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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책은 빠르게잘받아보았습니다. 영화에서 나오는 겉커버라 기대가 많이 했고 빨리받으니좋네요 책이 너무이쁘고 멋집니다. 그런대 첫장 작가소개란에 작은아씨들 발표 년도 표시가 잘못기재된거같습니다. 출판사에서 빠르게 수정이 필요해보입니다. 1968년을 1868년으로 수정하셔야합니다 확인하시기바랍니다. 책이 너무 기대됩니다. 영화도 보고싶네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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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쪽 '...대고모이 마차에 탈 때까지..'대고님이.가 맞겠죠.두번이나 실수있고,315쪽 '..그런 사람들과 교체하게 하느니 우리 모두를..'교체가 아니라 교제겠죠? 아직 1부읽고있는데..교정실수가 이렇게 나오다니 실망입니다. 몇번이나 다시 읽어보게하고..흐름 깨집니다.급하게 만들어진 책이 아닌가싶어서 좀 그렇습니다. 앞부분도 배경이 미국이니까 잔치라는 표현보다는 파티라는 표현이 예나지금이나 더 어울릴것같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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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들이 성장하는 드라마를 품은 소설을 꼽으라면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간머리 앤>도 있지만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비록 21세기를 사는 소녀들에게는 고루한 느낌을 주는 '오래된 소설'에 불과할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20세기 문학소녀들에게는 정말 손에 꼽을 명작소설이었고, 지금은 어른이 되어버린 '그 시절의 소녀'들의 추억거리가 되어버렸지만, 난 지금의 소녀들에게도, 아니 소년들을 포함해서, 꼭 읽어보아야 할 소설로 꼽고 싶다. 그 까닭은 바로 '가난한 삶이 주는 행복'을 음미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대한민국은 오직 '돈'이 유일한 목적인냥 행복한 삶의 조건에 '돈'을 으뜸으로 꼽고 있다. 물론 도덕교과서 덕분(?)에 돈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많다는 것에는 다들 인정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돈'이 없으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푸념만 늘어놓는 세대가 전부인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차라리 대한민국 국민의 대다수가 못살던 6, 70년대가 더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느껴질 정도라는 어르신도 정말 많다. 분명 대한민국은 경제발전과 성장을 모두 이루었고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약적인 풍요로운을 만끽하며 살 수 있게 되었지만,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이전의 젊은 세대들보다 더욱 빈곤하고 쪼들리며 살고 있고, '무언가'에 쫓기듯 하루 24시간이 부족한 듯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물론 이는 '기성세대'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물질적인 풍요'에만 집중했을 뿐, '삶의 질' 따윈 살피지 못하고 무작정 '경제성장'에만 올인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풍요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긴 했는데, 정작 그 풍요로움 속에 '여유'를 담지 못하고, 한껏 끌어올린 풍요로움을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애먼글먼 걱정만 하는 모습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어리석음도 모자라서 물려주어선 안 될 '걱정거리'만 잔뜩 물려주고선 정작 '경제적 풍요로움'에서 안락하게 즐기며 걱정없이 학업을 정진하고 다채로운 꿈을 펼쳐내는 향연을 누리는 멋진 삶 대신에 어릴 적부터 '부자'가 꿈이라는 둥, '건물주'가 되어 놀고 먹고 살고 싶다는 둥, 그도 아니면 '돈 많이 버는 직업'을 꿈이랍시고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채찍질만 해대었으니, 그런 아이들이 자라서 뭐가 되겠냔 말이다. 물론 그런 척박한 환경속에서도 건실하게 성장하는 올곧은 아이들이 없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가난한 삶'을 두려워하지 않는 멋진 어른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백번 낫지 않을까 싶다. 결코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을 깨우치는 교육시스템을 갖추고, 멋진 어른으로 성장하도록 시기적절한 '경험'을 선사해주고, 필요하다면 적극적으로 '코칭'해주는 선생님으로 가득한 나라를 만들 수도 있지 않겠느냔 말이다. 물론 소설에서나 나올 법하고,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긴 하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그래야만 되지 않겠느냔 말이다. 현실이 비극적이라고 꿈조차 '비극'으로만 준비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이책 <작은 아씨들>에는 그런 '학교'가 실현되었다. 조가 어릴 적 '꿈꾸던 집'이 바로 그것인데, 시작은 '마치(March)가의 다섯 식구'가 펼쳐보이는 소박한 가정의 모습으로 선보인다.
