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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안도현은 자신의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을 두고, 기록으로는 전봉준이 서울로 압송된 때가 음력 정월이라는 것 밖에는 없지만 자신이 시의 배경으로 눈을 퍼부어주었기 때문에 만약 어떤 감독이 전봉준을 영화로 되살려낼 때는 반드시 눈이 내리는 날을 배경으로 할 것 같다고 했는데 그 말은 영화보다 소설로 먼저 실현되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이 순창 피로리에서 민보군들에게 붙잡혀 서울로 가는 동안 그 공간의 배경에는 늘 눈이 있었고 소설의 마지막 문장도 눈이 퍼붓고 있는 것으로 끝이 났다. 흰 눈은 소설을 읽는 내내 문장의 배경이 되어 녹두장군이 가는 길의 발자국을 깊숙이 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군이 기세를 올려 전주를 함락하자 겁이 난 조선조정에서는 서둘러 ‘화약’을 맺고 농민군을 해산시켰다. 농민군이 해산되었지만 동학군을 몰아낸다는 구실로 들어 온 청군과 일본군은 물러나지 않았고 오히려 이 땅에서 전쟁을 일으켰다. 평양에서 일어난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조선에서 마음껏 활개를 쳤다. 전봉준은 일본군을 몰아내야만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판단에 다시 한 번 농민군을 규합했지만 신식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우금치에서 대패한다. 이 책의 내용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농민군을 해산 시킨 전봉준은 옛 부하 김경천을 찾아간 뒤, 김경천의 고발로 민보군에게 사로잡히게 된다. 서울로 압송된 전봉준은 다섯 번의 신문을 받고 사형에 처해지는데 이때 그의 나이 마흔 한 살이었다. 소설은 전봉준이 김경천에 의해 사로잡힌 후 서울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이토 겐지를 내세워 삶과 죽음 사이에 갈등하는 전봉준의 내면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이토 겐지. 천종관. 일본제국의 의무관이며 이토 히로부미의 양아들. 그는 전봉준을 잡아 서울로 압송하는 도중에 전봉준을 위한 어떤 고생과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다. 섬에서 살다가 포졸들의 횡포를 견디지 못해 해안가를 측량하러온 일본인의 배에 무작정 올라타 일본으로 간 인물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부지런하고 똑똑해 보인 그를 양아들로 삼아 일본인으로 키우다 동학군이 일어나자 전봉준을 일본까지 무사히 데려오라는 명령과 함께 조선으로 보냈다. 이토 겐지는 전봉준에게 뺨을 얻어맞으면서도 끝까지 그를 회유한다. 그의 말은 죽음을 목전에 둔 전봉준의 마음을 뒤흔들기 충분했다.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는 당장의 충이나 의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는, 지금 그것을 잠시 젖혀놓고 무조건 살아나서 다시 장군이 장군의 날과 백성들을 위해 큰일을 하는 것을 하늘은 바라고 있어라우. (91쪽) 한양에 당도하자마자 죽을 목숨을 가진 전봉준은 이토의 말이 갖는 달콤함에 한없이 흔들린다. 마흔 하나, 죽기에는 너무나 억울한 나이. 이대로 죽기보다는 이토의 말처럼 일본으로 건너가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고 미국이나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몇 년 뒤에 돌아와서 조선을 위해 큰일을 하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은 것이 아닐까. 그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 그를 죽이고 자신이 죽는 것이 조선을 위한 일이 아닐까. 이토 겐지처럼 일본의 개가 되더라도 살고 싶다는 욕망 앞에 흔들리는 전봉준을 보는 일은 마음이 아렸다. 그는 그래도 괜찮았다. 이토 겐지의 말처럼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의 주역들 역시 미국으로 몇 년 피신한 뒤 돌아와서 조선의 관료가 되어 조선을 좌지우지하고 있지 않는가. 전봉준이라고 못할 일은 없다. 그러나 그는 살아서 일본의 개 노릇을 하는 것보다 죽어서 조선의 모든 사람들을 깨워야한다고 자신을 달랬다. 예수가 스스로 죽음으로써 영원히 살아있는 것처럼 자신이 잡혀 서울 가장 높은 곳에서 피를 뿌리며 죽어야 조선의 희망이 뿌리를 내릴 수 있다고 믿었다. 탐관오리들이 기승을 부리며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모든 것이 밝고 깨끗하여 살기 좋은 ‘희희호호’한 세상을 만들려고 몸부림쳤던 자신의 최후는 그래야 마땅하다고 믿었다. 전봉준이 동학의 우두머리가 된 이유는 부자와 양반들의 횡포 때문이었다. 탐관오리들이 돈을 주고받으며 벼슬을 사고팔고, 그 벼슬 값을 되찾기 위해 백성들의 고혈을 짜고 있는 희망 없는 조선에서 일본군과 썩은 벼슬아치들을 몰아내고 깨끗하고 올바른 지도자에게 나라를 맡겨 희망 있는 조선을 만들고자 했다. 