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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소설이지만 소설이란 느낌보다는 철학서란 느낌을 더 받았던 '특성 없는 남자' 솔직히 하나의 대상에 대해 너무나 많은 생각과 이야기를 풀어놓는 내용은 쉽게 다가오거나 술술 잘 읽히는 책이 아니라서 고생을 하면서 읽었다.
예전보다는 다양한 국가의 작가들이 우리와 만나는 기회가 늘어났다. 나름 열심히 책을 읽는다고 생각했지만 이름조차 모르는 새로운 작가를 만나면 자연스럽게 기대를 갖게 된다. '특성 없는 남자'의 저자 로베르트 무질도 이번에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작가인데 20세기에 왜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소설로 그의 작품이 선정되었는지...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와 율리시즈와 함께 3대 모더니즘의 걸작으로 꼽혔는지... 흥미롭게 느껴져 내용이 궁금해졌다.
'특성 없는 남자'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울리히란 인물은 30대의 초반의 남자다.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능력 있는 아버지를 두고 있다. 울리히의 아버지는 황당한 저택을 구입하고 막대한 수리 비용이 들어가는 아들의 판단에 마음이 좋지 않다. 그런 아들과 한동안 연락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무심하게 지내게 되고 이런 아들에게 꼭 만나길 바라는 인물을 추천하기도 한다.
울리히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친구부부를 비롯해서 그가 사랑에 빠지는 여인들이나 전혀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끌리는 복잡한 감정에 대한 이야기는 살아가면서 우리 역시 겪게 되는 감정이라 어느정도는 공감하게 된다. 울리히는 여성을 살해한 살인자의 행동에 대한 생각이나 그를 돕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책의 내용은 울리히를 비롯해 평행운동을 중심으로 모여든 인물들이다. 이들 속에서 특히 사촌이며 지성인이라 스스로 느끼고 사는 티오티마와 그녀의 남편 아른하임, 그리고 라인스도르프 백작 등을 비롯한 인물과의 대화와 생각이다. 울리히란 엘리트 집단의 한사람의 삶을 쫓아가는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 불안정한 시대 속에서 울리히를 둘러싼 인물들과의 생각과 사상, 시대상을 볼 수 있는 소설이다.
너무나 어렵게 뛰엄뛰엄 읽다보니 책에 대한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아 힘들었다. 한번을 읽고서 책과 저자에 대한 평가를 내 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느끼게 해 준 책이다. '특성 없는 남자'은 아직 끝난게 아니다. 3권으로 이어진다. 3권에서는 또 어떤 사유에 대한 들려줄지... 울리히란 남자를 친숙하게 느낄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궁금해서 읽어 볼 생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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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질(Musil)의 팬인가? 그렇게 보긴 어려울 듯 싶다. 로베르트 무질의 단편집 <<세 여인>>을 읽고 나는 그의 세계에 빠져들었지만,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을 읽고 다소 실망했으며, 역자가 힘들게 번역했을 이 <<특성 없는 남자>>는, 예상했으나 역시였다. 20세기 초 소설의 일부 경향이 사건 중심이 아니라 사유 중심이었듯이,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처럼 이 책도 지극히 사변적인 방향으로 소설이 전개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놀랍게도 그 사변적인 특성으로는 20세기 최고라는 명성을 얻었던 소설이었다. 그러한 특성으로 20세기 최고의 소설 반열에 올라갔으며, 영미권에는 제임스 조이스, 프랑스에선 마르셀 프루스트, 그리고 독일어권에서는 이 작가, 로베르트 무질이! 소설의 역사에서 사유가 그렇게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작품은 없었다. 