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폴 라파르그가 '게으를 수 있는 권리'에서 주장하듯 우리는 노동하기보다 삶을 즐기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을 것입니다. 아담 스미스가 예언했던 시대에는 지금보다 훨씬 적은 시간을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여가를 즐기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들이 현실이 되었다면 우리의 노동은 지금보다 훨씬 즐겁고 기쁜 일이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직장생활이 22년 차에 접어들었습니다. 맨 처음 사회에 첫 발을 디밀고 직장생활을 하던 때를 떠올리며 지금의 생활과 비교를 할 때, 저자가 말하는 노동이 우울한 이유를 저는 두 가지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노동을 통해 만들어 내는 산물을 제가 소유하거나 좌지우지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시간이 흐르면서 제 노동에서 '여유'가 계속해서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 분기점이 1997년 IMF체제였다고 봅니다. 그 이전엔 노동자로서의 삶을 긴 안목으로 긴 호흡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내가 어느 자리에 있게 될 것이란 계획이 명확하게 보였고, 실제의 삶이 그 예상과 비슷하게 흘러갔습니다. 하지만, IMF 이후에는 모두 아시는 것처럼 우리에게 저 멀리 미래를 그려보는 게 금기시되었습니다. 당장 내 눈 앞에서 동료들이 잘려나가고 자본은 한 번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노동자들을 불안으로 몰아넣고 생명을 짜내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하루를 힘겹게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미래를 꿈꾸는 건 사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미래를 잃는 순간, 우리 손에서 노동의 즐거움은 사라졌습니다. 노동의 주인이라는 건, 적어도 내가 이 일을 한다 안 한다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하고, 내가 한 그 결과물에 내가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주어진 일을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선택하며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내가 일에 주인이 될 때 비로소 여유도 갖게 됩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밀물처럼 밀려드는 일에 대해서 'STOP'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일한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 일의 뒤에서 우릴 감시하며 일을 쉼없이 던지고 있는 '그들'에게 말입니다. |
|
저자는, 스스로를 기계로 만들고 한계상황까지 일하는 워커홀릭들을 진단한다. 책이 다루는 노동자는 중산층 이상의 사무직 노동자들이다. 부모라는 절대적 버팀목이 있던 어린시절과 달리 가시적 버팀목 없는 어른들은 불안해한다. 내가 일을 소홀히 하면 누군가가 나를 대체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내가 가진 가능성을 모두 발휘하지 못하며 살지 모른다는 초조함이 인간을 기계적 노동으로 내몬다. 저자는 또한 이러한 상황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구조도 짚는다. 노동에 국한되지 않고 소비와 욕망에 관하여 다루기도 한다.
결론을 간단히 이야기 하자면 '쉬엄쉬엄 하라' 정도가 될까.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다른 길로 많이 샌 부분도 있는 것 같다. 아직 노동자는 아니지만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으로서 나 자신을 너무 바쁘게 몰아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던 차에 공감되는 부분도 많이 있었다. '죽도록 일하지 말고 내버려 두어라'는 메시지는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떠올리게 한다. 내게 열린 가능성을 가능성대로 두는 것도 좋다고 한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무위에 대하여 다룬다. 이미 노자가 2000년도 더 전에 말한 것이 아니었나? 인류는 참 먼 길을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여러 철학자들을 인용하고 나름의 개념도 제시한 책이지만 전하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일에 중독되지 말고, 쉬엄쉬엄 살아라. 가능성을 좇아 자신을 희생하지 마라' 불쑥 드는 생각은 그걸 누가 몰라서 그렇게 일들을 하고 살까 하는 것이다. 저마다 가족에 대한 책임 때문에, 삶의 목표 때문에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과연 저자가 생각한 것 처럼 향락 노동의 희생자들인지는 모르겠다.