그 일이 실패한 지금 전봉준은 서울로 압송되어가는 내내 자신이 살아서 한양까지 가야하는 이유를 자신에게 설득시키고 있었다. 자신은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붉은 피를 뿜으며 죽어야했다. 자신이 뿜어내는 그 피를 사람들 가슴에 적셔 조선인민들의 막혀있는 정신을 깨워야했다. 자신이 흙 밖에 모르던 정직한 사람들과 함께 봉기한 이유가 호의호식하고 권력을 탐한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내린 밥을 깨끗하고 정성스레 나누어 먹는 세상을 위한 것이라 걸 알려야 했다. 생사에 대해 내면적인 갈등을 겪고 있던 전봉준과는 달리 전봉준을 압송하고 있던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앞길에 걸리는 것이 있으면 마음대로 해치는 만행을 저질렀다. 전봉준의 가마를 메고 가는 가마꾼들이 발이라도 삐기만 하면 칼로 찔러 죽이고 총으로 쏘아 죽였다. 자신들의 행렬을 본 사람이면 누구라도 죽였다. 나루터에 있던 양민들을 학살하고 배를 태워준 뱃사공을 죽였다. 자신들의 밥을 지어준 주막집 부부를 죽이고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마루를 뜯어내 장작으로 사용했다. 자신들이 먹을 한 끼를 위해 그 집의 재산인 돼지, 닭을 강탈하고 역졸들을 함부로 가마꾼으로 징집해 부리고 다치면 죽였다. 이런 만행이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이어져 나라에 힘이 없으면 백성들이 어떤 고초를 겪는가를 똑똑히 깨우쳐 주고 있었다. 이 책에서 내가 중요하게 본 인물은 전봉준과 그를 고발한 김경천, 그리고 전봉준을 일본에 데려가기 위해 최선을 다한 이토 겐지였다. 이 셋은 모두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지만 한 사람은 의인으로 남았고 한 사람은 천박한 배반자로, 또 한 사람은 일본의 개라는 소리를 듣는다. 전봉준이 백 년이 넘은 지금까지 민중들에게 영웅으로 불리고 있는 것은 그의 선택이 자신에 머물러 있지 않고 만인을 위했기 때문이었다. 전봉준 역시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죽음과 삶의 기회가 함께 찾아왔을 때 갈등하고 또 갈등했다. 그러나 그는 혼자서만 잘 살기보다는 만 사람이 함께 잘 사는 세상을 꿈꾸었기에 죽음을 선택해 조선 사람의 의기를 세상에 떨쳐 보일 수 있었다. 김경천 역시 남들보다 똑똑해서 주변의 상황을 남 먼저 읽으며 자신의 길을 정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처신은 그 자신의 안위 하나에 머물렀으므로 그는 소인배의 낙인이 찍힌 채 살아갔다. 이토는 자신이 잘 살기 위해 무작정 일본으로 도망친 사람이다. 자신의 부모가 섬에 남아있지만 자신을 받아준 양아버지 이토 히로부미의 명령을 착실히 수행하기 위해 아직 집에도 한 번 들르지 않고 전봉준을 회유하기에 바쁘다. 그는 일신의 안복을 삶의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부모 형제가 살고 있는 조선을 배반하고 일본의 종이 된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못난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전봉준을 고발한 대가로 천 냥을 받기로 했던 전봉준의 옛 부하 김경천이 받아든 돈은 삼백 냥에 지나지 않았다. 위로부터 아래까지 이리저리 떼어가고 남은 돈이었다. 김경천은 그 삼백 냥을 또 여기저기 나누어 주고 나서 자신에게도 얼마쯤의 돈을 남길 것이다. 그러나 그 돈의 대가는 전봉준이 녹두장군으로 불리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 “희희호호한 세상을 꿈꾸며 민중을 이끈 지도자”로 새겨진 반대편에서 자신이 한 때 따른 지도자를 배반한 자의 이름으로 남아 땅 아래 누운 그를 괴롭게 할 것이다. 우리는 늘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안고 살고 있다. 이 질문에 양반출신 동학도인 이방언의 말을 빌려 답해야겠다. “나 혼자서만 잘 먹고 잘 살면 무엇을 할 것인가. 백성들과 함께 잘 살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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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대통령 선거 운동이 한창일때 여동생네와 함께 주말을 맞아 순창에 있는 전봉준 장군 피체지에서 하룻밤을 묵었었다. 운동장처럼 넓다란 방에서 두 집 일곱 식구가 뒹굴거리며 음식을 해먹었었다. 밤 11시쯤 되었을까. 서울에서 갑자기 선거관계 사람이 내려온다는 연락을 받고, 신랑은 우리 가족을 버리고 새벽에 사무실로 돌아가고, 느지막히 일어난 여동생네와 우리는 밖에서 음식을 해먹고 전봉준 장군의 피체지를 한 바퀴 돌고 기념사진도 남겼었다. 역사책에서만 볼수 있었던 동학혁명을 일으켰던 녹두장군이 마지막으로 체포되었던 곳이라 의미가 깊어 아이들에게 설명을 해주었었다. 우리가 묵었던 그 장소가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곳이었다는 게 우리로서는 왠지 숙연한 느낌도 들게 했다. 방이 몇개 되지 않지만, 동학혁명을 일으켰던 전봉준 장군을 잊지 말자는 취지에서 수련관처럼 숙소를 마련해 그 의미를 되새겨보자는 뜻 같았다.
