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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석영, 「가객(歌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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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건너편은 일반 사람들이 사는 저자이고, 강 이쪽 편은 외눈박이의 조그만 문둥이 거지인 서술자 ‘나’가 사는 거칠고 막막한 들판이다. 이쪽 편에는 들쥐와 살쾡이와 개구리와 뱀들만이 우글거린다. “저자에서는 밝고 훌륭하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히히덕거리는 말의 부서진 쪼가리들이며, 기름진 음식이 익어가는 냄새, 그리고 무엇보다도 놀이터에서 들려오는 흥겨운 음률의 가락이 물을 건너서 내 코와 귓전에까지 날아와 후벼대곤 했다.”(138쪽) 문둥이라는 이유로 강 이쪽으로 내쫓긴 ‘나’는 밤이면 들짐승들이 부르짖는 소리에 질리고 떨려서 잠들지 못한다. 그럴 때마다 그는 여름 꽃밭처럼 다투어서 피어난 작고 큰 모닥불과 등롱과 둥근 창, 모난 창의 촛불들이 어우러진 저자의 밤거리를 애타는 눈으로 바라본다. 저자에 사는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은 땅에서 ‘나’는 이 세상의 아름다운 이치를 깨닫게 해준 수추(壽醜)라는 인물을 떠올린다. ‘나’는 죽은 수추가 되살아나 저자의 한가운데 서서 노래를 부르며 모든 썩은 것들을 몰아내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수추가 도대체 어떤 노래꾼이기에 ‘나’는 그를 이리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일까? 소설의 시간은 과거로 돌아간다. 진눈깨비가 몰아치던 어느 이른 봄날 점심 무렵 비렁뱅이 가객 하나가 거문고를 메고 저자로 들어선다. 다리 아래 쪼그려 앉아 또랑물을 바라보던 ‘나’는 이상한 가락이 목덜미에 깊숙이 꽂히더니 정수리에서 발뒤꿈치로 뚫고 들어와 맴돌아 나가는 신비한 경험을 한다. 싸늘하고 구죽죽한 저자를 나직하고 힘찬 목소리가 따뜻하게 데우는 느낌에 안달이 나서 ‘나’는 서둘러 다리 위로 올라간다. 저자 사람들도 이 소리를 들었는지 문밖으로 얼굴을 내민 사람들이 소리의 진원지를 찾고 있었다. 다리 위에서 비렁뱅이 가객 하나가 거문고를 무릎에 올려놓고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순식간에 다리 위는 음률에 끌린 사람들로 가득 찼다. 사람을 못 견디게 하는 소리 한 곡조가 끝나자 사람들은 제각기 허리춤을 끄르고 돈을 내던졌다. 가객은 고개를 가슴팍에 콱 처박고 앉아 길고도 여윈 손을 뻗쳐 무릎 근처에 흩어진 돈들을 긁어모아서는 제자리 밑에 쓸어넣었다.
사람들이 고개를 숙인 가객을 향해 얼굴을 들라고 소리친다. 노래만 들으면 됐지 얼굴을 봐서 무엇 하려는가? 사람들이 재촉하자 가객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어쩐지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회가 동했을 때처럼 속이 뒤틀리고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가객은 이 세상에서는 어디서든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추악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141쪽)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뒤로 한 채 가객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더러운 얼굴이 더욱 흉하게 일그러졌다. 사람들 가슴 속에 깊은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추악한 얼굴을 사람들은 견디지 못했다. 사람들은 기분 나쁜 노래니, 온 세상에 미움을 퍼뜨리는 가락이니, 구역질이 나는 목소리니 하며 가객에게 욕을 퍼부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같은 사람이 노래를 부르는 것인데, 사람들의 반응은 정반대이니 말이다. 사람들이 가객을 향해 돌멩이를 던졌다. 돌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가객은 추한 얼굴을 빳빳이 쳐들고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첫 노래를 듣고 던져준 돈을 다시 빼앗은 사람들은 가객에게 제각기 침을 뱉으며 제 갈 길로 흩어져버렸다. 다리 위에는 문둥이 거지인 ‘나’와 가객만 남았다. 어느새 물가로 내려가 얼굴에 묻은 피를 씻는 가객을 향해 ‘나’는 돌을 쳐들고 당장 여기서 사라지라고 소리친다. 가객은 그저 물가에 앉아 흐르는 물을 내려다보며 “아직도…… 아직도, 내 얼굴이 아니다. 아직도 아직도, 낯설구나.”(143쪽)라는 말을 중얼댈 뿐이다. 눈물까지 흘리는 가객을 어떻게 돌로 내리칠 수 있을까. 가객은 ‘나’에게 사람들이 자신을 미워하는 것은 노래만이 아름답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추악한 얼굴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니 사람들이 미워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럼,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되지 않는가? 가객은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덧붙인다. “내 얼굴이 추악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은 바로 나의 음률을 완성했던 그 순간부터였다.”(144쪽)라고.
