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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사랑과 용서를 깨닫게 하고 나를 치유한 완소소설 나는 신은 존재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교회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항상 그들의 말에 '왜?'라는 의문을 갖고 있었고, 내가 기독교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였을 수도 있지만, 어떤 이로부터도 그 질문들에 관한 명쾌한 답을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그 사람들도 잘 설명을 못하는 하나님을 왜 그렇게 믿으라 하는지 더욱 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기독교 소설을 읽었다. 친구와의 약속을 기다리며 이런 책은 도대체 어떤 내용일까....를 생각하며 우연히 서점에서 몇 장 넘겼다. 그런데 메켄지가 파파로부터 쪽지를 받았을 때부터 그 이후의 이야기들이 너무나 궁금해져서 그날 밤 바로 예스에서 주문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신학과에 다니는 동생의 말에도 귀기울이지 않던 내가 이 책 한권으로 자진해서 교회를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내가 갖고 있던 궁금증들을 한 방에 모두 털어내주며, 동시에 성경 완독도 한 번 하지 않은 내 안에 주님을 먼저 세울 수 있게 만들었다.
당신이 그렇게 우리들을 사랑한다면 왜 상처와 아픔을 주는 것이고, 모든 일들을 다 알고 있으면서 왜 피해가도록 인도하시지 않은 건지.. 신기하게도 저자가 이끄는 이야기들이 모두 내가 가진 궁금증이었다. 그런 여러 질문들에 진심으로 하느님이 말씀해 주시는 것 같았다. 난 굳이 성경을 먼저 읽고 하느님을 이해하려 애쓸 필요가 없었다. <오두막>을 통해 난 직접 하느님을 만난 것 같았다.
백인이며 아버지이고 하얀 수염이 나있을 것만 같은 하느님에 대한 기존의 고정관념들을 깨며 흑인 어머니로 맥 앞에 나타난 파파. 그의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힐 때 생겼을 상처를 똑같이 가지고 있던 파파. 나까지도 하느님을 '파파'라고 부르고 싶게 만들었다. 또, 사라유와 함께 정리한 정원은 복잡한 맥의 정신이자 나의 머릿속이었다. 그렇게 때로 눈물까지 흘리며 단번에 책을 읽어 내려 갔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난 내 곁에 파파(하느님)와 예수와 사라유(성령)이 함께 하고 있다는 믿음에 행복함마저 들었다. 그분이 여기 내 안에 거하신다는 생각에 두려움없이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이 책을 그렇게 만나도록 한것도 그 분의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물하고 싶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우선순위를 두어 리스트를 정리해야 할 정도로, 정말 내게는 너무도 고맙고 소중한 책이다.
김네몽닷컴 http://www.kimnemo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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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무수한 굴곡의 길로 이루어져 있다. 평탄하다가도 어느 순간 갈림길에서 선택의 순간에 직면하기도 하고 오르막길을 한없이 오르다가 내리막길 앞에서 그만 푹 고꾸라지고 싶은 경험을 하기도 한다. 생의 선택 앞에서 어떤 길이 올바른 길인지는 과정을 거치고 결과적으로 끝이 와도 뭐라 단정 짓기 어렵다. 왜냐하면, 무릇 인간이란 그 어떤 선택을 해도 전적으로 만족하기란 어려운 법이기 때문이다. 선택이란 어떤 상황과 때에 따라 오차가 허용되는 유동적인 성질을 갖고 있지 않던가. 이 때문에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든 후회라는 꼬리표를 늘 달고 다닌다. 가지 못한 길,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열망이 가득한 게 인간이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갈림길- 선택적 딜레마에 빠진 한 남자 『갈림길』은 너무도 이기적인 한 남자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인생에 수없이 존재했던 선택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와 같은 철학적인 물음을 던지는 작품이다. 특이한 것은 혼수상태 즉 그러니까 현실에서는 의식불명, Coma 상태에 놓여있으면서 무의식의 자아와 대면하는 서술방식이기에 환상소설의 분위기를 내포하고 있기도 하고, 사후 세계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는 계기를 갖게도 한다. 모든 것의 기준이 재력이며 상대방을 존중하는 법도 없고 철저히 개인주의로 살던 이 남자는 무의식 세계에서 야기되는 선택의 길에서 현실의 자신을 적나라하게 목도한다. 그러면서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까지 이르는 혼란 상태를 경험한다. 우리는 나로 살고 있지만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전적으로 인지하며 살지는 못한다. 이는 기억의 망각도 톡톡히 한몫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또렷이 기억나는 게 있는 반면 그런 순간이 있었던가 같이 까맣게 잊고 있는 경우도 수두룩하지 않던가. 앤서니가 깨어있던 현실이 이전 세계(현재 우리가 사는 삶)라 한다면 사후 세계는 life-after(이후의 삶)이다. 그리고 현재, 육신은 의식불명 상태에 놓여있지만 영혼은 깨어있는 상태는 이 두 세계의 중간적인 공간, '내면세계'이자 영혼 세계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상태에서 생사의 갈림길이 결정된다. 그리고 앤서니는 그런 상태에서 지난날 자신이 살아왔던 인생을 반추한다. 하지만 좋았던 기억보다 끔찍한 악몽 같던 기억이 더 많은 그다. 이 시간을 통해 내면의 충돌을 겪게 되는 앤서니는 차츰 '믿음'이라는 것에 눈뜨게 된다. 공허하고 부질없다 생각했던 신(하느님, 예수)에 대한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게 되고, 타인을 통해 전해지는 사랑에서 믿음이라는 생명의 불씨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신은 없다' 라고 믿어왔고 그의 인생에서 겪어왔던 일련의 사례들을 통해 더욱 확신을 했던 사람에게 '신은 있다' 라는 명제는 혼란을 부추길 수밖에 없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있다면 신은 내 안에 있다' 가 저자가 독자에게 전하는 궁극적 메시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형체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근본적으로 똬리를 틀고 있어야만 가능한 이 믿음은 종교가 없거나 무신론자들에게는 거부감을 들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종교적인 색채는 일체 배제하고 받아들이면 결국 삶에 임하는 자세는 손에 잡을 수 없는 이상이 아니라 나를 믿는 것,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 선입견을 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도 있다는 걸, 그리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대략적인 소설의 흐름에서 어느 정도 눈치챌 수 있겠지만 이 작품은 종교적인 색채가 조금 짙은 편이다. 나 같은 경우 딱히 종교가 없고 무신론자에 가까운 편이라 살짝 거슬리는 정도였을 뿐이지만 사람에 따라 불편함을 호소할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소설 안에서도 앤서니의 내면 세계에서 예수, 성령과 같은 인물을 만나고 그들을 통해 이타적인 자신으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만 보면 이들 모두는 앞서 말했다시피 모두 내 안의 내면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러니 그저 편하게 받아들이면 된다!
