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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책읽기가 잘 되지 않는다. 아무래도 상당 시간을 텔레비젼에 집중하거나 인터넷 기사 검색만 하기 때문이다. 벌써 7일... 생존의 가능성이 희박해진다. 그래도 부디 많은 사람들, 특히 어린 학생들이 살아서 부모품에 안기기를...
오랜 시간에 걸쳐 강수돌 교수의 팔꿈치 사회를 읽었다. 아무래도 집중을 하며 읽어야 하는데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책 읽기를 비롯한 모든 상황에 마음의 상태가 중요함을 다시금 깨닫는다.
팔꿈치 사회?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부제가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이다. 책에 설명이 나와 있지만 팔꿈치와 경쟁의 묘한 관계 파악이 핵심이라고 말하는 제목과 부제다.
인문학 책을 읽다 보면 그것이 다루는 분야가 철학이든 교육이든 역사든 모든 문제의 시작과 끝은 바로 인간이다. 너무나 뻔하고 익숙하지만 변하지 않는 가치이자 본질이리라. 이 책 역시 우리 사회를 경쟁 사회로 보고 논지를 전개하지만 결국 인간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자본이 그 몸집을 불리기 위해 만들어 가는 사회 경제적 시스템, 경쟁 중심의 조직 구조도 문제지만 그 시스템에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적응하고 동조하는 사람이 문제라는 것이 이 책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본구조를 근원적으로 타파하고 새로운 구조를 창출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며 그래야 비로소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책을 읽으며 눈에 걸렸던 개념이나 용어 중심으로 내용을 정리해 본다.
먼저 골드소프 등이 연구한 노동에 대한 태도 부분이 눈에 띈다. 그들은 성취지향성, 연대적 지향성, 도구적 지향성으로 노동에 대한 태도를 구분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각각 노동자들의 상층부 상승 의지, 노동자들의 정서적, 감정적 유대감, 생활수준 향상의 수단으로 노동을 대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특히 셋째 태도, 생계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 현실세계(자본)의 압박을 스스로에게 강제하는 현상을 '정서적 프롤레타리아화'라고 칭한다. 일에 대한 지향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일이 우리에 대한 일정한 지향성을 강제하는 상황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노동을 신성시하고, 나아가 고통스런 현실적 삶의 도피처로 삼는 것, 이것이 일중독 시대에 대다수가 내면화해버린 노동관이라는 지적. 집보다 직장이 심리적으로 편하다면 진정으로 그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은 어디일까?라는 의문을 갖게하는 문제의식이다. 그러면서 정신이 피폐해버린 우리 사회의 만연된 일중독을 고발하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다.
책의 제목인 팔꿈치 사회, 1982년 독일에서 올해의 단어로 뽑힌 말이라 한다. 옆사람을 팔꿈치로 치며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치열한 경쟁사회를 가리키는 말이다.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가 치열한 경쟁을 자극하고 조직화함으로써 우리는 경쟁을 내면화하고 더 높은 사다리를 오르기 위해 강자와의 동일시도 내면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탈경쟁이 자아내는 두려움을 정면으로 꿰뚫고 연대의 실천을 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경쟁의 내면화가 초래하는 자기소외를 넘어 관계적 존재로 다시 서는 것이 소통이며, 문제 상황의 돌파를 위해 힘을 합쳐 해결의 주체로 함께 당당히 나서는 것이 연대이며 이의 실천을 위해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또한 경쟁은 필연이 아니라 자본의 필요로 만들어지는 것. 어릴 때부터 부단히 학습되어온 경쟁은 무조건 필요하다는 것과 경쟁을 하면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이 무시무시한 논리가 내면화된 데는 자본의 억압과 교묘한 지배가 결정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경쟁사회에서 영원한 1등은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진리다. 끝없는 경쟁은 결국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파괴하며 진정한 인간이 없는 사회를 만들고 만다. 오늘의 승리자가 내일의 패배자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무수히 난립했고 세계 경제, 우리 경제를 호령하던 기업들의 몰락을 수없이 보지 않았던가? 누군가를 누르고 가져가는 승리, 그것은 패자의 희생을 담보로 한다. 그리고 그 승리는 일시적일 뿐이다. 이런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이 경쟁을 무너뜨려야 한다. 바로 인간 및 자연의 근원적 생명력과 자본의 파괴성 사이의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그리하여 경쟁을 넘어선 공동체적 개인으로 서야 하는 것이다.
