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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적, 문화적 선을 넘나드는 여성 지역 연구자들의 스토리
"지리적, 문화적 선을 넘나드는 여성 지역 연구자들의 스토리" 내용보기
지리교사로서 나는 세계의 여러 국가, 지역에 대해서 다룰 일이 타 교과보다 많다. 지리교과서에 나와 있는 국가와 지역의 통상적인 모습을 제시하면서, "세계는 이러하다"는 식으로 학생들에게 언급하곤 했다. 종종 학생들이 "정말 그래요?"나 "지금도 그런 모습 그대로일까요?"와 같은 궁금증이나 해당 이야기에 대한 추가 질문을 했을 때에는, 내가 가 보거나 책에서 본 이야기가 아
"지리적, 문화적 선을 넘나드는 여성 지역 연구자들의 스토리" 내용보기


  지리교사로서 나는 세계의 여러 국가, 지역에 대해서 다룰 일이 타 교과보다 많다. 지리교과서에 나와 있는 국가와 지역의 통상적인 모습을 제시하면서, "세계는 이러하다"는 식으로 학생들에게 언급하곤 했다. 종종 학생들이 "정말 그래요?"나 "지금도 그런 모습 그대로일까요?"와 같은 궁금증이나 해당 이야기에 대한 추가 질문을 했을 때에는, 내가 가 보거나 책에서 본 이야기가 아니고서아 말문이 막혔었다. 나 역시도 실제로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과 감정, 그리고 변화하는 사람들과 사회상 등이 궁금하면서도, '교과서에 나온 이야기들이 다 맞겠거니' 하면서 궁금증을 멈추곤 했다. 종종 "정보화 사회인데 굳이 꼭 현지에 가봐야 아나?"는 오만한 생각으로, 인터넷에서 검색한 몇몇 내용을 가지고 현지를 다 아는것처럼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물론 마음 한 켠에는 "그곳에 대해 나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또한 어느 누군가가 여러 지역에 대한 최신의, 그리고 역동적인 이야기들을 들려 주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이 책은 내가 기다리던 반가운 12인의 '누군가'들이 쓴 책이다. 저자들은 각자의 국가와 지역으로 '선을 넘어' 가서 수행한 지역 연구의 결과는 물론, 그 과정에서 겪은 생생한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저자들은 인류학, 지리학 등 제반 인문사회과학을 학문적 기반으로 하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학문적 기반, 지역 연구자 외에도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여성' 이라는 점이다. 여성 홀로 지역 연구라는 어려운 길을 자처하여, 우리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들을 연구한 것이다. 총 12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12인의 저자가 각각 한 장씩 맡아서 집필하였다.


* 저자들의 연구 지역은 세계 여러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데,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인근에 집중되어 있다. 흔히 쓰지 않는 도법으로 연구 지역을 도해한 것이 인상적이다. 



  12인의 저자들의 이야기는 크게 3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연구자'로서 선을 넘은 저자들의 연구 실천 스토리와 여러 뒷이야기이다. 저자들은 각자의 연구 현장에서 특정 연구 목적을 가지고 현장 및 사람들을 연구하였다. 저자들은 연구 목적에 맞는 이야기들을 듣기 위해 사람들과 관계를 맺었고, 이 과정에서 여러 에피소드가 많았다. 연구자로서의 원칙, 그리고 현지 사람들과 '라포'를 형성하면서 참여관찰을 하는 것 사이의 갈등이 그것이다. 때론 연구자로서 지켜야 할 '선을 넘는' 유혹에 빠지거나, 실제로 저자들은 이를 '감행'하기도 한다. 또한 현지 문화와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문화적, 심리적 '선을 넘어버린'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딛치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들은 오히려 이를 통해 연구 대상을 재설정하거나, 사람들의 삶에 대해 더욱 깊이있게 이해하는 계기로 승화시키는 모습이었다. 통상적으로 논문을 작성해서 학위를 받기 위한 과정은, 그저 연구 대상 장소에 가서, 대상과 거리를 두고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연구하는, 딱딱하고 건조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저자들의 연구 과정에서의 좌충우돌 에피소드를 읽다 보면, 통상적인 양적 연구에서 느끼기 힘든 '사람 냄새'가 나서 좋았다. 해외지역연구라는 것이 결국,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이 조금 더 용기와 열정을 가지고 연구자가 되어, 현장으로 가서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을 만나며 '연구자가 되어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자신만의 연구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진솔한 성장 스토리가 흥미롭고 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세계 이곳저곳에 퍼져 있는 필리핀 여성 이주노동자들은 이스라엘에서도 볼 수 있었다. 법과 제도의 경계를 넘나들며 '의외로'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확인하면서, 내 마음속에 은근히 존재하는 이주자에 대한 편견을 자극하였다.

