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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속도, 걷는 속도, 책을 읽는 속도는 꽤 빠른 편이다. 먹기와 걷기의 경우, 자주 빈축을 사기도 한다. “다른 사람과 함께 걷거나 먹을 때에는 상대방과 속도를 맞추어 시공간을 공유한다는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잔소리를 들었다. 그런 반면 독서의 경우에는 아무리 빨리 읽어도 옆에서 아무도 참견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학 입시 때의 암기 지옥에서 해방되었을 때부터 책을 읽는 속도는 재미가 붙을 정도로 빨라져, 그 후 20년 동안 하루 평균 일곱 권을 읽고 있다.(요네하라 마리, 『대단한 책』, 357쪽) 이 이야기에서 우선 놀라게 되는 것은 요네하라의 속독력이지만, 사실 이런 이야기가 나오게 된 배경이 있었다. 그런데 1년쯤 전에 고지엔(이와나미서점에서 발간하는, 백과사전의 역할도 겸비한 사전)을 펼쳐 보는데, 갑자기 글자가 흐릿하게 보이는 것이 아닌가? 눈을 비비고 사전을 멀리 들거나 얼굴에 바짝 가져다 대보기도 해보았지만 헛수고였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었다. 2.0을 자랑하던 시력이 이렇게까지 확 떨어지리라고는……. 그러고 보니 책 읽는 속도도 급격히 느려졌다. 원통하다. 인정하고 싶지 않다. 예전과 같은 속도로 책을 사고 자신에게 계속 허세를 부렸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능력의 쇠퇴를, 게다가 인생도, 읽을 수 있는 책도 한계가 있다는 단순한 진실을 잔인할 정도로 분명하게 자각하게 해주었다. (같은 책, 357~8쪽) 1996년, 즉 세상을 떠나기 꼭 10년 전의 기록이다. 터무니없는 추측이겠지만, 어쩌면 이때부터 건강에 이상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독서의 신이라 불리는 마쓰오카 세이고나 지의 거장 다치바나 다카시의 현재 나이는 당시의 요네하라 보다 훨씬 많음에도 독서력이 떨어졌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마쓰오카는 1400회 가까울 정도로 꾸준히 하루에 한 권씩 읽고 글을 쓰고 있으며, 다치바나 또한 2007년에 발간 된 『읽기의 힘, 듣기의 힘』에서 확인 되는 바. 사실 이틀 있으면 『주간문춘』의 독서란에 실릴 글을 써서 넘겨야 한다며, 이를 위해 이틀 전에 서점에 가서 쇼핑백 2개 분량의 책을 산다고 했다. 물론 그 이틀 만에 읽고 솎아내고 읽고 나서 원고 까지 마무리 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사실 요네하라 본인의 안타까움 과는 달리 1995년 요미우리 문학상, 1997년 고단샤 에세이상을 비롯하여 나중에는 소설에도 도전하여 상을 받는 등. 꾸준하기는새로에 오히려 범위를 넓히며 활약을 이어갔다. 이 책은 그런 요네하라의 필력이 아닌 ‘입담’을 즐길 수 있는 책이다. 혹은 역으로 필력의 숨은 힘을 확인 할 수 있는 책이라고 해야 하냐? 2001~2005년 사이에 “각계 명사들과 다양한 주제로 나눈 이야기를 모은 대담집”(321쪽)인 만큼 긴장도는 조금 떨어지지만 대신 다채롭고 무엇보다 편안히 웃으면서 따라갈 볼 수 있는 책이다. 다만 마지막 이토이 시게사토와의 대담은 조금 페이스가 떨어지는 느낌이다. 참고로 대담집인 만큼, 즉 기본적으로 5할은 비非요네하라의 목소리로 채워져 있다고 상정되기 때문에 의구심이 들 수도 있겠지만, 국내에도 저서가 번역된 명사도 여럿이고, 무엇보다 이야기의 스펙트럼이 세계를 오간다거나 보편적, 혹은 특수한 주제가 대부분이라. 독자가 소외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외국어,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교육, 통역의 세계, 「논리의 귀 나열의 눈」, 멍청한 관료와 정치인 이야기, 이탈리에서는 성희롱을 하지 않는 것이 성희롱이라는 부분 등은 단숨에 읽어버리게 만들 정도로 재미있었다. 글의 흐름과는 별도로, 마지막으로 드는 생각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신의 능력의 일찌감치 조퇴시키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능력의 쇠퇴를, 게다가 인생도, 읽을 수 있는 책도 한계가 있다는 단순한 진실을 잔인할 정도로 분명하게 자각”하고 할 수 있는 것에는 온 힘을 다하자. 누군가 강제로 시켜야만 경험할 수 있는 것도 분명 있기 때문에 하찮은 것에도 온 힘을 다하라는 요로 다케시의 말이 떠오른다. 하물며. 역도 선수가 바벨을 들어 올리는 순간 맥박이 140까지 올라간다고 해요. 동시통역을 대개 (세 명이 한 팀으로 각각) 10분에서 20분 정도 하는데, 저는 그때 맥박이 160이에요. ─요네하라 마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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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네하라 마리가 2001~ 2005년에 일본 각계 명사 11인과 나눈 대담집이다. 사후 그녀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에 의해 묶여 나왔으니, 책 자체의 완성도는 기대하지 말고 읽어야 한다.