아름다운 노래를 완성하자마자 자기 얼굴을 잃어 버렸다고 고백하는 가객(이름이 수추다)의 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수추는 아름다운 노래는 듣지 않고 추악한 얼굴만 보는 사람들이 정말로 밉다. 오죽하면 제 온몸에는 이제 미움만이 꽉 들어차 있다고 이야기할까. 사람들에 대한 미움을 버리려면 노래를 부르지 않아야 하는데,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수추는 살 수가 없다. 그는 차라리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으로 가려고 한다. ‘나’는 사람들이 살지 않는 저쪽 강 건너편을 알려준다. 수추는 지금 강 이쪽=저자에 있다. 저자는 통념에 빠진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곳이다. 추악한 얼굴을 한 수추는 이쪽에서 노래를 부를 수 없다. 하지만 이쪽을 나와 저쪽으로 가면 상황이 달라진다. 저쪽에서 수추는 마음껏 노래를 부를 수 없다. 문제는 노래를 들어줄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많은 저자대신 노래를 선택한다.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죽을 판이니 이밖에 달리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강 건너로 간 수추는 오동나무 잎이 누렇게 변하고 구멍이 뚫려서 물 위에 헤적이며 떠나는 즈음에 저자로 돌아왔다. 거문고도 없이 맨손으로 돌아온 것으로 보아 그는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에 대한 미움으로 이글거리던 그의 눈빛은 어린 짐승의 눈처럼 양순하게 젖어 있었다. 무엇이 그를 이리 바꿔 놓은 것일까? 강 건너로 간 수추는 무너진 절터의 계단에 앉아 거문고를 뜯으며 노래를 불렀다. “새들이 일시에 울음을 그쳤고, 맹수들은 포효를 잊었으며, 나무숲들은 가지를 떨도록 바람에 내맡기지 않고서 오히려 바람과 타협하여 숲의 소리마저 잠잠해진 것만 같았다.”(146쪽) 숲속에 있던 짐승들이 소리를 듣고 수추 주위로 몰려들었다. 해가 떠오르자 그는 노래를 그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백 마리 새들이 창공이 찢어지듯 날개를 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수추는 물가에 앉아 물속에 비친 제 용모를 보며 울었다. 그는 자기 얼굴이 한없이 미웠다. 얼굴을 비추는 시냇물도 미웠다. 미움이 강해질수록 그의 얼굴은 더욱 더 추악하게 물 위로 떠올랐다.
