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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트라우마'. 현재 우리나라 현실에 대해 가장 정확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대표적 언론인으로 꼽을수 있는 손석춘의 눈을 통해 바라본 박헌형이라는 인물. 그의 아들 원경스님과의 대화를 통해 박헌영의 생애와 신념. 삶과 죽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우리가 배웠고 배우고 있는 역사에서는 이 거대한 인물에 대한 설명이 없다. 수많은 역사적 인물속에서 그 이름 석자만 스치듯 지나갈 뿐이었다. 우리나라 근대사에 관심을 갖고 주의깊게 들여다 보았다는 사람도, 해방후 좌익의 대표적 지도자로 몽양 여운형을 떠올리기 쉬울것이다. 그의 생애를 전체적으로 훑어볼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있는 시간이었지만, 숙청과정에서의 그의 대응과 역사를 만들어가던 거대한 인물이 그 역사의 흐름속에서 허무하게 사라져가는 과정들을 보며, 아직도 안정되지 않은 한반도의 한 구석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수가 없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을 장구한 역사의 흐름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북에서는 아직도 역사적 평가와 해석에서 논쟁이 되고있는 보천보 전투로, 그 명성을 알리기 시작한 김일성에 의해 일제하 독립운동가들이 숙청을 당하며 1인 독재체제로 갔고, 남에서는 친일, 좌익을 건너뛰며 권력의 편에 서고자 했던 한 군인에 의해 정적과 무고한 시민들이 제거되며 1인 독재의 국가로 갔다. 이 모든것이 과거로 끝난 일인것인가? 저자가 이책의 제목에 '트라우마'라는 단어를 달아놓은 것은 과거가 과거로 끝나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미래비전을 제시하는 밑거름이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음이다. 작금의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 등을 지켜보며, 책에서 언급한 '현실은 과거의 열매이지 미래의 씨앗', '역사의 가정은 우리에게 과거를 재구성하는 성찰력만이 아니라 미래를 새롭게 열어가는 상상력을 준다' 는 표현들의 생생함이 착잡하게 가슴깊이 파고든다.
박헌영이라는 인물의 흔적을 쫒아가며 무엇보다 놀란것이,,, 해방후 아시아권에서 개념자체도 생소했을 '민주주의'라는 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8월 테제에서 제시한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 1945.11.30 서울중앙방송 연설에서 전국민을 대상으로 건국의 이상을 '진보적 민주주의'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외에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민주주의 통일정권 제시, 이것의 기반은 국민적 여론과 대중의 판단이라 역설하고 있다. 오늘날에 적용하여도 이상국가의 모델로 제시함에 손색이 없는 '민주주의' 국가의 모습이다. 현시대는 천박한 자본주의가 '민주주의 국가'로 대중들의 뇌리속에 각인되어 그리 해석하고 있다. 일베사이트에서는 '민주화'라는 용어가 참으로 기가막히게 쓰이고 있다. 어떠한 국가의 모습이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의 모습인지 대다수가 정답을 잃어가고 있는 현실에, 69년전에 민주주의를 외친 한 혁명가의 삶을 들여다 보는 마음이 다시 착잡할뿐이다.
그렇듯 큰 인물의 아들로 살아가야 했던 고난의 길은 저자와 나눈 원경스님의 얘기가 아니라도 미루어 짐작이 갈수 있을 것이다. 사회에 큰 파장을 줄수도 있는 역사의 해석과 다른 얘기들이 큰 관심을 끈다. 보천보전투에 대한 이현상의 발언들, 빨치산 대장 이현상의 죽음, 좌익의 거두 김상룡 및 이현상과의 인연, 박정희의 박헌영에 대한 평가, 해군입대, udt 근무와 탈영의 과정들... 원경스님의 삶을 언급해오며 가장 중요하게 등장하는, 지금은 확인할 수 없는 한산스님이란 분의 존재.. 내용중 일부 의아한 부분이 있는것도 사실이며, 아쉬운 부분이라 개인적인 생각이 든다.
저자의 남과 북에 던지는 메세지는 분명 화해와 통일로 가는 길에 남과 북 모두가 되새기고 해결하고 가야만 할 '박헌영'에 대한 '트라우마' 치유책일 것이다.