전체적으로 요네하라 마리의 입말을 옮겨 놓은 것이어서 출판사 소개글 그대로 그녀의 입담을 즐길 수 있는 책이다. 이 대담집에서, 저자가 말하는 부분을 읽어가는데 상대방과 대화한다는 것만 빼면, 저자가 쓴 다른 책들을 읽어가는 것과 별로 큰 차이를 못 느꼈다. 그러니까, 요네하라 마리는 문어체 글도 구어로 이야기 들려주는 것처럼 편하게 쓰는 재주를 가졌던 것이다. 아마 이 부분은 일어 원문을 읽어보면 더 잘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내용은 통역에 대한 이야기, 세계 정세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그녀의 절친인 이탈리아 통역사 '시모네타 도지' 다마루 구미코와의 대담이 4차례나 있다. 이 부분에 좀 사적이고 웃긴 이야기가 많다. 맨 뒤에는 저자의 집에 기숙했던 러시아 통역사의 추모글 성격의 해설이 실려 있다.
요네하라 마리를 추모하여 그녀의 개인적이고 세세한 에피소드까지 읽으려는 독자에게는 괜찮은 편이다. 나는, 저자가 프라하에서 고단샤 세계명작전집을 여러번 읽은 일화 부분에서, 나도 모르게 그렇지, 그럴줄 알았어, 라고 혼잣말하며 무릎을 쳤다. 다른 책에서 저자가 어릴적 읽었던 세계 명작에서 궁금했던 사항의 역사 문화 배경을 책을 읽으며 추적하는 대목을 읽고, 어쩜 이리도 나같은 인간이 또 있었을까, 혹시 이 분도 명작동화전집세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뭐 이런 이야기 등등, 내게는 소소하게 저자를 알아가는 재미가 있는 대담집이다.
하지만 저자를 좋아하지 않거나 저자에 대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이 책을 저자의 전체 책 중 첫권으로 읽게 된다면, 그런 독자에게는,,, 글쎄다. 예스의 상품 상세 페이지로 가면, 이 책에 별 하나 준 리뷰가 있는데 나는 이 저자를 좋아하지만 그 독자분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저자를 여성우월론자라고 하는 등, 각각 쓰신 이유엔 동의할 수 없지만. ) 나 역시 몇 년 전에 <팬티 인문학>과 <러시아 통신>을 읽고, 왜 이 정도 에세이가 인문학이며 러시아학으로 소개되는지에 분개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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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읽은 요네하라 마리란 여자를 몇 줄로 요약해 보자면
1. 공산주의에 대해 동경을 갖고 있는 여자: 어린 시절을 보낸 공산주의 국가의 장점과 일본의 단점을 비교하며 공산주의를 은근히 미화하는 경향이 있어서 거슬렸다. 물론 아버지가 공산당원이라 그렇다 쳐도,
2. 반미 주의자: 요네하라는 미국이 무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국가라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 몇 가지 예를 들었는데, 그 예란 것이 정말 웃기다. 히로시마 원폭과 6.25전쟁 당시 북한 융단폭격까지 미국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예라고 주장하는데, 이 대목에선 그냥 책을 덮어버리고 싶었다.