그러던 어느 날, 대낮에 혼자서 노래를 부르던 참에 거문고의 줄이 무참한 소리를 내며 뚝, 끊어졌다. 그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거문고를 계단 위에 내동댕이쳤다. 자르릉, 괴상한 소리를 내며 악기는 부서져버렸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가 없었다.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노래를 부르지 않는 바로 그날 수추는 오랜만에 평화로운 잠을 잤다. 노래를 부르지 못하면 죽을 줄 알았다. 그런데 노래를 부르지 않으니 수추의 마음은 비로소 평화로워졌다. 완전한 음률에 도달한 그는 물속에 비친 추악한 얼굴을 보고 경악했다. 아름다운 소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었다. 추악한 얼굴이 생각날 때마다 그는 노래를 불렀다. 노래는 그에게 더러운 얼굴을 잊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문제는 노래를 부를수록 추악한 얼굴이 그의 마음을 헤집는다는 점이었다. 그는 아름다운 노래와 추악한 얼굴 사이에서 마음의 평화를 잃었다. 노래와 얼굴에 집착함으로써 수추는 정작 자기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지 않은 셈이다.
그가 물을 마시려고 시냇물에 구부렸을 적에 수추는 또 다른 얼굴을 만났다. 그의 눈은 삶의 경이로움에 가득 차 있었고, 그의 입은 웃고 있었고, 뺨에는 땀이 구슬처럼 매달려 있었다. 그는 모든 산 것들이 그러하듯이 만물의 소멸에 대하여 겸손하였다. 그가 자신을 추악하게 본 것은 그 마음이 자기를 자만하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노래는 그의 생처럼 절대로 완전함에 도달하지 않는 것이었다. 남이 자기를 보고 까닭 없이 미워함을 두려워하기 전에, 수추는 저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쁜 마음을 일으키고 사랑하는 마음이 일도록 다시 살아야 함을 느꼈다. (148쪽)
참으로 오랜만에 평화로운 잠을 잔 수추는 물속에서 지금까지 보지 못한 또 다른 얼굴을 발견한다. 그는 추악한 얼굴을 잊기 위해 완전한 노래에 집착했다. 자기 얼굴을 대신할 것을 그는 바깥에서 애타게 찾았다고나 할까. 바깥에 있는 노래에 집착할수록 그래서 그는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서 수추는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자기와 마주할 수 있었다.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는 건 더 이상 바깥에 있는 노래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완전한 노래’라는 허상에 매인 에고가 무너지는 순간이라고나 할까. 에고가 무너지자 사람들에 대한 미움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한마디로 그는 새로운 세계를 여는 깨달음에 이른 것이다. 수추는 저자로 돌아가 자기가 새로이 발견한 이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저자로 돌아온 그가 동냥 그릇을 내밀자 사람들은 그득그득히 음식을 담아주었고, 수추는 뜨거운 마음으로 그것을 받았다.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는 수추를 굳이 내치려고 하지 않았다.
다리 밑으로 다시 돌아온 날부터 수추는 괴이한(?) 짓을 하기 시작했다. 문둥병으로 고생하는 ‘나’의 몸에 난 종기를 예사로 빨아댔고, ‘나’가 추위에 떨며 신음소리를 내면 뒤에서 몸으로 감싸 따뜻하게 녹여 주었다. 잔치가 있는 집이나 슬픈 일이 일어난 집을 찾아가 조심스레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잔칫집에 모인 사람들은 흥이 돋았고, 슬픔에 빠진 사람들은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었다. 수추의 얼굴을 보고 뭐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강 저쪽을 다녀온 후로 수추의 얼굴에는 늘 웃음이 감돌았다. 저자 사람들은 그의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한없이 평화로워졌다. 사람들은 뜻을 모아 수추에게 악기를 만들어주기로 했다. 수추는 여러 번 사양을 하다가 마지못해 사람들 뜻을 받아들였다. 오동나무를 베어 그는 직접 거문고를 만들었다. “시험 삼아 줄을 퉁퉁 퉁겨내니까 물방울 하나가 똑 떨어져 폭우가 되고 벽력이 치면서 강줄기로 합치고 폭포가 되어 무한히 큰 물의 출렁거리는 소리로 변하는 것이었다.”(150쪽)