어찌됐든, 먹고살기 힘들다는 이유로 삶에 매몰되어 정신없이 살다가 잠시 삶의 여유를 찾고자 잡은 이 책을 통해, 현실의 씨앗인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봄과 동시에 나의 삶을 잠시나마 반추해 보며 정돈하는 소중한 시간을 갖게 되었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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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규 . 2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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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의 분단과 함께 사고도 두 동강이 나버렸다. 보고자 하는 부분만을 보고 적극 끌어안는 일을 50년이 넘도록 수행해온 사람들은 자신이 외면한 진실에 대해 의문조차도 품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역의 사람들에게 적잖이 빚을 졌다. 비록 이념에 의해 철저히 지워졌지만 역사 속에서 그들의 역할은 결코 작지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변절의 길을 걸은 몇몇 인사들보다 더 강직했고, 숱한 고초에도 스스로를 꺾지 않았다. 더딘 속도긴 하지만 많은 이들에 대한 재평가가 진행 중에 있다. 언젠가는 우리에게 다가올 통일이후의 삶을 위해서라도 이는 분명히 필요하다. 그런데 아직 아무도 입에 올리지 못하는 이가 하나 있는 듯하다. 그의 이름은 박헌영. 남한에서는 그를 빨갱이 중의 빨갱이로 평가했다. 반면 북에서 그는 미제 간첩이었다. 미국과 남북, 즉 세 주체 사이에 문어발을 걸친 스파이라도 됐던 것일까? 아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독립운동을 하였다. 남북을 아우르던 세력인 조선공산당의 대표였는데, 북한 인민의 마음속에서 영생(?)을 획득한 김일성의 지위는 박헌영보다 아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헌영은 김일성에 의해 처형당했다. 남한보다 그의 정통성을 더 인정해줄 것처럼 보였던 북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함으로써 그는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인물이 되어버리고야 말았다. 남 혹은 북. 어쩌면 조국의 독립만을 바라보며 달리던 이들에겐 어느 쪽에 속하느냐는 부수적인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가장 심오한 문제는 조국을 하나의 독립된 세력으로 만드는 것이었을 테니 말이다. 저자는 박헌영의 아들로 알려진 원경 스님과의 대화를 통해 잊혀진 박헌영을 현실로 불러들였다. 오래도록 박헌영의 아들은 침묵해왔다. 연좌제는 엄연히 폐지됐지만 현실에서는 아버지가 빨갱이면 아들도 빨갱이였다. 어린 시절 헤어졌고 남의 입을 통해 자신의 아버지가 처형됐단 사실을 알았지만 그는 박헌영의 아들이었고 그래서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스님이 된 이후에도 그에게는 안기부의 직원이 따라붙었다. 침묵은 스스로 택한 것인 듯했지만 실상은 강요받은 것이었다. 그런 그가 아버지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본인의 나이도 일흔이 넘어 더는 아버지에 대해 증언해줄 이가 남아 있지 않으리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아무도 박헌영을 기억해주지 않는다면? 개인적으로도 비극이지만 이는 우리 사회에도 비극이다. 그가 꿈꾸던 사회에 대해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은 우리는 적지 않은 힘을 발휘해가며 독립운동을 해온 한 축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어느 선까지 받아들여야 좋을까. 단순히 흥미라고 여기는 것은 힘겹게 입을 연 이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 같다. 그렇지만 북한의 김일성이 김일성이 아니라는 그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 학계에서도 이는 사실이다/거짓이다로 의견이 갈리는 부분이다. 보천보 전투의 규모와 중요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진실이 무엇이 되었건, 박헌영이 갖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해외로 도피하지 아니 하고 국내에서 미래를 도모했다는 점이다. 방법론의 문제겠지만 이 땅에 존재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차이는 크다. 이승만이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그의 주 활동무대는 미국이었다. 그의 삶은 국내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들만큼 뜨겁지 못했다. 실제로 그는 외교에 집중했으며, 자신의 권력을 추구하기에 바빴다. 박헌영은 달랐다. 감옥에서 똥을 먹고 정신병으로 인정받아 풀려나기가 무섭게 독립운동을 다시 시작했을 정도였다. 아들의 꿈은 아버지의 복권이다. 