다음은 교육에 대한 내용이다. 뼈아픈 지적이고 우리 교육의 현실을 냉정한 시각으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열가지는 의미심장하다. 그 열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공부의 궁극적 목적이 행복한 삶이란 것을 일관되게 가르치지 않는다. 2. 대학이란 그 자체로 공부의 끝이 아니라 비로소 큰 공부를 시작하는 곳이라는 점을 가르치지 않는다. 3.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가 따지고보면 결국은 상층부로 진입하여 기득권을 많이 차지하려는 것이라는 삶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4. 학교와 부모가 바라는 인재, 영재가 삶의 주체가 아니라 누군가 써먹기 좋은 자원으로 보는 잘못된 철학에 기초해 있음을 가르치지 않는다. 5.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는 구체적 방법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는다. 6. 학생들이 나날이 자라는 과정에 있는 하나의 인격체임을 가르치지 않는다. 7. 시험문제가 참된 삶에 별로 필요도 없는 허황된 것들이 대부분이란 사실을 가르치지 않는다. 8. 입시경쟁이 노동력 경쟁으로, 노동력 경쟁은 상품경쟁, 생존경쟁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가르치지 않는다. 9.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타인에 대해 친절하고 우애와 환대의 정신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치지 않는다. 10. 사회질서가 사다리 질서가 아니라 원탁형 질서로 바뀌어야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가르치지 않는다. 저자는 꿈의 발견, 실력증진, 사회 헌신, 이 세 가지 내용을 갖고 아이들과 함께 행복하게 인생 여행을 하는 것이 건강한 교육이요 배움이라고 역설한다. 그리고 우리의 현실이란 적응해야 하는 현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시켜야 하는 현실도 있음을 웅변한다. 결국 남을 짓밟고 올라서는 생계의 길을 넘어 꿈을 발견하고 꿈을 실현하여 실력 증진, 사회 헌신을 하는 아이를 위해서는 학교와 부모, 나아가 사회의 의식과 구조 자체가 변해야 한다. 그것이 팔꿈치 사회를 극복하고 모두가 웃을 수 있는 사회의 첫걸음이자 궁극적 목표일 것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해서 눈에 띄는 용어는 기업의 5D전략이다. 부정(deny), 지연(delay),지배(dominate), 왜곡(distort), 기만(decieve)가 그것이다. 특히 지배전략은 부정도 지연도 못할 상황일 때 상황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거나 사실 관계를 왜곡하여 본질적 문제를 외면하고 보상 문제로 치환한다는 내용이나 각종 수치를 조작하여 시민사회를 기만한다는 내용이 와닿는다. 바로 지금 이 사회에서 늘상 보고 그냥 넘어가는 일들이 기업의 교묘한 전략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침묵을 지키는 대다수 사회구성원에게 다시금 경고를 주는 내용이다. 그리고 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5D전략이 먹히지 않는 상황이 오면 부정부패전술과 감투씌우기, 우호적 협력 전술로서 시민사회의 저항을 무력화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구조조정의 개념적 차이들. 첫째, 세계자본이 요구하는 개방적이고 자유주의적 구조로 바꾸는 것. 둘째, 노동집약적, 저부가가치형 경제구조를 자본집약적, 고부가가치형의 경제구조로 전환하는 것 셋째, 경쟁력이 있는 분야는 사릴고 경쟁력 없는 분야는 정리하는 재벌 중심의 구조조정. 넷째, 재벌 위주의 구조를 종소기업 위주로 바꾸자는 것. 다섯째, 사람의 사회적 필요와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것드을 살리고 그렇지 않은 것은 과감히 잘라내는 것. 그 기준은 인간다운 삶. 어떤 구조조정이 바람직한가는 뻔하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경쟁과 분열이 아닌 연대와 협력, 오만과 남용이 아닌 자연에 대한 겸손과 외경의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덫에 걸린 우리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업과 국가가 주도하는 인간성 소외의 시스템에 의해 상처받은 사람드이 두려움을 깨고 공감과 소통, 성찰과 연대를 통해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것과 풀뿌리 민주주의의 기운을 지속시켜 안전화 사회경제적 시스템의 변화로 이어지도록 대중운동의 조직적 역량과 인프라를 튼실하게 구축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책의 마지막 두 장은 앙드레 고르와 이반 일리치의 삶에서 배우는 아름다운 삶과 사랑 그리고 마무리에 대해 서술하고 부모의 바람과 자신의 뜻대로 인생을 개척하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글이다. 부모도 멋지고 그 멋진 부모 밑의 아들도 멋진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내 아이도 이처럼 자신의 주관을 가지고 스스로의 인생을 개척하는 멋진 아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더 크게 가지게 만든 글이다.
