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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디스토피아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 왜 다수의 민중들은 기득권을 지지하는가. 수많은 분석이 도출된 낡은 질문이지만 여전히 명료하게 답하기는 어렵다. 개별적인 사연이 반영된 아비투스(habitus), 정치적 수사와 계몽, 무엇보다도 욕망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다. 이시백의 신작 장편소설 『나는 꽃도둑이다』(한겨레, 2013)는 이 낡은 질문에 대한 작가의 개인적인 답인 동시에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천박한 욕망에 대한 보고서로 읽힌다. 소설에는 청계천 주변에 거주하는 ‘청심회’라는 친목계 회원들의 이야기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담겨 있다. ‘청심회’ 회원들은 어느 날 한꺼번에 파출소로 끌려간다. 처음엔 청계천의 물을 거슬러 올라온 잉어를 잡아 천렵을 한 죄를 물으려는 줄 알았으나, 알고 보니 경찰은 청계천 ‘복원’ 공사를 마친 시장이 기념 삼아 박아 놓은 명판이 뜯어간 범인을 찾고 있었다. 사건 당일의 행적을 진술서에 적는 과정을 통해 이 청계천변 장삼이사들의 일상과 그들의 삶이 다채롭게 드러난다. 청심회 총무 명식은 외국인 노동자를 짐승처럼 부리면서 조금의 자책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고용주로서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애국 어버이 회원인 청심회 회장 황치산은 아직도 박정희 전대동령을 ‘각하’라고 칭하면서 스스로를 자유대한의 질서를 확립하는 자라고 굳게 믿는다. 황치산은 탑골공원에서 노인들에게 몸을 파는 박 여사와 동거 중이다. 그 밖에도 이발사인 송재록과 양초 노점상을 하는 진근, 야동 노점상을 운영하는 야바위 킴 등은 당장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거짓말도 서슴치 않으면서도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바쁜 인물들이다. 이들은 “뭐니 뭐니 해도 세상에는 머니가 제일”(145쪽)이라는 욕망을 굳건하게 신봉한다. 재록은 키스방에서 일하는 총무 명식의 딸에게 서비스를 받는가 하면 야바위 김은 성인용 포르노 시디를 버젓이 팔아넘긴다. 게다가 그들은 외국인 노동자와 탈북 이주민들을 노골적으로 차별하고 과거의 독재자들과 폭력적인 개발을 일삼는 정권을 일방적으로 옹호한다. 이를테면 청계천에서 촛불시위가 벌어져도 진근의 관심사는 오로지 양초를 팔아 이득을 보는 것이다. “하루 품팔아 하루 사는 일용직도 절반에 가까운 49.2퍼센트”를 찍는 것만 봐도 “없는 이들일수록 부자 편”(151쪽)이라는 사실을, 진근은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지만, 그 앎은 정치적인 각성이나 저항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을 움직이는 건 촛불이 아니라 돈”이며 “박사는 책이나 무섭게 파고, 노동자는 죽어라 망치질이나 하면 만사 오케이”(152쪽)인데 왜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정권과 세상을 비판하는지 혀를 찬다. 세상이 야바위판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힘센 놈이 약한 놈 잡아먹고, 있는 놈이 없는 놈 놀려먹고, 높은 놈이 낮은 놈 부려먹는 게 이치”(173쪽)라는 사실을 비판없이 수용한다. 대통령이 된 전직 시장의 명판을 찾으려는 경찰의 수사는 배고픔에 꽃 몇 송이를 훔친 안 목사가 객사하면서 흐지부지 막을 내린다. 관청에서 시행하는 미화작업에 쓸 꽃을 훔친 안 목사의 미미한 범죄행위는 훨씬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저지르는 권력자들의 비리와 이기적이고 비루한 청심회 회원들의 삶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그러나 세상은 안 목사의 ‘저렴한 죽음’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작가는 청계천 주변 장삼이사들의 한심한 삶을, 실감나는 충청도 사투리와 함께 재현한다. 무식하지만 자신의 사소한 이윤 앞에서는 감각적인 지혜를 발휘하고 타자의 고통이나 공동체의 윤리에는 둔감하지만 자신의 쾌락과 이득에는 예민하게 반응하는 인물들은 텍스트 안의 허구적 세계 안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무섭도록 실감나는 이시백의 인물들은 그대로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민중의 민낯을 대변한다. 