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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에 싸인 듯 신비의 나라로 여기던 인도의 이야기인데다 작가와 작품에 대한 평가가 워낙 호평이어서 궁금한 마음과 기대감으로 만나게 되었다. 결코 평범하다고 할 수 없는 주인공을 내세워 인도의 아픈 역사, 정치 현실을 놀랍도록 예리하게 보여주는 이야기였다. 주인공 안줌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게 태어났는데 이런 제3의 성을 힌두어로 ‘히즈라’로 부른다고 한다. 자웅동체의 동물이 있다는 것은 들어보았지만 인간에게 그런 경우가 있다니. ‘불가촉천민’에 해당하는 ‘히즈라’ 안줌이 인도의 역사, 종교, 정치상황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서로 변화되어 가는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종교 때문에 분리된 역사가 있다는 것은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잔혹한 이야기가 들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작가의 분신인 듯한 건축학도 틸로를 비롯하여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이 많이 나온다. 시체 안치소에서 일하다 잔혹한 폭도들에게 아버지를 잃고 그들에게 복수하려고 이슬람교도가 되어 ‘사담 후세인’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사담, 자본주의 제국과 인도와 미국의 국가 테러리즘, 모든 종류의 핵무기와 범죄 등 온갖 사회문제를 해결을 촉구하기 위해 십년이 넘도록 단식투쟁을 하는 아자드 바르티야 박사 등 인도라는 나라를 이해하는데 생생한 역할을 하는 등장인물들이다.
자하나라 베굼이 네 번째 아이를 낳았는데 아들이라는 산파의 말을 듣고 엄청 기뻐한다. 미리 준비해 두었던 이름 아프타브 라고 지어주고 이튿날 아침 찬찬히 아이의 몸을 살펴보던 베굼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아들인 줄 알았던 아이의 몸에 남자와 여자의 성징이 함께 있었던 것이다. 처음엔 심장이 죄어들고 뼈가 재로 변하는 기분‘이 들더니 자신과 아기를 죽여 버릴까 하는 복잡한 마음까지 생긴다. 세상 대개의 것에는 암수가 정해져 있거늘. 참담한 심정이 된 베굼은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신께 기도를 올리면 여아의 성징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는다.
“신이 왜 히즈라를 만들었는지 알아?” “아뇨, 왜 만들었는데요?” “일종의 실험이었어, 신은 행복할 수 없는 생물체를 만들어보기로 결심한 거야. 그래서 우리를 만들었지.”(P39)
콰브가에서 사는 사람은 모두 행복하다고 여겼던 아프타브에게는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는 행복한 사람이 없고 있다고 해도 가짜고 속임수 일 뿐이라고. 보통 사람들은 물가 상승, 자녀 입시, 남편의 폭력이나 힌두-이슬람 폭동, 인도-파키스탄 전쟁에 대한, 결국은 해결되는 외부적인 걱정이지만 히즈라들은 그것 말고도 극복해야 할 걱정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불행한 존재라는 것이다. 행복하다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열네 살이 되어서야 님모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는데. 키가 커지고 근육질이 되고, 더구나 여자가 되고 싶은 아프타브에게 치명적인 변성기가 찾아오자 자신이 혐오스럽고 두려운 마음이 된다. 삶의 의욕을 잃고 혼란스러운 아프타브는 열다섯 살이 되자 히즈라들의 공동체 ‘꿈의 집’을 뜻하는 콰브가로 들어가 우스타드 쿨숨 비의 제자가 되어 안줌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세월이 흘러 안줌은 델리에서 가장 유명한 히즈라가 되었고 버려진 아이 자이나브를 만나 엄마가 되고 싶다는 소망도 이루었다. 더 완벽하게 여자가 되고 싶어서 수술을 하고 후유증으로 두 개의 목소리를 갖게 되었지만 그렇게 콰브가에서 삼십 년 넘게 살다가 마흔 여섯이 되었을 때 그곳을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유치원생이 된 자이나브가 시름시름 앓게 되자 기도를 하러 아지메르에 갔다가 구자라트를 경유하게 되는데 구자라트의 폭동을 겪고 죽을 뻔했던 고비를 넘기고 돌아오지만 그 충격으로 딴 사람처럼 변하고 콰브가 식구들과 불협화음이 결심을 굳히게 한다.
“늙은 새들은 어디에 가서 죽나요? 하늘에서 우리 머리 위로 돌처럼 떨어지나요? 길거리에서 새들의 시체가 우리 발부리에 걸리나요? 우리를 이 지구에 보낸 전지전능한 존재가 우리를 데려갈 적당한 방도를 마련해 놓았을까요?”(p16~17)
그녀는 묘지에서 나무처럼 살았다. 새벽이면 까마귀들을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박쥐들을 맞이했다. 해질녁엔 반대로 했다. 새벽과 저녁 사이엔 그녀의 높은 가지들에 흐릿한 형체로 앉아 있는 유령 독수리들과 교류했다. …… 사람들이 그녀를 서커스 없는 광대, 궁전 없는 여왕이라고 헐뜯을 때에도 그 상처가 그녀의 가지들 사이로 산들바람처럼 불어가게 했고, 살랑거리는 잎사귀들의 음악을 고통을 달래주는 진통제로 삼았다.(P13~14)
“비루(개 이름)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그런 것처럼 일단 벼랑 끝에서 떨어지면 추락을 멈출 수 없어.” “그리고 우리는 추락하면서 역시 추락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매달리게 되지. 그 사실을 빨리 깨달을수록 좋아. 우리가 사는 여기 이곳, 우리가 보금자리로 삼은 이곳은 추락하는 사람들의 집이야. 여기엔 하키 카트(‘현실’의 의미)가 없어. 이봐, 심지어 우리 자신조차도 현실이 아냐. 우린 진짜로 존재하는 게 아냐.”(P117~118)
안줌의 삶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한편 다른 쪽에서는 인도의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대립 상황과 정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2002년 힌두교도가 수천 명의 무슬림을 학살한 구자라트 폭동은 인도 역사상 가장 잔혹했던 폭동이라고 한다. 대학 때 연극 연습에서 만난 친구였던 나가, 비플랍, 무사, 세 사람 모두 이 소설의 또 다른 중심인물인 틸로를 사랑하지만 틸로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무사이다. 이들은 분리 독립운동으로 들끓었던 카슈미르에서 재회를 하는데, 카슈미르 분쟁은 영토 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종교 문제, 지역 패권 문제, 그리고 주권 관련 정치문제로서의 여러 가지 성격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정부군의 총에 맞은 아내와 어린 딸을 잃은 무사는 정부군에 맞서는 이슬람 전사가 되어 지하운동을 하며 쫓기는 신세이고, 정보국에서 일하는 비플랍과 신문 기자인 나가는 그 지역에서 근무 중이었다. 무사의 은밀한 연락을 받고 카슈미르에 오게 된 틸로는 암리크 싱에게 체포되어 ‘가슨 호바트’라는 메시지를 비플랍에게 전해달라며 구조 신호를 보내고 이들의 운명은 뒤얽히게 된다.