"이게 사실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제발! 이게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주세요! 정말 이게 제 모습인가요? 병들고 불쌍한 인간쓰레기? 이게 내 인생인가요? 외롭고 구역질 나는 인간이 바로 나인가요? 제발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주세요!"-87p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시간, 자신이 살아왔던 삶의 방식들을 곱씹어보는 계기를 생사의 갈림길 앞에서 추적해가는 남자는 절규한다. 쓰레기 같았던 자신의 인생,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 자신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는 자괴감 앞에서 울부짖는 남자의 인생길은 보는 이들의 눈물샘을 촉촉이 자극함과 동시에 안타까운 한숨을 쉬게 한다. 세상에 누구의 삶이 옳은가 하는 정답지는 없다. 개인이 삶에 임하는 방식과 가치관이라는 것은 나름의 고유성을 가지고 그 삶을 지탱하게끔 해주는 중추가 된다. 앤서니의 삶이 옳다 그르다 말하지는 못하겠다. 종래에 가서 그는 말한다. 자신의 삶에는 오직 '자기 자신' 밖에 없었다고. 대개 상처가 있는 사람들은, 특히 어린 시절의 충격적인 경험은 트라우마로 남아 삶 앞에서 사사건건 방해공작을 하기 마련이다. 작품 안에서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지는 않지만 앤서니도 그런 상처를 안고 있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시작된 타인과의 격리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최고조를 달린다. 그리고 앤서니를 철저히 혼자만의 고립된 세상으로 내몬다. 그의 아픔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서 내가 처음에 그에게 가졌던 선입견은 눈 녹듯이 사라져갔다. 문득 어느 때고 자신이 처한 삶의 무게가 쓰나미처럼 생생하게 다가올 때가 있는 법이다. 앤서니에게는 내면세계에 갇혀있는 지금이 그때이다. 그 해일에서 살아남느냐 휩쓸리느냐는 온전히 자신의 의지만이 지탱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 따라오는 모든 책임은 자신의 삶 안에서 짊어지고 나가야 할 것이다.
"고백하건데 때로는, 내가 다른 사람들을 너무 많이 비판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가끔은 내가 우월하다는 생각이 들고, 세상 사람들 중에는 남을 좀 비판해도 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어쩌면 내가 바로 그 사람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고요. 내 말 이해하겠어요, 토니? 우리는 누구나 어느 면에서 엉망이라고요."-360p
"믿음에는 모험이 따르죠. 관계에도 항상 위험이 따르고요. 하지만 결론이 뭔지 아세요? 관계가 없다면 이 세상은 아무 의미도 없어요. 어떤 관계는 다른 관계보다 좀 더 엉망이고, 어떤 관계는 오래 가지 않고, 또 어떤 관계는 힘들어요. 반면 어떤 관계는 수월하기도 하죠. 어찌 되었든 그 모든 관계가 다 소중해요."-367p
자신을 믿는 것에서부터 온전한 나로 거듭날 수 있다면, 타인과 나의 사이는 융합되어야만 '내'가 존재하는 의미가 있다. 철저한 개인주의로 사회적 성공에만 몰입했던 그에게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희망'과 '사랑'으로 갈무리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첫걸음이며, 상처 또한 타인과의 관심과 사랑으로 치유가 가능하다 같은 보편적인 진리들을 일깨우는 매 장면은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따끔한 충고의 소리이기도 하다. 타인에게 고통과 상처만을 주며 살아왔던 남자의 마지막 선택은 그래서 가슴 찡한 감동을 선사한다. 비로소 삶의 참 의미를 깨닫게 되었으니 다행이라 말할 새도 없이... 벽을 쌓는 것만이 자신을 지탱해줄 최선이라고 믿고 있는 세상의 수많은 앤서니에게 윌리엄 폴 영은 말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나와 너를 단절시키는 '벽'이 아니라 구분 지을 수 있는 '경계'라고 말이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존재들인데, 누가 누구의 허물을 비난하고 비판할 자격이 있을까. 없다. 그 누구에게도. 나 아닌 타인에게 함부로 돌팔매질 할 자격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나 자신을 위해 달리는 것보다 주변을, 세상과 더불어 교유할 때 비로소 풍족한 삶이 영위될 수 있다는 걸 『갈림길』을 읽다 보면 깨닫게 된다. 나만 보면 되는 거라 생각했다. 내 삶이 고단한데 타인의 삶의 무게까지 들여다볼 여유 따위는 없는 거라고 애써 합리화했다. 하지만 무언가를 나눌 때, 누군가를 위할 때 내 마음속에서 생명의 불씨가 타오르리라는 것을 이 작품은 조곤조곤 속삭여주었다.
우리는 날마다, 매일,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순리대로라면 우리의 수명은 딱 하루만큼씩... 줄어들고 있는 것이니까. 그리 생각 하다보면 욕심도 미움도 시기도 편협한 사고도 모두 부질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외려 마음의 평온 상태에 접어든다. 바꿔 생각하면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조금 욕심도 내고 질투도 하고 가끔은 고리타분한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살아있다는 신호가 아닐까 하는 우스운 생각도 한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황폐해진 마음을 하나하나 짚어가고, 죽음을 삶의 끝이라 단정하던 앤서니가 차츰, 영혼의 세계에 눈 뜨는 과정은 앞서 말한 매일 죽어가고 있다는 나의 말과는 엇갈리는 맥락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까. 우리는 매일 조금씩, 내 가장 가까운 내면, 마음의 평정 상태에 접어드는 평화로운 세상이자 영혼의 소리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삶은 언제나 갈림길에 직면한다. 선택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손을 놓아버릴수는 없다. 왜냐하면 삶 역시도 선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곳이 아님을, 앤서니는 생의 마지막에서야 알게 된다. 하지만 마지막이 절대 마지막이 아님을, life-after를 믿는 모든 이들의 마음 속에 생의 불씨가 타오르리라는 것을 믿는다면 죽음이 결코 무섭기만 한 생의 마지막은 아니리라. 당신의 선택이 당신의 인생을 만들어간다. 삶에 있어 어떤 선택이든 중요하지 않은 게 없고 신중하지 않아야 할 게 없다.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얼마나 되는가. 선택은 순간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생을 통해 겪게 되는 무수히 반복되는 선택이 우리의 인생을 형성해가고 있다는 걸 잊지 말기를 바란다. 그리고 지금, 당신이 사는 현재 또한 그 선택으로 이루어진 삶의 순간이라는 것을 명심하기를...
그리고 인생의 갈림길 앞에 놓인 당신의 선택이 어떠하든 자신을 믿고, 그 방향을 향해 힘차게 발을 내딛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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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위로 받기를 거절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위로일지라도 거절합니다.
하나님께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하나님께 가장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었는데,
나의 기도에 응답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심에도,
그렇게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해주실 수 있는데 해주지 않은 것,
그 거절이 저에게는 가장 큰 상처입니다.
그래서 무기력한 사람에게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더 화가 납니다.
복음서에 가득한 기적은 그때뿐인 기적이었나요?