무질은 소설가인 동시에 위대한 사상가였다. <<특성 없는 남자>>에서 그의 사유는 당대의 인물, 사회적 조건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그의 사유는 여러 학문을 답사해 나온 그런 답답한 지식이 아니라, 현실의 실존적 측면에 집중한 결과였다. 한 마디로 독특한 소설적 사유였던 것이다. - 밀란 쿤데라 (<나의 20세기 책>, <<차이트>> 1999년 1월 21일자), 336쪽에서 재인용 하지만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읽으면서도 상당히 힘들었는데, 무질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21세기 초반 이제 이런 유형의 소설은 거의 없다. 읽히지도 않는다. 소설다움은 인물과 사건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인물들 간의 관계, 그리고 사건이 위치하는 시/공간을 통해 배가는 자신의 철학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소설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쏟아낸다. 배경이 있기는 하나, 그것이 필연적이지 않다. 그래서 혹평 하는 것이다. 도리어 밀란 쿤데라의 저 찬사가 낯설게 느껴진다. 저 찬사는 지극적 유럽적인 것이 아닐까. 20세기 초 유럽을 휩쓴 전쟁과 광기 앞에서 인물과 사건은 무력해지고 살아남기 위한 사유만을 향해 매진했던 건 아닐까. 그래서 그러한 사유를 소설로 담아낸 무질에 대해서 높은 평가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한글로는 2권의 책으로 1부, 2부 일부까지만 번역되어 있다. 이제 한 권의 책을 읽었으니, 나머지 한 권도 읽을 생각인데 ... 살짝 부담스럽긴 하다. 어려운 단어들이 빈번하게 나온다거나 문장이 엉망이라서가 아니라, 굳이 소설을 읽으면서 사유를 쫓아가야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건 확실히 취향의 문제이므로, 내가 재미없게 읽었다고 해서 무질을 무시해선 안 될 것이다. 로베르트 무질, 그는 국내에 너무 뒤늦게 번역되었으며, 세계적인 명성에도 불구하고 거의 읽히지 않았던 작가였던 탓에 관심을 가질 필요는 충분히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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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기 ‘가장 기억에 남는 책’ , ‘세계 문명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책’ ,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좋은 책에 선정되어 조이스, 프루스트, 로렌스, 톨스토이 같은 거장들과 나란히 그 이름을 올린 로베르트 무질은 우리에게는 낯선 작가이지만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조이스의 <율리시즈> 와 함께 20세기 모더니즘의 3대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무질의 소설 <특성 없는 남자>는 현대의 고전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그의 소설 <특성 없는 남자>는 제목과 명성만 들어 왔을 뿐인데 이번에 1,2권이 먼저 번역 되어 출판되었기에 어렵사리 작품을 읽게 되었다. 정작 작품을 대하기까진 많은 시간이 걸린 셈이다.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에서 태어난 무질은 1차 세게대전이 발발하기 전인 1919년에 <특성 없는 남자>의 집필에 들어갔다. 1,2권이 발표 된 뒤 정권을 잡은 나치에 의해 판매금지가 되었다. 20세기 가장 중요한 독일어 소설이지만 생전의 로베르트 무질은 그 명성을 거의 누려보지 못한 채 궁핍한 삶을 살다 결국 미완성인 채로 숨을 거두었다.
소설 속에 자주 언급되는 카카니엔은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의 별칭으로 무질이 작품활동을한 수도 빈은 당시 유행하는 모든 사상의 집합소였다. 프로이트가 이 도시에서 활동했으며 비트겐슈타인, 에른스트 마흐, 클림트와 실레 같은 빈분리파 화가들, 쇤베르크를 필두로 한 음악가들까지 이 도시는 현대 사상과 문화로 뜨겁게 달아 오르고 있었고, 이런 사상의 흐름은 그의 작품속에 고스란히 담아 냈다. 무질 자신의 고국인 카카니엔은 소설속 배경이며 히틀러 역시 카카니엔 출신이였음은 우연이 아니다. 카카니엔의 황태자 페르디난트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 의해 피살되면서 시작된 1차세계대전과 인종주의와 군국주의가 결합된 파시즘은 그의 사유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무질은 그토록 많은 사상과 문화에도 불구하고 유럽이 야만적인 상태에 빠져들게 되었는지를 말해준다.
