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의 제목인 ‘빛이 있는 동안 빛 가운데로 걸으라’ 라는 작품에서 그의 신앙관을 알 수 있었다. 세속적인 삶 안에서 행복을 찾아야하는지 또는 사유재산을 포기하고 신앙 공동체로서 살아가면서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하는지 고민하는 주인공과 다른 등장인물간의 대화를 통해서 톨스토이의 신앙관을 알 수 있었다. 기존의 사회 시스템은 결국 폭력에 근거하기 때문에 사회에 분열이 초래 된다는 논리, 남자가 여자를 하나의 인간으로 보기 위해서는 그들을 나의 자매처럼 생각하면 된다는 이야기가 특히 생각할 바를 주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물질을 소유하기 위해 온 시간을 보내는 현대인들에게 톨스토이가 생각하는 이상적 생활을 얘기하면 먼 나라 이야기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와의 경쟁에서 패한 사회주의의 모습과 유사한 나머지 더더욱 설득력이 잃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행복감은 선진국보다 후진국에서 더 높게 나타나고 선진국에서 우울증과 같은 마음의 병이 더 생긴다는 점은 물질이 다가 아니라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최소한 필요한 것으로 물질의 욕구는 제한하고 나머지 에너지는 신앙에 쏟는가면 이상적인 삶이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 때 방탕한 생활을 했다던 톨스토이는 그런 것들로는 인생의 만족을 얻을 수 없다고 한다. 영상매체에서 쏟아져 나오는 선정적 장면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충고대로 그들을 가족이라는 마음으로 본다면 그래서 본인의 마음에 평안이 온다면 그것이 신앙인들이 누릴 수 있는 참다운 행복으로 가는 처음 발걸음이 될 것이다.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이라는 영화를 본적이 있다. 단지 러시아의 대문호인 줄로만 알았던 톨스토이에게 자신의 사상을 추종하는 이들이 있었고 이들이 공동생활을 영위했다는 사실을 알고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당시 영화는 신앙에 기반한 그의 구체적 사상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지는 않았다. 이 책은 그 영화에서 알 수 없었던 그의 사상에 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가난하지만 사랑을 실천하는 단편 속의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맘에 곱씹으면서 물질이 넘쳐나는 오늘날 어떤 마음으로 신앙을 실천해야 할지 생각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
|
톨스토이... 아...톨스토이 단편집 서평을 써야할 때가 왔군요. 고전읽기. 이게 맘처럼 쉽게 안되더군요. 이웃 블로그에 고전 읽기에 대한 좋은 글이 있길래 옮겨 봅니다.
좀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호흡을 좀 길게 해야할 것이다. 후훅-심호흡을 하고... ...고전이란 뭔가 근본적인 것, 본질적인 것, 보편적인 것,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책이다. 그런 고전을 봤는데 감흥이 없다? 고전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말이 되겠다. 그럼 그렇게 보일 때까지 한 번 들여다보자. (*출처 : http://jrhong71.blog.me/90161208611)
흠...그렇군요. 읽어도 별 감흥이 없는 저는 고전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 되는 거로군요.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고전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다른 작가의 저작을 통해 이미 접해보거나 고민해 본 문제등으로 약간은 식상한 면이 없지 않더란 말이지요. 그래도 겸손이 미덕인지라 후훅-후훅-여러번 심호흡을 하고 읽어보았습니다. 책의 표지에도 나와 있듯이
기독교로의 회심이후 기쁨과 행복에 대하여 문학으로 계시하는 톨스토이의 영적 성찰!
기독교적 내용을 담고 있는그의 단편을 모아 놓았군요. 부분적으로는 정말로 그가 성경을 정확히 읽어낸 것인지 확신이 안서는 부분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래요, 본질적인 것을 언급해 놓았군요. 책에는 * 있는 자들의 한가한 대화 * 빛이 있는 동안 빛 가운데로 걸으라. * 일리야스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 * 하나님은 진실을 아시지만 기다리신다 * 세 은자 * 회개하는 죄인 이런 단편들이 실려있습니다만 이 중에는 학창시절 여러번 접했던 이야기도 있고 처음 읽어보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 중 인상적이었던 이야기를 소개하자면 <세 은자>이야기와 <하나님은 진실을 아시지만 기다리신다>입니다.
