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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버리고 숲을 품기 (시정신과 유희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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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읽는 하루 ― 서울을 버리고 숲을 품기     《詩精神과 遊戱精神》  이오덕  창작과비평사  1977.4.25.       《시정신과 유희정신》(이오덕, 창작과비평사, 1977)이 어렵다고 얘기하는 분이 제법 많습니다. 1977년에 처음 나온 책은 “詩精神과 遊戱精神”처럼 한자로 적었기에, 이 한자를 못 읽느라 선뜻 손이 안 갔다는 분도 많습니다. 그러나 막상 책을 펴면 ‘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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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읽는 하루

― 서울을 버리고 숲을 품기

 

 

《詩精神과 遊戱精神》

 이오덕

 창작과비평사

 1977.4.25.

 

 

  《시정신과 유희정신》(이오덕, 창작과비평사, 1977)이 어렵다고 얘기하는 분이 제법 많습니다. 1977년에 처음 나온 책은 “詩精神과 遊戱精神”처럼 한자로 적었기에, 이 한자를 못 읽느라 선뜻 손이 안 갔다는 분도 많습니다. 그러나 막상 책을 펴면 ‘한자를 드러낸 대목’은 없다시피 합니다.

 

  이오덕 님은 뒷날 《우리글 바로쓰기》를 펴냈지만, 전두환이 이오덕 님을 어린배움터에서 솎아내며 괴롭히던 때까지 글에 곧잘 한자를 썼습니다. 어린배움터에서 마지막까지 아이 곁에 있지 못 하고 떠나야 하고 나서, 열린배움터(대학교)에서 이태 동안 가르친 적이 있는데, 이무렵 우리나라 젊은이가 글을 너무 못 쓰고 말을 너무 모르는 줄 깨달았다지요. 우리 젊은이가 왜 이토록 말글을 모르는가 하는 뿌리를 파헤치면서 ‘우리말 우리글’부터 제대로 들려주고 배우지 않으면 이 나라가 통째로 썩고 뒤틀리고 흔들릴 수밖에 없겠다고 느꼈다고 합니다.

 

  1990년 앞뒤로 몹시 바쁘게 하루를 보내었고, 부르는 곳이 있으면 어디라도 이야기꽃을 피우려고 달려가다 보니, 어느새 여린 몸이 더 지치고 말아 끝내 드러눕다가 권정생 님보다 먼저 흙으로 돌아간 이오덕 님입니다. 그동안 써낸 책 가운데 《시정신과 유희정신》만큼은 쉬운 우리말로 고쳐쓰고픈 마음이었지만, 옛글을 고쳐쓰기보다는 새글을 쓰는 일에 더 힘을 쏟느라 《시정신과 유희정신》은 1977년에 나온 판 그대로 남았습니다.

 

  총칼을 휘두르는 우두머리가 춤추던 1977년 무렵, 이 나라 앞길을 헤아리면서 꿈씨앗처럼 남긴 두 마디인 ‘시정신’하고 ‘유희정신’을 오늘 우리 어린이한테 들려줄 쉬운말로 옮기자면 ‘노래얼’하고 ‘놀이넋’입니다. “시정신과 유희정신 → 노래얼이랑 놀이넋”입니다. 한자말 ‘정신’을 앞뒤에서 다르게 풀었는데, 노래를 부르고 나누는 숨결은 ‘얼’을 차리면서 스스로 ‘알아’가는 길입니다. 놀이를 하고 노느는 숨빛은 ‘넋’을 깨우면서 ‘너나’없이 하나로 가는 살림입니다.

 

  우리말 ‘노래·놀이’는 말밑이 같습니다. ‘노’는 ‘높다·노을’하고도 맞물리고, ‘노을’을 줄인 ‘놀’은 ‘너울’을 가리키기도 하고, ‘노느다·나누다’로도 잇닿아요. ‘놀·너울’이란 ‘널리’ 뻗는 길이자, ‘너머’로 가는 다릿길입니다. 노래하고 놀이를 하기에 ‘넉넉’히 마음을 가꾸고, 누구하고나 ‘나눌’ 줄 아는 착하고 참한 숨소리로 퍼져요. 높이높이 오르는 노랫가락은 어느새 하늘에 닿아 파랗게 물드는 바람으로 번지고, 이 바람은 휘파람으로 감기고, 바다로 물결치고, 바닥(땅)으로 내려와서 마음밭(마음바탕)을 이룹니다.

 

  노래하고 놀 줄 알기에, 나비처럼 날개돋이를 하면서 홀가분하게 날아오르는 ‘나’를 만나요. 노래를 잊거나 빼앗긴다면 놀지 못 할 뿐 아니라, 날개가 꺾이고 ‘나’를 잃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어린이가 노래하고 놀지 못 하도록 틀어쥐거나 억누르거나 짓밟으면서 셈겨룸(시험)으로 내모는 오늘날 배움터란, 어린이를 죽이는 수렁입니다. 모든 어린이가 시골에서든 서울에서든 마음껏 노래하고 놀도록 울타리를 걷어내고서 하늘빛으로 어울리는 ‘우리다움’을 찾을 적에 비로소 홀가분(자유)히 나래를 펼 수 있어요.

 

  《시정신과 유희정신》을 보면, ‘구경(완상玩賞)’이란 무척 무시무시한 짓이라는 대목을 낱낱이 밝힙니다. 구경꾼 어른이 어린이를 꼭두각시로 내모는 짓이 ‘동심천사주의’이고, 이 동심천사주의는 ‘윤석중·박목월·유경환’이 이끌었는데, 어느새 ‘동심천사주의 윤석중·박목월·유경환’ 같은 이들이 어린글밭(아동문학계)을 집어삼켰습니다. ‘구경 아닌 삶짓기’를 글(시·동화)로 담아내어야 어른일 텐데, 막상 우리나라에는 어른스레 글을 여미는 손길이 얕았고, 하나같이 돈(상업주의)에 팔려 ‘구경(완상)’하는 겉치레만 쏟아내었다고 여길 만합니다.