‘여기저기서 남아프리카나 동아시아를 향해 배들이 출항했지만, 그렇게 자주는 아니었다. 세계경제도, 세계권력을 향한 열망도 없었다. … 군비를 지출했지만 단지 열강들 중 가장 약한 나라에 머물지 않을 정도만을 유지했다. … 단 하나의 잘못된 점이 있다면, 그들이 고귀한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에 의해 뒷받침받지 못한 천재나 개개인들의 창조적인 동기들을 건방진 행동이나 불손함으로 간주했다는 점이다. … 카카니엔에선 천재가 무뢰한이 되는 경우는 있어도, 다른 곳에서처럼 무뢰한이 천재로 둔갑하지는 않았다.’ (p 55)
이 소설은 여타의 다른 소설들과 달리 줄거리보다는 주인공인 울리히와 등장인물들의 사유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때문에 책을 읽는 자체가 재미와 속도감에 익숙한 내겐 지루한 여정이 아닐 수 없었다. 자칫 주인공의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다 딴 생각이 들어 거기서 벗어나기라도 하면 읽어 온 문장들을 되짚어 가야하는 번거로움과 언급한 문장들을 곱씹어 가며 생각해야만하는 수고를 반복한 끝에 어렵사리 읽혀진다. 무질의 소설에는 당대의 학문과 사상이, 심리학과 과학철학, 생철학을 비롯해 군국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 반유대주의에 대한 생각들을 비롯해 소설가이자 사상가였던 저자의 지적 유희가 끊임없이 이어져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주인공 울리히는 행동보다는 생각하는 인물이다. 책은 신중하고 냉소적이며 지적인 독특한 캐릭터인 율리히와 카카니엔 황제 즉위 70주년을 기념하여 주변국에 평화의 의지를 알리자는 '평행운동'을 두 측으로 전개 된다. 행사준비위원회의 비서인 울리히는 무한한 가능성들의 끝없는 지평이 펼쳐지는 것을 경험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물질세계에 맞서 구질서를 회복하자는 영혼회복운동의 취지와는 달리 각 단체의 대표들은 자기집단의 이익만을 대변할 뿐, 행사의 의미와 목표에 대한 끝없는 토론에도 불구하고, 그 행사의 내용이 실제로 무엇을 담아야 할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말하지 못한다. 율리히에게 평행운동은 영혼과 정신의 외양을 걸쳤으나 '불충분한 근거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며 역사의 진행과정을 촉진 시키는 촉매의 작용은 할지언정 전쟁이 될지 평화가 될지 알 수 없는 불전한 것으로 보았다. 무질은 “학자의 연구실에서 떨어져나온 부스러기 같은 논문들”을 협오했으며, 전문가 사회에서 정신의 과잉은 오히려 대중의 의식을 무감각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서구역사에서 '신'을 대체한 특성을 '자아' 또는 '주체'라는 이름으로 불려왔으며 이 주체들이 인류 역사상 가장 야만적인 전쟁과 학살을 이끌었다고도 주장한다.
소녀들을 살인한 정신병자 모스브루거나 역사에 오류가 없다고 주장하는 거대기업 소유주인 프로이센 출신의 자유주의자 아른하임, 시민계급 출신의 고위관료의 아내인 아름답고 지적인 디오티마, 군사적인 훈련을 통해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이념들에 질서를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믿는 폰 보르드베르 장군 같은 인물이나 자신이 관리하는 모든 책들을 결코 읽지 않는 사서 등 다종다양한 전문가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생각을 따라가다보면 철학적인 문제와 맞닥뜨리게 된다. 울리히는 밤길에서 만난 세 남자와 싸움을 벌이다 가진돈을 모두 털리고 폭행까지 당하지만 그는 세 남자가 부랑아가 아니라 ‘자기와 같은 평범한 시민이며, 분명히 그들에게 계속 밀착돼온 억압에서 해방되어’ 적대감을 드러내 보인 것이라고 믿는다. ‘사실 오늘날 무수한 다수는 또 다른 무수한 다수를 향해 지속적으로 적대적인 입장에 있다. 자기자신의 범위 밖에서 사는 사람들을 뿌리 깊이 불신하는 것은 오늘날 문화의 한 본질이 된 것이다. 그래서 독일인이 유대인을, 또한 축구 선수가 피아노 연주자를 이해하지 못한 채 서로를 가치없는 인간으로 여기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사물이 단지 경계를 통해 존재한다는 것, 그래서 결국 자신의 주변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적대적 행위를 통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p 43)
이쯤 되면 이 책은 소설의 범위를 넘어 오히려 철학서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잘 읽혀지지 않는 작품임에도 이 소설을 펼쳐들자 멈출 수 없는 호기심에 주인공 율리히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펼쳐지는 사유의 끝자락이라도 부여잡고 놓칠새라 온통 이 책에 집중 할 수밖에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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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만나고 읽는 동안 수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답니다. 쉽게 넘겨지지 않는 부분도 있는 반면 철학적인 부분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힘들었지만 무엇인가를 자꾸 갈망하게 만드는 책이라는 겁니다. 더불어, 저자의 삶과 이 책이 최고의 책으로 손꼽히기까지 그가 겪었던 과정들을 볼 때면 시대에서 어쩔 수 없이 탄생하게 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답니다.
어느 소설을 읽든지 간에 그 나라의 문화를 먼저 이해 해야만 책의 흐름이 받아들여지는데 '특성 없는 남자'는 쉽게 생각할 수 없게 만들어졌죠. 주인공인 '율리히'라는 인물을 시작으로 특성있는 남자가 특성 없는 남자로 변해가는 과정과 그가 시도하면서 겪은 이야기들은 한 사람의 생각을 통해 다른 여러가지를 터득하게 만들고 생각을 하게 만들고 있답니다.