바로, 첫째 딸 메그, 둘째 딸 조, 셋째 딸 베스, 막내 딸 에이미, 그리고 네 자매의 어머니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 다섯 명의 등장인물은 한때는 남부럽지 않을 부와 명성을 누렸지만, 아버지가 사업에서 실패하고 전쟁에 참전을 하며 오래도록 가정을 비우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풍요로웠던 지난 시절에 비하면 참으로 옹색한 살림을 꾸리며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쪼들린 삶을 살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고, 조금의 여유가 생기면 자신들보다 더 도움이 필요한 불쌍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아끼지 않고 베푸는 선량한 가풍을 잃지 않았다.
물론, 꿈 많은 소녀들이었기에 남들의 부러움을 살만한 것들을 갖고 싶은 욕구는 넘쳤다. 첫째 메그는 맏딸답게 부잣집 남자와 결혼을 해서 엄마가 경제적으로 힘들게 살림을 꾸려나가는 것에서 벗어나게 해드리려고 했다. 그래서 메그 자신도 '사교모임'에도 적극적으로 나섰고, 외모가 출중했기에 누구라도 좋은 혼처를 소개해주겠다고 나설 정도였다. 허나 '사랑' 없는 결혼은 '영혼'을 팔아버리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되자 메그는 돈 많은 남자보다는 진실한 사랑을 찾으려 노력하였고, 그에 걸맞는 참한 아내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둘째 조는 아버지가 없는 동안은 자신이 아버지 '대신'이라는 생각을 하는 씩씩한 소녀였기에 누구보다 진취적이었으며 '정숙한 아내'가 되기보다는 '경제적 독립'을 이루려 한다. 물론 자기 혼자만 부를 누리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가족의 생계'를 자신이 직접 챙기겠다는 당찬 포부였다. 실제로 조는 자신의 재능을 꽃피워 '작가'로 등단하였으며 고액의 원고료를 받으며 가족들의 생계에 보탬이 되었으며, 진실한 사랑도 이루고 '훌륭한 학교'도 운영하며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당찬 여성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막내 에이미는 자존심과 고집이 센 소녀로 천방지축처럼 사고를 일삼기도 했지만, 한번 마음 먹은 것이 있으면 기필코 마음 먹은대로 이루고야 마는 집념의 소녀이기도 했으며,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희생을 감수할 줄도 알고 참고 견디는 인내심도 대단한 소녀이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사랑스러운 소녀였던 베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천사처럼 사랑을 베풀며 사랑을 받았지만 심한 병에 걸려 일찍 건강을 잃고 안타깝게도 하늘나라의 천사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베스가 꿈꾸던 소망은 스스로 실현하지는 못하지만 남은 가족들이 대신 실현을 하며 가족들과 함께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된다. 비록 육신은 차갑게 식어 땅에 묻혔지만 그녀의 따뜻한 마음과 더 따뜻한 사랑은 가족과 이웃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게 된 셈이다.
