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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동 앨리스와 직장의 신 사이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드라마 <청담동 앨리스>(2012) 한세경. 명문여대 차석 졸업, 각종 공모전 입상, (비록 하우스푸어로 전락했지만)중간계급의 부모, 소위 엄친딸이자 학벌사회의 승리자 그러나 유학파의 문화자본을 가지지 못해 디자이너로서의 꿈 좌절. 열심히 살아도 ‘내려가는 사회’라 ‘하늘과 땅’의 격차를 좁힐 방법이 사실상 없음을 깨달음. “나도 그 노예 한 번 해볼 수 있을까 해서 버티는 거다” 드라마 <직장의 신>(2013) 정주리. 소위 지잡대 졸업, 평범한 토익 점수, 때로는 유능하지만 보통은 실수도 많은 3개월 계약직. 자존심도 없냐는 소리를 감내하며 언젠가 정규직이 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버리지 않음. 버티기만도 벅차기에 ‘내려가는 사회’의 ‘하늘과 땅’의 현실 인식을 할 겨를이 없음. <88만원 세대>에서 우석훈과 박권일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 조언한지 어언 6년, 그러나 2013년 20대는 여전히 바리케이트와 짱돌 대신 한세경처럼 애써 배금주의자가 되려하거나 정주리처럼 막연한 희망을 품은 채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다. 한세경처럼 위악을 부리지 못 하고 정주리보다는 여유가 있어 생각이 많은 이들은 스스로를 ‘루저’ 또는 ‘잉여인간’이라 자조한다. 왜 청년세대는 여전히 짱돌을 들지 못/안 하고 있을까? 덤1) 후면의 참고문헌을 보지 않더라도 “이건 XX월 XX일 00신문에 기고한 글을 참고했네.”라며 알아낼 수 변태적인 독자라면 한윤형의 글이 책 한 권이 DB화되었다는 것만으로 즐거울 것이다. 덤2) 무크지적 편집 덕분에 아주 빠르게 읽을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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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패러디한 제목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제목처럼, 이 시대 ‘청춘’의 이야기를 담담히, 가감 없이 그려내고 있다. 아니, 때로는 고발하고 있는 느낌도 받았다.
무엇보다도 감탄했던 것은 작가인 한윤형의 글쓰기다. 자신이 경험해 온 삶의 궤적들 속에서 청년들의 공통적인 문제를 발견해가고, 그 문제들을 통해 현 시대의 청년 키워드를 말하고 있다. 또, 풍부한 독서 편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자료들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객관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가히 과거의 ‘키보드 워리어’라 불릴 만하다.
책에게 초점을 맞추어 보자. 이 책이 좋았던 이유는 기존의 청년들을 위한 책과는 위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로 대변되는 청년 대상 책들은 너무 뻔했다. ‘아프지만 견디어야 한다, 청춘은 청춘 자체로 아름답다’는 류의 위로는 청년들이 순간적으로나마 현실을 이겨 낼 수 있는 각성제가 되었다. 하지만 깨어났을 때는 어떤가? 익히 잘 알고 있듯이 더 아파하고, 힘들어 한다. 계속 몰아치는 세상의 ‘바람’ 앞에서 자신의 존재는 바람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미약한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런 각성제류의 책이나 자기계발서들은 현실을 잠깐 잊게 해주지만, 그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
다시 훑어보지만, 이 책에는 그런 위로가 담겨 있지 않다. 꼰대의 “어떻게 살아라!”는 최소한의 지침도 없다. 오히려 냉혹하게 이 시대 청춘의 위치와 청춘이 견디어야 하고, 살아남아야 하는 사회의 차가운 온도를 보여 준다. 여기에 이 책이 갖는 따스한 장점이 살아난다. 청춘들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있어 꼭 필요한 ‘참고서’가 되는 것이다. 물론, 적합한 위로와 지침이 있으면 안성맞춤이겠지만, 없다 하더라도 괜찮다. 이 시대 청춘들은 각기 다른 상황 속에서 각기 다른 문제를 안고 살기 때문에 대처 방안과 실천 방안은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청춘들에게 획일적으로 “이렇게 살아라!”라고 충고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그냥 읽고 “내가 사는 세상이, 우리 청춘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이런 세상이구나. 이 시대 청춘의 모습이 이렇구나.”라고 자신이 인지하면 그만이다.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옷깃을 여미고, 세상에 뛰어들면 되는 것이다. 예전과는 다른 청춘의 모습으로.