경쟁이 없는 자본주의 사회를 상상할 수 있을까? 너무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고 그것을 의식하든 못하든 우리 안에 너무나 깊숙이 침투해있다. 그러기에 너무나 당연하게 남보다 앞에 서거나 남보다 위에 서기를 희망하고 강요하는 현실 속에 우리는 서 있다. 이헌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답은 어디에 있는가? 역시 인간이다. 바로 인간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다소 추상적으로 보이는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해답을 이 책은 제시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탈경쟁을 선언하는 것은 일탈 혹은 소외 혹은 패배로 직결된다는 것도 이미 내면화되어 있기에... 그만큼 자본주의의 지배구조는 견고하다. 그러나 언제까지 앞만 보고 달려가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의식을 지닌 개인이 조금씩 늘어난다면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희망은 바로 나 자신부터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실천... 실천... 이 쉬운 단어가 너무나 어려운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그 실천 앞에 '개인적'이라는 말이 넣어지는 순간만큼 외롭고 비참한 상황은 또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연대와 소통이 필요한 것인데 이 역시 만만치 않다. 멀리 찾을 것이 아닌데. 바로 내 가족 내 주변의 사람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익숙하지 않아서, 시도조차 하지 않아서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 문제는 문제다. 다시금 나를 일깨우고 주변을 일깨우는 작은 시도, 작은 손길이 필요하다. 지금의 나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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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아주 가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사람답게, 추하지 않게, 개나 돼지와 다르게 사는 것일까, 생각해 보곤 한다. 물론 그렇다고 개와 돼지를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또 그렇다고 우리가 개, 돼지와 같이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표현상의 문제로 항상 개와 돼지에겐 미안하게 생각한다. 저자는 내가 무척 존경하는 분이다. 아주 예전, 인터뷰를 위해 만난 적도 있다. 당시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멍청한 머리로 인해 기억이 나질 않지만, 적어도 그때의 느낌은 남아있다. 여느 그렇고 그런, 한심한 교수와는 다른 분이라는 점. 강수돌 교수는 삶으로, 행동으로, 자신의 글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매우 힘이 센 분이다. 그가 책을 펴낼 때마다 가능하면 챙겨두고 읽으려 노력한다. 그렇다고 전부 다 읽지는 못했지만, 그의 글은 간결하고, 거짓이 없으며, 무엇보다 이해하기 쉽기에, 나에겐 고마운 글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책, 그런 글, 사실 찾기 그리 쉽지 않다. ‘팔꿈치 사회’는 독일에서 맨 처음 사용된 표현이라 한다. 팔꿈치로 옆 사람을 누르고 앞으로 나가야만 생존할 수 있는,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경쟁사회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당연히 지금 우리의 모습은 자타가 공인하는 팔꿈치 사회다. 아예 그 팔꿈치에 날카로운 창이나 칼을 덧붙인 모습이 아닐까 싶을 정도니까. 우리는 경쟁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며 살아간다. 태어나자마자, 사물을 인식하고 아주 초보적이나마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있을 때부터 치열한 레이스에 돌입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아이들은 무한경쟁의 도가니에 빨려 들어가 제일 행복하고 아름다워야 할 젊음의 시절을 고통과 좌절, 분노의 시간으로 보낸다. 도대체 언제 주어질지도 모르는, 그리고 사실 그 가능성이 점점 더 희박해져가고 있는, ‘개인의 안정’을 위해, 젊음을 빼앗긴다. 나이가 들어서도 달라질 것은 없다. 또 다시 경쟁, 또 경쟁. 그러다 낙오되면, 철저히 밑바닥으로 떨어져, 다시 일어서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게 바로 지금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연대와 공감보다는, 이기주의와 온갖 속임수가 우대 받고 칭송 받는 시대. 사기꾼의 시대, 협잡의 시대, 불의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밑바탕에는 경쟁이라는 룰이 자리 잡고 있다. 강수돌 교수는 사실, 경쟁이라는 단어조차 협동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한다. 경쟁(Competition)이란 말의 어원을 보면, 라틴어로 ‘함께 추구하는 것’이란 뜻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함께 추구하는 것, 그것은 결코 우리가 지금 보고 듣고 직접 행동하고 있는 경쟁과는 전혀 다른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도대체 왜 우리는 본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잔인하고 무의미하고 결국 아무도 승자가 될 수 없는 경쟁에 인생 전체를 갖다 바치며, 기계의 부속처럼 살아가고 있을까. 그것에 대한 정답은 명확하다. 자신의 몸집을 끝없이 불리기 위해 자본이 만들어낸 시스템에 자의반 타의반 끌려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이 경쟁에서 승자와 패자는 별 의미가 없다.