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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201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영재 시인의 첫 시집이다.
제1부의 제목은 '상쇄'인데, 모든 시들이 밀도가 아주 높아서 집중해서 읽게 된다. 1부에서는 「흰검정」, 「내가 알던 A의 기쁨」, 「코끼리」가 맘에 들었다.
이 시집의 첫시인 「흰검정」을 빼고 나머지 두 시는 매우 긴데 (그렇다고 산문시는 아니다),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다. 요즘 젊은 시인의 시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암호처럼 단번에 해석되기를 거부한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낯설고 생경하기는 한데, 처음 들어보는 외국어를 대하듯, 집중해서 읽어보려고 한다.
「흰검정」과 「내가 알던 A의 기쁨」에는 '개미'와 '콜라'라는 익숙한 사물들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이 익숙한 사물들로 그린 시는 매우 낯설고 생경하다. 「흰검정」과 「코끼리」에는 흰색과 검정색의 대비가 두드러진다.
「내가 알던 A의 기쁨」은 사랑에 대한 시처럼 읽히기는 하는데, 잘 읽었다는 확신이 없다. 그러나 더 잘 알고 싶다는 생각은 드는 시다.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캔 콜라와 패스트푸드가 떠오른다면 이 둘은 학생일 때 만났거나 가난한 연인이었을 것이다. 그런 유추는 가능하다. 그런 걸 염두에 두고 이런 시구를 읽으면 시가 조금은 선명해지는 느낌이다.
- 질척한 웅덩이엔 발자국이 겹겹이 쌓여 있다 A는 지문이 도드라진 손바닥을 찍고 (13쪽)
- 죽고 싶었을까 죽이고 싶었을까 존재에게 접속사를 더할 수 없다는 A의 신념은 (14쪽)
- 그래서, 어제는 사람 같은 걸 죽이기엔 기쁜 날이었다는 A의 마지막 거짓을 진심으로 변호했다 (15쪽)
그리고 「대위법」의 이런 부분들은 시각적 이미지가 그려지면서 시 전체의 정서가 느껴지는 점이 좋았다.
화로가 가운데여서 형성된 주변에 기쁨을 앓던 이들이 모여, 여전한 기쁨을 숨긴 채 모두가 미움을 곡해하지 않을 미소다 (20쪽)
침묵, 모두는 기쁨을 조금씩 꺼내, 잘 섞어 누누어 가졌다 총량이 달라지지 않은 침묵이다 제주의 날씨를 살아온 사람도 (20쪽)
'나는 되어가는 기분이다'라는 이 시집의 제목은 「슬럼」이라는 시에서 따왔다. 이 시 역시 매우 시각적이라 한 편의 장면이 저절로 그려진다.
「겁과 겹」의 이런 부분도 인상적이다.
입체를 쌓으며 강요는 순환해왔을까 몸은 몸과 맺어왔다 입체를 견디는 입체의 역할을 순행이었다고 해도 될까 반복마다 반복이 덧씌워지고 덧입혀진 옷이, 안쪽의 왜소를 대변한다 웃음에 웃음이, 출근길에 출근길이, 기쁨에 기쁨이, 희망에 희망이, 희망에 희망이, 희망이 희망에 덧대어지고 (30쪽)
「상태」는 마치 이상의 시 「오감도」를 연상시킨다. 뭔가 의미가 있는 것 같은데, 그 의미가 뭔지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반복되는 시의 패턴들이나 시인이 사용한 시어들을 통해 시인이 의도한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시의 패턴은 'OOO 중의 OO를 어찌할 수 없다'가 한 페이지 정도 반복되다가 'OO 중의 OO을 어찌하고 싶지 않다'가 반 페이지 정도 반복되고, 다시 'OO 중의 OO를 어찌하지 않기로 했다'가 한 페이지 정도 반복되는 식이다. 술취한 사람이 중언부언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그러기에 사용하는 단어들이 매우 명료하게 'OO 중의 OO'가 매우 정교하다. 동사와 명사의 조합에서 명사와 명사의 조합 식으로 바뀌기도 하는데, 이런 패턴들이 모여 정교한 언어적 실험을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시가 되었다. 시 중간 중간의 (...) 표시 역시 이러한 사고의 확장들이 무한해서 중간 생략한다는 의미로 읽혔다.