한편,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눈이 심상치 않았다. 영화 <관상>에 이런 대사가 있다. “그 사람의 관상만 보았지 시대를 보지 못했네. 파도만 보고 바람은 보지 못했네. 파도를 만드는 건 바람이건만...” 이제 서른에 접어든 작가는 마치 바람을 보는듯하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이(중‧장년도 마찬가지이지만) 바로 앞의 ‘파도’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데 말이다. 단순히 청춘의 현상만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 속에서의 청춘의 위치를 제대로 짚어 주니 이 책이 더 설득력을 갖는 이유가 된다. 게다가 작가도 청춘 아닌가.
‘만물(萬物)이 푸른 봄철’이라는 의미의 청춘(靑春), 이 아름다운 ‘청춘’들이 푸름을 잃고, 스러져 가고 있다. 기성세대는 각종 이름을 이들에게 붙여 왔다. X세대, N세대, P세대, 88만원 세대…. 이제 이름은 그만 붙여도 된다. 청춘은 청춘이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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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등에서 하도 재밌다고 해서 사보게 되었는데, 한윤형씨 이름은 들어본 적 있지만 이렇게 재밌는 사람인지 몰랐다. 그냥 좀 글 잘쓰는, 어디서 키우는 글쓰는 앤가보다 했다. 생각해보니 역시 재밌게 읽었던 수업 교재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의 공저자였다. 약간 자전에세이 같은 이 책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훨씬 쎈 표현들이 등장하고 책 곳곳에 드립이 넘친다. 일단 책 제일 앞에 용어 설명과 등장 인물 설명에서 빵빵터짐. 뭐 이런 식이다. 넘사벽 :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의 주말. 인문학 방언으로 번역한다면 '심연의 간극' 듣보잡 : '듣도 보도 못한 잡놈'의 준말. 원래 있던 인터넷 용어지 결코 진중권이 변희재를 욕하기 위해 만들어낸 말이 아니다. 덕분에 1부에서는 한윤형의 20대 시절이 줄줄줄 나오는데, 공감가는 것도 많고 그랬다. 특히 첫 장 '자의식'은 한번 쯤 스스로가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20대라면 많이 공감할 것 같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몇 몇 장들을 좋아할 것 같고, 스타리그를 좋아하는 나같은 사람은 스타리그에 대한 탁월한 분석이자 애정에서 신나게 읽었다. (스덕들은 종종 농담조로 이 길의 마지막엔 보람상조배 스타리그가 있는 걸까? 라고 말하는데서 웃었다) 판타지 소설 이야기도 나오고, 단골 술집 이야기도 나오는데... 읽다보면 한윤형 얘 도대체 뭐하는 놈이야? 라는 생각 밖에 안든다. 그런데 이 책이 신기한 건 여기서 멈추는게 아니라, 이런 다양한 소재들을 이야기하면서 한국 사회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청춘세대의 특징은 뭐뭐뭐가 있는데, 그게 사실은 어떤 의미고,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살게 되었고.... 저자에 따르면 청년 문제는 청춘 세대 자신의 문제라기 보다는 부모 세대의 문제이며 한국 사회의 표층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2부도 재밌는데, 주로 지금의 청년들이 어떤 한국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를 말한다. 전체적으로 책이 좀 난삽하긴 한데, 꼭 트위터에서 폭트하는 한윤형을 보는 것 같았다. 2부에서는 지금까지 나온 세대론 (그 시작을 X세대로 보고 있음)을 시대별로 요약, 나열, 비평, 정리해버리는데 이 부분이 상당히 재밌었다. 지금까지 나온 세대론 이야기 중에 가장 넓은 범위를 구체적으로 정리해주는 글이었다. 3부는 그런 사회를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무난한 사회 분야 책 답게 다양한 가능성과 방법을 찾는 것으로 책을 마치고 있다. 1부가 에세이라면, 2,3부는 사회분야 책의 느낌이 나는 것이다. 이렇게 읽고 나면, 이 책을 누군가에게 권하고 싶어진다. 너네가 뭐가 힘드냐? 라고 물었을 때, '딱히 뭐라고 말할 수 없는데, ,하여간 우리 세대가 힘들다' 라고 말하게 된다. 사실 윗세대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지 못하므로. 그런데 이 책은 '뭐가 다른지' 그게 '어디서 오는지'를 말해준다. 만약 이 책을 부모님이 본다면 자녀들을 더 이해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여전히 대기업에 가야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공감할 수 있는 젊은 저자의 책이 나왔다.. 