작가가 그려내는 민중들은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민중담론에 부합하는 그런 민중이 아니다. 그들은 이제 어렵고, 옳고, 무거운 것에 반응하지 않는다. “돈은 힘이 세고, 욕망은 만개”한 현실 속에서 “자본이 피워낸 꽃”(293쪽)들의 화려함에 환호작약하며 콘크리트로 만든 디스토피아에서 자신만은 안전하다고 자위할 뿐이다. 그들은 경제적, 정치적 약자이면서도 구조를 재편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모적인 경쟁에 몰두할 따름이다. 한국인의 무의식에 각인된 산업화의 망령은 여전히 현재적이다. 약자를 눌러서라도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은 1960년대 베트남의 정글을 거쳐서 외국인 노동자와 혼혈아에 대한 폭력으로 지속되고 있다. 반공을 국시로 하는, 극단적인 남북대립을 수십 년간 겪으면서 우리는 ‘다름’과 ‘차이’에 대한 충분한 학습의 기회를 잃어 버렸다. ‘종북’과 ‘좌빨’이라는 단어가 여전히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현실이 바로 그 증거다. 그 와중에 권력자들은 부지런히 투기와 개발을 조장했고, 민중들은 ‘잘 살아보세’를 외치면서 거기에 동참했다. 그러나 상당수가 낙오될 수밖에 없는 구조는 견고하게 은폐되었다. 그 과정에서 민중들은 타인의 고통에 민감할수록, 상생을 주장할수록 투기판과 같은 현실에서 낙오된다는 무서운 진실을 본능적으로 익혔다. 청계천에 기거하는 부박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시백의 소설은 산업화의 논리가 막장에 이른 현실에 대한 가혹한 은유이다. 이 은유는 낯설고 당혹스럽다. 어느 누구의 삶도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고 모두가 전락하는, 거대한 파국에 직면한 상황에서 들리는 능청스러운 웃음소리. 그것은 비명과 다르지 않다. 어떤 이들은 산업화의 폐해와 개발지상주의에 대하여 민중들을 ‘계몽’해야 한다고 손쉽게 말하곤 한다. 그러나 계몽이란 그렇게 손쉬운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경제적으로 상위계급에 올라서려는 욕망을 지닌 사람들에게 빈부격차와 경제적 불평등을 드러내는 온갖 지표를 들이밀어도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바꾸기보다 오히려 계몽하려는 자를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라고 부를 가능성이 크다. 또한 과거의 지도자를 ‘종교’처럼 숭배하는 자들에게 그 지도자에 대한 비판적인 자료를 건네면 이내 대화의 맥은 끊기고 단단한 경계가 생겨버리고 만다. 지난 대선을 떠올려 보라. 지겹도록 겪지 않았는가. 소설은 계몽과 한탄이 담긴 직설적인 목소리를 내뱉지 않는다. 단지 여러 인물들의 삶을 보여주면서 이런 질문을 내민다. 사소한 이득에 목을 매는 청심회 회원들의 삶과 당신들의 삶은 어딘가 닮아 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계몽하려는 욕망이 커지면 아집과 독선이 뒤따른다. 그것은 민중들을 계몽하려는 자들이 그토록 적대시한 타락한 권력자들의 그것과 얼마나 비슷한가. 처음에는 청계천을 오가는 장삼이사들의 능청스러운 웃음과 보신주의를 보며 분노하고 혀를 찼다. 그러나 그 분노와 한탄은 자책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산업화의 망령과 싸우기 위해서는, 분노와 계몽보다는 자책감을 정직하게 통과해야 한다. 계몽하려는 욕망과 분노를 느낄 때 이미 그 내면에는 어떤 위계가 설정되어 있을 테니까.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것인가. 콘크리트로 도배된 세계에서 공감과 상생은 어떤 식으로 가능한 것인가. 문득 걷고 싶어진다. 청계천에서 노동자들을 몰아낸 (안 목사가 훔쳤던) 꽃들이 있는 덕수궁 대한문 앞까지. 그 곳을 걸으면, 왠지 소설 속의 인물들과 마주칠 것만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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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만 들어보면 꼭 만담을 하는것처럼 참 재밌게 들리는데 어쩜 그리 말을 맛깔스럽게 잘하는지 그저 놀라움을 금치 못할때가 많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이 책속에 가득 모여 있다. 청계천을 무대로 좌판을 벌이며 하루하루를 근근히 살아가던 온갖 지역 사람들이 청계천 개발로 하루아침에 오갈데 없는 신세가 되어 아둥바둥 살아가는 이야기가 무척 풍자적이고 해학적이지만 그저 웃을수만은 없는 이야기들이라 씁쓸하다.