<세 은자>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어느 작은 섬에 세 은자가 자신과 타인의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하며 살고 있는데 한 주교가 그들을 찾아가 교리와 주기도문을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순박하고 겸손한 은자들은 열심히 따라해 보지만 곧 잊어 물위를 달려 주교를 찾아와 묻습니다. 아까 뭐라고 하셨더라... 주교는 그제야 깨닫고 말하지요. "하나님의 사람들이여 여러분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될 겁니다. 여러분을 가르칠 사람은 제가 아닙니다. 우리 죄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232p 아... 우리는 얼마나 섣불리 가르치려고 드는지... 재밌는 것은 은자에 대해 얘기하는 또 다른 한 사람의 관점. "말씀드리기 뭐하지만 그런 수고를 할 만큼 가치있는 노인들은 아닌듯 합니다. 제가 듣기로 어리석은 노인네들이라고 하더군요. 아무것도 이해를 못하고 바닷속 물고기처럼 말 한마디 못하는 노인네들이라고 말입니다."-224p 우리는 과연 타인에 대해 올바른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해 주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진실을 아시지만 기다리신다>에 대한 소개는 목사님이신 역자의 짤막한 해설의 인용으로 대신할까 합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이 단편은 한 인간의 비극적 운명의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두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어쩌면 세묘니치는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도구로 사용된 피해자일 수도 있다. 왜? 악시노프라는 세상에 속한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서, 또 세묘니치라는 죄 지은 한 인간을 회개하게 하고 하나님 품에 안기게 하기 위해서다. 이 단편은, 악시노프가 젊어서 방탕했지만 재산도 있고 재주도 많은데다 외모도 준수한 호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결혼 후 생활이 조금씩 건전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세상을 즐기는 세상적 인물이었다. 하나님은 그런 악시노프를 구원하기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그 계획을 세묘니치라고 하는 강도를 통해 이루셨다...악시노프는 (이 강도 때문에) 살인의 누명으로 이십육 년을 시베리아의 감옥에서 유배되어 살게 되고 그 가운데 신앙심이 깊어가며 감옥의 성자로 인정받게 된다. 그의 가슴속에 응어리진 한이 없었을까? 결국 하나님은 세묘니치라는 강도와 악시노프를 만나게 하고 악시노프가 그를 용서하게 한다. 악시노프는 오히려 세묘니치에게 자신이 더 죄인임을 고백한다. 그 이상의 용서가 있을까? 용서받을 자와 용서할 자가 뒤바뀌는 장면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며 하나님의 역사다. 톨스토이는 구구절절 악시노프의 삶과 그가 행했던 여러가지 선악을 열거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이 동일하게 짓는 선이요 악이기 때문이다. 악시노프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이다. 다행히 살인의 누명과 같은 엄청난 일을 경험하지는 않지만 우리에게도 수많은 삶의 파노라마가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그 파노라마는 의미있게 다가오고 우리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얼마나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지 알게 된다.-259p,260p
언젠가 TV 프로그램에서 "톨스토이"에 대해 다루는 내용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이상적인 신앙의 생활을 추구한 나머지 자신의 책에 대한 인세를 거부하고 모든 재산의 소유 자체를 거부했다고 하더군요. 주렁 주렁 낳아놓은 아이들의 양육도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던가 봅니다. 그 아내의 노고가 가히 짐작이 되네요. 요즘은 성경을 지나치게 의역하거나 비약 해석하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성경의 문자적 해석보다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면에서 책의 부록에 실린 애매한(?!) 얀코의 말도 눈여겨 볼 만 하네요.
