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먼저, 우리들은 자신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많은 사물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신용카드나, 휴대전화, 시계, 담배와 같은 것들은 항상 몸에 소지하고 있고, 세탁기, 진공청소기, 냉장고, 소파, 탁자, 침대와 같은 가구들은 집의 일부가 되어있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이러한 사물들을 보면서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생활해 나가는데 필요한 것들이고, 아니 보다 편리한 생활을 위해 선택한 것들이기에 사물들의 원래 기능에 맞게 사용할 뿐, 그것들에게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자들은 어떠했을까? 그들도 일상에서 흔하게 마주치는 이러한 사물들에 대해 우리와 같은 생각을 했을까?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마주치는 사물들을 묘사하고 탐문하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물들을 통하여 인간의 사유와 일상, 삶과 죽음, 기억과 망각, 꿈과 환상을 철학자들의 생각과 연결시킨다. 서른개의 사물들에게서 서른명의 철학자들의 생각을 읽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물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살펴보면서, 사물과 더불어 사유와 철학을 즐긴 그들의 흔적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이처럼 흔한 사물들을 주목하고, 그것들에 대해서 사유하고, 철학자들의 생각과 연결시킨 것은 궁극적으로 사물들을 통하여 우리가 얻고자 하는 욕망을 이야기하고자 함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사물들을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매개물로 보았다. 우리 인간들이 필요한 사물들을 소유하는 순간, 그것들은 욕망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소유한 사물들을 아무런 사유 없이, 아무런 의미 없이, 그저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처럼 사용할 뿐이다. 요즘의 세상에서 휴대전화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아마 상상이 되지를 않을 것이다. 휴대전화가 없다면 일상생활에서의 불편은 이루 말로 헤아리기가 어려울 것이다. 또한 우리는 휴대전화를 통하여 불특정다수와 연결되기도 한다. 그것은 현실세계를 떠나 가상세계라는 새로운 세계 속으로 나를 안내하며, 또 다른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훌륭한 안내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판촉전화나 문자는 나의 일상을 가만히 놔두지를 않는다. 그런가 하면 이렇게 연결된 세상을 사는 우리는 끊임없이 타자와의 연결을 시도하곤 한다. 이처럼 휴대전화는 시공을 초월하여 나를 확장시켜주고 있지만, 우리에게서 고독의 온전함과 자유를 잃게 만든다는 미셸 세르의 사유는 잃어버린 자아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볼 시간을 주기도 한다. 나는 아직도 담배를 피우고 있다. 이제는 끊겠다고 가끔씩 금연을 시도하기도 하지만 절박함은 없다. 조급함과 분노가 담배연기를 통해서 사라지고, 담배를 피우는 동안은 마음의 집중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저자는 흡연을 욕망의 충족이면서 동시에 욕망의 단절이라는 역설행위라고 말한다. 담배를 피우는 동안은 다른 욕망을 중지해야 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담배가 가진 독성물질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금지가 욕망을 더 자극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즐거움과 쾌락을 위해 그것들을 애써 모른척 했다고 한다. 아마 그래서 프로이트가 끝내 담배를 끊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이처럼 무심코 피우는 담배를 통해서도 내 자신이 마음속에 담고 있는 욕망에 대해서 사유해 보도록 하고 있다. 욕망의 충족과 단절이라는 근원적인 것을 사소한 사물인 담배를 통하여 생각해 보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철학이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발견하고, 사유하는 것임을 알려주는 게 아닐까 싶다. 이처럼 저자는 우리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사용하는 흔한 사물들을 사유해 나가면서 우리에게 철학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더불어 어렵게만 느껴지는 철학자들의 사고의 단면을 소개하면서 그들을 친숙하게 해주기도 한다. 자동판매기에서 무사고의 극치를 찾아내는가 하면, 비누를 통하여서는 사물의 끝과 소멸을 생각하게 하고, 면도기에 잘려 나가는 수염들은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흩어져 사라지는 어떤 자취들, 부재의 징표들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삶이란 결국 그런 망각의 흔적들 위에 쌓아 올린 그 무엇이라고 말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물들을 철학의 눈으로 들여다 본다는 것, 그런 사물들과 더불어 인생에 대해 관조하고 사유가 풍부해질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 그리고 욕망의 충족과 금지 사이에서 삶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다. 결국 인문학이란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이며, 어떤 삶을 사느냐는 문제인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
철학이란 무엇일까? 철학이란, 생각하는 것이다. 어떻게? 사물을 인지하고 사유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철학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기 위해 탁자에 앉는 순간까지 지나친 사물은 여러가지가 된다. 이 여러가지의 사물에 대해서 한번이라도 생각해본적이 있었던가? 있었는가 싶었는데 역시나 없다. 매일 사용하는 휴대전화, 신용카드, 세탁기가 존재하는 이유를 생각해보기는 커녕 그저 하찮은 사물이라 여겨왔던 것 같다. 마이클 샌델은 철학을 모든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모든 사물을 그냥 생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반드시 비판과 고찰을 하여 삶을 더 나아지게 하는 것이 철학이 가진 궁극의 목표이다. 철학자들은 이러한 사물의 발견과 고찰을 통해 살아가는 의미를 터득하곤 하였다. 일상의 철학가 몽테뉴는 사물의 존재를 통해 삶을 깊이 성찰하였으며 이런 성찰은 인간의 이해로 확장시켰다. 《철학자의 사물들》은 사물의 존재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나아가 사회와 경제와 정치까지 시야를 확장하여 철학을 우리 삶에 체화시키고 있다. 오늘날 책은 바로 우리의 노인이다. 우리는 미처 고려하지 않지만, 문맹인 사람과 비교해 볼 때 우리가 더 풍요로운 이유는, 그 사람은 단지 자신의 삶만 살아가고 또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우리는 아주 많은 삻들을 살았다는 데 있다.(움베르토 에코; 책으로 천년을 사는 법)
사람은 사물을 만들고, 사물과 더불어 산다. 사물을 만듦으로써 사람은 동물과 분별되면서 제 존엄성과 권위를 더 드높이는 존재로 거듭난다. 철학자의 사물들의 첫 장의 시작인 이 문장은 도구의 인간(호모 파베르 homo faber )을 가잘 잘 표현한 말이다. 이 책의 철학의 단초는 말그대로 사물이다. 우리는 그 사물을 통해 철학자 장석주의 시선으로 사물을 상상하고 느낄 수 있다.