그후 몇개월이 흐른후 동학혁명을 일으킨 전봉준 장군을 이곳에서부터 한양까지 압송해 가는 과정을 그린 한승원 작가의 소설이 연재된다는 걸 알고 반가웠다. 전봉준은 왜 동학혁명을 일으켰는가, 조선 사람도 아닌 일본 군대가 전봉준 장군을 압송해 간 이유는 무엇인가를 알 수 있었고, 살아야 할 것인가, 죽어야 할 것인가 번민하는 전봉준의 속내를 알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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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장군이 그토록 몰아내고 싶었던 일본군에게 끌려가고 있는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웠다. 전봉준 장군을 끌고가는 일본군 중에는 조선 출신이 있었다. 이토 겐지라는 자로 전봉준 장군을 생포하기 위해, 직접 동학 혁명을 하는 이들 속에 숨어서 그들을 살폈다. 또한 그는 조선을 집어 삼키려는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로 한양까지 올라가는 길에 전봉준 장군의 곁에서 일본으로 가 훗날을 도모하라고 그를 회유하고 있었다. 그런 이토의 말을 듣는 전봉준은 한 편으로는 살고 싶었다. 살아서 자신의 아내를, 자식들을 바라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어떻게든 종로에서 조선 사람들이 보이는 곳에서 죽어, 그의 피를 조선인들 모든 사람들이 보았으면 했다. 동학혁명을 일으켰던 자신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바랬다.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기를 바랬던 전봉준이 그렇게 죽어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 그의 말대로 몇십년이 지난 뒤에는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세상이 되었다.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 ![]() 전봉준 녹두장군 피체지(전북 순창군)
우리는 전봉준 장군이 뜻하였던 바를 잊지 말아야겠다. 우리가 현재 이렇게 누군가의 종으로, 누군가의 양반으로 있지 않다는 사실, 결국 전봉준이 바라던 바가 아니었던가.
한 인간의 삶에 대한 고뇌, 죽음에 대한 고뇌를 알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어떻게 죽을 것인지,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될 것인지, 죽음으로 인해 사람들은 어떻게 바뀔 것인지 고뇌했던 전봉준의 고뇌를 볼 수 있었다. 2013년이 다시 갑오년이라고 한다. 이런 시점에 전봉준 장군이 부르짖었던 것을 다시한번 되새길 수 있는 책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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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에 있어 빠질 수 없는 인물이 녹두장군 전봉준이다.그의 삶은 짧고 굵었지만 역사에 남긴 가치와 교훈은 길이 남을 것이다.그가 태어나던 1855년 무렵 조대비가 왕조를 쥐락 펴락하고 탐관오리 및 부패관료들의 학정 그리고 조선을 개화하느냐 그대로 쇄국의 길을 걷느냐 등으로 갈팡질팡하던 시절이 이어지고 전봉준이 본격적으로 탐관오리,외세의 침입에 분연히 일어서게 된 것은 그의 아버지 전창혁이 탐관오리의 대명사 조병갑에 의해 난장질에 의한 옥사가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 글은 한울님을 믿는 동학교도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세력이 조선 전국을 강타하던 차,동학교도들은 하나 둘씩 제 갈 길을 가려고 민보군을 창설하는데 그들은 전봉준을 체포해 주는 댓가로 거액의 현상금을 걸게 하면서 시작된다.그는 휘하 부하였던 김경천의 지시에 따라 그의 몸을 피체(被逮)하여 발등과 정강이뼈를 못쓰게 만들어 놓는다.전봉준은 가마꾼,일본장교,이토 양아들과 함께 길고도 지루하며 고통스러운 119일 간의 일지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음을 알게 된다.한승원작가의 쉼없는 스토리텔링과 서사적이고 개연성이 한데 어우러져 전봉준이라는 인물이 왜 위대하고 본보기가 되고 있는가를 새삼 깨닫게 해 준다.
입에 재갈이 물리고 두 손과 두 다리는 포승줄에 결박된 채 순창 피로리를 떠나 담양,정읍,전주,우금치(牛禁峙),공산성,수원,한양에 이르게 된다.당시 한양으로 가는 길은 때가 한겨울이어서인지 추위와 상처로 인한 고통,전봉준을 이토히로부미의 양아들로 만들기 위한 이토의 회유가 끈질기고 집요하게 이어지는데 전봉준도 한 인간인지라 자신의 뜻을 저버리고 일본의 주구가 될 것인가를 놓고 잠깐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그는 끝내 동학의 한울님을 모시고 자신으로 인해 죽어간 동학교도를 생각하고 탐관오리,변절한 갑신정변의 주역들에게 나라를 맡길 수는 없다는 지조와 절개를 끝까지 지켜 낸다.