기적은 예수님 공생애 기간으로 막을 내리고
이제 유효한 것은 내게 요구하는 온갖 계명과 율법들뿐인 겁니까?
‘맥’이 찾아간 ‘오두막’에서 삼위 하나님을 맞닥뜨렸을 때, 나도 모르게 원망의 말들이 터져 나왔다. 책을 읽기 바로 직전, 나의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또 한 번 외면하셨기 때문이다. ‘맥’을 따라 좇아간 ‘오두막’에서 이렇게 실재적인 하나님을 마주할 줄 미리 알았다면, 나는 책장을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나에게 말을 걸어오시는 하나님,
미안하지만 지금은 듣고 싶지 않아요.
아니 적어도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삼위 하나님께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 ‘오두막’ 안에서 도망쳐 나오고 싶었다. 하나님과 직접 해결하지 않은 채, 묻어둔 나의 상처가 다시 건드려지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나의 방식대로 알아서 처리하고 겨우 진정하고 있는데,
결과를 바꿔주실 것도 아니면서,
왜 상처의 한 가운데로 나를 부르십니까.
잔인하십니다.
더구나 내가 쓰러진 그 자리에서 그렇게 친근하고 인자한 모습이라니!
나는 월리엄 폴 영의 은밀한 ‘오두막’을 엿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오두막]의 저자인 월리엄 폴 영은 부모가 선교사로 활동하던 뉴기니에서 자랐고, 그곳 원주민들에게 성추행을 당했던 경험이 있다고 소개된다. 그런 월리엄 폴 영에게 ‘오두막’은 모든 비밀, 아픔, 치욕적 기억들을 묻어두는 마음속 깊은 곳을 상징한다고. 나는 이 소개 글을 읽자마자 흠칫 놀라 내 마음 안의 오두막이 안전한지 확인했다. 아직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하니 안심이 된다. 그러면서 스스로 놀란다. ‘내 안에도 오두막이 존재하는구나!’ 잊은 기억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안에 집 짓고 살고 있는 은밀한 고통들. 나는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누구에게도 꺼내놓고 싶지 않은, 내 안의 비밀스런 오두막을 안전하게 숨겨둔 채, 단지 월리엄 폴 영의 은밀한 오두막을 들여다보고 싶은 호기심에 사로잡혔을 뿐이다.
그의 이야기 안에는 이러한 ‘오두막’이 실재한다. ‘맥’이라고 불리는 주인공 ‘매켄지’에게 ‘오두막’은 사랑하는 딸이 유괴범에게 납치되어 살해된 장소이다. 즉, 그의 ‘거대한 슬픔’이 시작된 곳이다. 그런데 어느 날, 맥은 ‘파파’(그의 아내는 하나님을 ‘파파’라고 부른다)로부터 쪽지를 받는다. 「매켄지, 오랜만이군요. 보고 싶었어요. 다음 주말에 오두막에 갈 예정이니까 같이 있고 싶으면 찾아와요. -파파.」 이 장난 같은 쪽지의 진위를 맥은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다시 기억조차 하기 싫은 그 ‘오두막’을 찾아간다. 마침내 그가 찾은 ‘오두막’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쪽지보다 더 황당한 세 사람과의 만남이다. ‘파파’(성부 하나님)와 ‘예수’(성자 하나님)와 ‘사라유’(성령 하나님),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 [오두막]에서 만난 삼위 하나님은 그들과의 교제 가운데로 맥을 초대하며, 그에게 말을 걸어오신다.
나는 구약의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과 대면하고자 하실 때에는 ‘원점상황’, 즉 아무것도 없는 광야(사막)로 그의 백성을 불러내신다고 배웠다. 하나님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곳, 그리하여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시는 곳으로 말이다.
그런데 [오두막]에서 만난 하나님은 내가 쓰러진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상처를 재료로 스스로 마음 안에 지은 집, 하나님과의 대화를 거절한 채 하나님을 피해 숨어버린 바로 그곳에 하나님이 와계셨다. 더 달아날 데도 없고, 숨을 데도 없고, 감출 것도 없는 바로 나의 가장 은밀한 그곳에 말이다.
신이 존재하는 것을 믿는 사람이든, 부정하는 사람이든 살면서 한 번쯤은 신에 대한 실망을 경험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고통과 부조리와 불행은 신, 특히 ‘창조주 하나님’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많은 신학자, 설교가, 철학자, 저술가들이 이 문제를 고민해왔고 답해왔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여러 대답을 알고 있다. 그러나 [오두막]에서 만난 삼위 하나님과 ‘맥’의 대화를 통해 지금 내가 얻은 대답보다 역동적인 답변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신학적 이론을 초월하면서도 논리적이고,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개념이면서도 명확한 이해를 제공한다.
삼위 하나님을 알 때, 그분의 일하심을 이해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나의 경험에 의하면, 치료와 자유함의 신비를 체험하게 된다. 나는 하나님을 이해함으로 비로소 나와 내 삶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맥은 자신의 딸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한다! 맥이 경험한 치유와 자유함의 신비,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내가 경험한 치유의 신비가 궁금하지 않은가! 그리하여 나는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된 존재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나에게 부어지는 자유와 평강의 충만함! 그는 아신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아신다. 내가 겪는 고통과 쓰라림을 아신다. 그분이 아신다는 그 사실 자체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위로가 된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뜨거운 사랑과 손에 잡힐 듯한 실재적인 소망 가운데 내 안의 상처에 새살이 돋고, 오두막은 막 피어난 꽃향기로 가득한 정원처럼 비로소 생기를 얻는다. 그것은 맛본 자만이 알 수 있는 신비이다.
나는 책을 덮으며 하염없이 울었다. 하나님을 향했던 나의 원망과 분노 위로, 예수님을 욕하며 죽어간 좌편 강도의 모습이 겹쳐진다.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스스로 제한하시고 고통 가운데 죽으신 예수님. 나는 그것이 나를 위한 역사였음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그 예수님께 끊임없이 메시아이심을 증명해보라고 외치는 나를 발견한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를 위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나는 [오두막]을 읽은 사람들이 이 책을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것은 치유와 용서와 자유를 선물하는 축복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동을 선물하는 것이다. 나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오두막지기가 되고 싶다. 그 은밀한 [오두막]에서의 만남. 하나님과의 만남, 그 자체가 대답임을 모두가 알게 되기를 바란다. 나의 영혼은 [오두막]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감지한다. 그리고 고백할 수 있다. 그는 보이지 않아도 나를 위해 일하신다. |
겉표지도 멋지지만 속표지도 아주 멋지다.<표지와 제목에 대한 느낌> 경건하고 웅장한 느낌이 들었다. 갈림길이라는 제목에서 연상되는게 많았다. <이책은> 세계사의 서평 의뢰 도서다. <저자는>
<책내용 맛보기>
<책읽은 소감>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두 가지 길을 선택하는게 나왔었다. A와 B 둘 중의 한 길을 선택해서 일어나는 각 과정과 결과를 다뤘는데 무척 흥미롭게 봤던 기억이 있다. 우리는 삶을 영위함에 있어서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 직면하게 된다. 사소한 것들이라 치부할 수 있는 짜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에서 짬짜면이 나오는 시대가 되었어도 여전히 선택앞에서 올바르고 더 안전함을 모색하고 싶은 마음으로 망설이게 된다. 다짜고짜로 선택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개는 신중한 선택을 위해 차분히 망설인다고 본다.