수추의 노래를 들으려고 먼 지방에서까지 사람들이 몰려왔다. 아픈 사람들이나 슬픔에 겨운 사람들이 찾아오면 수추는 그 속에 앉아 조용히 노래를 흘려보냈다. 노래를 들으며 사람들은 마음속에서 샘솟는 환희를 느꼈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가슴에서 가슴으로, 몸짓에서 몸짓으로 퍼져나갔다. 저자에 모인 사람들은 저자가 떠나가도록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면서 그들은 하나가 되었다. ‘나’의 더러운 얼굴에 뺨을 비비며 복 많이 받으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노래 하나에 담긴 힘이 이토록 크다는 걸 새삼 확인하는 순간이다. 사람들이 모여 떼로 노래를 부르는 걸 권력이 좋아할 리 없다. 권력은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노는 것을 싫어한다. 사람들이 모이는 것만큼 권력을 두렵게 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저자 사람들이 아니라 수추이다. 저자의 권력자인 장자가 수추에게 노래를 부르지 말라고 명령한다. 수추는 살아 있는 한 노래를 부를 것이라고 대답한다. 아무도 없는 데로 가서 노래를 부르라는 장자의 말에 수추는 제 노래를 원하는 사람들을 떠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권력자인 장자는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노래로 대중을 선동하는 수추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죽일 수 있는 힘이 있다. 수추를 잡아가둔 장자는 악기를 빼앗아 줄을 끊어버린다. 악기를 잃었음에도 수추는 감옥 속에서 날마다 새로운 곡조로 노래를 했다. 그는 이제 안과 밖을 나누지 않는다. 악기의 음률은 이미 마음속에 들어차 있다. 그가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는 감옥 밖으로 재빠르게 퍼져 누구나 따라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화가 난 장자는 수추의 혀를 뽑아 까마귀들에게 먹이려고 높은 감나무 가지에 걸어두었다. 까마귀마다 수백 번씩 그 혀를 쪼았지만 견고한 혀를 먹지 못했다. 혀는 허공에서 싱싱한 선홍의 빛깔로 더욱 더 빛날 뿐이었다. 혀를 잃은 수추는 목구멍으로 노래를 불렀다. 안으로 꽉 잠긴 그의 노랫소리는 저자 바닥으로 깊이깊이 스며들었다. 사람들이 몰래몰래 그 노래를 따라 부르자 장자는 끝내 수추의 목을 자르라는 명령을 내렸다. 효수되어 장대 위에 얹힌 그의 얼굴은 행복감에 감싸여 있었고, 사람들은 그 얼굴을 보고 더욱 더 그가 남긴 노래들을 불렀다.
수추의 노래가 죽음마저 넘어서자 장자는 그에 대한 기억 자체를 없애버리려고 했다. 그가 노래를 부르던 다리를 허물고, 악기를 만든 오동나무의 밑동이 뽑혀졌다. 수추와 친한 ‘나’는 강 건너로 쫓겨났다. 권력은 왜 이리 수추의 노래를 지우려고 한 것일까? 권력은 사람들을 자기 방식으로 다스리려 한다. 그래야 자기 입맛에 맞게 사회 질서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추의 노래에는 권력이 지향하는 사회 질서를 단번에 무너뜨리는 힘이 있다. 권력은 그 힘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수추에 대한 기억을 사람들 머리에서 제거하려고 하지만, 저자 사람들이 어떻게 수추를 잊을 수 있겠는가? 권력이 수추를 지우려고 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기를 쓰고 수추가 남긴 노래를 불렀다. 강 건너로 쫓겨난 ‘나’도 마찬가지다. 그는 수추의 팔딱이는 혀를 품에 지니고 새벽이 밝을 때마다 강변으로 나가 수추가 오기를 기다린다. 수추는 죽었지만, 그가 부른 노래는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다.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던 수추를 권력은 힘으로 눌러버리려고 했다. 악기를 빼앗았고, 혀를 잘랐으며, 끝내는 목까지 잘랐다. 그런데도 그가 부르는 노래는 살아남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노래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진다. 