그런데 그의 문학작품 대부분이 두말할 나위없는 걸작의 대열에 든 반면, 그의 인물됨은 예나 지금이나 의문에 싸여 있다. 그가 살아있을 당시에 이미 그의 인물됨을 둘러싸고 형성된 신화는 지금도 계속된다. 그 신화는 어찌나 강력한지, 심지어 사실이나 톨스토이의 본질마저 흐리게 할 정도이다.-261p |
|
#빛이있는동안빛가운데로걸으라 #톨스토이지음 #톨스토이단편집 #샘솟는기쁨 톨스토이의 단편선은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됐을만큼 톨스토이의 책은 문화나 연령과 시대를 뛰어넘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이다. 어릴때에 톨스토이 문학의 단편의 한구절이나 단편을 접하지않은 사람은 없을것이다. 제목이 너무 좋았으며 톨스토이의 포즈와 눈빛에 압도 당하여 읽고싶었다. 표지사진은 톨스토이의 유일한 컬러사진으로 흑백으로 되어있지만 눈빛이 강렬하고 포스가 느껴지는 사진이다. 러시아의 대표작가로 러시아의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젊은시절 방탕한 삶을 살았으며 술, 여자, 도박을 즐겨하여 한때는 도박빚 때문에 저택을 저당잡히기도 한 한량이었다. 이 책은 톨스토이의 신앙, 신학, 문학이 잘 녹아있는 단편 모음집이다. 여기에 단편들은 톨스토이가 50세이후에 삶을 방황하다가 기독교로 회심하며 삶을 다시한번 생각하며 회심한 후 신앙고백이자 신앙적 관점에서 쓴 글이라 할 수 있다. 여덟편의 단편으로 되어 있으며 챕터는 삶, 사랑, 믿음에 대해 세분류로 되어 있으며 단편들이 끝나는 지점에 짧은 묵상을 통해 QT를 할 수 있어서 좋다.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살아가는데 있어서 모든것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보는 시각으로 성찰을 하고 통찰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작품을 보면서 단편이지만 팩트가 있고, 그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으며 믿음의 영적멘토인 톨스토이의 글을 보면서 깊은 통찰과 그리스도의 삶은 어떻게 우리 삶에 적용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 생각하게 해준다. 단편중에 와닿았던 단편은 <있는 자들의 한가한 대화, 빛이 있는 동안 빛 가운데로 걸으라,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가 좋았다. P.25 톨스토이는 그보다 더 심각한 우리의 모습을 꼬집는다. 다른 이의 신앙과 삶을 하나님으로부터 끌어내리려는 악한 모습이다. 자신만 못하면 그나마 봐주겠건만 다른이가 하겠다는 것까지도 가로막는다. <있는자의 한가한 대화>의 QT의 한부분을 적은 것인데 나도 반성이 되기도 했다. 의연중에 내가 혹시 상대에 대해 내멋대로 판단하지 않았는지 묵상을 통해 다시금 돌아보게 되었다. 톨스토이 단편집으로 톨스토이의 영적성찰로 기독교의 회심이후 기쁨과 행복에 대하여 들어가보자. |
|
- 톨스토이의 회심이후 쓴 단편들을 읽고- 러시아 3대 문호 중 한 분인 톨스토이(Leo Nikolaievitch Tolstoy, 1829-1910)를 만난 것은 고교시절입니다. 그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 『전쟁과 평화』 , 『안나카레리나』 ,그리고 『부활』을 읽었습니다. 당시 국어선생님께서 필독서라고 해서 읽기는 했으나, 사실 잘 생각나지도 않습니다. 다시 읽어보고 싶습니다. 그나마 단편은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는데, 최근 『빛이 있는 동안 빛 가운데로 걸으라』(샘솟는 기쁨, 2013)라는 제목으로 만났습니다. 