갈림길이라는 제목을 보았을때 이 텔레비전의 프로가 딱 떠올랐다. 어차피 이 길을 갔어도 저 길을 갔어도 성취와 아쉬움은 남는 법. 다만 성취감이 크면 아쉬움은 적을 것이요, 반대인 경우엔 아쉬움과 아울러 미련도 클 것이다. 그렇게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호기심도 있지만 대개는 두려움으로 대다수가 가는 길을 선택하는게 아닐지. 그 길은 안전하고 많은이가 가다보니 더디고 느려도 누구나 가는 길이기에 덜 답답해 할 것이며 가보지 않은 길은 더 미지의 길이 될 것이다. 그 가보지 않은 길의 끝에 죽음이 있다고 볼 때 그 길은 누구나 한 번은 갈 길이지만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가는 이는 거의 없다고 본다. 그저 때가 되어 맞이할뿐.
앤서니 스펜서는 누가 봐도 명백히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의 앞에선 누구나 굴복하였고 그럴수록 그는 사람들을 무시하였고 어느 순간부터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감시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히려 대다수가 작당을 하여 똘똘 뭉쳐서 자신을 무너뜨리기 위해 감시한다는 생각이 깊어지면서 자신만의 은밀한 휴식처이자 은신처를 비밀리에 만든다. 그렇지만 그 은신처는 남들이 다 아는 별장에다 만들어서 휴식을 위한 공간인 줄로만 안다. 철통같은 보안을 유지시키며 그 좋은 머리로 기분 내킬때마다 유언장을 수도없이 변경하며 작성한다. 그 유언장의 가장 압권이 모든 재산을 고양이에게 증여한다는 것. 그건 술김에 만든 것이었는데...
매사 빈틈없는 그가 어느날 졸도를 하고 식물인간 상태가 된다. 그런 상태에서 영혼이 잠시 이탈을 하며 만나게 되는 사람들. 그 여행길에 만나는 사람은 예수요, 성령이라는 할머님, 그리고 매기, 클라랜스, 몰리, 캐비, 린지 ...자신의 어머니가 무척 독실한 신자였고 자신의 아들이 5살 어린 나이에 죽어갈때 그렇게 부르짖었던 이름, 살려달라고 자신의 목숨을 대신이라도 하려던 아들이 떠나고 그는 변하기 시작했다. 딸을 안아주지도 않았다. 세상의 전부였던 어머니가 돌아가신후 그 아들을 잃은 그의 가슴은 얼어붙었다. 냉혈한이 되고부터 외로워졌으나 그건 자신을 질시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라며 우월감으로 자신의 성을 쌓고 살았다.
원하지 않았으나 어느새 여행을 다니며 자신의 삶의 궤적을 돌아보는데, 머리 좋은 그였기에 상황판단은 상당히 빠르다. 척하면 척인게 너무 억지스러웠다. 그보다는 종교가 없는 내게 [하나님, 예수, 하나님 아버지, 성령 등등]을 가장 알기 쉽게 풀이하는 것 같은 대화에서 조금은 거부감이 들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더 부담을 넘어 곤혹스런 상태가 되기도 했다. 글은 상당히 호의적이고 감정을 유발하는 문체는 아니나-그렇다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서평 의뢰 도서인데 난감하군 이런 생각이 많이 들 즈음에 거기서부터는 조금 편안해졌다.
미혼모인 몰리에게 다운증후군인 아들 캐비가 있는데, 아버지가 다른 여동생 린지는 백혈병 환자로 투병중. 매기는 매우 친절하고 상냥한 간호사로 흑인인데 둘도 없는 친구이자 독실한 신자. 몰리에게 매기가 없었다면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을 일상. 앤서니가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분의 뜻으로 여행을 하는건 사람들의 내면. 빙의가 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캐비의 내면에 들어갔다, 키스를 하면 이동하게 되는 경로로 매기에게 들어가고, 매기에게 큰 곤경에 처하게 하면서 친구가 된다. 그렇게 여러 경로로 결국은 다 알게 되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아는 존재가 된다.
자신이 죽지는 않았으되 죽은거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생활을 돌아보는 기이한 경험. 그 경험은 이미 초월한 상태가 되다 보니 온전한 몰입이 되었다 할 수 있겠다. 다른건 생각할 수 없는 상태에서 주어진 숙제처럼 하지 않으면 안되고 달리 그것밖에는 할 수 없는 상태에서의 돌아봄은 냉철한 제3자의 눈으로 볼 수도 있겠다. 현재 자신이 벌이는 진행형과 이미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보는 결과론과는 큰 차이가 있다고 본다. 더구나 자신이 이미 죽은거나 다름없는 상태에서라면 더욱 말이다. 그렇기에 감정이 있으나 감정을 배제한 상태같은 입장서 냉정히 볼 수 있으니 더욱 감정적이 될 수도 있고, 얼어붙은 심장에 아주 작은 단초하나가 둑을 무너뜨리는 효과로 작용했다고 본다. 한번 터진 둑은 감정을 분출시키며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화를 거듭한다는 사실. 어쩜, 애당초의 그로 돌아가는 시간이라 볼 수도 있었다.
삶은 유한하다. 누구나 죽음을 피할 방법은 없다. 아직까지 불로초는 없다. 다만, 누구나가 맞아야하는 죽음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여야하는 싯점일때 적어도 후회로 점철되어진 삶은 서글플 것이다. 그렇지 않기 위해선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자신이 직면하게 되는 그 날이 가까워올수록 어떤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떠난 자리는 늘 커보이는 사람이 되는 길은 자신이 떠난 자리를 돌아보는 시간을 자주 그려보는 일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자연의 순리대로라면 나이 많은 순으로 반드시 가야할 곳이니까. 사후 세계가 있다고 믿어야 그나마 살아가는 날들이 조금은 긴장하며 살 수 있고, 비교적 선하게 살려 노력할 수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하지 않을까. 죽음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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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신의 고통에 몰입이 되면 그 고통이 너무나 커 보이고, 나만 왜 이런 고통속에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지고, 깊은 슬픔 속에서 헤어나기 어려운 우울감에 빠지게 된다. 그 고통의 기간이 길어지면 이제는 간절함이 타성에 젖어서 기도의 끈마저도 놓아버리다가 결국엔 등을 돌리게 되는게 가장 인간다운 수순이 아닐까? 사람들이 제 아무리 좋은 방법들을 제시하고 조언을 하더라도 결국 욥의 친구들과 같이 느껴질 뿐이고, 나의 갈기갈기 찢겨진 마음은 같은 상처를 지닌 사람과만 공감할 수 밖에 없다. 그 거대한 고통의 문제를 바라볼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크리스찬들을 왜 이런 고통속에 방치하시는지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은 과연 내 안에, 그리고 이 곳에 계시는 걸까?