친구 부부를 만나면서 친구 부인과의 대화와 더불어, 친구인 '발터'가 자신에 대한 생각하는 요소들은 한 인간에 대한 성찰이랄까....한편으로는 망상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거든요. 그리고, 그의 부인 역시 그녀는 남편인 '발터' 자체를 사랑하기보다는 '천재'라는 타이틀에 얽매여 그와 결혼했다는 점 등을 볼 때면 이렇게 특정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모습들은 결국 당시 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것을 통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고 싶은 것인지 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답니다.
그렇다보니 '율리히'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존재하는 캐릭들은 한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였답니다. 그런데, 책속에서 그가 생각하는 모든 것들 그리고 언어들은 몇번을 읽어도 납득 자체가 되지 않아 어려웠습니다. 정말, 이 책을 읽고 한번에 습득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으나 시대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철학에 조금이나마 깨여있다면 흥미로운 책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와 이 시리즈는 20세기 현대 문학걸작으로 알려져 있기에 더욱더 관심을 받은 책이기도 하고요.
그동안 읽었던 다른 책들과는 상당히 다른 .... 이해 불가능 같으면서도 이해를 하고 싶은 책이라 할 수 있답니다. 마지막으로 2권에 이어 3권이 출간이 될 텐데요 '율리히'가 들려 줄 이야기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가 궁금하기도 합니다. 3권을 읽었을 때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기대를 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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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상에 누가 소설을 읽나? 이렇게 글을 시작하려니 내 마음도 불편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요즘 누가 책을 읽나?, 이렇게 묻는 게 맞다. 뭔가를 읽지 않으면 불안한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물론 읽기엔 너무 시시한 소설(글)도 있고, 여러번 읽어도 결코 안 시시한 소설(글)도 있다. 나는 글이면 웬만한 건 다 읽어치우는 사람이니 당연히 소설도 읽는다. 읽는 행위에는 당위성이나 대가성이 없다. 읽을 때의 조용함과 몰입감이 나는 좋다. 사지를 맘껏 뻗을 수 있는 공간에 몸을 부린 채 모든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시간이 좋다. 마음의 목소리로 혼자 읽는 시간이 (아직까지는) 좋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스마트폰, 이 별것도 아닌 것들이 21세기 정신적 배틀의 승자가 될까봐 나는 오늘도 읽는다.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란 소설을 읽는 동안, 뭔가를 읽(어내)는 인생의 위대함에 탄복하면서.
시시한 소설에는 한마디의 예언도 없다. 소설이 무슨 예언서냐고?? 소설은 예언서뿐 아니라 무엇이든 될 수 있어야 한다. 소설은 이야기다, 맞다. 소설은 잠언집이다, 맞다. 소설은 거짓말이다, 맞다. 소설은 아편이다, 맞다. 소설은 묵시록이다, 맞다. 소설은 쓰레기다, 맞다.
다 맞다. 소설은 무엇이 되고도 남음이 있는 생명력 있는 어떤 것,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초라한 그 무엇, 혹은 뭐라 규정할 순 없지만 인류 옆을 태초부터 중얼중얼 거리며 서성대는 이상한 기운임에 틀림없다.
제도판 위에 딱 붙어서, 그들은 자신이 직업을 사랑하고, 그 안에서 놀라운 덕목들을 소유하게 됐다는 식의 태도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기계가 아닌, 자신들의 생각이 지닌 대담함을 발휘해야 할 때면, 그들은 마치 망치로 사람을 죽여보라는 부당한 요구를 받은 것처럼 행동하곤 했다. 이렇게 해서, 기술을 통해 중요한 사람이 돼보려고 했던 좀더 성숙했던 두번째 시도는 재빨리 끝나버리고 말았다. (『특성 없는 남자 1』, 65쪽)
당신이 소설에서 이런 대목을 읽고도, 그깟 소설 한 구절, 하며 자신의 백치미를 과시한다면 소설뿐 아니라 어떤 글에서도 영감과 도전을 못 받을 가능성이 크다. 이미 폭력화된 현대성을 통탄할 일이다.
로베르트 무질이란 소설가는 이미 백년 전에 기계 문명과 기술이 난무할 현대를 걱정했다. 특성 없는 남자 울리히가 엔지니어란 직업을 미련없이 버리는 선택에 나는 공감한다. 시민들의 뇌구조가 이상해지는 걸 울리히는 놓치지 않았다. 무질이 그려낸 시민들이 제국의 도시 카카니엔에서 불안정하게 사는 모습이 내게는 슬슬 거슬리던 차였다. 시민의 정체성은 정말 이런 거였나.