사람은 늘 두 상반되는 의지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는 존재이다.이 지점이 바로 사람과 귀신이 갈리는 관건이고,선과 악이 나뉘는 기미로서,사람의 마음에 도의 마음이 교전하고 의리가 이길지 욕망이 이길지 판결이 나는 때이다.사람이 이때 맹렬히 성찰하고 힘써 극복한다면 도에 가까이 다가갈 것이다. - 정약용 <맹자요의> 중에서 -
그래도 전봉준이라는 인물의 장래성을 높이 평가하되 전봉준을 잘 활용하여 개인의 명예와 권력 뿐만 아니라 장차 조선식민지 활동에 가교역할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이토,천우협의 다나카,법무대신 서광범 등이 전봉준을 새삶을 살아야한다고 강권하지만 끝내 그의 생각을 되돌리지 못한다.그가 차가운 형장에서 망나니에 의해 참수가 되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목이 베여 운종가 저자거리에 걸려지고 그 피는 만인의 가슴과 모든 탐관오리들의 가슴에 뿌려져야 한다고 시종일관 주장한다.
불혹의 나이에 일찍 삶을 마감했던 전봉준은 탐관오리를 몰아내고 모든 백성들이 평등하게 살아갈 것을 원했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시국은 그의 편이 아니었던 것이다.그는 이토의 간곡하고 끈질기며 인간적인 면까지 내세워 그를 이토의 제2 양아들로 만들려 했던 회유작전은 반강제적이나마 성공할 수도 있었는데 법무아문의 결정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비록 그의 육신은 사라졌지만 그의 고귀한 영혼과 넋,유지는 사회에서 소외되고 힘없는 계층들을 대변하고 있기에 갸륵하기만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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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살다간다. 일상을 얽매는 삶의 무게에 짓이겨 힘들게 사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영달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도 있고, 때론 자신의 삶보다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고자하는 사람들도 있다. 가치 있고 없고, 옳고 그름을 떠나 누구에게나 한번뿐인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는 스스로 결정하게 된다. 하지만,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에는 다양한 조건이 따라 붙게 된다. 그 조건에는 그 사람이 처한 개인적 여건을 비롯하여 사회적 환경도 한 몫 한다. 그리하여 한 사람에 대한 이해는 개인의 배경과 함께 그 사람이 살았던 시대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때 올바른 이해가 가능해 지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은 역사 속 인물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더욱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역사 속 인물은 그 사람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조건에 제약이 많기 때문에 더욱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더라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이 살아가는 시대의 가치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기에 역사라는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지점이 되기도 한다. 이것이 역사를 만나는 이유가 될 것이다.
한승원의 '겨울잠, 봄꿈'도 역사 속 한 인물을 만나게 된다. 그는 조선말 1894년 동학혁명의 지도자로 녹두장군으로 알려진 '전봉준(全琫準, 1855 ~ 1895.4.24)'이다. 사람이 가진 생명력에 관심을 갖고 이를 작품 속에 구현하고자 애쓰는 작가의 작품으로 다시 탄생한 것이다. 그의 작품 '초의', '흑산도 하늘 길', '다산' 등에서 역사 속 인물들을 작가 특유의 시선으로 독자들과 만나게 하여 다양한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작가다.
'겨울잠, 봄꿈'은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로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전봉준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 아닌 동학혁명군이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참패를 당한 1894년의 겨울, 패주한 동학군의 지도자 전봉준이 밤을 도와 잠행하다가 민보군과 일본군에 의해 붙잡혀 한양으로 끌려가는 천리 길의 기나긴 참담한 여정을 그려낸 것이다.
패전 그리고 붙잡힌 패장은 이미 죽음이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죽음이 결정된 사람이 어쩌면 살 수도 있는 길이 있다면 그 심정이 어떨까? 자신의 삶을 지탱해준 대의명분을 지켜 나갈 것이지 아니면 그것이 자신을 회유하는 것임이 분명한 것을 알면서도 흔들리는 것은 당연지사일 것이다. 저자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하여 '겨울잠, 봄꿈'을 이끌어가고 있다.
백성에 의해 혁명의 지도자로 그리고 수만의 죽창 그 맨 앞자리에 선 그가 그들에 의해 배신당하고 몸이 부서져 죽음의 길에 서서 동학농민혁명의 지난 과정을 돌아보며 스스로의 길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지 되 뇌이고 있다. 죽어간 사람들과 한양으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자신으로 인해 죽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회한이 함께하고 있다. 압송되는 길이 동학농민혁명의 격전지를 비롯하여 동학군들이 걸었던 길을 지난다. 지금은 이미 그 길에 함께 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없다. 그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결국, 어떻게 죽을 것인가가 문제인 것이다. 한 사람의 죽음과 이어지는 사람들 속의 기억이 어디에 머물게 될지 그것은 죽음의 성격에 달렸을 것이다. 이 점이 작품을 통해 인간의 생명력에 대한 구현을 실현하고 있는 작가의 의도와 전봉준이 죽음의 길에서 죽음을 선택한 전봉준의 길과 한길로 만나고 있다고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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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의 대서사시를 읽은 느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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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시작과 끝만 어렴풋이 알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가끔 읽게 되는 역사소설을 대할때마다 스스로 부끄러움과 함께 역사속을 살다간 선조들의 끈기와 희생에 언제나 찬탄을 금치 못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1894년 갑오년 4월 전라도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농민운동을 일으키고 그해 12월 그와 함께 봉기 하였던 농민군과 일본군에 붙잡혀 한양으로 압송되어 이듬해인 1895년 을미년 3월에 죽음을 맞게 되는 전봉준. 그리고 청일 전쟁이 발발하고 청의 간섭에서는 벗어났으나 일본의 섭정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었던 동학농민운동. 그렇게 농민운동을 일으키고 쓸쓸히 죽어간 전봉준의 마지막 길은 잘 알지 못합니다. 그가 한양으로 압송되던 그 천리길의 지옥같은 여정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비록 역사적 사실에 살을 붙인 소설이라 할지라도 이 책을 읽고 있는 동안에는 그 모든것이 역사적 사실인것 처럼, 안타깝기 그지없는 치욕을 고스란히 느끼는 전봉준을 옆에서 보고 있는듯 가슴이 짠해옴을 느꼈습니다.