이렇게 얼핏보면 그저 아름다운 소녀들의 꿈과 사랑이야기로만 보이는 소설속에는 '지독한 가난'이 불편한 진실로 드러나며 소녀들의 꿈과 희망을 좌절시키는데 한몫 단단히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소녀들은 '가난'보다 더 큰 어려움이 얼마든지 많고, '가난'보다 더욱 불편한 것들도 더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 깨달음 덕분에 가난하지만 행복할 수 있었고, 가난으로 불편을 겪는 와중에도 가족들간에 더욱 화목하고 사랑으로 뭉칠 수 있었다. 물론 가난으로 인해 '여성의 삶'이 아름다울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예쁜 옷을 입을 수도 없을 것이고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도 하지 못해 초라하고 볼품없어 아무에게도 '관심'을 끌지 못하게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 지혜로운 여자라면 값비싼 옷과 장신구로 치장하지 않고도 품위로 돋보이게 하고, 예의바른 행동과 고운 말씨, 그리고 남을 돕는 상냥함과 배려심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여기까지는 여느 '교훈적인 이야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레파토리일 것이다. 허나 가난한 여성이 선량한 마음씨와 사랑스런 외모로 위기를 극복하는 뻔한 스토리를 뻔하지 않게 만드는 힘은 바로 '가난극복을 위한 경제적 독립'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19세기에는 여성의 사회진출이 쉽지 않았고, 실제로도 전문직은 '여성작가나 여선생님'까지였고 아이들 뒤치닥거리나 하는 보모와 다를 바 없는 '가정교사'나 '바느질감'을 얻어와서 푼돈을 벌어들이는 것이 고작이었고, 고된 노동을 해야 하는 공장 노동자나 농사일은 여성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열악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작은 아씨들>속에서도 네 자매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제한적이었으며 그나마 현실적인 경제적 보탬을 할 수 있는 것은 '숙녀'가 되어 사교모임에 겉모습을 최대한 꾸며서 '돈 많은 남자'를 낚아내어(?) 친정에 경제적 이득을 보태던가, 적어도 자기 자신이라도 쪼들리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슬기로운 방식이었던 것이다. 조를 제외한 세 자매도 처음엔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올컷은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평범하게 끌고 가지 않았다. 조는 독립적인 여성으로 우뚝 내세웠고, 메그는 사랑없는 부유함을 걷어차고 사랑이 넘치는 가난을 스스로 선택했으며, 에이미는 고르고 골라 자신의 꿈과 허영을 동시에 만족시켜줄 돈 많고 멋진 남성을 길들였(!)으며,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럽고 한없이 아름다웠던 소녀는 무능하고 무뢰한 남성이 채가기 전에 차리리 희생(?)시켜버리는 과격함(!)까지 선보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올컷이 선보이고자 했던 여성상은 무엇이었을까? 모든 여성의 꿈인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에는 이견이 없었다. 허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기 위해 여성들에게 무한한 희생만을 강요하던 '교훈적인 이야기'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는 '마치 대고모'라는 인물을 통해서 여설히 드러난다. 당시의 바람직한 여성상을 대변하는 이가 고루하기 짝이 없는 '마치 대고모'와 한없이 자애로운 '네 자매의 엄마'였지만, 네 자매는 부유하기만 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마치 대고모를 '쓸쓸함의 대명사'로 만들었고, 가난이란 현실 앞에 숙명처럼 수긍하기만 했던 '엄마'와는 달리 네 자매는 적극적으로 가난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지가 없었더라면 네 자매도 당시의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현실과 적절히 타협하면서 평범한 여성처럼 살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네 자매는 달랐다. 진취적으로 살지 않으면 끝내 베스처럼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삶'을 살게 될 것이니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개척하는 당찬 여성으로 살아가라고 교훈을 심어두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어려움을 많이 겪게 된다면 또 다른 소설인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에서 순례자가 온갖 역경을 딛고 천국으로 향하는 것처럼 당당히 맞서라고 귀띔해주고 있다. 딴에는 종교적인 색채로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굳이 '청교도 정신'까지 끌여들이지 않고 '극복의지'로 이해를 해도 좋을 것이다. 가난한 삶이 여성에게 끼치는 영향이 <천로역정>에 비유될 정도로 큰 고통일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말고 자신의 꿈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라고 말이다.