확실한 건 정말 재밌고, 읽고 나면 참 슬픈데,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든 이 세상을 바꾸며 잘 살아가야 하지 않냐는 것이었다. 미래는 우리에게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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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윤형은 세대론에 대해 그리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지만 읽고난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세대를 가늠해보게 된다. 나는 과연 어떤 세대에 속한 사람이었던가. 94년도에 대학에 들어가 386세대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보았고, 당구가 저물고 스타크래프트가 뜨는 순간을 체험했으니 잠깐 나타났다 사라진 단어였던 x세대쯤 되지 않을까 가늠해본다. 베이비붐 세대라며 취업의 고통을 하소연하던 학번은 하나 높지만 나이는 조금 많던 다른과 선배의 모습이 얼핏 떠오른다. 하지만 선배의 하소연 직후, IMF는 우리를 급습하였고 모두가 힘들다는 시대에 명예퇴직을 종용받던 아버지의 버팀으로 다행스럽게도 나는 학자금 지원이라는 수혜를 받으며 무사히 의대를 졸업할 수 있었다. 이후 군의관시절, 경제위기의 긴 여파로 인하여 젊은 친구들이 마지못해 군입대를 선택해 들어오는 모습들을 보며 마음아팠던 일을 생각해보면 한윤형이 제목에서 말하는 청춘이라는 세대적 범위의 경계는 크게 잡아 내 또래의 바로 뒤에서 형성되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 역시 세대론적 분석이나 경계지음을 좋아하지 않는다. 세상은 세대간의 수많은 교류를 만들어내며 함께 흘러가는 시공간이기에, 그리고 자본이나 계급등 수많은 경계지음의 기준들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굳이 세대까지 구분해가며 싸움을 붙일 필요는 있겠나 싶기 때문이다. 경제학적으로 따지자면, 정해진 부의 운영과 분배방식의 문제를 해결하면 취업난으로 대표되는 현시대의 세대간의 갈등은 자연적으로 해소되는 면도 없지 않기에 세대론은 부차적인 의미로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오히려 '인민'이라는 대상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위고의 말처럼 인민은 빵과 배고픔때문에 움직이는 존재라면 굳이 이렇게 자잘한 정치평론이나 세태에 대한 고민은 필요없을 것이다. '인민이 위대한' 이유가 언제나 함께 가야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라면 그저 배고픔과 불만이 극도에 다다를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않는 존재들이고, 그래서 세상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와 분석과 주장을 내놓는다. 그렇다면 우리의 답답함과 우울함은 빵과 배고픔 이상의 무언가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 아닐까? 개인적으로는 몇년전 프랑스에서 연금법 개악에 반대하는 데모가 한창일 때, 고등학생들이 내건 플래카드에 '은행에서 현금을 모두 인출해버리자!' 라는 문구가 항상 뇌리에 맴돈다. 그 문구는 그들과 달리 우리에게 보편적으로 필요한, 어떤 지적인 바탕이 부족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해와 논리가 완벽하지는 않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현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와 그 이면의 현상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하는 저자에 대한 감탄 이면에 마음 한 켠의 어떤 답답함이 늘상 자리하고 있던 느낌은 위에서 말한 나의 생각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저자의 분석과 글이 무척 마음에 들면서도 한윤형 이전의 사회를 분석했던 수많은 평론가들에 비하여 신선함의 면 외에는 별반 차이가 없는 느낌이었다. 그가 내놓는 소소한 대안은 '바리케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라'는 우석훈의 대안보다 좀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이긴 하지만 공감은 작기만 했다. 물론 우리사회가 뾰족한 대안이나 해법이란게 대뜸 나올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복잡하긴 하다. 