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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옛날의 일이다. 고전경시대회라는 것이 있었다. 국가에서 주관했던 것인데 초등학생부선정도서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였다. 그때 내가 살고 있던 시골에는 서점이 없었는지라 아버지가 도회지에 나갔다 돌아오면서 [삼국사기] 고구려, 백제, 신라편 세 권과 [삼국유사]를 사다 주셨다. 그 책을 받아들고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리고 그 책들을 참 열심히 읽었던 것 같다. 도대항전까지 나갔던 기억이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헌데 그 이후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읽어본 기억이 없다. 분명 당시 읽었던 책이 어린이들을 위한 축약본으로 엮은 책이었을 텐데 시간이 지나고서도 그 책들은 다 아는 내용이라 치부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그 책들을 다시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것은 마음뿐, 여간해서 손에 잡히지를 않았다. 이 책은 고등학교 교사인 편저자가 [삼국유사]를 최대한 쉽고 다양한 생각을 해보자는 취지로 썼다고 한다. 그동안 마음속에만 두고 있었던 책을 읽는다는 기쁨에 책을 받자마자 곧바로 읽어가기 시작했다. 편저자가 책을 읽으면서 행간에 숨어있는 의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하는 것에 유의하면서 그것이 가리키는 바가 무엇일까를 줄곧 생각하며 읽었다. 책을 읽는다는 것, 특히 역사책을 읽는다는 것은 텍스트에 쓰여 있는 글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자가 글과 글 사이에 숨겨놓고 생략한 의미까지 파악하면서 읽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느끼게끔 해주었다. 또한 책이 쓰여진 당시의 시대상황과 배경을 이해할 때 비로소 온전한 이해가 가능함을 알게 해주었다. 편저자는 먼저 [삼국유사]가 어떤 책이고,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삼국유사]는 고려 25대 충렬왕 시절인 1285년경 일연스님이 쓴 책이다. 유사(遺事)란 남겨진 이야기, 즉 역사로 기록되지 못하고 남겨진 이야기란 뜻이다. 여기서 남겨진 이야기란 1145년에 김부식이 편찬한 역사서 [삼국사기]에서 빠진 삼국의 역사를 말한다. 역사책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누락되었다면 그것은 그 역사책을 쓴 사람에게는 역사가 아닌 것으로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역사적 내용을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허구로 보았거나, 혹은 서술자의 관점과 달랐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허구가 섞여 있다고 해서 그것이 사실을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특히 김부식은 유학자였고, 일연스님은 불교의 승려였다는 사실은 이들이 역사를 보는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일연스님은 [삼국사기]의 시대적 역사관에 대한 불만과 우리 역사에 대한 적극적인 재해석의 의지로 [삼국유사]를 썼을 것이다. 이런 [삼국유사]는 5권9편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1,2권은 역사책에 가깝지만 3,4,5권은 불교문화사라 할 수 있다고 편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1,2권마저도 신라의 이야기가 80퍼센트 가량을 차지하고, 그것도 진평왕부터 경덕왕까지 삼국통일 전후 150여년에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 아마 그 시절 신라의 역사가 불교와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후세의 사람들이 [삼국사기]를 정사로 보고 [삼국유사]를 야사로 보는 것은 이처럼 쓴 사람들의 신분과 이후 고려와 조선에서 유학이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지 싶다. 편저자가 이 책에서 살펴보는 것은 역사서에 가까운 1,2권 <기이>편이다. [삼국유사]는 먼저 고조선과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가락국의 건국신화를 싣고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삼국사기]가 기원전 57년 신라의 건국을 첫머리에 놓고 있지만, 일연스님은 단군조선과 위만조선을 [삼국유사]의 첫머리에 놓음으로써 삼국의 뿌리가 되는 공통의 조상에 관심을 가졌다. 편저자는 이들의 신화를 읽으면서 우리의 고대사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여러 문제, 즉 고조선의 위치나 한사군의 실체 등에 대해서도 살펴보고 있다. 또한 신화에 나타난 이야기들은 전승을 통한 누적과정을 거치면서 이루어진 것으로 당시 사람들의 바램이 들어가 있을 수 있음을 말한다. 다시 말해 당대 사람들에게 구전되던 신화나 전설이 고려대까지 이어져 내려와 기록되었을 가능성도 크다는 것이다. 이어서 일연스님은 신라상대, 중대, 하대로 나누어 삼국의 유사를 기록하고 있다. 편저자는 이들 이야기를 읽으면서 행간의 의미를 살펴보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 속에서 당시의 상황과 배경을 유추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신라상대에 들어있는 백제 무왕의 이야기가 그렇다. 무왕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서동요의 주인공이다. 