 

  그나마 《시정신과 유희정신》이 처음 나온 1977년 무렵만 해도 아직 시골에서 살림을 짓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 뒤 쉰 해 가까이 흐르는 동안 시골은 아작났습니다. 이제 거의 모두 서울(도시)에서 살고, 서울에서도 잿집(아파트)에서 삽니다. 큰고장에서 골목집 살림을 잇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손바닥만 한 텃밭이나 마당을 누리면서 풀꽃나무를 흙에 묻고 돌보는 손길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어느 풀꽃나무도 꽃그릇을 안 반깁니다. 꽃그릇은 나쁘지 않되, 풀꽃나무한테는 사슬터(감옥)입니다. 그릇 크기를 넘게 자라거나 뻗을 수 없으니, 풀꽃나무로서는 그릇에 심기면 ‘갇혀’ 버리는 꼴입니다.

 

  우리는 언제쯤 모든 꽃그릇을 걷어치우고서 맨땅에 풀씨랑 꽃씨랑 나무씨를 심을 터전으로 가꾸려나요? 우리는 언제쯤 높다란 잿집을 걷어내고서 누구나 ‘마당·텃밭을 누릴 조촐한 집’을 보금자리로 삼으려나요? 우리는 언제쯤 어린이를 ‘배움터(학교)란 이름인 사슬터(감옥)’에서 풀어놓을 수 있을까요?

 

  스스로 ‘서울에 갇혀’서 ‘풀꽃나무를 꽃그릇에 가두’는 손길이기에, ‘어린이를 울타리(학교·학원)에 가두어’ 놓고도 ‘가르침(교육)’을 시킨다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맙니다. 둘레를 봐요. 시골에도 서울에도 빈터랑 풀밭이 사라졌습니다. 어린이가 뛰놀거나 쉬거나 깃들 데가 사라졌습니다. 서울에서는 쇳덩이(자동차)가 모든 곳을 차지하고, 시골에서는 죽음물(농약)하고 비닐이 몽땅 뒤덮습니다.

 

  갇힌 어린이가 할 수 있는 ‘짓’이라고는 고작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는 손전화 빼고 무엇이 있을까요? 뛰놀 수도 쉴 수도 없도록 갑갑한 ‘꽃그릇 수렁(보기좋은 감옥)’에 갇힌 어린이를 알아보지 못 하는 눈길이니, 예나 이제나 숱한 글(동시·동화)은 ‘동심천사주의’에서 못 헤어나옵니다. 이뿐 아니라 ‘사실적 표현’을 한다는 글조차 ‘학교·학원생활 울타리’에서 못 벗어납니다.

 

  2020년을 넘어선 뒤로는 ‘이웃빛(동물권)’을 담는 글이 하나둘 나오고 배움책(교과서)에도 실린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숲에서 안 살고, 시골을 떠났고, 서울 높다란 잿집에서 쇳덩이를 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웃빛 글(동물권 문학)’을 쓸 수 있을까요? 흙을 밟지도 만지지도 않으면서, 풀꽃나무가 흙에 뿌리를 내리면서 해바람비를 마시는 터전에서 함께 살아가지도 않으면서, 참말 어떻게 ‘이웃숨결을 헤아리는 글’을 쓸 수 있을까요? 모두 겉발린 허울이지 않나요?

 

  오늘날처럼 온통 잿더미에 먼지투성이로 매캐한 판에서는 ‘그냥그냥 녹색·초록·그린·친환경·자연·생태’를 들먹이는 글이 아닌, ‘수수하게 숲을 품고 스스로 푸르게 하루를 노래하는’ 글을 쓰고 읽고 나눌 노릇입니다. 이제는 글을 쓰려면 서울(도시)을 떠나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어른’이란 이름을 밝히고 싶다면 모든 허울을 떨치고서 쇳덩이(자동차)를 버리고 잿집(아파트)에서 나와야 합니다. 맨몸으로 해바람을 쐬고, 맨손으로 빗물을 받고, 맨발로 풀밭에 서서 우리를 둘러싼 이 별빛을 오롯이 누리고 살림을 짓는 사랑을 일굴 노릇입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마당·텃밭이 있는 조촐한 보금자리’를 어린이랑 오순도순 열 해이고 스무 해이고 서른 해이고 가꾼 뒤에 붓을 들어야지요. ‘농사·농업’이 아닌 ‘여름지이·열매짓기·흙살림·들살이’를 해야지요. 돈바라기에 갇히는 ‘농사·농업’이 아닌 ‘손수 살림을 짓는 숨결로 손수 들숲바다를 맞아들이는 작은길’을 갈 적에라야 붓을 쥐어 글을 쓸 만한 사람인 어른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이오덕 님이 한숨을 쉬면서 나무란 ‘훔침글(표절작가)’ 이야기라든지 ‘겉치레글(위선·허례허식·가식적 문장)’은 우리 스스로 ‘어른 아닌 늙은이’인 몸으로 돈·이름·힘에 얽매였기에 불거집니다. 철이 들면서 어질고 참하고 착하면서 고운 사람이기에 ‘어른’입니다. 나이만 먹고서 나이를 앞세워 그저 윽박지르며 높낮이(위계질서)를 가르기에 ‘늙은이’입니다. 이른바 ‘선생·원로·기성세대’는 모조리 늙은이입니다. 우리가 어린이 곁에 서려면 ‘선생·원로·기성세대’ 같은 고리타분한 허물을 싹 털어내고서 수수하게 ‘어른’ 하나를 돌아볼 줄 아는 눈빛일 노릇입니다.