3. 페미니스트: 말도 안 되는 성차별적 발언을 잘도 하는 여자다. "남성은 현상, 여성은 존재"라는 근거도 없는 여성우월주의 시각을 늘어놓으며 깔깔 웃는다. 남성 통역가가 없는 이유가 남성은 소속감이 없으면 불안감을 느껴서란다. 여기까지 이르니 책을 덮는 것에서 그치지않고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아 그리고 내용은 정말 볼 게 없다. 요네하라 마리란 여자의 신변잡기와 통역 에피소드가 주를 이룬다. 명사와의 대담 내용도 깊이는 없다. 그녀의 팬 클럽이라면 좋아하겠지만 나 같은 일반 독자로서는, "이 여자가 그렇게 대단해? 내가 왜 이런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읽고 있어야지?"하는 반감이 든다. 중반부터는 속독으로 대충 훑어 읽었다.
1줄 요약 1. 요네하라 마리 팬클럽이 아니라면 읽지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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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어 통역가, 낯설다. 새로 산 셔츠가 피부에 닿으며 바짝 선 깃과 결로 나를 긴장시킬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할까. 러시아에 눈꼽만큼의 관심도 없었고 일본작가의 정신세계는 요시모토 바나나 언니님 이후로 버겁다며 고이 접어두었던 내게 요네하라 마리는 날이 선 셔츠같았다. 뭐부터 어떻게 다가가야 내 것인양 익숙해지지?
『언어 감각 기르기』는 마리가 일본의 저명인사들과 인터뷰한 내용을 글로 펴낸 책이다. 모국어와 외국어를 통역하는(혹은 번역하는) 작업이 어떠한 것인지 인터뷰 사이사이에 엿보인다. 어설픈 솜씨로 지어진 연설문을 들으며 세련된 언어로 바꾸어 말해야 할지 원문 그대로 조악한 문장으로 내보내야 할지, 이어폰을 꼽고 발을 진땀을 빼고 있는 가상의 여인을 떠올려 볼 수 있다. 물론 그 자리엔 이탈리아어 통역가도 있어줘야 한다, 망사 스타킹을 신은 고운 차림의. (이탈리아어의 통역사가 저런 차림만 있는 건 아니다, 다양한 방식의 사람들을 떠올릴 수 있다. 실제로 이탈리아어 통역가로 활동중인 '다마루‘와의 대화가 여러 번 실려 있는데 정말 재미있다.) p.208 그러고 보니 이탈리아인이 쓴 이런 내용의 러브레터가 생각나네요. "사랑스럽고 사랑스러운 내 보석 마리아 씨. 당신의 눈동자가 저를 응시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알프스를 맨발로 넘는 것도 불사하겠습니다. 당신의 부드러운 팔에 안기기 위해서라면 어떤 깊은 바다도 헤엄쳐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사랑스러운 마리아에게. 피에로"라고 쓴 다음에, "P.S. 다음 토요일, 만약 비가 안 오면 만나러 가겠습니다." 이게 바로 이탈리아 사람이죠.(웃음) 정말로 절반도 믿어서는 안 된다니까요. 그까짓 비가 뭐라고.
일본에서만 자란 일본인이 아니라 체코에서 어린 시절을 살았다가 일본에서 자리를 잡은 일본인으로서 마리씨는, 일본인의 문화나 언어 곳곳에 묻어나는 ‘익숙함’에 대해 객관적으로 다시 접근해볼 수 있었을 것이다. 덕분에 일본 혹은 러시아 문화권에 대해 다면적인 접근이 가능하다. p.44 그때까지 나는 열등감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그런 감정을 가진 적도 없어. 그러고 보면 소비에트 학교의 친구들에게 열등감이라는 감정, 그리고 사람의 재능이나 능력에 대한 질투나 시기 같은 감정이 없었잖아. 뛰어난 재능을 친구에게서 발견하면, 자기 일인 양 기뻐했지.