마지막으로, 1부의 「낭만의 우아하고 폭력적인 습성에 관하여」도 좋다. 이 시는 꼭 한 번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II
제2부인 기형에 실린 시들은 1부의 시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독자에게 매우 친절하다. 1부의 시가 매우 난해했던 데 비해 2부의 시들은 비교적 이해하기 쉽다. 시인이 좀더 친절해졌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시를 거듭 읽다 보니 이 시인의 화법에 익숙해진 탓도 있을 것 같다.
일단은 서사와 내용이 있어 쉽게 읽힌다. 「외곬」은 단편소설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서사가 있는 긴- 내용의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이 시 역시 말미에서 비튼다. 마치 이종의 것들을 결합한 듯 생소하고 낯설게 만들었는데, 그래서 더욱 집중해서 읽게 되기도 한다.
시인은 기본적으로 한 단어를 거듭 거듭 말하는 방식을 취하는데, 이 방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기존에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들에 의문을 품게 된다는 점인 것 같다. 이것인 일상화되고 관습화된 사고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우리가 기존에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인습들에 대해 회의하고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시인은 새로운 언어를 발견하거나 창조하는 사람이기도 하겠지만, 익숙한 것을 새롭게 만들거나 새로운 측면을 보게 함으로써 인식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한다.
「캐러멜라이즈」도 좋다. 어쩐지 시어로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캐러멜라이즈'라는 단어가 시어가 될 수 있다는 것도 '발견'이지만, 설탕이나 단 것, 흰 것과 갈변 중인 것 등의 이미지를 통해 아름다움과 순수 등을 사유하는 방식도 마음에 들었다.
괜찮아 질량이 전복되면, 질량이 된다 아름다움에 관한 달콤한 오해를 나누며 살아 있는 모두가 살아 있다는 기분에 중독된 채로 (60쪽)
부제가 '영등포에서'인 「파수」도 좋았다.
기어코 검은 구멍을 통과하려는 다름, 다름, 다름이 허위라는 걸 아는 사람들이 겨우 틀림을 통과해 모두가 틀렸다는 편집으로 완성된다 이곳은 충분했던 충분이었다 인식이었고 인식이다 나의 인식은 매일 수렴된 우울을 만나 편집되는 우울을 완벽한우울로 지켜내려는 지켜냄이다 충분도 충분치 않을 수 있는 이곳은, 이곳을 수렴하려는 수렴, 그 이상인 나의 이상이다 (62~63쪽)
「개미를 구별하는 취미」는 '사회적 자아'가 가장 부각된 작품이다. 이전까지의 작품들이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들, 언어 자체를 궁구하고 언어의 새로운 사용을 도모하는 시였다면, 이 시는 사회적 모순 등에 대한 시라서 특별하다. 시인은 '이 혁명과 그 혁명은 다르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나 '이 불온과 저 불온은 같은가' '그 혁명과 이 혁명은 틀렸다'는 발언 등등에 대해 사유한다.
부른 배가 불쾌해 오르막이었을 내리막에서 똥을 쌌다 냄새가 없다 코카 큰 인칭은 왜 코가 작고 발가락이 긴 인칭은 왜 발가락이 짧은지에 관한 생각이 잠깐 들었다. 다시 똥을 쌌다 냄새가 없다 산속으로 사라진 인칭 때문이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인칭보다 옳고 늙어버린 인칭에 비해 젊다 비해서, 대체 어떤 똥에 비해 어떤 똥이 더 냄새가 없는 걸까 비해서, 비해서 결국 나는 저 철조망보다 옳다 옳기에, 나는 매 순간 특별하고 다르게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다 (82쪽)
「암묵」은 시 쓰기 혹인 시인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시로 읽힌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이 시집에 실린 시들 중에서 이 시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죽은 것들에 어떤 비유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죽은 것들은 이미 된 것이다 모든 것을 떠나서 모든 것과 연관되지 않으며, 자체로 완성되는 욕망이 있다고 본다 완벽은 아니지만, 완벽을 닮아 있거나 완벽과 비슷한 냄새를 풍긴다 (93쪽)
나는 많은 원인을 내가 아닌 것들에 부여한다 부여된 것들은 나로 인해 존재된다 나는 부여하기에 존재된다 여기에 반복되는 부끄러움이 역겨움이 아름다움이 (92-94쪽)
나는 내게서 비롯되는 문장들을 참아낼 수 있다 착각 속이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문장마저 착각 중이기 때문에 문장이 적히도록 방치하거나, 방치된 채 길어지는 문장을 넘어뜨리면서 (94쪽)
시집의 남은 반 (3부와 4부)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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