일본군의 개입으로 우금치에서 패한 농민운동의 수장 전봉준은 같이 농민운동을 하였던 부하들과 백성들에 의해 붙잡히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그 부하와 백성들은 몽둥이로 전봉준을 걷지 못하게 하였고 전봉준을 실은 가마의 가마꾼이 되어 천리길의 여정을 같이하게 됩니다. 그 여정엔 그렇게 가마꾼이 된 네사람과 일본군인들, 그리고 이토히로부미의 양자가 됐다는 조선인 이토겐지가 함께 합니다.
추운 겨울의 험난한 여정속에 부러진 정강이를 감싸놓은 천조각속에 득시글 거리는 이와의 싸움. 혀를 깨물고 자결할까 물려놓은 재갈(위아래 이빨 사이를 들어 올리고 나무조각을 가로로 끼워 넣은다음 조각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수건으로 조여 뒤통수에다 묶어 놓은것)의 고통. 그 재갈속으로 남이 씹던 음식을 받아 삼켜야하는 처절함. 특히나 백성을 위해 농민운동을 일으킨 수장이 백성들에게 약탈해온 음식을 먹어야 하는 치욕까지. 그 와중에 이토 히로부미에게 충성을 약속하면 앞날이 보장된 삶을 약속한다는 이토겐지의 끝없는 달콤한 유혹앞에서 흔들리는 자신을 다잡는 전봉준을 보며 그저 농민운동을 일으킨 수장이 아니구나 하는걸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사람들에게 다 하고 죽어야 한다. 우리는 왜 봉기했으며 우리의 주장과 꿈은 무엇인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은 각자가 다 한울님이므로 박해 받거나 착취당하지 않고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꿈이다. 우리의 그 꿈은 십년 뒤에 든지, 이십년 뒤에 든지, 오십년 뒤에 든지 백 년 뒤에 든지 반디시 이루어질 것이다.(58쪽)
대관절 무엇이 두려워 사방이 막힌 이 눈밭에서 꼭두새벽에 죽이려 하느냐?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잘라 죽여라. 내 피는 종로 거리를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과 이 땅의 모든 탐관오리들의 가슴에 뿌려져야 한다. 그들의 가슴에 뿌려진 피는 우리 조선사람들의 자자손손의 가슴으로 이어져서 이땅에 탐관오리들이 기승을 부리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327쪽)
항상 역사소설을 읽을 때면 역사적 사실과 소설속의 이야기가 뒤죽박죽이 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역사소설이 그렇듯 <겨울잠, 봄꿈> 또한 가장 큰틀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거죠. "보국안민, 척양척왜, 제폭구민"의 기치를 내걸고 외세와 착취에 맞섰던 녹두장군 전봉준. 119일간의 고통과 치욕의 긴 여정에서 삶과 죽음의 갈림길과 유혹을 오직 이 나라를 위해, 이 나라의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죽음을 맞이한 그이기에 오척 단신이었다는 그가 한없이 커보이는 내용이었습니다. 자신의 고향인 장흥을 배경으로 서민들의 애환과 생명력, 한의 문제를 다루어 오셨다는 한승원 작가님. 작가님의 책은 처음이지만, 그리고 그 한이 무언지 글로는 설명한 순 없지만 책을 읽는 내내 가슴속에 묵직한 뭔가가 느껴집니다. 이 책은 반드시 딸아이에게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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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지 못한 봄의 꿈은 처절했다 - 겨울 잠, 봄 꿈 _ 스토리매니악
내가 우리 역사 중에 제일 싫어하는 시기가 바로 '구한말~한말'이다. 단순히 망국의 시기, 치욕의 시기라는 점 때문은 아니다. 한 나라가 망하거나 바뀌면서 보이는 여러 이유 중에, 이토록 한심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시기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은 그것이 망국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물론 그 시기에 반짝반짝 빛나는 위인들도 많다. 나라를 어떻게든 구해 보려고 동분서주 하는 인물들인데, 그 중에 눈에 띄는 이는 단연 녹두장군 '전봉준'이 아닐까 싶다.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이자, 하마터면 조선이라는 나라를 개혁할 뻔 했던 인물로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진하게 장식하고 있는 인물이다.
이 소설은 바로 이 전봉준을 중심인물로 하고 있다. 동학군이 일본군의 기관총에 무참히 쓰러져 대패하고 패주하여 한 마을에 숨어든 전봉준이, 자신의 부하였던 자의 밀고로 일본군에게 붙잡혀 한양으로 이송되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나라의 썩은 부분을 도려 내고자 앞장섰던 인물이 처참히 죽을 곳을 향해 가며 겪는 내적 갈등이 잘 드러나 있는 소설이다.