그렇지만 그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아버지의 복권보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이들의 복권이 우선이길 바랐다. 그들의 열의는 순수했다. 세상에 바라는 것 하나 없이 오로지 순수함으로 변화를 꿈꾸었던 그들에게 드리워진 짙은 그림자가 걷히는 날은 알게 모르게 우리 자신에게도 깃들어 있던 레드 콤플렉스가 벗겨지는 날이기도 할 것이다. 설레지만 동시에 그 날이 너무도 먼 곳에 존재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도 용기 내어 침묵을 깨트려 준 한 인물로 인해 또 한 발자국 역사는 움직였지 싶다. 깊은 곳에 존재하는 상처를 응시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역사의 수레바퀴 역시 좀 더 빠른 속도로 돌아갈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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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트라우마>는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의 주요 간부들이 국가전복 음모로 평양에서 체포된 지 60년을 맞아 기획한 책이다. 저자는 박헌영이 남과 북의 지도자가 되었다면 20세기 후반의 우리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을지, 박헌영이 지금 살아 숨 쉬고 있다면 어떤 길을 걸어갈지에 대해 논의하면서 독자들의 사유의 지평을 넓혀주고, 남과 북이 함께 풀어야 할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역사적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 사진 자료를 풍부하게 수록하였다.
박헌영(1900.5~1956.12)은 일제강점기에 주로 국내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투사이자 혁명운동가이다.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을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이며, 1945년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 재건시 당수로 선출되었다. 해방 후 한반도 남단을 무력 강점한 미군정에 의해 조선공산당(남조선노동당)이 불법화된 후 월북하여 해주에서 활동하였으며, 한국전쟁 전후까지 한반도 남단의 남로당 활동을 지도했다. 한국전쟁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외무상이었으나 정전 후, 북한에서 "미제국주의 간첩 및 국가전복 음모"라는 죄명으로 사형되었다.
박헌영은 일제강점기 때 일제 경찰에게 체포된 후 모진 고문을 이겨내고 변절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그의 첫 아내였던 항일여성운동가 주세죽은 2007년 남한에서 복권되어 건국훈장이 추서되기도 했다.
한국전쟁과 전세계적인 냉전 이후 반공주의와 반북주의가 성경처럼 유지되어온 대한민국 정부와 학계에서는 대부분의 사회주의계열의 항일독립투사는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박헌영은 남한에서도 항일투사이자 사회주의 혁명가로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미군정이 조선공산당을 불법화시킨 계기가 되었던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의 조작에 대한 재심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북한 역사에서도 박헌영은 ‘미제의 간첩’이자 ‘반역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가 일제강점기 때 고군분투한 항일운동은 역사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박헌영에 대한 북한의 조사와 재판을 ‘고문에 의한 사건조작’이며 ‘정적에 대한 부당한 숙청’으로 규정한다.
<박헌영 트라우마>는 2014년 한국현대사를 다시 공부하면서 구했던 책인데, 최근 위안부 문제와 식민지 청산 등 일제강점기 관련한 문제가 사회적으로 확산되면서 읽기 시작했다. 저자는 박헌영씨의 아들로 알려져 있는 원경 스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박헌영의 삶과 활동에 대해 재평가를 시도했다. 더불어 책의 부제 '그의 아들 원경과 나눈 치유 이야기’처럼, 이 책은 박헌영의 아들과 한국사회 전반의 '치유'에 대해서도 저자의 의견을 밝히고 있다.
한편 이 책에는 박헌영의 방송연설문과 8월테제, 연표를 담아 당시 박헌영이 제시한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의 개념도 재조명해 본다. 남과 북이 통일되었을 때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는 공통된 목표가 될 수 있어서다. 물론, 그다음 단계를 어디로 갈 것인가는 다음 세대의 몫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저자는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을 창립해 원장과 이사장으로 일했던 손석춘이며, 2011년부터 건국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과에서 젊은이들과 소통하고 있다.