이런 <작은 아씨들>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주는 교훈은 없을까? 비록 오래된 소설이라 '이야기, 그 자체'에 깊이 공감되지는 않을지라도 '가난한 삶'을 대하는 네 자매의 자세를 통해 오직 돈만 바라며 살아가는 어리석음만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모두 어릴적에 '돈보다 더 소중한 것'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이미 배워서 안다. 그리고 현실에서도 경험을 통해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알 것이다. 그런데도 '돈돈돈'이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줄 만능열쇠로 굽신거리는 까닭을 모르겠다. 그렇게 굽실 거릴바에는 차라리 '가난'에 당당히 맞서고 '가난'을 친구로 삼는 현명함을 뽐내는 것은 어떨까? 나도 여기껏 살다보니 '풍족함'보다는 가난에 쪼들리는 '부족함'에 더 가까운 삶을 살았다. 그래서 가난이 주는 '불편함'을 누구 못지 않게 잘 안다. 허나 가난이 부끄러웠던 적은 없다. 지금의 젊은 세대로 '가난'이 가르쳐주는 소중한 교훈을 통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는 멋쟁이가 되길 바란다. 결코 '가난한 삶'이 두려워서 몹쓸 짓도 서슴없이 저지르는 멍청이가 되지 말길 바란다. 그런 멍청이들이 부자가 되어 저지르는 짓은 정말 눈뜨고 못봐줄 정도로 천박하니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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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isa May Alcott, Little Women (1868, 1869) 상상의 부재에 던지는 교훈 지난겨울에 많은 사람이 그랬듯, 나도 영화판 「작은 아씨들」을 보고 나서 뒤늦게 소설을 읽었다. 작가가 명시하고 있듯, 소녀들에 바치는 책이기는 하지만, 나는 소년일 때조차 이 작품을 읽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해적판 짜깁기 판본을 쉽게 접할 수 있기는 했지만 아마도 젠더 기대에 편승한 탓인지 눈길이 가지는 않았다. 어렸을 때 집에 어린이 명작동화 전집 따위가 있었는데, 그중에 「작은 아씨들」이 포함되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반면, 「소공녀」는 분명히 책장에 꽂혀 있었고, 나는 그동안 그 작품과 「작은 아씨들」을 종종 혼동해왔다. 다행히도 앞으로는 그럴 일이 없어졌다. 영화판을 보고 극장을 빠져나오면서, 나는 원작도 읽지 않은 주제에 영화화가 엄청나게 잘 된 작품이라고 주제넘은 찬사를 쏟아냈다. 가끔은 주제넘게 막 던진 단언도 어떻게든 맞아떨어질 때가 있다. 그레타 거윅(Greta Gerwig)은 소설의 영화화에 있어서 하나의 이상적 모델을 구현해냈다. 그는 9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가족사를 단선적인 시간 순서로 배치하는 대신,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회상의 장치로 풀어냄으로써 러닝타임의 압박에서도 효과적으로 인상적인 장면들을 구원해냈고, 나아가 추억 속의 아련함을 배가시키는 효과까지 가져왔다. 꼭 필요한 장면은 적재적소에서 빛을 발했고, 극 중 단 한 사람도 소외되지 않는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치밀하게 통제된 소품과 세트, 특히 19세기에서 갓 튀어나온 듯한 의상이 빚어낸 시대적 분위기도 환상적이었다. 다만,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의 외관상 차이를 좀 더 확연하게 드러내 보였다면 세월을 넘나드는 관객의 혼란은 덜었을지 모른다. 원작 소설을 찬찬히 읽고 나니, 우리 시대가 겪고 있는 비극이 무엇인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이 시대는 ‘상상의 부재’, 아니면 적어도 ‘상상의 위탁’으로 정의할 수 있다. 