 

  《시정신과 유희정신》을 그냥 읽으면 그냥 못 알아봅니다. 《시정신과 유희정신》을 읽고 싶다면, 먼저 서울·쇳덩이·잿집을 버려야 할 뿐 아니라, 종잇조각(졸업장·자격증)도 버려야 하고, 이름값(선생·원로·기성세대)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 책을 쥐고서 들숲바다 가운데 한 곳으로 가기를 바랍니다. 멧골에 올라도 즐겁습니다. 풀벌레하고 새가 노래하는 곳에서 책을 펼칠 일입니다. 바다가 물결치고 바람이 일렁이는 곳에서 빗물수다를 들으면서 책을 넘길 일입니다.

 

  집안일을 하던 손으로 읽을 《시정신과 유희정신》입니다. 비질에 걸레질을 하던 손으로, 천기저귀를 갈고 빨래하던 손으로, 아기를 안고 젖을 물리던 손으로, 아이한테 자장자장 노래를 들려주는 눈망울로, 밤마다 별빛을 보고 낮마다 햇빛을 보는 눈짓으로,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를 달리는 몸으로, 껍데기를 버리고서 이웃이랑 어깨동무하는 매무새로, 천천히 읽고 새기면서 스스로 노래얼이랑 놀이넋을 밝힐 책 한 자락입니다. 같이 노래해요. 함께 놀아요. 나란히 이야기를 펴고, 새롭게 오늘을 써 봐요.

 

ㅅㄴㄹ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국이나 영국 같은 부유한 나라 사람들보다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큰 집을 지어 살려고 하는가? (9쪽)

 

아동문학이 아동을 위한 문학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아동의 건전한 성장과 그들의 미래가 밝고 빛나는 세계가 되기를 염원하는 작가의 철학을 기반으로 창조되어야 한다. 따라서 작가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사회적 현실을 양심으로 파악하고 아동의 생활을 정직한 눈으로 보고 거기서 진실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24쪽)

 

그런 ‘인간적’인 것을 찾아내는 노력, 그런 인간적인 것이 짓밟혀 시들어지는 것을 애통히 여기고 그것을 지키고 키워가는 작업, 이것이 교육이고 문학임을 확인하자. (66쪽)

 

아동이란 존재를 사회와 역사 속에 살아가고 있는 생명체, 주인공으로서 작가의 온 인생관과 문학관으로 이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작품에 좀더 절실하고 진지한 주제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 (104쪽)

 

동심주의 동요가 가져온 해독은 아이들이 참된 시의 세계로 찾아가는 것을 완고하게 방해하고 있는 일뿐만 아니다. 그것은 또 아이들의 정신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113쪽)

 

우리가 창조하는 아동문학, 그것은 미국의 것도 일본의 것도 중국의 것도 그밖의 어떤 나라의 것도 될 수 없는 바로 우리 한국의 것이다. 한국이란 땅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주는 문학이요, 한국이란 특수한 풍토에서 피어난 문학이다. (136쪽)

 

아동문학의 간판을 내걸어 놓고는 아동을 멸시하고 아동과 상관없는 글을 쓰는 작가들도 문제지만, 얕은 손재주를 팔고 있는 상업주의의 유행도 문제고, 위선과 호언장담을 유일한 문단 처세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 사람도 있어, 이들은 항시 정직한 작가의 발언을 봉쇄하기에 광분하고 이 땅의 아동과 민족의 앞날을 염원하는 양심적 작가들을 해치려고 하고 있다. (163쪽)

 

그토록 아이들을 사회와 절연된 세계에서 아무 생각 없이 귀엽게만 바라보는 것으로 작품을 쓸 수 있는 시인이 있었던가. (178쪽)

 

아이들은 철저하게 생활인인 것이고, 생활 속에서만 시를 느끼고 시를 생활하고 있는 것이 아동이다. (224쪽)

 

결국 동시는 시인의 세계와 아동의 세계가 하나로 일치되는 자리에서 비로소 참되게 씌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226쪽)

 

신현득의 동시는 사물을 달콤하고 아름답게만 보이려고 하는 순응주의로 하여 그 뜻한 바 교화적 의도조차 달성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물 미화의 작기 방법은 근본적으로 그가 동심주의적 아동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때문이라고 본다. (252쪽)

 

글짓기 교육을 예술작품 창작교육으로 오해하고 있다. (334쪽)

 

우리 자신을 찾아 가지는 일이야말로 민족의 역사적 과제요 아동문학의 나아갈 길이다. (351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이달의 사락 h*******e 2023.02.2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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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는 대중문화가 모든 걸 뒤덮고 있다. 그리고 그 대중은 세계를 아우른다. 커피와 와인, POP 음악 등이 한국의 문화로도 자리 잡고 있다. 사상적으로도 마찬가지다. 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 등에서 시작된 철학이 한국에 뿌리를 내려 열매를 맺은 뒤 다시 그 열매로부터 피어난 새싹들이 울창한 숲을 이룬지 오래다. ‘ㅇㅇ의 이론에 따르면으로 시작하는 담론에서 ㅇㅇ99.9%가 한국 외 학자들이다. 솔직히 100%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의 대중문화는 국가를 초월하는 개념이고 인간의 정신은 보편성이 있기에 굳이 거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지만, 이론과 개념만이 아니라 그것을 현상으로 구체화시킬 소재나 방법론의 영역에서까지도 외국의 것을 그대로 쫒아가기 급급하다는 점은 한번 고민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나라와 지역마다 인간이 환경에 적응한 모습이 다르고 바로 그 토착문화가 한 지역의 삶에 가장 적합하다고 할 때 철학과 실천도 마찬가지 일 것이기 때문이다.