1894년 겨울에서 이듬해 봄까지 전봉준의 죽음을 향해 가는 여정을 바짝 쫓아가며, 치욕의 시간을 그리고 있다. 패장으로서, 혁명의 실패자로서, 나라의 군이 아닌 침략자의 군에 의해 쓸쓸히 이송 되는 그의 모습은 정말 처절하다. 죽지 못하고 한양까지 가야 하는 이유를 가슴에 품고, 자신을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로 들이려는 갖은 회유를 접하며 죽음의 길을 가는 전봉준의 여정은 고달프기만 하다.
실패한 자의 처참한 갈등을 아주 잘 묘사하고 있는 소설이다. 처참함, 치욕, 절망의 감정들을 온전히 쏟아 내며, 그 분노를 표출할 곳을 찾아 울부짖고, 자신을 회유하는 갖은 속삭임에 갈등하는 인간 전봉준의 이야기가 실감나게 그려지고 있다.
교과서로만 접한 전봉준과 소설 속의 전봉준은 많이 달라 보인다. 그 천리의 이송 길 동안 전봉준이 과연 어떤 생각을 하였을지 실상은 알 수 없지만, 과연 소설 속의 절망을 담고 있었을까를 상상해 보게 된다.
하지만, 언뜻 작가가 그리고 있는 전봉준의 모습에 고민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 삶에 대해, 나라에 대해 회유에 대해 고뇌하는 전봉준의 모습에 쉽사리 공감하기가 어렵다. 동학의 큰 뜻을 품었던 인물이 치욕스런 회유에 침묵 하고, 그 회유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는 방법이 동학의 선봉에 선 전봉준의 모습과 쉽사리 겹쳐지지 않는다.
전봉준이 조선에 대해 걸고 있는 기대, 그 기대의 실체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 해주지 않음에 따라, 그의 고뇌가 쉽사리 와 닿지 않는다. 오히려'이토'라는 인물이 전봉준을 회유하려 쏟아내는 말들이 더 설득력을 가지는 것 같다. 적어도 그는 전봉준을 살려내려 하는 이유가 분명하다.그 목적을 위해 노력하고, 끝 없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반면, 전봉준은 자신이 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명확히 설득시켜 주지 못한다.
이런 괴리가 굴곡 없는 전개로 더 두드러진다. 이야기의 대부분이 전봉준의 이송 길을 묘사한 장면들인데, 막판의 한양에서의 장면들을 제외 하고는 너무 단순해 보인다. 전봉준의 고뇌의 강도는 더해질지라도, 어제와 같은 오늘의 에피소드. 어제와 비슷한 오늘의 생각은 글과 나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어 버린다.
전봉준의 처절한 여정, 끝 없는 고뇌에 초점을 맞추었다고는 하나, 그 과정이 반복되면 향기가 옅어지는 법이다. 조금은 다른 장치들로 읽는 사람의 감정을 흔들어 주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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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새 노래를 알고 전봉준을 알지만, 역사의 한 페이지로 공부했다가 잊혀져버린지 오래, 다시 읽는 그의 이야기는 새삼 애잔하기가 그지 없었다. 도망할 것을 염려해 일부러 부러뜨린 발이 낫지 않아 혼자서 화장실에도 못갈 처지인 전봉준은 가마에 태워져서 서울로 호송되면서 이러저러 생각이 많다. 어찌해서 이런 일에 몸담게 되었을까 하며, 종국에는 양반들의 학정때문에 억울하게 죽어간 아버지께서 윤참판댁을 뒤로 하고 나올때의 말을 기억해낸다.:"부자와 양반들의 문턱은 높고, 그들에게서 얻어먹는 밥은 짜다.(p.87)" 어린 시절을 시작으로 가끔씩 기억해내는 그의 인생의 전환점들에서 전봉준은 가난하지만 내내 올곧은 정신으로 민초들의 아픔을 이해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띤다. 또 한편으로는 한없이 겁에 질리고 작아져서 자신이 사형당할 것이 뻔한 먼 길을 가면서 무고한 가마꾼들이 죽어나가고, 묵어가는 주막마다 죽어가는 목격자들이 생기는 것에 절망하면서 '한울님'을 부르짖으며 절망하는 인간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다만 사내로서 자신이 품었던 여인들을 기억해보기도 한다. 하마 죽었거나 자신과 똑같이 죽음을 향한 길을 가고 있을 동지들을 생각하기도 하고, 삼족을 멸한다는 법에 따라 잡히면 모두 죽게될 자식들과 아내를 생각하기도 한다. 녹두장군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데, 왜 전봉준에 대해 새로 쓰고 싶었을까 생각을 염두에 두고 읽기 시작했었다. 아마도 작가는 역사의 인물 전봉준이 아니라, 어찌하다 역사의 격랑 속에 인생이 휘말려버린 한 인간을 그리고자 했던 것 같다. 백산에서 동지들과 함께 죽창을 들고 외치던 초심을 떠올리며, 죽음 앞에서 초라해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한 인간에게 다가오는 모든 미묘한 감정들과 인생에 대한 회한들. 어쩌지 못하고 문득 떠오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 앞에서 약해지는 자신을 향한 간교한 회유의 말 앞에서 약해지려 약해지려하는 의지를 다시 세우곤 하는 고집스런 집념. 