권력은 수추만 없애면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수추의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이미 ‘수추’와 한 몸이 되었다. 수추를 없애려면 그러므로 수추의 노래를 들은 모든 사람들을 없애야 한다. 사람들이 사라지면 권력이 무슨 소용인가? 현실적으로 노래를 부르는 수추는 힘이 없지만, 실제로 그는 아주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노래로 사람들과 하나가 되는 힘이다. 더불어 부르는 노래는 태산이라도 무너뜨릴 힘이 있다. 저자의 장자는 바로 이 점을 무시하고 있다. 권력은 무엇보다 폭력의 힘을 믿는다. 사람들이 개체로만 남아 있다면 이런 폭력이 통한다. 하지만 노래의 힘으로 묶인 사람들을 어떻게 폭력으로 다스릴 수 있을까? 황석영은 수추의 노래를 통해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예술의 힘을 소설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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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개월의 새 몰개월은 바닷가 근처의 조그만 마을이다. 그곳은 월남 파병을 위한 특교대가 생긴 이후, 작부 한두 명을 둔 술집이 생긴다. 특교대를 빠져 나가기 위해서는 몰개월을 거쳐야 한다. 주인공 '한상병'이 서울로 무단 외출을 하고 돌아올 때와 월남으로 떠날 때도 그랬다. 몰개월의 작부들은 "살아가 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아는 자들의 자기 표현"으로 달마다 "이별의 연극"을 연출한다. 한 쪽에는 죽고 죽이는 전쟁터로 가기 위해 훈련을 하고, 한 쪽은 그런 군인들을 상대로 죽음과 같은 밤을 맞으면서, 살아가는 것의 소중함을 느끼기 위해 그들과 연애를 한다. 따라서 몰개월의 내면적 의미는 살아가는 것의 소중함을 깨우쳐 주는 배경이라고 볼 수 있다. '한상병'은 무엇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서울로 무단 외출을 한다. 그에게 서울은 "화냥년 같은" 곳이며, "어깨를 늘어뜨리고 싸돌아 다니던" 곳이다. 그에게 "이 짧은 밤의 여행은 군인이 되기 전 나의 온갖 외로움을 모아 놓은 것과 같았고, 미친년처럼 얼룩덜룩하게 화장한 육십년대의 축축한 습기가 배어 있는 듯했다." 그가 서울에서 확인한 것은 옛 애인은 결혼을 했고, 자신의 주위에서 별다른 변화가 없다는 것뿐이다. "청춘이 다 그런 거다" 하지만 돌아오는 역에서 그는 한 공군 중위와 그의 애인을 바라보면서 "희한 덩어리였던 나의 시대와 작별하면서, 내가 얼마나 그것을 사랑하고 있는가를 알았다. 내가 가끔 못 견디도록 시달리는 것은 삶의 그러한 편린들에 의해서"인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서울이 아니라 몰개월이다. '한상병'은 죽고 죽이는 전쟁터에서 살아남고 죽이는 훈련을 하기 위해 몰개월에 머문다. '미자'는 죽지 못해 사는 삶의 전쟁을 몰개월에서 이어간다. 이들은 다 같이 그 시대에 버림받은 인물들이다. '한상병'은 '미자'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성적 대상으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미자'가 같은 식구인 것을 깨닫게 된다. 더 이상 술집 작부가 아니고 식구이기에 "식구를 먹어주는 놈"은 없는 것이다. '한상병'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몰개월로 가지 못한다. 즉, 특교대와 몰개월을 분리시키는 담과 철조망을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통과해야 한다. '미자'는 밤에는 "갈매기집"의 작부고, 그녀의 방은 '棺'과 같은 곳이다. 따라서 '갈매기집'에서의 '미자'는 죽었다. 하지만 갈매기집을 벗어난 "면회소"와 "빨래터"에서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이것은 '한상병'의 눈을 통해 본 서술자의 입장이다. 그래서 그녀는 달마다 "이별의 연극"을 연출할 수 있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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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중단편 전집 마지막권을 마져 읽었다. 그의 소설은 항상 치열하고 진한 여운을 남긴다.