 

학교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교육 현장에 약 10년간 있으면서 수많은 이론과 그 이론에 바탕을 둔 방법론을 접했다. 먼저 유행하던 철학을 수정 보완해서 세련되게 다듬은 다음 새롭게 등장하는 철학들도 있었고 문제점을 공격하며 전면적으로 대립각을 세우며 등장하는 철학들도 있었지만, 언제나 한 가지 공통된 점이 있었다. 바로 철학의 탄생과 성장과정이 외국에서 진행되었다는 점 하나와 해당 커리큘럼이 번역만 한 수준으로 거의 똑같이 들어온다는 점 하나이다. 물론 발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교육과정이 우리 학생들에게 적합하게 다듬어지는 연구가 진행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언제나 이상향은 오리지널이다. 교육과정의 토착화는 현실과의 타협인 것이다.

거창한 철학뿐만이 아니라 아이들과 연극을 하려고 하더라도, 온작품을 함께 읽으려고 하더라도, 시를 낭송하려고 하더라도, 그림을 그리려고 하더라도, 무용을 해 보려고 하더라도 이 같은 문제는 발생한다. 원조가 사용했던 효과가 검증된 재료는 보통 우리나라 것이 아니라 망설여지고, 우리나라 토종 재료를 쓰자니 효과가 검증이 안 되어 망설여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과감하게 오리지널을 그대로 수입하는 용기내기나 부작용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쳐내고 우리나라 토종 재료를 가져다 써보는 용기내기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나는 우리의 선택지가 이렇게 두 가지만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잘 검증된 우리나라 고유의 소재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도달하고 싶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이오덕선생님이 나에게 찾아오셨다. 아이들과 시낭송을 하기 위해 시를 찾을 때면 외국시는 번역의 과정에서 시의 리듬감이 사라지는 등 느낌이 완전히 달라져서 아쉬웠고 우리 작가들이 쓴 시는 어떤 것이 좋은지 몰라 고르기가 너무 어려웠는데 품격 있는 우리의 동시가 무엇인지 이오덕선생님께서 가야할 길을 밝혀 주셨다.

 

그런 가르침 한가운데에 시정신 유희정신, 어린이문학의 길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의 것을 온전히 알아볼 수 있는 눈이 한층 성숙해 질 것으로 기대가 된다.

 

책을 읽다가 무릎을 치게 된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책은 본래 우리 어린이문학이 나아갈 길을 밝히는 어린이문학 평론집인데 놀랍게도 어린이문학이 나아갈 길이라는 문구에서 어린이문학을 우리교육으로 치환하여 우리교육이 나아갈 길이라고 바꿔보아도 이오덕선생님의 날카로운 통찰이 교육영역에 그대로 유효하다라는 것이다. 아니 그 어떤 교육비평보다 더욱 적확하다.

 

오늘날 교육현실에 정말 딱 들어맞는 시정신과 유희정신에 대한 이오덕선생님의 통찰을 정리해 보겠다.

 

 

1. 어린이를 위해서, 혹은 어린이에게 읽히기 위해서 쓴 시란, 시인 자신이 반드시 어떤 성장 과정에 있는 아이의 심리 상태가 되어 쓴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어린애의 마음이 된다는 것은 엄밀히 따지자면 있을 수 없고, 그것은 아무런 뜻이 없으며 속임수가 되기 쉽다...... 동시인들이 아이들을 거짓 꾸며 보이는, 곧 어린애인척하는 것을 동시라 하여 온 것 같다.

 

▷▷▶ 학생을 위해서, 혹은 학생에게 배움을 불러일으키는 교육이란, 교사 자신이 반드시 어떤 배움 과정에 있는 학생의 심리 상태가 되어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학생의 마음이 된다는 것은 엄밀히 따지자면 있을 수 없고, 그것은 아무런 뜻이 없으며 속임수가 되기 쉽다...... 교사들이 학생들을 거짓 꾸며 보이는, 곧 학생인 척한 것을 배움이라 하여 온 것 같다.

 

교사들이 수업을 분석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도 쉽게 학생의 마음속에 들락날락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교사가 특정 철학과 그것을 실현할 방법론을 세련되게 제시하면 학생의 마음속에서는 의도한 변화 내지는 성장이 일어날 것이라 공언한다. 심지어 수업장면을 특정기법으로 분석하거나 수업 후 학생에 대한 짧은 인터뷰와 설문하기를 통해 아동의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 볼 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 또 학생이 원하는 것은 행복이라 말하며 교사가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놀이교육을 강조하고, 아동중심교육을 말하며 교육과정 설계 자체를 아이들의 손에 맡기기까지 한다. 학생중심 교육이라는 것이 교사가 학생의 마음으로 가르치거나 선택권을 보장한다는 명분으로 교사의 영역들도 학생들에 일부 내어주는 것처럼 단순한 개념은 아니지 않을까? 교사들이 기꺼이 동심주의에 사로잡힌 채로 교육을 이야기하다보니 요즘 교육의 담론들은 흡사 속임수처럼 느껴진다.

 

 

2. 동시는 어른인 시인 자신의 세계를 온몸으로 쓴 것이 그대로 어린이에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이러한 시가 되자면 어린이의 세계에 대한 시인의 깊은 관심과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은 물론이지만, 무엇보다도 시인으로서의 자각과 특질, 곧 높은 지성을 밑받침으로 한 시정신을 가져야 한다...... 자칫하면 모방과 정체 상태로 떨어지기 쉬운 형식성에 대해 끊임없는 자기 갱신과 탈피의 자세를 확보하는 일 또한 시인이 지녀야 할 특성이라 하겠다.