|
|
밤늦도록 도심이 이토록 환한 국가는 우리나라밖에 없을 것 같다. 물론 밤 문화를 즐기는 국민성(?)이 휘황찬란한 도시를 만드는 데 한 몫 톡톡히 담당했겠지만, 안타깝게도 평일 저녁 시간대의 분주함은 노동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6시라는, 공식적으로 정해진 퇴근시각은 허울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직장인은 6시에 퇴근하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긴다. 9시 10시 11시. 심지어 주말에도 평일처럼 출근해 일하는 이들도 많다. 그래서 누군가가 말했나보다. 나의 일주일은 월 화 수 목 금 금 금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그런데 이처럼 열심히 일을 함에도 우리가 삶으로부터 획기적인 무언가를 획득하진 못한다.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일하는 입장에서 천문학적인 금액을 월급으로 받아 챙겼다는 이는 없다. 그렇다고 일이 가족도 친지도 잊고 할 정도로 흥미진진하다거나 일을 통해 자아실현에 한 발씩 다가가고 있다는 달콤한 고백을 하는 이들도 드물다. 노동은 한 마디로 우울하다. 손에서 놓아버리고 싶지만, 막상 직장을 관두려 들면 당장에의 먹고 사는 게 걱정스러운지라 그러지도 못한다. 노동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직장생활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너무도 장시간 격하게 일하고 있는 현대인은 이른바 강박증 환자가 아닐까 싶다고 저자는 말한다. 충분히 일을 했으니 이제는 쉬어도 족할 텐데 대부분이 일을 손에서 놓아버리지 못한다. 마음과는 달리 몸은 계속해서 일에 매진하고 심지어 그 강도를 점점 높여가면서 희열을 느낀다. 이러한 강박적인 모습은 요즘 들어 더욱 격화되고 있는 자본주의를 만나 변질되고 있다. 초식동물처럼 유순한 남성들을 일컫는 말 ‘초식남’이 등장했는데, 여성적인 면모를 지닌 이 남성들을 사회는 마냥 긍정적으로 바라보질 못한다. 왜냐하면 이들이 결혼과 출산은 뒷전이기 때문이요, 심지어 연애마저도 귀찮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자기 앞길은 스스로 개척치 못하는 이들의 남의 가십(gossip)에 열광한다. 그리하여 등장한 것 중 하나가 포르노다. 사랑 없이 가능한 포르노를 통해 젊은이들은 왜곡된 형태의 사랑을 습득한다. 사랑이 없지만 그 역시도 사랑이라 여기며 과도하게 매달린다. 많은 여성들이 종종 보여주는 외모에의 과도한 집착 역시 같은 부류의 예다. 가꿀 게 어디 외모뿐이겠느냐마는 몸에 칼을 대서라도 완벽해지고자 하는 여성들의 욕망은 오로지 자신의 신체만을 향하고 있다. 내면으로의 침잠이다. 자기 자신과의 대화는 꼭 필요한 것임이 분명하지만, 제 안에 잠재되어 있는 진정한 자아와의 만남 없이 이루어지는 외모 개혁(?)은 또 다른 칼질을 부를 따름이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완벽을 향한 강박적 욕망은 인간의 모든 것을 겨냥하고 있다. 병원에서 느끼는 두려움과 통증마저도 돈으로 환산해야 직성이 풀린다. 아이를 낳으며 진통을 경험한 이와 무통주사 덕에 진통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이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무섭다. 통제를 시도한 것은 제 자신의 몸이었건만, 그로 인해 경험한 것은 단절이었다. 지금은 타인과의 경험 공유가 쉽지 않다 수준에 머물고 있지만, 머지않아 제 자신과의 대화에서도 갑갑함을 느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할 거 같다는 불안감을 느낀다.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여유다. 일명 내려놓기, 놓아주기 등 대중들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끈 단어들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잃어가고 있는 제 자신을 힘껏 움켜쥘 수 있는 방법이다. 나아가 우울하기 짝이 없는 노동이 잿빛을 벗고 색다른 모습으로 새로이 인식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지금 당장은 돈을 덜 버는 것 같을 수도 있지만 진지하게 물어보자. 계속 재미없고 지치는 삶을 살 것인가! |
|