그동안 신학서적 위주의 딱딱한 글을 읽다가, 톨스토이를 대하니 머리가 상큼 맑아지는 듯합니다. 총 9편의 단편을 통해서(50세 이후 회심한 후에 쓴 신앙고백),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정한 삶과 사랑, 그리고 믿음이 추상이나 관념이 아닌 실천이어야한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그의 삶과 신앙 체험을 녹여낸 것으로 보입니다. 역자 조병준의 깔끔하고도 시원한 문장과 읽기 편한 편집, 그리고 하나의 단편이 끝날 때마다 친절하게 ‘묵상글’을 실어줌으로써, 한 번 더 ‘되새김’하게 한 것도 큰 은혜로 다가옵니다. “있는 자들의 한가한 대화”를 읽을 때는 이중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했고, 초대교회 이야기를 다룬 “빛이 있는 동안 빛 가운데로 걸으라”를 읽을 때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 이나 『거룩한 전쟁』 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일리야스”를 대할 때는 욥기를 읽는 것 같았고, “세 은자(隱者)”를 읽을 때는 철저한 ‘겸손’을 떠올려보았습니다. 앞으로 신학 도서와 더불어 톨스토이 류(類)의 작품들도 비중을 두고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건강한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 경건한 고전들을 많이 읽어야겠습니다. 좋은 기회를 준 출판사와 역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2017. 12. 12(화). -배달보이- |
|
어둠에 붙잡히지 않으려면, 《빛이 있는 동안 빛 가운데로 걸으라》 : 톨스토이가 묻습니다. “당신은 무엇으로 삽니까?”
고전문학이 다시 바람을 타고 있습니다. 고전문학은 탄탄한 스토리 구성과 인간성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제기, 둔중하게 심장을 두드리는 작가정신이 심해처럼 가늠하기 힘든 깊이로 드리워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번 읽어도 그때마다 감정이 살아나고 이야기가 새롭게 들려오는 거겠지요.
수년 동안 만나온 애인이 다르면 얼마나 다르겠어요. 그런데 그(그녀)는 늘 새롭죠. 그(그녀)가 사랑스럽기 때문입니다. 고전문학이 독자를 끌어당기는 이유도 그런 것 아닐까요? 오래도록 사랑을 받아오니 새롭게 보이는 것. SF 영화의 영향으로 스펙터클한 화면구성과 박진감 넘친 사건전개에 익숙해진 독자들이 고전문학을 읽어내려면 처음엔 다소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애인에게 맞춰가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 과정이 오래가지는 않습니다. 말문을 튼 애인과 놀랄 정도로 가까워지듯이 고전문학도 맛과 향취에 취하면 걷잡을 수 없지요.
평소 고전문학에 친숙하지 않은 독자라면 고전문학이 주는 무게감과 톨스토이라는 작가의 아우라에 순간 멈칫했을 수 있습니다. 고전문학에 연전연패한 경험이 있는 독자라면 더더욱 명성이 주는 중압감에 주눅이 들 수도 있겠지요. 그런 부분을 섬세하게 짚어낸 작은 판형이 적절히 안도감을 주는 게 사실입니다. 간단히 백에 넣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 꺼내 읽을 수 있을 정도니까 들고 다니는 부담이 확실히 적어졌습니다.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아스라한 풍경의 도판과 내용 정리와 사고를 이끌어내며 각각의 단편을 깔끔하게 갈무리한 QT가 한결 수월하게 이 책을 읽어내게 해주고 있습니다.