관계 : 신용카드, 휴대전화, 자동판매기, 세탁기, 진공청소기. 취향 : 담배, 선글라스, 비누, 욕조, 면도기 일상 : 가죽소파, 탁자, 침대, 변기, 카메라, 텔레비전 기쁨 : 책, 화로, 사과, 병따개, 냉장고, 조간신문 이동 : 시계, 구두, 여행가방, 우산, 활, 망치, 추 다섯 개의 분류지에 따라 배치된 사물들은 철학자들의 사유의 인식의 촉발제로서 더욱 풍성해진다. 우리에게 익숙한 신용카드는 마우리치오 라자라토의 <부채인간>으로 낯설게 바라보기를 시도하며 현대의 신용카드로 우리는 이미 금융 자본주의 시스템에 장악된 ‘부품’이며 노예라는 ‘호모 데비토르’의 탄생배경을 사유케 한다. 사물의 존재란 이렇게 익숙한 명칭과달리 그 이면에는 사회적 관계의 형성망이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 휴대 전화는 미셀 세르의 <인간이란 무엇인가>와 짝을 이루어 휴대전화를 사용하기 시작한 순간, 우리는 ‘이 기술의 핵심은 곧 시간의 압축이다. 인류가 이 시간의 압축제를 써서 창조적 진화물에서 진화의 창조자로 나서고 있다.’ 휴대전화를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이미 진화되는 것을 멈춘 것이다. 자동판매기는 데카르트와 짝을 이루어 자동판매기와 같은 인간을 비유하며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 고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며 현대 문명의 비판의 날을 세운다. 스피노자와 진공청소기의 짝은 포퓰리즘의 비판을 낳고 니체와 선글라스는 권력자의 가면을 표방한다. 잘 보드리야르와 비누, 면도기와 막 오제는 사물세계의 고갈과 소멸에 대한 사유로, 망치와 제러미 러프킨은 기술적 진보가 인간을 노동에서 소외시키는 현대사회를 비판한다. 노동으로 피곤한 몸을 누이기엔 그만인 소파는 사르트르의 <구토>의 주인공이 '사물들의 세계'를 상상하는 것처럼 인간의 몸뚱이를 삼키는 권태와 환멸의 세계가 펼쳐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남편이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물은 소파이다. 집에서 누워있다가도 남편이 오면 자동반사로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는데 요즘에는 소파에서 잠드는 횟수가 많아져 걱정을 했더니 ‘ 내가 죽으면 소파와 같이 묻어줘’ 하며 소파와 자기는 일심동체라는 말을 한다. 특정 사물에 대한 애착은 삶과 함께 한다. 역겁의 세월을 살아오며 사물은 인간과 함께 흘러왔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사물의 흐름'을 인지하라는 말을 남겼다. 스피노자는 기존의 관계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보며 관계를 맺는 그 순간 존재했던 것은 새로운 흐름 형식을 띄게 된다고 하였다. 신용카드의 흐름, 비누의 흐름, 탁자의 흐름, 침대의 흐름, 냉장고의 흐름, 구두의 흐름, 우산의 흐름, 활의 흐름 등 사물들의 흐름이 시작되고 새로운 사고가 스며들어 삶의 내부를 바꾸어주는 실천과 장소가 되는 기제가 바로 철학이다. 우리는 사물들과 더불어 살며 사물들의 세계속에서 살다가 죽는다. 저자 장석주는 사물을 모른다면 사물들 속에서 살과 피와 뼈를 얻는 삶도 안다고 할 수 없으며 사물의 감식가는 사물의 장엄함을 통해 삶을 맛보고 그 삶의 珍景진경을 들여다보는 자일 것이라 한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몽테뉴가 사물의 흐름에 발견하고 고찰하며 내면의 변화가 일어나 삶을 사랑하며 인생을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처럼 시인이자 비평가인 장석주의 《철학자의 사물들》은 사물들이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함과 동시에 일상의 사물을 삶이라는 철학으로 체화하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책이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
오락가락하는 장마로 대낮인데도 초저녁을 흉내 내는 어둠과 습기가 낮게 깔려 있다. 우웅 우웅~, 어느 집에선가 진공청소기를 돌리는 모양이다. 우리 집에선 잠정 휴식을 취하고 있는 바로 그 녀석의 목소리다. 그래, 지금은 니가 좀 그립기도 하다. 기다란 주둥이로 빨아들이는 각종 먼지들에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 같단 생각이 들 때마다 작동을 멈추곤 하던 네 녀석을 분리해 먼지필터를 끄집어내 먼지를 버린 다음(물론 필터를 통째로 버리고 새 필터로 교체하기도 한다) 다시 원래대로 끼워 넣어야 하는 등 넌 적잖이 내 손을 필요로 했었다. 허나 너보다 수천 배는 날 더 곤혹스럽게 만드는 건 따로 있었으니, 그에 비하면 넌 양반이었다. 먼지는 내 손의 필요를 떠나서 언제나 심신의 건강까지 위협하는 아주 성이 가신 애물단지다. 오전 내내 집안 구석구석에 축적된 먼지와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 나는 습관처럼 매일아침 기상과 함께 높이 5CM미터의 초강력접착제인, 노란 박스테이프를 들고 온 집안을 휩쓸고 다닌다. 그런 날 보고 엄마는 물걸레로 하지 왜 번번이 노란테이프로 미련한 고생을 하냐하신다. 언뜻 생각하면 물걸레청소가 쉬운 것 같지만, 실상 그렇지가 않다. 청소 후 걸레를 빨아서 탈탈 털어 건조시키는 과정에서 그 먼지의 가차 없는 공중부양을 여러분도 모르시진 않을 터. 이런 측면에서 강력테이프를 이용한 먼지청소야말로 노동시간을 단축해줄 뿐만 아니라 청소를 마친 후의 쾌적함이나 개운함에 있어서 물걸레청소를 훨씬 압도한다.
습관 만큼이라면 진공청소기는 내 절친이어야 마땅할 것이다. 우울할 때마다 전원 버튼을 누르는 내 손의 애무에 행복해할 세탁기, 가짜로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열고 닫았다 하는 냉장고, 엉덩이는 붙였으나 책이나 스마트폰에 더 자주 시선을 주는 날 질투하는 변기 역시도. 하지만 이 시점에 아직도 난 욕조보다 지질한 어린 아이를 감싸주던 고무통을, 휴대폰보다 오로지 주고받는 청각만으로도 서로에게 애틋하던 공중전화를, 진공청소기보다 닦고 빨고 너는 삼중고가 지닌 질서의 교훈을 일깨워준 걸레를, 전기밥솥이 아닌 마른 장작에 열정을 다해 불붙이던 아궁이의 성숙한 노고를, 변기보다 낙하 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용변을 온몸으로 껴안고 살던 변소와의 그 무심하고도 아팠던 소통을 그리워하고 있다. 지금쯤 그들은 어디로 가 무엇이 되어 있을까? 이렇듯 온데간데없이 사라져간(다른 용도로 변질되는 등의 곡절로 간혹 있기도 하지만) 저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어떤 계기를 만날 때마다, 나는 그들의 부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에 무한한 자책감이 들면서 미안해진다. 때때로 그런 내 슬픔에 대한 보상으로 슬퍼하기도 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가 우리로부터 빼앗아갈 수 없는 유일한 것은 추억. 그 속엔 지난 날, 나와 함께했던 사물들이 여전히 나의 방문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장석주, 그는 누구인가. 그 안에 사물들이 있다...