“언젠가는 카슈미르도 그런 식으로 인도를 자폭하게 만들 거야. 그때쯤 너희는 공기총으로 우리 모두를,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전부 눈이 멀게 만들어버렸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눈이 성한 너희들은 너희가 우리에게 한 짓을 볼 수 있을 거야. 너희는 우리를 파괴하고 있는 게 아냐. 일으켜 세우고 있는 거지. 너희가 파괴하고 있는 건 너희들 자신이야. 쿠다 하피즈, 가슨 씨”(P567)
남자도 여자도 아무것도 아니었던 안줌은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면의 강한 여성의 정체성으로 잔나트 게스트하우스 안에서 꿈을 펼쳐 나갔다.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 사람들을 편안히 쉴 수 있게 보금자리를 내어주고 매춘부라는 이유로 냉대를 받던 여자의 시신을 받아들여 장례를 치러주기도 한다. 그곳은 힘없고 가엾은 타인과 자신을 위한 ‘파라다이스’였던 것이다. 틸로는 아이를 원한 적이 없었지만 버려진 아이를 ‘유괴’하여 미스 제빈의 엄마가 되어 잔나트 게스트하우스에 들어온다. 엄마에게 버림받은 아픔이 아이를 원하게 했을까. 자신도 모르게 한 행동에 놀랍고 의아해 한다. ‘지복의 성자’이며 ‘위로받지 못한 자들의 성인’ 사르마드를 의지했던 안줌은 자나이브와 우다야 제빈의 엄마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한 모든 이들의 어머니로 거듭난 것이 아닐까. 억압에 굴종하지 않고 자유와 사랑을 향한 자신의 길을 나아갔던 것이다. 히즈라였던 안줌과 틸로의 만남이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었다. 아픈 상처가 없는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 서로 함께 도우며 살아가는 세상, 그것이 자유와 평화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로 느껴졌다. ‘보석 같은, 거대한 폭풍 같은 소설, 물에 풀어놓은 잉크처럼 느껴지는, 대담하고 충격적일 만큼 아름다운 작품’이라는 언론의 호평이 더없이 어울린다는 것을 깊이 공감하고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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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복의 성자, 제목을 본 순간은 인도의 정신세계에 관한 이야기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인도를 상징하는 단어 중 하나가 “성자”이니. 그 알지 못하는 지복의 충만함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매진하고 있을까
막상 펼쳐보니 쿠쉬완트 싱의 “델리”라는 소설이 떠올랐다. 남녀추니(남, 여의 성기를 가진 사람)의 등장과 인도와 파키스탄 분리의 비극과 인드라 간디 암살 후 시크교도 박해를 소수인 시크교도의 눈으로 보았다고 하면, 이 책은 힌두교도와 회교도 등 다양한 소수들이 바라본 인도였다. 그러나 “델리”의 확장판 같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아직도 끝나지 않는 인도 현대의 비극인 ‘카쉬미르’와 “낙살바리”, 그 속의 소수자들의 이야기이며 대학동기의 사랑이야기이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안타까움이 지배했다. 종교와 빈부격차 그리고 힌두극단주의 등 인도 현대의 아픔을 잘 보여주었다.
저자의 첫 소설 “작은 것들의 신”은 상도 많이 받고 유명한 소설이 되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소설이었다. 내 이해가 부족해서 아니면 번역의 문제 그래도 아직까지 내 책장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언젠가 다시 읽어 보리라. 두 번째 소설인 “지복의 성자”는 나에게 많이 와 닿는 소설이 되었다. 저자의 20년만의 장편소설이라니. 그동안 사회적으로 많은 활동을 하여 유명했지만, 소설가로는… 사회적 활동을 통해 확 넓어진 시각이 이 책을 낳을 것 같다.
힌두극단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의 힌두교도와 회교도의 대립, 거의 일방적인 경기가 아닐까? 8대 2가 싸움이 될까? 심심찮게 발생하는 폭동, 그 뒤에는 정치가 숨어있는 것 같다. 상설적인 싸움이 펼쳐지는 카쉬미르, 인도의 다른 지역과는 좀 다른 풍경을 보여주는 풍요의 파라다이스였는데. 지금은 슬픔과 비극의 지역이 되어 버렸다. 스리나가르의 달호수와 주변의 아름다움 그것을 덮어버리는 경찰과 군대 그리고 카쉬미르 사람들과 칠흙 같은 어둠이 지배하는 밤 그 위에 찬란하게 빛나는 별들, 호수에 비친 달 그리고 총소리와 폭탄소리가 내 기억을 차지하고 있다. 언제 비극적 슬픔을 던져 버리고 다시 풍요의 고향으로 돌아갈까.