월남파병을 앞두고 지나온 것과의 이별을 그려낸 '몰개월의 새'도 마찬가지다. 몰개월 갈매기집의 미자를 통해 잊어야 할것들은 잊고 살아가는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게 해준다.
병사들이 트럭에 타고 부대를 떠나갈때 몰개월의 모든여자들은 한복으로 갈아입고 나와 길 양쪽으로 늘어서서 이들을 환송한다. 몰개월의 여자들이 매달 연출하는 이 이별의 연극은 살아가는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아는 자들의 자기표현 이다.
이것은 몰개월을 거쳐 먼나라의 전장에서 죽어간 모든 병사들이 알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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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작품들은 관념적이지가 않다. 그의 글을 읽으면 처음 부터 끝까지 단번에 읽게 된다. 때로 시원시원한 문체로, 또 때로는 구수하게 감겨오는 문체로 글을 써내려가는 작가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체질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작가로서의 황석영은 큰 능력을 갖춘 것임에 분명한데, 그러나 황석영이라는 작가는 거기에 머무르고 있지도 않다. 그것은 바로 작가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작가가 '자신의 문학을 살아 내야 한다'는- 결코 말처럼 쉽지만은 않은 결의를 생애 내내 실천해오고 있는데서도 살펴볼 수 있다. 사실 황석영은 문학 외적으로도 꽤 유명한 사람이다. 방북 사건에 이은 옥살이도 그렇거니와,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이 또한 황석영이 쓴 것임은 제법 많은 사람들이 알고있는 가십거리일 것이다. 작가가 자조적으로 문예 창작에 기울일 힘을 엉뚱한 곳에 쏟았다고 했지만, 해묵은 순수/참여 논쟁의 틀에 얽매여 바라보지 않더라도 황석영의 문학은 그대로 삶의 한복판에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 나는 황석영의 작품들을 그다지 많이 읽지는 못했다. 장편 <장길산>을 중학교 시절에 밤새워가며 읽었던 것- 그리고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삼포 가는="" 길="">과 <한씨 연대기="">를 읽었
던 게 전부였지 싶다. 그렇지만, 그 몇의 작품들로도 황석영이 라는 작가의 글을 더 읽어보고 싶단 생각이 절로 들었었다. 한데, 솔직히 말하자면 이번에 읽은 <몰개월의 새="">는 조금은 실망 스러웠다. 전에 읽었던 작품들을 너무 감동깊게 기억하고 있었던 탓일까. 물론, 이것은 상대적인 내 나름의 평가이고, 이 작품들이 작가의 삶과 분리되지 않는 좋은 작품들이란 것은 말할 수 있다. 특히나 내가 요즘 들어 고민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문제- 그 중에서도 계급성에서의 문제들이 다루어져 있는 작품들이 많아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읽어내렸던 듯하다.