장석주 시인을 거쳐 간 사물들은 우리 모두하고도 연이 깊다. 일상 속에서 생활용품이라고 하는 이름을 달고 인간에게 온갖 부림을 당하다 급기야 폐기처분되는 그들의 비운에 멈칫하는 건 너무나 시적이고 철학적이다. 그러므로 속전속결의 첨단을 달리고 있는 21세기의 사물들을 추억하게 되는 날, 다시 펼쳐든 [철학자의 사물들]에서 누군가는 반드시 용서를 구하게 될지도 모를 일, 어쩌면 당신과 내가 사물들이 자유자재로 부리는 인간들 중 한 개인으로 전락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스무 살에 시인으로 등단한 이래 소설가, 문학비평가, 대학교수, 방송진행자, 출판기획자 등 소위 글쟁이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소망할 법한, 온갖 프리랜서 인텔리직업을 두루 거친 장.석.주. 3만여 권의 장서를 소장한 다독/지독가. 그렇다. 장.석.주. 그가 이전까지와는 사뭇 다른, 인문지성의 극치를 가차 없이 피력하기 위해 나섰다. 그 비장의 무기인즉 바로 이 책, <철학자의 사물들>. 우울하고 따분하고 무력하다고 느껴질 때마다 모든 필요한 것을 구하기 위해 곧장 책으로 달려간다던 그의 시선이 이제 사물에까지 가닿은 것이다. 신종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적합한, 조금은 유연한 유물론적 관점을 고수하는 듯하면서도 인문학적 해석을 놓치지 않고, 거기에 시인출신답게 문학적 은유를 퐁퐁 떨어뜨린 철학에세이. 이쯤 되면 마치 귀환한 사물의 神이 인간의 삶과 실존에 대한 재인식을 촉구하는 비문을 가슴에 품고 온 듯한 계시까지 느껴진다.
철학 +장석주 : 사물
얼개는 이렇다. 각 꼭지별-관계(신용카드/휴대전화/자동판매기/세탁기/진공청소기), 취향(담배/선글라스/비누/욕조/면도기/거울), 일상(가죽소파/탁자/침대/변기/카메라/텔레비전), 기쁨(책/화로/사과/병따개/냉장고/조간신문), 이동(시계/구두/여행가방/우산/활/망치/추), 부록(이 책에 나오는 철학자들)-로 예닐곱 개의 사물을 등장시킨다. 그런 다음 각각의 사물의 변천사를 거쳐 먼저 작가의 사색을 펼친 후, 관련 철학자들의 말을 인용해 사색에 대한 키워드를 밝힌다. 이를테면 그동안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거나 몰라서 놓쳤거나 미처 깨닫지 못했던, 그보다는 너무나도 관심 밖이었던 이른바 사물에 투영된 인간과 생사의 문제, 그리고 문명의 진보에 대한 허虛와 실失을. 물론 그 배후엔 서른 명의 철학자가 든든하게 버티고 있었으니, 한 권의 책으로 수십 권의 철학서를 해치운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 또한 본서의 뿌리칠 수 없는 매력일 것이다. 바뤼흐 스피노자(진공청소기), 지그문트 프로이트(담배), 르네 데카르트(자동판매기), 자크 라캉(거울), 장 폴 사르트르(가죽소파), 움베르트 에코(책), 알랭 드 보통(여행가방),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발터 벤야민(시계), 특히 프리드리히 니체(선글라스)와 질 들뢰즈(냉장고)에 푹 빠진 장석주 식 사물보기란 죽었거나 살았거나 하는 생사의 구분을 떠난 모든 존재에 대한 애정과 관조를 통한, 인간과 역사의 각성과 성찰, 그리고 모태향수母胎鄕愁와도 같다.
고독이란 지적유희를 이끌어낸 사물들
한 고독한 독학자의 철학적 탐닉이란 권성우 씨의 발문에서 보듯이 얼마나 처참하게 고독해져야 무생물을 생물로 전환시킬 수 있을지 당신들은 짐작할 수 있겠는가. 외로움과 고독의 다름을 너무도 잘 아는 자에게 다가오는 먼지란 크기에 상관없이 가치의 등가를 이루(51쪽)는 일종의 진공청소기 안의 포퓰리즘 군단이며, 세탁기는 세척과 탈수를 통해 덧없이 과거가 되어버린 시간과 장소들의 흔적을 말끔하게 씻어내(41쪽)는 기적과 혁신을 불러일으키는 놀라운 도구다. 텅 비어있는 것의 실재(87쪽)면서 종말론자의 꾐에 넘어가지 않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는 욕조, 배변하는 동안의 고독 속에서 나 자신과 만나고 우주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자기충족적 시간(143쪽)을 장석주는 기꺼이 변기에서 맞이한다. 그런가하면 우리를 속박하는 쾌락에의 욕망에 연결된 그 무엇이(198쪽)면서 식품들의 얼음묘지, 그곳에 모여 있는 것들은 탐욕과 포만에의 욕망에서 잠시 유예된 것들,(199쪽) 그리곤 곧장 잊혀버리는 그것들을 오래도록 데리고 사는 냉장고. 이렇듯 언제나 묵비권을 행사하며 인간의 최측근에서 과거와 현재를 들락거리며 소멸과 생성, 변형의 과정을 거친 사물들. 그들을 향한 철학적 탐닉이야말로 진정한 독학자 장석주 식 고독이었던 거다.
... 그리고 책읽기
“책은 생명보험이며, 불사不死를 위한 약간의 선금이다.” .(169쪽, 움베르토 에코, <책으로 천년을 사는 방법>)
책읽기야말로 고독한 자기와의 싸움이자 수련이다. 책읽기를 밥을 구하는 노동과 관련짓고 고루함과 독단에서 벗어나는 영혼을 위한 장엄미사이자 번뇌를 끊고 열반정적에 나아가기 위한 참선(170쪽)이라고 표현할 만큼 장석주는 유명 난 열독가다. 유년기에 ‘죽음’이라는 형이상학적 사유에서 촉발된 물음으로부터 떠밀리듯 시작한 독서. 조숙했던 어린 소년은 말이 아닌 글과 무던히도 지지고 볶으며 뒹굴었겠다. 내가 곧 죽을 것임을 기억하는 것은, 내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대 가장 도움이 되었던 도구(186쪽)라고 말했던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그는 책 속에서 수만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었을지 모른다. 일찍부터 그의 마음과 직관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186쪽)었다는 듯이.