일연스님도 이 이야기를 수록하면서 사실이 아니라 전해지는 이야기라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사실이 아닌 이야기가 당대의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는 것은 어쩌면 삼국통일 후 백제유민들을 위무하기 위하여 신라에서 만들어 유포한 허구일 수도 있다. 소문은 또 다른 소문을 부르고, 그런 소문과 소문이 모이면 전설과 신화가 되고 때로는 역사에 기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신화나 전설이 전하는 내용의 이면에는 당시의 사회 정치적인 문제를 에둘러서 표현한 것 일 수도 있음을 생각하고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있는 많은 이야기들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욕망을 표현한 것들이 많다. 이 책의 편저자는 이러한 수많은 이야기와 이미지야 말로 우리 문화의 원천이라고 강조한다. 그것들이 이천년이라는 시공간을 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해온 것은 우리민족이 지닌 상상력과 정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삼국유사]는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를 우리의 역사로 만든 첫 번째 역사책이기도 하다. 역사는 기록으로 남아서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속에 살아있을 때 진짜 역사가 된다고 한다. [삼국유사] 속에 기록되어 있는 역사는 바로 우리 선조들의 의식 속에서 전승되어 온 것들의 기록이기에 살아있는 역사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삼국유사]를 통해 사유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와 문화라고 저자는 역설한다.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본 이야기들이지만 이 책은 우리가 역사서를 읽으면서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이고, 또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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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인지 몰라도 초등학교 시절 [삼국사기]의 고구려 본기 일부와 [삼국유사]를 자주 읽었던 적이 있다. [삼국유사]는 당시에도 꽤 오래된 재질의 책이어서 초등학생이 보기에는 다소 딱딱한 느낌도 들었지만, 흔치 않은 고구려의 역사라는 점에서 자주 읽었던 것 같다. 이와는 달리 [삼국유사]는 아이들을 위한 책이었는데, 마치 전래동화를 읽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한동안 [삼국사기]는 정통한 역사서로서, [삼국유사]는 민담 또는 야사로서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삼국유사]가 [삼국사기]와 달리 고조선에 대한 신화를 수록함으로써 민족의식 고취와 자주적인 역사관에 입각한 역사서로서의 평가를 얻음으로써 이제는 [삼국유사]에 대한 보다 진지한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 인간사랑에서 출간한 [교양인을 위한 삼국유사]는 바로 그러한 필요성은 물론 우리가 왜 [삼국유사]에 보다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지를 원전에 대한 해석과 설명을 통하여 다루고 있기 때문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만한 책이 아닌가 생각된다.
1285년에 일연 스님에 의하여 편찬되었다고 추측되는 [삼국유사]는 제목처럼 삼국시대의 일 중 역사에 기록되지 않고 남은 사실들을 적은 책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그 대상이 되는 책은 1145년 고려에서 편찬한 [삼국사기]이니 결국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 포함되지 않은 내용 중에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내용들을 모아서 정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5권 9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중에서 '왕력'과 '기이'는 [삼국유사]가 역사서로서의 면면을 엿볼 수 있는 내용들인데, 이 책에서는 주로 '기이'에 해당하는 내용들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저자는 그간 역사서로서 그리 각광을 받지 못했던 [삼국유사]의 진정한 의미를 전하기 위하여 이 책을 썼다. 여전히 [삼국유사]를 야사라고 생각하는 분위기 속에서 저자는 어떤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우리는 이에 귀를 기울이면서 동시에 보다 객관적이고 차분하게 그 내용들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저자는 '기이'편의 첫머리의 문구에 대한 인용을 통하여 [삼국유사]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즉, '중국의 신화를 감안한다면 삼국의 시조가 탄생한 신비로운 이야기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라는 문장인데, 실제 '기이'에는 고조선을 비롯하여 삼국은 물론 가락국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건국 신화가 수록되어 있다. 