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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에게 예수, 인도인에게 석가, 중국인에게 공자, 희랍인에게 소크라테스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다석이 있다. 다석은 우리말로 철학을 한 최초의 사상가다. 그동안 한국의 철학자는 유불도의 변경지대를 넘어서 본 적이 없다. 오직 다석 유영모(1890-1981)와 씨알 함석헌(1901-1989)이 우리말과 글로 철학을 한 대표적인 사상가다. 물론 다석은 석가나 공자와 같은 세계 4대 성인들에 비하면 한참 후학이다. 어쩌면 우리에게도 고유의 사상가 '단군'이 있지 않냐며 공자나 석가만큼 앞선 고유한 철인을 제시하고픈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번 곰곰히 생각해보라. 단군이 정말 우리말로 철학을 했을까? 예수나 석가나 공자나 소크라테스나 모두 자기네 말과 글로 철학을 했다.
다석 유영모는 동서 정신문화의 창조적 융합을 추구한 철학자다. 저자 박재순은 다석의 사상을 "동양 문명의 뼈에 서양 문명의 골수를 넣다"고 표현한 바 있다. 다석은 동양의 종교 사상, 서양의 기독교 사상, 서구 근대 이성 철학에 두루 통하는 현대 사상가다. 다석의 사상은 철학과 종교, 이성과 영성이 통합되어 있다. 서양의 이성철학이 자기와 타자를 객관화 대상화 타자화하는 철학이라면, 다석의 철학은 자기와 타자를 주체화하는 철학이다. 서양 문명의 기초는 그리스의 로고스 철학과 기독교의 복음 철학이다. 유럽 기독교 문명의 과제와 사명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이성과 정의와 사랑을 실현하는 영성을 통합하는 데 있다. 그러나 서양의 기독교 문명은 이성과 영성의 통합에 실패했다. 현재 미국의 기독교와 한국의 기독교는 이성도 영성도 부족한 종교다.
다석의 철학은 이성과 영성의 통합을 지향한다. 서양의 이성주의 철학은 방법론, 논리와 개념의 엄격성, 인과적 결정론과 환원주의를 주장한다. 서양의 이성철학이 개념의 정확성과 논리의 일관성을 추구했다면 다석의 생명철학은 주체의 깊이와 전체의 합일을 추구했다. 서양의 계몽주의에서는 이성을 남의 도움없이 사용하는 것이 성숙이지만, 다석에게는 탐욕과 노여움, 삶과 죽음, 편견과 지식을 넘어서는 것이 성숙이다. 서양의 이성철학이 신을 멀리하고 언어분석과 논리실증주의로 귀결되었다면, 다석의 철학은 신을 탐구하고 신에 대한 지식과 깨달음에 근거해서 만물의 변화를 전체적으로 깊이 알고자 했다. 이를테면 다석은 [주역]에 나오는 '궁신지화'를 강조하는데 '신을 탐구하면 만물의 변화를 알게 된다'는 뜻이다. 다석은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 하나님을 찾는 본성이 있다고 했다. 궁신은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한국 전통문화의 구성원리는 종교문화사적으로 천지인 삼재론을 중시했던 북방 수렵문화와 음양오행설을 따랐던 남방 농경문화의 만남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석은 음양오행사상을 운명론적이고 결정론적인 것으로 비판하고 천지인 합일 사상으로 돌아갔다. 한국의 정신과 사상은 본래 낙관적이고 감정적이다. 이는 함석헌이 한민족 종교문화의 근본줄기를 신선사상으로 본 것과 일맥상통한다. 신선사상은 자연친화적이고 평화적인 사상이다.
다석은 우리말과 우리글로 철학한 첫 번째 사람이다. 하이데거는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했고, 라캉은 언어가 무의식의 조건이라고 했다. 언어는 생각의 표현일 뿐 아니라 생각을 낳고 만든다. 다석의 사상은 생각을 중심에 놓는다. 사람은 하늘과 땅 사이에 곧게 서서 생각하는 존재다. 다석에게 생각은 사변과 관념의 행위만이 아니라 몸과 맘과 얼을 불태우는 생명과 혼의 행위며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생성하는 존재의 행위고 천지인 합일에 이르는 우주적 행위다. 생각은 몸에서 캐낸 정신의 불꽃이다. 우주와 인생과 사물의 엉클어진 문제들을 푸는 실마리는 생명의 씨알맹이가 싹트는 끝, 사람의 마음 끝, 생각의 끝에 있다. 다석의 씨알 사상은 동학에서 제기한 시천주, 사인여천, 인내천의 핵심사상을 그대로 포함한다. [삼일신고]의 '성통공완'을 '바탈을 트고 맡음을 마침'으로 풀이한다. 즉 사람의 본성이 싹트고 뚫리고 통하여 하늘이 준 사명과 보람을 이룬다는 뜻이다.
다석 사상의 핵심에는 '몸 제사'가 있다. 제사는 자아를 불살라 허공, 빈탕한데, 하늘에 올리는 일이다. 내 살과 피로, 내 몸으로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나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 다석은 의인의 깨끗한 피가 세상의 죄와 더러움을 개끗이 씻는다고 굳게 믿었다. 다석은 자연의 먹이사슬을 희생제사와 속죄 행위로 보았다. 다석의 '자연상속은'은 자연생명세계가 서로 속죄함으로써 서로 더러움과 죄를 씻어줘 자연생명세계가 융성해진다는 것이다. 이는 동학의 제2대 교주 최시형이 하늘로서 하늘을 먹인다는 '이천식천'으로 본 것과 상통하는 구석이 있다. 다윈의 진화론은 생존투쟁과 자연선택을 말한다. 여기엔 혼과 영의 관점이 없다. 반면에 다석은 숨을 목숨, 말숨, 우숨으로 구분한다. 목숨은 목으로 쉬는 숨이고 말숨은 말씀과 생각으로 쉬는 숨이고 우숨은 하늘의 얼숨으로 쉬는 숨이다. 이처럼 숨줄(생명)은 몸, 맘, 얼로 구성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