우리가 곧잘 사용하는 시민의식, 시민운동, 시민세력 같은 말속의 시민과 『특성 없는 남자』의 시민이란 존재는 어딘가 동떨어진 정체성을 지닌 듯하다. 20세기가 시작될 때만 해도 그 시절 시민들은 혹독한 향수병에 시달리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들이 그리워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세기의 모든 옛 것들, 봉건적이고 불공평하며 비민주적이었던 모든 것, 그 중에서도 그들을 지배했던 귀족들의 귀족스러움, 혹은 귀족됨이다.
퇴락하는 귀족들의 꽁무니를 따랐던 사람들, 전문지식이나 전문기술로 자본축적이 가능해지자 결국엔 귀족스러움, 혹은 귀족됨을 추구하며 귀족을 향한 묘한 향수의 열병을 앓았던 사람들, 이 사람들이 바로 시민이다.
당신은 시민이지만, 시민으로서 자연스럽고도 넉넉하게 살고 있지만, 당신의 정체성은 당신에게서 비롯되지 않았기에 스스로의 언어로 세상을 향해 말해야 할 때면 그저 당혹스러울 뿐이다. 아니, 나를 뭘로 보고 망치로 사람을 치라는 거야?… 무질의 비유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나를 대변할 수 있는 건 돈, 아니면 돈벌이가 가능한 직업, 혹은 내가 소유한 물건들, 한마디로 ‘특성’이라 불리는 것들이다. 나는 처음부터 없는 존재였으니 나의 정신은 당연히 없다.
그들이 본 것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가구, 바로크식 궁정, 여전히 많은 하인들에게 삶을 의존하는 사람들, 엄청나게 방이 많은 현대 가옥들, 으리으리한 은행들, 그리고 최고위층 시민관료들의 집에 스며든 스페인식 엄격함과 중산층의 생활관습 등이었다. 대체로 귀족들에게는 수돗물도 안 나오는 집에 거대한 예절의 찌꺼기만 남았고 부유한 시민층의 집과 집무실에는 더 향상된 위생상태에 더 좋은 취향을 갖춘, 귀족생활의 창백한 복제품들이 재생산되었다. (『특성 없는 남자 2』, 173쪽)
그렇다면 건강한 시민의식이란 귀족을 흉내내던 촌스러움을 버려야만 가능해진다는 결론에 이른다. 등장인물들의 내면이 모두 불안정하며 퇴폐적인 주된 이유는 시민계급이 발생하며 배태된 그들의 허위의식 때문일 것이다. 무질은 그러한 텅 빈 의식의 단면을 결코 아량의 눈길로 바라보지 않는다. 시민사회의 속됨과 경박함은 집단적인 범죄행위, 이를 테면 전쟁과 같은 인류의 불행을 자극하기에 충분할 만큼 거세게 일기 시작한다(이를테면 소설 속의 평행운동). 세기말의 비엔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멸망이 코앞에 닥친, 현대라고 하기엔 아직은 봉건적이고 미개한 백년 전의 어느날, 로베르트 무질은 시대가 뿜어내는 공포에 대항하는 방식으로, 매서운 문장과 문명화를 비웃는 특유의 사유체계로 마무리하지 못할 이 소설을 시작한다. 백년 후 자신이 예언자로 명명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이것도 소설이냐고 누군가 물으신다면, 소설은 무엇도 다 될 수 있고 아무것도 다 아닐 수도 있다는 똑같은 대답밖에는.
『특성 없는 남자』와 같은 소설이 다음 세기에도 탄생할 수 있을까. 지금도 이 소설을 끝까지 읽을 수 없고, (세 번씩이나!) 읽어도 해독 불가능을 호소하는 (나와 같은) 시민들이 득시글거리는데, 우리의 현대성은 이 향수병을 떨쳐버릴 수 있을까. 말하자면 귀족의 귀족스러움과 귀족됨을 그리워했던 세기말의 그들과 우리가 동일하다 할진대 현대성에 절어버린 우리에게 누군가는 벌이라도 내려주어야 하지 않을까.