윌리엄 폴 영은 자신의 여섯 자녀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주위사람들에게 15권을 복사본으로 돌렸다가 이 소설에 감동받은 사람들의 권유로 출판에 이르게 된다. 입소문으로 2008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고 하니 이 책을 읽었던 수 많은 사람들 또한 나와 동일한 감동을 받았나 보다.
주인공 맥은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폭력 속에서 아버지에 대한 증오로 어린나이에 가출을 감행한다. 장성하여 가정을 일군 맥은 다섯명의 자녀를 두고 본인이 받지 못한 사랑을 자녀들에게 베풀며 화목한 가정을 이룬다. 어느 날 어린자녀 3명을 데리고 캠프를 떠난 맥에게 인생이 뒤바뀌는 일이 생기는데, 연쇄살인범이 6살 짜리 막내 딸 미시를 유괴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경찰에서도 오랫동안 찾고 있던 범인이었기에 결국 주도 면밀했던 범인을 잡지는 못하고, 산 속 깊은 외딴 곳에 세워진 허름한 오두막에서 피가 묻고 찢겨진 딸의 옷만을 발견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가족 모두에게 깊은 상처와 아픔의 시간이 찾아오는데,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으로부터 그 오두막에서 만나자는 저녁약속의 편지가 도착한다.
주인공 역시 그러했지만, 하나님은 물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시기에 인간의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의 아들이신 예수님이야 유대인의 자손이었기에 중동사람의 모습이었다고 예측할 수 있지만, 하나님, 성령님을 사람의 형상으로 생각해 본적이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작가의 재치가 돋보인다. 하나님, 성령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셔서 그 깊은 상처의 공간인 오두막에서 맥을 기다리고 계신다. 하나님을 흔히 아버지라고 칭하기에 아버지에 대한 편견으로 하나님을 바라볼까 싶어 흑인 여성의 모습으로 분하여 따뜻한 어머니의 사랑을 전하는 하나님과의 대화가 인상적이다. 또한 바람이라는 뜻의 사라유라는 이름을 갖게 된 성령님은 그 광채에 대한 묘사로 글을 읽어 내려가는 내내 눈이 부실지경이다. 2박 3일간의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과의 대화의 시간을 통하여서 맥의 상처는 조금씩 치유되며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가게 된다. 성경 속에서만 알고 있던 두려운 모습의 하나님을 대화속에서 실제 존재하는 하나님으로 경험하는 기분은 정말 특별한 느낌이었다. 맥이 아파할 때, 미시가 소리칠 때, 그리고 내가 부르짖었을 때, 그 순간 순간마다 함께 아파하시고 눈물 흘리시는 하나님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만나게 된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 걸까? 왜 6살짜리 꼬마아이 미시는 연쇄살인범과 함께 오두막에서 상상하기도 싫은 순간을 보내야 했을까? 이는 하나님이 이미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셨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하나님이 미시를 살인범을 통해서 해하길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 모두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선택하면서 시작된 일이라는 것이다. 그의 정의로 죄를 심판한다면 우리 중 그 누구도 선택 받을 수 없는 입장이지만 그는 사랑의 방법으로 자기자신이자 그 분의 아들인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모두 구원하는 방법을 택하셨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떠한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우리도 순간 순간 그 분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건을 통해 맥과 가족들은 상처가 치유되고 슬픔의 오두막을 허무는 계기가 되었으나, 나의 오두막은 그럼 이제 어떻게 하여야 할까? 친절한 하나님의 음성과 내 심령의 정원을 가꾸시는 성령님과 상처난 팔로 손을 잡아주시는 예수님과 함께 따뜻한 저녁식사를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리고 나 역시 맥과 같이 그분들과의 진심어린 대화로 문제를 해결받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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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요새 베스트 셀러로 나온 책으로
엄청난 횟수의 리뷰를 달고 인터넷 책 판매 싸이트에서 판매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교묘한 상술로 펴낸 책이다.
자. 책의 시작하는 말을 살펴보자.
대부분 시작하는 말에서는 작가의 생각을 담기 마련이다.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말에는 이런식으로 시작이 된다.
'매켄지 엘런 필립스'라는 이 책의 주인공에 대해서 작가가 서술하는것 처럼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매켄지는 맥으로 불리운다.
20년 전 , 이웃을 돕기 위해 외양간에 쓸 건초를 묶으러 간 적이 있었다. 그날 함께 일을 도와준 것이 인연이 되어 맥과 나는 친하게 지내왔다. 그 후 우리는 같이 시간을 보내며 커피도 마시는 사이가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두유를 넣은 아주 뜨거운 차이 티를 마셨다.) 우리는 자주 웃음을 터트렸고, 가끔씩 눈물을 흘리기도 했으며 언제나 깊은 교감을 나누었다. 나이를 먹을 수록 우리 사이는 더욱 돈독해졌다.....중략
자. 이 내용은 다름 아닌 시작하는 말에 들어가있다.
시작하는 말에는 당연히 소설 부분이 아닌 작가의 하고 싶은 말이라든지, 책에 대해서 하고 싶을 말을 쓰게 된다.
다음을 더 읽어보자.
맥은 이야기는 잘하지만 글쓰기는 젬병이었다. 그는 내가 글쓰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이야기를 '아이들과 아내를 위해' 대신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가족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보여주고, 또 자신의 내면 세계, 당신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임하시는 그런 세계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중략
다음을 읽어보면 맥이라는 사람은 글을 못쓰지만 작가인 윌리엄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대신 써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자 마지막을 다음을 읽어보자.
그러나 이글이 바로 그들을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이어질 글은 맥의 회상을 내가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맥의 이야기이지 내 이야기가 아니다. 도중에 나도 가끔 등장하지만 맥의 시점을 따라 나를 3인칭으로 부르겠다.
다음글을 끝으로 시작하는 말이 끝맺음이 된다.
자 여기까지 읽은 당신은 뭐라고 생각이 드는가?
작가인 윌리엄이 자신의 친구의 맥의 이야기를 대신 써주는것처럼 보인다.
이제는 줄거리를 살펴보자.
이 책의 줄거리는 맥이라는 중년의 사내가 자신의 아들 한명과 딸 둘을 데리고 강가로 휴가를 보내던 중,
딸인 케이트와 아들인 조시가 보트를 타다가 전복 사고를 겪게 된다.
다행이도 아버지인 맥은 그 둘을 무사히 구하게 되지만, 맥이 둘을 구하는 사이에
막내인 '미시'가 행방불명 되게 된다.