 

▷▷▶ 교육은 어른인 교사 자신의 세계를 온몸으로 내보이는 것이 그대로 학생들에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이러한 교육이 되자면 아동의 세계에 대한 교사의 깊은 관심과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은 물론이지만, 무엇보다도 교사로서의 자각과 특질, 곧 높은 지성을 밑받침으로 한 교육정신을 가져야 한다...... 자칫하면 모방과 정체 상태로 떨어지기 쉬운 형식성에 대해 끊임없는 자기 갱신과 탈피의 자세를 확보하는 일 또한 교사가 지녀야 할 특성이라 하겠다.

 

교사들을 대상으로 연수를 진행했던 한 교수님은 연수 말미에 반드시 똑같은 질문이 나온다고 한탄하며 이야기 하셨다. 한결같은 질문이란 바로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러면 교실에 적용할 방법은 무엇인가요?’라는 것이다. 처방전을 제시해 주는 것이 연수의 목적이 아니라 철학과 태도의 변화를 위한 강의였으며, 실천방법은 변화된 생각을 바탕으로 직접 찾아보라고 답을 해주면 연수가 시간낭비였다고 불쾌해 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이런 연수는 인기가 없다. 반면 교사들의 필요를 세밀하게 충족시켜주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같은 교사 출신 강사들이다. 인기 있는 강사는 실천사례를 간단히 소개한 뒤 실천방법들을 A부터 Z까지 세트화시켜서 제시해준다. 실천방법 소개가 친절하면 친절할수록 강사의 인기는 치솟는다. 책으로도 사례와 방법이 출판되어 나오게 되고 강사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원격연수촬영도 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교사들은 모방하기에 심각하게 묶여있다. 당연히 모방하기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좋은 것이다. 배움에 있어서 언제나 출발은 스승을 모방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때의 모방은 온전한 모방이여야 한다. 내 입맛에 맞는 것만 취사선택하는 것은 배움으로서의 모방이 아니다. 자신의 실천결과를 나눠주는 사람도 물건을 팔 듯 쉽게 고를 수 있게 포장하여 목록을 전달하고 있고, 받는 사람도 즉각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것만 쏙쏙 빼서 챙겨가는 것은 좋은 의미의 모방도 아닌 것이다. 슬픈 점은 마치 나는 아닌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사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이다.

 

또 한편으로는 변화에 대한 관성이 크다. 세트화 된 도구를 활용한 수업이 좋은 성과를 불러일으켜서 유행이 되면 형식성이 강화되어 그 틀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안 되는 것으로 굳어진다. 새로운 유행이 강력하게 불어오기 전까지 딱딱하게 굳은 틀이 모두를 짓누른다. 그리고 함께 짓눌리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과연 교사들에게 끊임없는 자기 갱신과 탈피의 자세를 확보하는 교육정신은 있는가? 개개인의 교사는 물론 훌륭하다. 그러나 훌륭한 개개인 말고 교사집단을 하나로 보았을 때 교사라는 공동체 속에는 교육정신이 살아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겠다. 정신이 문제가 있을리는 없다. 정신을 물질세계로 가지고 내려오는 과정이나 정신을 물질화 시키는 과정에서 뭔가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교사 공동체 속에 교육정신이 제대로 피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3. 거짓 꾸며 쓰는 동요 세계의 문제점은 어린이를 위해서 쓴 시인의 시라기보다 어린애들을 상대로 한 어른의 유희적인 취미물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른들의 자기만족을 위한, 어른 본위의 표현이란 것은 아무리 쉬운말로 썼다고 하더라도 어린이를 위한 문학이라고는 하기 어렵다...... 시는 맨 처음 어린이의 것이었다고 하는데, 이 말은 옳다. 그런데시가 어린이의 것이라고 함은 어린이가 온몸으로 세상을 보고 느끼는 경이심이 시가 된다는 것이지, 어린아이의 행동을 재미스런 장난감처럼 본 어른의 마음이 시가 된다는 말이 아니다.

 

▷▷▶ 잘 꾸며 쓰여진 교육과정의 문제점은 학생들을 위한 교사의 수업이라기보다 아이들을 상대로 한 교사의 유희적인 취미물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사들의 자기만족을 위한, 교사 본위의 표현이란 것은 아무리 교육적인 단어를 썼다고 하더라도 학생들을 위한 교육이라고는 하기 어렵다...... 배움은 맨 처음 학생들의 것이었다고 하는데, 이 말은 옳다. 그런데 배움이 학생의 것이라고 함은 학생이 온몸으로 세상을 보고 느끼는 경이심이 배움이 된다는 것이지, 학생들의 행동을 재미스런 장난감처럼 여기는 교사의 마음이 교육이 된다는 말이 아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100대 교육과정이라는 것이 있었다. 학교 교육과정 운영 결과를 보고서 형태로 잘 정리해서 응모하면 그 중 모범 사례로 100개의 우수학교가 선정되는 것이다. 나는 그 이유를 자세히 모르지만, 학교장의 입장에서는 전국 100대 교육과정 우수학교로 선정되는 것 자체가 교장 임기동안 이루고자 하는 '로망이요, 꿈이며, 영광'인 것이라고 한다. 배움은 학생들의 활동으로 열매 맺는 것이기에 학교 교육과정을 등수 매긴다는 발상은 모든 아이들의 개성과 교육환경이 다름을 무시한 채 학생을 하나의 균질적인 대상으로 여긴다는 것, 과정보다는 결과가 중요하는 것, 교육은 계획과 결과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만 나오기에 그 자체로도 교육에 미치는 해악이 엄청나다. 그런데 100대 교육과정 선정을 목표로 보고서가 쓰여지는 과정을 보면 더욱 심각하다. 온갖 전시성 행사와 실적에만 매달리고 조그만 것도 과장해서 거짓 꾸며 쓰는 것이다. 다행히 학교 단위의 거짓 교육과정은 2년 전쯤 사라졌다.