더 살고싶다는 욕망을 자존심으로 다시 억누르며 더 슬퍼지는 이 가련한 사형수의 마지막 길에는 눈이 내려서 쌓여서 더 시리고 외롭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 힘차게 함성을 지르며 달렸던 땅들을 이제는 제 발로 걷기도 못하고 지나치면서, 초라한 한 사내가 되었다가, 가족을 그리는 가장이 되었다가도 마지막에는 언제나 꼿꼿하게 녹두장군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그 한줄기 의지가 너무 대견하고 아프다. 종로 네거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민중을 깨우는 말을 하고 사람들의 가슴에 자신의 피를 뿌리고 죽고자 하는 소망으로 그 긴 춥고 두려운 길을 견뎌낸다. 죽음을 향해가는 길 내내 소망하였던 그 마지막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책을 덮고도 마음 한편이 쓰리다. 그러나 훗날의 역사를 보면 그가 흰 눈밭에 뿌린 그 서러운 피가 이 땅에 스민 것만은 분명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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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생각을 합니다. 만약, 역사가 다르게 흘러갔다면..... '동학농민운동'이 다른 방향으로 되었다면 이 나라는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말이죠. 아픔과 슬픔이 남겨져 있는 역사 그렇지만 우리는 이 역사를 통해 다시는 겪지 말아야 하는 다짐을 가져 하는데도 쉽게 잊혀지는 모습들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학창시절 들었던 '녹두장군 전봉준' 하지만, 세세한 내용보다는 이러한 일들이 있었다라는 설명과 함께 현지 답사를 다녀왔던 기억이 나는데 그 순간이 지금에서야 너무 부끄럽습니다. 한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분..이 한반도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생각할 때면 그렇게 찾고자 했던 나라인데 지금은 어떠한 모습인지....역사는 이 땅에 살고 있는 한 반드시 알아야 하는 부분인데 그렇지 못한것이 슬프기만 합니다.
그리고 오늘 만난 '겨울잠, 봄꾼'은 백성을 위해 일어섰고, 백성을 위해 죽어간 '전봉준'선생님의 마지막 생애 119일을 소설로 풀어주었답니다. 동학농민 운동에 실패해 도망치지만 다시 일어설 수 없음을 느낀 그가 스스로 잡히고 한양까지 가는 여정의 이야기...초반, 그를 밀고한 사람의 모습을 보면 마치 예수를 판 유다의 모습이 비춰졌는데 다시 부활한 예수와 죽음을 택한 유다 처럼 흘러가기를 바랐으나 진실을 알고 있기에 참으로 마음이 씁쓸했답니다.
또 하나,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인물입니다. 그는 '전봉준'을 양아들로 삼으로는 계획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돕기 위한 그의 아들인 '이토'가 조선과 중국 그리고 광활한 지도속에 있는 서양 나라들을 포함하여 꿈꾸고 있는 야망에 대해서 설명할 때 과연 고뇌에 빠지는 '전봉준'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습은 그가 살아남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 인해 이 나라가 더 나아질 수 있는 것인가 라는 것입니다.
최근 모 프로에서 '안중근' 선생님에 대한 다른 내용이 들리면서 조국를 그토록 그리워하고 자유를 꿈꾸었던 그 역사를 힘이 없기에 겪어야 했던 굴욕과 수모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자랑스럽게 보였습니다. 자아의 뿌리를 찾듯이 당연히 나라의 뿌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점점 세대가 흐르면서 엷어지는 것 같아 무섭기만 합니다. 더욱더 단단해져야 하는 요소인데 말이죠.
<겨울잠, 봄꿈>은 이렇게 소설로만 읽고 넘길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마지막 119일'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그들에게 결국 '전봉준' 선생님의 그 자체로 희망이 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다는 것을 말하고 싶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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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흔히 수레바퀴 같아서 흥했다 망했다 하는 흥망성쇠를 반복하는 일련의 과정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 나라는 망국의 길을 필연적으로 걸었고 미래를 준비한 나라는 부국강국의 길을 역시 필연적으로 걷게 된다. 이것은 수천 년 인류역사를 통해 확인한 진리이자 교훈이다. 그렇다면 한국 근대사에 있어 동학혁명은 어떤 위치에 놓여있는 걸까? 올해로 혁명 발발 119주년을 맞이하는 현 시점에서 말이다.