과거 상상으로만 구현됐던 세계, 즉 경험적 질서의 제약을 벗어난 이상적/초현실적 세계의 구현은 전적으로 디지털 신경망에 위임되어 있다. 반면, 작은 아씨들은 상상의 세계관 속에서 서로 역할을 분담하며 가상의 자아와 실재 자아를 비교하고 성찰하며 성장한다. 천로역정 놀이, 크리스마스 연극, 피크위크 클럽 등에서 상상의 유희가 삶의 저변에 깊숙히 뿌리내리고 있음이 잘 드러난다. 이러한 놀이는 언젠가 실제로 벌어질 상황들에 주체적인 의사결정을 바탕으로 기민하게 대처하도록 돕는 역동적인 훈련이다. 유년기의 제약 없는 상상과 다양한 역할에 대한 대리적 체험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취해야 할 적절한 역할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시뮬레이션이다. 지금 우리네 아이들은 무엇을 하며 놀고 있나? 상상은 게임 속 세계관에 위탁했다. 역할 놀이는 게임 속 캐릭터와 유튜브 크리에이터에게 위임했다. 너무나 많은 것이 미리 갖추어졌고, 그 감각성은 실로 화려하고 촘촘하기에, 상상을 통해 여백을 채워나갈 여지는 지극히 제한적이다. 나는 유년기를 가난한 강원도 산골 마을에서 보냈다. 내 선대에 비하면 풍족한 환경이었겠지만, 제대로 된 장난감 하나도 변변치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빨래집게로 로봇을 만들고, 우산대를 뜯어서 검을 만들고, 냄비뚜껑을 팽이 마냥 돌리면서도 하루가 금세 저물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동네 또래들은 책가방만 던져놓고 공터에 모이는 것이 당연한 일과였고, 그중에서도 연장자는 연장자대로, 꼬맹이는 꼬맹이대로 각자 기대되는 역할을 자연스럽게 수행하며 뛰어놀았다. 놀이의 형태는 스포츠나 전쟁, 혹은 개인 단위의 경쟁 등의 형태로 단순하기 그지없었지만, 그 세부적인 맥락에서는 역동적인 상호작용이 끊이지 않았다. 게임의 룰을 만들어 가는 것도 결국은 당사자들이었다. 소크라테스도 당시의 청년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고 하니, 윗세대가 아랫세대를 보며 걱정하는 양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부할 정도이고, 대부분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태어나자마자 유비쿼터스 세상에 던져진 세대가 그보다 앞선 세대는 절대 예상치 못했을 방식으로 창조적 결과물들을 쏟아낼 것이라는 전망도 유효하다. 하지만 만들어진 세계를 즐기는 세대와 황무지 위에 세계 자체를 만들며 커나간 세대는 분명 성찰의 범위와 깊이가 다르리라고 본다. 문제에 닥쳤을 때 바로 검색창을 여는 사람과 깊이 생각해 본 후 검색창을 열어 그 산출물을 내적 분석의 결과로 피드백하는 사람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의미에서 「작은 아씨들」의 표면적 주제의식은 가족의 소중함, 기독교적 소명의식, 진정한 사랑과 꿈의 성취 등일지 몰라도, 오늘날 이 작품이 던지는 가장 유효하고도 시의적절한 교훈은 상상으로 여백을 채우는 성장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준다는 데 있지 않을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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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지 않았던 고전을 마침내 정독하게 만든 영화 [작은 아씨들]. 어릴 적 향수로 남았던 만화를 다시 접하고 보니 영화가 보고 싶어졌고 그러다 보니 원작까지 찾게 됐다. 이런 자연스런 인연과 어쩌면 당연했던 수순을 잘 알면서도 가끔은 신기하다. 목침으로 제격인 두께의 이 주홍 책이 이렇게 소중해질 줄이야. 이 평범하기 그지없는 한 가족의 일대기가 가슴 벅차게 다가올 줄이야.
만화/영화/책 속 자매들이 조금은 다르게 그려지지만 나는 ‘조’의 캐릭터가 가장 맘에 든다. (아니, 닮고 싶은 캐릭터라고나 할까.) 베스는 너무 소심하고, 메그는 다소 속물적인가 하면 에이미는 메그와 조의 중간쯤 되는 것 같다. 천방지축이지만 귀엽고 명랑했던 화가 소녀가 매력적인 여인으로 성장해 로렌스 가와 가족이 된 것도 참 잘 됐다 싶고. 내심 로리가 조와 결혼하게 되길 바랐지만.