이 부분은 [삼국유사]가 [삼국사기]에 비하여 신화를 통한 민족의식의 고취는 물론 자주적인 역사관으로 확장될 수 있는데, 이 대목을 마냥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삼국사기]에는 비록 고조선과 관련된 신화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삼국의 건국 신화에 대한 부분은 역시 수록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김부식 역시 [삼국유사]의 그 첫문장과 비슷한 취지, 즉 신화가 미신적인 내용이어서 빼는 것이 마땅하지만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으며, 시조와 위대한 위인에 대한 미신은 중국에서조차 빼지 않았으니 자신도 빼지 않겠다라는 자신의 생각을 기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몇몇 신화의 범위에 대한 차이가 있지만, 무조건 [삼국유사]에만 해당 신화가 수록된 것이 아니며 [삼국사기] 역시 비슷한 취지로 신화가 수록되어 있다는 점은 다시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국유사]가 높게 평가되는 이유 중 하나가 고조선에 대한 본격적인 내용들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단군조선과 위만조선에 대한 역사를 기록함에 따라서 민족의 기원이자 우리 역사의 시작을 고조선을 뿌리로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분명 가치가 있는 대목이다. 물론 학계에서는 초반에 이러한 부분은 역사가 아닌 신화로 보는 경향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기원전 2333년에 단군이 조선을 건국하였다는 기록은 한반도의 청동기 문화가 기원전 4~5세기 또는 빨라야 7~8세기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에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에 따라서 방사능 연대 측정을 통하여 기원전 15세기 정도로 청동기 문화의 상한선이 올라가면서 단군조선이 단순히 신화의 영역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역사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더 각광을 받게 되었다. 심지어 [삼국유사]는 단군조선과 위만조선만을 언급하면서 기자조선을 부정하고 있기에 중국과의 첨예한 고대사 논쟁에도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러나, 사실 위만의 출신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연구와 분석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왜 [삼국사기]에서는 고조선에 대하여 다루지 않았을까라는 의구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사대주의적인 성향의 김부식이 고조선에 대한 부분은 단순히 신화나 야사로만 생각한 것일까? 어쩌면 삼국의 역사를 다루는 [삼국사기]의 취지와는 맞지 않기 때문에 아예 기록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김부식 역시 [삼국사기]에서 247년 동천왕이 평양성을 쌓는 대목에서 '평양은 본래 선인 왕검(王儉)의 옛터’라고 설명하고 있었으니 그도 고조선의 존재에 대해서 딱히 부정적으로만 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역사서를 서술함에 있어서 관점의 차이에 의한 것이기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상보적인 관계에 놓여진 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단군의 신화를 통하여 저자는 가장 오래되고 순수한 북방계 건국 신화의 형태, 즉 소박하면서도 천손강림신화라는 내용과 같이 다양한 해석을 통하여 [삼국유사]의 가치를 드높인다. 신화라는 행간 속에서도 건국 과정이라는 역사적인 사실을 짐작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신화에서도 잘 나타나는 부분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주몽은 그 아버지가 해모수이며 동시에 알에서 태어난다. 아버지가 해모수라는 점은 단군 신화와 마찬가지로 천손강림신화와 일치하는 것이며 동시에 알에서 태어나는 부분은 남방계 신화와 관련이 있다. 이는 주몽의 신화가 시조에 대한 고구려인의 자부심과 선민의식을 그대로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신화를 단순한 야사나 설화로만 볼 수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부분들이 신라와 가락국의 건국 신화에서도 공통적으로 나오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신화를 어떻게 역사로서 바라봐야 하는지와 연관지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고조선의 경우도 그렇지만, [삼국유사]에 수록된 내용들은 미처 사실로 기록하지 못한 고대사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역사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가령 일본의 계체왕(게이타이 천황, 재위 507년~530년)이 바로 백제의 무령왕의 동생이라는 설은 일보의 국보 '인물화상경'이라는 청동 거울의 문구를 바로 그 이유를 들고 있는데, '사마가 남제왕이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 거울을 만들어 보낸다.'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서 '사마'는 무령왕의 이름이고 '남제왕'은 바로 무령왕의 동생이기에 이러한 추측이 가능한데, 정설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분명 연구를 통하여 충분히 정설일 수 있다는 점에서 [삼국유사]의 기록들은 빛을 발하고 있다. 거꾸로 신라의 왕이 된 탈해왕은 선진문물을 가지고 바닷길을 통해 신라로 이주해 온 집단으로 추정되는데, 과연 그가 어디에서 건너왔는지에 대한 것 역시 동아시아의 고대사를 이해함에 있어서 중요 열쇠가 될 수 있기에 [삼국유사]의 행간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는 것 역시 또 하나의 역사를 연구하는 방법이 될 수 있으리라 보여진다.