노동은 본질적으로 우울할 수 밖에 없다. 현생인류 등장 초기인 4만 년 전에는 인간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생존을 위해서만 노동을 했다. 오늘 하루 사냥이나 채집의 노동이 없으면 굶는다. 이것이 지속되면 생존할 수 없다. 운이 좋아서 노동하지 않고 풍성한 먹을 거리와 생존에 필요한 물품이 넘쳐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냥과 채집을 할까? 아마, 사자도 늑대도 먹을 것을 필요한 만큼 자동으로 공급받는다면 그리 힘들여 몇 시간을 수풀 사이에 몸을 낮춰 사냥감을 지켜보고 온몸의 근육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달려야 하는 사냥의 수고로움을 당장 던져버릴게 분명하다. 인간도 마찬가지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간의 온전한 노동은 배 곯지 않고 생존하기 위한 활동에 모두 쓰여졌다. 이런 생존을 위한 노동은 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안 하는 게 행복하다. 줄일 수 있다면 최대한 줄이는 게 삶의 질 향상에 더 가까워 지는 길이다. 그런데, 인간은 문화를 향유하고 과학에 눈떴으며 뭔가 생존과는 별개로 노동을 하기에 이르렀다. 한나 아렌트는 이것을 과거의 노동과 구분하여 ‘작업’, ‘활동’이라고 칭했는데, 작업은 인간이 유용한 것을 만들기 위해 하는 행위이며, 활동은 그 자체로 즐겁기 때문에 하는 행위이다. 도구를 개발하고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여러 (창조)행위를 작업이라 할 수 있고, 그 자체로 목적인 놀이나 스포츠를 활동이라 할 수 있겠다. 현대사회의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과거 소수 귀족에게만 집중되었던 ‘작업’과 ‘활동’이라는 혜택을 전 계층이 향유할 수 있는 권리로 만들었다. 이제 더 이상 노동을 과하게 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동의한다면, 우울한 노동시간을 줄이고 여가와 향유의 시간을 늘리면 된다. 그런데 그게 잘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나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능력을 인정받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여겨진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과도한 노동을 한다. 그리고 성실하고 열심히 과도하게 일할수록 뛰어난 인재라고 칭송 받는다. 자본은 이를 조장하고, 그로 인한 잉여의 대부분은 자본으로 귀속된다. 파편으로만 존재하는 개인은 이 일련의 우울한 시스템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시스템에 최적화된 일부로 편입 되기 위해서 오늘도 야근을 하고 주말을 반납한다. 다른 한편으로 현대사회는 노동과 작업과 활동의 경계가 모호해졌다고도 말한다. 자신이 하는 일이 생존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뭔가 창조적인 것이며 사회에 도움이 되는 것이기를 바라고,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는 그런 일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가를 따져보면,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아무리 즐기는 취미라도 그것이 생존을 위한 노동이라면 과거와는 다르게 다가올 것이 분명하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생존 그 이상의 의미가 없는 ‘노동’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두려워 의도적으로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일지 모를 일이다. 결국, 사회가 개개인의 좋은 삶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면, 노동을 줄이고 마음의 평정과 향유를 누릴 수 있는 시간을 늘려야 한다. 이미 백 년 전부터 전 세계의 인간이 하루 네 시간만 일해도 충분히 풍요롭게 먹고 살 정도로 생산성은 발달했다. 이제는 결정만 하면 된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이 마음으로는 동의하지만 이 동의를 모아내는 것이 힘든 일이다. 드러나는 모습은 대부분 강력한 기득권 세력, 지금의 시스템에서 거대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의 의견일 뿐이다. 그 대다수의 동의를 모아내는 일은 누가 해야 할까? 스스로 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사실을 인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조그만 것에서부터 참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나부터 말이다.