* 홍콩의 과거 거주민 소송은 현재 홍콩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우리의 프레임이 홍콩에 동일하게 재현되지 않는다는 점을 새삼 느끼게 해 주는 부분이었다.

  그들과 관계를 쌓아가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했고, 신뢰를 얻기 위해 인터뷰를 서두르지 않고 모든 모임과 집회, 시위, 농성에 동참하고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자리에도 몇 시간씩 함께하는 노력이 필요했다. (...) 그렇게 '장기간 무작정 함께 지내기' 전략이 효과를 발휘한 사건이 있었다. 한 외국인 연구자가 이 사건을 연구하고 싶다며 민간단체로 연락해왔는데, 단체에서 그에게 집회에 오라고 하자 그가 "학자는 중립적이어야 하므로 나는 집회에서 관찰하되 그들과 거리를 두겠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당사자들은 분개하며 "우리가 전염병 환자아? 왜 우리랑 거리를 둬? 장정아처럼 맨날 우리랑 같이 있어야 우리가 얘길 해줄 거 아냐? 내일 만나기만 해봐라. 욕을 해줘야지"(...) 이 사건 덕에 나는 조사대상자들 사이에서 그와 비교되며 장점이 부각되었다. 즉 나는 '거리를 두려 하'거나 '학자인 체하지' 않고 기꺼이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어떤 거친 자리라도 함께하는 사람이었고, 그런 나의 '비효율적인' 조사방법은 그들에게 헌신성으로 여겨지게 되었다.(p.160-161)


  나의 안위를 위협한다고 생각해 경계하게 만들던 다른 사람들이 내는 소리는 떠나지 못한 사람이 나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 공간에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킴으로서 나를 안심시켜주고 있었다. 이처럼 타자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되고 나의 사람들이 타자가 되는 경험을 하면서, 비로소 나의 연구 질문을 수정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애당초 나는 '타자'를 연구한다고 생각하며 이곳에 왔지만, 나와 타자를 나누는 구분선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나의 질문은 그들이 나와 얼마나 다른가가 아니라, '왜 나는 그들을 다르다고 느낀 것인가', '왜 나는 그들이 나와 같지 않다고, 심지어 위험하다고 오해했던 것일까?'로 변화하게 되었다. 이처럼 '그들'을 향해 던졌던 물음표는 긴 시간을 돌아 다시 나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p.256)


  자신들에게 특별한 이익이 없음에도 내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나를 자신들의 삶에 포함시켜주는 현지민들에 대해 잘못 묘사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의 연구 및 존재 자체가 그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지 항상 고민했다. (...) 나의 이런 심적 갈등을 알았던 걸까? 현지조사 중 가끔 그들이 나의 옌볜 및 조선족, 그리고 한국에 대한 충성심을 시험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 이야기를 마친 미선이 나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한국 남자는 백 퍼센트 바람둥이 아니야?" (...) 그들이 나에게서 정말 듣고 싶었던 말은 한국이 성적으로 부도덕한 문화를 가졌다는 고백이 아니라, 오히려 옌볜 조선족에 대한 나의 생각과 평가였다고 여겨진다. 즉 옌볜 사람들은 한국 텔레비전에서 포장해서 보여주는 한국 사람들처럼 세련되고 부드럽고 부유하진 않지만, 일부 한국 남성들과는 달리 섹스관광을 하지 않는 의리있고 도덕적이고 진중한 사람들이라는 말을 내게서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p.328-329)