확실히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 비하여 정확한 사료에 근거하여 쓰여진 책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 출처가 되는 대부분의 역사서가 지금은 전해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내용을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당 내용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확장될 수 있다는 점은 우리 역시 [삼국유사]를 자신만의 해석을 통하여 바라볼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저자는 훗날 무왕이 되는 서동의 이야기를 통하여 훗날 신라와 백제의 화합을 위하여 지어진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지만, 무왕이 신라를 무수히 침공한 점을 들어서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신라와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가 그것이 틀어지면서 악화된 것으로 해석하는 부분이 그러한 예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삼국유사]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역사적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누구라도 관심을 가져볼 수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삼국유사]는 국문학적으로 가치가 높다는 점도 지나칠 수 없다. 이 책에 수록된 '구지가', '헌화가', '모죽지랑가', '안민가', '해가'만 보더라도 다양한 향가와 고전 시가를 살펴볼 수 있으며, 또한 저자의 원문 해석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두 문자도 함께 활용되고 있기 때문에 고문학적인 가치가 상당하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한 향가에 담긴 문학적인 의미 역시 당시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니 일연의 역사의식은 물론 당시 사람들의 의식 역시 느껴볼 수 있으니 이 또한 잘 알려지지 않은 [삼국유사]의 가치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적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지금의 우리와는 사뭇 다르면서도 또 어떤 점에서는 전혀 다르지 않은 이 이야기 속 인간의 모습들이야말로 우리가 지켜야 할 인간 본질의 한 단면이며, 미래의 인간인 인공지능과 구별되는 인간의 궁극적 속성이 아닐까요? - p. 13 中에서 - [삼국유사]의 다양한 내용들을 접하면서 책의 첫부분에 저자가 오늘날 이 시점에 왜 우리가 [삼국유사]에 주목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구가 자연스레 떠오르게 된다. 그동안 민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강력한 결속을 보였지만, 공동된 역사의식의 부재로 인하여 그 결속은 점점 약화되고 있다. 21세기에 민족이라는 개념에 대한 의문부호가 뒤따르고 있지만, 중국과 일본의 자국에게 유리한 역사 왜곡을 감안한다면 우리로서는 뿌리에 대한 인식과 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서 보다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삼국유사]가 고조선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설화 형태로 전하고자 한 그 안에 담긴 다양한 역사적인 의미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역사의식 형성이 가능하기에 [삼국유사]는 역사서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글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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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인을 위한 삼국유사 일연/ 엮은이 김봉주 인간사랑/ 2020.1.30.
우리는 국사 시간에 <삼국사기>에 대해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배운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정식 사서로 취급하지 않고 일종의 야사로 취급하여 우리의 신화에 대해 배우는 것이 현실이다. 이 모든 것이 식민사관에 의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 중에서도 우리의 고대사는 그 정도가 가장 심하다. 그들은 ‘실증사학’이라는 미명하에 우리의 역사를 신화로 보는 일제 식민사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스승의 이론에 반기를 드는 신진학자들을 학회에서 소외시키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학문적 발전은 물론 우리의 역사 또한 제대로 정립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동북공정을 세밀화하는 중국학계나 대륙진출설을 끊임없이 주장하는 일본 사학계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음을 볼 때 한심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교양인을 위한 삼국유사>는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이야기를 새롭게 조명하여 주체적 사관으로 설명해 보려는 시각이 나타나 있다. 엮은이 김봉주는 서울 영동일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삼국유사>를 학생들과 읽고 토론하면서 다채롭고 풍부한 옛 이야기를 통해 역사적 상상력을 키우고 민족의 뿌리를 깨달을 수 있음을 느껴 이 책을 엮었다고 한다. 저서로 <청소년을 위한 삼국유사>가 있다. <삼국유사>의 지은이는 알려진 것과 같이 고려후기의 승려로 보각국사라고도 한다. 지눌(知訥)의 법통을 이었으며 말년에 연로한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경북 군위의 인각사를 증축하여 그곳에 머물며 <삼국유사>를 집필했으며 84세에 입적했다. 저서로 <어록>, <게송잡저>, <조정사원> 등 불교 관련 서적 80여 권이 있다.
“<삼국유사>는 단순히 <삼국사기>에 누락된 내용을 보충한다는 의미를 넘어 <삼국사기>의 사대적 역사관에 대한 불만과 적극적인 재해석의 뜻으로 만들어진 책입니다.(p.20)” <삼국유사>의 이야기들은 결국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우주를 창조하고, 국가를 건설하고, 초인간의 경지에 들고자하는 욕망의 표현이다. 가장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욕망이며 상상력이고, 인간과 사회에 관한 근원적 질문이라고 엮은이는 말한다. 삼국유사를 통해 우리가 사유해야 할 것은 바로 인간과 사회의 근원적 속성과 그에 관한 문제 제기이며 시대를 초월해 우리가 지키고 가꾸어야 할 ‘우리를 우리답게 할 그 무엇’이라는 것이다. 원 저자인 일연 스님도 중국의 옛일과 비교해봤을 때 삼국의 시조가 탄생한 신비로운 이야기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이야기라고 <삼국유사>의 서문에서 말한다.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삼국유사>가 <삼국사기>와 갖는 가장 큰 차이는 삼국의 건국 이전에 단군조선과 위만조선을 놓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삼국사기>는 기원전 57년 신라의 건국을 첫머리에 놓고 있습니다. <삼국유사>가 단군조선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일연 스님의 자주적 태도를 보여줄 뿐 아니라 그가 삼국의 역사 이전의 역사, 즉 삼국의 뿌리가 되는 공통의 조상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p.20)” 삼국을 아우르는 공통의 뿌리에 대한 관심은 곧 ‘민족’에 대한 관심으로 이것은 일연 스님 시대에 부쩍 높아진 우리 민족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 것이다. <삼국유사>는 무신 정권을 경험하고 북방의 오랑캐로 여겨지던 몽고가 천하를 지배하던 고려 후기 선종에 속한 한 승려에 의해 수집되고 바라본 우리 민족 고대 사회의 모습이란 것이다.