남녀 한 몸인 “암줌”(인도와 파키스탄)과 “틸로”의 이중창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오케스트라, 그 장대한 울림은 슬픔이었고, 사랑이었고, 희망이었다. 사람들의 사연들이 하나씩 밝혀지고 거의 끝날 쯤에 떠오른 “낙살라이트”, 인도 카스트제도가 낳은 비극이라고 할까? 빈부격차가 낳은 비극이라고 할까? 아직도 그들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모든 아픔은 잠시 봉합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더 큰 아픔을 낳을지 아니면 치유될지.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은 사랑, 무엇이 사랑일까? 라는 생각의 여운이 강하게 남는다.
*쿠쉬완트 싱의 “델리”와 같이 보면 인도의 현대 비극에 대해 많이 알게 되지 않을까
p. 342 밑 7줄, 343 4줄, 348, 377 등에 나오는 ‘빈디’를 피워 물었다, ‘빈디’ 연기 등에 나오는 빈디는 ‘비리’와 혼동한 것 같다.
p. 405 12줄 ‘피르니’, 요리에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서 ‘파니르’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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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델리와 카슈미르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은 안줌라고 하는 남자이자 여자인 두 개의 생식기를 가진 안무의 성장기와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남자 아이를 간절히 원하는 한 부부에게서 태어난 안줌은 태어날 때부터 여자와 남자의 생식기를 가졌지만, 엄마인 자하나라 베굼은 시간이 지나면 없어질꺼라 믿고 안줌을 아들로 키운다. 할례시기가 다가오자 더 이상 거짓말을 숨길 수 없었고 남편에게 털어놓으며 의사를 찾아가 여성의 생식기를 제거하려고 하지만 실패한다. 사랑이야기나 치장에 관심을 보이는 안줌은 자신이 여성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고 열다섯에 제3의 성으로 분류되는 인도 최하층 집단이 모여사는 히즈라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도 안줌은 자신이 바라는 여성이 되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변성기가 찾아오며 남성적인 성징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안줌은 엄마가 되고 싶었고 우연히 자이나브를 양육할 기회를 얻는다. 자신의 정체성과 함께 인도의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장벽에 부딪힐 수 밖에 없는 안줌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지만 묵묵히 자신이 안식할 수 있는 곳을 포기하지 않고 삶을 살아간다. <작은 것들의 신>에서도 보여주었던 아룬다티 로이의 신화가 다시 한 번 쓰여진 것이 독자로서 너무나도 기뻤다. 이 책을 쓰기 위해 10년이라는 집필기간이 필요했다고 하는데, 정말이지 세밀한 심리와 묘사가 탁월했던 책이다. 이제 다시 또 언제 아룬다티 로이의 소설을 만날 수 있을지 예상할 수는 없지만 계속되서 이런 사회 문제와 인간을 다루는 소설을 많이 썼으면 좋겠다. 현실을 외면하지 않을 뿐이기에 소설을 집필했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작가의 소신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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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잔나트 게스트하우스의 공동체 생활을 하며 상처을 짊어지고 죽음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얻습니다. 수영장과 동물원과 학교가 있는 공동묘지 공동체지요.
이 공간이 맺어준 사담과 자나이브 커플의 결혼이 성사됩니다. 혈연을 벗어난 사람들이 함께 손을 보태 의식을 치르며 오랜만에 바깥 외출에 나섭니다. 사담은 안줌에게만 말했던 소 트라우마를 사람들에게 공개하며 이전의 ‘복수 판타지’를 거두고 다른 저항을 이어가기로 합니다. 한사람을 온전히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과거까지 품는 거지요. 안줌의 눈에는 예전보다 나아진 변화들도 눈에 들어옵니다.
# 이제 몸속에 인도-파키스탄 전쟁을 품은 사람이 더 이상 없는 거라는 얘긴가? (536)
소설에서는 역사의식이 뚜렷한데 그중 하나가 장례절차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묘지를 마련해 영혼을 달래고 기립니다.
2. 남성 혁명운동가로는 무사가 있다면 이번 파트에서는 레바티/‘마세’ 동무의 삶과 죽음이 언급됩니다. 시위 현장의 예비 박사를 통해 그녀의 편지가 전달됩니다. 그녀는 제빈 2세의 친모로 숲 게릴라전에 가담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들은 우리식으로 종북 좌파 프레임에 가두어지곤 합니다. 공산당 여성 혁명가의 이중고가 “여섯 아버지”로 끔찍하게 드러나며, 세 어머니의 딸인 미스 우다야 제빈이 탄생합니다.
3. 소설 제목이기도 한 ‘지복의 성자’의 사르마르 영묘가 언급됩니다. 오래 전 아들을 사랑하는 법을 알려달라던 어머니의 기도부터 안줌이 왕쥐를 품던 날의 기도를 거쳐 미스 제빈 2세를 위한 기도로.. 다시 사담과 자나이브의 결혼 축복까지 바턴을 이어 갑니다. 이처럼 생명과 사랑과 안식의 기도는 생이 다하는 날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4. 우물쭈물하며 한걸음 물러나 있던 비플랍의 인생 말년이 다뤄집니다. 그는 알코올중독으로 일자리와 가족을 잃지만 옥탑방에 틸로가 남기고간 사진과 문서들을 ‘읽고’ 정리하며 지난날 자신이 관여했던 일의 실체를 비로소 깨닫습니다. 그러나 제복을 벗고 반핵 평화주의자로 활동하거나 칼럼니스트가 되어 돈을 버는 일은 하지 않기로 합니다. 양심이 가동한 결심이지요.
옥탑방 열쇠가 있던 무사의 등장에 놀라지만 그들은 하룻밤을 같이 보냅니다. 마지막 인사, 안녕을 기원하면서 그들 사이에는 좁혀질 수 없는, 대치하는 경계선이 여전함을 감추지 않습니다. 남남끼리 서로 다름을 완전히 포용하고 극적 타결을 이루기란 쉽지 않음을 그대로 담아요.