  이렇듯 조사과정에서 나 자신이 변했기 때문에 비혼돌봄자에게 중요한 현안이 돌봄의 생을 지속하는 것 그리고 일과 돌봄을 양립하는 것이라는 점에 생각이 미쳤고, 그래서 확신을 가지고 와키 씨에게 단체 설립을 권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연구자인 내가 연구대상자들에게 배우고 그 내용을 언어화해서 연구대상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다시 그 결과가 나에게 돌아오는 연쇄적인 상호작용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연구자는 매처럼 하늘에 떠서 연구대상을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지상의 되먹임 사슬에 포함되어 상호작용하는 존재인 것이다.(p.394-395)



  둘째, '여성' 연구자로서 저자들의 연구이다. 연구자의 성별이 얼마나 중요하겠느냐 싶냐만은, 이 책에서는 남성 / 여성 연구자의 구분은 단순히 성별 특성을 넘어서, 연구자의 정체성, 연구 과정 등과 결합되어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낸다. 사실 우리나라를 떠나서 낯선 나라에 가서 연구를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힘든 과정일텐데, 거기에 여성으로서 부가되는 수많은 불안, 위협을 무릅쓰고 연구를 수행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별로 생각하지 못했어서 아차 했던 부분인데, 기혼 여성에게 주어진 사회적 '과업'에 대한 책임감, 게다가 비혼 여성일지라도 현장에서의 여러 '구애'를 무릅쓰고 연구를 해야한다는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물론 '여성' 연구자라고 무조건 위험하거나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도 일종의 젠더 편견일 것이라면서, 이런 시선을 경계하면서 묵묵하게 연구를 수행하는 모습도 보였다. 또한 현장의 여러 여성 연구 대상들과 유기적으로 결합되는 저자의 모습을 보니, 오히려 젠더 특성이 메리트가 될 때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연구자가 남성이어서, 여성이어서 한쪽이 좋다, 안좋다를 결정한다기보다는, 결국 연구자가 자신의 주어진 조건에 맞게 연구 대상과 방법을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혼으로 타국에서 유학과 현지조사를 수행하면서 연구와 조사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었지만, 한국인 싱글 여성이기에 겪어야만 했던 압박과 스트레스도 존재했다. (...) 현지조사 기간 내내 부모님 대신 필리핀 이주자들로부터 걱정과 잔소리를 끊임없이 듣는 처지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한국으로의 이주 기회를 엿보던 이웃집 필리핀 남성 리처드가 틈만 나면 나와 동갑인 자신의 조카를 데려와 나와 이어주려고 노력했다. (...) 그는 조카와 나의 혼사를 도모하다가 실패하자, 결국에는 아내를 동반하고 나를 찾아와 자신과의 위장결혼을 제안하기까지 했다.(p.92)


  일상생활에서는 항상 중국 본토 여성, 그것도 불순한 목적으로 홍콩에 온 여성으로 여겨져 냉대를 받고 스트레스가 심했다. 나는 아침부터 밤까지 어떤 집회든 시위든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기에 허름하고 활동적인 복장으로 생활했다. 그러니 사무직으로 보이지 않는 젊은 동양 여성인 데다 광둥어를 할 줄 아는 나는 성매매 등을 위해 본토에서 온 젊은 여자로 오해받기 쉬웠다. 요즘은 홍콩에 중국 본토 출신 유학생이 많지만 당시엔 지금처럼 많지 않았기에, 젊은 본토 여성은 다음의 셋 중 하나로 여겨졌다. 성매매 여성, 홍콩 남성과 결혼한 이주민, 아니면 홍콩 남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는 여성. 셋 다 홍콩인들에겐 반감의 대상이었다. (p.153)


  이란 현지조사 기간 동안 미혼 여성에서 기혼 여성으로, 또 아이 어머니로의 변화는 조사 기간 동안 나로 하여금 연구자로서 전환점을 맞게 했다. 아이가 있는 엄마로서 이란 여성들과 마음속의 내밀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기혼자인 필자 앞에서 이란의 기혼, 미혼 여성들은 성적인 농담을 꺼냈고, 보수적인 사회에서 오히려 내국인에게는 말할 수 없는 자신들의 성생활, 남자친구와의 관계에 대해 보다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 '아가씨'에서 '기혼녀'로의 전환과 아이의 존재는 이란 사람들이 함께할 때 서먹한 감정을 녹일 수 있는 좋은 대화 주제였고, 서로의 결혼 생활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높이는 데 효과적이었다.(p.224)