어렵사리 마치며...
장.석.주. 나는 이분의 책을 처음 읽었다. 그에 대해 아는 거라곤 무지하게 책을 읽어 제끼는 시인에 얼마 전 모 인터넷 신문지상에선가 절필선언 기사를 읽은 게 다였다. 딱히 그 분에 대한 관심도 없었다. 그러던 차에 [마흔의 서재]를 비롯한 최근작들에 대한 이웃들의 리뷰를 심심찮게 접하던 중 출간된 이 책의 제목에 단박에 빠져들었다. 이유인즉 나는 철학(자)이 주는 유혹도 그렇거니와 사물들이란 단어가 주는 일상적 무정無情에 대한 절박함에 평소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무생물, 혹은 사물이라 불리는 것들의 ‘살아남’은 우리 인간의 몫이라 줄곧 생각해왔다. 그렇기에 ‘우리’가 안 되면 ‘나’라도 반드시 짊어져야할 몫이라는 어떤 의무감이 있었다. 그런 면에서 이 책과 마주함은 내겐 너무 설레고 반가운 일이었다. 감사하게도 철학자들의 그럴 듯한 이론에 시인의 아름다운 시詩가 입혀진 부활이라면 사물들도 얼마나 기뻐할 일이던가. 이 책 [철학자의 사물들]은 오랜 세월 공통의 이름과 공통의 맵시, 공통의 쓸모를 가지고 살았으되 죽은, 죽었으되 산 이도저도 아닌 묵직한 비존재감으로 견뎌야했던, (설령 내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지구상의 모든 사물을 위무하는 책으로 길이 기억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
|
동녘출판사와 시인의 만남이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동녘에서 펴낸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워낙 감명 깊게 읽은 터라 출판사 이름만으로도 반가운데 저자가 시인이라서 기대감이 더 높았다. 그런데다가 이 시인께서 서평가 이현우에 버금가는 다독가라고 한다. 책속에 자신의 독서경험을 어떻게 녹여놓았을지 궁금했다. 사물이 곁에 없는 인간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사물이 있기에 인간은 비로소 인간다워질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사물을 통해 다시 인간을 들여다 본 내용이다. 가령 여기 신용카드라는 사물이 있다. 이 작은 사물은 인간을 아주 쉽게 부채인간으로 전락시키고 노예화하는데 성공한다. 이탈리아 철학자 마우리치오 라자라토가 펴낸 <<부채인간>>이라는 책을 읽은 저자는 신자유주의 금융 시스템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통치하고 있는가를 골똘히 생각한다. 결국 이 작은 사물을 쓰는 한 인간은 자신의 의지나 선택과는 상관없이 부채인간이며 금융시스템의 노예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서 우리가 별 생각 없이 사용하고 있는 신용카드에 대해 진지한 물음표를 던지게 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사물 서른 개를 서른 명의 철학자들의 사상과 연계시켜 이야기하고 있다. 서른 개의 사물은 다시 다섯 개의 장으로 묶인다. 관계를 위해 존재하는 사물에 신용카드, 휴대전화, 자동판매기, 세탁기, 진공청소기를,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사물로는 담배, 선글라스, 비누, 욕조, 면도기, 거울을 들었다. 또 우리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사물로는 가죽소파, 탁자, 침대, 변기, 카메라, 텔레비전을, 우리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사물로는 책, 화로, 사과, 병따개, 냉장고, 조간신문을, 그리고 우리의 위치를 바꾸어줄 수 있는 이동의 사물로는 시계, 구두, 여행가방, 우산, 활, 망치, 추의 경우를 들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물들을 통해 철학을 하고 삶을 들여다본 저자의 글쓰기는 매력적이다. 저자처럼 해박한 지식을 펼쳐 사물을 새롭게 고찰하고 분석하기는 어렵겠지만 무심코 사용하고 있었던 주변의 사물들을 유심히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자판기의 일회성을 머리가 없어 생각하지 못하는 무두성의 존재로 다시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나 세탁기와 진공청소기를 보며 우주와 신을 동시에 이야기하는 저자의 끝없이 확대되는 지식의 향연을 읽는 일은 즐겁다. 도시에서 느끼는 강한 빛과 자외선을 차단하기 위해 이제는 누구나 사용하는 선글라스. 이 선글라스는 사용하는 사람의 눈빛과 내면의 심리마저 가린다. 선글라스를 쓴다는 것은 자외선 차단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차단막 구실도 한다. 이와 비슷한 가면은 나를 들여다보려는 타인의 시선을 가로 막는데 니체는 천 개의 가면을 갖고 있는 철학자라는 것이다. 매일 사용해서 닳아 사라지는 비누를 통해 저자는 죽음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끝이나 소멸을 슬퍼하는 이유는 비누도 사라지지만 그것을 사용한 사람도 언젠가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 사라짐을 인정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지혜로 충만한 사람들이 맛볼 수 있는 해방과 자유, 휴식을 누릴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문명인인 우리의 배설물을 해결해주는 변기. 우리 몸에서 나오는 잉여물질인 대소변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먹고 사는 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몸에서 나온 똥을 더럽다고 하지만 인간의 내면에 깃든 악성이 똥보다 더하다는 걸 강조한다. 화장실 변기를 거꾸로 세워 전시한 뒤샹이 있었기에 백남준, 앤디 워홀, 데미안 허스트가 존재할 수 있었다. 사람은 똥을 누면서 가장 순수한 자연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 이 시간을 자신을 만나고 우주를 만날 수 있는 철학적인 시간으로 만들어 보라고 독자에게 권한다. 가장 흥미를 갖고 읽었던 부분은 움베르토 에코를 철학자로 연결시킨 <책> 부분이다. 우리는 하나의 삶을 살 수밖에 없지만 책을 통해 수많은 삶을 경험할 수 있었다. “책은 생명보험이며, 불사를 위한 약간의 선금이다”라고 말한 에코의 말은 명언이다. 책읽기는 죽음에의 두려움까지 벗어나게 하려는 힘이 있다. 저자 역시 이런 사실을 알았기에 일 년에 1,000권의 책을 사고 그것들을 끊임없이 읽으며 살아오지 않았을까. 저자는 독자들에게 평범한 사물을 세계적인 철학자들과 연결시켜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인간의 삶을 이해시키려고 한다. 저자처럼 내 주변에 있는 사물들을 둘러보며 나를 이해하고 내 존재의 의미를 찾아봐야겠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
철학자의 사물들. 그동안 장석주의 인문학 책을 많이 접해봤지만 이 책은 아이디어 측면에서 그 중 가장 독창적인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나의 사물과 한 명의 철학자를 연결지어 설명하다니요. 늘 철학자가 지은 책으로만 설명한 걸 보아왔단 저로서는 읽으면서 어떻게 이런 기막힌 생각을 했을까 무던히 감탄했더랬습니다. 그렇게 이 책은 세탁기와 헤겔의 변증법을 연결시키고 진공청소기와 스피노자의 범신론을 연결시키며 활과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근대를 연결시킵니다. 언뜻 보기에는 어째 무리가 있을 것 같은 연결이라 보여집니다만 책을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그 사물이 연결된 철학자의 사상을 위해 태어난 것인양 무리없이 연결됩니다. 그게 바로 장석주의 역량이겠지요. 그러니까 '철학자의 사물들'이란 제목 그대로의 책인겁니다.