그러면, 좀 더 작은 단위의 교사 개인 차원의 교육과정은 어떨까? 나는 혁신의 바람이 전국 100대 교육과정 우수학교는 날려버렸지만, 교사 단위의 ㅇㅇ샘의 ㅇㅇ수업같은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거짓 꾸며 쓰는 교육과정에는 미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교사 한명 한명의 전문성이 강조되는 요즘 같은 시기에 피어나는 불안감 때문에 의지할 곳이 필요한 선생님들을 매료시키며 거짓 교육과정이 우후죽순처럼 넘쳐난다고까지 말하고 싶다. 그런 교육과정을 거짓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교사가 일부러 거짓을 의도했기 때문이 아니다. 수업이, 교육이 학생들을 위한 교사의 활동이 아니라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교사의 유희적인 취미물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학생이 있어야 할 자리에 교사의 이기심이 비집고 들어가 있으니까 교사공동체의 단단한 구성은 요원한 일이다. 자기 것을 뽐내기 바쁘고, 남을 깍아내리기 바쁘고, 서로 싸우는데 바쁜 것이다.

 

 

4. 잠자리가 바지랑대 끝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정말 아이들이 무섭지 않나하고 느낄 것인가? 여기에는 한국 동요 동시의 특유한 위시적인 면을 뚜렷이 느낄 수가 있다. 아이들은 결코 나뭇가지나 바지랑대 끝에 앉아 있는 잠자리나 새를 보고 무섭지 않나하고 염려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아이들의 세계를 안이하게 짐작한 어른의 잘못이다...... 이 동요를 읽은 그 어느 어린이가 그런 생각을 할 것인가? 별것 아닌 것을 가지고 무슨 신묘한 작품처럼 보이자니 이런 무리한 해결이 나오는 것이다. 시인 스스로 아무 감격도 하지 않는 사실을 가지고, 이런 것은 아마 아이들이 이렇겠지, 하고 일부러 아이들인 척 해 보이는 것이다. 시인이 아이들의 생활과 운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온몸으로 느끼고 생각한 것을 쓴 것이어야 할 터인데, 자신의 것도 아니고 아이들의 것일 수도 없는 것을 이렇게 쓰게 되는 곳에 아이들의 세계를 치졸한 공상으로 만들어 내는 동심주의가 있다.

 

▷▷▶ 단위 수업에서 보이는 단편적인 행위들 몇 가지의 통해 아이들을 판단할 수 있을까? 여기에는 교육세계 특유의 반교육적인 면을 뚜렷이 느낄 수가 있다. 교육이란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듯 즉각적으로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행동주의적 관점처럼 교육의 장면을 해석하는 것은 학생들의 세계를 안이하게 짐작한 교사의 잘못이다...... 이 수업을 받은 그 학생은 과연 교사들이 예상한 배움을 가졌을까? 당장은 알 수 없는 일이다. 큰 배움이 생겼을 수도 있고, 아무런 배움없이 사라져버린 시간이었을 수 있다. 아마 그저 지나가는 시간일 가능성이 더 클 수도 있다. 별것 아닌 것을 가지고 무슨 신묘한 수업처럼 보이자니 무리한 분석과 해석이 나오는 것이다. 교사 스스로 아무 감격도 하지 않는 수업을 가지고, 이런 것은 아마 학생들이 이렇겠지, 하고 일부러 학생들인 척 해 보이는 것이다. 교사가 학생들의 생활과 운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온몸으로 느끼고 생각한 것을 가르쳐야 할 터인데, 교사의 것도 아니고 학생들의 것일 수도 없는 것을 이렇게 가르치게 되는 곳에 학생들의 세계를 치졸한 공상으로 만들어 내는 아동중심주의가 있다.

 

교사들은 수업을 위해 발문연구를 한다. 배움의 세계로 아이들과 손잡고 나아가기 위해서 발문연구는 필수적이다. 여기까지는 좋지만 한발 더 나아가는 것이 문제다. 학생들의 예상 답변까지도 정해버리는 것이다. 실제 수업이 진행될 때 교사의 발문에 의해 나오는 실제 답변과 계획 단계에서의 예상 답변의 싱크로율이 높으면 높을수록 능력있는 교사로 인정받았던 것도 불과 얼마 전까지의 일이다. 예상 답변이 학생의 입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교사의 발문이 잘못된 것이라는 이야기로 논의가 이어지곤 했었는데 그 바탕에는 학생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하겠지, 생각해야지, 생각해야만 해 라는 확신이 있어 보였다. 학생들의 세계는 안이하게 설정해 두고, 자신의 연구를 마치 엄청 신묘한 것인양 포장하기에만 바쁘다보니 수업비평은 언제나 무리한 분석과 해석, 혹은 근거없는 비난만 가득했다. 그러다 보니 수업은 교사의 것도 아니고 학생의 것도 아니게 되었고, 학생들의 세계에 대하여 1차원적인 행복만 강조하는 방향으로 급격하고 몰려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학생들의 생활과 운명, 행복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온몸으로 느끼고 생각해야만 할텐데 너무 가볍게 툭툭 결론을 내려버린다.

 

 

5. 동심의 유희 세계는 그 주제의 빈약성과 제재의 한계성 때문에 우리 동시를 참된 시로서 높여 주지 못하고 갈수록 심하게 반시적인 수공품의 조작 경향으로 기울어졌다. 이런 동시인의 작품들은 안이함을 원하고 이기적인 삶의 태도를 익히고 있는 많은 어린이들에게 한갓 오락물을 주는 구실을 하여 크게 환영받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뤄진 신진 작가들의 작품 세계는 8.15이후 많은 짝짜꿍 동요의 아류를 낳게 되고, 모작은 물론이고 표절작·타작들이 신춘문예고 잡지 추천이고 단행본·시화집 따위에 이르기까지 예사로 횡행하고 행세하는 기이한 광경을 이루어 놓았다.