  그런데 현지조사를 마친 후 여성 지역연구자들과 현지조사에 관한 후일담을 나눠보니 매번 그들이 경험한 성추행 에피소드가 등장하는 것이 아닌가? 연구지역에 상관없이, 한번쯤 성추행을 당하지 않은 여성 지역연구자가 거의 없었다. (...) 연구자의 접근을 신뢰를 형성하려는 시도로 받아들이지 않고 성적 유혹으로 왜곡해서 이해하는 행위는 그 남성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실 성불평등 사회에서 나타나는 구조적 문제다. 그리고 대부분의 여성 지역연구자들이 현지에서 겪게 되는 현실이다.(p.333)



  셋째, 여성 연구자인 저자들이 국경'선을 넘어' 연구 대상으로서 그곳(현장, 현지, 지역 등)을 바라보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이다. 저자들도 특정 해외의 그곳을 연구하기 전에는 기존에 배웠던, 통상적으로 여겨지는 지식 혹은 편견으로서 바라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리적 '선을 넘어' 현장에 가서 보고 듣고 느끼는 그곳의 모습은  예상과 달랐고, 여러 시행착오를 겪기도 한다. 이를 통해 자신의 연구 목적, 지역 규모, 질문거리 등을 재설정하고, 현장을 겸손한 태도로 바라보려 한다. 저자들은 해당 지역에 대한 '전문가'로 불리면서도 현장을 모두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현장이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자신의 관점 및 질문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다고 느끼는 모습이다. 이렇게 통상적으로 우리가 알고있거나 학교에서 배운 것과 다른 그곳의 다양성과 역동성이 흥미로웠고, 또한 저자들이 특정 현장과 상호작용하면서 해당 지역을 재구성하기도 하는 과정이 인상깊었다. 그리고 이러한 저자들의 '고생'이 밑바탕이 되어서, 우리는 비로소 여러 나라와 지역에 대한 편견이 깨지고 이해가 풍성해지는구나 하는 생각도 새삼 들었다. 


* 다른 책에서 접하기 힘든 베네수엘라 바리오에 사는 사람들의 깊이있는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상공회의소에서는 아세안경제공동체와 메콩 유역 개발이 치앙라이에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 소개하고 그에 대비해 사업가들이 전략적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교육하는 세미나를 자주 개최했다. 대부분이 국경지역 개발에 관련한 것, 국경교역의 절차에 대한 것, 주변 국가의 발전상을 공유하는 것 등 국경교육과 관련한 내용이었지만, 의외로 상공회의소에 속한 사람들 중 국경교역 사업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 치앙라이에서 소규모로 국경교역을 하는 사람들이 메콩 유역 개발이니 아세안경제공동체이니 하는 지역협력계획을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지 않거나 무지해서라기보다, 이러한 계획에 로컬 단위에서 이루어지는 소규모 교역 활동을 고려하는 정책은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p.30-31)


  중국 현지조사를 다니는 과정에서, 특히 남쪽 지방에서 만난 다양한 출신과 외모의 중국인들을 통해 나의 선입견은 완전히 깨졌다. 지금 나에게 중국은 다양성으로 설명할 수 밖에 없는 나라다. 그들의 외모, 말투, 식습관, 생활습관 등을 하나로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비록 강력한 국가체제가 구축하는 사회상이 있을지언정, 중국의 국가권력은 사회집단에 따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고, 국가의 통치영역 바깥에서 지내는 이들도 무수하다. (...) 그래서 중국이라는 나라를 알면 알수록, 중국을 '안다'고 말하기가 더더욱 어려워진다.(p.130)