그렇게 장석주는 우리를 하나의 사물을 통해 한 철학자의 사상으로 인도합니다. 철학자와 그의 사상이 나온다고 하니 '뭐야, 어려운 것 아냐?'하고 혹시 생각하실지 모르겠으나 그동안 나온 장석주의 인문학 책을 접해보셨다면 잘 아실 터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이야기라 하더라도 듣는 이가 소화하기 좋게 잘 빻아주는 것. 그것이 또한 장석주란 브랜드의 미덕이니까요.
그러니 그동안 이름만 들어봤던 발터 벤야민, 칸트, 하이데거, 라캉, 질 들뢰즈, 마샬 맥루한, 니체, 보드리야르, 프로이트, 사르트르, 데카르트, 루소, 수잔 손택, 사사키 아타루, 움베르트 에코 등등이 도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그 대략적인 스케치마나 그려봤으면 좋겠다 생각했던 분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안내자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철학은 얼른 우리가 생각하기에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여겨집니다. 솔직히 말해 존재가 어떻고 세상의 근원이 어떠하냐 따위의 질문들은 비록 그 대답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실생활이 불편한 것은 아니죠. 그럴 때 우리들은 흔히 탈레스의 우물을 떠올리게 되곤 합니다.
서양 철학사에서 언제나 늘 첫머리에 등장하는 이름인 탈레스. 그는 최초로 세계의 궁극적 원인(흔히들 '아르케'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처음으로 밝혔던 사람이었습니다. '물'이라고 말이죠. 그래서 철학사를 이야기할 때면 언제나 가장 먼저 언급되는 영광을 오래도록 누리고 있는데요. 자연을 보면서 주로 사색했던 자연철학자답게 그는 또한 밤하늘의 별을 관측하는 것도 아주 좋아했습니다. 하루는 밤하늘의 별을 보고 가다가 그만 땅에 있는 우물을 보지 못하여 거기에 풍덩 빠지고 말았죠. 혼자 힘으로 나갈 수 없는 우물이었던지라 그는 도와달라고 외쳤습니다. 그 때, 트리키아의 한 하녀가 나타났습니다. 늘 밤하늘을 보고 다니기로 인근에 유명했던 탈레스인지라 하녀는 곧바로 우물에 빠진 자가 누구인지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죠. '하늘의 별들은 그리고 잘 보시면서 어떻게 자기 발밑은 보시지 못하는 건가요?' 하고 말이죠.
나중에 헤겔은 자신의 철학사에서 이 예화를 기록하고 트리키아 하녀 의 이와 같은 생각을 거세게 비판합니다만 아무튼 이것이 바로 보통 사람들이 철학에 대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인상일 것입니다. 발이 디디고 있는 현실에 있어서는 정작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허황된 탁상 공론. 그리고 그 인상을 보다 강화시켜 주고 있는 것이 철학이 늘 추상적이고 사변적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겠죠. 아마도 그래서 장석주는 하나의 사물과 한 사람의 철학자를 연결지으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물이라는 구체적인 현실에서 먼저 출발함으로써 추상적인 철학자의 사변들에 어떤 중력을 가져다 주려고 말이죠. 그런 식으로 끌어내려 먼 밤하늘에 존재하는 별이 아닌 내가 디디고 설 수 있는 단단한 땅이 될 수 있도록. 그런 마음으로 사물들을 특별히 끌어온 게 아닌가 합니다. 아마도 여기에는 철학이 결코 우리네 현실적인 삶과 유리된 게 아니다라는 것 역시 전해주려는 소박한 소망이 또한 있지 않나 싶습니다.
말하자면 이건 하나의 시작입니다. 특히나 철학이라는 말에 묘한 멀미를 느끼고 부담을 느끼는 이들에겐 말이죠. 실생활과 그저 유리되어 있어 보이기만 하는 철학이 실은 얼마나 사물과 지금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인지 보여주어 결국엔 철학이란 것 역시도 이 책이 사물을 전혀 다르게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그저 우리 삶을 좀 더 새롭게 바라보려는 방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 좀 더 나아가자면 이렇게 생겨난 철학에 대한 흥미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좀 더 스스로 알아보고 생각해 보려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책이 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철학자의 사물들'은 바로 그것을 위해 마련된 일종의 초심자들을 위한 인큐베이터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전혀 연관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사물과 철학자를 새삼스럽게 연결시키는 것도 사실은 그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철학이란 그렇게 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며 사실은 그저 사유 놀이에 불과한 것임을 알려주는 것 말입니다. 이를테면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놀이 같은 것이죠.
비트겐슈타인은 후기에 이르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물과 언어 사이에 일대일 대응관계 같은 건 없다. 모든 건 우연적이고 작위적이며 오로지 놀이 규칙에 의해 결정되는 것 뿐이다 라고.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철학은 더 이상 내 바깥에 있는 진리를 찾는 활동이 아닙니다. 정확히는 지금 내 삶을 규정짓고 결정하고 있는 규칙들을 새롭게 바라보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 규칙이 옳지 않다면 대체할 수 있는 규칙을 추구하는 행위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지금 내 삶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을 새롭게 바라보려는 노력. 그 자체가 바로 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비트겐슈타인과 비슷하게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로 너무도 유명한 리처드 로티 는 철학을 이렇게도 정의했죠. 그동안 우리의 사상들에 깊은 영향을 미쳐 온 새로운 철학들은 모두 새로운 방식의 말하기에 불과하다고.