사실 말이지, 나는 노동자-농민의 기층 민중들과 이른바 중간 계층이 결코 같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서 중간 계층의 우월성 따위를 주장하고자 하는 건 결코 아니다. 다만 섣부른 동일시와 그에 기반한 어설픈 주장들은 찬성하기 힘들다. 우선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첫번째요, 그 다르다는 것을 너와 나 사이의 단절로 이어가지 않고, 우월이 아닌 차이로 인정하는 관점을 바탕으로 연대해나가는 것이 그 두번째다. 내 짧은 경험들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직 여기까지다. 그 후의 단계에서야 비로소 서로를 인정하고 얼싸안으며 하나의 공동체로 태어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점에서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은 근래의 소설들 중에서 손꼽히는 수작으로 내세울
수 있을 것이며, 황석영의 현실 인식과 소설에서의 형상화 또한 그것에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작품들은 나에게 고민들을 더욱 명확히 인식시켜주었다. 더 읽어나가며, 때로 몸으로 부딪쳐나가며 생각들을 정립시키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랴, 작품이란 작가와 독자가 만날 때만이 생명력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을. [인상깊은구절] 글쎄요, 부인이나 저처럼 어느정도 교육도 받고 일정한 규모의 생활을 하고 있는 중간층들이란 물론 어느 부분은 할 수 없이 포기하고 살아가지만, 여기서의 삶이 진이가 느끼듯 그렇게까지 엄혹하다고 느끼기는 좀 어려운 일이겠지요. 그러나 일상의 잡다한 현재의 일에서부터 앞으로 어찌될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우리들의 미래에 이르기까지, 문득 돌아다보면 얼마나 우리의 삶이 속박당하고 있는가를 대번에 알게 되는군요. 누구나 말로는 아주 쉽게 남북 분단이 우리의 삶을 근원적으로 제한하고 있다고는 말하지만, 실제로는 거기에 익숙해져서 마치 무너진 집의 벽 한쪽에 받침대 대신 동시대의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을 세워두고, 그들로 하여금 무너져내리는 지붕을 쳐들고 있도록 해두면서 임시로 살아가고 있는 듯한 꼴입니다. 우리는 온전한 정상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니라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임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당신들의>몰개월의>한씨>삼포>장길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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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항상 황석영이라는 작가가 궁금했었다. 北에 다녀온 작가, 혹은 대하소설 '장길산'의 작가 등등으로만 이름을 들어왔을 뿐 그의 소설세계의 미학을 형상화하는 많은 소설장치, 체험, 상상력 등등에 관해선 제대로 알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난 단순히 한 평범한 인간으로서라기 보다는 비범한 한 작가의 특이한 성장과정과 체험세계가 매우 알고 싶었다.
바로 이 '몰개월의 새' 단편집에 우리 현대사의 굴곡과 아픔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체험해 온 황석영이라는 작가의 성장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작가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삽입한 '열애'를 읽고 황석영의 청소년 시절의 고민과 아픔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표제작인 '몰개월의 새'에선 그가 월남전쟁에 참전하기 전 어떤 심경에 있었는지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한편 '돛'이라는 작품에선 총알이 사방으로 튀는 전장에서의 약육강식의 세계가 다소 냉소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죄수를 압송해야 하는 책임을 떠맡은 군인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철길'이란 작품을 통해서는 월남참전 후 '전장에서 멍청한 기분으로 돌아와 다시 이전의 무한하고 두렵던 가능성 속에 내동댕이쳐진'(p.303) 작가 황석영의 초라한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이 단편집에 실린 모든 단편이 수작인 것은 아니지만 그가 후기에서 자신감있게 밝히고 있듯이 '소설은 보여주는 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감동을 수반한 비판적 기능을 가지고 내일을 이야기하는 데까지 가야 한다'(p. 304)는 주장을 실천하려는 노력이 다분이 엿보인다. 자신이 다루려는 현실의 한복판, 그 현장에 있는 사람이야말로 작가라고 믿는 황석영 자신의 신념이 철저하게 지켜진 작품들의 모음집이라고 표현하면 옳을 것 같다. [인상깊은구절] <몰개월의 새=""> 중에서 나는 승선해서 손수건에 싼 것을 풀어보았다. 플라스틱으로 조잡하게 만든 오뚜기 한쌍이었다. 그 무렵에는 아직 어렸던 모양이라, 나는 그것을 남지나해 속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작전에 나가서 비로소 인생에는 유치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서울역에서 두 연인들이 헤어지는 장면을 내가 깊은 연민을 가지고 소중히 간직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미자는 우리들 모두를 제 것으로 간직한 것이다. 몰개월 여자들이 달마다 연출하던 이별의 연극은, 살아가는 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아는 자들의 자기표현임을 내가 눈치챈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몰개월을 거쳐 먼 나라의 전장에서 죽어간 모든 병사들이 알고 있었던 일이다.몰개월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