# - 자네들이 옳을지도 모르지만, 결코 이길 수는 없을 거야. - 결국 우리가 틀린 것으로 판명될지도 모르지만, 우린 벌써 이겼어. (564)
비플랍은 무사에게 싱을 죽였냐고 묻습니다. 그는 싱의 죽음을 토대로 의미심장한 말을 차분히 날려요. 공기총으로 사람들의 눈이 멀도록 하는 현재의 수법이 언젠가 싱의 ‘자폭’의 경로를 따를 거라고요. 잊지 않을 테니까요.
# 하지만 눈이 성한 너희들은 너희가 우리에게 한 짓을 볼 수 있을 거야. 너희는 우리를 파괴하고 있는 게 아냐. 일으켜 세우고 있는 거지. 너희가 파괴하고 있는 건 너희들 자신이야. (567)
나사에게도 그렇지만 비플랍에게도 틸로는 영원히 사랑할 여자, 빈자리 ‘부재’로 남습니다. 무사와 함께 한 시간은 괴로움에 그가 다시 술에 손을 대겠지만, 현직에서 물러나 나사와 함께 ‘음악’으로 구원받는 길이 임박했음을 알립니다.
5. 무사는 낙원(잔나트) 게스트하우스에 있는 틸로를 찾아가 마지막 밤을 보냅니다. 그는 다음 세대에게 지하조직의 리더 자리를 내주고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마친 상태입니다. 사랑하는 남자를 중심으로 틸로는 “산산조각난 이야기들”을 이어갈 것입니다. 물론 그 결과물인 소설 <지복의 성자>를 이렇게 눈으로 보고 있지만요. <작은 것들의 신>에 이어 이십년이 걸린 소설을 변론하듯 틸로는 말합니다.
# 산산조각이 난 이야기를 어떻게 말해야 할까 서서히 모든 사람이 되어서, 아니, 서서히 모든 것이 되어서. (570-571)
어느 참혹하게 죽은 자의 손가락에 낀 흙에서 겨자꽃이 핀 이야기처럼, 무사의 죽음은 다른 역사를 꽃 피우리라 짐작됩니다. 더 과격해질 것이 예상되지만요. 그리고 세 어머니와 공동체의 보호 속에 무럭무럭 자라날 미스 우다야 제빈의 앞날은 죽음의 토양을 딛고 아름답고 강인한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역사 속에서 제국은 하룻밤 사이 몰락해 사라져 왔습니다. 영원한 고통도, 영원한 삶도 없으니까요.
# 그래서 삶은 덜 확정적인 것이 되고 죽음 또한 덜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5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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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 속에는 '인도'가 그대로 축소되어 들어있는 듯 했다. 종교분쟁, 구세대적인 신분제도, 빈부의 격차속에서 신음하는 인도인의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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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궁금증을 열어두며 소설이 시작됩니다. 사람 외에도 모든 생명체를 중시하는 작가임을 알기에 나무가 된, 한 개인 여자는 아닐 것 같아요.
1. <작은 것들의 신>에서 이란성쌍둥이가 나온 까닭에 ‘히즈라’도 생명에 대한 규정(구분)과 잠재된 폭력성 혹은 경계 넘기(해방)를 예상하게 되요. 아니면 분리 독립된 인도/파키스탄의 역사를 반영한 것일지도.
# 언어 바깥에서 사는 게 가능할까? (9)
2. 신, 영혼, 묘약, 방언, 미신, 신화를 말하고 구전 시를 읊는가하면 거대기업과 상품광고(미용, 음료 등)가 수시로 언급되어 구시대와 신문명이 서로 겉도는 인상을 풍깁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 후 공산주의 체제에 있다가 신자유주의 국가가 된 급변하는 문화를 담은 게 아닐까요.
3. 태어남은 운명적이고, 몸 역시 ‘주어진’ 속성이 강합니다. 타고남으로 인해 여러 폭력에 노출됨을 선명하게 보여주죠. 아프타브였다가 ‘그녀’인 안줌으로 전환되는 콰브가에서의 삶이 어떠셨나요? 미루어 짐작하건대 히즈라도 MtoF만 가능한 거죠.
4. 주인공이 동네 할머니와 나선 여정에서 구자르트 인종 학살을 겪고 ‘히즈라’라는 정체 덕분에 살아 돌아오잖아요. 이 학살은 9.11테러와 함께 반테러리즘법의 비호 속에 빚어진 끔찍한 살육의 현장으로 기록됩니다. 이슬람교,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최하위계층으로 전락하고 아무런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실정을 고발합니다.
# 그들이 어떻게 남자들을 접고 여자들을 펼쳤는지. 그리고 결국은 어떻게 사지를 갈가리 찢고 불에 태웠는지에 대해. (89)
아룬다티 로이는 인도 카스트 제도의 그림자가 아직까지도 도사리는 인도의 직업 분류를 구태로 심각하게 다룹니다. 그 이유가 불가촉천민은 마치 실재하지 않는 존재로 총구를 겨냥하기 때문인데요. 달리트, 히즈라 등으로 낙인찍고 사회적 권리를 박탈하고 무시하는 구조를 살펴볼까요.
5. 구자라트에서 돌아온 주인공이 데려다 키운 딸을 남장하는 대목은 어땠나요?
# 아무리 아이의 안전을 위한 것이라 해도, 속박이지 해방이 아니다. (79)
안줌이 가슴으로 낳은 자나이브가 생쥐에서 왕쥐가 되고 동물애호가가 된 뒤 사이다와 가까워지는 원인에 대해 말해보죠. 안줌은 행복한 엄마가 아니라고 언급하는데요.
6. 콰브가 공동체의 특징에 대해 말해볼까요. 어원, 구성원과 운영방침, 히즈라의 불운에 대한 두려움, 장구한 왕족 역사 속 역할까지.
7. 주인공은 제2의 고향인 콰브가를 떠나 가족 묘지를 주거지로 삼습니다. 경제정책으로 철거민이 된 하층민이 숲으로 들어가 무장투쟁한 것과 연결지어볼 수 있을까요.