그의 주저라고 할 만한 책,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에 나오는 말입니다만 저는 이 말이 맞다고 봅니다. 결국은 전혀 다른 말하기의 방식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철학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장석주가 사물들을 전혀 새롭게 바라보는 것과 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늘 새롭게 말하고, 새롭게 바라보고, 새롭게 생각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철학'이니까요. 그러고 보면 이 책 자체가 철학적 사유의 한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고 여겨도 좋을 것 같네요.
아무튼 철학은 그리 거창한 것도 난해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나와 내 주위의 사람 그리고 나를 둘러싼 세계를 지금까지와는 좀 더 다른 눈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철학입니다. 장석주의 '철학자의 사물들'은 그동안 우리가 무겁게 여기고만 있었던 철학의 무게를 한결 가볍게 만들어 줄 그 경쾌한 첫 걸음이 되어 줄 것이라 감히 장담합니다.
|
|
비누만 사라지는 게 아니라 비누를 쓰던 사람도 언젠가 사라진다. 하지만 사라짐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 차라리 삶의 총체적 완성이다. 삶은 죽음에 닿아 비로소 둥글어진다.(82쪽)
하루에도 대여섯번은 족히 비누 거품을 이용해 더러움을 씻어내지만, 비누를 바라보면서 인생을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이러한 나의 사색없음이 철학자가 아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생각없는 되풀이가 바로 일상이며, 일반적이라고 여겨지는 삶의 사이클을 가진 사람의 행동방식이 아닌가 생각한다. 너무 깊은 사색은 때로 습관적으로 되풀이 되는 삶을 불가능하게 하니까 말이다. 장석주. 그를 시인이라 불러야 할까, 작가라 해야 할까, 비평가라 해야 할까 잠깐 고민해보았다. 그러나 역시 나는 그를 시인으로 부르기로 한다. 왜냐하면 사물을 두고 하는 그의 철학 속에서 '시인의 눈'을 자주 보았기 때문이다. 시인의 마음, 시인다운 통찰이라 해도 좋겠다. 나는 범인이므로 이렇게 예리하고 깊게 생각하지 못하지만, 그는 시인임으로 이토록 풍부하고 세밀하게 사색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통찰에 공감할 수 있는 내 나름의 감성도 그다지 나쁜것 만은 아니라고 위안해 본다.
삶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철학이라고 할때, 철학함에는 나뿐만 아니라 나와 관계하는 모든 것들, 즉 생물이거나 자연이거나 혹은 물질이거나 하는 것들이 포함된다. 이 책은 삶 속에서 '나'라는 존재와 관계하는 사물에 대한 장석주의 생각들을 담고 있다. 포인트는 '존재'도 '물질'도 아닌 그것들과 존재와의 관계, 존재가 그것들을 이해하는 방식에 있다 할 것이다. 비누를 사용함에 있어 아무 생각할 필요없는 습관적인 행위로 반복될 때 철학은 발생하지 않는다. '시'는 당연한 모든 것을 색다른 관점, 독특한 시각에서 볼때 씌여진다. 장석주는 바로 그러한 시인의 시점에서 사물들을 바라보고, 자신만의 언어로 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시인들을 철학자로 보아도 좋은 것일까,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한 것일까. 내 개인적 생각으로는 두 경우 모두 맞지 않나 생각한다. 철학도 시도 낯설게 보는 가운데 탄생하는 언어의 마술이니까 말이다. 언어의 마술, 혹은 언어적 유희, 또는 말 장난으로까지 표현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인 것일까.
가끔 자주 이 책을 읽으며 '철학은 말장난'이란 생각을 해보았다. 당연한 것을 비틀어 보는 것은 듣기에 따라서 말장난으로 확대해석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예를 들면 이런것. '여기 잠수함보다 작고 고양이보다 더 큰 여행가방이 있다.(232쪽)' 여행가방을 설명하는 데에 잠수함과 고양이라니. 이런 뜬금없음, 맥락없는 비교가 이야기의 흐름을 끊곤 해 책 읽기의 속도가 더뎌짐을 느낄 때마다, 나의 얕은 생각이 원망스러워 졌다. '철학하기'라는 거창한 명제에 기가 눌려서 내 나름으로 책을 읽어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매사에 논리적이지 못한 나는 '그렇게 볼 수 있겠지'라는 대책없는 낙관 혹은 지은이 식으로 표현하자면 '모호한 낙관'으로 근거없는 나의 지성을 포장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그런 생각으로 이 책을 끝까지 읽어내었다.
이 책의 좋은 점이라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일상의 사물에서 생각해 보지 못한 '깊이'를 공감할 수 있었던 것과 함께 사물에 대한 지은이의 생각 속에 빼곡히 철학자들의 '철학'이 쉬우 언어로 해석되어 있었다는 것을 꼽을 수 있겠다. 대체로 인용이 많다는 점에서는 알랭 드 보통의 글쓰기 스타일과 비슷하다. 지은이의 글 쓰기 스타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문장의 중간일지라도 가로묶음을 이용해 매번 인용글의 출처를 밝히고 있는 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출판되고 유통되는 많은 책들이 인용의 인용이것만, 제대로 출처를 밝히고 있지 않은 실정에서 이러한 노력은 높이 살 만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특히 마음에 드는 글은 <부채 인간>의 마우리치오 라자라토를 들어 설명한 '신용 카드'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그늘에 대하여>를 인용한 '변기', 산업화된 사회는 시민들을 이미지 중독자로 만든다는 수전 손택의 심미적 소비주의를 설명한 '카메라', 생각 얕음, 야비함, 천박함에 끌리는 우리들의 바보놀음을 지적한 '텔레비전'이었다. 나는 언어의 '아름다움'보다는 현대사회의 병폐를 꼬집는 '날카로움'에 더 관심이 많았다.
'발문'을 적은 문학평론가 권성우는 1987년 출판된 장석주의 첫 번째 평론집 <한 완전주의자의 책읽기>를 통해 장석주의 세련된 심미적 감성과 아름다운 문체, 우아한 지성을 확인한 후 그에게 빠져들었다(270쪽)고 했다. 나 또한 장석주 시인의 감성과, 감각적인 문체, 책에 관한 그의 박학다식함을 훔치고자 이미 절판된 <한 완전주의자의 책 읽기>를 중고서점에 신청해 두었다. 그만큼 <철학자의 사물들>이 인상적이였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언제가 내가 죽는 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무언가를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덫에 빠지지 않는다(186쪽에 인용된 스티브 잡스의 말)는 말을 생각할 때, 나의 이 끝없는 책 욕심도 좀 생각해 볼 문제다. 내가 죽고나면 이 많은 책들은 다 어떻게 되는 거지?