“<사기>에 묘사된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전쟁 과정을 보면 위만조선의 왕검성(왕험성)이 있던 곳은 지금의 평양은 분명 아닙니다. 특히 이 기록은 사마천이 살아서 목격한 동시대의 기록이므로 무엇보다 정확한 사실이라고 하면 고조선이 멸망하던 기원전 108년경 한나라와 전쟁이 있던 곳은 지금의 요동 지역이 틀림없습니다.(p.42)” 다만 단군이 건국한 시기는 이로부터 2천여 년 전이므로 그 나라가 그 기간 동안 그 지역에서 그대로 이어졌을지는 의문이 남는다. 국사 교과서에서도 단군이야기는 아직도 신화로 보지만, 단군왕검은 당시 지배자의 칭호이며 기원전 2333년 전 환웅 부족이 곰을 숭배하는 부족과 연합하여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지역도 요하와 대릉하가 있는 요령 지방과 대동강 유역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본다. 나름대로 절충안이라 주장하겠지만 안이한 판단과 식민사관을 벗어나지 못한 주장일 뿐이다.
“조선을 멸하고 4군을 두었다고 하지만 4군의 태수로 누구를 임명했다든가, 어떻게 4군으로 나누었다든가 하는 내용도 하나도 없습니다. 전쟁의 내용이 매우 세세하게 묘사된 데에 비하면 용두사미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한이 조선을 멸하고 4군을 두었다는 이 기록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p.57)” 이 4군을 소위 한사군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정말로 있었다고 믿기 어렵다. 조선을 공격했던 한의 체면상 결과는 한이 이긴 것처럼, 그리고 조선에 있던 4군데 지명을 4군으로 나누어 지배한 것처럼 서술한 것이 아닌가 한다고 엮은이는 말한다. 그동안 당연시 되던 한사군의 실체는 이렇게 근거가 불확실한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위만조선의 위치다. 처음 섭하가 조선의 비왕을 죽이고 패수를 건너 요새로 들어갔다는 표현을 보면 패수는 왕검성과 중국의 변방요새 사이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또 요동 태수로 임명된 섭하를 조선 사람들이 습격하여 죽였다는 기록을 보면 조선의 왕검성과 요동은 거리가 멀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그래서 지금의 평양과 1000km이상 떨어진 것을 애써 눈감으려는 식민사관을 가진 역사학자들의 주장이 눈물겹게 느껴지기도 하다.
“무왕과 진평왕 시대, 백제와 신라는 정말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이 시대는 수없는 전쟁의 기록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때는 바로 증오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무왕의 시대가 끝나고 20년밖에 지나지 않아 그들은 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 증오심을 치유하고 화합하여 하나가 되어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p.203)” 백제 멸망 후 줄기차게 일어났던 백제 부흥운동을 무마하고,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야 한다는 당면 과제를 안고 있던 시대, 가장 대립적이었던 두 나라를 서동요라는 노래를 통하여 사랑으로 묶어내는 이 이야기는 그 시대에 가장 필요한 주제였기에 두 나라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이어보려고 노력한 것이 아닌가 하고 엮은이는 추론하고 있다.
“우리에게 있어 하나의 민족이란 의식은 신라 통일 이후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천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 만들어진 것입니다. 7세기의 전쟁을 그 전쟁의 결과로 인해 형성된 개념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분명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p.257)” 그럼에도 삼국 시대를 신라쪽에서 통일로 마감한 것을 아쉬워하는 것은 지나치게 현대적으로 해석한 것이 아닌가 하고 엮은이는 조심스럽게 비판하고 있다. 영남과 호남을 대결구도로 몰아가는 아전인수격인 현정치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민족적인 생각이 아닌가 한다.