가까운 일본이어서 그리고 그 언젠가 같은 문화권에 놓일 수 밖에 없었던 운명이어서 일본과 우리는 비슷한 흐름이 많다. 가령 ○×식이나 선택형의 시험. 아무렇지 않게 당연하게 접해온 시험방식인데 다른 나라에서의 평가와 비교하면 삭막하기도 하다. 왜 한번도 ‘왜 꼭 이런 형식만 있어야 할까?’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지 못했을까 생각했다. 아니 중학생때에 마리씨와 비슷한 의문을 가져본 적은 있었던 것 같다, 다만 ‘선생님께 따’지지 않은 것만 차이가 있다할까. (마리씨, 화끈하게 선생님께 따져보기도 했단다. 참 근사하다.) p.44~45 나는 참을 수가 없어 선생님에게 따졌어.(웃음) 예를 들어 역사의 경우 소비에트 학교에서라면 “인더스 강이 인도의 농업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 혹은 “인도의 자연과 종교의 관계에 대해서”같은 문제가 나와, 책을 읽거나 어른에게 묻거나 스스로 어떻게든 조사해서 친구들 앞에서 발표해서 평가를 받잖아. 암기하더라도 전체적인 문맥 속에서 의미를 갖는 것이지 토막 내고 잘라내버리면 무의미하다고 하면서, 이런 식의 공부 방법도 평가 방법도 잘못된 거라고 항의했지. 그랬더니 선생님이 “마리야, 한 반에 50명이나 있기 때문에 도저히 그런 식으로는 할 수가 없단다. 게다가 그런 방식으로는 객관적인 평가가 불가능해”라고 하셨지. 하지만 객관적인 평가는 어차피 불가능한 법이니까, 그건 단순히 평가하는 사람의 책임 회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어. 그래서 나는 일본 사회에 영원히 적응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요네하라 마리가 세상을 떠난 해에,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마리씨의 책이 출간되었다고 한다.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도 많을 것이고 접하지 못한 마리씨의 에세이도 많을 것이다. 어쩌면 ‘언어 감각 기르기’는 통역을 준비하면서 꼼꼼하게 많은 것들을 연구하던 그녀가 그만큼 폭넓은 열린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봤기 때문에 가능했던 건 아닐까. 세상을 넓고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내 생각과 같았지만 그녀는 ‘러시아어’를 통한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 나는 나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 그녀처럼 본질을 바로 보면서 즐거운 대화를 많은 사람들과 이어가기 위해선 내 시선이 더 깊고 넓어져야 하지 않을까. 이미 세상을 떠나 없는 마리씨가 안타깝다. 더 좋은 시선으로 ‘정형화되지 않은’ 많은 것들에 대해 한마디 더 하셨어야 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친근했다고, 벌써 마리씨를 좋아하게 되어 버렸다. 하긴, 빳빳하고 차가운 셔츠도 조금 지나면 내 체온으로 따스하게 와닿잖아.
나 같은 경우, 태어나서 사춘기가 오기까지 어린 시절에 습득한(?) 것은 서울의 언어요 문화였다. 그런데 지금은 부산에 산다. 사투리나 영남 지역에 독특하게 존재하는 풍습(?)같은 것들이 새롭게 와닿을 때가 많다. 덕분에 새로운 것을 알아간다는 사실에 신나기도 하지만 문제는 너무 신나하다가 이상한 핀잔을 듣기도 한다는 점. 또 전라도 사투리, 충청도 사투리 등 너무 많은 언어에 노출되어 있어서 내 촉수(!)가 피곤할 때가 많다는 점. 감각기의 성능과 용량을 높여야겠다. 마리씨는 낯설었던 일본에서 어떻게 잘 적응했던 걸까. 더 많은 책으로 만나봐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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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네하라 마리의 글에 매혹된 것은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세계음식기행 <미식견문록>에서였다. 그냥 음식 이야기 몇 가지 나열된 것일거란 생각에 가볍게 책을 집어들었다가 탁월한 말솜씨에 빨려들어가 단숨에 책을 다 읽게 되었다. 그 이후 <문화편력기> <발명마니아> <인간 수컷은 필요없어> <미녀냐 추녀냐> <대단한 책> 등을 읽었다. 이런 글들을 이제야 알았다는 아쉬움과 함께 말이다. 이번에 읽게 된 책은 2013년 출간된 <언어 감각 기르기>이다. 요네하라 마리의 책이 새로나왔다는 것을 보고 책에 대한 정보를 아무 것도 모른 채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저 '요네하라 마리'라는 이름만으로 선택해서 읽은 책이다.