로베르트 무질의 소설을 고통스럽게(?!) 읽은 한 시민의 절규는, 자학과 자해의 형태로 다짐을 반복하게 하는데, 무슨 말이냐 하면, 나는 그래도, 읽겠다는 것이다. 내 투쟁의 도구는 읽기요 쓰기요 밑줄치기요 연필깎기인 것이다. 그래서 나도 화끈하게 『특성 있는 여자』란 소설로 무질의 경지에 도전해볼까 생각(?!^&~! ㅋㅋ…)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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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니 오래전에 읽다가 포기했던 책이 생각난다. 그 책은 바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였다. 꽤 길었던 책으로 기억하는데 결국 다 읽지 못하고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한 권만 아주 간신히 읽고 깔끔하게(?) 포기했던 책이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번역한 책이라서 그랬을까? 아마도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어쩌면 그렇게 난해하고 철학적이면 거기다가 엄청난 분량의 책을 번역한 번역가의 인고에 상이라도 줘야할 판이다. 그냥 한글로 적혀 있어도 읽기가 이렇게 힘든데 외국어를 번역하다니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책이 그 오래전에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답답함, 지루함, 난해함 그리고 짜증남 등 여러가지 감정을 다시 상기시켰다. 로베르트 무질... 개인적으로는 처음 듣는 작가지만 왠지 소설 제목, '특성없는 남자'를 보니 끌렸다. 그리고 소설인데 난해하면 얼마나 난해할까하고 생각했다. 맞다. 내가 쉽게 판단한 것이다. 애초에 이 책의 소개글에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조이스의 '율리시즈'와 함께 20세기 모더니즘의 3대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라는 설명을 보고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란 책을 읽은지가 오래전 일이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래서 엄청나게 어려운 수학문제를 앞에두고 쩔쩔 매듯이 책을 읽었다. 굉장히 조금씩 그리고 아주 긴 시간에 걸쳐서 읽었다. 사실 소설이라고는 하나 사념의 덩어리가 동동 떠다니는 알 수 없는 책이었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도 내가 어디를 읽고 지금 무슨 내용인지 길을 헤맬때가 많았다. 분명 눈은 글자를 쫓고 있는데 읽다보면 무수한 활자속 사이에서 멍청하게 앉아있을 때가 많았다. 아마도 그동안 쌓아둔 배경지식이 많이 부족했던지 개인적으로는 무척 어려운 책이었다.
도대체 이런 책을 잘 이해하고 읽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일까? 여하튼 이 책이 독일의 대표적 지성 99명이 뽑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독일어 소설에서 1위로 뽑힌 책이라고 하니 새삼 독일 사람들에게 경외감을 느낀다. 아마도 설문조사를 한 범주가 독일에서 손꼽히는 지성인들이라는 것이어서 가능한 일인 것 같다. 주인공 울리히는 여러 사람을 만나는데 제목과 달리 살인자의 행동도 이해하는 듯한 난해한 모습도 보인다. 아마도 팍팍한 사회에서 사는 현대인들의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모순적인 감정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책을 읽다보면 작가의 기구한 삶과 어딘가 이어져있는 것 같은 주인공 울리히를 통해 작가와 20세기 모더니즘을 바라볼 수 있었던 어렵고 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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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몇 주 동안 이 책 두 권을 갖고 씨름했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 밀란 쿤데라의 책이 사람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어 나도 한동안 그 열풍에 동참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농담’을 몇 번씩 읽으며 그의 사유를 좀 더 이해해보려 노력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 쿤데라가 ‘20세기의 어떤 철학이나 학문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소설의 장관’이란 평을 내놓았다. 또, 사유소설로 유명한 제임스 조이스와 프루스트와 함께 20세기 현대문학의 걸작이라는 옮긴이의 글을 읽고 이 책을 꼭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대학교 때 괜한 지적 허영심에 제임스 조이스를 많이 좋아했더랬다. 그의 책을 읽고 또 읽어도 과연 제임스 조이스가 무얼 쓰고자 했는지, 또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조차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제임스 조이스를 연구하는 수많은 학자들도 각기 의견이 달랐으며 프루스트 또한 그러했다. 물론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그들의 책은 여전히 힘들다. 나의 지적 수준을 어느 정도 받아들여야 할 나이가 됐음에도 무질의 소설 ‘특성 없는 남자’를 보고 또 지적 허영심이 발동했다. 과연 어떤 책일까?
우선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남자 울리히가 등장한다. 저자가 이야기 했듯이 울리히는 특성 없는 남자다. 주인공이 어떤 행위를 함으로써 이야기를 전개하고 무언가를 이루는 소설에 익숙한 나는 울리히와 주변 여러 인물들의 사유와 생각들만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이 소설이 조금 버겁기도 했다. 특별히 지루하거나 재미가 없진 않지만 또 특별하게 무언가 전개가 되는 느낌이 없어 이야기를 읽어가는 내내 늘어지기도 했다. 세계대전 등 전쟁으로 세계의 정세가 불안하고 사상이 아직 확고하지 않았던 시절 작가가 시대에 대한 고민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소설을 통해 알 수 있다. 여러 사상을 가진 다양한 인물들을 등장시켜 시대상을 반영하고 고민하려 한 흔적이 엿보인다. 특히 자신의 고국인 오스트리아의 과도기와 사상적 혼란을 다루고 있다. ‘평행운동’이라는 애국주의 운동, 디오티마가 주장하는 ‘위대한 오스트리아 문화’, 라인스도르프 백작의 민주적 군주국의 꿈 등은 전쟁과 파시즘이라는 야만적인 결론에 이른다. 여러 등장 인물은 각자 ‘위대한 이상’을 가지고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지만 결국 모두 자가당착에 빠진 허무한 외침에 불과한 결론에 빠진다.