단편 형식을 택한 것도 출판기획 면에서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수년 동안 이름 있는 출판사를 중심으로 고전문학이 장편의 전집형태로 묶여 나온 점을 감안할 때 장편 고전문학 시장이 겨냥한 독자들은 그 기간 동안 대부분 시장에 흡수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와중에 단편 시장이 소홀히 취급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실제 기획단계에서 이름난 단편을 발굴해내기가 쉽지 않은 게 직접적인 이유 중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는 사이 단편 시장이 무주공산 처지로 전락했던 거지요. 그 틈새를 이 책이 파고들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특히 기독출판계가 오랜 동안 장/단편 고전에 대한 관심에서 멀어진 형편에서 이 책이 고전 기독출판물의 출간 붐을 조성하는 마중물이 될지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과거 1990년대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가 나온 이후 그와 같이 묵직한 고전이 번역 출판되지 않은 현실에 못내 아쉬움이 있었는데 이 책의 출간으로 기대감이 한껏 높아진 것이 사실입니다. 더욱이 톨스토이라는 굵직한 작가의 단편집이라는 점에서 호기심을 한층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대문호로 《전쟁과 평화》(1869), 《안나 카레리나》(1877) 등 불멸의 사실주의 작품을 남긴 톨스토이는 50대 초반에 회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책, 《빛이 있는 동안 빛 가운데로 걸으라》에 실린 8편의 단편은 톨스토이가 50대에 쓴 소설로 평소 이야기를 민중의 언어로 사실감 넘치게 풀어간 성향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우린 그 예를 〈있는 자들의 한가한 대화〉와 〈빛이 있는 동안 빛 가운데로 걸으라〉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있는 자들의 한가한 대화〉는 신앙에 대해 대담한 관점을 서로 주고받으면서도 실제 대가를 치러야하는 책임 있는 행동을 하지 않는 종교인들의 행태를 꼬집고 있습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 사회에서도 잘 차려입고 남 부끄러운 줄 모르고 꾸며 말하는 호사가들을 경멸하는 풍조가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저택에 몇몇 사람들이 모여 삶에 대하여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었다”로 시작되는 단편은 그런 점에서 대단한 풍자의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택에 모인 사람들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지만 삶과 유리된 채 겉도는 그들의 말에서 당시 만연했을 무책임의 행태적 모순이 기독교인들 사이에 파고들지 않기를 바라는 작가의 신앙적 양심을 강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문학이 인생에서 전형을 획득하고 있다면 그건 시대를 막론하고 독자들을 자기성찰로 이끈다는 데 있다고 할 것입니다. 젊은이는 경험해야 할 세계가 아직 많으니 섣불리 결단하지 말라거나 노인은 이미 충분히 즐겼으니 늘그막에 결단해서 식구들에게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지금도 결단을 막는 유효적절한 장치로 사용하는 너와 나의 현실을 돌아보며 회개와 의식전환이 누구에게서부터 시작되어야하는지 깨달을 수 있다면 톨스토이가 말하려던 바를 정확이 이해한 게 될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 사도의 함의가 문학적 형태로 돋을새김되어 어느 때보다 독자들을 깊은 성찰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이 단편의 가치가 시대를 건너 빛나고 있습니다.
책 제목과 같은 〈빛이 있는 동안 빛 가운데로 걸으라〉는 구도자적 관점에서 《천로역정》과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회심한 톨스토이가 줄리어스의 입장에서 구도자인 유베날리우스를 통해 배우고 깨달은 것을 기록한 자서전적 단편으로 읽어도 무방할 정도로 이 소설은 현실이라는 공간에서 영혼이 파괴된 인간 톨스토이가 궁극적으로 찾고자 했던 행복과 평안이 어디서 기원하는지를 파노라마 같았을 자신의 인생 위에 한 폭의 그림처럼 한 눈에 보이도록 그려주고 있습니다.
비록 짧은 단편에 불과하지만 마치 누군가의 인생 전반을 읽어낸 듯 그에 대한 뜨거운 애정에 이어 묵직한 소회를 밝히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심정에 사로잡히고 말 것입니다. 그건 이 소설이 기독교인이건 그렇지 않건 인생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을 살아가며 추구할 바가 과연 돈과 권력, 향락이 전부인지를 성찰적으로 돌아보게 함으로써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가 닿을 곳에 대한 꿈을 꾸게 하며, 그렇게 피어난 결단의 열매가 얼마나 달콤한지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죄인 같은 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믿고 구원받았다. … 죄인과 같은 나는 악하게 살았고,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대부분의 주위 사람들이 나처럼 사는 것을 보았다. … 마치 죄인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나는 어떤 힘에 의해 그런 고통과 악의 삶에 못 박혔다. ... 이 모든 비극에서 나는 정확히 죄인과 같았다. … 그런데 갑자기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부터 삶을 이해하게 되었고, 생과 사가 악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절망 대신에 죽음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삶의 행복과 기쁨을 경험하였다.”