휴가도 잊은 채, 맥, 케이트, 조시는 미시를 찾지만, 찾을 수 없게 되고
경찰의 조사에 따라 납치범에게 잡히게 된것을 깨닫게 된다.
남치범을 찾아 증거를 쫓던중, 오두막에 범인이 있다는것을 알고
경찰이 오두막으로 범인을 검거하러 들어가지만
남은것은 미시의 드레스와 흘러내린 선혈뿐이었다.
이로 인해서 맥은 하나님과의 사이가 멀어지게 되게 된다.
그러던중 어느날 자신의 집으로 '파파'(맥의 아내가 하나님을 부를때 쓰는말)라는 이름으로
편지가 도착하고,
그 편지 내용에는 오두막에서 만나자는 하나님의 약속이 쓰여져 있다.
맥은 이 것이 범인의 장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면서 혹시나 정말 하나님이 보낸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으로 혼자서 오두막으로 가게 된다. (이때 자신의 친구인 '윌리'가 차를 빌려 주게된다. 이 글을 쓴 작가이다.)
오두막에 도착한 맥은 자신의 딸의 선혈 자국을 보며 다시 아픈 기억을 떠올리다가
지쳐서 집으로 다시 출발하려고 하는데, 뒤를 돌아보니 오두막이 다른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그 오두막으로 다시 들어간 맥은 그 안에는 하나님(여자 형상), 예수, 사라유 셋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서 맥은 이 셋으로 인해서 마음의 치유가 되고,
그들을 만난지 삼일째 날에는 딸의 시체가 파뭍힌 장소를 하나님이 알려주신다.
맥은 감사하다는 말을 하나님께 하고는 그 살인자를 용서하게 딘다.
그리고 맥은 다시 눈을 뜨게 되는데, 자신이 잠시 잠들어있다는것을 알게 되었고
이 것에 대해서 자신의 가족들에게 말해주기 위해
차를 타고 집에 가던중 사고를 당하게 된다.
몸이 어느정도 완케된 후에 맥은 이 때 있었던 일을 친구인 윌리에게 말을 해준다.
윌리는 맥이 하는 말이 약물투여로 인한 정신적인 환각이 아닐까 생각하지만,
그를 믿고 이야기를 끝까지 듣게 된다.
그리고 맥이 병세가 호전되자, 맥은 하나님이 알려주신 자신의 딸의 미시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경찰의 조사를 요구하게 되고, 경찰은 미시의 시체를 발견하게 되며 그것을 증거로
살인마를 체포하게 된다.
자 여기까지가 줄거리이다.
맺는 말을 읽어보자.
내가 들은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이 모든것이 맥이 회상한 대로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교통사고와 모르핀 때문에 그의 정신이 약간 이상해진 결과인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요즈음 맥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생산적인 삶을 살고 있으며, 자신의 이야기가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고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굳게 확신하고 있다...중략
이 글을 쓸 당시 맥은 꼬마숙녀 살인마의 재판에서 증언 중이었다. 그는 범인을 만나고 싶어했지만 아직 허락을 받지 못한 상태다. 그는 판결이 내려지고 한참 후에라도 그를 꼭 다시 만나겠다고 마음먹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실을 같지 않은가?
이 정도 읽고 다면 교회를 다니는 교인들은 더욱 믿음이 단단해질 것이며, 확신이 들것이다.
그리고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은 정말 엄청나구나라고 생각이 들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다. 비록 꿈이었지만, 자신의 딸의 시체의 위치를 알 수 있지 않았는가?
본래 내가 생각한 이 책의 평점은 이렇지 않았다.
하지만 몇페이지를 넘기자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맺음말 다음으로
책을 더 넘기면 몇페이지로 된 추천의 말이 있고.
또 몇페이지를 더 넘기면 옮긴이의 말이있고.-_-
더 넘기면 '오두막의 뒷 이야기'가 있다.
자. 다음을 읽어보자.
나는 내 아이들이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고 그것을 통해 아빠가 그토록 사랑하는 하나님과 아빠에 대해 이해해주기를 바랐다. 윌리(나)가 맥 대신 이야기를 대필해준다는 기발한 아이디어까지 떠올랐다. 내 첫번째 책에 오두막. 매켄지 앨런 필립스 저, 윌리엄 폴 영 공저라고 쓰게 될것이다. 나는 아이들이 나의 기발한 아이디어를 보고 재미있어 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물론 맥은 실제 인물이 아니다. 내 아이들은 맥이 나와 비슷하고 낸은 킴과 많이 닮았으며 미시와 케이트등 다른 인물들도 우리 가족이나 친구와 닮았다고 여겼고.....중략
이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을까? 이 이야기는 내가 만들어낸 픽션이다...
그렇다.
이 책의 모든 이야기는 허구다.
뒷편에 이러한 설명이 있으니, 독자들은 이 책이 허구라고 생각할까?
대부분의 독자들은 왠만하면 책 뒷쪽까지 읽지 않는다.
내 말이 거짓말 같은가?
그러면 인터넷 책 판매싸이트에서 리플을 보아라.
가관이다.
허허허. 웃음만 나오는구나.
이 책은 미국에서 600만부나 팔렸다고 한다.
작가라고 하는 윌리엄이라는 사기꾼은 초기에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하더라.
그래서 잔머리를 썼나보다.
뭐. 처음부터 이 내용은 허구요. 라고 명시하고 글을 썼으면
누가 이 책을 재미있다고 생각하겠는가?
아무튼, 이 책은 쓰레기다.