저자는 남과 북의 박헌영에 대한 거짓과 위선적인 태도를 끝내야 한다고 이야기하며, 남과 북이 통일로 가는 길에 박헌영은 반드시 거쳐야 할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더불어 한국전쟁으로 인한 역사적 트라우마를 치유하려면 박헌영과의 정직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는 책 서문에서 박헌영을, 박헌영의 삶과 죽음을, “조선공산당의 역사를 남과 북이 함께 풀어야 할 '역사적 트라우마'로 규정하며, 장기적으로 한민족이 통일을 향해 나아갈 때 박헌영에 대한 복권과 트라우마 치유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주장에 공감이 되는 부분도 있고, 그 반대로 수긍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공감되는 부분은 박헌영을 항일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 계열의 투사로서 복권시키고 재조명해야 한다는 점과 미군정이 조선공산당을 불법화했던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의 조작 여부를 재조사해야 한다는 점 등이다.
반면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은 특정 개인(강상호)의 주장을 토대로 북한에서 이루어진 박헌영에 대한 재판이 ‘정치적’이고 ‘부당’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점과 박헌영 사망 시기에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아들(원경스님)의 기억과 진술로 박헌영과 주변인물에 대한 평가를 대신하려 한 점이다.(물론 그들의 증언도 사건의 목격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가치는 충분하다.)
북한에서 내무성 정치국장으로 근무한 경험이 있는 러시아 거주 강상호(1909~2000)의 증언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는 이유는, 그가 생애 마지막 10년을 국제적으로 ‘북한민주화 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북한민주화 운동’이 국제정치적인 의도와 목적을 지닌 채 하나의 주권국가를 위협하고 국가간 갈등과 긴장을 유도할 뿐 국제적인 평화나 화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들은 CIA나 국정원 등 한미 권력기구가 배후로 의심되는 단체의 자금을 수령하면서 자금을 횡령하거나 국제적인 사건사고를 일삼는다고 생각한다. 한반도의 통일은 커녕 남북화해와 평화를 가장 앞서서 가로막고 있는 세력 중 하나가 바로 ‘북한민주화 운동단체’이다. 북한에서 1990년대 후반 노동당 중앙위원까지 엮임한 후 특별한 반북활동을 하지 않았던 박병엽의 증언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2010 유영구,정창현 선인)과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2010 유영구,정창현 선인)이 오히려 신뢰가 간다.
아들(원경스님)의 증언 역시 그의 생애를 인간적인 측면에서 생각해볼 때, 측은함과 안타까움에 대해서는 동정과 공감을 표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가 아버지 박헌영이 젊은 시절 추구했던 양심과 정의를 따라 살았다기보다는 권력의 공안기관과 접촉하며 ‘목숨을 연명’해왔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그런 아들의 희미한 증언을 토대로 박헌영에 대한 객관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민족의 후세들에게는 이처럼 논쟁이 많은 박헌영의 생애에 대한 지속적인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즉 일제강점기 시절 그가 사회주의 항일운동을 전개한 부분과 해방 후 조선공산당과 남조선노동당 지도자로서 활동한 부분에 대한 평가는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조선공산당이 불법화된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조작’ 역시 해방 후 한국현대사와 한미관계, 그리고 사회주의 운동사의 관점에서 재조사와 재평가가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에게 협력했다는 의혹과 해방 후 미군정 정보부서에서 간첩으로 활동했다는 북한의 조사 결과, 해방 후 조선공산당이 근로인민당 및 조선신민당과의 관계 및 남조선노동당 설립 과정, 사회주의 항일투사 김삼룡의 체포 과정, 해방 후 남한 내 빨치산 투쟁, 한국전쟁 과정에서 박헌영과 남로당의 활동, 이승엽 이강국 등 남로당 지도부의 간첩 및 국가전복 음모, 북한에서의 재판과정 등에 대해서도 지속적인 재조사와 재평가는 필요할 것이다.
해방 전후 박헌영과 남로당의 활동에 대한 진실과 평가를 위해서는 앞으로 꾸준히 박헌영과 남로당, 김일성과 남북현대사에 대해 공부해야 할 것 같다.
[ 2016년 9월 11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