이 책은 요네하라 마리가 일본의 명사 11인과 나눈 대화를 담은 것이다. 대화를 나눈 것이니 대담 형식으로 구성된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대화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읽어서였을까? 무언가 낯설고 산만한 느낌이 들었다. 책을 읽고 있는 내가 겉도는 느낌이 들었다. 김빠진 뜨뜻미지근한 맥주를 마시는 느낌이랄까? 그전 느낌을 되살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충분히 책 속으로 빠져들고 싶었는데, 그럴 마음의 준비가 다 되어 있는데, 막상 그러지 못했다. 지금껏 푹 빠져서 읽은 책들에 비해 아쉬움이 많이 느껴진 책이었다.
이야깃 거리가 많은 동시통역사 요네하라 마리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많이 아쉽게 느껴졌다. 그래도 지금까지 남겨놓은 자료들만 편집되어 출간될 뿐, 새로움을 느낄 책은 당연히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크게 아쉬울 것은 없다. 다음에는 '요네하라 마리'라는 이름이 들어간 새로운 책의 제목을 보더라도 당장 집어들지 않을 것이다. 머뭇거리게 될 것이다. 아무래도 지난 번 독서를 마지막으로 멈출 것을 그랬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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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네하라 마리의『언어 감각 기르기』가 출간되었다는 소식에 고민 없이 바로 주문했다. 나는 저자 요네하라 마리의 팬이다. 요네하라 마리의 책들은 그녀의 이름으로 더 유명한 것 같다. 그러니깐 그녀의 이름이 책의 보증수표가 할까? 이렇게 그녀에게 빠져버린 것은, 그녀의 『차이와 사이』책이었다. 책의 소개 글에 의하면 이렇다.
그녀는 러시아어 동시통역사였다. 이런 이력 때문인지 그녀는 언어와 소통에 관한 통찰력이 뛰어나다. 또한 다지식을 소유했으며, 더 놀라운 것은 그러한 모든 것을 유머로 전환시키는 강력한 매력이 있다는 것이다. 처음 그녀의 『차이와 사이』란 책을 읽었을 때, 나는 그녀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기존에 내가 느끼는 일본특유의 몽롱한(감수성적인) 문체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다. 어린 시절 프라하의 소비에트에서 여러 개국의 아이들과 생활한 탓인지, 내가 일본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의 과감히 탈피시켰다. 오히려 통 큰 그녀의 발언들은 사람을 유쾌, 상쾌, 통쾌하게 만든다.
내가 『차이와 사이』에 대해 먼저 이야기 한 것은 『언어 감각 기르기』를 읽으면서 맨 처음 내가 읽었던 『차이와 사이』확장판 대담집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혹시나 그녀를 알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차이와 사이를 먼저 읽을 것을 권유한다).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그녀와 다른 사람의 대담으로 다시 엮어진 것 같았다. 『언어 감각 기르기』그녀가 동시통역사였기 때문에 언어에 관한 이야기가 많지만, 이외에도 정치, 과학, 문학 기타 등등 여러 장르의 이야기들이 들어있다(참고로 그녀의 음담패설도 하나의 귀여운 매력으로 읽을 수 있다는). 워낙 독서광이란 그녀의 이력 때문에 지식의 끝이 보이지 않을 기색이다.
요네하라 마리의 글을 읽다보면 그녀는 주제에 대한 교합과 편집을 잘한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소재들을 주제에 이어붙이며 또 다른 지식을 재정의 한다. 이런 점을 보면 분명 그녀는 브레인스토밍에 뛰어날 것이란 확신이 든다. 그렇게 그녀가 새로 만든 지식은 독자에게 쉽게 전달할 수 있도록 만들다. 오히려 그녀는 어렵게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다.
일찍이 그녀가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 아쉽다. 좀 더 오래 살아서 계속 다양한 이야기들 들을 수 있었더라면 싶다.