어느날 갑자기 경찰서에 붙들려 오게 된 청계천 주변 인물들의 도둑이 제발 저리듯 풀어놓는 개개인의 이야기에 4대강 사업이나 촛불시위, 청계천 복원등 지금의 실상을 꼬집어내면서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는데다 또한 방글라데시나 베트남, 그리고 탈북자등 불법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들을 중간중간 등장시켜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속에 깊이 간여하고 있는 그들의 삶까지 돌아보게 만든다. 또한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한 행동이 한사람의 죽음으로까지 이르게 되자 그것이 동기가 되어 똘똘 뭉치다가도 또 다른 사리사욕의 그림자에 뿔뿔이 흩어지는 모습들이 참으로 현실적이란 생각이 든다.
여름의 폭우로 인해 청계천이 범람하고 그 물을 따라 올라왔던 잉어를 잡아 매운탕을 끓여 먹은 이유로 경찰서에 불려왔다고 생각한 청심회 계원들은 서로 자기에게 불똥이 튀지 않게 하려 신세한탄을 늘어 놓고 있다. 김치공장 공장장으로 점심값을 돈으로 달라고 요구하다 집안에 들어앉게된 명식을 시작으로 강남에서 헌옷가지나 쓰레기를 주워다 골동품으로 팔아 생을 이어가는 만물상 황회장, 환경미화원 보조로 근근이 살아가며 이마저도 못하게 될까봐 노심초사하는 심씨, 이발소를 하면서 무기력해진 스스로를 달래려 키스방을 드나들다 친구딸을 만나게 된 재록, 탈북자 양경일, 촛불 시위 현장에서 초를 팔아 살아가는 임씨등의 청심회계원들의 이야기가 참으로 사실적으로 스릴있게 펼쳐지고 있다.
경찰이 실은 청계천 복원 사업을 추진했던 높으신 양반의 명판이 사라져 도둑을 잡고자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는 어딘가 수상쩍은 인물로 경찰들에게 정보를 제공해주던 특수임무 박금남까지 불러들이게 되는데 이어 꽃을 판돈으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안목사 내외까지 잡아들이게 된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정신병원에 있어 병원비를 마련하지 못해 결국 꽃까지 팔아야했던 안목사 부부의 이야기는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 없다. 이들은 명판과는 아무 관련이 없지만 자신들이 꽃을 훔쳐 팔았다는 사실을 털어놓은 죄로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며칠후 안목사는 풀려나지만 병색이 짙어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로인해 청심회계원들은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그를 위해 장례를 치뤄주는가 하면 그로 인해 또다시 하나로 뭉치는듯 하지만 모두 딴맘을 품고 있다.