이 글은 톨스토이가 1884년에 발표한 신앙고백의 일부입니다. 그의 회심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죄인에서 의인으로의 거듭남, 거기서 비롯된 행복과 기쁨, 이에 더해 악하게 살았던 과거의 내 전철을 밟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그는 이후 내내 작품 속에 녹여냈습니다. 8편의 단편은 그런 톨스토이의 환희와 격정을 문학이라는 도구를 빗대어 첨가물을 전혀 가미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문호가 인생 후반부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고 물었다면 우리도 언젠가 한 번만이라도 그런 질문을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생 뭐 있어!” 하고 쉽게 처리할 만큼 우리 인생이 그렇게 가벼운 것이겠습니까. 모처럼 만난 고전 단편에서 우리가 잃어버렸거나 잠시 잊은 질문을 던진다면 아마도 지금보다는 더 행복해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뜻에서 이 책을 일에 휩쓸려 목적 없이 살아가는 직장인들에게 우선 권합니다.
|
|
러시아의 3대 문호로 알려진 톨스토이의 단편집을 통해 그의 신앙을 보게 되었다. 그는 시대적인 상황속에서 경험했던 수많은 좌절과 난관을 경험하면서 삶과 죽음, 종교에 대한 깊은 사고를 하게 되었다. 시대적인 기독교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되면서 진정한 기독교의 정신을 찾고자 했음을 그의 저술에서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참회록을 통해 자신이 만난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저술하기도 했다. 현실속에서 새로운 삶의 꿈을 갖게 했던 결과물로 부활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그는 철저한 삶의 고뇌를 경험하였기에 오늘의 역작들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면서 삶의 진지한 자리로 초대한 톨스토이 작품을 우리는 한 두권은 읽었을 것이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삶속에서 만난 하나님을 통해 기쁨을 갖는 삶을 갖게 되었다. 그가 만난 하나님에 대한 깊은 사랑과 믿음은 우리가 읽는 이 책에서 발견할 것이다. 그는 삶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시대적인 상황을 통해 삶에 대한 구체적인 접근을 찾게 되기도 했다. 내가 누구인가.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속에서 그는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갖게 된다. 수많은 백성들은 굶주림과 파고속에서 살아가지만 이방인처럼 아니 딴 세상에 사는 이들이 있다.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들은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찾을 수 있는 질문인 것이다. 이러한 원초적이면서 구체적인 삶의 질문속에서 그는 빛을 만나게 된다. 빛이 있는 그곳으로 그는 걷게 된 것이다. 삶의 어둠을 뚦고 빛은 찾아온 것이다. 그는 그 빛을 사랑했다. 그 빛을 통해 새로운 삶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곳은 사람이 무엇때문에 사는 것인가를 보게 한다. 그곳에서 사랑을 보게 되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하나님은 그곳에 계심을 보게 되었다. 사랑은 공평하다. 사랑은 결국 모든 것을 이긴다. 사랑이 있는 곳은 하나님이 계셨다. 그에게 사랑을 통해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게 되었으며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믿음은 자신의 모습을 보게 했다. 자신은 진정 죄인이었다. 죄인된 자신의 모습을 철저히 회개하는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된다. 참회록에서 보았듯이 그가 보았던 자신의 죄는 표현할 수 없는 처참함이었다. 시대를 비관하였지만 자신을 바라볼 수 없는 더러움이었다. 이때 하나님은 자신의 죄를 해결하신 분임을 보게 되었고 그분만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그의 신앙의 고백이 이 책에 담겨졌다. 톨스토이가 새로운 삶의 자리와 저작의 세계를 보게 된 것은 바로 신앙이었다. 믿음이었다. 그가 받은 사랑의 세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그의 전체적인 신앙의 과정을 볼 수는 없지만 변화된 그의 글을 볼 수 있다.