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고, 버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강 교수는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경쟁의 과정이나 결과는 결국 궁극적으로 인간이 없는 사회를 만든다고 경고한다. 인간이 없는 사회, 즉 우리 모두가 사라진 사회에서, 과연 승자는 누구인가. 극소수의 기득권의 배를 불려주기 위해, 나머지 대다수의 사람들이 소모품으로 버려지는 모습. 이것이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의 경쟁이다.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연대의 본능, 협동의 본능을 느낄 수 있다. 원래 우리 인간은 서로 도우며 연대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경쟁이라는 비정상적 시스템 속에서 인간이 살아온 것은 인류 역사 속에서 고작 몇 백 년이 채 되지 않는다. 때문에 경쟁은 결코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어느 사이엔가, 이미 우리에게 내면화 되어 있는 ‘경쟁’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과연 이것이 불멸의 존재인지, 아니면 우리들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그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본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연대의 힘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 말하고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미미한 존재는 물론, 전 세계 모든 국가들에서 이미 경제적 성장의 한계는 뚜렷하다. 애초 무한성장이란 것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누군가 경제적 이익을 얻으면, 당연히 누군가는 손해를 보기 마련이다. 손해를 보는 대상이, 피해를 입는 대상이 저개발 국가인지, 아니면 자연 그 자체, 우리 삶의 터전인 지구인지, 그것만 다를 뿐이다. 잘난 경제학자들이 떠드는 것 중 그나마 유효한 것 하나는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것, 그것일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어마어마한 전염병으로 이미 수 십 년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이들이 생명을 잃었다. 그 대신 이익을 얻은 것은 그들에 비해 극소수에 불과한 몇몇 이익집단, 기업가 그리고 자본의 주인들일 뿐이다. IMF 이후 대한민국 사회가 송두리째 바뀌고, 공동체가 무너지고, 세월호와 같은 끔찍한 범죄가 여전히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이유, 바로 그 이유에도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라는 치명적인 병균이 자리 잡고 있다. 무책임이 당연한 사회, 몰상식, 몰염치한 사회에서 애초 세월호의 진상을 밝히라는 호소는 허무한 바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세월호 비극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이들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권력을 누리며, 오히려 유가족들을 탄압하고 모욕하고 있지 않은가. 이 모든 참혹한 현실 속에는 무한경쟁, 경쟁사회라는 비정상적 시스템이 근원적으로 깔려 있다. 이를 깨부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쩌면 영원히 세월호를 바다 속에서 꺼내지 못할 지도 모른다. 저자는 말한다. 더 이상 피라미드형의 사다리 질서가 아닌, 모두가 둘러앉아 오순도순 이야기 나누며 밥을 먹는 ‘원탁형 질서’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그래야 우리가 살 수 있다고 말이다. 서북청년단 재건을 외치는, 전혀 청년으로 보이지 않는 집단들의 광기와 무지를 보며, 이러한 기형적 뒤틀림의 근원 속에 과연 무엇이 존재하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나만 살면 된다는 이기심과, 그것이 변태적으로 진화하여 지금의 경쟁 논리가 만들어진 것은 아닌지, 거기에 자본이라는 악마가 다시 붙고, 추악한 욕망이 붙고, 권력이 사적으로 이용하고… 체념하고 싶은 세상이다. 배우 김부선 씨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 행사와 투쟁에 대한 정부와 언론의 어이없는 행태를 보며, ‘대한민국, 졌다 졌어’라고 한탄했다. 나도 GG를 누르고 싶다. 이미 나라임을, 공동체임을 포기한 모습이니까. 하지만 아직은 누를 수 없다. 이 지긋지긋하고 애틋한 희망을 놓을 수는 없다. 여전히 난 모두가 둘러앉아 함께 밥을 나눠 먹는 세상을 꿈꾸기 때문이다. 그런 세상에서 밥 한 번 먹고 싶기 때문이다. 좋은 책, 함께 나눠야 할 책이다. 세상도 어서 그랬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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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꿈치 사회/강수돌 팔꿈치로 옆사람을 치며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치열할 경쟁사회... 한때 나의 좌우명처럼 강하게 지녔던 생각은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이 행복하길~ 이었다. 누군가 그게 진심이냐고 물었을때 진심이었다. 물론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그러한 생각들을 잊고 지내온것 같다. 많은 생각들이 스친다. 경쟁 자체가 싫고, 상생이 아닌 탐욕스런 경쟁과, 남을 짓밟는 경쟁이 싫어 빠져나온 내가 이 경쟁사회에서 실패했다는 느낌도 없지 않았었다. 헌데 이 책을 읽으며 잠시나마 경쟁사회 속에서 일과 삶의 균형을 잃고 살았던 것, 행복하게 살자고 일에 맹신해야 했던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경쟁만이 살길인 것 같은 현대 사회에서 삶의 본질을 느끼게 해 주는 책 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