“서양문화를 이해하려면 누구나 먼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리스 로마 신화와 성경은 서양 문화를 공부하기 위해 읽어야 하는 첫 번째 책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문화에 있어 이 위치에 있는 것이 바로 <삼국유사>입니다.(p.452)” 현재의 우리 문화 안에 끊이지 않고 흐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전통이다. 처용 이야기, 단군 이야기, 주몽 이야기 등 <삼국유사>에 담겨 있는 많은 이야기와 이미지는 끊임없이 재생산 되는 우리 문화의 중요한 원천이다. 이것은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폭넓게 현재 우리 문화의 저변에 스며있다. 이것이 21세기의 우리에게 <삼국유사>가 갖는 첫 번째 의의이며 우리가 <삼국유사>를 읽어야 하는 첫 번째 이유이다. 92년의 아카데미 영화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네 개 부분의 상을 타며 세계적인 인정을 받게 된 것 또한 같은 맥락이라 생각된다.
“근래 국사학계의 가장 큰 숙제는 일본의 교과서 왜곡과 중국의 동북공정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p.453)” 일본은 한반도와 대륙의 침략의 역사인 제국주의 일본의 만행은 슬쩍 덮고, ‘자학적 역사관’에서 벗어난다는 이름 아래 철저히 자기들 중심으로만 서술한 역사 교과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에 항의하는 우리에게 그것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할 문제는 아니라고 한다. 또한 “동북공정이란 단순히 그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기록하는 것만이 아니라 중국인의 역사의식 속에 이 나라들을 넣어 중국인이 스스로 이 역사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자는 것입니다.(p.456)” 그런데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모르고, 우리의 자존심을 지키기 못하면서, 그리고 우리의 역사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남의 역사왜곡을 지적하고 바로 잡으려 한들 그것이 어디 가능한 일이겠는가? 일본과 중국이 우리보다 고구려나 고조선에 대해서 더 잘 알고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면, 그 역사가 우리의 것이라는 우리의 외침은 한낱 공허한 외침에 불과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들이 <삼국유사>를 읽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라고 엮은이는 강조한다.
우리의 역사를 5,000년 역사라 하면서도 3,000년은 신화로 얼버무리고 삼국시대부터 2,000년의 역사만 가르치는 현재 역사학계의 잘못된 인식이 바로 잡혀 제대로 된 5,000년 역사를 정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역사를 2,000년으로 폄하하고 자기네 역사를 1만년 전 조몬시대부터 기술하는 일본에 맞서기 위해서는 ‘실증사학’이라는 틀을 깨고 광범위하고 다양한 방법을 동원한 제대로 된 역사의 정립이 필요하다 생각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발해를 이미 자기네 역사에 편입시킨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처하는 일이기도 하다. 중국에서 편찬된 <한서>, <당서>, 등에 있지도 않은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가 중국 역사가 아니라 우리의 역사임을 자라는 청소년들에게 분명히 인식시키는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이 책은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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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듯이 <삼국유사>는 고려 후기에 승려인 일연이 쓴 역사서이자, 당대의 설화를 모아 엮은 책이다. <삼국유사>는 분명 역사를 소재로 하여 다뤄지고 있지만, 단지 역사서로서의 기능만을 하지는 않는다. 고조선을 비롯한 삼국의 건국신화가 수록되어 있고, 다양한 설화와 시가들이 포함되어 있어 문학적으로도 소중한 자료라 하겠다. 특히 여기에만 수록되어 있는 향가 14수에 대한 기록들은 어쩌면 그 실체를 잃고 사라질 수 있었던 국문학 자료를 보존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 가치를 헤아리기가 힘들 정도이다. 따라서 <삼국유사>는 역사서이자, 또한 국문학의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고전문학을 전공하는 나로서는 그동안 <삼국유사>의 원문 강독은 물론, 여러 차례에 걸쳐 읽고 또 지금도 강의의 자료로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다. 그동안 다양한 번역서가 출간되었으며, 내 서가에는 10여종의 <삼국유사>관련 책들이 꽂혀 있기도 하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다양한 기록들은 어떤 관점에서 접근하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가 조금씩 달라 인식될 수 있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향가 ‘서동요’와 관련된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에 대한 기록은 역사로서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이 책의 편자도 지적하고 있듯이, 일연이 접했던 원전에는 ‘무왕’이 아닌 ‘무강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무왕으로 보더라도 신라의 공주와 혼인했다는 기록을 찾을 수가 없으며, 얼마 전 익산 미륵사지 선탑을 보수하면서 발견된 ‘사리봉영기’에도 선화공주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비단 이 뿐만이 아니라, 신라 하대의 헌강왕 시절의 처용에 대한 내용도 마찬가지이다. 