끝과 사라짐을 슬퍼하지만은 말자. 사물과 존재와 현실은 거품들 속에서 닳아 없어지는 비누와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순간부터 종말을 향해 내달리는 것들이 아닌가? 왜 아니겠는가? 종말은 삭막한 노동의 의무에서 해방이고 장이다. 그래서 끝과 사라짐이 품고있는 무성은 은총이고 평안이다.(83쪽)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
저자 - 장석주
이런 글을 쓰려면 얼마나 많은 책을 읽고, 얼마나 깊은 생각을 해왔으며, 얼마나 주의 깊게 사물을 관찰했을까하는 놀라움과 감탄이 절로 나왔던 책이다. 주위의 사물을 보면서 거기에서 연상되는 자신만의 독특한 생각과 철학적 의미 그리고 철학가들까지의 연결이 독특했고 개성이 묻어나왔다.
문득 작년에 읽었던 '식탁 위의 철학'이 떠올랐다. 그 책은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요리들에서 철학가와 그들의 사상을 연결시킨 책이었다. 그런 점에서는 비슷하다. 주위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사물 또는 요리를 철학가의 시각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차이도 있다. 아무래도 쓴 사람이 다르다보니, 각자의 개성이나 관점, 중요시 여기는 사항들에서 차이점이 있다. 우선 다룬 소재부터 다르다.
이 책은 분위기가 차분하다. 어떤 느낌이냐면, 골목에 있는 다른 집들의 불은 거의 다 꺼지고 멀리 보이는 고층 건물에 한두 개 켜있는 새벽. 가끔 컹컹거리는 개 짖는 소리만 들리는 그런 적막한 골목. 겨울이라면 찹쌀떡 사라는 소리도 간간히 들리는 시간. 약간의 바람이 불어 창이 미약하게 덜컹거리는 그런 날씨. 내 앞에는 차 한 잔. 날씨에 따라서 차갑고 따뜻한 것이 결정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용한 음악.
저자는 현대 사회에 관심도 많고, 시사적인 부분이나 연예오락도 어느 정도는 잘 알고 있어 보인다. 그러면서 상당히 현대 문물에 대해 비판적이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그런 걸 느낄 수 있다. 첫 이야기인 '신용카드'에서부터 시작해서 후반에 나오는 '활'까지 그런 어조를 일관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냉소적이라고 오해할 수 있는데, 다시 보면 그것보다는 비정하고 비인간적인 현대 사회에 대한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관계, 취향, 일상, 기쁨 그리고 이동이라는 주제로 저자는 신용카드, 휴대전화, 담배, 면도기, 가죽소파, 탁자, 책, 병따개, 시계, 여행가방 그리고 우산 등등의 주변 사물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펼쳐내고 있다. 사회의 부품이 되어버린 인간, 타인을 제쳐야 자기가 이기는 경쟁 사회, 텔레비전에 조련당하는 인간들.
사물과 어떤 철학가의 사상과의 연결은 톡톡 튀는 아이디어처럼 금방 나왔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정리하는 것에는 오랜 시간의 사색이 필요했을 것이다. 또한 자신이 생각한 것을 다른 이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게 정리하고 표현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내가 아직 철학가들에 대해서는 무지하기에, 이런 사람도 있다는 정도에서 넘어갔다. 하지만 그 외에 저자의 생각을 적은 부분은 꽤나 흥미 있게 읽었다. 그리고 부록으로 등장하는 철학가들에 대해 간략하게 적어놓은 것도 마음에 들었다. 짧게는 한 쪽, 길게는 두 쪽 정도로 생애와 사상 그리고 대표 저서에 대해 적혀있었다.
무엇보다 스티브 잡스를 철학가로 분류한 것은 흥미로웠다. 진짜 이 사람은 20세기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그에 대한 재평가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었다. 하지만 난 애플 제품이 하나도 없지.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
철학은 무엇이고 에세이는 무엇인가?에 대한 많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에세이 속에 들어있는 철학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철학 즉 그 무엇에 대한 생각? 얼핏보아서는 에세이를 좀더 심도있게 적어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에 나의 철학이 되고 나의 철학이 다른 사람에게 충분히 적용가능한 어떤 사실로 널리 익혀질까? 그러나 그 속에는 수많은 고찰과 그에 대한 냉정한 비판이 따라야하고 그로 말미암아 보다 뛰어난 어느 누가 봐도 긍정과 비판의 여지가 있고 고찰할만한 또 우리에게 뭔가 과제가 아닌 생각할 여지를 남겨주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철학은 우리의 주위에 존재하는 모든것이 철학의 주제로 가능하다는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는 어느 누구의 생각이 판단할 가치가 있고 없고가 아니라 그 모든것이 자유이고 내 마음대로 생각해도 아무런 거리낄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를 어떤 목적으로 문자의 형태로 사회로 나왔을때는 사회에서의 반응은 제각각이고 평판이 우수할 수도 있으며 그 반대의 상황도 무시할 수 없다. 또 나름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고로 나의 생각이 모든이에게 공감은 주지 못할지라도 나의 생각을 적은것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독자들에게 공감을 주지 못한다면, 또 의미가 없는 것처럼 생각되어진다면 과연 소용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독과 많은 생각과 지식을 품고 후학들을 육성하고 계시는 저자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찌보면 우리가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물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그로인해 연결 가능한 철학의 지식을 결합하여 에세이 형식을 빌어 우리에게 저자의 생각을 들려주려 문자로서 남긴것 같다. 그러나 각장에서 주제로 삼은 주제들과 그 주제를 생각하는 저자의 마음과 그 다음으로 들려오는 철학적 사실의 인용과 그 철학적 사실을 다시 사물과 결합시켜려는 과정은 새롭다고도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왠지 내용과 철학적 지식과의 연결에 있어 매끄럽지 못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 철학과 주제 사물과 의 연결점을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것으로 나의 사견으로는 사소한 주제에 너무나 큰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나는 에세이를 싫어한다. 젊었을때는 마음의 감성을 자극하여 감동하는 경우가 많아 즐겨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요즘은 에세이는 읽지 않는 편이다. 이제 나도 감정이나 사물을 생각하는 나름의 고정관념이 생기다 보니 에세이 작가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의 생각이 우선적으로 개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되고 내가 생각하는 내용과 달라지게 되면서 점점 거리를 두게 되는것 같다. 철학자들의 생각이 일반인과는 많은 차이를 나타내어온것이 사실인다. 그들의 철학적 고찰과 사실이 너무나 어렵고 생각의 차이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 철학도 이제는 우리의 주위에서 널리 알고 그로인해 개인적으로라도 그 사실을 깨달아 삶에 풍부한 활력소가 될 수 있다면 철학이라는 학문과 우리 주위에서 누구와도 대화로서 풀어가는 논리가 되었으면 한다. 어찌보면 참으로 간단한 주제로 간단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좀더 깊이있게 들어가면 그 나름의 철학적 사실도 알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 책이다.