동시에 나의 생각은 치밀하고 현실적인 저자의 분석과는 거리감이 있는, 은연중에 세대론에 빠져있는 구세대적 연령공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우리가 보편적으로 지녀야 하는 세상을 직시하는 지적바탕을 고민하고 있다. 한윤형의 분석을 조금 지루하게 받아들이게끔 만든 나의 고민에 대해 한윤형은 이러한 생각을 하는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 줄까? 문득 궁금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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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 단어가 무얼까? 청춘? 진보? 과거에는 이런 단어들로 규정한다고 해도 일반적으로 동의를 얻을 수 있었지만, 지금의 20대는 좀 달라졌다. 현상만 얘기해 보자면, 과거에는 20대가 사회의 변혁을 주도했으며, 보수와 반동의 정 반대에 자리잡고 있었다. 70년대 이후 80년대 광주민주화운동과 87년의 6월항쟁도 모두 이십대 대학생들이 그 도화선이 됐다. 정치권에 몸담은 지금까지 진보적인 위치를 버리지 않고 있는 많은 인사들도 과거에 자기 한 몸 희생해서 사회를 바꾸고자 노력한 이들이다. 심지어 지금 보수적인 정당에 있는 사람들조차 젊었을 때는 총학생회에서 투쟁 좀 하던 운동권 학생출신이 많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십대는 더 이상 진보와 투쟁의 최 일선에서 멀어졌다. 물론, 운동권이 주류를 이뤘던 그 때에도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것으로 비루한 현실에 눈감은 이도 있었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정치사회적 이슈에는 관심이 없다. 관심이 없다는 말은 보수화되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혹자는 과거 주사파를 핵심으로 하는 운동권에 대한 대중의 반감과 민주화된 작금의 현실에 더 이상 투쟁의 대상을 찾지 못하는 데에서 운동권의 쇠퇴를 설명한다. 이로 인해 대학 새내기들에게 지속적으로 사상적 교육을 통해 전수되어왔던 현실에 대한 각성과 자각의 흐름이 단절됐기 때문에 청년들의 보수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진단도 내놓는다. 물론, 그런 부분들도 대학생들의 보수화에 대한 원인일 수 있으나, 충분한 답변은 되지 못한다. 20대가 현재 처해 있는 위치는 과거 386세대처럼 운동 좀 하다가 4학년때 원서 쓰면 어디서든 데려가는 그런 시대도 아니고, 일부 정치권이나 시민단체처럼 학생 때 운동하던 경력을 발판 삼아 정치적 역량을 키워나갈 방법도 없다. 게다가 예전에 대학은 소수의 선택 받은 엘리트 집단이라고 여겨졌으며, 일부의 낭만과 여유도 누릴 수 있었다. 그만큼 대학 이후의 삶이 다양하고, 그 선택지 가운데서는 마음만 먹으면 자기의 미래를 경제적인 불안으로부터도 충분히 보호할 수 있었던 시대다. 그러나, 지금은 고등학교 졸업생의 85%가 대학을 간다. 소위 스카이대라고 하는 최상위 클래스의 학생들 조차도 경쟁에 내몰려 있다. 지금은 대학에서 열심히 해도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들어갈 확률이 과거 운동하던 386에 비해 바늘구멍처럼 줄어들었으며, 이러한 경쟁과 미래에 대한 불안에 학생들은 보수화할 수 밖에 없었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삶이 내려가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모두가 연대하여 최저임금 이라던지, 청년실업의 적극적인 정책을 이끌어내기 위한 활동과 같은 생활정치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연대하면, 가시적 성과를 거둘 수도 있으나, 현재 삶이 팍팍한 이들을 그렇게 묶어줄 구심점이나 동력이 없다. 마치, 하루하루 노동에 매어있는 최하층이 보수화되어 수구 기득권을 지지하는 것처럼.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이처럼 민주화를 만들어낸 위세대로부터도 보수화되었다고 욕 얻어먹고,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하고, 몇 안 되는 괜찮은 일자리를 위해서는 동료를 제치고 더 열심히 체제에 복무하고 순응해야 하는 청년들의 팍팍한 삶을 좀 이해하고, 제대로 들여다 봐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 같다. 물론, 그 엄혹한 세월에도 제한 몸 바쳐가며 독립을 위해 싸운 이들도 있고, 말과 글을 빼앗고 언론조차 권력의 나팔수였던 때에도 먹고 살기 힘들기는 지금보다 더 했지만, 그들은 운동했고, 투쟁했다. 모든 청년이 보수화 된 것은 아니다. 훨씬 많은 숫자가 세대의 아픔과 약자에 대한 공감능력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실현할 무대가 없을 뿐이다. 오히려, 잠재적인 진보세력이 많은 것 아닐까. 