|
|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 이에 대한 직접적인 답은 없다. 그래서 책의 부제는 '경쟁사회에서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이다. 우울의 원인을 사회 구조적 모순이나 자본의 탐욕을 거론하지 않는다. 단지 철학적 측면에서 우울의원인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저자는 '예전의 노동이 고난이요 원죄에 대해 신이 내린 형벌'이라며 프로테스탄티즘 노동윤리인 '금욕과 신을 위한 근면, 재산의 축적'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단언한다. 그래서 '오늘날 노동은 고통이 아니라 필요 이상으로 에너지를 일에 쏟아 붓는 향락 노동자라고 지칭'한다. 즉 워크홀릭 상태이다. 인간만이 가지는 노동의 특유성이다. 타인의 인정에 대한 욕구와 끊임없는 명예심을 높이기 위해 자기 착취에 가까운 노동 충동을 보인다. 즐거움과 쾌락을 상실한 현대인. 지나친 금욕과 강박적인 일에 대한 의지 이는 오디세우스를 통해 이야기한다. 사이렌의 유혹적인 노래 소리에도 불구하고 그는 '욕망의 대상과 건강한 거리를 유지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에 대한 절대적 지배권을 지킨 남자'이다. 자신의 임무 즉 노동의 의무에 충실한 오디세우스는 일 중독자에 가깝다. 쾌락적 향락을 거부한 숭고한 인물이 아닌 즐길 줄 모르는 과도한 자기 착취자인 것이다. 현대인은 일에 대한 중독성은 마치 포르노 배우가 결코 멈추지 않는 기계적인 성행위를 반복적으로 진행하는 것과 유사하다. 저자는 '포르노는 현대 노동 세계에 대한 상징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언제라도 할 수 있고 아무리 지쳐도 무서우리만치 다시 의욕을 내는 신체들이다'라고 강변한다. 포르노 배우는 항상 'Yes i can' 혹은 'Just do it'이라는 정언명령으로 멈추지 않는 행위를 지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우리에게는 축제가 필요할 것이다. 저자는 여유의 신성함이라고 하는 '사회적 의례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전통적인 의례는 욕망의 방출, 금기에 접근을 통해 집단적으로 이뤄지는 여유로움이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집단성에 탈피하여 개인화되는 고립적 존재로서 여유의 신성함으 만끽하고있다. 소위 웰니스라고 불리는 안전한 일상의 여유로움말이다. 웰니스의 방식은 휴식과 재창조의 의미라기 보다 일을 더 잘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작용한다. 더 많은 성과와 생산을 하기 위한 도구화된 신체이다. 자신의 상품성을 높이는 방식인 셈이다. 결국 그것은 지나친 야망으로 이어진다. '외적 명예를 탐하는 자는 운동을 해도 즐거워서가 아니라 오직 메달을 위해서 하고 일을 해도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일과 결부된 명예를 위해서 한다. 오로지 목표에 집중한 체 일체의 일탈과 여가를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노동의 우울에서 벗어나 자유와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저자는 하이데거와 성 안토니우스의 일화를 통해 금욕과 은둔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처럼 다양한 열린 장소에서 사람들과 대화를 통해 이뤄지는 대중과의 소통을 강조한다. 그래서 '철학자는 절대 자기 자신을 통해서만 창조하지 않는다. 불후의 지성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탄생한다'고 한다. 즉 소크라테스는 먹고 마시면서 에로스를 탐하면서 자신의 진리를 탐구한 것이다. 우리의 노동도 에로스 즉 생활의 향락을 충분히 즐기면서 임한다면 즐거움의 노동이 될 것이다. 또한 저자는 '놓아두기의 칭송'이라는 무위의 예찬을 늘어 놓으며 '우리에게 여유를 선물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것들이다'라고 말한다. 애써 자기 파괴적인 노동의 몰입을 통해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을 해결하기 보다 자신을 놓아둠으로써새로운 창조적 발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짐승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물 위에 누워 평화롭게 하늘을 바라보는 것. 그저 존재하는 것. 그밖에도 아무것도 아닌 것. 더 어떤 규정할 것이나 실현할 것도 없이....' 라는 아도르노의 잠언을 통해 '놓아두기를 진정한 자유로 이해하라'고 제안한다. 이렇게 저자는 중독된 노동에서 벗어나기 위해 생활의 향락을 즐기고 타인들과 함께하며 다양한 에로스를 즐기기를 당부한다. 행여나 어쩔 수 없는 것은 그냥 놓아두기를 통해 이 현대 자본주의의 우울한 노동에서 벗어나기를 주장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