이 책은 위에서 밝힌 것과 같이 쉽게 읽히는 소설은 아니었다. 군국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 반유대주의 등 너무나 광범위한 사상과 학문, 철학을 집합해 놓은 책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와 시대상까지 알고 이해해야 소설을 깊이 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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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한 텍스트를 읽어내는 데에는 특별한 재주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포기하지 않고 읽을 수 있는 끈기, 어느 수준의 지적 능력, 그리고 충분히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특별히 엉망인 번역서나 이해할 수 없는 지적 능력을 요구하는 이론이 아닌 다음에야 위의 조건들이 갖추어지면 읽어내지 못할 텍스트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 과정이 지루하고 복잡하고 난해할 뿐이어서 견디어내기 힘들다는 것이 문제다.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역시 마찬가지다. 몇 문장(또는 한 문장)을 읽고 그것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고 다음 문장을 읽어 내려가야 한다. 각각의 문장은 모호하며 갑자기 이런 문장이 왜 튀어나왔는지도 알기가 힘들다. 한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 게 고통스러울 정도다. 대체 누가 이것을 즐겁게 여길 것인가. 문제는 로베르트 무질의 이 작품은 난해한 텍스트뿐이 아니라는 것이다. 노력과 끈기로 극복하기 어려운 사유의 세계는 더 크게 앞을 가로막고 서 있다.
“좀 구식이긴 하지만 사실을 꽤나 잘 드러내주는 한마디 말로 하자면, 때는 1913년 8월의 어느 청명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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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는 중요한 세기였다 모더니즘으로 대표되는 정신상의 분위기는 구시대와 결별하고 새로운 흐름으로 다가올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이성에 대한 맹신에 가까운 믿음으로 의학과 과학 그리고 철학에 있어 시대를 장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과도 같은 싹이 20세기의 몸 안에서 자라고 있었다는 것은 어떠한 모순을 떠나 인간 정신의 맹점을 비추고 있는 거울처럼 그 시대의 정신을 증거한다 다가오는 파시즘의 어두운 구름 아래 집결하게 될 시대 정신의 광기는 전 유럽을 삼켰고 그 독안개 아래에서 정신들은 질식했다 세기초는 공포와 피에 젖은 시대였다
그 신세기의 암울한 전조를 예견하듯 지성으로 수놓아진 이 소설은 정신의 모험으로 서술되어 시종일관 관념에서 노닌다 일반적인 스토리 위주의 서사를 중시하는 소설의 문법을 도외시하듯 가볍게 초월 또는 이탈하여 자유롭고 그래서 난해한 그러기에 필연적으로 현란한 현학적 수사로 직행한다 지독히도 안 읽히고 지독히도 어려운 그래서 무지 재미없는 소설이 이 소설이다 더 어려운 소설도 읽어 본 적이 있던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문장이 어렵지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문장이 겹구조로 끝없이 순환하고 반복되어서 그렇지 그렇게 사변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이소설은 작심하고 관념의 땅을 거닐겠다고 작정했는지 곡예에 가까운 사념의 유희를 벌인다 아마도 작가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으리라 유럽인들이 전 세계에서 가장 사변적이라는 건 그들의 철학의 난해하고 왜곡된 현학에서 알 수 있듯이 유구한 역사와 두꺼운 전통을 지니고 있다 그 전통의 줄기에서 갈라져 나온 이 소설은 도대체 독자를 일치하게 하는 힘을 주지 않는다 독자를 빼앗아 와 자신에게 강제로 집어 넣어 이끌고 간다 독자에게 돌려 주는 건 어리둥절한 관념의 전시이다 그래서 지루하다 못해 현기증이 난다 20세기초의 유럽을 뒤덮은 정신의 맥락을 짚어 나가는 이 소설의 묘미는 지성의 대체불가능한 과도한 역할론을 보는 것이다 육체가 사라지고 피가 식으며 일체의 애정이 흩어진, 관념으로 살아가는 