개인적으로 신의 이름으로 사기를 치는 놈들은
제발 없어졌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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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믿는 종교인들은 교리를 앞세우며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라고 말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그런 종교인들은 타 종교인들 혹은 무종교인들에게 배타적인 행동을 취하곤 한다. 왜 그럴까? 왜 하느님의 뜻을 잘 안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서로 사랑하며 조화롭게 지내지는 못하고 오히려 그들이 앞장서서 타 종교인들이나 무종교인들을 배척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절대 자신을 믿지 않는 이들을 배척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그리고 자신 이외에 다른 종교를 믿지 말라고 말씀하신 적도 없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종교지도자들은 타 종교를 무시하고 배척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 인양 선전하고 신도들에게 강요한다. 이건 결코 하느님의 뜻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다. 자신을 믿든 안 믿든 어차피 다 하느님의 창조물인데 하느님이 그렇게 배제하라고 하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있는가 이 말이다. 한편 기독교 혹은 천주교에서는 조상숭배를 하지 말라고 하는데 이 또한 하느님의 뜻을 왜곡시키는 행위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나 자신을 있게 한 조상도 하느님의 창조물이다.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그 정점엔 하느님이 계신다. 다시 말해 조상을 숭배하는 것이 인간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숭배하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은 조상을 숭배하면 하느님을 덜 숭배할까봐 걱정이 돼서 그런지 몰라도 조상숭배를 금지한다. 잠깐만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이 이치를 왜 종교지도자들만 모르는 것인지 난 도통 이해할 수 없다. 종교지도자들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만 하지 않았어도 더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는 종교를 불신하거나 도외시하진 않았을 것이다. 타 종교를 배척하거나 배제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더 많은 이들이 창조주 하느님을 믿고 따랐을 것이다. 종교전쟁이나 일으키고 종교 때문에 서로 분쟁을 일으키는 것은 결코 하느님의 뜻이 아님을 종교지도자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진정한 하느님의 뜻이 무언인지를 제대로 말해주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지인인 맥(매켄지)이 겪은 일을 토대로 하느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책의 핵심은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하느님에 대한 고정관념이 실은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데 있다. 하느님이 백인 남자가 아닐 수 있다 라든가, 하느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강요하지 않는다든가, 하느님이 자신 이외에는 다른 존재를 믿지 말라고 말한 적이 없다든가 하는 것을 이 책에선 다루고 있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가 실은 하느님의 뜻을 왜곡되게 전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총 18개의 파트로 구성이 되어 있다. 지금부터 난 내가 주목한 것들 위주로 그 내용을 하나씩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 번째로 내가 주목한 것은 ‘주인공 매켄지가 딸 미시를 잃은 슬픔으로 하느님을 원망’하고 있는 부분이다. 여기서 매켄지는 ‘거대한 슬픔’이 서려 있는 오두막에서 하느님에게 “내가 당신을 필요로 할 때 한 번도 옆에 계시지 않았죠.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도, 미시를 잃었을 때도요. 지금도 없군요. 정말 대단하신 ‘파파’입니다!”라고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다.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나도 20대 초반에 실패로 힘들었을 때 하느님의 도움을 간절히 바랐지만 하느님은 도움은커녕 오히려 거듭 실패를 하도록 내버려두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 난 공공연히 종교를 비난했고 하느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종교의 문제점인 배타성까지 문제 삼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따로 종교를 믿지는 않지만 하느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부인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내가 사는 것이 너무 힘들고 괴로워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자살하려고 했을 때 항상 개방되어 있었던 옥상 문이 그 날만 잠겨 있어서 죽지 않았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 옥상은 아주 넓은 공간이었고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어서 맑은 날엔 빨래 널기에도 좋아 늘 그렇게 열려 있었다. 그걸 알고 있었던 난 심각하게 자살을 고민하다 마침내 결심이 굳어져 행동으로 옮기려고 했는데 문이 잠겨 있는 바람에 포기하고 말았다.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몰라도 난 그때 문득 하느님이 나를 아끼시고 내가 죽기를 바라지 않아서 그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비록 고통스럽고 괴롭지만 이 순간만 버티고 이겨내면 더 나은 미래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자살을 포기한 그 순간 들었기에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돕는 방식인가 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이런 일을 겪은 후부터 난 완전히 달라졌다. 한없이 나약하기만 했던 난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가 되었고 힘든 일도 잘 버텼다. 그리고 그 덕분에 대학생활을 알차게 보낼 수 있었고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두 번째로 내가 주목한 것은 ‘종교에 관한 예수님의 생각’을 전한 부분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매켄지에게 “나는 제도를 창조하지 않았어요. 그건 하나님 흉내를 내고 싶어 하는 자들의 소관이죠. 나는 종교를 좋아하지 않아요.”라는 말씀을 하신다.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해주셨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결코 종교를 강요하지도 계율을 강요하지도 않으신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방침이 마치 하느님의 말씀인양 떠들고 그걸 신도들에게 강요한다. 하느님이 뭐가 아쉬워서 창조물들에게 자신을 믿으라고 강요하겠는가! 뭐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분인데 왜 인간들의 사랑을 목말라 하겠는가 이 말이다. 십일조 같은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천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결코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교회나 성당을 으리으리하게 지으면 하느님이 좋아하실 것이란 착각도 버려야 한다. 원하는 것은 뭐든 가질 수 있고 뭐든 할 수 있는 분이 고작 건물 하나 번지르르 하게 지어놨다고 손뼉치고 좋아하실 리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세 번째로 내가 주목한 것은 ‘매켄지가 왜 예수님은 자신을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다. 여기서 매켄지는 “내 생각엔, 어 ,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대체 왜 나를 사랑하는 건가요? 나는 아무것도 드릴 게 없는데요?”라는 질문을 한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당신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줄 것이 없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더할 것도, 앗아갈 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 무척 자유로울 거예요…….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줄어들겠죠.”라고 답변하신다. 이 말은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부모가 자식에게 자신을 낳아준 것에 대해 보상을 바라지 않는 것처럼 하느님도 창조물인 우리에게 무언가를 바라지 않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게 진정한 하느님의 뜻이 아닐까 생각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하느님은 부족한 것이 없으시다. 그러니 바랄 것도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몇몇 종교지도자들은 하느님이 자신의 창조물인 인간에게 많은 것을 바라고 있는 것처럼 설교한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제일 하느님의 뜻을 잘 전달해야 하는 분들이 자신들의 부를 더 늘리고자 왜곡된 사실을 마치 하느님의 말씀인양 전달해 하느님의 자식들을 혹세무민하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이런 몇몇 종교 지도자들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실천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잘 전달하고 있는 분들까지 도매급으로 매도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신성한 일을 하시는 분들이 이제 더 이상 부정한 일들로 하느님 이름에 먹칠하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종교는 거래하는 장사가 아니다. 