8. 선글라스 낀 사담이 들려주는 “죽은 소 이야기”는 주인공의 “고가도로 이야기”와 맞물리며 두 사람을 질기게 연결시키는데요.
사담은 시체 닦는 일을 하는 하류층이고, 기업재단이 운영하는 예술 사업에 연루됩니다. 미술관에서 일하던 중 눈 화상을 입지만 산재를 인정받기는커녕 해고되는 말단 노동자이기도 하죠.
무덤 거주지인 잔나트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온 그는 가죽쟁이 아들로 중세 연극 같은 아버지의 죽음 속 풍경의 일부가 되었던 상처와 개명 사연을 공개합니다. 그를 통해 권력의 부패와 법을 악용하는 경찰국가의 시민의 좌절감을 느낄 수 있는데요.
주인공 역시 가짜라는 강박에 시달리며 존재성을 충만하게 온전히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가 추락하는 사람들은 떨어지면서 모이게 된다(추락하는 사람들의 집)고 말한 부분이 기억에 남습니다.
9. 살만 루슈디 풍의 유머 해학도 좋지만 <작은 것들의 신>의 응집되고 농후한 숨막히는 전개와 묘사를 기대했던 독자로서 파편적으로 흩어지는 에피소드들이 살짝 아쉽습니다. 아룬다티 로이의 이야기꾼의 면모나 매력에 대해 말해볼까요.
10. 히즈라가 엄마가 되고 싶어 하는 바람과 생명과 사랑의 관계를 계속 추적해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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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작도 이런 과작이 없다. 아룬다티 로이는 1997년 《작은 것들의 신》을 발표했고 부커상을 수상했다. 이후 아룬다티 로이는 사회 운동가로 활동하며 에세이를 썼지만 (아룬다티 로이의 《9월이여, 오라》는 내 추천 리스트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는 책들 중 하나이다) 소설은 발표하지 않다가 2017년 그러니까 《작은 것들의 신》 이후 이십여 년이 지난 시점에 새로운 소설 《지복의 성자》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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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며 철썩 철썩 철썩 노 젓다 보면 끝은 온다. 비플랍이나 나가가 초로에 맞이한 해방감이 이런 맛일까. 충분히 사랑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추억할 것을 알지만 일단은 지금의 풀려남과 고독을 만끽하고 싶다..
<작은 것들의 신>에서 암무는 쌍둥이와 떨어져 지내며 학교를 세우고 선생님이 되어 아들을 찾으러가겠다고 약속한다. 그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틸로의 어머니와 틸로가 달성한다. 틸로는 공동묘지 공동체에서 지식을 나누며 행복의 기술을 배운다.
틸로에게 비플랍과의 관계는 가.슨.호.바.트가 전부였던 것 같다. 틸로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내며 무사의 생존 여부에 덜 마음을 쓰며 짐을 덜게 된다. 생과 사의 문틈에서 살다보니 죽음도 삶도 견디기 수월해진다. 조금은.
*It made life less determinate and death less conclusive.
안줌과 사담이 의외로 잘 통해서 파격적인 커플이 되나싶었는데 사담은 자나이브와 연결된다. <작은 것들의 신>에서 벨루타가 손톱을 빨갛게 칠했듯 사담은 주황색이다. 사랑의 증표요 표식이다. 게스트하우스는 동물원과 학교와 (물 없는) 수영장을 구비하며 지상낙원을 향해간다. 하지만 여전히 밖은 힌두교 민족주의가 득실거려 다시 시끄럽다. 역사를 신화화하고 신화를 역사화하는 오용을 고발하며 역사는 과거에 대한 공부일 뿐 아니라 미래를 그리는 척도가 됨을 지적한다. 아룬다티 로이의 소설들에서 거의 모든 인물이 역사에게서 자유롭지 못하고 거대한 단하나의 역사의 그림자 속에 살아간다. 우리도 자각하지 못할 뿐 역사의 굴레와 멍에를 어깨에 짊어지고 오늘을 산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소에 대한 신성시를 언급하자 사담이 발끈한다. 어떤 우상화는 소설의 비유에 따르면 방호벽blast walls을 세우는(남을 죽이는) 명분이 되고 만다. 사담의 아버지는 경찰의 변심에 무참히 으깨지지만 이제 시대가 바뀌어 아버지의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저항한다. 그렇게 잘난 너희들이 해라! 한번 우리 없이 살아봐라! 그러던 사담이 복수 판타지를 끊어내고 자기 삶을 살기로 한 터닝포인트에 딱 맞춰, 하늘에 얼어버린 까마귀가 언급된다. 독립기념일을 기리는 의미에서 날리는 연줄이 눈에 보이지 않는 덫이 되어 까마귀를 가둔다. 명민한 사담의 손길로 까마귀가 걸린 마법이 풀리고 사담은 새출발한다.
사담은 (대체) 가족들을 위해 결혼 전 깜짝 이벤트를 준비한다. 멋진 차를 타고 시내를 돌고 쇼핑몰에 가서 식사 대접을 한다. 더 이상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쟁을 몸으로 겪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두니야 여정에 나선다. 알고 보니 쇼핑몰의 자리는 사담의 아버지가 억울하게 죽은 곳이기도 하다. 안줌이 나서서 혼을 기리는 두 번째 장례식을 거행한다. 유골함에 담긴 틸로의 어머니도 장례식을 치르고 매장된다. 안줌의 공동체에서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비는 일R.I.P이 중요한 활동이고, 틸로는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가 좋아하던 셰익스피어 구절을 낭송한다. 당시에는 제정신이 아닌 어머니의 난폭한 모욕주기라고 생각했던 말이 장례식에 대한 선견지명으로 달리 들린다.