책을 읽다보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라는 이야기가 참 많이 등장한다. '다 먹고 살자고' 라는 핑계로 자신들의 삶의 명분을 찾는 청계천 사람들처럼 우리는 정말 먹고 살자고라는 핑계를 대며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합리화 시키고 있는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평소 구경삼아 나들이 삼아 청계천에 발걸음 하곤 했지만 이제는 그곳이 삶의 터전인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악전고투로 살아가야할 삶의 현장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될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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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중심이 아니라 인물 중심의 소설이다. 청계천 주변에서 가까이 지내온 이웃끼리 만든 친목계인 청심회 회원들이 중심인물들이다. 사정은 이렇다. 소나기가 오자 한강에서 놀던 잉어며 붕어들이 새 물을 따라 청계천으로 거슬러 올라온다. 물이 빠지면서 팔뚝만 한 잉어들이 꽃밭에 누워 펄떡이다가 죽는 게 부지기수였는데, 그걸 치우느라 고생하던 환경미화 보조원 심흥복 씨가 청심회 황치산 회장한테 진상한다. 여름내 수박 한 통 내놓지 않는다고 계원들이 구시렁거리던 차에 황 회장은 이게 웬 떡이냐 싶어 청계천 다리 밑에 솥을 걸고 매운탕을 끓인다. 그것이 위법이라고 하여 청심회 회원들은 줄줄이 파출소로 끌려가 진술서를 쓰게 된다. 소설은 진술서를 쓰게 된 청심회 회원들의 그날의 알리바이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청심회 회원들은 청계천 주변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김치 공장 공장장인 김명식은 도시락을 싸고 다니겠으니 식대를 달라고 공장에 요구했다가, 오든 말든 맘대로 하라는 사장의 대꾸에 풀이 죽는다. ‘먹도날드 분식’을 하고 있는 명식의 아내는 그런 김치 공장 사장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다가도 자신이 부리는 종업원에게는 가멸차게 대한다. 환경미화원 보조로 일하는 심흥복은 황 회장의 소개로 일하게 되었지만 몸을 팔고 다니던 박 여사를 사이에 두고 황 회장과 대립한다. 아내가 운영하는 에덴 미용실에서 함께 일하며 기를 펴지 못하는 송재록은 키쓰방에서 김명식의 딸 경순에게 서비스를 받는다. 이들은 가난하게 살지언정 건강한 의식을 가진 민중이라기보다는 자본과 세속에 길든 군상들이다. 탈북 새터민 양경일과 베트남에서 온 비엔, 그리고 묘적선사와 안 목사 부부는 청계천 주변 장삼이사들에게조차 차별을 받지만 건강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인물들이다. 비엔은 사업하는 사람이라는 중매업체의 말만 믿고 결혼하지만 알고 보니 한국인 남편은 정신질환자였다. 비가 오면 두들겨 패는데 그대로 살다가는 뱃속의 아이마저 잃겠다 싶어 무작정 집을 나온다. 안 목사 부부의 집에서 살다가 해산할 날이 다가올 때 양경일의 집에서 묵게 된다. 양경일의 도움을 받은 비엔은 양경일이 급전이 필요할 때 도움을 준다.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것이다. 안 목사는 신학대학을 마치자마자 청계천변에 천막을 치고 목회를 시작한 사람이다. 한때 잘나가기도 했지만 지금은 먹을거리조차 없어 아내가 꽃 도둑이 되기에 이른다. 안 목사는 자신이 한때 교회를 세웠던 천변 어름으로 내려갔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안간힘을 쓰며 물소리로 위치를 가늠하며 한 발, 한 발 가까스로 움직였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가 일용할 양식과 바꾸기 위해 꽃을 뽑아 오느라 듬성듬성 비어 있는 꽃밭으로 다가갔다. 비에 젖은 몸이 허기와 함께 사정없이 떨렸다. 가물거리는 정신을 모아 그는 라면 박스에 담긴 꽃모종을 꺼내 들었다. 그것들을 손에 쥐고 꽃밭을 더듬어 빈 자리마다 한 포기씩 심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있는 마리골드나 피퓨니아는 씨를 구할 수 없어서 집에서 기른 봉선화와 분꽃을 대신 심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로서는 최선을 다한 셈이었다. 그는 우지끈 소리를 내며 도심 한가운데로 내리치는 뇌우를 보며 중얼거렸다. 주여, 부디 꽃을 훔친 저희를 용서하소서. (240쪽) 청심회 회원들이 줄줄이 파출소로 끌려간 까닭은 공유수면에 평화롭게 떠도는 잉어를 잡아먹은 죄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지난 월요일, 청계천 공사를 마치고 황학교 부근에 완공 기념으로 박아 놓은 전 시장이자 현 대통령의 명판이 사라졌고, 얼마 뒤 있을 청계천 행사에 그분이 오시기 전까지 범인을 색출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권력자의 행차 때문에 졸지에 파출소에 끌려가 진술서를 쓰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소설은 퇴행적 역사 상황에서 청계천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풍자적으로 보여준다. “이문구의 공백이 한 언어의 사멸처럼 충격이었을 때 그가 홀연 나타나 그리움과 허전함을 채워주었다.”는 후배 소설가 전성태의 평가처럼 문장은 걸뚝한 입담이 특장이다. 야바위꾼 김노천이 야동 시디를 파는 대목은 그 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