십일조를 받았다고 그에 대한 대가로 천국행 티켓을 주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이다. 하느님의 본연의 뜻을 왜곡하고 하느님의 자식들을 배제하는 행위는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한다. 하느님이 창조물인 우리들에게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겠다면 꼭 이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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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t worry. Be happy!'라는 팝송을 후렴만 알고 지내다가 얼마 전 전체 가사를 본 일이 있다. 거기에는 '우리는 문제를 가지고 있는데, 그 문제만 보고 있으면 문제를 double로 만들 뿐'이라는 가사가 있었다. 세상에는 참 많은 사람이 있고, 이 노래는 조금은 오래된 노래인데도 사람사는 것은 다 똑같나보다. '많은 사람들이 문제(상처) 속에서 살고 있구나!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 미국 사람들도 힘들단 말이지~'란 생각이 들었다. 여기 맥은 특히 더 아픈 상처를 지니고 있다. 맥이 가진 상처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아직도 책을 읽을 때, 처음에는 깊이 빠지지 못하고 헤매는 경향이 있다. 이 책 역시 주인공을 이해하고 그에게 일어나는 사건을 이해하고 빠져드는 데에 시간이 좀 걸렸지만, 나에게도 사랑스런 딸이 셋 있기 때문일까? 미시에게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나면서부터 나는 정신이 번쩍 들며 책 속으로 완전히 빠져들었다. 미시를 찾기 위한 맥의 발걸음마다 눈물이 있는 것 같았고, 그날 아침부터 일어난 모든 일을 돌이켜 보면서 '만약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만약 내가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하면서 안타까워 하는 맥을 보는 것이 가슴 아팠다. '악몽을 꾸는 횟수가 점차 줄어들고 웃음과 기쁨이 순간 순간 돌아왔어도 죄책감은 여전했다.'라고 말하는데 그 부분에서 왜 그리 눈물이 나던지...... 그런 맥에게 주말에 '오두막'에서 만나자는 쪽지가 온다. 맥은 그 쪽지를 때문에 자신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준 오두막으로 간다. 그런데 그 곳에 누가 있었는가? 놀랍게도 거기엔 하나님이 하나님 우리의 기대와 상상을 초월하는 깜짝 놀랄 모습을 하고 맥을 기다리고 있었다. 맥에게 파파(성부)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간달프처럼 턱수염을 휘날리는 거구의 백인 할아버지로 나타났다면 당신의 종교적인 고정관념이 더욱 강화되었겠죠. 하지만 이번 주말은 당신의 고정관념을 강화하기 위한 시간이 아니랍니다. "
맥이 놀란 것처럼 나도 하나님의 외모 때문에 깜짝 놀랐지만, 그 후로 파파가, 또 예수가,또 사라유(성령)가 맥을 차례차례 만나면서 맥과 대화하는 부분에서 그들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들은 강제로 맥의 상처를 치유하지 않았고, 또 맥의 상처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한 분씩 맥과 데이트하는 방식으로 깊이 있는 대화를 통해 맥을 만지는 모습은 내가 경험한 하나님의 모습과도 같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에게 있던 상처를 떠올려보았다. 어릴 적 우리 가족은 사업을 이유로 인천으로 이사왔지만, 안타깝게도 사업은 실패했고 엄마는 너무 많은 고생을 하며 우리 다섯 남매를 기르셨다. 일일이 나열할 수는 없지만, 나는 엄마가 고생하는 원인이 아버지의 무능력에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아버지는 엄격하며 자상한 면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를 점점 더 미워하며 자랐다. 그러다 대학교 2학년 때 기독교 동아리 MT에서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직면했고,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그 날 많은 이들에게 기도를 받고 내 마음 속에 아버지를 미워하는 마음은 놀랍게도 싹 사라졌다. 그 때 함께 한, 간사님이 내 등을 만져주실 때 나는 평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또 한 번의 경험이 있다. 아이 둘을 키우면서 가사일에 지치고, 나의 나다움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며 살아갈 때 '영아부 부모 세미나'에서 여자 목사님께 기도를 받은 일이 있다. 다른 엄마들이 기도를 받기 위해 줄을 서 있었고, 나는 내 아이들을 챙기느라 다른 쪽에 앉아 있었는데 목사님께서 갑자기 내게로 오시더니 기도를 해 주시는 게 아닌가. 잠시 후 목사님은 내 귀에 '딸아 내가 다 안다. 다른 사람들이 너에게 별 것 아닌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너를 귀하게 지었다. 다 괜찮다. 너는 특별하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괜찮다'라는 세 글자가 지닌 놀라운 힘! 나는 그 세 글자에 울고 또 행복해졌다. 맥을 특별히 사랑하시는 그 분 때문에 맥은 데이트 하는 동안 천천히 그러나 조금씩 치유된다. 그러나, 이 소설의 놀라운 점은 맥이 고통에서 해방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통에서 해방된 맥은 자신에게 상처준 그를 용서하는 사람이 된다. 우리는 자신의 넓은 아량만으로 남을 용서하기에 부족하다. 이런 놀라운 용서가 우리들 삶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또 맥은 딸 케이트의 상처를 알아주고 치유해준다. 맥이 케이트의 상처를 알아주는 부분은 정말 감동적이었고, 나도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놀라운 소망이 생겼다. "아들아, 첫날과 두 번째 날에는 용서한다고 백 번을 선언해야 할지도 몰라. 셋째 날부터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고 언젠가는 완전히 용서했다고 깨닫게 될 거야. 또 그 사람의 온전함을 위해 기도드릴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나의 사랑으로 그의 삶에서 타락의 모든 흔적을 태울 수 있도록 나에게 인도하겠지. 지금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언젠가는 그 사람이 다른 처지에 놓이게 된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이 책 표지 앞, 뒤에 '소설'이라는 글자가 없었다면 나는 이 이야기를 모두 사실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인간처럼 눈 앞에 나타난다는 것이 좀 신비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과 너무 맞아 떨어지는 대화들~ 한 사람을 치유하는 따뜻한 대화와 사랑에 매료되었기에 사실로 받아들일 뻔했다. 이런 놀라운 이야기를 저자는 단지 자신의 아이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썼다는 것이 또 나를 놀라게 했다. 처음에 책 제목을 볼 때는 작고 허름한 오두막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런데 이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깔로 뒤덮인 그리고 가장 평안한 곳, 따뜻하고 포근한 곳이 그려진다. 얼마 전 영화'나니아연대기'를 보았는데 화려한 영상을 보여주던 이 영화에서 마지막에 아슬란이 사는 세계(천국)는 그 입구만 보여주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곳의 따뜻함과 아름다움은 어떻게 표현되었을까 기대하고 있다가 그 곳을 기대하게 하는 것이 작가의 감독의 뜻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실 3D영화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곳이 천국일 것이다. 보이지 않은 것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소설의 매력이 아닐까. '오두막'을 읽다 보면 사라유의 그 부드러운 몸짓과 편안한 웃음, 그리고 오두막 주변의 멋진 풍경들을 마음껏 상상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곳을 사랑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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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일상 속에서도 항상 내 자신보다는 타고난 운명을 탓했다. 어디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는 오랜 물음에 아우성치며 건배하고 있는 나에게, 항상 옆에서 웃으며 나에게 힘이되어주는 친구녀석이 푸른 빛이 감도는 한 권의 책을 선물해 주었다. 표지에는 <오두막>이라는 제목과 아주 한적해 보이는 눈내리는 날의 오두막 사진이 보였고 그 오두막을 봄기운이 느껴지는 따스한 빛이 내려앉고 있었다.
한 권의 책이 내게 준 선물은 단순한 재미와 감동, 지식이 아닌 그 모든 것을 포용한 나의 오랜 물음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오두막이란 내가 만든 작은 공간. 20살 이후 난 차근 차근 그 집을 그 누구도 아닌 내 스스로 짓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받은 실망과 상처들.. 감당하기 힘든, 아니 너무나 부정하고 싶은 일들이 나를 가두고 가두며 오랜 시간을 내 안에 갇히게 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 하늘에 대해 한강에 대해 물었던 찾았던 무엇.
오두막은 맥과 하나님의 대화를 통해 내게 마음으로 대답해 주고 있다. 작은 오두막 안에 내가 나를 가뒀지만, 이젠 이 안에서 진정한 '나'를 찾고
오랜 시간동안 걱정해주며 슬픔을 나눴던 친구 유리에게 이젠 오두막으로 감사의 마음을 대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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