나처럼 생각과 양심은 자리를 지키고 있으나, 현실의 팍팍함과 사회로부터의 요구에 의해 마치 겉으로는 보수화된 듯 보이는 것이 아닐런지, 자본주의적 이념이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깊숙이 침투해 있는 지금 진보적 가치를 생활에서 실현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내기조차 어렵다. 취업하기 위한 면접에서 진보적인 시각을 보인다는 건 입사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고, 조직 내에서 조금 다른 시각을 갖는다는 건 문제사원으로 찍혀 성공으로 올라가는 사다리에서 낙오하는 것을 의미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경제적 혜택도 포기하지 못하고, 이념적 좌표는 진보의 어딘가에 놓인 이들은 자기희생을 감내하면서까지 운동하는 것을 원하지도 않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 그들이 소위 강남좌파이고, 촛불시위에 가끔 얼굴을 들이미는 넥타이부대이다. 진보가 주류가 되지 않은 이상 커밍아웃하지 않고 뉴스타파나 독립언론을 구독하고 인터넷 댓글과 트위터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이들 말이다. 영웅적인 청년 투쟁가도 좋다. 하지만 지금의 청년들이 자본주의적 경쟁력을 지닌 사회인으로 편입되어야 진보의 파이가 커지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책속에서] 체제는 인격의 끝없는 성장을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가 그를 적당히 써먹을 수 있는 수준에서 성장이 멈추기를 바랄 뿐이다. 더 중요한 것은 경쟁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우리의 경쟁'의 비효율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지식 외우기 게임'은 여러 사람의 믿음과는 달리 대단히 비효율적이며 그 게임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중고교 세계 경시대회에서 순위를 얻는 것뿐이다. '국가대표 판타지'는 생활인의 관점에서 보면 조금 슬픈 것이다.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스포츠를 즐기다가 리그에 열광하고 훌륭한 선수를 키워내는 것이 아니라 생활과 떨어진 '별동대'를 키워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노동시장은 비정규직 비율은 엄청나게 높지만 퇴직 이후에 다시 정규직으로 돌아오는 쪽의 '유연성'은 전혀 없다. '노동 유연화'가 사용자와 노동자 모두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만큼 일하는' 것을 실현하도록 디자인된 게 아니라 단지 노동시장을 분할하고 임금을 후려치는 수단으로 변질된 탓이다. 한국사회의 정치적 민주화가 다시 독재사회로 역전될 수 없겠지만, 여전히 '침묵'이 처세의 미덕이 되는 사회다. 서민들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심지어는 파워엘리트 들에게도 그렇다. 새 정부가 발표하는 내각 인사들의 인터뷰를 보면, 그들이 '소신'을 가지기 보다는 '굴신'의 자세를 '처신'의 기본으로 삼는 '가신'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이 충분히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논제에 대해 생각했던 것만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통계적으로 드러난바 '노조 활동은 싫지만 노동조합이 있는 괜찮은 직장에 가고싶다'고 생각하는 청년들의 모순적 인식 혹은 영악함이 오늘날의 한국 사회를 떠받치는 근간일 것이다. 한국 사회가 '집값'은 높이고 '사람값'은 낮추는 체제를 운용해왔다는 것이다. 맹목적으로 투표를 한다, 안 한다, 결론을 내리지 말고, 자신이 행사할 권리들에 대해 모두 조사해보자. 각각의 투포에서 내 삶의 문제를 대변하는 후보들이 있는지를 알아보자. 그렇게 한 후 투표할 수 있는 만큼만 투표하고, 투표할 수 없느 선거에 대해선 그냥 기표하지 않은 채 집어넣어도 된다. 사랑에서 상처를 입었다고 하여 사랑을 거부하는 일이 바람직한 일은 아닌 것처럼, 사랑을 해보지 않고 냉소적으로 상처를 거부하고 마음의 문을 닫는 일이 비참한 일인 것처럼, 당신의 소중한 권리를 조심스럽게 행사하는 것은 그 어떤 종류의 냉소적 진실보다 가슴 떨리는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말이지 그렇게 되기를 빈다. 건조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생산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존재하기에 필요한 만큼 생산한다. 그리고 존재의 이유는 맹목적이며, 가치판단의 대상이 아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을 신뢰하는가? 