 

▷▷▶ 교육의 유희 세계는 그 주제의 빈약성과 제재의 한계성 때문에 교육을 참된 성장의 장으로 높여 주지 못하고 갈수록 심하게 반교육적인 복제품의 조작경향으로 기울어졌다. 이런 교사들의 수업은 안이함을 원하고 이기적인 삶의 태도를 익히고 있는 많은 학생들에게 한갓 오락물을 주는 구실을 하여 크게 환영받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진 많은 선생님들의 교육과정은 혁신학교바람을 타고 수많은 짝짜꿍 교육의 아류를 낳게 되고, 모작은 물론이고 표절작·타작들이 인터넷 홈페이지, 블로그, 서적에 이르기까지 예사로 횡행하고 행세하는 기이한 광경을 이루어 놓았다.

 

전국을 휩쓸고 있는 혁신학교 물결에 의한 혁신교육에 대해서 교사들 사이에서는 부정적인 시선도 많은 반면 학생들은 엄청난 지지를 보내고 있다. ‘즐거웠다.’, ‘행복했다.’는 아이들의 환호성이 혁신교육에 대한 발전적 논의를 더디게 한 채로 수많은 아류와 복제, 표절교육을 횡행하게 만든 건 아닐지 반성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6. 동시라는 것이 결코 어린애들의 치졸한 심리 속에 시인이 내려가서 그들의 마음을 간지럽히는 장난이 아니고, 시인의 온 정신을 투입하여서만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동시가 살아날 수 있는 길은 시인의 어린이 생활에 대한 넓은 이해와 접근, 유희적 제재에서 탈피하기, 동심이란 고정관념의 타파, 그리고 무엇보다도 높은 시정신의 획득에서만 기대할 수 있다.

 

▷▷▶ 교육이라는 것이 결코 학생들의 치졸한 심리 속에 교사가 내려가서 그들의 마음을 간지럽히는 장난이 아니고, 교사의 온 정신을 투입하여서만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 교육이 살아날 수 있는 길은 교사가 학생 삶에 대한 넓은 이해와 접근, 유희적 제재에서 탈피하기, 동심이란 고정관념의 타파, 그리고 무엇보다도 높은 교육정신의 획득에서만 기대할 수 있다.

 

동시를 교육으로 바꾼 말 그대로이다. 교사의 온 정신을 투입하여서 인간에 대한 넓은 이해와 접근을 하는 동시에 수업이 1차적 행복만 강조하는 제재에서 탈피하여야 하고, 너무 쉽게 아이의 마음이 될 수 있다는 착각을 버려야만 한다. 그랬을 때만이 높은 교육정신이 교사 공동체에 내려올 것이라 생각된다.

 

이오덕 선생님이 동시인들의 실명과 구체적 작품을 직접 언급하면서 굉장히 강하게 비평하고 있기에 동시라는 단어만 교육으로 치환해 본 교육비평도 듣기에 따라서는 굉장히 거북할 수도 있게 되어 버렸다. 이오덕 선생님은 비평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동시란 무엇인가부터 시작하여 기본 개념부터 친절하게 이야기해 나가고 있다. 그러면서 어린이문학이 나아갈 길을 선명하게 닦아나가신다. 신기하게도 동시를 교육이란 단어로 치환한 교육비평도 계속 이어갈 수 있기에 우리교육이 나아갈 길에 대한 단서도 느껴지는 듯하다. 교육의 길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은 주저하지 말고 이 책 시정신, 유희정신-어린이문학의 길을 읽으시길 추천한다. 그리고 그런 분들과 교사공동체 속에서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인연으로 연결되길 기도해 본다. 소중한 책이 나에게 찾아온 운명에 감사드리며 책에 대한 이야기를 마친다.

n******s 2020.03.06.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시정신 유희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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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교육을 해마다 하고 있지만 모든 아이들이 제 마음이 살아있는 글을 써내진 않는다. 일기 쓰기를 비롯한 글쓰기를 공부처럼 어른들에게 강요받은 적이 있던 아이들은 문장 하나 쓰기가 고역이다. 그런 아이들에게는 마음에 드는 동시 따라쓰기를 권한다. 글자수가 적은 동시만 선택할까 싶어 많은 이들에게 좋은 동시로 알려진 동시 소개도 한다. 해마다 여러 동시들을 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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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쓰기 교육을 해마다 하고 있지만 모든 아이들이 제 마음이 살아있는 글을 써내진 않는다. 일기 쓰기를 비롯한 글쓰기를 공부처럼 어른들에게 강요받은 적이 있던 아이들은 문장 하나 쓰기가 고역이다. 그런 아이들에게는 마음에 드는 동시 따라쓰기를 권한다. 글자수가 적은 동시만 선택할까 싶어 많은 이들에게 좋은 동시로 알려진 동시 소개도 한다. 해마다 여러 동시들을 읽게 되지만 지금 이 시점에 돌이켜보니 동시 읽기를 비판적으로 해본 적이 없다. 이오덕 선생님의 시정신 유희정신을 읽고 나니 당혹감이 밀려온다.