나 자신도 간과했던 그리고 우리들도 결코 그 의의에 스스로 빛을 가렸던 동학혁명은 의외로 세계사에 있어 보다 큰 의의와 가치가 부여되고 있음을 뒤늦게 알 수 있다. 19세기 중 일어난 세계 민중혁명 중 최대 규모이고 프랑스 시민혁명, 독일 농민혁명, 중국 태평천국의 난과 함께 세계 4대 근대시민혁명의 하나로 당당히 꼽힌다는 역사적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 정도였던가? 그래서 동학혁명이 내건 '보국안민'과 '제폭구민' 같은 기치를 필두로 외세 배격과 신분제도 철폐를 주창하면서 우리나라 근대 민주주의의 출발을 알렸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우리는 동학혁명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참담한 실패라는 결과를 낳았는지 이미 역사시간에 배웠으니 이 소설에서 정말 그려내고 싶었던 시간적 배경은 봉기과정도 우금치 전투에서의 패전도 아니요, 탄압 속에서 전국에 퍼져 나갔던 동학 이념을 구체적으로 설파하고 있지도 않는다. 단지 패전이라는 참담한 겨울잠 이후 얼어붙은 이 땅에 봄이 찾아들기를 갈망했던 녹두장군 전봉준의 일대기를 봄꿈이라는 상징성을 빌어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은 쓰리고 눈물이 나려 한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녹두장군을 그리는 노래도 참 애달프지만 왜 녹두장군이라고 불렸는지도 모르고 있었다니 새삼 부끄러운 역사인식 앞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콩 중에서도 작은 녹두는 체구가 남달리 작지만 다부졌던 전봉준을 일컫는 별칭이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이 노래를 부르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니 약소국의 설움이 아니었겠는가? 그러한 배경을 뒤로 한 채, 녹두장군 전봉준이 우금치 전투의 패전으로 거사에 실패하고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일본군에 체포되어 한양까지 압송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까지의 마지막 119일에 대한 고난의 기록이 여기 있다. 당시 조선인으로 태어났지만 일본인으로 귀화해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가 되어 일본인보다 더 뼛속 깊이 일본인이 되어버린 이토 겐지의 회유는 그야말로 마지막까지 귓속을 간질이고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깊고 질었다. 이미 저물어가는 동방의 나라 조선의 백성으로 살다 죽을 것인가? 새로운 개화문물을 받아들여 강국으로 새로이 거듭나고 있는 일본을 제2의 모국으로 감아 이 더러운 세상을 갈아엎는 길을 택할 것인가? 아직 죽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다. 전봉준은 마음이 흔들린다. 그러면서 한양으로 압송되는 와중에 일본군들이 수시로 부상당한 가마꾼들과 백성들을 기밀유지를 빌미로 무참히 학살하는 만행을 목격할 수밖에 없는 암담한 현실에 좌절하고 치를 떨며 그들에 하늘의 천벌이 내리기를 소망한다. 그러면서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려야한다. 이토 겐지의 말 대로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로 입적되어 또 다른 방식으로 구국운동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 자신의 피를 뿌려 조선민중들에게 화약심지에 불을 붙일 도화선이 될 수만 있다면 기꺼이 한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결심은 더없이 숭고하다. 무엇을 주저하랴? 늦으면 늦을수록 후회만 있을 뿐이다. 그것이 비록 한때의 헛된 꿈, 즉 봄꿈이 될지라도. 밥이 하늘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모두 밥을 만들려고 산다. 밥을 쟁취하려고 싸운다. 더러운 밥이 있고, 깨끗한 밥이 있고, 떳떳한 밥이 있고, 부끄러운 밥이 있다. 내가 일어선 것, 고부 사람들이 관아로 몰려가 사또에게 대든 것, 아버지가 사람들의 소두로서 항거하다가 곤장을 맞고 장독으로 죽은 것, 호남 일대의 사람들이 죽창을 들고 일어선 것이 다 이 밥 때문이었다. 일본 사람이 조선 땅에 들어온 것도 조선 사람의 밥을 빼앗아 가려고 온 것이다. 나는 죽을 때 죽더라도, 그 슬픈 밥에 대하여 모두 말하고 나서 죽어야 한다. (본문 중에서) 그렇다. 중요한 것은 밥이다. 백성들에게는 먹고 사는 문제만큼 중요한 건 없다.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든 민씨 일파가 정권을 잡든, 탐관오리가 부정부패를 저지르든, 열강이 조선의 국권을 집어삼키든, 그런 거창한 대의명분보다 굶지 않고 배불리 먹고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더 절실했다. 그것을 위정자들은 허울좋은 이념을 앞세워 눈 가리고 아웅하고자 할 뿐이다. 누가 알아주기만 바랄 세월의 넉넉함이 없었기에 분기탱천했다. 전봉준의 삶은 그렇게 불꽃같이 피어올랐다가 사그라들었다. 한승원 작가가 전봉준의 고뇌를 따라가는 과정들은 그래서 고통스럽다. 결말을 알지만 그의 목숨을 구명하고 싶은 안타까운 열망을 한 폭의 수묵화처럼 구슬프게 그려낸다. 그 빼어난 서정성을 무엇에 비유할까 역사는 굴러가는 수레바퀴라고 서두에서도 밝힌 바 있다. 이 뜻 깊은 역사적 사실에 대해 아직도 기념일로 제정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잊지 않기 위해서도 역사에 대한 오판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한시바삐 기념일이 제정되어 현재를 바삐 살아가느라 옛 일을 돌아다 볼 겨를이 없는 우리 후손들에게 교육의 장이 되었으면 한다. 그런 차원에서 한승원 작가의 "여름잠, 봄꿈"은 한국인이라면 반드시 읽어야할 필독서가 될 것이다. 아니 되었으면 한다. 전기물로 받아들이기에 앞서 한 인물의 삶을 흐드러진 봄내음으로 담아내며 문학성이라는 빈자리를 지켜내고 있는 탁월한 소설이기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