조의 깨달음과 메그 부부의 위기가 지혜롭게 극복된 사연을 읽자니, 특히 이 문장, “사랑하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욕망과 결점을 참고 위로할 수 있는 부드러운 인내심을 배웠다.”에서 그만 눈물이 찔끔. 왜 자꾸 ‘가난’에 시선이 머무는지 모르겠다. 그런가 하면 노동(일)을 찬양하는 투의 문장들이 이상하게 아리다. 불행한 아내나 신랑감을 찾아 헤매는 처녀보다 차라리 행복한 노처녀가 백 배 낫다는 말은 또 어떤가!
자매들의 어머니는 거의 성모 마리아 급인 듯. 탐나는 어머니象이다. 어찌 그리도 자애롭고 현명한지, 이웃에 대한 헌신이며 인내력은 또 어떻고. 자매들 중 누구 하나 비뚤어지지 않고 건강한 정신으로 각자의 인생에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남북전쟁을 다룬 영화들을 몇 편 보았던 나로서는 이 책이 나름 묵직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인종차별과 전쟁, 그 속에 한 가족과 이웃 그리고 네 자매의 끈끈한 사랑과 우정을 다룬 이야기가 오랜만이라 일면 반갑기도 했고. 코로나 시국이라 더 그런 것도 같고. 무엇보다 영화 스틸 컷을 실어 읽을 맛이 났다.
감동 포인트도 아닌데 감동하고, 울컥울컥 유난히 감정이 헤펐던 시간을 지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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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지막 극장 출입은 2020년 2월 8일 잠실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점이었다. 그러고보니 내 마지막 서울행이기도 하다. 코로나19의 기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지만 로리로 변신한 티모시를 스크린으로 보고 싶다는 열망은 유례없는 전염병에 대한 공포마저 잠식했다. ?? 티모시가 <작은 아씨들>에 캐스팅 되었단 소식을 접하자마자 시공주니어에서 나온 예쁜 표지의 번역판을 사서 읽었는데 전쟁터로 떠났던 자매들의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는 1부까지만 다루고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1,2부 주요 서사들을 감각적으로 교차편집해 제작한 영화가 보다 잘 이해되었다. <작은아씨들>은 총 4부작으로 <작은 신사들>과 <조의 아이들>까지 이어져 있다고 한다. 영화가 정말 잘 만들어졌다는 걸 두꺼운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드는 걸 보면 감독 뿐 아니라 각본까지 직접 쓴 그레타 거윅이 얼마나 뛰어난 재주꾼인지 알 수 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영화 속 장면들이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페이지 중간 중간에 영화 스틸 컷을 삽입했기 때문이다. 티모시가 등장하는 컷을 많이 넣어줬으면 더 좋았으련만. 출간 당시 초판디자인이라는 매력까지 더해져서 상당한 인기를 끈 걸로 알고 있는데 번역도 좋은 거 같다. 나하고 잘맞으면 좋은 번역이고 아니면 나쁜 번역이고 뭐 다 그런거지. 아쉽게도 3,4,부는 RHK가 아닌 타출판사로 환승해야 한다. 앤도 그렇고 속편이 있는 명작들은 웬만하면 끝까지 좀 내주지. 안팔릴까봐 그러나? 아니면 한 번역자한테 다 맡기기 힘들어서 그러나? 쳇. 누구나 다 아는 결말을 보려고 읽는 게 아닐텐데 어째서 완역을 내지 않는걸까. 덧. 영화에서 베스의 죽음 이후 조의 집에 찾아 온 바예르씨가 가족들이 모인 가운데 피아노 연주를 하게 되는 장면이 있다. 그 때 베토벤의 '비창 소나타'가 흘러 나오는데 나는 그게 감독이나 음악팀의 선곡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원작 소설에서도 '비창 소나타'가 언급된다. 다만 바에르 씨가 아닌 로리의 연주다. 조에게 사랑을 거부당한 로리가 자신의 크나 큰 상심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쓰였다. 이런 자잘한 차이를 알게 되는 것이야말로 원작소설을 읽으며 얻는 큰 재미다. ※인상깊은 구절※ p.471 마치 대고모는 몹시 화를 냈다. 