   아이들은 또래 아이들이 쓴 재치있고 귀여운 동시들을 읽고 크게 공감한다. 그런데 아이들 동시만 보여주기는 어쩐지 뭔가 부족한 느낌이 앞선다. 그래서 어른들은 작가들이 쓴 동시를 교과서처럼 여기고 동시란 이런 것이다라고 가르쳐 본다. 어른들이 쓰고, 어른들이 소개하는 그 동시들이 모두 진짜 동시인가? 그동안 이를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오덕 선생님은 어린이가 쓴 시가 어른이 쓰는 문학작품과 다르고 달라야 한다고 말한다.그리고 어른이 쓴 시로 일반시, 동요, 동시, 어린이가 쓴 시는 어린이시로 구별하고 다음 내용들을 당부한다. ‘모든 어린이가 자기 생활을 정직하게 글로 써서 개성을 펴 나갈 수 있도록 참된 생활 글쓰기 교육, 어린이 자신의 시를 쓸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어린이에게 소위 동시라 불리우는 어른들의 흉내인 말장난인 글을 쓰게 해서는 안된다. 어린이시와 어린이를 위해 쓰여진 어린이문학 작품인 동시는 구별되어야 한다. 어른인 동시 작가는 시와 어린이의 글쓰기 작품을 많이 읽고, 어린이 속에 살면서 어린이의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

   <시정신 유희정신은 동시인과 어린이들에게 글쓰기 교육을 하는 어른들에게 어른의 관념에 사로잡혀 저지르는 실수와 잘못을 돌아보게 한다. 어린이의 삶을 외면하고, 어린이를 속이고 희롱하는 글, 어린이가 해독할 수 없는 글을 만난 아이들이 문학에서 떠나게 된다면 여기에 어른들의 책임이 없다고 누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아이들에게 억지로 문학을 쥐어줘서는 안된다.

   이오덕 선생님이 1977년에 펴 낸 시정신과 유희정신> 평론집이 그동안의 어린이문학 발전에 분명 기여한 바가 클거라 확신한다. 30여년 가까이 흐른 2020년에 선생님의 글을 읽게 된 나 역시 앞으로 동시와 어린이시를 구별하고 어린이문학작품을 좀 더 깊게 바라본 뒤 아이들에게 소개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어린이 문학작품을 쓰는 작가와 그 글을 이용하는 교육자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문학을 통해 아이들을 만나는 길, 이 책도 길잡이 역을 톡톡히 할 것이다.

 

*책 뒷표지 글

어린이가 없는 어린이문학이 있을 수 없는데도 우리는 지금까지 어린이 문제를 한 번도 논의한 일이 없다. 우리가 쓰고 있는 동화와 시를 읽어 줄 아이들, 그 아이들은 과연 어떤 아이들인가?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살아가기를 권하고 있는가 

 

p.41

동심의 유희 세계는 그 주제의 빈약성과 제재의 한계성 때문에 우리 동시를 참된 시로서 높여 주지 못하고 갈수록 심하게 반시적인 수공품의 조작 경향으로 기울어졌다. 윤석중과 박목월의 유아적 세계는 김영일과 강소천에 와서 어린이 혹은 소년층까지 그 유희의 대상이 높아졌을 뿐, 생활의 표면만을 미화하고 어린것의 흉내를 내는 상태는 다름이 없었다. 이런 동시인의 작품들은 안이함을 원하고 이기적인 삶의 태도를 익히고 있는 많은 어린이들에게 한갓 오락물을 주는 구실을 하여 크게 환영받았다. 매스컴의 물결을 타고 전국의 도시와 농촌 아이들에게 침투되고 보급되었다. 비뚤어지고 추잡한 어른의 사회에서 거칠고 살벌하고 잔인한 습성에 젖어 있던 아이들은 이런 동시에서 경박한 웃음과 신기로운 말재주의 잔꾀를 공급받고 좋아한 것이다.

 

p.46-47

어린이문학 작가는 어린이를 그가 생산한 작품으로써 키워 가야 하는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여야 한다. 시로써 어린이를 키워 가자면 무엇보다 시가 되어 있어야 하고, 시가 되자면 아이들이 읽어서 가슴 깊이 파고드는 것이 있어야 한다.

감동이 없는 동시를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나온 많은 동요.동시들이 감동 대신에 가벼운 웃음과 손재주를 팔아 왔다. 동시인들은 아이들을 유치한 세계에서 꿈만 꾸고 놀이와 장난만 하고 있는 천사로 생각해 왔다. 그래서 아이들인 척하여 우스꽝스러운 흉내를 내고, 괴상한 말의 재치와 꾸밈으로 아이들의 관심을 끌고, 혹은 공연히 어렵게 써서 아이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고, 더러는 괴이한 느낌이나 생각을 억지로 만들어 보이기도 했다. 물론 극소소의 훌륭한 시인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들에게 보급되는 상품의 양이라는 면에서 볼 때 이러한 대세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던 것이다.

 

p.48-49

많은 작가들이 당분간 동시라는 말을 기피할 필요도 있을 것 같다. 동시를 쓴다는 생각을 버리고 시를 쓴다는 정신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아이들을 멀리서 바라보지 말고, 위에서 내려다보지 말고, 또는 하늘 위에 모셔 두지 말고, 자기와 같은 자리에서, 바로 옆에서 함께 손을 잡고 살아가는 인간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함이 유익할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계를 넓혀야 한다. 말장난, 심리의 장난, 골동품의 장난, 그 손장난을 그만두고, 더욱 크고 넓고 깊고 무겁고 굵직한 감동의 세계로, 생활의 세계로 나와야 한다. 안개만 마시고 꿈만 꾸는 그 천사도 아닌 유령의 세계에서 탈출해야 한다.

 

p.473

흔히 어린이문학은 동심의 문학이라고 하지만, 이 동심이란 것을 좀 깊이 추궁해 본 일이 우리에겐 없었다. 그저 막연히 아이들의 티 없이 맑은 마음정도로 만족해 왔다. 그러나 어린이 문학이 동심을 찾고 동심을 키우고 동심을 보여 주는 동심의 문학인 것이 사실이라면 순진무구한 세계라고만 간단히 말해 넘기는 것은 무책임한 짓이다. 동심의 정체를 꼭 어떤 형상으로 고정시켜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의 성격, 자세, 지향같은 것을 문학을 창조하는 작가의 세계에서 제 나름대로 체득해 놓아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m****9 2020.02.25.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