|
|
아주 오래전에 톨스토이의 단편들을 이미 읽었었다. 그때 나는 집 근처 도서관에 정기적으로 들러 책을 빌려 읽고 반납한 후 또 다른 책을 골라 읽는 재미로 살았었는데 톨스토이의 단편집이 눈에 띄어 반가운 마음으로 집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장편은 책의 두께에 미리 겁이 나는데 단편들은 일단 마음이 가볍지 않은가.. ㅎ
집에 돌아와 책을 읽으며 몇번이고 덮었다 펼쳤다 해 가며 읽었더랬다. 아 뭐지. 톨스토이가 언제부터 이렇게 신앙서적을...? 이런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내가 읽었던 그 어떤 신앙서적이나 간증서 보다 더 좋다고 여겨졌었다. 마음에 와 닿는 글귀들을 독서노트에 베껴 적으며 책을 몇번이고 품에 안았다 다시 읽었다를 했던 것 같다. 그 후로 살아가는 동안 그 내용들이 다 기억에 남아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 책을 통해 느꼈던 감동이나 은혜로움 깨달음은 오래오래 남았다.
다시 톨스토이의 단편집이 출간되었다. 그의 작품 중 여덟편의 단편들을 한데 엮은 책이고 책의 서문에는 톨스토이의 신앙고백이 수록되어 있다.
그의 이러한 고백처럼 그의 작품들 속에서도 그는 설교를 늘어놓거나 가르치려 들거나 억지로 강요하거나 애원하지 않고 담담하게 하지만 확고하게 이야기를 풀어가 준다. 어려운 신학적 해석이 있거나 홀로 거룩하기만 한 것도 아닌 평범한 일상 가운데서 만나고 느끼고 실천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의 작품을 읽는 내내 뜨겁게 그리고 벅차게 느낄 수 있었다.
끝으로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은 다음과 같은 여덟편이다.
|
|
우습게도 톨스토이 작품을 정식으로 접한것은 이번이 처음이였다. 물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은 읽어보긴 했었지만 그것이 톨스토이의 작품인지도 모른채 그냥 읽었기에 정식으로 접한것이 처음이라고 하고싶다.
그렇기에 서문에서 그가 친구로부터 신이 인간을 만든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는 말에기독교를 저버렸다는 점에서 나도 한때는 그런 생각에 기독교에 대한 회의심를 품었던 적이 있어 놀라웠다. 같은 시대를 살지 않았음에도 한때 같은 생각을 가졌던 작가의 책이라서 책에 더 관심을 기울이며 읽게 되었다.
그런 마음을 갖던 그가 어떻게 하여 회심하고 그리스도를 찾게 되었는지 이책에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진 않지만 아마도 기독교가 삶의 중요한 요소를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니였을지 추측한다. 그럼에도 이 책 초반에선 기독교인이면서도 세상적 가치를 버리지 못하고 그것을 숭배할때 오는 불쾌함과 죄책감들을 느끼면서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고 또한 세상적인 가치를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세상적인 방법과 이유들로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의 이중성을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왜 기독교가 삶의 중요한 것을 담고 있음에도 지탄의 대상이 되어오고 믿는 사람들 조차도 회의감을 느끼는지 명쾌한 답을 내준다.
이책의 제목인 빛가운데로 걸으라의 단편은 마치 톨스토이가 기독교를 친구의 말에 기독교를 저버리다가 다시금 기독교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쓴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이 단편은 부유하고 외형적으로는 행복해 보이는 그가 진정한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는 모습속에서 과연 무엇이 행복한 삶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해준다. 그것의 답은 이책의 "사람이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은가보다"의 구절이 라고 생각한다.