조카의 예쁜 딸에게 좋은 배필을 구해 줄 작정을 하고 있던 터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젊은 처녀의 행 복한 얼굴에 나타난 그 무언가가 이 고독한 노부인의 심기를 긁어놓았던 것이다. 그건 말하자면 슬프면서도 아니꼬운 느낌이었다. p.657~658 "난 네가 연애에 젬병인 게 좋아. 분별력 있고 솔직한 여자를 보면 정말 신선하거든. 그런 여자는 명랑하고 친절하면서 자기 자신을 바보로 만들지도 않지. 우리끼리 얘긴데, 조, 내가 아는 여자들 중 몇몇은 내가 다 민망할 정도로 너무 앞서가거든. 물론 무슨 나쁜 의도가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지만 우리 남자들이 나중에 그런 여자들에 대해 어떻게 얘기하는지 알면 아마 생각을 바꿀걸." "그 여자들도 마찬가지야. 너희에 대해 아주 신랄하게 얘기할 테니까. 그러니까 결국 너희가 지는 거지. 어리석기로 치면 둘 다 똑같아. 너희가 올바르게 행동하면 그 여자들도 그러겠지. 하지만 너희가 골 빈 여자들을 좋아하니까 거기 맞춰주는 것뿐이야. 그런데 너희는 그 여자들 흉이나 보다니." p.661 조는 시키는 대로 했지만 한 손으로 베스의 뜨거운 이마와 젖은 눈꺼풀을 어루만지는 순간 가슴이 터질 듯하면서 말을 하고픈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아직 어리긴 했어도 조는 마음은 꽃봉오리와 같아서 억지로 연다고 되는 게 아니라 저절로 열려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베스의 새로운 아픔이 무엇 때문인지 충분히 알 것 같았지만 최대한 다정한 말투로 이렇게만 말했다. "괴로운 일이라도 있는 거니, 응?" p.708 그가 말을 하는 동안 어찌 된 영문인지 조의 눈에는 세상이 다시 올바로 서는 듯했다.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옛 신념들이 새것보다 더 좋게 보였다. 하나님은 맹목적인 힘이 아니었고, 불멸은 아름다운 동화가 아니라 축복받은 사실이었다. 조는 발밑의 땅이 다시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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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양장본 도서는 너무 그립감이 좋다ㅠㅠ 그리고 영화에 나온 도서대로 표지를 뽑아내서 더 좋다! 1, 2편 합친 것도 너무 좋고! 책 안에 영화 스틸컷 흑백으로 넣어 놓은 것도 예쁘다. 사실 영화를 그렇게 막 감명깊게 보지는 않았지만 원작이 궁금해서 사게 됐다. 책을 읽어 본 친구는 고전 소설치고는 고전적인 느낌을 별로 못 받아서 그렇게 막 재밌게 읽지는 않았다고 얘기해줬는데 그래서 더 궁금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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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월의 네 번째
어렸을 적부터 읽어왔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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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너무 두껍지만, 고전의 느낌이 나느 표지가 너무 아름다워서 구매했다. 책 속의 포토카드들도 너무 이뻤다. 각자의 꿈을 위해 살아가는 메그, 조, 베스, 에이미 등 4명의 자매와 이웃 소년 로리의 스토리를 통해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며, 사랑과 우정, 주체적인 인간으로 거듭나는 자매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영화와 더불어 보면 더 좋은 책이라 이런 책들이 많이 나오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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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고전은 고전입니다. 사실 인디고 버전으로 사서 읽었는데, 이 책은 완전판인 것 같아서 다시 구매했어요 소장용으로도 좋은 것 같습니다 선물하고 싶은 아름다운 책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