한 평범한 그러나 정신의 귀족이며 그 정신을 절대로 놓지 않는 남자의 여정을 따라 유럽이 안고 있던 육체가 거세된 사회의 불안을 섬세하게 또는 대담한 비약으로 형상화한다 요컨대 특성없는 남자는 자신의 생존의 조건으로 관념을 무기 삼아 투쟁하는 것이다 육체는 슬프고 영혼은 살해 당했으며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지성밖에 없는 시대의 총아이자 버림받은 이 그가 그토록 정신의 세계에서 거주하며 의식의 활동 속에서만 참다운 의미를 띠는 것은 그가 생명력이 사라진 남자라는 것을 말한다 즉 20세기초는 생명이 소실된 불모의 시대였다는 것 사람이 살아가기 위한 것들이 일체가 제거되고 주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가련하게도 정신의 세계속에서만 의미를 구하는 세계와 자신과의 머나먼 거리 속에서 그는 신음한다 차츰 소멸되어 가는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바라보며 그는 무의식적으로 방황하다 마침내 의식적으로 그것을 자각한다 어쩔 것인가 이대로 사라질 것인가 의미를 찾아 혼란스럽더라도 방황할 것인가 그 귀착점이 정신속으로의 후퇴는 관념의 필연적인 단계이다 관념 속에서만 그는 사랑을 하고 활동하며 숨쉰다 마침내 그는 거대한 물결 속에서 생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그 생을 복원할 어떤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집단에서 도태되고 자신으로부터 격리되며 세계와의 합일을 박탈당한다 세계는 진화하는 것인지 그는 그토록 관념적임에도 예감하지 못한다 요컨대 그는 암중모색의 안개와도 같은 관념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 어찌 보면 그는 그것을 즐기고 있는 것도 같다 그럴 수밖에 그는 관념으로 이루어진 사람이며 그외에는 특성이 없는 것이다 개인으로서의 자존도 없고 생활의 질감도 없으며 열정을 불태울 동기도 찾지 못하는 무력한 그는 오로지 자신의 운명을 정신의 탐구에만 쏟는다 앞으로 도래할 자신의 무기력한 운명에 대한 일종의 무의식적인 예감 앞에서 그는 자신의 삶이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시대와의 불화로 자신이 이탈하고 있다는 불분명한 자각을 함과 동시에 자신이 해야할 결단을 알지 못하는 이 저당잡힌 운명의 고아는 불우하다 시대가 변하고 세계가 회전하고 사상이 바뀌며 삶의 축이 갈아치워지는 거대한 변화에 그는 속수무책이다 다만 그런 자신의 운명을 알고는 있다 행동도 오로지 관념 속에서만 이루어지고 사랑마저도 관념이 지배하는 이 가상의 세계에서 그는 홀로 고립되어 있다 아마도 그를 유럽에서 분리된 섬으로서의 개인으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를 그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전체 속의 하나가 아니다 그렇다고 고유한 개별성의 존재도 아니다 그는 단지 사색하는 이방인, 조류에 밀려 떨어져 나온 모래알 하나일 뿐이다 그가 가야할 길은 예정되어 있다 소멸의 예정대로 그는 천천히 그러나 뚜렷히 사라진다 육체적으로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어디에도 속할 수 없었던 예민한 그 감각의 지성으로 그는 그 소멸의 운명을 느끼지만 그것을 막을 힘은 없다 그는 말하자면 손으로 만져지는 것을 외면하고 눈으로 보며 느끼지만 고개가 돌려져 있는 이탈자이다 차라리 그것이 어느 의미에서는 나았으리라 시대를 휩쓴 전체주의의 무기력한 광풍에 함몰되어 자아의 상실과 해체를 맛보기 전에 스스로를 순장시키는 소외의 해탈 아닌 해탈을 준비했으니까 사람은 자신의 그림자를 보며 길을 가는 법인 것도 같다
특성없는 남자가 사회의 어느 곳에도 적을 두지 못하고 일체의 활동에 의미를 잃어 자신의 고유성을 철학과 지성으로 대체하려 했던 그 무의미한 도피와도 같은 정신적 수난을 돌아보노라면 개인과 사회가 서로 침탈하기 보다는 외면한 그리하여 생의 요소들이 결핍되고 제거되기 시작한 20세기 벽두의 곤핍한 상황을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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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특성 없는 남자는 빠르게 읽히지 않는 특성이 있으며, 문장의 형태소들을
샅샅이 감각하며 읽을 수 있다면 무중력의 낯선 시공에서 미증유의 색다른 점에 매료될 여지가 충분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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