그런데 이렇게 그녀의 또 다른 책이 출간되어 기뻤다. 보고 싶은 친구와 다시 만난 것 같아서 책을 읽는 내내 행복했다. 또 한명의 친구를 책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책읽기의 묘미라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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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싶지 않은데, 내 생각이나 가치관이 자꾸 미국이나 일본 스타일에 경도되는 걸 느낄 때가 있다. 그야 자본주의를 다루는 경제학과 세계 패권이나 제국주의 등을 배우는 정치외교학을 전공했으니 미국과 일본 스타일에 끌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대안경제학이라는 것도 배웠고 세력균형이나 복지국가에 대해서도 배웠으니 생각의 균형이 잡혀야 하지 않을까? 요네하라 마리의 책을 읽을 때면 유난히 이런 반성을 자주 하게 된다. 아홉살 때부터 5년 동안 체코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에서 다녔으며, 도쿄 외국어대에서 러시아어를 전공, 훗날 러시아어 통역가이자 작가로 성공한 요네하라 마리. 그녀는 소련 붕괴 전후 일본 최고의 러시아통(通) 중 한 명으로 손꼽히며 일본 내에 러시아의 언어와 문화, 예술 등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러시아 통신>을 비롯해 그녀가 쓴 책들을 보면 내가 그동안 러시아를 비롯해 과거 공산주의 국가들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하고 무지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비록 이들의 이상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들이 전통적으로 지키고 가꿔온 문화와 예술 중에는 얼마나 대단하고 멋진 것이 많은가. 볼쇼이 발레단이라든가, 톨스토이라든가, 보드카라든가......^^ <언어 감각 기르기>는 요네하라 마리가 러시아에 대해 다룬 책은 아니고, 그녀의 전공인 언어와 통역, 문화 등에 대해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요네하라 마리가 요로 다케시, 하야시 마리코, 이토이 시게사토, 다마루 구미코 등 모두 11명의 명사들과 여러 매체에서 나눈 대화를 모은 대담집이다. 과학자, 문학 교수, 정치가, 카피라이터, 작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과 대담을 한다는 것 자체도 대단한 일인데, 생전에 매일 일곱 권씩 책을 읽었다는 그녀답게 화제마다 맹렬하게 달려들어 이야기하는 모습이 어찌나 멋있었는지 모른다. 러시아어 통역사는 러시아 사람처럼 대개 이상주의적이고 수수하다는 것이 그녀의 평인데, 그 안에는 보드카처럼 뜨겁고 화끈한 열정이 담겨 있는 것까지도 닮았으니 신기할 따름이다. 역시 언어는 문화를, 문화는 언어를 닮는 것일까. 사람에게 클론 기술을 응용하는 것에 대해 모두들 걱정하고 있지만, 클론 기술 같은 걸 사용하지 않더라도, 다들 유니클로를 입고, 같은 TV 프로그램을 보고, 편의점 음식을 먹고 하니까, 말투도 비슷해지고, 그러다보면 머릿속도 서로 닮아가지 않을까? (p.56) 요네하라 마리는 러시아의 언어와 문화를 알리는 데에는 앞장섰지만, 모든 나라들이 천편일률적으로 미국화되는 것에는 반대했다. 아니, 세계 패권을 미국이 쥐고 있기에 미국화되는 것을 반대할 뿐, 지구촌의 수많은 나라의 다양성이 무시되고 오로지 한 나라를 기준으로 획일화되는 것에 반대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이는 실용성이나 편리함을 앞세운 제국주의, 파시즘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나. 일상 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똑같은 브랜드의 옷을 입고, 똑같은 기업에서 만들어진 똑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은 문화 상품을 소비하는 것은 당장 쉽고 편한 일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수많은 대안들을 제거하고 모든 것을 균질한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끔찍한 일이다. 대중의 '같음'에 휩쓸리지 않고 나의 '다름'을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의 다른 언어를 배우고 다른 문화를 알아가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 요네하라 마리가 비록 몸은 일본에 살고 있지만 마음은 러시아의 언어와 역사, 문화 등을 연구하며 끝까지 남과 다르게 살았던 것처럼 말이다. 아직도 그녀에게 배우고 싶고 그녀를 닮고 싶은 것이 많은데, 출간된 책은 거의 다 읽고 이제 세 권 정도만을 남겨두고 있다. 아쉽다. 아, 아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