- 본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 |
|
버트런드 러셀은 <철학이란 무엇인가; http://blog.yes24.com/document/7241864>에서 ‘현상(現狀)과 실재(實在)’를 구분하는 방법, 즉 “사물이 어떻게 보이는가 하는 것과 사물이 사실상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이 철학적 사유의 출발점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물에서 철학공부를 시작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 입니다. 장석주교수님의 <철학자의 사물들>은 그 실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권성우교수님은 발문에서 “<철학자의 사물들>은 제목 그대로 우리 주변에 가까이 존재하는 서른 개의 사물을 각기 서른 명의 철학자(사상가)의 문제의식과 절묘하게 연계시켜 설명하는 일종의 철학적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273쪽). (…) <철학자의 사물들>은 장석주의 박람강기로 표현할 수 있는 드넓은 지식, 다양한 사물들에 대한 면밀한 관찰력, 인간의 욕망과 행위를 투시하는 혜안을 엿볼 수 있는 충분히 개성적인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 (…) 그 사물들의 존재와 특성 그리고 이에 연계된 인간의 실존을 걸출한 철학자들의 독창적인 사유와 연계시켜 해석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철학적 사물들>은 로제 폴 드르와의 <사물들과 철학하기>의 심화이자 확대라고 할 수 있겠다.(275~276쪽)” 그러니까 아직 읽지는 못했습니다만, 드르와의 <사물들과 철학하기>를 벤치마킹한 글쓰기였던가 봅니다.
어떻든 재미있습니다. 관계, 취향, 일상, 기쁨, 이동 이라는 다섯 개의 키워드에 상응하는 서른 가지의 사물이 사유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특별한 원칙이나 규범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만 저자는 이 사물들이 이끈 그 사유 안에서 삶과 죽음, 주체와 타자, 꿈과 기대, 욕망과 무의식, 기호와 교환 따위에 대해 묻고 대답하려 했는데, 이 사물들을 오래 유심히 바라보고 사유하다보니 그것이 바로 철학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버트런드 러셀이 설명하던 철학은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라는 점을 실증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저자는 서른 가지의 사물에 대하여 사유하는 과정에서 주제에 부합하는 철학자 혹은 사상가의 생각을 인용하고 있습니다.(스티브 잡스를 철학자 혹은 사상가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잡스의 인문학적 소양을 충분히 배려한 것이라고 보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신용카드에 대한 사유는 현대 신용사회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부채를 늘리는데 크게 일조하고 있음은 신용카드 발급에 제한을 두지 않던 시절 신용불량자를 양산하던 부작용으로 입증되기도 하였는데, 신용카드의 이런 어두운 일면을 이탈리아의 철학자 마우리치오 라자라토의 <부채인간>에 나오는 “돈/부채는 인간 부품에게 신용도, 합의도 요구하지 않는다. 단지 주어진 지시에 따라 정확하게 기능하기만을 명령한다.(16쪽)”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신용카드는 부채를 만드는 수단이자 삶을 통제하고 통화그물망 안에서 파편화하고 기계적 노예화로 이끄는 방법이다.”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신용카드를 부채를 만드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100퍼센트 동의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즉 신용카드를 내가 지불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사용하는 사람은 저자가 주장하는 부채인간이며 기계적 금융 시스템에 예속된 노예라고 볼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기억과 망각의 관계를 수염을 자르는 면도기에서 발견한 것도 독특하다고 하겠습니다만, 여행가방에서 여행을 읽어낸 것도 대단한 착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연히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을 인용하고 있어 반갑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는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는 보통의 말에서 “새로운 사고는 새로운 장소와 만나는 놀라움에서 튀어나온다. (…) 멕시코에서 맞은 어느 추석날 새벽 한꺼번에 울려퍼지는 성당의 종소리들에서 내가 아는 세계가 결코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암시받았다.(236쪽)”라는 사유를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서른 가지나 되는 사물들로부터 저자가 이끌어내고 있는 다양한 생각은 물론 관련된 철학자 혹은 사상가들의 생각을 덤으로 즐기는 좋은 기회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
|
'철학'이라고 하면 '어렵다'는 이미지가 동시에 떠오르곤 하였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바꾸게 된 계기가 있는데, 그건 바로 철학자 '강신주'를 알게 된 후이다.
장석주의 책을 읽었는데 왠 강신주 이야기냐 싶겠지만, 그의 강의를 통해 철학에 대한 편견을 깰 수 있었고, 그래서 이 책도 반갑게 읽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 책은 우리 일상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그리고 평범한 사물들을 '철학자의 시각'으로 바라본 것이다.
그것은 관계, 취향, 일상, 기쁨, 이동으로 구분되어 있으나 그것은 편집자의 시각으로 봤을 때 그러한 것일테고, 유기성은 그닥 없어 보인다.
오히려 마치 조각난 글들은 무언가 좀 있어보이게 하기 위해 그러한 범주로 구분했다는 생각마저 들게한다.
이 책은 순서대로 읽어도 좋겠지만,
내가 일상적으로 쓰긴 하지만, 철학적으로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을 철학자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한 사물들을 먼저 찾아 읽어보는 것이 더 재밌다. 그리고 이후 그 사물을 보거나 이용할 때 떠올려 보는 것이다.
이 책에 묘사된 비누, 침대, 사과, 병따개 등을 묘사한 글들이 특히 인상적이다.
비누 - 사물과 존재와 현실은 거품들 속에서 닳아 없어지는 비누와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순간부터 종말을 향해 내달리는 것들이 아닌가? 82~83p
침대 - 침대는 바닥이 없는 심연이고, 우연히 탑승한 배다. 나는 저 시끄럽고 복잡하고 어딘가 모르게 불균형함으로 기우뚱거리는 바깥-세계로 나가기 위해 이 심연을 박차고 일어나야 한다. 나는 오늘이라는 항구에 정박한 배에서 내려서서 빛으로 넘치는 대지 위에 첫발을 내딛는다. 127p
사과 - 이 과육이 이빨에 으깨질 때 아삭하는 소리가 우울감을 경미하게나마 경감시켜 준다. 바닷물을 스푼으로 떠낸 만큼이나 극소의 양이지만, 중요한 건 양이 아니라 우울감이 감소로 돌아서며 흐름이 반전되었다는 사실이다. 181~182p
병따개 - 병에 든 음료수를 마시려고 주둥이를 막은 뚜껑을 분리하는 일은 병의 목을 따는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자객의 일이다. 190~191p
이 책을 통해 나는 일상생활에서 철학을 배우게 되었다.
|