물질만능주의로 인해 행복이란 개념이 물질적 가치로 변질되어 버린것이 이러한 문제의 발단인것 같다. 행복이 커지는 것은 가진것을 나눌때이고 이를 위해선 믿음과 사랑이 존재해야 하며 이것을 실천하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종교를 가진 사람이 아닌가 싶다.
|
|
톨스토이의 단편소설들을 한꺼번에 읽을 수 있어서 참 좋았던 것 같다. 톨스토이의 인생에서 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귀의한 후에 쓴 글들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기독교적인 색채가 다른 글들보다 조금 더 진하게 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던 것 같다. |
|
책머리에 실린 신앙고백에서 50대 중반에 이른 톨스토이는 고통과 악의 삶에 못박혔던 과거를 떨치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삶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죽음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삶의 행복과 기쁨을 경험하였다고. 모두 여덟편이 묶인 이 책 속의 단편들은 모두 그의 신앙고백 이후에 쓰여진 것으로 문학, 특별히 소설의 형태로 기독교로의 회심과 그 속에서 느끼는 기쁨, 행복을 써내려간 것들이다.
역자 역시 현재 목회자이고 출판사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기독교와 관련되어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기독교 서적이라고만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톨스토이는 소설 속에서 기독교적 신의 모습과 가름침을 통해 구원을 이야기하지만 결국은 절대적 '善'대 대한 경외감과 삶에 있어 그 어떤 가치보다 앞서는 서로에게로 향하는 인류애적이고 보편적인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모든 종교들이 추구하는 것이며 모든 종교를 넘어선 곳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각 소설 뒤에 역자가 편집해 놓은 '묵상'편도 해당 종교인에게는 물론 누구에게나 스스로를 다시 돌아볼 수 있는 좋은 생각거리를 주고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작품은 표제작인 '빛이 있는 동안 빛 가운데로 걸어라'로서 초기 기독교 시대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예수탄생 백여년 후를 시대적 배경으로 줄리어스라는 한 인물의 인생여정과 기독교 공동체로의 귀의과정을 그리고 있다.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의문의 여지도 없이 풍요로운 삶을 누리던 그의 곁에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생활하며 그를 초대하는 친구 팜필리우스가 있다. 주리리어스는 성인의 길목에서 부모와 불화하고 처음으로 기독교 공동체를 찾아나서지만 낯선이의 세속적 논리에 다시 집으로 돌아와 일상의 삶을 꾸린다.우연히 행복하고 건강해보이는 팜필리우스와 마주치고, 토론을 나누기도 하지만 사회적, 정치적 성공을 이룬 그는 또다시 삶에 의문을 가질수 없을 만큼 바쁜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우연한 사고, 전차 바퀴가 왼쪽으로 손가락 넓이만큼 벗어난 사고로 중상을 입고 투병하며 그는 다시 기독교 공동체를 떠올리지만 역시나 세속적 논리에 굴복하고 만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스스로의 고집과 악함을 깨닫고 마침내 친구가 머물고 있는 기독교 공동체를 찾아간다. 그 곳의 포도밭에서 늙은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진정한 위로를 얻는 것으로 이 소설은 끝이 난다. "...당신이 가벼이 여긴 세상의 일은 당신에게 당신의 죄를 보였주었고 당신은 회개하였소. 당신이 회개하였을 때 당신은 곧은 길을 발견하였소. 그 길을 따라가시고 과거를 생각하지도 또 그것이 큰지 작은지 생각하지 마시오..."
이 밖에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세 은자'와 같은 소설들도 새롭게 읽으며 짧고 단순한 내용 속에 담긴 내용들을 다시 음미해 볼 수 있었다. 내쫓긴 천사가 인간 세계에서 깨달은 세가지, 인간들에게 있는 '사랑'과 결코 바로 앞의 미래도 알수 없다는 인간들의 한계와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네 삶의 변치않는 정수를 잘 정리해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소설 사이사이에 성경 구절들이 들어있어 기독교인이라면 깊은 묵상과 더불어 깊이있게 읽을 수 있을것 같다. 종교가 없는 이들이라도 사랑과 겸손, 나눔의 기쁨, 유한한 것에 얽매이지 않는 지혜, 논리를 앞서는 진리에 대한 탐구 등등에 대해 조용히 음미하며 천천히 읽기에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