지금도 전하는 처용탈의 형상을 통해서 그의 정체를 중앙아시아 출신의 상인으로 보는 것이 유력한 학설이기는 하지만, 당시 울산 지역의 유력한 호족이라는 의견과 당시까지 신통력을 지니고 있었던 무당일 것이라는 견해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이처럼 해석에 따라 기록의 내용이 지닌 의미가 달라지는 것은 부지기수라 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시간의 순서를 잘못 계산했거나, 심지어는 도저히 동시에 성립할 수 없는 사건이나 인물들이 나린히 배치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삼국유사>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고, 다양한 기사들의 해석과 의미도 학자들에 따라서 여전히 팽팽하게 논의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책은 국어 교사인 편자가 고려 이전의 역사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동안 교단에서 가르쳤던 <삼국유사>에 대한 기사들을 나름의 관점에서 해석한 내용을 제시하고 있었다. ‘기전체’로 구성된 원전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재배치하여, 건국신화에 대한 기사는 물론 신라시대를 각각 상대/중대/하대로 구분하였다. 이러한 내용에 포함되지 않은 기사들은 따로 ‘불교 이야기’라는 항목으로 묶어 배치하고 있었다. 특히 1장에서는 ‘<삼국유사>로 사유하기’라는 제목으로, 책의 체제와 성격은 물론 저자가 생각하는 독법을 제시하고 있다. 처음 <삼국유사>를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적지 않은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다만 일부 해석의 논란이 제기된 기사들의 경우, 저자의 관점이 너무도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어 자칫 독자들에게 그것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원문을 읽기 쉽지 않은 독자들에게 기사의 내용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안내해 준다는 의미에서. 이 책이 지닌 장점도 적지 않다고 하겠다. 다만 저자가 국어 교사이기에, 이 책에 소개된 다양한 문학적 자료들에 대해서도 충분히 다뤄지지 못한 점은 아쉬운 점이라 여겨진다. <삼국유사>가 정사가 아닌, ‘유사(遺事)’ 즉 정사에서 다뤄지지 않은 일(사건)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록이다. 때문에 다양한 기록들에 포함되어 있을 의미를 탐색하는 것은 <삼국유사>의 독법에서 가장 중요한 몫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차니)
*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음. * 개인의 독서 기록 공간인 포털사이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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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고려 후기 승려 일연이 쓴 역사서. 우리나라 최초의 역사서인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함께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책. 대충 봐도 알겠지만 삼국유사를 직접 읽고 알고 있는 내용이 아니라 교과서로 배운 내용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왜 지금까지'삼국유사'가 어떤 글을 담고 있는지 한번도 궁금해 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이 책 '교양인을 위한 삼국유사'를 보면서 든 생각이다.
고등학교 선생님인 저자는 학생들에게 설명하듯 쉬운 글로 삼국유사를 보여주고 있다. 솔직히 이 책을 보면서 내가 알고 있던 많은 내용들이 삼국유사에 있던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많이 놀랐다. '유사'란 '남겨진 일'이므로 삼국시대의 일 중 역사에 기록되지 않고 남은 사실들을 적은 책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여기서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일이란 1145년 고려에서 편찬한 삼국시대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에 빠져버린 삼국의 역사입니다. '유사'에 대한 정의를 보여주고 있다. 알지 못한 내용이였는데, 이 책을 보고 왜 삼국'유사'가 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삼국유사'는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사화라고 볼 수 있다. 역사적 사실이라고 볼 수 있는 이야기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이야기도 많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감명깊었던 것은 '우리나라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용의 진위여부도 중요하겠지만, 우리나라의 고대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사실을 보여주는 역사서이지만 사대주의적인 사상이 반영된 삼국사기보다는 허황된 면이 있더라도 우리나라의 자주성을 보여주는 삼국유사가 훨씬 가슴에 와 닿았다. 삼국유사는 아래와 같이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스님이 쓴 책이라서 그런지 불교에 관한 이야기도 많다. 고조선부터 시작되는 삼국유사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해당 국가와 관련된 다양한 자료와 해석을 함께 보여주어 독자들로 하여금 역사관을 스스로 정립하게 한다. 우리나라의 역사이기에 편향적이지 않다고 할 수 없으나 난 자주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주로 흥미로운 이야기 위주로 전개가 되기에 책장이 잘 넘어간다. 몰랐던 역사적 사실에 대한 내용을 아는 재미도 있지만, 기존에 내가 알던 지식들을 다시 차곡차곡 정리하는 기쁨도 있다. 