안줌은 지복의 성자인 사르마드의 뜻을,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무하는 성스러운 행위를 영매가 되어 행한다. 세 번째 다시 치르는 장례식은 미스 제빈 2세의 생모의 죽음이다. 아지드 박사 편에 전달된 편지를 통해 제빈 2세의 엄마가 숲에서 Green Hunt정책에 맞서 게릴라전을 치르는 공산당원임이 드러난다. 여섯 명의 성폭행범을 떠올리게 하는 딸이 죽도록 밉지만 아이의 인생을 가로막지 않는다. 잔타르만타르 시위 현장에서 좋은 사람들을 보고는 아이를 버린/위탁한 것이다. 오염되지 않은 ‘새날’을 이름으로 선사하고, 안줌을 비롯한 세 어머니의 보호와 사랑 속에 아이는 자란다.
*She should know about her mother of course. Never about their father.
앞서 비플랍을 가진 자이자 힌두교 민족주의자로 규정하고 내치지 못한 이유가 11장에서 구체화된다. 그는 틸로가 두고 간 서류와 기록들에 파묻혀 재활센터에 들어갈 시기를 놓친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죄책감과 후회로 술에 절어 지내며 결정적으로 카슈미르에 대한 마음이 바뀐다. 그 사이 무사가 다녀가고 그는 더 이상 그의 ‘적’이 아님에 안도한다. 비플랍은 무사에게 가장 묻고 싶었던 물음, 암리크를 죽였냐고 묻는다. 이에 무사는 그는 자살한 것이며 우리가 스스로 죽게 만들었다고 다소 애매하게 답한다. 아내 폭행으로 사는 거처가 기사화된 이후 카슈미르의 도살자인 그의 주변에 그를 지켜보는 눈이 생겨나고 다시 눈들은 그가 한 짓을 상기시켜 자기파괴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언젠가 인도도 카슈미르인들을 눈멀게 한 대가를 똑똑히 보게 될 것이고 그에 따라 자기파괴에 이를 거라고 경고한다.
*One day Kashmir will make India self-destruct in the same way. You may have blinded all of us, every one of us, with your pellet guns by then, But you will still have eyes to see what you have done to us. You’re not destroying us. You are constructing us. It’s yourselves that you are destroying.
역사에서 거대 국가들이 하룻밤새 몰락하는 것을 봐왔다. 비플랍은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며 모든 것이 더 나아지고,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다짐한다. 자신의 논지를 은퇴한 반전 평화주의자인 양 방송에 나가 발언하거나 글을 기고해 돈 벌 생각은 없다. 음악만이 자기파괴self-destruct에서 자신을 구할 것이라고 믿고 나가에게 연락을 취할 참이다. 일단 술 한 잔 마시고.
무사는 죽음으로 걸어 들어가기 전 틸로와 마지막 시간을 게스트하우스에서 보낸다. 틸로가 흩어지고 조각난 이야기를 ‘느리게라도’ slowly 모든 사람everyone이 되어, 모든 것everything이 되어 말하는 날이 올 것이 예고된다. 그녀는 무사의 죽음을 깊이 슬퍼하면서도 이제 그에게 마음껏 편지하고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해가 떠오르기 전 안줌은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것이며 그래야만 한다고 되새긴다. 미스 우다야 제빈의 독립된 삶을 위하여.
*But even he knew that things would turn out all right in the end. They would, because they had t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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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복의 성자>를 처음 읽었을 때 사실 나는 이 집주인에 대해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런데 <작은 것들의 신>을 다시 읽는 과정에서 차코라는 뜻밖의 인물에게 감정이입이 되었던 것이다. 나와 일치되는 캐릭터라기보다 이해받고 싶은 지금의 나의 한계와 모순을 그가 다 지니고 있는 듯했다. 가방끈이 길지만 앎과 삶이 따로 놀고, 괜찮은 사람이고 싶은데 머물고 싶은 곳과 머물러야 하는 곳이 달라 어디에도 소속감을 깊이 느끼지 못하는 어중간함과 허술함이 나를 자꾸 되비추었다. 훌륭한 문학은 그때그때 내주는 메시지와 품이 자꾸 변하나보다.
세 번째 읽기를 감행한 이유 중 하나가 7장 집주인을 파보고 싶어서였다. 그와 차코를 나란히 둘 수 있을까. 무엇보다 혼란스러운 건 나는 그를 나쁘다고 쉽게 매도하고 싶지 않다. 분명 치사하고 유약한 타협주의자임에도 밉지 않다. <지복의 성자>의 두 번째 이야기 물줄기에 해당하는 틸로라는 여성을 둘러싼 남성 인물들 중 이 사람처럼 자기 회상과 목소리를 크고 길게 낸 사람이 아직까지는 없다. 더욱이 바로 앞 장은 수많은 인파에 치이는 상황이었는데 단독자로 등장하니 그의 말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Not around her perhaps, but around the memory of my love for her.
하지만 이 남자 다시 보니 생각보다 자기애와 자의식 과잉이다. 틸로를 보는 순간 그녀를 중심으로 삶이 돌아갈 것을 알고는 조심스레 보호막을 친다. 그가 그녀에게 끌렸던 주된 이유는 목줄을 하지 않은unleash 것 같은 자유스러움과 여성적이지 않은 특이함에서 비롯된다. 가질 수 없지만 자꾸 시선이 돌아가고 나란히 걸을 수 없음을 알기에 뒤에서라도 쫓는 느낌이다. 언제든 그녀가 돌아보면 “나 여기 있었어”라고 고백할 타임을 노리는 사람 같다. 가슨 호바트라는 암호에는 응답하지만 직접 나서지 않고, 아래 위층에 살게 되지만 무던하게 군다. 지금까지의 삶에 영향을 드리우지만 과거의 추억으로 남겨두려는 마음이 역력하다. 그것마저 손상되어버리면 구축해온 이미지가 영영 망가져버릴 것 같아 유보하고 간직하려든다고 하면 설명이 될까.