  중국과 홍콩의 지형은 홍콩인들의 관념 속 지형과 달랐다. 현장에서 듣는 이런 수많은 이야기들은 나로 하여금 중국과 홍콩의 지형을 새롭게 바라보게 만들었다. 현장을 통해 나의 지식이 구성될 뿐 아니라, 나의 지식을 통해 현장이 구성되기도 한다. (...) 현장은 우리에게 실재로서 주어진 그 무엇으로 사고되기보다는 우리와의 조우를 통해 재구성되는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흔히들 생각하는 현장성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현장성은 중요하고 현지조사도 중요하다. 단 그 현장이 어떤 현장인지에 대한 질문은 계속되어야 한다. 현지조사가 문헌이나 이론에 없는 '생생한 현장성'을 찾아 멀리 떠나는 것이라는 단순한 낭만화는 문제시되어야 한다. (p.184-185)


  사실 처음 이란에서 현지조사를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사회 변화를 절실히 원하면서도 거리로 뛰쳐나가지 못하고 저항하지 못하는 이란의 젊은 세대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1년여의 현지조사를 경험한 이후, 사회적 현실에 불만이 있더라도 쉽게 저항할 수 없는 이란의 사회적 구조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란인 지인들은 나에게 '좋은 경험'을 했다면서, "우리가 이런 무서운 사회에 살고 있어. 너도 이제 우리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지?"라고 위로해주었다. (...)  귀국 후에도 현지조사의 기록들을 논문으로 옮겨도 될까 하는 불안감이 1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하지만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현지조사 당시 내가 체감한 공포심과 우울, 신뢰와 불신의 문제 등은 이란 사회를 관통하는 정동과 사회 심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p.220-221)


  최근 나는 전략을 좀 바꾸어 내 연구의 독자를 '동남아를 알고 싶어하는 한국인들'로 상정한 다양한 연구를 동시 진행 중이다. 박사논문 때와 같은 장기 체류는 이제 불가능하지만, 나는 여전히 현장으로서 필리핀 사회를, 더 넓게는 동남아 지역을 자주 방문하고 여전히 척박한 지역연구를 해보려 애쓰고 있다. (...) '설탕으로 본 필리핀'과 '공정무역'이라는 주제가 그러하다. 이 주제는 필리핀 민중을 힘겹게 하는 온갖 사회, 환경 문제들을 '고발'하는 연구가 아니라 그들이 주인공이 되어 스스로 지역사회를 바꿔나가는 구체적이고 '건강한 삶의 현장'에 관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나에게 좀 더 특별하다. 내가 노력한 만큼 이 현장을 알고 현장과 연대하려는 사람들의 수도 늘어나는 '사회적 효능감'도 느낄 수 있는 연구여서, 논문도 쓰고 보고서도 쓰고 단독 저서도 쓰며 이 현장의 사람들과 활동을 소개하려 다방면으로 노력 중이다.(p.443)



* 태풍, 지진과 같은 천재지변을 겪으면서도 현장에서의 연구 수행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저자들의 처절한 후기도 볼 수 있다. 



  12인의 저자가 각각 집필한 원고를 묶은 책이지만, 한 사람이 쓴 것처럼 책의 흐름이 유사하게 이어진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다음 지역은 어디이고, 또 어떤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질까?"라는 생각으로 페이지를 넘기고 계속 읽게 되는 책이었다. 저자들은 모두 현재 활동 중인 지역 연구자이고, 일회적인 지역 연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연구 주제를 보완하고 발전하고 있는 중이다. 앞으로 저자들의 지역 연구 결과 및 변화하는 지역의 스토리들이 기대가 되었다. 또한 새삼스럽게 저자들과 같은 지역 연구자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가 편안하게 세계 여러 지역의 이야기들을 접할 때, 그 이야기의 이면에서 지리적, 심리적'선을 넘는' 여러 연구자들이 있었음을 문득 깨달았다. 이 책은 세계 여러 지역과 사람들의 삶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흥미롭게 읽을 것이다. 또한 지역 연구의 실제에 관심이 많은 이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반드시 지역 연구가 아니더라도 질적 연구로서 학위논문을 작성하려고 하는 이들에게도 도움되는 부분이 많을 책이다. 



YES마니아 : 골드 r*****0 2020.02.24. 신고 공감 7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