하지만 진실은 "호랑이에게 물려갔을 때 '정신줄'을 잡으려 하면 더 고통스럽게 죽어갈 뿐이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세상을 살아가게 될지 알 수가 없다'는 느낌은 세계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욕망을 갉아먹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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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저 자 : 한윤형 “우리는 대한민국의 짧은 역사를 통틀어 아마도 인생 전 기간동안 가장 많은 것을 소비할 세대가 되겠지만 모든 세대중 평생 기대 소득이 가장 높은 세대는 아닐 것이다. 부모세대는 폐허와 공허를 물려받고 죽음에 직면할 정도로 고생을 했어도 이 시대도 내 삶도 올라가는 느낌 속에서 살아왔다. 반면 우리는 상승한 부모와 삼촌 세대의 축척된 부를 통해 소비 취향과 자의식을 물려받고 집중적으로 교육투자를 받았지만 이 시대도 내 삶도 내려가는 느낌 속에서 살아왔으며, 살아가야 한다.” --> 슬픈 일이지만 맞는 말일 것같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내 자식들은 어쩌면 현재의 20대보다 더 좋은 삶을 영위할 세대가 될 수있을 거라는 확신을 갖지 못한다. 그렇지만 뭔가를 해야지 내 자식들에게 좋은 뭔가를 해줄 수있다는 생각에 요즘 20-30대의 이야기를 자주 읽는다. “오늘 날 20대 망국론을 공개적으로 떠드는 김용민이나 386패거리가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규탄하는 변희재를 그 연배의 대표로 생각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 지금의 20대 후반들이 사회에 관심이 없고 정치의식이 없다는 핍박을 주는 세대에 대한 반감이다. “사실 사회의 규탄이전에 이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서 부끄러움이란 감정을 내면화하고 있다. 사회와 부모가 자기 자신이 협력하여 그린 셀프이미지 (self image)에 훨씬 못미치는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 요즘 보이는 루저문화라는 것은 이 부끄러움을 그나마 유머러스하게 풀어내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이라 말할 수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정서는 정치적인 각성과 자기 학대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다.” --> 이해할 만하다. “경쟁체제를 찬양하는 어른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이들 명문대생은 천재적인 창의력을 가지고 다른 이들까지 먹여살릴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어야 할 사람들이다. 그러나 최근 신문보도에 따르면 드디어 SKY학생들까지 9급 공무원 시험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미 예전부터 전해지던 사례들이다.” --> 마뜩치않지만 사실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 나머지 지잡대들은 얼마나 어렵겠나! “이제 주류에 대한 부정적인 규정으로서 ‘나-루저’가 아닌 다양한 루저들의 삶을 담아내고 그 안에서 차이를 발견하고 서로의 모습을 발견해가는 시도가 필요한 때이다. 그런 시도가 진행될 때에 루저들은 비참함을 지각할 수 있는 특권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보다 아래의 부속품들의 삶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 가능하도록 하기 이해 담론의 영역에서도 그들의 문화적 생산물을 통해 그들의 삶을 재현하려는 시도를 계속해야 할 것이다.” --> 이 책을 읽으면서 참 잘 썼다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 본인은 진보적인고, 그런 정당의 당원이라고는 하지만, 상당히 양쪽을 이해하고 비판하면서 썼다. 오히려 진보라거나 보수라는 사람들보다 더 성숙하다는 글솜씨를 보이고 있다. 요즘 나에게 ‘그래, 그렇게 해야되!’라는 각성을 주는 사람은 30대 중반의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 뭐라할 때보다 그들이 뭐라할 때 더 공감이 간다. 그래서 난 그들의 나의 멘토라고 하고 자주 만나려고 한다. 이 글을 읽으면서 한윤형을 만나서 막걸리마시면서 세상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세대에게 권할 만한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