아니 어쩌면 틸로의 의지나 뜻과 무관하게 그녀를 두고 펼쳐지는 남자들의 전쟁과 싸움을 투영한 건지도 모른다. 밤에 혼자 사는 그녀의 방문을 두드리며 위협하는 상사와 조금 다를 뿐인지도. 남자들이 믿고 의지하는 서사를 돌연히 후반부에 부수어버릴지도 모르겠다..
세월이 흘러 비플랍은 가정생활과 직장생활 모두가 위기에 처한다. 문제는 알코올중독인데 그의 현재를 방해하면서 또 유지하는 역설적인 의지처가 되어준다. 왜 있어야 할 재활센터에 가지 않고 틸로의 인생 주변을 배회하는가. 비플랍은 틸로에 대한 관망에서도 직접 관여와 개입과 충돌을 극히 꺼린다. 다른 인물들과 달리 본인의 이름을 못마땅해하면서 그냥 두는 사람이다. 혁명이라는 이름과 그는 별개의, 동떨어진 삶을 살지 않는가. 그 자체로 모순과 비애를 품는 삶이라는 듯이.
사실 가장 합리적으로 비플랍을 읽는 방법은 기득권 보수층으로의 접근일 것이다. 브라만 출신으로 가진 것을 내려놓을 생각이 없지만 그러다가도 틸로가 도움을 요청하면 가진 권력을 기꺼이 내준다. 우정에서나 사랑에서 그는 적극적이지 않고 모두를 견제한다. 그런 성향 때문인지 틸로가 쓰던 방에서 금지된 위스키를 따며 오락가락하는 그의 정신 상태가 납득이 간다. 좋은 배경과 세트장을 갖추고 두 번이나 운 좋게 살아남았음에도 그의 삶은 환희로 방수처리 되지 않고 내리는 비에 저 홀로 젖는다. 자신은 시장에 내다 팔 불운이라는 상품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가. 출신과 배경으로 인한 역사적 비극을 지겨운 구걸 행위로 여긴다.
내 사견과 달리 그는 카슈미르에서 저질러진 만행을 끔찍해하면서도 멈추지 않는 폭력과 피의 복수vendatta와 인종학살이 되살아나는 역사의 관성에 주목한다. 인도의 정보부 고위 관직 일에 대한 자부심도 상당하다. 투철한 사명과 애국심, 정치색을 지녔음에도 한 여자를 향한 옛 감정을 잊지 못하며 향수에 젖고 슬퍼한다. no shocking.. but it saddens me.. 뜻하지 않게 다리를 놓아 나가와 틸로가 결혼하게 되지만 그의 마음은 무사에게 오히려 호의적이며 그를 예외적인 카슈미르인으로 존중한다. 나가가 자신을 골탕 먹이고 별칭으로 괴롭힌 일과, 주목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과잉 연기와 관종 심리를 꼬집는다.
<작은 것들의 신>에서 벨루타의 손이 얼마나 섬세하고 감각적으로 묘사되었는지 아는 독자에게 무사의 농부 같은 손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저 정도의 남자에게 딸을 양도해야 마음이 놓이겠다는 아버지의 마음, 딸바보의 느낌이 살짝 묻어나기도 한다. 그를 파악하기 쉽지 않고 알 듯 말 듯 모호하게 그린다.
삶을 전체적으로 통찰한 듯한 체념적인 <노먼, 당신이야?>와 관련한 어록과 끝나지 않는 전쟁의 속성에 관한 비유도 기억에 남는다. <작은 것들의 신>의 흰자에 이어 달걀 트라우마가 생길 듯하지만. 이번에는 분노의 용암 노른자이다.
*Normality in our part of the world is a bit like a boiled egg: its humdrum surface conceals at its heart a yolk of egregious violence... As long as the yolk doesn’t run, you’ll be fine. In moment of crisis it helps to take long view.
*If you’ll pardon me for making this somewhat prosaic observation -- maybe that’s what life is, or ends up being most of the time: a rehearsal for a performance that never eventually materialize(實演).
*The thinking was that permitting the population to vent its feelings and shout its slogans from time to time would prevent that anger from accumulating and building into an unmanageable cliff of rage.
*Those eyes that stared at us for one and a half hours -- they were forgiving eyes, understanding eyes... We do terrible things to each other, we wound and betray and kill each other, but we understand each other.
이제는 충격을 잘 느끼지 않는 무뎌진 정서를 고백하며 그는 틸로의 지난날의 미로 속으로 성큼 들어선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모르는 사이 그녀의 과거의 맨홀로 빠져버린다. 제정신의 회술이라면 오히려 믿음이 가지 않았을 것 같다. 그는 수달Otter이자 색출자Spotter인 암리크 싱이 고문기술을 어떻게 자기편에서 이용했는지 조목조목 드러낸다. 각본대로 상황을 꾸미는 무지막지한 연출력. 암리크는 가정 내 폭력도 불사한 최악의 인물로 그려진다. 가족의 삶을 자신과 분리하지 못하고 총성으로 끊어버리는 실수를 마지막까지 범한다.
비플랍은 틸로가 빼지 않은 은반지가 무사와의 결속을 의미함을 아직까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A급 테러리스트인 굴레즈 대장이 무사였고 그가 죽었다고 믿고 싶었던 걸까. 그래서일까 다음 문장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괜한 의심이자 억측이었으면 싶은 상황이 연일 보도되고 있다. 표밭에 눈이 먼 정치인들을, 누가 국민을 먼저 염두에 두는지를 기억하자.