고대 역사서라 막연히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너무 흥미롭고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나처럼 삼국유사를 한 번도 접해보지 않은 분들에게는 좋은 가이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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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학계의 숙제 근래 국사학계의 가장 큰 숙제는 일본의 교과서 왜곡과 중국의 동북공정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일본은 한반도와 대륙의 침략의 역사인 근현대사에서 다른 민족에게 주었던 피해와 제국주의 일본의 만행은 슬쩍 덮고, 소위 ‘자학적 역사관’에서 벗어난다는 이름 아래 철저히 자기들 중심으로만 서술한 역사 교과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항의하는 우리에게 모든 국가는 자기들 중심의 시각으로 역사를 쓰고 가르치므로 주변국이 그것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할 문제는 아니라고 합니다. 일본에 대한 항의와 왜곡된 역사 교과서의 대안으로서 한중일 공동 교과서의 제안 등 대외적인 대응 외에 내부적으로는 어떤 대응책을 준비하였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일본의 역사왜곡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대외적 대응 외에도 우리 스스로 그들의 왜곡을 이겨낼 수 있도록 역사적 안목을 기르고 연구 실적을 쌓아 실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 하지 않겠습니까? p.4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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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철로왕 신라라는 국호를 정한 것도 지증왕 때이고, 마립간을 버리고 왕이란 칭호를 처음 사용하였으며, 임금이 죽은 후 부여되는 시호가 처음 사용된 것도 지증왕부터입니다. 또 순장 제도를 폐지하고, 소를 이용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도 이때라고 합니다. 전국을 주, 군, 현으로 나누어 정비하고 울릉도를 정벌한 것도 이때입니다. p.167 왕비의 체격이 매우 컸다는 것은 그녀 가문의 세력이 매우 강했음을 말하는 상징적 표현이며, 그들의 엄청난 체격은 곧 그 시대에 와서 왕권이 크게 강해졌음을 상징하는 이야기입니다. 처가의 힘을 빌려 64세에 왕위에 오르긴 하였지만 지증왕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울릉도를 정벌하였으며 그의 아들 법흥왕은 신라를 고대 국가의 체제를 갖춘 나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런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체적 특징이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된 이유는 처가 세력의 힘과 그의 강력한 왕권이 그의 시대에는 가장 중요한 이야깃거리였기 때문일 겁니다. p.1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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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 싹트던 민족의식 <삼국유사>에 담긴 자주성과 민족에 대한 관심은 고려가 처한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漢族이 세운 송나라가 북쪽 오랑캐의 하나인 여진족에 의해 남쪽으로 쫓겨가고 몽골에 의해 결국 멸망하는 것을 지켜보는 경험은 기존의 중국 중심 세계관이 통째로 뒤집히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역사상 처음 벌어진 이 놀라운 반전의 충격은 고려인에게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고려의 처녀를 원나라에 조공으로 바쳐야 하는 치욕적인 현실도 민족의 단결과 자존심 회복의 필요성을 키웠을 것입니다. <삼국유사>가 씌여진 1285년 전후는 이런 역사적 대 격변기였습니다. 1287년 이숭휴가 지은 <제왕운기>가 단군을 우리의 시조로 삼고,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 발해를 최초로 언급한 것은 <삼국유사>와 함께 이 시대 고려에 싹트던 민족의식과 자주의식의 결과입니다. p.21 <삼국유사>는 무신 정권을 경험하고 북방의 오랑캐로 여겨지던 몽고가 천하를 지배하던 고려 후기 선종에 속한 한 승려에 의해 수집되고 바라본 우리 민족 고대 사회의 모습입니다. p.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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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대 경문대왕 <삼국사기>[궁예]열전을 보면 궁예는 경문왕의 자식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경문왕이 궁 밖에서 낳은 자식인데 점쟁이는 그가 티어나면서부터 이가 있고 이상한 징조를 보이므로 죽이라고 합니다. 경문왕은 사람을 보내 그를 죽이려 하였는데 누각 아래로 던져진 그를 유모가 받아 길렀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한쪽 눈을 잃었다고 말합니다. p.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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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의 의미와 고조선 사회 첫째, 단군신화는 가장 오래되고 순수한 북방계 건국 신화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 제정일치 사회의 모습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셋째, 단군신화는 농경사회를 배경으로 나온 신화라는 점입니다. 넷째, 단군신화에는 나무숭배사상이 들어 있다는 점입니다. 다섯째, 단군신화는 다른 건국신화와 다르게 이염이 강조되고 인내심과 끈기가 중요시된 신화라는 점입니다. 여섯째, 국가의 건설에 필연적인 지배자의 등장과 계급의 분화를 그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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