의사소통방식을 보며, 도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간사이 지방의 사투리로만 나눌 수 있는 소란스러움과 정겨움을 상기한다.(p.75) 누구나 한 도시를 이해하는데 있어 다른 도시와의 연관관계 속에서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된 뉴욕에서 오사카적인 것 발견하기라는 코소만의 관점은 거대도시 뉴욕에 나있는 어쩐지 비균질적인 구멍들을 차례로 탐사하기에 이른다.
이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두 가지 질문을 하게된다. 첫번째는, 언젠가 한번쯤 이방인이 되어 외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도시를 떠올리며, 그 때 나는 어땠지? 이를테면 나의 런던은, ‘런던+서울의 유비 속에 끊임 없이 움직이는 유체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게된다. 두번째는, 철저하게 안쪽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현재의 도시에서 외부자에게 보여질 이곳은 어떤모습일까? 이미 서울은 스스로의 신체 안에 다른 도시를 지니고 온이주자들의 이동, 생산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도시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 자본의 논리에 의해 멸균되어가는 도시 서울. 그 외모가 아름다울 수록 보이지 않는 사회적 과정이 억눌리는 경향이 있다(p.250)는 코소의 말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 책을 집필하는 시기에 공교롭게도 저자는 미국의 시민권을 갖게된다. 긴 이민 생활 끝에 내린 존재론적 결단이다. 이제는 공식적으로 안쪽의 사람이 된 코소가 다시 한 번 일본이라는 동아시아의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구축해갈 새로운 도시 이야기가 기대된다. 같은 동아시아의 끝에 위치한 우리는 그의 책을 통해 어떻게 북미의 한 도시를 읽어낼 수 있을까. 또한 동시대 거대도시의 몰락현상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서울로 눈을 돌릴 때, 독자 개개인의 해석을 기다리는 거리의 이야기들이 살아서 돌아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l*****o 2013.04.05.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