*There’s so much data, but no one really wants to know anything, don’t you thin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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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복의 성자>를 읽으며 타고난 출신과 배경과 피부색과 성별 등의 영향력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무거워지곤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해진 운명 안에서 겨우 보고 믿고 듣는 식으로 협소하게 살다가 생을 마감하는 것 같다. 운명의 굴레, 그 속에서 잠시의 자유와 기쁨을 누리는 점에 한숨이 푹 새어나오다가도 삶의 속성이 그러한 거라면 품고 감수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 소설은 끔찍하지만 무력하지 않다. 누군가의 눈에는 미개한 국민성으로 비춰질 소지가 있다. 되풀이되는 폭력의 잔혹사. 왜 근절하지 못하는지 그 뿌리에 신경이 쓰이다가 이내 현실로 돌아간다. 특정 지역 사람들의 근성처럼 말하지만 우리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확신할 수 있냐는 것이다. 일제 식민지, 전쟁과 분단의 민족, 군부독재정권, 경제 고속 성장과 부패, 민주화와 사유화까지 과연 과거 청산이 깨끗이 이루어지고 건전한 시민의식과 국민에 봉사하는 투명한 민주 사회로 향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외면하고 부정하고 싶은 생채기와 쪼개지고 망가진 대자연과 사익으로 분열된 정치를, 인도라는 커다란 거울에 자꾸 비추어보게 된다. 그 넓은 땅과 많은 인구에 여러 지역과 언어들과 종교와 계층으로 끊임없이 갈라지며 분류되는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얽힌 사슬은 아마도 단숨에 풀 수 없으리라.
신기하게도 소설 속 인물들 중 누구도 어차피 삶은 그런 거라며 악인이 선량한 사람을 군림하는 지옥이니 여기 삶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고 고개를 돌리거나 눈 감아버리지 않는다. 자신들의 주관과 마을을 보존하고 지키기 위해 삶의 경로를 틀어 적극적으로 자기 역할을 수행한다. 지상 혹은 지하조직이냐부터 숲이냐 도시냐... 이슬람 무슬림이냐 힌두 불교냐 시크교도냐.. 지도부냐 하수인이냐, 공산당이냐 자유주의자냐 등을 비교적 어린 나이에 정한다(상황적으로 불가피하기도 하다). 각자의 위치에서 생명과 사상과 꿈을 보호하며, 미래를 위해 개인의 현재를 헌납하는 믿음의 화신이 된다.
소설에는 자루에 담긴 형체 없는 죽음이 난무하지만 복수 판타지는 가급적 끊어낸다. 정부 권력의 부역자가 되어 일하던 유명 언론인 나사와 관료 비플랍이 이전의 옷을 벗고 보통사람으로 구원받는 길이 열리기도 한다. 그들은 너무 일찍 초로기에 들어선다. 카슈미르인 암살자 ‘수달’ 암리크 싱만이 제거되는데 그것도 삶의 물길이 끊긴 나머지 과거 자신의 만행의 출몰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고문센터의 악명 높은 총구가 되지만 여러 폭압 역사의 고문자 중 한명일 뿐이다. 그 사람 하나로 지옥 같은 전쟁이 어찌 지속되겠는가. 무엇이 그에게 무한대의 파괴력을 갖도록 했나.
소설의 시작은 두 개의 성기를 가진 남자 아이가 어떻게 히즈라 여성의 삶을 선택하고 살아내는지 보여준다. 애초의 가족과 계급 등의 주어진 구속 환경을 지우고, 새로운 공동체의 출현을 긍정한다. 히즈라의 삶이 문제될 거 없는 꿈의 집 콰브가에서 가슴으로 낳은 딸을 키우지만 안줌의 스케일에는 여전히 예속된 굴레이기에 보다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사실상 구자라트 살육을 목도한 후 그녀는 이전의 삶을 지속할 수 없다. 고민과 방황에서 탄생한 잔나트 게스트하우스, 즉 낙원 무덤공동체의 구성원과 장례문화는 기존의 가부장제나 군대 조직에서 과감히 벗어나 있다.
안줌과 자나이브 모녀의 한계와 갈등(단숨에 이상적일 수 없음)은 틸로라는 여성이 버려진 아기를 유괴하여 키우면서 새롭게 조정되고 더 나은 관계를 찾아간다. 틸로는 학창시절의 삼 사각관계를 이용하여 생명과 사랑을 지켜나가며, 앙갚음과 복수 대신 사랑의 역사를 철썩 철썩 철썩 느리게 저어나간다. 피와 눈물과 오물로 범벅이 된 오염된 역사를 세 어머니가 주축이 된 사랑과 포용의 공동체가 정화시키며 용서와 공존을 모색한다. 비록 밖은 눈먼 학살로 접었다 펼쳐지길 멈추지 못한 채 붉은 장미떨기를 떨어뜨리지만, 그들은 함께 저항하는 다른 걸음과 경로를 찾아낸다.
앞으로 여섯 아버지와 세 명의 어머니(여신이 아닌)의 역사를 딛고 미스 우다야(일출=새날) 제빈은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공동묘지 공동체는 억울하게 조각나고 훼손된 죽음을 예의를 갖춰 모신다. 죽음이 삶과 밀착된 전쟁과 폐허에서 이룩한 회복의 구조물이다. 이런 점에서 공동묘지와 장례식이 있는 한 야수성에 맞서 인간성은 지켜진다. 그 인간적인 믿음을 발판으로, 막힌 수로를 뚫으며 이야기를 복원하고 증언해나간다. 개인적으로 작가 아룬다티 로이의 목소리내기와 운동이 바로 지복의 성자가 하는 궁극의 일이라고 본다.
거룩한 신의 뜻을 실천하는 크고작은 어머니들과 조력자들이 있어 개척과 파괴의 역사가 잠시 숨을 고르고 땅을 부활시켜 새롭게 수혈 받은 새 시간과 역사로의 순환이 가능해진다. 지복의 성자가 멀리 외따로 추상적으로 개념화된 세상보다는 차별과 다름과 폭력까지 보듬는 실재하는 세 어머니들과 조력자들의 손길과 안녕을 살피는 기도가 망망대해를 헤쳐 나가는 인간애와 생존의 힘이 되어준다. 부디 그 여정에 신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내 사랑. 그 위대한 마음과 주문이 암흑의 심연을 빠져나오는 천국의 문(출구)이 되어 주리라. 핍박받는 약자들이 힘을 합쳐 함께 움직일 때 초록빛 세상은 이어지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